2023년 04월 18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7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잠시 여러분을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닙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여러분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18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고자 하였고, 특히 나 바울은 한두 번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였습니다.

19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20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NIV

For what is our hope, our joy, or the crown in which we will glory in the presence of our Lord Jesus when he comes? Is it not you?(19절)

 

주석

사탄의 방해(18절) 어쩌면 그곳 시의원들과의 문제 때문에 바울이 되돌아가는 것이 금지되었을 것이며 계속 그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사탄의 방해로 만나지 못한 교인들에게 그리움을 전합니다(17-18절). 덧붙여 바울이 고대하는 그날, 주님 앞에서 소망과 기쁨과 자랑할 면류관이 바로 그들임을 고백합니다(19-20절).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없음에도, 바울은 그들을 묵상하며 기쁨을 고백합니다. 믿음을 배워 삶으로 실천하는 이들의 존재가 지금의 바울에게 기쁨을 주었고, 내일의 기쁨을 소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존재가 미래의 바울에게 영광을 줄 것입니다. 오늘의 어려움을 인내할 수 있는 힘은 내일을 향한 소망과 기쁨으로부터 옵니다.

 

[오늘의 묵상]

1. 방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당연히 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자란다. 

사랑하면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리워 진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다.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라는 책에서, 그 언어 중 하나가 함께 함이다. 

시간과 공간을 같이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사랑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사랑이다. 

 

사랑이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결국 몸을 움직여 방문하게 하고, 만나게 한다. 

특히나 사랑에 자랑스러움이 붙으면 그 열망은 더욱 커지는 법. 

바울은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 만남이 가져다 줄 시너지가 기대된다. 

성도들은 더욱 굳음 믿음을 갖게 될 것이며, 바울은 더욱 힘을 내서 사역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단은 이런 것이 싫었나 보다. 

사랑의 교제도 싫고, 믿음이 더욱 강화되어 세상을 이기는 힘으로 성장하는 것도 싫었을 것이다. 

사탄이 방해를 한다. 

방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재정적인 문제일지, 도시 권력자들의 방해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 일상적인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탄의 방해라고 부를 만큼의 독특하고 특별한 문제 상황이 발생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노력에 우연을 가장한 사탄의 방해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탄은 교묘하게 사람들을 조종하고, 유혹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한다. 

이유도 없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기도 한다. 

정치, 경제, 사회적 이유로 교회를 박해하기도 한다. 

 

2. 여러분이야말로

바울의 기쁨과 감사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환란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 유대인의 신이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바울의 기쁨은 이들로 인해 가득하다. 

도리어 동족인 유대인들 중에는 바울을 박해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현상에 대해 바울이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복음은 사람을 바꾼다. 

복음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바울과 이방인들과의 사랑을 만든다. 

복음은 인종적 벽을 허문다. 

복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기쁨이 되도록 이끈다. 

 

복음으로 연결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한 사람이다. 

서로를 사랑하고 기뻐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함께 꿈꾸고 함께 일했던 친구들이 많다. 

오늘 그들이 보고 싶다.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무엇보다 학생들의 변화를 위해 기도했던 그들이 보고 싶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길… 

 

[오늘의 기도]

성도들을 사랑으로 연결시켜주시는 주님, 

만나고 싶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제 성향은 혼자있기 좋아하는 내향형이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 주세요. 

만남의 기회가 더 많아지도록 인도해주세요. 

 

오랜만에 만난 간사님들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소서. 

일로만 바라보지 않고 기쁨의 관계로 바라보도록 이끄소서. 

전국의 간사님들과 더욱 행복한 시간들로 연결되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21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2 여러분은 마음을 넓혀서,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 우리는 아무에게도 부당한 일을 한 적이 없고, 아무도 망친 적이 없고, 아무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없습니다.

3 여러분을 책망하려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도 말하였거니와, 여러분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입니다.

4 나는 여러분에게 큰 신뢰를 두고 있으며, 여러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온갖 환난 가운데서도, 나에게는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5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의 육체는 조금도 쉬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환난을 겪었습니다. 밖으로는 싸움이 있었고,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6 그러나, 실의에 빠진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디도를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7 그가 돌아온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리워하고, 내게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또 나를 열렬히 변호한다는 소식을 그가 전해 줄 때에, 나는 더욱더 기뻐하였습니다.

8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9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11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2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편지한 것은, 남에게 불의를 행한 사람이나, 불의를 당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여러분의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환히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NIV

Make room for us in your hearts. We have wronged no one, we have corrupted no one, we have exploited no one(2절).

 

주석

2-4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 자신과 화해하자고 호소한다. 자신의 행동에 화해를 가로막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충분히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 화해를 고린도 교인들과 자신의 관계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실함을 호소합니다(2-4절). 그는 디도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로 인해 걱정했지만,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과 화해하기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합니다(5-10절).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하게 마주한 이들에게 회개와 화해의 기쁨이 넘칩니다(11-12절).

 

온갖 환난과 싸움과 두려움에도 포기하지 않은 바울의 마음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원했던 고린도 교인들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픔과 후회가 있었지만, 그 결과로 얻은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회개와 화해의 과정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아픔이라면 결코 손해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변호하는 사람도,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린도 전서에서만 봐도, 여러 파가 존재했다. 

바울파, 아볼로파, 바나바파, 예수파…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중심으로 묶여야 하지만, 원래 인간들이 자신들의 당파를 만들어 특별한 소속감을 느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조직을 만들곤 한다. 

그 사조직이 분열을 이끈다. 

분열로 인해 고린도교회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교인간의 분열은 자칫 교리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 

자신의 성향 문제를 교리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개인적 성향에 의해 교리를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충분한 공부와 학습과 이해가 결여되면, 결국 자신의 성향대로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도 놔버리는 우를 범하곤 한다. 

바울은 이런 분열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교리적 타락, 우상숭배의로의 타락, 성적 타락, 은사받은 자들의 교만을 지적하면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애쎴다. 

직접 방문할 생각도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편지를 쓴 것이다. 

비판적인 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죄에 대해 적나라하게 적었던 것 같다. 

고린도전서도 그런 비판의 내용이 나오지만, 두 번째 보낸 편지는 좀더 심했던 걸로 보인다. 

바울도 여러 번 반복적으로 그 편지가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적고 있다. 

성도들의 죄를 조목조목 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죄를 지적함과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아프게 하는지, 

그리스도를 욕보이게 하는지 적었던 것 같다. 

편지를 읽는 내내 성도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솔직히 어떤 사람들은 그 편지로 인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바울의 진심어린 진솔한 비판을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그들은 바울의 편지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9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바울 마음 속에는 기쁨이 점점 찾아오고 있다.

성도들이 바울의 진심을 알아주고 있다. 

성도들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고 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 아픔이 도리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으로 이끌고 있다. 

하나님도 때로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바울은 적고 있다. 

구약의 역사에서도 엇나가는 백성들을 호되게 꾸짖으시거나, 그게 작동하지 않으면 물리적인 충격을 주시곤 했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좋은 촉매제가 된다. 

 

물론, 이런 마음의 작동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 회개하게 만드는 일은, 어찌보면 무당들이 제일 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죄를 들춰내고 두려움을 심어준다. 그래서 사단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종교적 노예가 되게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이다. 

강력한 질책, 죄책감과 두려움, 복종과 노예화… 

기독교도 이런 심리적 메카니즘을 통해 사이비를 출생한다. 

이걸 기술로 삼아 교회를 운영해서는 안된다. 

복음은 죄책감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유를 선포한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가져다 주는 참 자유를 선포한다. 

문제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스르는 행위를 무분별하게 할 때다. 

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온당하며, 그래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을 갖게 된다. 

어쨌든,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종교적 기술로 사람들을 옭아매는 것은 잘못이다. 

 

핵심은 이걸 기술로 쓸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도들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섬기려고 하면서 그리고 본을 보이면서, 성도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랑이 아니라 기술로 다가가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가 되어 버린다.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 전제한 뒤에 죄에 대한 지적과 훈계가 이어져야 한다. 

지적과 훈계가 습관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그래서 문제가 된다. 

습관 혹은 강박은 진실된 사랑과 거리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비판, 지적, 훈계를 강박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 참지 못해 습관적으로 강박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사랑으로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비판과 지적으로 자기 사람을 만들어온 사람들은 계속 그 방법을 사용한다. 

 

목회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죄책감을 통한 자기 사람 만들기다. 

죄책감을 계속 조장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면 신랄하게 비판한다. 

성도들은 참 힘들지만, 그 심리적 메커니즘에 중독되어 있다. 

자신을 혼내주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아니 혼나기를 욕구하기도 한다. 

일종의 메조키스트적 욕망이다. 

이걸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진심을 담아 사랑하는 사람이 비판할 자격을 얻는다. 

그러니 목회는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다. 

사랑해야 그 설교에 진정성이 남는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으십니다. 

죽음으로 당신의 진정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떻게 저의 진심을 담아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외칠 수 있을까요?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육체의 욕망이 아니라 진정성있는 태도로 끝까지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세요. 

사랑을 담아, 진심을 담아,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게 하소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 회개를 요청하게 하소서. 

사랑과 비판. 이 둘을 조화롭게 감당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2월 21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니, 주님의 규례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

 

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8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11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12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MESSAGE

“그러나 그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행함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꾸준히 신뢰하십시오. 흔들림 없이 소망하십시오. 아낌없이 사랑하십시오. 이 세 가지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13절)

 

 

바울은 이전 장에서 방언, 예언, 지식,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며,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2:7 참조). 그러나 이 은사들이 가장 좋은 길은 아니며, 더 큰 은사가 있다고도 말했습니다(12:31 참조). 이제 그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은사도, 지식도, 믿음도, 섬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1-3절).

 

현재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일지라도 영원까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영적 어른의 일이며, 온전한 일입니다(11, 12절). 바울이 진술하는 사랑의 본질(4-7절)을 하나씩 묵상하면서 내 안에 사랑이 풍성하길 기도합시다.


고린도전서의 백미다. 

교회 분열의 최고의 해답은 사랑이다. 

다른 은사나 능력으로는 갈등과 분열을 해소할 수 없다. 

오직 사랑의 힘으로 끝까지 인내하고 끝까지 바라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온전해지는 길은 사랑의 길이다. 

능력의 길이 아니다. 

그 사랑의 길을 오늘 다시 걷는다. 

현실은 사랑대신 자기 보호를 선택하라고 한다. 

개인이건 공동체건 사랑대신 자기 보호를 선택할 때, 예수님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 다시 사랑이다. 


주님, 

다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의 길로 인도해주세요. 

많은 말과 사역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겁니다. 

이건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한 자를 위해 공동체가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가 절대 가치를 갖지 않습니다.

공동체도 개인도 하나님 나라의 작은 모자이크일 뿐입니다. 

주닝 저와 공동체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7 06 화요일

여는 기도

내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계시는 일어나야 일들을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자기가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3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열매이시요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6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7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그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것이다.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것이다.” 그렇게 것입니다. 아멘.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석
1: 계시란 하나님의 주도와 허용이 없이는 사람들의 접근이 불가능한 진리가 하나님에 의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IVP 성경신학사전).

 

4, 8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란 말은 이따금 헬라어에서 영원한 신성을 나타내던 칭호와 관련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특히 구약에 나오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에 대한 헬라어 해설을 반영한다(IVP 성경배경주석).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revelation)입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고(1절), 요한이 본 것이고(2절), 또한 모든 사람들이 이 이루어질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3, 7절). 하나님의 사람들은 현실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하나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4, 8절)’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스스로를 ‘알파요 오메가(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의 통치 아래 있던 일곱 교회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함께 계시는 주인(Lord)’이라는 메시지는 어떤 의미로 전해졌을까요? 지금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사무엘하에서 요한계시록으로 

 

다윗 시대에서 요한의 시대로 시공간이 이동되었다. 

사무엘하 말씀을 통해 다윗이 명암을 보았다. 

다윗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요한과 그의 시대 성도들에게로 시점을 이동한다. 

성경의 이곳저곳을 다니는 것은 나름의 재미가 있다. 

시대와 장소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일하셨는지 살피고 여전히 이곳 여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할 있어서 더욱 그렇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

요한의 시각은 오실 예수님에게 맞춰져 있다. 

요한은 때가 가까이 왔음을 확신하고 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7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그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것이다.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것이다.” 그렇게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처음의 일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요한은 말을 이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 그러니 굳건히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아직도 어둠에 있는 사람들이 돌아오길 요청하고 있다. 

사실 요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이렇게 늦어지는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재림은 늦어지는데, 외부의 공격은 거세다. 박해가 심해지고 있다.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이 신이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성도들의 고난은 점점 강도가 더해지고 있다. 

베드로도 그의 편지에서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썼다(벧후 3:9). 그것은 아직 구원받을 사람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가 차야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이다. 아직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인원만큼의 회심자를 얻지 못했다는 말이다. 

요한은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를 단순하게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해서 재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고난과 시련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의 역동적인 삶이 담겨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의 접근과 조금 다르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의 답변이 시대적으로 앞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베드로와 요한의 성향 차이이기도 하리라. 

요한은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를 문장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보여준다. 여러 장의 그림으로 재림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결국 현실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삶을 살라고 굳게 현재를 이겨내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의 접근 방식과 요한의 접근 방식 둘다 필요하다. 

 

요한이 보는 복음의 정수 

 

4b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열매이시요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6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구절들은 요한이 복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첫째, 복음은 위대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평화다. 그분은 영원히 계신 분이시며, 부활의 처음이시고, 모든 중의 왕이시다. 절대적으로 위대하신 예수님이 은혜를 주신다. 평화를 주신다. 영원한 , 부활의 , 모든 현실 권력을 능가하는 왕이 은혜를 베푸신다. 평화를 베푸신다. 이것만 생각해도 요한은 가슴이 벅차다. 복음의 기쁜 소식이 그에게 들린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사실을 요한은 누구보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이다.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라고 자신을 표현하기도 했다. 익명이 오히려 더욱 부각되는 형국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의 삶을 지지하시고 더욱 멋진 삶을 살라고 격려하시며 응원하시는 분이시다. 이러니 기쁜 소식이 아닐 없다. 

셋째,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죄와 죽음,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주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일을 하셨다. 사랑이 우리를 해방한다. 그분의 의무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여러 압제에서 구원하신다. 이게 복음이다. 사랑이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크고 작은 선물을 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랑이 그분 자신을 주신 것이며, 사랑이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영적으로 해방시켰다. 이게 기쁜 소식이다. 요한은 기쁨이 넘칠 밖에 없다. 

넷째, 해방 이후의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제사장이 되게 주셨다. 해방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정초해 나갈 없다. 우리는 그런면에서 연약하기 그지 없다. 해방이 자유가 아니라 막막함의 감옥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 나라로 엮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나라가 되고 나라의 통치 질서 속에서 있게 되었다. 허망함과 막막함을 이겨낼 있는 위치에 우리를 올려 주신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세상의 죄를 주님께 가져와서 화목의 제사를 드릴 있는 제사장의 위치에 올려주셨다. 하나님과의 화해를 주선할 있는 위치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왕이 죄인을 사랑해서 자신의 목숨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해방시켜주시더니 그들에게 엄청난 지위를 허락하신 것이다. 이러니 복음이다. 

 

그렇게 것입니다. 아멘. 

 

이런 일이 더욱 강력하게 일어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런 복음의 역사가 거부할 없을 만큼 강력하게 드러나게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땅에 드러난다. 

요한은 확신에 가득 있다. 

여러 가지 환상을 보고 환상 끝에 이런 확신에 도달했다. 

요한의 환상은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이런 확신을 더욱 강화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것이었다. 의도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이 아니라 안도와 확신 속에서 현실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여전히 예수님이 오지 않으셨다. 

그래서 불안하다. 

혹시 안오시면 어쩌나 의심이 들곤 한다. 

그러나 복음으로 우리를 이끄신 예수님의 사랑이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는다. 

어떻게 하면 회개하는 무리의 숫자가 가득찰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재림의 날을 앞당길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을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12) 

 

 

——

오늘도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당신의 사랑을 깊이 누리길 원합니다. 

요한이 생각하는 복음의 정수를 제가 깊이 누리길 원합니다. 

당신의 사랑이 제게 더욱 부어지게 하소서. 

우리 교회, 우리 아벱에 예수님의 사랑이 더욱 크고 능력있게 부어지길 간절히 소망하고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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