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1. 김혁수

 

[본문_예레미야 12:1-6_현대인의 성경]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논쟁한다고 해도 주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께 가지 물어 보고 싶습니다. 악한 자가 잘되고 정직하지 못한 자가 성공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뿌리를 박고 자라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입술로만 주를 가까이할 마음으로는 주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3여호와여, 주는 나를 아시고 나를 보고 계시며 주를 향하는 마음 자세를 살피고 계십니다. 양을 잡으려고 끌어내듯 악한 자들을 끌어내어 죽일 날을 위해 준비하소서.

4언제까지 땅이 슬퍼하며 들의 모든 초목이 말라야 하겠습니까? 땅에 사는 사람들이 악하므로 짐승과 새들도 전멸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우리가 하는 일을 그는 보지 못한다하고 말합니다.

5여호와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걸어다니는 사람과 함께 달려도 피곤하다면 어떻게 말과 경주를 하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서 비틀거린다면 요단의 숲에서는 어떻게 하겠느냐?

6 형제들과 가족까지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소리를 지른다. 그들이 너에게 좋은 말을 하여도 너는 그들을 믿지 말아라.”

 

0. 들어가며 

- 결승점, 반환점 

만약에 여러분이 마라톤을 뛰는 선수라고 가정해 봅시다. 시계도 안보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죽을 만큼 힘든 시간들을 버티고 끝에 결승점이 보입니다. 팔을 벌리며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결승점이 아니라 반환점이었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심정일까요? 저는 최근에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해를 열심히 달려왔는데, 여전히 끝나지 않는 문제와 사건들의 후폭풍이 계속되었습니다. 결승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반환점이었던 겁니다. 이런 순간에도 우리는 계속 달릴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볼까요? 

 

1. 예레미야와 아나돗 

1) 예레미야의 메세지 

- 예레미야 

분은 남유다 왕국 마지막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BC 627년에 예언 활동을 시작하여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BC 587 어간까지 40년간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시기는 유다의 마지막 정치, 종교 개혁이 있었지만 줄곧 쇠퇴의 길을 걷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조국이 멸망해 가는 과정을 오롯이 경험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그는 조국에 대한 사랑 때문에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별명이 그러하다고 눈물만 흘리는 감성적인 선지자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판입니다. 그는 40년간 줄곧 자신을 반대하고 위협을 가하는 동족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메세지가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으며, 다른 선지자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그의 메시지는 어땠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9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이 나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 10그들도 자기들의 조상이 저지른 죄악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조상이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면서 섬기더니,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도, 내가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다.

11그러므로 주가 말한다. 보아라, 그들이 벗어날 없는 재앙을, 내가 그들에게 내리겠다. 그들이 나에게 도움을 간청해도,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 12 때에 유다의 여러 성읍에 사는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은, 분향하며 섬기던 신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간청하겠지만, 재앙의 날에 신들은 절대로 그들을 구하여 주지 못할 것이다. 전혀 도와줄 없을 것이다. 13유다 사람들아, 너희가 섬기는 신들은 너희가 사는 성읍 수만큼이나 많고, 너희가 바알에게 분향하려고 세운 부끄러운 제단은 예루살렘의 골목길 수만큼이나 많구나!

14 예레미야야, 너는 이런 백성을 보살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너는, 그들을 도와 달라고 나에게 호소하거나 간구하지 말아라. 그들이 재앙을 당할 때에, 네가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예레미야 11:9-14)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줄곧 어려운 일을 시키고 계십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유다의 재앙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지금 진퇴양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속국으로 계속 살기도 싫었습니다. 독립을 하자니 군사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의 도움으로 바벨론에 맞서 싸우자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포기하고 이집트로의 망명을 시도합니다. 사람들은 동요합니다. 그런 상황에도 이들은 하나님을 찾기보다 우상을 따릅니다. 그런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9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이 나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 10그들도 자기들의 조상이 저지른 죄악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조상이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면서 섬기더니,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도, 내가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다.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휴지통에 버렸습니다. 13절에 보면 우상이 성읍마다 하나씩 있습니다. 바알에게 분향하기 위해 세운 제단은 예루사람의 꼬불꼬불한 골목길 숫자보다 많다고 한탄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유다가 부르짖어도,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메시지를 길거리에서 전하니 사람들이 싫어할 밖에 없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것을 그만둘 마음도 없거니와, 여호와라는 자신들의 조상 신은 응답하지도 않겠다고 하니, 짜증이 났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희망적인 메시지가 나와도 성에 차지 않는데, 부정적인 메세지를 매일 길거리에서 쏟아내는 예레미야를 보니 울화통이 치밀어 오릅니다. 

 

2) 듣기 싫어하는 동향인

그런데 예레미야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사실은 단순히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를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예레미야를 알고 그와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던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모의한다는 소문과 위협을 들었을 ,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21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나돗 사람들을 두고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의 목숨을 노려서 이르기를너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아라.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계속하다가는 우리 손에 죽을 알아라한다.”(예레미야 11:21)

 

자신의 메세지가 사람들의 마음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조금 이해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냉혹했습니다. 고향 친구들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에게 협박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 예언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합니다. 더이상 듣기 싫은 소리를 그만 두라고 합니다. 

 

2. 예레미야의 질문 

1) 인생의 딜레마 

- 어떻게 악인은 번성하고 의인은 고통받는가? 

예레미야는 이제 예루살렘의 길바닥에 털썩 주저 앉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온갖 생각들이 몰려 옵니다. 이제 수많은 의문들을 가지고 기도 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들어볼까요?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악인은 번성하고 의인은 고통받는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오랫동안 던져왔던 질문입니다. 정의로운 형벌이 주어지지 않는가? 공평한 처벌이 벌어지지 않는가?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형통하고 반역하고 배신한 사람들이 평안해 보이는지 예레미야는 미치도록 궁금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자신은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들 멋대로 지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민족적 재앙 앞에서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있습니다. 

 

2) 악인에 대한 처분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악인들로 인해 의인들이 죽어나갑니다. 악인들로 인해 민족의 산과 들이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악인들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고 가축이 죽어나가고 농작물이 말라갑니다. 이제 악인을 처단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마음이 때가 얼마나 많습니다. 악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낮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어기는 사람들 때문에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되어 결국 일반 대중이 죽어나갑니다. 강간범, 살해범에 대한 법의 처벌이 솜방망이 같이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형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댓글로 도배합니다. 

 

어제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한국 드라마지옥 이런 소재로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은 죄인들에게 벌주고 지옥으로 데려가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신으로 모시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죄인들을 공개처형하는 지옥의 사자들에 대해 종교적 열정을 갖다 바칩니다. 그렇게 심플하게 해소되길 바랬습니다. 사람들은 명확한 것을 원합니다.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 명확한 선이 있기를 바랍니다. 애매한 , 모호한 것을 싫어합니다. 초월적인 누군가가 등장해서 선악을 분명히 가르고 선에 대해서는 상을, 악에 대해서는 벌을 주기를 바랍니다. 역설과 

딜레마를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3. 말과 함께 달리기 

1) 역설 인내 

이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다시 읽어 볼까요? 

 

5여호와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걸어다니는 사람과 함께 달려도 피곤하다면 어떻게 말과 경주를 하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서 비틀거린다면 요단의 숲에서는 어떻게 하겠느냐?

6 형제들과 가족까지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소리를 지른다. 그들이 너에게 좋은 말을 하여도 너는 그들을 믿지 말아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지금 상황은 걸어다니는 사람과 함께 달리는 것으로 보고 계십니다. 현재 예레미야가 겪고 있는 딜레마와 역설은 물론 힘든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일상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들이 번성하면서 의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오랫동안 벌어져 왔던 인류 역사의 보편적인 상황이라고 하시는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했던 순간부터 이런 역설과 모순이 보편적이 되어 왔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겪어내야 역설과 딜레마는 마치 말과 함께 달리는 수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역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십니다. 말과 경주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하십니다. 천천히 시속 4KM 걷거나 달리는 것이 아니라, 시속 20KM이상으로 달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겁니다. 때에는 더욱 혼란스러울 겁니다. 더욱 고통스러울 겁니다. 

 

실제 그런 순간이 나중에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그건 최종적 심판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벨론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예레미야는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을 했기로서니 더욱 포악한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분별이 어려웠습니다. 

 

육체적 달리기가 아니라 정신적, 지성적 달리기입니다. 숨을 헐떡이며 10km, 20km, 40km 뛴다고 , 중간중간에 나오는 장애물과 언덕을 넘어설 , 끝난 같은데 아직도 많이 남았을 , 달리는 것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지적으로도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가진 상식과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을 , 역설, 모순, 딜레마에 빠져 출구가 없어 보일 , 문제가 꼬이고 꼬여 실타래처럼 뭉쳐 있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 한숨은 깊어지고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을 , 때가 정신적 달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말과 함께 경주하는 순간이지요. 

 

2) 소명의  

하나님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소명의 삶을 살라고 요청하시고 있습니다. 100%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선명한 경계를 긋지 못하더라도, 모순과 역설과 딜레마가 극에 달한다 하더라도, 예레이먀에게 주신 소명을 삶을 끝까지 살아내라고 요청하시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고향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고, 동료 예언자들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뺨을 때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메시지가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들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예레미야나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이런 삶을 살았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찌질하고 괴팍한 삶을 살았습니다. 소명을 끝까지 감당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말과 경주할 정도로 힘에 지나도록 달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삶이었습니다.  

 

4. 나가며 

- 온전함을 향하여

무엇이 온전함입니까? 역설과 모순과 딜레마를 해결하고 깔끔하고 선을 긋고 사는 삶이 온전함입니까?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같습니다. 오히려 역설, 모순, 딜레마를 하나님의 신비와 섭리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삶을 끝까지 인내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온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느리게 한가로이 걷기, 평소에 걷는 속도로 걷기, 빠르게 걷기, 천천히 달리기, 장거리 달리기, 400미터 달리기, 100미터 달리기여러 가지 속도의 걷기와 달리기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너무 강렬한 역설과 모순과 딜레마 앞에서도 하나님의 소명의 길을 뛰어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말과 함께 경주하는 순간일 겁니다. 

 

K드라마 지옥은 신과 인간의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상당히 불편하고 스트레스로 가득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깨닫게 되었습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번 주도 숱한 질문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길을 걸어가는 때로는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많아질 있습니다. 때로는 불만이 올라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할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질문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의문이나 불만이 있나요? 솔직하게 아뢰는 기도를 드립시다. 

 

2.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정신적인 극한 상황에서도 달려나갈 것을 요청하기도 하십니다. 평소에 걷고 달리던 속도가 아니라 때로는 말과 함께 달려야 하는 상황도 있는 겁니다. 혹시 지금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끝까지 달릴 있도록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나의 인생의 여정에서 말과 경주할 정도로 전속력으로 달려 적이 있나요? 무슨 , 어떤 목표 때문에 렇게 달렸나요?     

 

2. 하나님에게 가지는 나의 인생 최대의 질문은 무엇인가요? 질문은 언제부터 가지게 되었나요?     

2021. 11. 28. 김혁수

 

[본문_디모데후서 4:1-8_새번역]

1나는 하나님 앞과,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2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3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6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0. 들어가며 

- 마지막 스퍼트  

운동을 지속하면 근육이 요구하는 만큼의 산소를 공급하지 못해 근육에 피로물질이 쌓인다. 그러다 결국 운동을 멈추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허친슨은 놀라운 현상을 찾아냈다. 세계신기록을 세운 선수 대부분은 마지막 바퀴에 가속을 붙여 기록 수립에 성공한다. 허친슨이 인용한 논문에 따르면 ‘1920 이후 육상 5000m 1m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한 선수들 가운데 66명이 마지막 바퀴에서 가장 빠르거나 번째로 빠른 속도를 기록했다’(105) 한다. 마지막에 속도를 높이는 현상을막판 스퍼트라고 부른다. 결승선을 통과한 뒤에 힘이 남는다면 역시페이스 조절 실패. 마지막에 남은 힘을 쏟아내는 것이 기록도 세우고 페이스 조절에도 성공하는 길이다.”

 

중앙일보 장혜수 기자의 글입니다. 마지막 스퍼트라는 것이 있죠. 장혜수 기자는 허친슨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세계신기록 보유자들이 마지막 스퍼트를 어떻게 하는지 적고 있습니다. 결국 막판 스퍼트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기록을 세우느냐 마느냐로 갈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운동할 , 마지막 힘을 짜내서 힘을 쓰는 경우가 있죠? 윗몸 일으키기, 팔굽혀펴기, 턱걸이 등의 운동을 때도 마지막에 근육이 터질 같은 순간이 있잖아요. 달리기에도 그런 마지막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죠. 바울의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바울의 마지막 달리기

- 30년의 달리기 인생 

바울은 지난 30년간 줄기차게 달려왔습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만난 예수님 때문에 인생이 180 바뀌었습니다. 유대교 원리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벗고 예수님 중심의 복음주의자가 것이죠. 성경을 예수님 중심으로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비밀을 풀고 퍼즐을 맞추어 방탈출 하듯이 성경이라는 비밀의 방을 예수님이라는 힌트를 가지고 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랬더니 율법의 의미가, 성전의 의미가, 언약의 의미가, 예언의 의미가 분명히 밝혀지기 시작 겁니다. 바울은 이걸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라고 이해했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이라는 비밀의 방에 갇혀서 여전히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충동과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달리기 시작한 겁니다. 지역에 머무는 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시작한 세계 선교 여행은 그의 달리기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도시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지중해 지역을 돌고 스페인까지 가서 비밀의 방의 탈출 힌트 혹은 패스워드 알려주고 싶어했습니다. 3 선교 여행 , 에베소 지역 머물면서 2 선교 여행에서 개척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9 

24경기장에서 여러 선수들이 함께 달리지만 우승자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우승자가 되도록 힘껏 달리십시오.

25우승자가 되려고 경쟁하는 선수마다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26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는 권투 선수처럼 싸우지 않습니다.

 

-바울의 마음 

바울은 이런 마음으로 달리기를 하듯, 그렇게 지난 30년을 달려왔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스퍼트를 내야 하는 시기임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그의 말년에 쓰여진 편지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치 유언과도 같은 글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기약이 없습니다. 만나면 다행이지만, 만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데요, 읽어볼까요? 

 

디모데후서 4 

9그대는 속히 나에게로 오십시오. 10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11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대가 때에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 12나는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13그대가 때에, 내가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에 두고 외투를 가져오고, 책들은 특히 양피지에 것들을 가져오십시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번째 투옥은 가택연금과 비슷한 것이지만, 번째 투옥은 엄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외투를 찾고 있습니다. 디모데의 면회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가 로마로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바울이 돌아가시기 전에 디모데를 만났기를 바래봅니다. 

 

- 사람 세우기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마지막 스퍼트는, 마지막 달리기는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1나는 하나님 앞과,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2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5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달리기는 사람 세우기였습니다. 리더십 전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신이 뛰었던 달리기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고난과 아픔이 있었던 달리기를 디모데에게도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붇돋아 주고 있는 겁니다. 이게 그의 마지막 스퍼트였습니다. 

 

2. 달리기와 인생

달리기와 인생은 여러 모로 닮았습니다. 달리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종종 합니다. “달리기는 인생이다.” 어떤 부분이 닮았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닮은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페이스 조절 

번째는 페이스 조절입니다. 단거리 달리기 말고 마라톤을 비롯한 중장거리 달리기에는 페이스 조절이 관건입니다. 자신의 신체 상태를 빨리 파악하고 자신의 맞는 페이스로 달려야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빨리 뛰게 되면 오버 페이스라고 해서 결국 자신이 목표한 거리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목표한 시간에 한참이나 미쳐서 들어오게 됩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평소에 훈련하면서 자신의 상태, 평균적인 페이스가 어떻게 되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페이스에 맞춰 뛰는 거지요. 

 

이건 우리 인생도 혹은 신앙 생활도 비슷합니다. 너무 빨리 달리면 탈이 납니다.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간다면 더욱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MBTI 애니어그램을 통해 자신의 성향을 알고 일을 추진하고 관계를 맺으면 좋습니다. 요사이 MBTI 유행이더라구요. 검사하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구요. 자신이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무엇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지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에너지 수준을 계속 관찰하세요. 육체의 에너지, 정서적 에너지, 정신적 에너지를 살펴야 합니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달리다가는 병이 납니다. 중간에 포기하게 됩니다. 저는 예전에 종종 밤을 새곤 했습니다. 일이 많으면 새벽 늦게까지 일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몸과 마음이 따라주질 않는 겁니다. 늦게까지 일하는 날들을 줄여가고 있습니다. 그래야 계속 일할 있습니다. 

 

2) 인내와 절제 

달리기와 인생의 닮은 , 번째는 인내와 절제입니다. 달리기를 하다보면 힘든 순간이 찾아옵니다. 숨도 가빠지고, 근육도 뻐근해집니다. 쉬고 싶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분명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았음에도 2-3km 지점에서 위기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걸 넘어서면 다시 달릴 힘이 나옵니다. 세컨 윈드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그렇게 힘든 순간 순간이 종종 찾아옵니다. 그러다가 소위 말하는 러너스 하이, 러닝 하이가 찾아옵니다. 30 이상 달리다보면 죽겠다 싶은 순간, 사점(dead point) 통과하는데요, 때부터는 몸속에 엔돌핀이 품어져나오면서 고통을 잊게 하고 심리적인 기쁨을 주는 거지요. 인내의 달콤한 선물이라고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뛰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부상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상은 올바르지 않은 자세, 한쪽 근육에 힘을 집중하는 자세 등에 의해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 오래 달리다 보면 100이면 100 부상을 당하게 되어 있죠. 그래서 달리기에는 인내 아니라 절제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고통을 참는 인내가, 때로는 아는 절제가 필요한 거죠. 

 

인생, 그리고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인내가 없이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도 없고, 일정 시간의 인내가 가져다 주는 달콤한 선물도 맛볼 없죠. 그렇다고 쉬지 않고 몰아서 달리면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건강을 잃거나 관계가 틀어지거나 정서적인 번아웃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절제가 필요합니다. 

 

신앙 생활도 비슷합니다. 성경 읽기나 기도 하기는 인내가 필요한 활동입니다. 성경의 , 기도의 맛이 느껴질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맛을 알아야 계속 있습니다. 그러다가 절제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왜냐하면 성경 읽기도 자기만의 스타일로 굳어질 있고, 기도 생활도 매너리즘에 빠질 있기 때문입니다. 때는 절제해야 합니다. 성경 읽기의 다양성을 위해 공부하고, 기도의 생생함을 회복하기 위해 다른 영성 훈련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아니 어느 순간에는 기존의 활동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잠을 자면서 휴식을 취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3) 유종의  

달리기와 인생의 유사점 번째는, 유종의 입니다. 달리기도 마지막 스퍼트가 좋아야 좋은 기록에 도달할 있습니다. 순간을 평소에 연습해야 체력이 올라갑니다. 힘이 빠져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같을 , 숨을 몰아쉬며, 팔을 힘차게 흔들고, 무릎을 들어 마지막 지점을 향해 최선을 다해 뛰는 겁니다. 그럴 , 몸의 한계를 넘습니다. 체력의 한계를 넘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기록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여러 번의 마지막이 다가옵니다. 시작한 일을 마무리 하는 때가 오는 거지요.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책임감 있게, 필요한 일들을 감당하는 겁니다. 페이스 조절을 선수는 마지막 스퍼트를 힘이 남아 있습니다. 

모든 행사에도 마무리가 있습니다. 정리 정돈하고 돈을 회계 장부에 정리하고 평가서를 작성하고 다음 행사를 위해 보고서도 만듭니다. 화려한 폐막식이 끝나고도 원래대로 원상복귀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사가 끝난 겁니다. 그것까지 감당할 힘을 남겨놔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시작점에 있습니까? 반환점에 있습니까? 아님 결승점에 있습니까? 시작점에 있다면 자기 페이스를 빨리 파악하세요. 반환점에 있다면 인내와 절제를 번갈아 가며 지혜롭게 사용하세요. 결승점이 가깝다면 마지막 스퍼트를 준비를 보세요. 

 

3. 우리의 마지막 달리기 

- 코로나가 바꾼 예배 

2021년도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음 주면 12월입니다. 해를 돌아보며 우리가 어떻게 달려왔는지 확인해 보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줌에서 드리던 온라인 예배를 유툽 예배로 전환하고 비대면에서 대면으로 바꿔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름 수련회도 어쩔 없이 줌으로 진행했습니다. 많은 행사 계획들이 취소되고 최소한의 모임만 유지되었습니다. 비대면의 일상이 익숙해질만 하니까 대면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면 모임이 자리를 잡아가려고 하니까 다시 확진자가 폭증하고, 아프리카에서는 델타 변이보다 강력한 오미크론 변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매주 매주 다가오는 파도가 높고 거칩니다. 

 

- 수고했어 올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동안 달려 왔다고 생각합니다. 무리하지 않고, 페이스 조절하면서, 인내하면서, 절제하면서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올해의 마지막 스퍼트가 남았습니다. 서로를 격려하면서 말씀과 기도의 맛을 느껴보자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에 힘을 쏟자고 이야기를 건네면 좋겠습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내년을 기약하면서 힘을 내보자고 격려했으면 좋겠습니다. 

 

4. 나가며

- 사람세우기

동시에 바울처럼 저도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예수님이라는 힌트를 알리는 일에 여러분이 함께 달려주십시오. 해만 하고 그칠 일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작은 디모데가 되어 바울의 마지막 부탁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3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사람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의 이야기보다 오징어게임과 지옥에 환호할 겁니다. 숱한 드라마와 영화와 웹툰과 웹소설에 열광할 겁니다. BTS 블랙핑크에 빠져 지낼 겁니다. 좋습니다. 그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성경의 비밀을 푸는 열쇠, 우주의 신비를 푸는 열쇠인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직무입니다. 이걸 잊지 맙시다. 

 

일을 위해 섬기십시오. 중고등부, 아동부, 유치부 교사로 섬겨주세요. 찬양팀으로 섬겨주세요. 청년부 운영위원으로 섬겨주세요. 페이스 조절하면서, 그렇지만 인내하면서, 절제하면서, 마지막 스퍼트를 준비하면서그렇게 섬겨주세요. 장거리 달리기라고 생각하시고 섬겨주세요. 일년 이년 섬기는 걸로 끝내지 맙시다. 

 

저와 여러분이 작은 디모데가 됩시다. 이번 기도하시면서 내가 무엇으로 섬길 있을지 고민하시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말씀해주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바울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이 사랑하던 영적 아들 디모데가 자신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오래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소원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소원을 깊이 우리 마음 속에 새겨달라는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해를 돌아볼 ,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순간은 인내해야 순간이었습니까? 절제하며 쉬어야 하는 순간이었습니까? 어떻게 분별할 있을까요?       

 

2.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섬겨야 영역은 무엇인가요? 우리 송청 공동체에는 어떤 필요가 있을까요?  

 

2021. 11. 14. 김혁수

 

[본문_누가복음 15:11-24_새번역]

1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12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것을 챙겨서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하였다. 14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그래서 그는 지방의 주민 가운데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 아버지의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19나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0. 들어가며 

- 달리기 시리즈

지난 우연찮게 QT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지난 야외 활동을 해야 해서 설교를 15 내외로 준비하다보니 QT 본문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준비하다보니 엘리야의 달리기가 너무 인상에 남아 그걸로 주제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설교 이후에 달리기에 관한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달리기의 모습을 살펴보는 시리즈죠. 이번 주는 상상 속의 달리기 이야기 입니다. 도대체 어떤 달리기가 등장하는지 본문을 읽어볼까요? 

 

- 돌아온 탕자 이야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정말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자신이 받은 유산을 미리 정산해서 달라고 요청했던 겁니다. 아주 버릇없는 행동이요 아버지를 욕보이는 행동입니다. 유산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리고 많은 재산을 탕진하게 됩니다. 탕진한 상태에서 흉년이 찾아 오자 둘째 아들은 더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 했지만,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1. 가지 

내용은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야기의 중심 포인트를 가지로 풀어내곤 합니다. 

 

- 둘째 아들

먼저는 둘째 아들의 관점에서 보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입니다. 배은망덕한 인물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허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 다시 하나님을 떠올리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삶의 고난과 고통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다면 둘째 아들처럼 행동하라고 촉구하는 메시지로 읽을 있죠. 

 

- 첫째 아들

다음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첫째 아들의 관점에서 보는 겁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동생이 다시 돌아와 귀빈 대접을 받는 모습에 분노하게 됩니다. 동생도 싫었지만,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첫째 아들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죠. 그래서 지금도 사랑이 없이 원칙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종교인들을 비판할 이야기를 사용하곤 합니다. 

 

- 아버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관점으로 보는 겁니다. 집에 함께 거하는 첫째 아들도 귀하지만, 멀리 떠나 죽음에 이른 둘째 아들도 아버지에겐 귀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었으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 우리는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있습니다. 

 

가지 관점 우리가 눈여겨 보고 귀담아 들어야 포인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비유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직접적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면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있습니다. 

 

1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2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_누가복음 15:1-2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 투덜대며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못마땅합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고 식사하는 것이 당시의 율법에서는 금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비유의 이야기를 꺼내신 겁니다. 그렇다면, 첫째 아들의 관점에서 메시지를 찾는 것이 우선 되어야 겁니다. 바리새인들의 말과 행동에 대한 가르침인 것이죠. 

 

그렇다고 둘째 아들의 관점이나 아버지의 관점이 사라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예수님 주변에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동안 세리와 죄인들을 대상으로 얼마나 많은 비난과 정죄의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너희는 저주 받을 거야. 죽어 마땅해. 하나님은 너희를 버렸어. 너희는 하나님의 저주 속에 있어…’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시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다른 그림을 죄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그려주십니다.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바꾸시는 겁니다.  

 

2. 역동적인 장면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에서 유독 인상적인 장면 하나에 꽂혔습니다. 바로 20절입니다. 

 

20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가 달리고 있습니다. 거리가 멀었습니다. 달려가서 둘째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춥니다. 장면을 상상해 봤습니다. 

 

- 아버지의 연세? 

여러분, 아버지의 연세는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지금 비유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말씀해주시는 것이지만, 그래서 실화는 아니지만, 그러기에 맘대로 상상해 있을 있기도 하죠. 일단 장선한 아들이 있었으며, 둘째가 자기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을 , 못해도 40-50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둘째가 재신을 탕진했던 기간까지 합치면, 그것보다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50 넘은 나이가 것입니다. 지금이야 50이어도 젊다 소리 들을 수도 있지만, 예전에50 중년의 마지막 시기라고 말할 있겠습니다.  

 

- 거리? 

예수님은 거리가 멀다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멀리 둘째 아들이 보였던 겁니다. 얼마나 멀었을까요? 100미터 정도를 멀다고 표현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시야에 들어오는 정도라면 4-500미터 정도를 떨어져야 조금 멀리 있다고 말할 있을 겁니다. 만약 1km 정도 떨어져 있다면 거리가 멀다고 말할 있을 같네요. 그러나 이것도 사람의 시력에 따라 다를 겁니다. 몽골 유목민들의 시력은 3.0 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태국의 모겐족 사람들은 시력이 8.0이나 된답니다. 시력이 3 내지 4 경우에는 가시거리가 7km까지 간다고 하니, 거리가 멀다고 때의 거리가 얼마쯤일지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냥 우리 기준으로 해도 직선거리 1-2km라고 있을 같습니다. 거리를 달려 겁니다. 아들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나이에 열심히 달려옵니다. 조금 빠른 속도로 100미터만 달려도 숨이 찹니다. 

 

- 아버지의 숨소리? 

여러분 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리시나요? 거의 1km 이상을 굴곡이 있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산길을 열심히 아들을 부르면서 달리고 있습니다. 

혁수야, 아들아~~”

아들을 끌어 안을 ,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시나요?

헉헉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나이가 아버지가 자신이 있는 최선의 달리기를 하셨습니다. 심장 박동이 올라가고 몸에는 땀이 주르르 흐릅니다. 

 

3.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

저는 아버지의 달리기를사람을 살리는 달리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개인적인 달리기와는 다른 차원의 달리기입니다. 사람을 환대하고 용서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달리기입니다. 거리를 걸음에 달려와 와락 끌어 안는 달리기입니다. 놀이터에서 순간 잃어버렸던 아이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멀리서 아이를 발견했을 때의 아빠의 달리기입니다. 저는 그런 달리기를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 혜강이를 찾아 10분을 달리다가 헤강이가 멀리 나타나자 전속력으로 달려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게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입니다. 누군가를 돌보고 사랑하고 환대하려면 우리는 이런 달리기를 연습하고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돌봄을 위한 몸의 훈련 

첫째는 돌봄을 위한 몸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달리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남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심폐 기능이 부족하면 몸을 오래동안 움직이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람을 돌보고 살리는 일은 중노동에 가깝습니다. 체력 소모가 큽니다. 하루 이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의 훈련, 단련이 필요합니다. 최대 산소 섭취량(V02 max) 늘리십시오. 우리 1kg 근육이 1분당 섭취하는 산소의 최대 용량을 표시하는 수치입니다. 이것이 늘어나면 몸의 피로가 줄어듭니다. 

 

2) 돌봄을 위한 마음의 훈련 

둘째, 돌봄을 위한 마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몸만 훈련한다고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를 계속 없습니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는 마음과 정서가 건강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리가 멀지만 둘째 아들을 반기고 환대하는 아버지의 마음 말입니다.

 

우리 나라 3 신이 있다고 하죠. 강아지의 강형욱, 장사의 백종원, 육아의 오은영. 저는 중에서 육아의 오은영 박사님의 프로그램을 요사이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금쪽이들을 다루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들을 다루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요사이에는 어른들도 상담해주고 있더라구요.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라는 프로그램인데요. 어른들이 겪는  정서적 어려움의 원인과 해법을 설명해주시더라구요. 프로그램을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유명한 연예인들이라도 정서적, 관계적 어려움을 갖고 있더라구요. 

 

우리는 마음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마음의 근육과 심장의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를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요구와 필요에 반응할 있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 훈련이 필요하죠. 

 

3) 돌봄을 위한 영의 훈련 

셋째, 돌봄을 위한 영의 훈련도 필요합니다. 돌봄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고 해서 타인과 세상을 돌볼 있는 힘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한한 사랑의 근원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의 달리기를 경험해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경험했던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느껴야 합니다. 나를 향해 멀리서 달려오시는 하나님, 숨을 헐떡이시면서 와락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렇게 그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그렇게 가르쳐주고 싶으신 겁니다. 그동안 왜곡되었던 하나님 이미지를 완전히 고쳐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달리기 하시는 분이십니다. 

 

4. 나가며 

- 몸과 마음과 영의 달리기 연습

몸의 훈련, 마음의 훈련, 영의 훈련어느 것이 먼저일까요? 예전에는 무조건 영의 훈련이 먼저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훈련, 마지막이 몸의 훈련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순서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든 여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십시오. 저는 몸의 훈련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달리기를 시작하십시오. 처음부터 어렵다면 걷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런데이 어플을 깔고 런데이 트레이너의 응원 목소리에 맞춰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십시오. 조금씩 뭉쳤던 근육을 풀어주고, 약해진 인대를 강화시켜나가고, 심장과 허파의 근육들을 단련시켜서 산소 섭취량을 늘려주세요. 달리면서 음악만 듣지 말고, 기도도 하십시오. 삼위 하나님을 떠올리며 주님과 함께 달리겠다는 마음의 결심도 올려드리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달리기를 연습하는 겁니다. 

 

그렇게 훈련하다보면 어느덧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돌볼 있는 , 마음, 영의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이번 다시 시작해 봅시다. 

 

 

[함께 기도하기]

1. 하나님은 멀리서 우리를 보자마자 달려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떠나 여러분 마음대로 여러분 뜻대로 살았다면 이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옵시다. 여러분의 실체를 인정하고 부모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옵시다. 그분은 여러분을 와락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그분께로 돌아가겠다는 기도를 드립시다. 

 

2.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과 영의 훈련이 필수적입니다. 몸을 훈련하기 위해 운동합시다. 마음을 훈련하기 위해 정서의 리플렉션 시간을 가집시다. 영의 훈련을 위해 삼위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를 합시다. 이런 훈련을 지속할 있도록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거리를 달려와 둘째 아들을 와락 끌어안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2. 몸의 훈련, 마음의 훈련, 영의 훈련 중에 지금 나에게 필요한 훈련은 무엇인가요? 그렇게 생각하나요?    

2021. 11. 7. 김혁수

 

[본문_왕상 18:41-46_새번역]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빗소리가 크게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42 아합이 올라가서, 음식을 먹었다. 엘리야는 갈멜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을 바라보며 몸을 굽히고,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

43 그리고는 그의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쪽을 살펴 보라고 하였다. 시종은 올라가서 보고 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다시 그의 시종에게, 일곱 번을 그렇게 다녀오라고 하였다.

44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시종은 마침내, 사람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바다에서부터 떠올라 오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는 아합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어서 병거를 갖추고 내려가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였다.

45 그러는 동안에 이미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캄캄해지고, 바람이 일더니, 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아합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내려갔다.

46 주님의 능력이 엘리야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엘리야는 허리를 동여 매고, 아합을 앞질러서, 이스르엘 어귀에까지 달려갔다.

 

주석

46: 구절은 빨리 달렸다는 말이 아니라 이스르엘에 도착할 때까지 아합의 병거 앞에서 달려갔다는 말이다. 왕이나 왕자의 병거 앞에서 달려가는 사람들은 그의 측근자들이다. 엘리야는 야웨의 권세하에, 선지자적 포고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IVP 배경주석).

 

0. 들어가며 

- 26km 

26km라고 구글에 봤습니다. 그랬더니 우연찮게 이런 회사 하나가 검색되더라구요. 

 

26km is...

26km 영상 콘텐츠 제작 회사입니다.
뮤직비디오, CF, 유튜브  모든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으며,
영상 기획부터 후반 작업까지 영상 제작의 모든 과정을 디렉팅하고 있습니다.

창밖의 풍경이 가장 보이는 속도 26km처럼
가장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영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시속 26km 차가 달리면 밖에 풍경이 가장 보인다고 해서 회사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제법 괜찮은 작명법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시속 26km 아니라 실제 거리 26km 등장합니다. 실제 거리 26km 달리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함께 읽어 볼까요?

 

1. 인상적인 장면 

최근 큐티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다가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마차 앞에서 달리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아합왕의 궁이 있던 사마리아의 이스르엘 지역까지 26km 왕의 마차, 혹은 병거 앞에서 달리기를 것입니다. 46절입니다. 같이 다시 읽어 볼까요? 

 

46 주님의 능력이 엘리야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엘리야는 허리를 동여 매고, 아합을 앞질러서, 이스르엘 어귀에까지 달려갔다.

 

여기서 아합을 앞질러서 달려갔다는 표현은 단순히 아합의 마차보다 빨랐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아합의 마차와 보조를 맞춰 달려가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했다는 말입니다. 26km 말의 속도와 비슷하게 달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비를 맞으면서 달리고 있습니다. 3년간의 가뭄 끝에 내리는 비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밖에 나와 비를 맞으면 기뻐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제 살았다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우물에 물이 넘치고 시냇가에 물이 가득합니다. 말라 갈라졌던 땅이 농사짓기 좋은 옥토가 되어갑니다. 3년간 지속되던 가뭄이 이제 끝난 겁니다. 오랫동안 비의 , 날씨의 ,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며 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그들은 바알이 비를 내려 주었다고 믿고 있었는데, 왕의 마차 앞에 뛰어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였던 겁니다. 동시에 어떤 소문도 함께 도착했습니다. 바알와 아세라의 제사장과 선지자 850 집단 살해, 갈멜산의 대결투, 1:850 싸움에서 이긴 엘리야, 여호와의 최종 승리, 이런 타이틀의 뉴스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조금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2. 엘리야와 아합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은 둘로 나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죠. 북이스라엘은 여러 번의 반역과 쿠테타로 왕조가 바뀌다가 오므리 왕조의 번째 왕인 아합에 이르러서 상당히 안정되고 번성한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아합이라는 왕이 하나님 편에서 보면 무능하고 엉망인데요, 시돈에서 이세벨이라는 왕비를 맞이합니다.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신을 전국 방방 곡곡에 소개하고 섬기게 만들죠. 때가 기원전 870-60년쯤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북이스라엘에 저주를 내립니다. 가뭄을 선포한 것이죠. 그리고 3년간 엘리야는 숨어 지냅니다. 그러다가 3년이 지난 어느날, 엘리야는 갑자기 나타나 제안을 합니다. 

 

17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요?” 18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아버지의 가문이 괴롭히는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주님의 계명을 내버리고바알을 섬기십니다. 19이제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갈멜 산으로 모아 주십시오. 그리고 이세벨에게 녹을 얻어 먹는 바알 예언자 사백쉰 명과 아세라 예언자 사백 명도 함께 불러 주십시오.” 20아합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부르고, 예언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았다.(열왕기상 18:17-20)

 

이렇게 흥미진진한 1:850명의 대결이 벌어진 겁니다. 갈멜산에서 제단에 불을 내리는 신이 신이라고 하고 서로 내기를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몸을 자해해가면 바알과 아세라를 불러보지만, 제단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부어 흥건하게 적신후에 여호와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야 제다다 불태워 버린 겁니다. 즉시로 850명의 바알, 아세라 신의 선지자들을 죽여버립니다. 아합은 사건을 보면서 진정한 신은 여호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시작된 겁니다. 3년간의 가뭄이 끝났습니다. 비가 내립니다. 그리고 아합은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를 왕의 마차 앞에 달리게 하면서 진정한 신은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게 하죠. 따라서 오늘 장면은 엘리야와 아합이 서로 싸우는 장면이 아니라, 아합이 여호와 하나님께 승복하여 엘리야와 함께 하나님을 증거하는 장면입니다. 

 

3. 엘리야의 달리기 

장면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봅시다. 여러분, 3년간 가뭄에 시달렸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죠.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습니다. 그의 체력이 26km 달릴 체력이었을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지금 엄청난 대결을 벌이고 850명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엘리야 학살설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도록 합시다. 어쨌든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게 만들었던 850명의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을 제거한 겁니다. 엄청난 일들이 끝난 , 그가 가진 거의 모든 체력이 소모되었는데, 이제 그는 20km 왕의 마차 앞에서 뛰는 겁니다. 왕의 마차이다 보니 얼마나 좋은 말과 차가 사용되었겠습니까? 최고의 말과 최고의 마차 앞에서 달리는 겁니다. 그냥 달리는 것도 어려운데,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옷이 젖어 무거워지고 곳곳에 생긴 웅덩이로 인해 장애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26km 왕의 마차 앞에서 달리고 있는 겁니다. 누구의 힘으로요.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달리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힘을 몰아서 써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며칠을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해야 때가 있습니다. 선교여행을 하면 짧은 기간안에 정말 쉬지 않고 일하고 달립니다. 사람들도 돕고 예배도 드리고 좋은 구경도 합니다. 모든 것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럴 , 우리는 누구의 힘을 의지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달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과 에너지로는 불가능합니다. 단순히 우리의 은사나 재능만으로도 계속 달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4. 나가며 

어제 10km 달리기를 하면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몰려 왔습니다. 다리는 무겁고 숨은 가빠지고 심장은 요동을 칩니다. 나이대마다 최대 심박수라는 것이 있답니다. [220 - 자기 나이]라는 공식이 있는데요, 공식에 따르면 저는 173-4 정도가 최대 심박수입니다. 그런데 중간 부터 벌써 170 넘은 같았습니다. 그만 뛰고 싶은 순간이 오죠. ,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목표한 10km 있게 도와 주세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달리기를 많이 닮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때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때도, 우리는 한계를 경험합니다. 그럴 우리가 드려야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목표한 일을 감당할 힘을 주세요. 저의 능력과 에너지와 은사와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도록 도와주세요. 산소를 공급해주시고, 심박을 안정시켜주시고, 근육에 힘을 주세요. 그렇게 끝까지 달리도록 도와주세요 

 

항상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계가 있는 존재가 맞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목표 이상까지도 있습니다. 왕의 마차 앞에서 26km 달릴 수도 있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의 속에 가끔, 아니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힘에 부치는 일이 많습니다.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일로 인해 마음이 피곤하고 몸은 피로합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삶이 그런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이럴 , 기도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엘리야는 아합 왕의 마차 앞에서 달려가고 있는 걸까요?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2. 지금 힘에 부친다고 느끼는 일은 무엇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렇게 힘에 부칠 여러분은 주로 어떻게 해소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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