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09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2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4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5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메시지

여러분은 저마다 창조적으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5절). 

 

[오늘의 묵상]

공동체에서 죄를 다루는 과정을 보면, 그 공동체의 성숙도를 알 수 있다.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되, 사람에 대해서는 자애로와야 한다. 

바울은 두 가지를 주문한다. 

하나는 바로잡기다. 

죄에 대해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 

죄가 계속 흘러가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죄악이 죄악이라는 사실이 공표되어야 하고, 그 죄악이 교정되어야 한다.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온유함 마음이다. 

죄를 지은 형제 자매를 대하는 태도는 온유함이다. 

죄를 바로잡기 위해 냉철하게 판단하고 단호하게 행동해야겠지만, 

형제 자매에 대해서는 온유함으로 일관해야 한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그것이 공동체를 살리고,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잡기를 위해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가 있다. 

1) 성령을 따라, 2) 자기를 살펴서, 3) 유혹에 빠지지 말기

이렇게 세 가지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이 모든 과정에 중심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분이시며, 사랑으로 이끄시고, 분별력을 제공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인도하심 없이 인간적 판단과 세속적 시스템에 기댄다면, 공동체는 분열과 갈등이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분의 인도하심을 좇아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연히 자기를 살피게 된다. 

사탄의 공격은 끊이지 않는다. 

성령님의 조명하심 속에서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결국 유혹에 빠지고, 자신도 흑화된다. 

 

자신을 살피는 과정에서 우리는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짐을 져 줄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이웃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은 사실, 죄로 인한 피해자 뿐 아니라 그 주변 사람, 가해자의 주변 사람, 그리고 심지어는 가해자까지 포함된다. 

이 모든 형제 자매들의 짐을 대신 져 줄 수 있는 사랑의 태도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렇게 죄의 문제를 다루다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심판자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특별한 권위를 받은 것처럼 스스로를 여긴다. 

바울은 그 유혹도 이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게 자기의 몫이다. 

자랑할 게 아니라, 묵묵히 자기를 몫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사실 이 기록은 바울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고, 

하나님이 바울에게 적용하도록 주신 말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바울은 그동안 갈라디아 교인들의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온유하라고 했지만, 그는 이 작은 편지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리석다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죄를 다루기 위한 그의 노력은 처절하고 간절하고 절박하다. 

그 스스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한다.

죄와 문화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문화 자체가 죄는 아니나 죄된 문화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날까롭게 분별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다. 

그리고 죄와 싸우기 위해 처절하고 간절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바울이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요청한다. 

 

[오늘의 기도]

소중한 권면들을 던져주시는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권면과 방향설정에 대해 듣습니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태도에 대해 알게 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죄를 분별하고 죄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되 온유한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강팍함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제 자신을 잘 돌아보게 하소서. 

바울이 보여주었던 방법을 참조하게 하시되, 그 방법 자체를 절대화 하지 않기 원합니다. 

절대적 기준은 우리 주님임을 이시간 다시 고백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고, 사람의 회복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05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9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21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주석

19-21절. 이 행위들은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성적 불순함, 우상 숭배, 불화, 술취함이 그것이다. 바울이 나열하고 있는 죄들은 대부분은 세 번째 범주에 속하며, 그것이 갈라디아인들이 인간관계와 관련된 죄에 특별히 취약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자유를 누리되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그 자유를 사용하라고 강조했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길을 가라고 권면했다. 

자유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과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은 동일한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성령님은 자유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하도록 성도들을 안내한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억압하지 않으신다. 

성령님은 성도들의 자유를 더욱 극대화하신다. 

하지만 방종으로 나아가길 원치 않으신다.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끄신다.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끄신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다. 

 

성령님의 역사에 반하는 움직임이 있다. 

바로 육체의 정욕과 그 행실이다. 

육체의 정욕과 행실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를 자유를 훼손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자신과 이웃에게 해를 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육체의 행실은 본문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음행, 더러움, 방탕은 성적 불순함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사회상은 성적인 방종이 심각했다. 

상류층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성적인 불순함과 불결함이 가득했다. 

성적 봉사를 하는 노예가 따로 존재했으며, 상류층은 사창가를 드나드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태어나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확신이 부족했다. 

기독교가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로마 상류층이 성적 순결을 지키려는 아내를 기독인 외에서는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대중 문화가 그러하니, 혼자서 성적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극도로 힘들다. 

사회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자유을 얻은 성도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가능한데, 그것에 반대하는 육체의 행실에 첫 번째 부류는 바로 성적 불순함이란다.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행실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우상숭배나 마술 같은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의 본성에서 나온 죄악이다. 

구약에서부터 금지해온 것들이다. 

사탄과 귀신을 주인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잇속을 채우려는 행위는 버려야 한다. 

마술, 요술, 신접, 무당, 굿…. 버려야 한다. 

결국 이런 것들은 성도의 자유를 짓밟고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는 이웃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죄악이 판을 칠 수 있다. 

분탕질을 하고 서로를 미워한다. 

뒷말을 하고 과도하게 비판한다. 

시도때도 없이 비판한다. 

생각날 때마다 언급하고 사람을 희화화한다. 

웃음거리의 소재로 삼는다. 

그렇게 파당이 만들어지고, 다툼이 거세지고 교회는 분열된다. 

이렇게 되면 이웃 사랑의 모델이 되어야 할 교회가 무너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더렵혀진다.

현대 교회들도 이런 죄악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술취함, 흥청망청 노는 것… 이것은 정말이지 현대 문화에 그대로 녹아 있다. 

너도 나도 즐거움과 쾌락에 중독되어 있다. 

즐겁다면 모든 것이 용납된다. 

즐거움이 최우선의 가치가 되곤 한다. 

 

바울은 이런 죄의 행실이 결국 성령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며, 자유를 이웃사랑으로 사용하는 성도들을 타락시키는 길이기에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라고 강조한다. 

심지어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성령님을 따르는 삶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삶이다. 

성적 불결함, 우상숭배, 관계 훼손, 쾌락추구는 성령님의 길이 아니다. 

육체의 욕망의 길이다. 

사탄의 길이며, 다시 하나님께 반역하는 길이다. 

 

기독인의 윤리와 세상의 윤리가 차별성이 점점 없어지는 세상에서 사도 바울의 경고는 의미가 크다. 

세상을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 세상 윤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버려야 하는가? 

기독교 윤리를 어떻게 성도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게 하고 체화시켜서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는가? 

모두 자기만의 세계관이 있으며,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기호가 있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과연 성경적 세계관과 성경의 보편적 윤리관을 어떻게 심어 줄 수 있는가?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 앞에 다시 선다.  

 

[오늘의 기도]

선악 구분의 참된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분명히 말해줍니다.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은 당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섬기는 우상숭배를 싫어하셨습니다. 

성적 부도덕, 성적 불결함을 싫어하셨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하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쾌락에 중독되어 하나님보다 즐거움과 쾌락을 찾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저도 싫어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저도 좋아하게 하소서.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더욱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쇼츠 시청을 줄이고, 더욱 생산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결심합니다. 그 결심을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03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15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주석

13절. 육체에 대한 경고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가 윤리적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우리는 항상 특정 존재로부터 자유롭지만 동시에 특정 존재에게 예속되어 있다. “서로 종노릇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한계를 극적으로 역설한다. 공동체 안의 종살이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상호 관계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백번 맞는 말씀이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맘대로 살라고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은 내 욕망대로 살라고 방치한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새로운 관계로 부르신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가져온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이 율법의 요약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율법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았다. 

예수님은 당연히 이 진리를 알았고, 그래서 이 진리를 통해 율법을 재해석했고, 급기야는 자신의 생명을 주는 이유도 이 진리의 실천임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을 사랑하시기에 그분께 순종했고, 이웃을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으셨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순종과 희생을 멀리 두지 않는다. 

 

그런데 좀전까지 할례주의자들과 싸우던 바울의 모습은 갑자기 사라졌다. 

할례주의자들을 대적하고, 그들에게 심지어는 “그 지체라도 잘라 버려라”라고 말했던 바울이 갑자기 사랑으로 섬기라고 하고 있다. 

좀전의 감정선과 사뭇 다른 흐름이 느껴진다. 

편지를 쓰다가 잠시 쉬었던 것일까? 

진리에 대한 불타오르는 열정 이후에 사랑에 대한 광활한 전망이 눈에 보였던 걸까? 

자유라는 단어로 연결되어 논리적 확장이 일어난 걸까? 

할례주의자들은 부자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 그러나 자유란 방임이 아님… 이런 논리로 이어가다보니 서로 섬김이라는 주제로 들어왔다고 봐야 하나? 

논리는 그렇다고 해도, 감정은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듯 싶다. 

쉽게 적응이 안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바울은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라고 하면서, 왜 할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강경하게 비판했는가?”

이렇게 답할 수는 있다. 

진리를 훼손하여 자신 뿐 아니라 타인들을 억압하고 죄로 다시 빠져들게 만드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 경고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행위가 사랑의 섬김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다시 죄의 부자유함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고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기에 그토록 강경하게 진리를 수호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은 무조건적인 허용이 아니다. 

섬김은 타인이 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섬김은 진리를 기반으로 적절한 한계지음이 없이는 도리어 타인과 공동체에 해가 되고, 관계를 파괴한다. 

사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시한 이유도 그러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진리에 기반한, 시대적 적절성을 확보한 율법을 주셨다. 

진리를 기반으로 한 적절한 한계지음이 바로 율법이었다. 

사랑과 섬김의 표현이었다. 

 

나는 가족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하고, 나와 관련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때로 그들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려는 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은 사랑과 섬김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그들을 망치는 길이며, 공동체를 해치는 길이다. 

적절한 한계를 지어주어야 한다. 

그 적절한 한계를 진리(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를 기반으로, 우리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여 잘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딸이 남친과의 혼전 동거를 허락해 달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사랑은 ‘보편적 진리’와 ‘시대적/상황적 문화’ 이 둘 사이의 상호 관계를 연구하라고 촉구한다. 

사랑은 어떤 면에서 분별력이다. 

 

[오늘의 기도]

우주의 모든 진리를 포함하시는 하나님, 

사랑이 어렵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무조건적인 내어줌이 진정한 사랑인지 점점 헷갈립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합니다. 

분별력 없는 희생으로는 참 사랑을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지혜로 분별하게 하소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 진리를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도 알게 하소서. 

아는 것을 넘어 실천하게 하시고, 그 결과로 희생과 섬김이 일어나게 하소서.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무턱대고 지지하는 일이 없도록, 

더욱 예리한 분석과 더욱 종합적인 분별력을 갖추게 도우소서. 

그리고 때가 되면 머리가 아니라 손과 발로 섬기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저의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02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7 여러분은 지금까지 잘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가로막아서,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였습니까?

8 그런 꾐은 여러분을 부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9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10 나는 여러분이 다른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거리낌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12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의 묵상]

갈라디아서를 쓰는 바울은 어딘가 다른 사람 같다. 

특히 12절의 문장을 그가 썼다는 사실이 쉽게 믿겨지지 않는다. 

은혜와 평강을 강조하는 그가,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다”라고 글을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좀더 점잖게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게 하지 않고 있다. 

성경 말씀에 이런 표현이 들어가는 것도 신기하다. 

하나님도 허락하신 표현이라는 생각이 도달하면 더욱 더 집중하게 된다. 

바울은 왜 이렇게까지 표현해 가며 극렬하게 유대 할례주의자들을 반대하는가? 

그 이유는 7절에 잘 등장한다. 

“누가 여러분을 가로막아서,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였습니까?”

진리를 가로 막는 사람들,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혼자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야 어찌 하겠는가! 

가능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정도로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기 혼자 그 길을 가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마치 자신들이 진리를 소유한 양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설득하고 유혹한다. 

복음이 가져다 준 자유를 훼손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려고 한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려고 한다. 

금송아지의 저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에게 다시 금송아지의 수하가 되게 하려 한다. 

십자가로 무너진 사탄의 권세에 자발적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한다. 

바울은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이단들의 교설이 교란을 일으킨다.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이단 교주의 추종자가 되게 한다. 

자신이 하나님이고 성령님이고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매여 산다. 

신천지, JMS… 정말 많은 이단들이 이 한국 땅에 존재한다. 

복음의 진리가 더욱 분명하게 전파되어야 할 이유다.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분별력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더욱 분명한 분별력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유의 복음, 화해의 복음, 회복의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면서 자유와 화해와 회복을 누리자. 

삼위 하나님의 연합 속에서 자유와 화해와 회복을 주시는 그분의 통치를 누리고 선포하자. 

규정과 규율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과 규율이 원래 의미하는 바, 참 자유와 화해와 회복을 촉진시키려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자.

 

[오늘의 기도]

삼위 하나님, 

우리는 억누르는 사탄의 교묘한 술책을 잘 분별하게 하소서. 

삼위 하나님의 연합 가운데, 자유와 화해와 회복을 경험하게 하소서. 

자유의 복음, 화해의 복음, 회복의 복음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여전히 중독적이고 강박적으로 죄와 사탄의 속임수에 이끌리는 성향을 고쳐주소서.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를 경험하도록 인도하소서. 

 

오늘도 복음의 진리를 잘 분별하여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숱한 진리 주장들 속에서, 참 진리를 알아보는 힘을 유지하게 하소서. 

 

아픈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돌보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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