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5월 23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사흘 만에 시글락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아말렉 사람이 이미 남부지역과 시글락을 습격하고 떠난 뒤였다. 그들은 시글락에 침입하여 성에 불을 지르고,2 여자를 비롯하여, 그 성읍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어린 아이나 노인 할 것 없이 사로잡아,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끌고 갔다.3 다윗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 성읍으로 들어와 보니, 성은 불타 버렸고, 아내들과 아이들이 모두 사로잡혀 갔다.4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목놓아 울었다. 모두들 더 이상 울 힘이 없어 지칠 때까지 울었다.5 다윗의 두 아내인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인 아비가일도 사로잡혀 갔다.6 군인들이 저마다 아들딸들을 잃고 마음이 아파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할 정도였으니,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7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말하였다. “어서 나에게 에봇을 가져다 주시오!”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 가져오니,8 다윗이 주님께 문의하였다. “제가 이 강도들을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틀림없이 따라잡고, 또 틀림없이 되찾을 것이니, 추격하여라!”

 

1. 아말렉의 공격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장정들은 블레셋 대 이스라엘 전쟁에 다 나갔다.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의 가족들만 시글락에 남았다. 

아말렉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민족은 약자를 공격하는 것이 특기다.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행렬 뒤에 쳐진 연약한 사람들을 공격했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했다. 

아말렉은 전투력이 없는 사람들을 붙잡아 자신들의 노예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다윗 및 병사들이 없는 틈을 타 시글락을 공격한 것이다. 

 

아말렉의 비열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와 노인들을 끌고 가면서 윽박지르고 때리고 저주한다. 

다윗의 두 아내도 죽을 목숨이다. 

아비가일은 최근에 다윗과 결혼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녀는 지혜와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무자비한 힘과 폭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전령을 보내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지만, 전령으로 쓸 사람조차 없었다. 

 

 

2. 다윗의 믿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큰 전쟁을 피했고, 이제 집에서 쉬면 되는 줄 알았다. 

시글락이 저 멀리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성을 봤을 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빨리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다. 

성읍은 불타고 사람들은 사라졌다. 

말밥국 자국과 흔치 않은 방패의 문양을 보고 금방 알아챘다. 

아말렉이다!! 

곳곳에서 대성통곡이 들린다. 

연로하신 부모님, 아내, 그리고 어린 아이들까지 죄다 사라졌다. 

시체가 거의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우리 쪽에서 항복을 했고, 그래서 모두 사로잡혀 간 걸로 보인다. 

군인들 사이에 큰 동요가 일어난다. 

다윗을 저주하는 부하들이 늘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다윗을 돌로 치자라는 말도 들린다. 

 

다윗이 이제까지 겪었던 그 어떤 위기보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것이 내부의 분열이다. 

신뢰를 잃은 장군은 곧 죽을 운명이다. 

다윗은 일생일대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하나님을 더 굳게 의지한다. 

그 방법 밖에 없다. 

 

다윗이 점점 싫어진다. 

아니 그의 존재가 싫다가 아니라 그의 삶이 너무 고달프다. 

다윗처럼 살고 싶지가 않다. 

좀 평온하게 살 수 없는가!

 

지인의 딸은 벌써 세 번째 암 발견이다. 

고난의 연속이다. 

눈물이 가리다가 메마른다. 

그 아이와 부모의 마음에 흐느낀다. 

고통스런 현실이 차갑다.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탄식이 깊어진다. 

 

주님! 도우소서. 

 

[오늘의 기도]

가족을 송두리째 잃어 버릴 때 다윗과 그 부하들이 느꼈을 고통과 아픔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위로를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겨낼 힘을 공급하소서. 

 

대선이 코앞입니다. 

다시는 윤석열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나라를 지켜주소서. 

평화를 만들어 북한과 그 너머에 있는 땅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꿈꾸게 하소서.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소서. 

건강한 몸과 맘으로 이 세상을 섬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5월 20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8 사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고 변장한 다음에, 두 신하를 데리고 갔다. 밤에 그들이 그 여인에게 이르렀는데, 사울이 그에게 말하였다. “망령을 부르는 술법으로,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사람을 나에게 불러올려 주시오.”9 그러나 그 여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것 보시오. 사울이 이 나라에서 무당과 박수를 모조리 잡아 죽인 것은, 당신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당신은 나의 목에 올가미를 씌워,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10 사울이 주님의 이름을 걸고 그 여인에게 맹세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지만, 당신이 이 일로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을 것이오.”11 그 여인이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누구를 불러올릴까요?” 사울이 대답하였다. “나에게 사무엘을 불러올리시오.”

 

12 그 여인은 사무엘이 올라온 것을 보고, 놀라서 큰소리를 질렀다. 그런 다음에, 그 여인은 사울에게 항의하였다. “사울 임금님이 몸소 오셨으면서도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13 왕이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네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땅 속에서 영이 올라온 것을 보고 있습니다.”14 사울이 그 여인에게 물었다. “그 모습이 어떠하냐?” 여인이 대답하였다.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겉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것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려 절을 하였다.15 사무엘이 사울에게 물었다. “당신이 왜 나를 불러올려 귀찮게 하시오?” 사울이 대답하였다. “제가 매우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지금 저를 치고 있는데, 하나님이 이미 저에게서 떠나셨고, 예언자로도, 꿈으로도, 더 이상 저에게 응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이처럼 어른을 뵙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16 사무엘이 책망하였다. “주님께서는 이미 당신에게서 떠나 당신의 원수가 되셨는데, 나에게 더 묻는 이유가 무엇이오?17 주님께서는, 나를 시켜 전하신 말씀 그대로 당신에게 하셔서, 이미 이 나라의 왕위를 당신의 손에서 빼앗아 당신의 가까이에 있는 다윗에게 주셨소.18 당신은 주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소.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늘 당신에게 이렇게 하셨소.19 주님께서는 이제 당신과 함께 이스라엘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실 터인데, 당신은 내일 당신 자식들과 함께 내가 있는 이 곳으로 오게 될 것이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군대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실 것이오.”

 

NASB

Samuel said, “Why then do you ask me, since the Lord has departed from you and has become your adversary(16절)?

 

주석 

9-10절. 사울이 무당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이야기의 의도는 강령술과 같은 풍습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습니다. 다만 사울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IVP 성경주석, 434쪽).

 

1. 무당 1인칭

당황스럽다. 

갑자기 고위 관료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 내라고 했다.

그건 이 나라에서 불법이다.

사울 왕이 무당과 박수를 모조리 잡아 죽였다. 

그 박해로 인해 나의 유일한 친구도 모진 고문 끝에 죽었다. 

알고 있는 모든 무당과 박수를 말하라고 했단다. 

나는 산속 깊이 피신했으며 겨우 살아 남았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이 사람들이 나를 찾아 왔단 말인가? 

 

우리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다.

그럼에도 박수와 무당의 역할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종종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길흉화복을 물었다. 

내가 가진 영험한 능력, 빠르고 정확한 직관을 가지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웠다.

하나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분은 즉각적으로 대답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개개인의 소망에 대해 혹은 개개인의 길흉화복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나를 어렵사리 찾아온 이들도 여러 가지 걱정이 있어서 왔을 것이다. 

가능하면 내 정체가 들키지 않아야겠지만, 이왕 이렇게 알려진 이상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당신들은 왜 나에게 올가미를 씌워 죽이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렇다면 믿을만 하다.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내가 당신에게 누구를 불러올릴까요?”

사무엘!!! 

이건 장난이 아니다!!!

 

2. 그 때나 지금이나

말씀을 보니 그 때나 지금이나 참 비슷하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찾거나 토속 신앙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당을 찾아가 점을 본다. 

영험한 신을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사주를 보고 길흉화복을 예언한다. 

사탄과 귀신이 좋아하는 것을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나의 세계관에서, 인간 영혼의 탈을 쓴 사탄의 졸개들이 신이랍시고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어서 예수님 품에 안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은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곳이 영원히 고통받는 불지옥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최소한 그곳은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어서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입증해야 하는 곳이다. 

살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 공의, 평화, 이해가 넘치는 곳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몸의 부활이 일어나고 영혼과 몸은 다시 연결된다. 

나의 세계관은 현재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물론 사후 세계에 대해, 그리고 영혼에 대해 다양한 신학적 이론이 있는 것을 안다. 

사실 어떤 것도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예수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을 가능하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비유가 실재를 100% 반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가져야할 세계관을 의도하셨다. 

 

무당들은 사탄들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영이 함부로 왔다갔다 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많은 경우 사탄의 속임수라고 본다. 

사탄은 통계치를 가지고 미래를 내다본다. 

그리고 사람을 속여서 자신에게 예속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려야 한다. 

그럼에도 사탄에게 속아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권사 장로라는 사람들이 그런 행위에 빠져 있다. 

통탄할 일이며, 사실 그런 경우 직분을 빼앗아야 하건만, 교회는 치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참으로 문제다. 

 

최근 윤석열이나 한덕수를 보면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정말 제멋대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에 치를 떤다. 

진짜 그리스도인의 출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무당들도 구원해 주소서. 

그들이 더는 사탄에게 속아서 자기와 남을 다 속이는 행위를 멈추게 하소서.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게 하소서. 

성경 속에서 답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하소서. 

제멋대로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재단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게 하소서. 

 

오늘의 만남 속에서도 즐거움과 의미가 넘치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참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이 땅에 머물며 떠돈다고 보지 않습니다. 대신, 죽은 자의 영혼은 하나님의 정하신 곳으로 간다고 믿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관점에서 죽음 이후 영혼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1. 죽음 직후: 영혼은 육체를 떠나 특정한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로 들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의 영혼은 즉시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된 장소(낙원 또는 천국)로 옮겨져 최종 부활과 심판을 기다립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구절(누가복음 23:43) 등을 근거로 듭니다.

믿지 않는 자의 영혼은 심판을 기다리는 다른 장소로 간다고 봅니다.

2. 최종 부활 및 심판: 세상 끝날에 모든 사람이 육체와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3. 영원한 상태: 심판 결과에 따라 최종적으로 천국 또는 지옥이라는 영원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이 땅을 떠돌아다니거나 산 자에게 나타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죽은 자와 관련된 현상들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통해 사무엘의 영을 불러낸 사건 같은 경우는, 그것이 정말 사무엘의 영이었는지, 혹은 다른 영적인 존재(예: 악한 영)의 활동이었는지에 대해 신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이러한 신접한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부정적으로 봅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구천을 떠돈다'는 개념을 성경적 가르침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대신 영혼은 죽음 이후 즉시 정해진 상태로 옮겨진다고 가르칩니다.

 

2025 05 19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주님, 내가 주님께 피하오니, 내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나를 건져 주십시오.2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속히 건지시어, 내가 피하여 숨을 있는 바위, 나를 구원하실 견고한 요새가 되어 주십시오.3 주님은 진정 나의 바위, 나의 요새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4 그들이 몰래 쳐놓은 그물에서 나를 건져내어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피난처입니다.5 주님의 손에 나의 생명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이신 주님, 나를 속량하여 주실 믿습니다.6 썩어 없어질 우상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미워하시니, 나는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7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주님은 나의 고난을 돌아보시며, 영혼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8 주님은 나를 원수의 손에 넘기지 않으시고, 발을 평탄한 곳에 세워 주셨습니다.9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쳐,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몸과 마음도 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10 나는 슬픔으로 힘이 소진되었습니다. 햇수가 탄식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근력은 고통 속에서 말라 버렸고, 뼈마저 녹아 버렸습니다.11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한결같이 나를 비난합니다. 이웃 사람들도 나를 혐오하고, 친구들마저도 나를 끔찍한 보듯 합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이마다 나를 피하여 지나갑니다.12 내가 죽은 사람이라도 것처럼,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습니다.13 많은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사방에서 협박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명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밉니다.14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NIV

Keep me free from the trap that is set for me, for you are my refuge(4).

 

1. 우상을 미워하시는

시인은 주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주님의 구원하심, 피난처 되심이 절실했다. 

안팎으로 고난이 심하니 어쩔 수 없다. 

그 와중에 그는 하나님의 선호를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상을 미워하시는 분이시다.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썩어 없어질 것들이다. 

진정한 구원을 만들 수 없는 존재다. 

사람들이 가진 두려움이 형상화된 것이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응축되어 숭배의 대상을 탄생시켰다. 

그 두려움은 사실 사탄이 제공한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의해 압제당하는 히브리 민족들을 구출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극복하기를 요청하신다. 

두려움에 가두려는 우상을 버리길 원하신다. 

 

우상은 중독을 일으킨다. 

두려움으로 시작된 우상에 대한 의존은 중독과 숭배를 낳는다. 

이성적, 상식적, 합리적 생각과 논리는 점점 배제된다. 

사람의 감정을 이리저리 흔들어 놓아 결국 중독에 빠지게 만든다.

가스 라이팅의 원조는 우상 숭배였다. 

하나님은 중독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현실의 영성을 바라신다. 

일상을 잘 살아내어 사람과 자연에 조화롭고 평화로운 환경이 만들어지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중독에서 사람들을 빼내어 자유로운 의지를 발휘하는 존재들로 만드신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신다. 

그분은 우상을 미워하신다. 

 

2. 비난 받을 용기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심지어 사랑해도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수 있다. 

시인은 8-14절까지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 고통받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시가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라고 한다면, 해당 부분은 너무 처절하고 개인적이다. 

이 노래는 다윗만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성가대의 노래를 듣거나 불렀다. 

원수의 손, 울다 지쳐 시력조차 잃다, 햇수가 탄식 속에서 흐른다, 근력이 마르고 뼈마저 녹았다…등의 표현을 보면 시인이 겪는 고통의 깊이가 얼마큼인지 알게 된다. 

사람들의 비난과 협박이 끊이질 않는다. 

대적자들이 시인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음모와 전략을 세운다.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 덕분에 항상 평온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많은 시간동안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협박을 받으며 살았다. 

다윗 자신도 전장의 장수로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니 당연히 많은 적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기 마련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비난 받는 경우가 있다. 

어찌보면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난 받는 것이 불가피한 과정일 수 있겠다. 

나는 오랫동안 비난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만큼 비난에 약하다. 

아마도 비난 받을 용기가 별로 없을 것이다. 

한 두 사람이라도 비난 하는 경우에 내면에 큰 상처로 남아 쩔쩔 맬 것이다. 

목사로서는 어쩌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최선의 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운동가로서는 비난 받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운동가는 이상을 향해 움직이는 사람이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복지부동의 사람들을 깨워서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 

그러니 비판과 비난이 찾아 올 수 있다. 

그걸 못 견디면 운동을 할 수 없다. 

목사는 그저 힘들고 지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나고 도우면 된다. 

그러나 운동가는 저항하는 사람들을 밀고 끌고 당겨야 한다. 

난 어디쯤 있는가?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저는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비난과 비판에 금방 위축되고 자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찌보면 타인의 비난과 비판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도가 아닙니다. 

무조건 다른 사람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르지 않습니다. 

찬찬히 비판의 내용과 의도를 잘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러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담대해야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성적으로 여유있게 반응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대적자들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저도 비판에 유연하게 대처하게 하소서. 

소명을 향해 끝까지 운동을 펼치셨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하게 하소서. 

목사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가셨던 운동가의 삶도 포기하지 않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 05 16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8 바로 기간에,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습격하곤 하였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수르 광야와 이집트 국경선에 이르는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9 다윗은, 그들이 사는 지역을 때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도 살려 두지 않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옷을 약탈하였다. 약탈물을 가지고 아기스에게로 돌아가면,10 아기스는 으레그대들이 오늘은 어디를 습격하였소?” 하고 묻고, 그럴 때마다 다윗은, 유다의 남쪽 지역을 털었다느니, 여라무엘 족속의 남쪽 지역을 털었다느니, 또는 족속의 남쪽 지역을 털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대답을 하곤 하였다.11 다윗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죽이고 가드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그들이 다윗의 정체를 알아, 다윗이 그런 일을 하였다고 폭로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지역에 거주하는 동안, 언제나 이런 식으로 처신하였다.12 아기스는 다윗의 말만 믿고서,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서 그토록 미움받을 짓을 하였으니, 그가 영영 자기의 종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 그럴 즈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 쳐들어가려고 모든 부대를 집결시켰다. 그러자 아기스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귀관이 나와 함께 출정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아오. 귀관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직접 출정하시오.”2 다윗이 아기스에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종이 무엇을 있는지, 임금님이 아시게 것입니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좋소! 귀관을 나의 종신 경호대장으로 삼겠소.”

 

주석

8. 블레셋 가드의 성읍이었던 시글락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했지만, 다른 나라의 국경과도 가까웠습니다. 다윗은 이런 지리적 입지를 이용해 유대의 대적이자 블레셋의 대적이기도 그술, 기르스, 아말렉 등을 습격했습니다(IVP 성경주석, 432).

 

1. 그술 사람

다윗의 군대가 쳐들어 온다. 

그런데 방향이 영 다르다. 

이스라엘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 땅에서 올라오고 있다. 

척후병과 세작들을 통해 알아본 결과 다윗은 현재 블레셋 가드 지역 시글락에 머물고 있단다. 

다윗이 블레셋에 투항을 했단다. 

믿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철천지 원수였다. 

어떻게 갑자기 블레셋의 아기스에게 투항했단 말인가? 

문제는 그가 이스라엘서 오든, 블레셋에서 오든 전투 후에 한 사람도 남기지 않는다는 첩보다. 

욕이 나온다. 

전투를 하자는 건지, 말살을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끝까지 항전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죽으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소문이 무섭긴 하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성읍을 떠났다. 

전의를 상실한 사람들이 산속으로 피신했다. 

아예 다른 성읍으로 도망하기도 했다. 

남은 사람으로 과연 전투를 수행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다윗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무자비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다윗의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신이신가? 

왜 우리를 이렇게 괴롭시는가? 

 

2. 어려운 질문

오늘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다윗의 처신일 것이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그러나 그술, 기르스, 아말렉 사람들 입장에서는 다윗과 하나님이 너무 미울 것 같다. 

도대체 왜 자신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느냐는 질문이 터져 나올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오래 전에 마무리 되었고, 지금은 사사시대를 지나 왕정으로 이어졌으니, 이방 민족들을 이렇게까지 몰살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로 받아들이기가 솔직히 어렵다. 

 

다윗은 아기스에게로 가지 말아야 했다. 

모세처럼 광야로 들어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딸린 식구들과 부하들의 식솔들도 있으니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자신들이 살려고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예수님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예수님은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고 하지 않으셨나! 

다윗이 예수님의 작은 모델이라는 말도 지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다윗을 통해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열심, 잘못을 회개함 등이다. 

그러나 절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것도 있다. 

분노, 살상, 간음, 생존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음 등이다. 

차라리 과거 아브라함처럼 과거 야곱처럼 멀리 이주하는 것이 답이 아닐까? 

팔레스타인을 넘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는 것이 답이 될 수도 있다. 

전쟁과 살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모험으로 그의 열정을 바꿀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으니, 나중에 사울이 죽은 후에 다시 돌아오면 된다. 

한동안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땠을까? 

 

[오늘의 기도]

비가 옵니다. 

질문도 많고 의문도 깊어집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당신이 주신 말씀들 속에 계속 거합니다. 

그러니 질문도 생기는 겁니다. 

주님, 당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구약의 단편적인 에피소드에서 하나님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구약의 편집자들이 다윗 편에서 이야기를 구성했는데,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 분별력을 허락하소서. 

어떤 위대한 인물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다윗에게 당신의 성전 공사를 허락하지 않았는지 점점 이해가 됩니다. 

 

쏟아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주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가 그런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