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07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2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누군가가, 사울이 갈멜로 가서 승전비를 세우고 나서, 거기에서 떠나 계속 행진하여 길갈로 내려갔다고 전해 주었다.13 사무엘이 사울이 있는 곳에 이르니, 사울이 그를 보고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님의 명령대로 다 하였습니다.”14 그러자 사무엘이 물었다. “나의 귀에 들리는 이 양 떼의 소리와 내가 듣는 소 떼의 소리는 무엇입니까?”15 사울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아말렉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우리 군인들이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가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진멸하였습니다.”
16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었다. “그만두십시오! 지난 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내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울이 대답하였다. “말씀하십시오.”17 사무엘이 말하였다. “임금님이 스스로를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던 그 무렵에, 주님께서 임금님께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이 되신 것이 아닙니까?18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전쟁터로 내보내시면서, 저 못된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들을 진멸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고 하셨습니다.19 그런데 어찌하여 주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면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주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시는 대로 전쟁터로 나갔고, 아말렉 왕 아각도 잡아왔고, 아말렉 사람도 진멸하였습니다.21 다만 우리 군인들이 전리품 가운데서 양 떼와 소 떼는 죽이지 않고 길갈로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진멸할 짐승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온 것입니다.”
22 사무엘이 나무랐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23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주석
23절. ‘거역하는 것’과 ‘고집을 부리는 것’은 모두 자신의 주장이나 행동을 강요하는 것과 관련된 표현이다. 사무엘은 이것을 우상 숭배와 연결한다. 사울은 우상 숭배자들처럼 예물로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했다(IVP 성경배경주석, 434쪽).
[오늘의 묵상]
오늘 본문을 보면서 첫 인상은, ‘하나님의 요구가 과하다’이다.
아말렉 사람들 모두와 그들의 소유 모두를 완전히 다 파괴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과연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적합한가?
사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의 대부분의 명령을 잘 따랐으며, 다만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서 양 떼와 소 떼를 남겨서 가져 왔을 뿐이다.
이 정도면 사울의 마음 씀씀이에 대해 하나님이 칭찬해주셔야 되는 것은 아닌가?
사울이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을 이와 같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화를 내실 일인가?
이런 질문들이 올라 온다.
매번 이런 질문들을 던질 때마다 나는 하나님 편에서 그분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입장이었다.
목사니까 설교자니까 당연히 그래왔다.
혹은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서 속끓이지 않으려면 성경 저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허나 신학의 실험실에서는 조금 더 내 감정과 인상에 솔직해 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그간의 실수를 만회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을 수 있다.
블레셋과의 전쟁 전에 제사장 사무엘이 늦게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제사를 올린 적이 있었다.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엄청나게 꾸지람을 받는다.
사무엘상 13:13-14_13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주님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14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께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런 꾸지람에 대해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충동이 컸을 것이다.
전쟁의 전리품을 챙기는 것 또한 매우 상식적이며, 당시 병사들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군사들의 사기를 충전하는 것은 왕으로서 매우 합당하고 당연한 행동이었다.
허나 하나님은 다르게 생각하셨다.
이 전쟁은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심판이 목적이었다.
진멸 전쟁, 즉 아말렉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 전쟁의 의도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것으로 하나님은 화를 내셨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질문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과거 사건에 대해 후세대가 벌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벌써 몇 백년 전에 있었던 사건, 즉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 행렬 끝의 사람들을 공격한 치졸한 아말렉 사건을 이제 와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과하지 않나?
당시에 벌하면 될 일이지, 이제 와서 모든 아말렉 사람들을 죄다 죽이라고 하시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에도 어울리지 않고 사실 정의의 하나님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원래 그런 분이며, 어떤 경우에도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 답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저항하고 싶어진다.
사무엘 꾸지람의 취지가 그렇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90점짜리 순종은 왜 순종이 아니란 말인가?
현실적으로 남는 장사를 하겠다는 것은 현명한 것이 아닌가?
예수님도 그러셨다.
불의한 제물로 친구를 사귀는 자가 현명하다고 말이다.
누가복음 16:9_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물론 누가복음에서 예수님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이다.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재물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런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음에도 해당 구절은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100점짜리 조언은 아닌 듯 싶다.
‘정직하게 모은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가 100점이다.
그러니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꾸지람에 저항감이 생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다.
특히 신약 성경 속 예수님의 말씀을 비중있게 다루며 순종하고 싶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나에게 참으로 도덕적이며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구약에서 보이는 모순이 비교적 적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자비롭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시키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과연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가?
당신의 영광이 허물어지는 것에 대한 인내?
예수님의 자기 희생에 비하면 구약의 하나님의 희생이라는 것은 그분의 명예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신약 속 예수님의 말씀에 더 귀기울리고 싶다.
구약은 다루기 참 껄끄러운 본문들이 너무 많다.
오해하지는 마시라.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임도 믿는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임도 믿는다.
그렇게 구약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구약에서 묘사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묵상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다르다는 이단 교설을 따르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선을 다해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마음이다.
다만, 불편한 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그 불편을 나의 신학 실험실에서 계속 다뤄볼 계획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아 가겠다.
불편함과 저항감을 안고 살아가겠다.
그것이 내가 속한 인류와 확연한 차이를 갖고 계신 신에 대한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라고 믿는다.
불편하기 때문에 버리거나 떠나지 않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구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행동하신 것은 저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불편하고 저항감이 올라옵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안 했을 것 같다는 말씀을 감히 드립니다.
사울에게 좀더 기회를 주셨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인간 왕에게 좀더 관해하셨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많이 관대하셨잖아요.
자기의 충직스런 부한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다윗을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사실 죄의 크기로 보자면 이 죄악이 더 큰 것 아닌가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이 저항감에 머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주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도와 주세요.
주님의 말씀과 행동과 결정에 대해 더 납득하도록 도와 주세요.
이 모든 불편과 저항감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에 대해 큰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저를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더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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