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09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니,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입니다.

 

15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행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고 이 말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17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면 삯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못해서 하면, 직무를 따라 한 것입니다.

18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심정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왜 이리 격하게 반응하는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의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상당히 강력한 공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어떤 공격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다만, 바울은 왠지 억울해하는 느낌이다. 

그동안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며 살았는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왜 그런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까?”라는 비아냥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사도들도 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으면서 사역하고 있는데, 당신은 무엇때문에 그런 것을 마다하고 이제와서 순전한 척하면서 자신의 영적 권위만 내세우는 겁니까?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헌신하라고 했나요? 

받을 것은 받고, 쓸 것은 쓰면서 살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자기 기준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건가요? “

등등… 

참 여러 가지 말들이 오고 갔을 성 싶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 입장도 참 비참해보인다. 

주변 사람들이 미리 알아 주면 참 좋은데, 그렇지가 않은가 보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바울의 이중성과 위선을 공격했을 수도 있다. 

왜 여기에서는 이말하고 저기에서는 저말하나요? 

이런 식의 공격 말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맞춰주는 스타일이었다. 

그들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메세지가 조금씩 바뀌었다. 

 

20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목적은 분명하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공감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행동과 메시지가 변했다. 

아마 이것이 공격 포인트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일관성이 없다 등의 공격 말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분명한 자기 기준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 중에 구원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족한 것이었다. 

사회문제, 외교문제에 날까롭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도리어 교회의 하나됨, 특히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의 하나됨에 대해 극렬하게 주장했으나,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의 말은 오롯이 복음이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하게 하는가에 집중되었다. 

 

그러기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 최소한 재정적인 측면에서는 독립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누구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스스로 벌어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절제하면서, 달리기 연습하듯이, 경주하듯이 그렇게 그의 일생을 달려 온 것이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본문이다. 

바울을 무작정 본받기에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그의 태도는 여전히 울림을 준다. 

복음에 대한 열정, 그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태도… 

그런 태도가 여전히 많은 경우 필요하다. 

교회를 교회답게,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하는 것은 상식적 기준을 넘어서는 헌신과 사랑이 기본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절제하고 끝까지 그 일을 하기 위해 연습한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그 목표를 향해 절제한다. 

그리고 그런 바울의 글은 초기 교회에 영감을 주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힘이 된다. 

우리 공동체도 이런 열정의 공간, 헌신의 공간으로 재탄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통스런 순간을 넘어서서, 절제하고 훈련해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주도하는 운동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헌신, 순종, 희생, 용서… 이런 단어들이 힘을 못 쓰는 공동체는 실제로는 오래가지 못한다. 

조직이 되어 현상 유지에 혈안이 된다. 

비전을 만들기가 어렵다. 

비전이 없는 공동체는 기독공동체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과연 어떻게 지금 시대에 헌신, 순종, 희생, 용서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다시 한 번 자문하게 된다. 


주님, 

헌신, 희생, 순종, 용서… 

이런 단어들이 힘을 얻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공정, 형평, 기준, 처벌… 

이런 단어들이 힘을 얻는 공동체는 이미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조직에 다를 바 없습니다.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서 헌신, 희생, 순종, 용서를 실천하게 하시고, 

자연스레 공동체 문화가 되게 하소서. 

물론 그렇다고 공정, 형평, 기준, 처벌이 사라진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권한이 많을수록 헌신과 희생이 우선되게 하소서. 

약자에게는 더욱 공정하고 형평성에 맞는 대우가 일어나되, 사실 그 이상으로 선대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강자와 약자를 구분했지만, 결국 공동체 전체는 헌신, 희생, 순종, 용서의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일에 쓰이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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