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10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15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어린 떼를 먹여라.”

16예수께서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쳐라.”

17예수께서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먹여라.

18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것이다.”

19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0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베드로가 제자를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주님,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2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23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24 모든 일을 증언하고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예수께서 하신 일은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기록한 책들을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예수님은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십니다(15-17). 예수님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에 싸여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고백하며, ‘ 양떼’(주님의 교회) 돌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며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을 알아갑니다(18-19).

 

베드로는 자신과 함께 있는 요한은 어떻게 될지를 묻습니다(20-21). 주님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은 너와 상관없으니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22). 주님은 사랑 가운데 사람을 향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부르십니다.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자가 되길 기도합시다.

 

——

 

호숫가 산책 

 

1. 나를 따라라

물고기 잡던 어부들을 다시 부르셨다. 그들에게 아침을 직접 만들어 주셨다. 

이제 예수님은 서서히 일어나셔서 걷기 시작하신다. 

여러분, 우리 함께 아침 산책이나 할까요?’

모두들 부시시 일어난다. 밤새 물고기 잡느라 고생한 몸은 천근만근이다. 

아침을 먹으니 피곤이 몰려 온다.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아 끌던 순간의 희열은 잠시극도의 피곤이 눈꺼풀을 잠근다. 

그래도 예수님을 따라 걷는다. 

 

20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베드로가 매번 그랬듯 예수님 바로 곁에 붙어서 걷는다. 

뒤로 요한과 다른 제자들이 듬성듬성 따라 걷는다. 

혹여라도 예수님이 무슨 말씀이라도 하실까 집중하며 아침 물새들의 퍼드럭 소리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침묵이 흐르고, 발걸음 소리만 호수의 잔잔한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리듬을 만든다. 

 

, 드디어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나를 사랑하느냐?”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평소에는 질문이 아니라 가르침이 있었다. 

자신이 하신 일에 대한 설명, 죽음과 부활의 과정과 경험을 나눠주실 알았다. 

예전에도 엄청난 기적이 있으신 후에 항상 기적의 의미를 말씀해 주셨었다. 

그리하실 알았다. 

그런데, 갑작스런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내면은 패닉이었다. 

주마등처럼 지난 주가 뇌를 스쳐지나간다. 배신, 저주, 도망, 은신, 두려움

베드로는 대답을 해야 했다. 

비록 자신의 잘못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렇게 여전히 그분의 곁에서 다른 제자들 보다 밀착해서 따르고 있다. 죄송스럽지만, 그래서 피하고 싶지만, 그래도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간의 행동과 자신의 말의 괴리가 스스로를 괴롭힌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이라 알려주셨던 그분의 수제자로서 과연 나는 사랑을 알기나 하는 걸까? 수많은 추종자들 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따랐던 나는 과연 정말 예수님을 사랑했었나? 예수님의 인기에 묻어 나도 마치 수퍼스타라도 착각했던 것은 아닌가?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고뇌에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어린 양떼를 먹여라 

동안 내가 했던 일을 너도 해라. 물고기를 잡는 일이 아니라 원래 너에게 주어졌던 사명, 사람을 낚아서 그들을 섬겨라. 방금 내가 아침을 만들어 주었듯, 우리가 그동안 보았던 숱한 우리의 추종자들을 니가 먹여라. 내가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식사를 대접했듯이,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핵심 원리를 가르침으로 영적 식사를 대접했듯이, 이제 베드로 니가 일을 하여라.’

 

말씀도 벅찬데, 번이나 반복하신다. 

사이사이 침묵이 흐를 , 베드로의 심장은 요동친다. 내가 계속 예수님 곁에서 보조를 맞춰 걸어 갈 수 있나? 피하고 싶은 생각호수 건너편 먼산을 바라보고 싶다. 해가 뜬다. 새로운 사명이 그에게 주어졌다. 호수에 비치는 아침 햇살의 눈부심이 그의 사명을 띄운다. 

 

나를 따라라

 

 

2.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에 다른 제자들도 혼란스럽다.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베드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것인가? 피곤한 눈이 번쩍 뜨인다. 요한은 질문에 예민하다. 사실 사랑에 대해서는 베드로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자신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예수님도 아신다. 마지막 만찬 , 예수님 바로 곁에서 그분의 품에서 속삭였던 장본인이다.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도대체 누군가요?” 

 

요한은 스스로를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0)라고 칭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던 하다. 예수님도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시지 않았던가! 저자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와 요한1, 2, 3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사랑인데, 그건 아마도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은 베드로의 대답에 민감했다. 과연 여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있을까?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듣는 모습을 보았다. 역시 베드로가 수제자였다. 

 

베드로의 배신과 두려움을 보았던 그로서는 약간 실망이었다. 베드로가 아니라, 자신에게 수제자의 지위를 수도 있었다. 요한에게도 아니 다른 제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말씀을 주실 있었다. 그러나 유독 베드로에게 그것도 번이나 주위의 모든 제자들이 듣도록 강조하며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서운함내가 사랑하는데베드로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데무덤으로 달려갈 , 전력질주 , 질주의 속도의 차이는 체력이 아니라 사랑에서 건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베드로의 노년과 죽음에 대해 예언할 , 베드로는 갑자기 요한을 의식한다. 

"요한은 어떻게 되나요?" 

베드로의 질문에 요한은 황당하다. 

나를 걸고 넘어지는가? 

대화가 불편하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사도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아 예수님을 증언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깊이 알게 되었다. 호숫가의 산책을 떠올리며 요한복음을 쓰거나 대필을 시킬 , 그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양떼를 끝까지 사랑하고 먹이고 가르쳐야 하는 사명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었다. 

당시에는 베드로와 모종의 경쟁 관계였지만, 돌아보니 우리는 가족이었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랑하느냐?” 질문은 충성 경쟁을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많이 형제와 이웃을 섬기겠느냐라는 질문이었다. 

예수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제자들이 하나되어 세상을 섬기는 (17:21) 열심을 내겠냐는 질문이었다. 

요한은 뒤늦게 깨닫는다. 베드도로 마찬가지다. 

 

비교와 경쟁이 화합과 섬김으로 나아가는 ,

그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느냐?”

 

——

 

산책을 권하시는 예수님께 박수를 드립니다. 

당신과 걷는 길을 동경합니다. 

커피 들고 함께 걷길 소망합니다. 

조곤조곤 대화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새기기 원합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 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양떼를 먹이길 원합니다. 

주님, 저와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년 04월 09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그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2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3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밤에는 고기를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4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7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저분은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8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탄 채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백 자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9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11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3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

14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기위해 배를 타고 나갔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웁니다(1-3절). 제자들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면 고기를 잡게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 말을 따라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4-6절). 그 때 요한은 그 말을 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아채고 베드로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께로 나아갑니다(7절).

 

빈 그물을 마주하며 실패감에 젖어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곳에서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숯불을 피우고 떡과 생선을 구워 주시는 예수님을 더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9-14절). 우리 역시 인생의 여정 속에 실패감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은 우리 곁에 더 가까이 계십니다.

 

——

예수님과의아침식사

 

1. 회귀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경험은 충격적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대화도 나누고 파송식도 가졌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파송식이 끝나고 예수님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셨다. 

마가의 다락방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기쁨과 환희…희망과 열망으로 가득찼다. 용서와 사랑의 메세지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세상으로 제자들을 파송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제자들에게 세상은 어디인가? 

예루살렘 성 안인가? 아니면 로마인가? 지중해의 다른 나라들인가? 

제자들에게 세상은 바로 갈릴리 바다, 자신들의 고향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고향으로 돌아왔다. 

 

예수님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곳,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 들린 사람들을 낫게 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말씀을 가르쳤던 곳,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 다 같은 지역의 이름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엄청 큰 갈릴리 호수다. 

이곳이 예수님이 세상으로 보냄받아 처음으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곳이다. 

 

갈릴리로의 회귀는 제자들의 자연스런 결정이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과의 첫번째 미션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첫번째 미션도 이곳 갈릴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동안 제자들이 실망감에 젖어 갈릴리로 돌아왔다는 설교와 묵상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나에게 본문은 조금 다른 해석과 늬앙스를 남긴다. 

제자들은 파송받아 갈릴리로 온 것이다. 

마태는 그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것이라고 하여라”( 28:7) 
때에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28:10)

 

그렇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돌아갈 것을 명받았다. 

왜 갈릴리인가? 요한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2. 고기잡기_만선의 추억

왜 갈릴리인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 사역을 시작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생선을 잡고 있는 어부들을 부르셨다.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했던(눅 5:4-5) 바로 이 곳에서 제자들을 삼으셨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을 부르신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떠나갔던 제자들… 

무서워 벌벌 떨며 문을 걸어 잠궜던 제자들… 

그들은 이제 다시 고기잡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 제자로 부름받아야 한다. 

다시 시작하는데에 이만한 장소가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배신을 다 용서하셨다. 이미 알고 있었기도 했지만 말이다. 

부활을 의심하고, 여전히 답답해 하던 제자들도 다 이해하셨다. 

그리고 다시 부르신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3. 오병이어의 재연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실 때, 가장 충격적인 기적 중 하나가 오병이어였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셨다.

오천명의 성인 남성들을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광주리가 12개였다(요6:1-15). 

하늘의 만나를 경험했던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을 다시 보는 듯 했다. 

이 놀라운 기적의 현장이 바로 디베랴(갈릴리) 바다였다(요6:1). 

 

왜 갈릴리인가? 

이 기적의 현장에서 다시 제자들을 먹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이 눈에 들어온다. 

숯불을 피우고, 생선을 굽고 계신다. 빵도 이미 준비하셨다. 

그전에는 한 아이의 생선과 빵을 사용하셨다면, 지금은 예수님이 직접 준비하신다. 

제자들이 잡아온 물고기도 가져오라고 하신다. 직접 굽겠다는 의지를 보이신다. 

생선을 다 굽더니, 빵과 함께 제자들에게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직접 주신다. 서빙을 하고 계신다. 

13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오병이어 때는 제자들이 돌아다니며 생선과 빵을 나눴었다. 

이제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다시 등장한다. 

예수님의 말에 잡히지 않았던 물고기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힌다. 153마리… 

음식을 제공하실 뿐 아니라, 직접 요리도 하시고 서빙도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시랑하신다. 발을 씻겨 주셨던 그 제자들에게 이제는 음식도 만들어 주신다. 

다시 한 번 공급자 되신 예수님을 경험한다. 

 

이제 갈릴리에서 다시 사역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사역이 아니라 이제 제자들의 사역이다. 

물론 예수님의 공급하심으로 시작되고, 이어질 사역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해서 발도 씻기도 음식도 만들어 주었듯, 이제 제자들은 또 다른 제자들을 그렇게 섬겨야 한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다. 공급하러 오셨다. 요리하고 서빙하러 오셨다. 

그 섬김을 이제 갈릴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들은 곧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간다. 

50일간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한다. 

강력한 선교의 시작은 성령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로부터였다. 

그러나 11제자(혹은 7제자)들의 새로운 시작은 이 곳 갈릴리 바다, 예수님과의 아침식사부터였다. 

 

예수님과 아침식사를 같이 먹었던 제자들의 특권이 더없이 부럽다. 

 

——

생선을 직접 구워주신 예수님, 

주님과 아침식사를 먹고 싶습니다. 

밤새 물고기를 잡다 허기진 배를 채워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왠지 저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 같아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영적, 정서적, 지적 부족함과 탈진에 주님 주시는 음식으로, 자양분으로 채워주소서. 

그리하여 더 제 주변의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공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분노하는 청년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게 하시고, 

조금이라도 주님의 음식을 흘려보내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전국의 간사님들이 학생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일 수 있기를… 

전국의 학생리더들이 멤버들을 끝까지 시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주님과의 아침식사 시간이 더욱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08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9 , 주간의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말씀을 하시고 나서,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손을 만져 보고,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두려움 속에 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샬롬-히브리어) 인사를 받고 기뻐합니다(19-20). 주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낸 것처럼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용서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십니다(21-23). 그러나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제자들의 예수님 목격 소식을 듣고도,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없다고 말합니다(24-25).

 

예수께서 도마에게 찾아가십니다. 자신의 못자국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도마는 예수님께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드립니다(27-28).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나의 삶에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

나의 나의 하나님

 

1. 공포영화

두려움은 때로 함께 두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배가된다.

작은 공간에 모인 제자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듯이,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약식재판을 통해 그랬듯이, 자신들도 언제든지 잡아서 죽일 있다고 생각했다. 

십자가의 치욕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언제든지 다가올 있는 일이었다. 

 

마가의 다락방일 가능성이 높은 바로 공간에서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공포영화의 장면이었다. 

 

실제로 덜덜 떨고 있는 사람도 있다. 

적막이 흐른다. 

노래라도 부르고 싶지만, 혹여 들킬까봐 작은 미소조차 조심스럽다.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 때문에 혼란만 가중되었다. 

시체는 사라졌다. 

누가 가져갔을까 서로의 생각을 나눴지만, 어느 순간 말소리 조차도 끊겼다. 

두려움의 숨소리만 커져가고 가끔씩 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았다고 , 두려움을 뚫기는 어려웠다. 

그도 이제는 체념하듯 조용하다. 

용기를 북돋을 말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밥먹는 것도 곤욕이다.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다. 

먹는 내내 소화가 되지 않는다. 위장이 멈췄다. 위장의 기쁨이 사라지니 뇌가 멈추는 같다. 

나이 어릴수록 분위기에 적응이 안된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보고 싶다. 

수소문이라도 해야 같은데, 괜히 그랬다가 유대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지 모른다. 

 

2. 그리고

모두가 각자의 생각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 예수님이 등장하신다.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샬롬!!’

두려움은 평안을 해친다. 두려움은 매순간 눈치를 살핀다. 안절부절, 다음 해야할 ,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정상적인 판단 기능이 멈춘다. 

평소에 보이던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이 어느새 들어와 있었는데,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없었다. 

이해는 간다. 저녁이고, 어둑컴컴한데다 문까지 걸어 잠그고, 창문도 닫았으며, 가능하면 불이 바깥으로 새지 않게 커튼도 쳤다. 촛불에 의지하여 아른거리는 서로의 그림자만 바라볼 , 촛점을 맞춰 사람들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허기사 지금은 거실이 너무 밝다. LED 영향이다. 그때야 밤이 되면 자연시계에 맞춰 잠들어야 하는 노멀이다. 

 

예수님은 작은 공간을 거닐면서 제자들의 표정을 살핀다. 

두려움과 의문 투성이의 눈빛을 보신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신 건가? 시체는 어디로 간건가? 혹시 우리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빼돌린 것은 아닌가? 가룻유다가 배신 했는데, 혹시 이곳으로 병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아닌가? 아니 그는 배신을 하고 지랄인가?’

두려움, 비난, 욕지거리, 답답함, 의문, 원망, 후회후회두려움

 

그제서야샬롬!”

깜짝 놀란다. 적막을 깨뜨리는 평화롭고 맑은 목소리가 울린다. 지난 삼일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목소리다. 아무도 그런 맑은 하늘 높은 소리를 적이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다. 

사이에, 빛이 다락방에 가득하다.

대반전 

진짜 살아나신 것이다. 마리아의 말이 맞았다. 12제자만 있었을까? 아니다. 남자 여자 없이 예수님의 깜짝 등장에 눈물이 쏟아진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쉰다. 

 

자신의 몸만 드러내신 것이 아니다. 

어두운 마음의 기운을 그분의 숨으로 몰아내신다. 

~~ 새로운 기운이 스며든다. 

성령을 받아라

그분의 숨은 공기가 아니라 영이었다. 

하나님의 , 예수님의 , 거룩한 ,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의 영이다. 

서로 비난 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 용서할 때가 되었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미워했던 사람들, 원망했던 모든 상황들, 심지어는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비난의 말들조차, 이제는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인해 용서할 있게 되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비난을 멈추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라.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에 마음 문을 열어라. 

너희가 쉬는 숨은 공기가 아니라 이제 내가 보내는 성령이다. 

성령은 너희가 세상에 살아갈 힘과 용기다. 지혜요 사랑이다. 

성령의 숨을 쉬어라. 

 

3. 나의 나의 하나님

도마의 의문은 정당하다. 

그에게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나라도 그랬겠다. 

나에게 엄청난 영광의 순간이 빗겨갔을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의문의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셨다. 그리고 다시 오셨다. 

도마를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제자들 전체의 하나됨을 위해서다. 

저자 요한은 하나됨이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청한 것은 서로 사랑함과 하나됨이었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마지막 대제사장적 기도의 핵심도 그것이다. 하나됨 

그러니 영광의 순간을 도마를 위해 재연하셨다. 

8 동안 도마는 하나됨을 누릴 없었다. 

기쁨의 소식을 혼자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재연은 대성공이었다. 

누구도 도마처럼 직설적으로 예수님을 부르지 못했다. 

마리아는 라부니(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라고 불렀겠다. 

도마의 고백은 예수님을 따르는 후대의 모든 제자들의 교본이 되었다. 

예수나의 , 나의 하나님 

이것은 신적 고백이었다. 

예수님 직접 입김으로 성령의 숨을 주시지 않았더라도, 그곳은 성령의 숨으로 가득찬 공간이었다. 

도마는 이미 고백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다시 자기에게도 나타나주시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성령의 숨은 도마의 고백을 만들었다. 고백은 도마 자신이 만든 것으로 보기 어렵다. 

고백은 성령님의 작품이었다. 

8일간 성령님은 도마의 마음 속에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

부활의 예수님, 

성령의 숨으로 저를 채워주소서. 

제가 머무는 모든 공간을 채워주소서. 

 

사랑과 용서가 더욱 빛나는 공간이 되게 하소서.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사람을 용서하게 하소서. 

죄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도록 역사하소서.

잘못한 사람이 피해자의 치유 과정에 겸손하게 임하게 하소서. 

 

나의 나의 하나님, 

고백이 끝까지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07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1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알고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16예수께서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라부니!하고 불렀다. (그것은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8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천사들은 우는지 묻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고, 어디에 있는지 없다고 대답합니다(11-13). 마리아가 찾던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지만, 그는 동산지기로 생각하여 예수님의 시신의 행방만을 묻습니다(14-15).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익숙한 음성을 듣고 나서야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습니다(16).

 

주님은 자신을 붙잡고 있으려는 마리아에게, 형제들에게 가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전하라고 하십니다(17).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것과 예수님께 들은 말씀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18). 예수님의 부활은 슬픔과 절망에 있던 마리아에게 기쁨과 소망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어떻게 다가옵니까?

 

——

기쁨의 탄성, 라부니

 

1. 천사들의 위치 

오늘 본문엔 질문거리가 많다. 12절에 등장하는 천사들의 위치가 의아하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천사들은 무덤 속에 있는가? 천사들 명은 예수님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명은 발치에 있었다. 이렇게 앉아 있는가? 굳이 다르게 앉아 있을 이유가 있는가? 그렇게 넣은 장소도 아닐 텐데, 이렇게 자리를 잡은 것이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다. 

 

순전히 추측을 해본다. 주석들을 찾아보는 노력과 열심을 기울이지 않고, 기존 정보와 상상을 통해 추측해 본다. 

아마도 예수님의 삼베옷과 머릿수건을 벗겨 가지런히 개켜 놓은 존재가 천사들이 아니었나 싶다. 천사는 예수님의 머릿수건을 벗겨냈다. 다른 천사는 예수님의 삼베옷은 목에서부터 발까지 걷어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도운 존재들이 바로 천사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다시 찾아 달려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명확하게 증언한다. 자신들이 시신을 감싸는 옷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었으며, 그것도 명이나 되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베드로나 요한도 열심히 달렸지만, 어제 오늘 본문의 사건 전개를 재구성하면, 막달라 마리아도 상당히 많은 거리를 열심히 달렸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가서 사실을 알렸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열심히 달려가던 길을 쫓아 다시 무덤에 도착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시신 도난 사건에 대해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혼자 남아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11). 그러다가 던지시 무덤 속을 쳐다본 마리아는 깜짝 놀라게 된다. 천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절실하다. 새벽녘 마리아의 울음을 상상한다. 슬픈 울음 소리에 천사들이 등장한 것이다. 마리아의 슬픔에 대한 반응이었다. “여자여, 우느냐?”(13)

 

2. 라부니

결국 베드로도 요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제자들이 아니었다. 제일 처음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무덤 밖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던 그였다. 천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도 함께 계셨다(14). 슬픔과 눈물에 젖어 있었던 마리아는 그토록 애정하던 예수님을 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설마 예수님이라고는 상상을 못했던 며칠 전에 로마의 병정이 옆구리를 찌르던 모습을 보았던 , 몰약과 침향을 바르던 모습을 지켜봤던 , 돌무덤에 가두고 돌로 막던 모습을 봤던 , 마리아는 도저히 상상할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예수님이 마리야를 부르신다. “마리아야”(16). 

마리아야그의 이름을 부르신다. 

부르심에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다정하고 위엄있고 따뜻하고 권위있는 음성이 들린다.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의 목소리, 어투였다. 

그제서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다.

라부니”, “선생님

목숨을 눈물에 그는 보답을 받았다. 가장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라부니라고 부를 있었다. 

 

3. 부활체

오늘 본문에서 가장 궁금한 하나가 17절이다. 

 

17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사실 얼마가 지나지 않아 제자들을 찾아 만날 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자신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는, 마리아 때는 안되고 도마 때 되었다면, 사이에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단 말인가? 부활하시자마자는 아직 아버지께로 가시지 않았지만, 곧바로 올라가셨다가 다시 내려오셔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으로 정리할 수는 있겠다. 

 

그렇게 정리는 되지만, 쉽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승천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쉽게 일어날 있는 일인가? 아님 승천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통해서인가? 

여튼 질문이 많아지는 구절인 것은 확실하다. 

 

질문과는 별개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와락 끌어 안으려고 했다는 데에 만원을 걸겠다. 

애정하던 예수님을 실제 다시 보았다. 

그토록 찾고 바라던 예수님이 눈앞에 살아서 계신 것이다. 

손이라고 잡고 싶었다. 감동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슬픔의 눈물이 감동의 눈물로 더욱 강하게 흐른다. 

제자들과는 비교할 없을 정도의 드라마다. 감정의 곡선이 요동친다. 

 

예수님을 경험하고 싶다. 

더욱 그분을 사랑하고 싶다.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꾸시는 그분을 오늘 만나고 싶다. 

 

——

예수님, 나의 라부니,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여주셨던 드라마를 저에게도 보여주세요. 

슬픔으로 가득찬 시공간 속에서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도와주세요. 

 

미얀마의 시민들이 결국 수류탄을 던지게 되었답니다. 

내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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