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11. 

 

요한복음 16:5-15(새번역)

5. “그러나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서 아무도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고,

6.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8.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9.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10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11.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0. 들어가며 

- 성령하면 떠오르는 색깔은? 그 이유는?

 

4주동안 예수님의 고별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시리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인데요. 예수 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오늘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려면 이 네가지의 방법을 장착해야 하는데요, 마지막인 성령의 도우심은 이 모든걸 가능케하는 힘이 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the Helper, the Advocate)

예수님께서 가시면 보혜사께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옆에 계시면서 변호하시고 대변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동시에 모든 공간에 임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육체를 지니신 예수님은 육체의 한계를 지니고 계십니다. 3차원에 갇혀 계실 수 밖에 없죠. 그러나 성령님은 3차원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 헬라어 단어는 요한1서 2장 1절에서 예수님께 사용한 단어입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한1서 2:1). 

 

여기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과 예수님은 같은 본성을 가지고 계신거죠. 14장 16절에 보니까 ‘다른 보혜사’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1 παράκλητος는 예수님이시고요. 또 다른 παράκλητος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럼 이 παράκλητος 돕는 분, 변호사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1.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보혜사(8-11절)

먼저 그분은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이십니다. 8절입니다. 변호사 성령님은 세상이 무엇이 잘 못 되어 있는지 정확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세상을 대변하여 제자들을 고소하는 사단이라는 검사는 세상이 옳고 제자들은 그릇되었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변호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옆에서 변호하십니다. 어떻게 변호하실까요? 

사실 8-11절은 한번 읽어가지고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도 다각도로 연구하고 선배님들의 글을 읽고 학자들의 연구서를 읽으니까 그때서야 이해가 가기 시작하더라구요. 시작해봅시다. 

 

1) 죄에 대해(9절)

첫째는 죄에 대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세상이 말하는 죄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불트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이 이해하는 죄는 세상적인 표준과 이상, 즉 세상에 안전을 제공하는 것들에 반역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적인 안전망 전체를 의문시하고 또 다른 안전 장치를 열어 주는 계시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것, 그것이 진정 죄다”(Bultman). 

 

세상에서 말하는 죄는 불법적 죄와 윤리도덕적 죄로 구분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법률에 의거한 규정을 어길 때, 처벌을 받는 죄가 있겠죠. 그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지탄받게 되는 윤리도덕적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드러내는 죄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일종의 영적인 죄인데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 새로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는 겁니다. 불신, 교만, 자기중심성이 죄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신뢰와 겸손, 예수중심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세상은 불신과 교만과 자기중심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성령님은 이 죄를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이건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런 큰 윤리적 획을 그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를 이분법으로 구분해서 세상은 교회 밖이고, 그 교회 밖 세상의 죄에 대해 성령님께서 정죄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은 아주 잘 못된 생각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구역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으로 구분됩니다. 교회 밖이건 교회 안이건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세상입니다. 불신, 교만,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살아가고 있으면 그 사람이 교회안에 있건 밖에 있건 그는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결국 성령님은 그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실 겁니다. 

 

2) 의에 대해(10절)

둘째, 변호사 성령님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의에 대한 잘못을 깨우치실 겁니다. 그런데 논거가 좀 이상하지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라니요? 이게 무슨 논리입니까? 저도 이 구절에서 한참 헤맸습니다. 이 구절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로마에 팔았습니다. 결국 유대 지역를 통치하던 5대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못박았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못 박은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십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바로 부활과 승천이지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겁니다. 세상에 있으면 세상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이라고 말하고 다닐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 우편에 계십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이 증명하신 겁니다. 아버지께로 간 자가 의로운 겁니다. 모세가 의로운 거죠. 엘리야가 의로운 거죠. 그렇게 예수님이 의로운 겁니다. 

 

세상은 세상의 규정과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이죠.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를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사람들 상호간의 생명과 복지를 향상 시키는 방향으로 의로움을 정의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의롭다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온전한 인정을 받은 분이기때문이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의입니다. 

 

3) 심판에 대해(11절)

셋째로 심판에 대해서도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겁니다. 세상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예수님을 심판했습니다. 유죄 선고를 내린 거죠. 그러나 성령님은 확실히 알게 하실 겁니다.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 세상이요, 그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이라는 사실입니다. 

 

=> 프레임짜기 

이렇게 변호사 성령님은 통념과 편견을 깨부수고 완전히 새로운 재판을 만드십니다. 기존의 법정에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논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승리합니다. 세상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립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판을 다시 짭니다. 프레임을 재구축하는 거죠. 

 

평화 올림픽 vs 평양 올림픽

이런 것이 프레임입니다. 평창 올림픽 때, 남북 선수단의 공동입장을 두고 누구는 평화 올림픽이라고 했고, 누구는 평양 올림픽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을 너무 많이 배려한다고 그건 평화가 아니고 평양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체제 선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프레임 싸움입니다. 

 

사진 프레임

셀카 찍을 때, 어떤 각도로 찍어야 얼짱이 나옵니까? 

세상의 윤리적 사법적 프레임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면 세상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으로 사태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2.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보혜사(13-15절)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기도 하시지만, 더 나아가 진리로 이끄시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1) 진리 되신 예수님께로(13절)

13절을 볼까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분도 예수님처럼 앵무새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자신 맘대로 말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듣는 말씀만 하십니다. 

 

요한은 지속적으로 진리에 대해 말합니다. 그건 철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인격이신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ex) 신입생 홍보와 전도를 위해 캠퍼스에 달았던 현수막_”진리는 인격이다.”  

 

2) 예수님을 영광되게(14-15절)

결국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실 겁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죠. 성령님은 예수님의 것을 받아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14-15절이 말하는 바입니다. 

 

성령님의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개인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잘못된 영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조직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거짓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불의의 영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높아져야 합니다. 

 

베뢰아 김기동이 주장했던 성령은 거짓의 영입니다. 음란의 영입니다. 

홍대새교회를 지어 다윗도 범죄했지만 회개하니 하나님이 용서하셨더라라고 말하면서 뻔뻔히 목회를 하고 있는 전OO목사의 성령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은 성령님의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길 원하십니다. 

그외는 그냥 그리스도의 제자일 뿐입니다. 예수의 증인일 뿐입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종 어느어느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이런 종류의 설명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예수님 중심으로 그분을 신뢰하면서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3. 보혜사 성령님의 핵심 역할(요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14:26) 

 

1)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심 

보혜사 성령님의 핵심 역할은 분명합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함께 지낼때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제대로 알게 됩니다. 육성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3년 동안 아무리 말로 가르쳐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임을 바꾸고 패러다임을 쉬프팅하고 관점을 바꾸려고 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2) 신약 성경의 핵심 저자_성령님 

그런면에서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 성경의 주저자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게 하신 겁니다. 새로운 패러다임과 프레임을 장착시켜주셨습니다. 그렇게 성경이 기록된 겁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작품인 겁니다. 

 

우리가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3) 성령 충만이란? 

그럼 여러분 성령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논리에 따르면, 성령충만은 예수님의 삶과 말씀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분을 영광되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공명하고 행동이 공명하고 그분의 삶의 이미지가 공명하는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분이 영화롭게 된다면 자기 자신은 철저히 낮아져도 된다는 겸손한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4. 나가며 

- 자기중심성, 교만, 불신의 죄의 결과

자기 중심적으로 살며, 교만하게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서, 자신의 능력과 돈과 권력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뉴스를 우리는 거의 매일 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약자인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우리는 미투 운동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국가를 사유화하고 부정부패와 뇌물수수를 일삼는 권력자들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작년 3월 10일 헌법재판관들은 당시 최고 권력인 대통력 박근혜를 파면했습니다. 지금 들리는 뉴스에 따르면, 만약 헌법재판소의 결과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기각으로 나오면, 촛불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의혹이긴 하지만,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 없이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위수령을 발동해서 시민들을 진압하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겁니다. 만약 그 의혹이 사실이었다면 제2의 518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위기였습니다. 

이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성, 교만, 불신이 가져다 주는 악의 구조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의 구조를 떠받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교회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예수님은 이걸 깨고 성령 충만한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자기 중심성을 깨고, 교만을 깨고, 불신을 깨고, 예수 중심, 겸손, 신뢰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깨우치시고, 예수님께만 영광돌리기 원하시는 성령, 그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성경연구 방법이나 성경개론 같은 것을 함께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회] 

1. 성령님에 대해 혹시 편향된 생각이나 이미지로 그분을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과 성령님께 고백합시다. 성령님이 어떤 분인지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2. 그분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이해를 깨우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함으로써 예수님만을 영광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할 문제]

1. 평소에 생각하던 성령님의 이미지와 오늘 설교에서 나눠진 성령님의 이미지와 어떤 부분이 비슷하고 어떤 부분이 다른가요? 

 

2. 대한민국 법률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3. 보혜사 성령님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무엇인가요? 기존에 알고 있던 성령 하나님의 핵심 역활과 같은가요? 다른가요? 다르다면 어떤 부분이 다른지 함께 나눠봅시다. 

 

4. 성령 충만한 삶은 어떤 삶인가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영역이 무엇입니까? 

 

5.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한 결단을 기도로 표현해봅시다. 

 

*** 참고 도서

존 스토트, 성령 세례와 충만, IVP

존스토트, 성령세례와 충만, IVP

 

 

2018. 3. 4. 

 

0. 들어가며 

- 최근 나의 절실한 기도제목은? 

- 예수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성령의 도우심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세번째로 오늘은 뜻에 맞는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1. 예수님의 꼼수? 

-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4절) 

14장 14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기도하면서 이 구절을 외우고 또 외우고 읊조리고 또 읊조립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순간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하잖아~~’ 그렇게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급속도로 팽창했던 60-70년대의 신앙은 오중복음 삼중축복으로 대표되기도 하는데요. 물질과 건강의 축복이 간절했던 그 당시 서민들의 정서를 정확히 찔렀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구절도 큰 유행이었죠.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니 정말 신나는 일 아닙니까!!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보다 더 쉬운 일이죠.

 

- 정직한 사람은 안다.  

그런데 조금만 정직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 뒤에 갖다 붙인다고 해서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도 중환자실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매일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혹시 예수님의 꼼수?

그럼 오늘 성경 말씀은 포교활동, 전도활동에 유용하게 사용하라고 전해주신 예수님의 마켓팅 전략인가요? 예수님의 꼼수인가요? 그럴듯하게 말해놓고 실제는 그렇지 않는 다단계 같은 영업 전략인가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이건 구라구만. 에이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네. 초대교회에는 가능했겠지...’ 등등 여러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2. 빌립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문맥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이해는 마음에 와닿는 한구절 한구절 외우는 걸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런 성경 암송은 외우지 않는만 못합니다. 성경의 바른 이해를 방해합니다. 전후문맥을 꼼꼼히 따져야 합니다. 

 

14장을 쭉 훑어보면 일단 경험주의자 제자 도마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 물었고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죠. 목적이자 방법이 예수님이라고 그게 바른신학이라고 말씀을 나눴었죠. 이번엔 빌립입니다. 

 

1) 아버지를 보여주소서(8절)  

예수님이 ‘너희는 아버지를 이미 보았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성적이었던 빌립은 어안이 벙벙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사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한다는 예수님의 예언에 멘붕상태입니다. 베드로가 한쪽 구석에 앉아 멍때리고 있을 때, 다른 제자들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8절) 원래 요한의 제자였던 빌립은 영적인 갈망이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2) 내가 곧 아버지다(9-11절) 

그때, 약간 책망하듯이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랫동안 함께 있었는데 내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있다. 정 못 믿겠으면 내가 하는 일을 보면 알지 않겠니?’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제자들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인격이 수천년동안 이스라엘이 섬겨왔던 만군의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갑자기 여러분에게 다가가서 재림예수다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은 쉬운 결단은 아닙니다. 증인도 있고 증거도 있긴 하지만 증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 우리에게 말씀을 거십니다. ‘2000년전 역사속에 존재했던 한 인물인 예수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 믿음이 가장 먼저 필요합니다.  

 

3. “내 이름으로”(13절) 

여러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주겠다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내 이름으로’ 입니다. 이건 주술이 아닙니다. ‘아브라카다브라’ ‘수리수리마수리’ 같은 주술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문맥에서 ‘이름’은 곧 그의 영광을 구하고 정확하게 그를 위해 말하는 사람들, 정말로 그의 인증을 받은 대리인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교 마술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영적 세력을 조작하려고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성경배경주석, p. 346) 

 

1) 바른 믿음(10-11절) 

첫째, in the name of Jesus는 바른 믿음을 의미합니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른 믿음입니다. 12절 시작부분에 이렇게 이야기하시죠. ‘나를 믿는 사람은....’ 맞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속에 실존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말이 아닌 거 아시겠죠. 그정도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 역사적 실존 인물이 유대교 경전인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른 믿음이죠. 이 믿음에 도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분을 좋은 윤리적 가르침을 전하는 인류의 대스승이나 성인급으로 받아들이는 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유일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in the name of Jesus는 이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2) 예수님의 대사(12절) 

둘째, 12절을 잘 읽어볼까요. 예수님보다 더 큰 일들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병고침과 귀신이 쫓기는 현상이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일어납니다. 전 세계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됩니다. 이 제자들은 단순히 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사들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한 특사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세계 곳곳으로 증폭시키는 일을 하는 대사들입니다. 이 정체성이 in the name of Jesus에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의미가 바로 대사, 특사라는 말입니다. 고대 근동의 용법이 그렇습니다. 

 

3) 아버지께 영광(13절) 

셋째, In the name of Jesus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13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더욱 높아집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바른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의 대사들의 간구를 들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지는 겁니다. 그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목적과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그 어구를 기도끝에 주문처럼 달아서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바른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기도는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내 욕망이나 내 가족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가 아닙니다. 

 

4. 기도 구절에 관한 고찰(14-16장_고별 설교내에서)

여기서 고별 설교 내에 있는 기도에 관한 내용들을 한번 쭉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고별 설교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드렸고, 그중에 세 번째가 ‘뜻에 맞는 기도’인데 14장 13-14절 두 절에서만 나오면 너무 적은 분량이잖아요. 사실은 16장까지 계속 곳곳에서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17장은 아예 대놓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이기도 하구요. 

 

1)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5:7)

잘 살펴보면 여기도 전제 조건이 있음이 보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을 뒤에 붙이는 기도가 아닙니다. 참포도나무되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즉 말씀과 행동이 공명되고 그분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이 우리 안에 계속 공명하고 있으면, 무엇을 구하든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가 전제 조건입니다. 

 

2) 열매 맺는 대사(ambassador)_제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15:16)

여기서도 단순히 모든 개인적인 욕망을 다 채워주신다는 뜻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열매맺는 대사, 특사로 택하셨습니다. 열매 맺는 대사로 택하신 건, 이를 통해 기도의 응답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문장 구조를 잘 보셔야 합니다. 열매맺는 대사로 택한 것이 먼저 입니다. 그럴때 비로소 무엇이든 받는 기도가 가능해집니다. 

 

3) 고난 속 기쁨을 위해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16:23-24)

16장은 마지막 때에 관한 장입니다. 그 날은 고난이 최고조로 달할 때입니다. 핍박과 박해가 극에 달할 겁니다. 먼저는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걸로 박해가 시작됩니다. 그 뒤에는 로마 황제들이 박해가 주기적으로 지속됩니다. 그때를 위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주실 텐데,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맥락은 기쁨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게 없이는 고난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고통 속에 기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사실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4)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16:26) 

마지막으로 16장 26절에는 예수님만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아버지께 직접 간구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회복됩니다. 제사장과 제사를 통해서만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유대인에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여기면서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별 설교에서도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통속적 해석이 튼튼히 서있기는 어렵습니다. 조건이 있고, 목적이 있고, 강조점이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자판기처럼 대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동전을 넣고 기도제목을 누르면 응답의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식 기도는 위험합니다. 이교적입니다. 

 

5. 뜻에 맞는 기도란?_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은 바로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1) 바른 믿음과 바른 관계안에서 드리는 기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바른 믿음과 그분과의 바른 관계안에서 드리는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2) 그리스도의 대사의 신분으로 드리는 기도 

또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 그리스도 예수의 특사의 정체성과 자격으로 드리는 기도가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 이런 조건 하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이런 조건 하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예수님께서 응답하시기 위해 일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함께 응답의 선물을 주실 겁니다. 

 

6. 나가며_맹신을 벗고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오해를 벗어버리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말씀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가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가 정답입니다. 그분이 다 듣고 있다는 정답입니다. 그러나 우리 뜻대로 다 이뤄진다는 오답입니다. 그분의 뜻에 맞을 때 이뤄집니다. 이 분문 때문에 생긴 오해를 벗고 참으로 인격적이신 그분과의 관계로 나아갑시다. 조건에 다 맞지 않다하더라도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건 그분과의 교제에 있어 가장 기본입니다. 두려움없이 그분과의 기도로 나아갑시다. 다만 내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신다는 맹신만 없으면 됩니다. 오해를 벗어 버리고 기도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회 

1.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뤄주신다는 말씀을 오해했다면 오해했다는 고백을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혹여라도 이 말씀을 무시하거나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거나 거짓말로 치부하거나 했다면 회개하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말씀의 본뜻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도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  

 

2.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시다. 그분이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바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 예수 그리스도의 특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 참고 도서

김영봉, 사귐의 기도, IVP

김영봉, 사귐의 기도, IVP 

2018. 02. 25. 

 

0. 들어가며 

1) 가장 친한 친구? 

-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절친의 이름을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그 친구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생각해봅시다. 

 

마지막 고별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별설교에서는 예수 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 이렇게 4가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오늘은 두번째인데요. 함께 머무는 교제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말씀을 읽어봅시다. 

 

1. 비유로 말씀하시다

1) 참포도나무(1절), 포도나무(5절), 가지(2절), 열매(2절)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비유합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동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이사야5:7). 출애굽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사사시대에도 실패했습니다. 왕정국가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라는 강력한 제국에게 망했구요. 남유다는 그보다 더 강력한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지금 로마에 속국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참포도나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십니다. 그분이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과거 전통에 묶여 있는 성전중심의 유대교, 회당중심의 유대교, 율법주의 유대교를 따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진정한 성전이요. 안식일의 주인되신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입니다.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게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가지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2) 비유의 기능_유진 피터슨의 비유로 말하라

- 비유의 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있으라. 거하라. 라고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는 확장성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는 사물과 개념을 이어줍니다. 비유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힘이 있습니다. 비유는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유는 보통 새로운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년 동안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우리가 간과한 것을 알아채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혹은 우리가 그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잊어버렸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유진피터슨, 비유로 말하라, IVP, p. 38). 

 

- 고정관념을 깨는 비유 

이렇듯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의 딱딱히 굳은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개념과 생각들을 마음속에 심어두십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포도나무로 여겼던 유대 사람들은 참 포도나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국가를 대체하는 한 인물의 등장에 놀랍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정도 수준의 사람이 되어야 가능한 발언입니다. 

 

- 비유의 현대화 

이 비유의 이미지가 우리 내면에 남아야 제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최상의 효과를 냈을 겁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현대 사회에 오셔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신다면 어떤 비유를 사용하실까요? 

나는 와이파이요 너희는 핸드폰이니 너희가 내게 연결되어 있으면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단다. 

나는 스킵이요 너희는 스윕퍼니 내 말에 머물러라 그러면 하우스안에 들어올 것이니... 

나는 버스 운전자요 너희는 승객이니 내 안에 머물러라 도착지점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니...

다양한 비유가 가능하겠지요. 여러분이 만들어보세요. 

 

2. 함께 머무는 교제 

1) 붙어 있으라(4절), 내 안에 머물러라(4-5절),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10절) 

결국 예수님의 비유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크게 보면 하나지만, 자세히 띁어보면 세 가지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붙어 있으라’입니다. 이 표현은 비유 때문에 나온 표현입니다. 나무와 가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드러나는 표현이죠. 두번째는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거니와 결국 버림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내 안에 머무는 것의 좀더 구체적 표현은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무엇이 흘러갑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물과 양분이 가지를 타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제자에게 전달되는 물과 양분은 바로 사랑이었던 겁니다. 

 

2) 계명을 지키는 삶(10절) 

여기서 요한은 한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게 10절입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바로 머무는 것은 사랑하는 거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면서 상상으로만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내가 가지니까 그래 꼭 붙어 있어야지’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1차원적입니다. 

그분을 구원자로 주님으로 만나는 것, 즉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주님 안에 머물게 되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나무에 가지가 붙는 과정이죠. 그 다음에 그분의 사랑안에 머무는 것이 두번째 단계이며 그 농도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안에 머물게 되는 두번째 단계의 핵심 동력은 형제자매 사랑입니다. 형제자매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면 주님의 사랑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상상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홀로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자매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분께 계속 붙어 있는 겁니다. 이쯤되면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열매가 어떤 건지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맞습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흘러 가지 끝에 열매로 맺힙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3. 교제의 시작_인격적 만남 

저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의 첫번째 단계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대학생 사역을 하다보면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경우도 많고, 인격적인 만남이 뭔지도 모릅니다.

 

1) 비인격적 만남

우선 인격적인 만남의 반대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예 맞습니다. 비인격적인 만남이겠죠. 

- 기계적 만남_알고리즘적 만남

기계적 만남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비인격적일 겁니다. 정해지는 대로, 프로그래밍 대로 반응하는 '쉬리'하고의 만남이 기계적 만남이겠죠. 정해진 알고리즘에 의해 바둑을 두는 그래서 결국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와의 만남이 기계적 만남일 겁니다. 인공지능과의 만남, 기대되는 만남이지만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건 프로그래밍된 결과물과의 만남이니까요. 이 만남에서는 우연을 오류라고 부릅니다. 이 만남에서의 반응은 수많은 데이타와 알고리즘의 산출물일 뿐입니다. 기계적 만남의 대표격이 바로 무속신앙, 기복신앙입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공을 들인만큼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 동물적 만남_본능에 충실한 만남

동물은 매우 본능적입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교미하고 싶을 때 교미합니다. 본능에 충실합니다. 본능과 본능이 만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충돌을 피하려고 평행선을 달립니다. 나는 나의 과업이 있고 상대는 상대의 과업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꿈과 열정이 있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비전과 열정이 있습니다. 굳이 조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긴 만났지만, 나에게 개입하는 걸 거부하는 만남을 동물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분을 내 욕구를 채우는 데 이용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계획으로 나를 조정할 의사는 없습니다. 내 본능, 내 욕구가 더 중요하니까요. 현대의 극단적 개인주의 신앙이 바로 동물적 만남입니다. 

 

- 위계적 만남_권위주의적 환경에서의 만남 

권위에 눌린 만남입니다. 북한 김정은을 만나는 느낌이랄까요. 고대 왕정시대의 왕과의 만남입니다. 질문도 못합니다. 불평도 못합니다. 거절도 못합니다. 앞의 상대는 무서운 분입니다. 이분에게 찍히면 내 앞날이 깜깜합니다. 각 분야의 대부격인 사람들입니다. 연극계는 이윤택이라는 분이 오랫동안 성추행을 해 왔는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도 너무 위대하시고 초월적인 분이라서 그분의 말씀에 토를 달지 못합니다.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대면해서 거부의사를 밝히지도 않습니다. 슬금슬금 피할 뿐입니다. 소위 말하는 오순절계통의 영적 카리스마 운동을 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느끼는 만남입니다. 아니면 극단적 보수적인 교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느끼는 만남입니다.  

 

2) 인격적 만남

- 지적, 감정적, 의지적 교류 

인격은 서로를 알아가고 정보를 나눕니다. 그 뿐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교류합니다. 교감이라고 하죠. 예수님은 자신을 알리시고 제자들을 알아가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자들과 감정을 교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을 알리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을 느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감정도 우리가 느끼길 원하십니다. 더불어 그분은 어떤 뜻과 계획과 의지가 있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뜻과 계획과 의지에 대해서도 존중하십니다. 이것이 서로 교류가 될때, 우리는 인격적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질문, 불평, 거부할 수 있는 권리 

인격적 만남에는 세 가지 권리가 함께 따라갑니다.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을 막고 질문을 못하는 만남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궁금하면 물어볼 수 있는 관계가 인격적 관계입니다. 비권위주의적 관계입니다. 좀더 세게 나가면 불평할 수 있는 권리도 인격적 관계에서는 가능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삶에 닥친 수많은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좀더 세게 나가볼까요. 때로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격적인 예수님은 거부 자체를 못하게 막는 분이 아닙니다. 정 하기 싫으면 안하겠다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강제하거나 억지로 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잘 짜여진 기계에 불과합니다.

 

 

4. 나가며

1)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라. 

핵심은 이겁니다.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십시오. 참포도나무에 제대로 붙으십시오. 그동안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었다면 이제 인격적인 만남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인격적 만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성경을 다독했다고 인격적 만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제 3월이 시작됩니다. 청소년기를 마치고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는 여러분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건 한 번 설교를 듣는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참포도나무되신 그분께 붙어봅시다. 그래서 그분안에 머물러 있어봅시다. 인격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종교행위가 아닌 살아있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18. 02. 18. 

 

0. 들어가며 

앞으로 4주간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순절도 시작되었는데요. 2월 14일에 교회력에서는 재의 수요일이라 해서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미사와 예배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동안 요한복음 14-16장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에 대해 다루려고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무작정 참회하고 무작정 슬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현재적인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사순절에 더 어울리는 설교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리즈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혹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가 함께 회개하면서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원리

- 사랑의 원리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을 것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포하시고 그 나라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시고 가르치시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습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며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통치의 기본 원리를 명령이라는 형태로 제시하셨는데요. 요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13:34-35) 

맞습니다. 마치 헌법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주 중요한 원리인 나라입니다. 

 

2) 명령 vs 방법

그런데 이런 명령만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명령만 있으면 가정이 운영이 되겠습니까? 평창 올림픽은 평화 올림픽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원리만 있으면 실제로 그것이 이뤄지겠습니까? 원리를 천명하고 당위를 제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입니다. 원리, 당위, 명령 등은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을 그려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신과 목적과 의미를 표현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평창 올림픽이 평화 올림픽이 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협력해야 합니다. 미국과 일본도 협조해야 합니다. 중국과 러시아도 동조해야 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서로 적대행위를 잠시 멈추고 대화 모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 올림릭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방법이 중요합니다.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사항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방식,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구현되는지를 알려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나 누가복음의 평지설교나 마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등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을 드러내 줍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그 명령과 원리를 실천해낼 수 있을까요? 저는 요한복음 14-16장이 그 방법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그래서 몇번에 걸쳐 이 본문을 묵상해 보시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어떤 방법들을 제시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 네가지 방법

14-16장까지 여러번 묵상하고 생각해보면, 크게 4가지 방법론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성령님의 도우심. 이 네가지를 앞으로 4주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바른 신학입니다. 

 

함께 본문을 읽어볼까요? 

잘 읽으셨습니다. 

바른 신학을 이루는 핵심 구절은 14장 6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그냥 앞뒤 문맥을 빼고 읽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구절이건 전후 문맥을 떼어 내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로 허공을 떠돌게 됩니다. 철저히 문맥 속에서 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1. 근심에 쌓인 이유

1절에 보니 예수님이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근심을 파악하고 계십니다. 왜 제자들은 근심하고 있을까요? 

 

1) 이 안에 배반자가 있다(13:21) 

첫째로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배반자가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음이 괴로우셔서, 환히 드러내어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요 13:21)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는 순간에 12명의 제자들을 보고 하신 말씀 치고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13:28)고 요한은 적고 있습니다. 

 

2) 나는 너희를 떠날 것이다(13:33) 

둘째로 더욱 더 큰 충격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날 것이라는 선언에 있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요13:33)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3년가까이 동행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 지도자들을 굴복시킨 뒤에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로마를 점령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할 일은 다윗처럼 이스라엘를 통일하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독립시켜서 전 세계에 가장 위대한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 믿었고 따라서 예수님이 곧 그와 같은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에 차있었습니다. 그런데 떠난다니요!! 제자들은 수군거렸을 겁니다. 

 

3) 수제자 베드로도 나를 부인할 것이다(13:38)

근심하게 된 세번째 이유는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할 거라는 예수님의 예언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13:38)

제자들 중에 가장 인정받고 있었던 수제자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란 말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라면 근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 근심에 둘러쌓일 만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걱정스럽게 근심되게 만드는 말들을 원투 어퍼컷을 날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 상황에서 새계명이라고 제시하시는 것 자체가 매우 모순적입니다. 가장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새 계명을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창 올림픽 개막식이나 폐회식에서 그런 선포를 하시면 분위기가 맞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새계명을 선언하십니다. 정말 예수님은 엉뚱한 구석이 많습니다. 제가 제자라고 해도 마음에 근심이 쌓일 만합니다. 

 

=>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 

좋습니다. 근심있는 마음을 아시고 자신을 믿으라고 하시니 일단 믿어봅시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전혀 사람 속을 모른채 자기 멋대로 말하는 분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심을 시켜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분을 신뢰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2. 아파트 vs. τοπον(place, position)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뭔가 이상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이게 무슨 소리죠? 저 같으면 그들의 정서를 공감하면서 신뢰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그래 너희들 마음속에 근심이 많은 것을 내가 잘 안다. 아까전에 내가 했던 말들 때문에 더욱 그럴거야.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이미 모든 상황을 내가 잘 정리해 두었단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만 믿어’ 

이 정도가 상식적인 답변 아닐까요? 느닷없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라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의 심사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1) 아버지 집에는 방이 많다(2절) _성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 집(2:16)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 바로 성전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2:16) 라고 말씀하실 때의 아버지 집은 성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럼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톰라이트라는 유명한 신약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성전의 핵심 의미는 그곳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풀면,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성전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제자들이 있을 곳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 토폰을 마련하러 간다(2절) 

바로 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거할 곳,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거든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면서 통치히시는 하나님 나라에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다고 대답하고 있는 겁니다. 

 

- 정적인 개념 vs. 동적인 개념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있을 곳, 헬라어로 하면 토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요. 이 토폰이 단순히 장소적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할과 포지션이라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있을 곳은 제자들이 가만히 앉아있거나 서 있는 곳이 아니라 제자들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곳을 함께 의미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거주하는 집, 아파트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는 역할과 포지션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토폰은 정적인 개념만이 나이라 동적인 개념도 함께 전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존재하다 그리고 활동하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존재를 통해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새로운 역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함께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이 드러날 때, 새로운 도성, 새 예루살렘이 이 땅 가운데 펼쳐질 때, 제자들은 각각의 역할과 위치를 부여받을 겁니다. 

 

3)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3절) 

-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기

새로운 하나님 나라는 그냥 앉아서 놀고 먹고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게 될 겁니다. 온 우주를 그분과 함께 정의로운 사랑으로 통치할 겁니다. 이게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첫번째 명령의 회복이 일어나는 그림입니다. 

 

=> 미래로의 초대 

근심에 쌓여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큰 그림을 그려주십니다. 단순히 그들의 정서를 위로해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는 말은 그들을 토닥이는 심리 삼담사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는 말은 세상의 끝을 위해, 새하늘과 새땅을 위해,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예수인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믿고 신뢰하라는 겁니다. 그분은 세상의 끝을 보고 있습니다. 그 미래로 제자들을 초대하는 겁니다. 

 

이 미래를 믿으십니까? 정말 믿습니까? 

 

3. 도마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_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현실주의자, 실증주의자, 경험주의자 도마로서는 이해가 안 될 겁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아주 정직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는 그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제시하신 미래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갇혀 삽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건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마 처럼 물어야 합니다. 주님! 정말 주님이 그리시는 그림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럼 그분은 이렇게 답하실 겁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이게 바른 신학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1) 길_방법 

그분이 방법이 되십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그분의 인격과 성품과 삶과 가르침,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겁니다. 

 

2) 진리_정체성 

그분은 방법 뿐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 하나님 나라 그 자체, 진리 그 자체가 됩니다. 세상의 처음과 끝이 되십니다. 창조주가 되신 그분이 모든 진실을 알고 계십니다.

 

3) 생명_목적

더불어 그분이 바로 우리 모든 숨쉬는 것들의 목적이 되십니다. 그분이 바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없이는 우리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참 생명이 되십니다. 

 

길, 진리, 생명 이 셋중에 오늘 본문이 집중하는 건 바로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도록 만드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이게 바른 신학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능케 하는 건 그 명제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우리는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만물을 회복시키겠다는 녹색당의 정강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겠다는 어떤 노력이나 정치이데올로기도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냅니다. 

 

4.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_예수 중심의 신학

결국 바른 신학이란, 예수 중심의 신학을 의미합니다. 구약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추출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빠진 하나님 나라 설명은 껍데기입니다. 

 

1) 신학, 교제, 기도, 성령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네가지가 있다고 초두에 말씀드렸습니다.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그중에 오늘 바른 신학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2) 신학이 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 

예수 중심의 신학이 바른 신학입니다. 이게 무너지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몇가지 원리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정의, 사랑, 공평, 자비, 희년, 자연보호, 인권, 약자보호, 내부고발 등등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떠 올릴 때 가져다 쓸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개념 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낼 수 없습니다. 

 

- 예수 중심의 신학을 위한 노력

이번 한주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한 노력을 조금만 더 기울여 봅시다. 구체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분에 대한 책을 읽는 것도 좋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라는 책을 한번 살펴보세요. 아니면 성경을 깊이 연구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큐티 정도가 아니라 연구를 해 보는 겁니다. 

 

이번 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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