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25. 김혁수 

 

[본문_요한복음 21:15-25] 

15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어린 떼를 먹여라.” 16예수께서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쳐라.” 17예수께서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먹여라. 18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것이다.” 19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나서베드로에게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0 베드로가 돌아다보니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베드로가 제자를 보고서예수께 물었다. “주님,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2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23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24 모든 일을 증언하고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 하신 일은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기록한 책들을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0. 들어가며
4
월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당시의 가장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감정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은 마지막 이야기를 베드로에게 할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등장시킵니다. 이제 제자들의 활약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마음의 죄책감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베드로의 죄책감을 다뤄주십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1. 호숫가 산책

지난 주에 우리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생선을 구워주시고 빵을 주시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 아침 식사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아침은 그야말로 감동이었습니다. 찢어질 잡힌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서 퍼득대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심장도 물고기들처럼 퍼득댑니다. 새로운 소망으로 차오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분이 이렇게 버젓이 살아서 제자들을 음식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분이 이제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섬겨주십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다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그런데 쪽에 베드로가 앉아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100여미터 되는 호수를 헤엄쳐 왔습니다(21:7). 하지만 음식이 주어지는 내내 베드로는 불편했습니다. 자기가 섬겨야 하는데, 제자가 스승을 모시는 것이 당연한데, 그는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예전 같았다면, “예수님, 음식 제가 만들겠습니다. 서빙도 제가 하겠습니다. 모진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던 몸을 이끌고 직접 일하시다뇨? 제가 하겠습니다. 앉아 계십시오!” 이렇게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쪽에 가만히 앉아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기만 했습니다. 더이상 선생님으로 주님으로 부를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말로 배신하고 저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었으며, 심지어는 욕을 했었습니다.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제 다시 수제자 노릇을 하기에는 염치가 없습니다. 

 

아침을 먹은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산책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의 손을 잡고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서 걷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니가 나를 여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보다 사랑하느냐?” 비록 조용히 묻긴 했지만, 베드로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 들을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베드로는 살짝 고민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했던 자신이 과연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그의 성격상 고민을 이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요 주님,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시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떼를 먹여라. 방금 내가 먹였던 떼를 이제는 니가 먹이면 좋겠구나 

 

2. 기억의 치유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후계자로 베드로를 다시 지목하십니다. 그에게 떼를 맡기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자격지심도 있습니다. 말만 많고 실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욕하고 저주했던 자신이 과연 예수님의 후계자가 있을까요? 번도 아니라 번이나 부인했던 자신의 과오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 예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니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질문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질문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대답하고 나니까 현타가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질문을 받자 마음이 너무 복잡합니다. 자신이 울기 전에 부인할 것이라 예언하셨던 예수님 아닙니까. 자신의 행동과 말을 아는 주님이 다시 이렇게 물으니, 갑자기 바를 모릅니다. ‘예수님이 물어 보실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등등. 고민 끝에 답을 합니다. “주님께서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다.” 

 

점점 과거의 기억이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올라옵니다. 2 , 새벽 동터오는 시간에 어쩔 없이 예수님을 부인했던 참혹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질문에 답하면 답할수록 답답합니다. 그런데 번째 질문이 던져집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번의 질문을 던지는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안들려서 크게 듣고 싶어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의 대답에 신중에 신중을 더합니다. 정말 사랑하는지, 모든 과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스스로 답을 찾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가 모든 일과 모든 말을 알고 계십니다. 숨길 없습니다. 비록 실수가 있었지만, 저는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것까지도 알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진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랑만큼은 알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부끄러웠던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에게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번이나 말이죠. 대화는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는 듣고 있었습니다. 

 

3. 나를 따라라 

예수님이 베드로의 감정과 마음만 치유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입니다. 살펴보세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번이나 그의 떼를 먹이고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무너진 마음의 회복은 기억의 망각이나 무시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한 고백에서 일어납니다. 비록 실수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의 회복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시 수제자로서, 후계자로서의 사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베드로에게 용서는그래 괜찮아. 이해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용서는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였습니다. 이게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그동안도 계속 따랐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예수님이 사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4. 나가며_따르고 있는가?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나요? 정말 그런가요? 교회에 나온다고, 일주일에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과연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있을까요? 다르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인가요? 아님 교회의 교인인가요? 예수님을 따라 여행을 다니며, 예수님을 따라 고난도 당하는 그리스도의 제자 맞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맞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비록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회복의 기회를 주시고, 원래의 소명을 부여하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따라 오라고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충분히 그러실 분이십니다. 허기진 우리의 몸과 영혼에 음식을 주실 분이십니다. 제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의 죄책감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죄책감 때문에 그분에 대한 사랑고백을 못하시는 분이 있나요?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음식을 주시며 호숫가에 산책을 청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패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자신의 임무를 부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그분을 따를 있는 겁니다. 

 

과연 내가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다시 돌아봅시다. 그리고 혹시 실패했다면 다시 그분께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을 따라 나섭시다.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번이나 물어보십니다. 번째 물어보실 베드로의 생각과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2. 여러분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과거 실패에 대한 자책감, 미래 소명에 대한 두려움 등등 여러분의 마음 정서를 나눠주세요. 

 

3. 예수님은 우리에게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번 그분을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요? 

2021. 4. 18.

 

[본문_요한복음 21:1-14] 

1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2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사람이 자리에 있었다. 3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하니, 그들이우리도 함께 가겠소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밤에는 고기를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4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 잡았습니다.” 6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7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저분은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였다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8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작은 배를 채로, 고기가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 90미터)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9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11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3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 14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이번이 번째였다.

 

[설교]
0.
들어가며
4
월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당시의 가장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해왔던 그들의 깊은 기대와 믿음은 송두리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3년간의 기대가 바뀔 , 누군가는 크게 저항하고 싶었을 겁니다. 완전히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그들을 새로운 출발선으로 데려왔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새로운 출발선에 봅시다. 

 

1. 디베랴/갈릴리 호수로 돌아온 제자들

마가의 다락방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돌아옵니다.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의 서쪽 연안에 자리잡은 매우 도시였습니다. 지난 달은 제자들에게 충격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만 해도 백성들의 환호와 기대에 눈빛을 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맥없이 잡히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절망과 고통 속에 있을 ,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끝나고 이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일이 없었다는 , 평온한 갈릴리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말에 원래 어부였던 제자들이 하나 베드로를 따라 나섭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고기를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과는 별개로 제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헤야 할지 막막하고 열매가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보는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 왔는가? 원래는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서 성령이 내려오실 때까지 기도에 전념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입니다. 성경 마태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제자들 보고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기를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것이라고 하여라”( 28:7) 
 때에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가서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그러면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28:10)

 

그러니 단순히 제자들이 낙담하여 자신들의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왔다고 해석하면 그건 반쪽짜리 해석일 겁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했을까요? 어차피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2. 기억의 소환

제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어부였습니다.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90미터 떨어진 뭍에서 사람이 소리칩니다. “여러분, 무얼 잡았나요?” 새벽녘 갈릴리 호수의 고요함을 깨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에 다들 흠칫 놀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별거 없습니다.” 그러자그럼,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져 보세요. 그럼 잡힐 겁니다.” 배의 오른편이나 왼편이나 얼마나 차이가 나겠습니까? 밤새 어부들이 오른편 왼편 던져보지 않았을까요? 말을 들은 제자들은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왠일입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생선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장면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4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5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6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누가복음 5:4-6)

 

뿐만이 아닙니다. 물고기를 잡아 오자 벌써 예수님은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생선을 굽고 계셨고, 빵도 이미 가져다 놓으셨습니다. 밤새 고기잡느라 허기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시면서 먹을 것을 건네 주십니다. 여러분, 장면은 무엇과 유사한가요? 맞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오는데, 장소가 디베랴 호수 근처였음을 우리는 있습니다. 모세 시대 만나의 기적을 재현하여 진정한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 사건이었습니다. 때는 제자들이 돌아다니면서 빵과 생선을 나누어 주었죠.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3 전의 사건들이 제자들에게 떠오릅니다.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과의 처음 만난 장면과 백성들의 흥분에 기대의 소리를 다시 기억해냅니다. 아마 예수님은 이런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다시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같습니다.

 

3. 새로운 출발선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제자들, 그들에게는 다시 출발선에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다시 주어져야 했습니다. 지난 3년이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에서 따라다녔던 기간이라면, 이제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들로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새로운 출발선에 섭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갈릴리로 부르셨습니다. 유사한 장면을 연출하심으로써 제자들을 다시 처음의 마음가짐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4. 나가며_나의 사명은?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분명있습니다. 때로는 사명을 새롭게 하고 다시 출발선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실패하기도 하고, 잘못된 기대와 기준으로 다루다 보니 어긋난 결과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시 부르심의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목표, 새로운 목적, 새로운 사명이 생겼던 때가 있었나요? 무엇이었나요? 누군가는 가족을 섬겨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겠다. 교회를 살리겠다. 청소년들을 섬기겠다. 주변에 가난한 이웃을 섬기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만물의 보호를 위해 애쓰겠다. 이런 결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꿈과 비전을 주십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기억들이 있을 압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의 결심은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세상의 관점과 생각에 의해 왜곡되거나 오염되기도 합니다. 나의 동기가 예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 우리가 해야 일이 있습니다.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다시 처음 부르셨던 예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 추억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대체로 예수님과의 깊이 있는 만남의 시간은 수련회와 같은 집중된 말씀 공부와 공동체적 활동을 통해 경험됩니다. 그런데 지금 코로나 때문에 그것이 막혀 있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이미 경험했던 분들이 그때를 회상하면서 하루 이상의 시간을 떼어놓고 충분히 기도와 묵상으로 들어가면 좋겠다고 추천드립니다. 성경과 기도책 그리고 노트를 들고 하루 피정을 떠나는 겁니다. 곳에서 오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거죠. 나의 갈릴리는 어디인가? 내가 처음 만난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등의 질문을 던집니다. 이렇게 다시 출발선에 서는 겁니다. 부디 예수님이 차려주시는 아침식사를 맛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갈릴리에 돌아온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을까요?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매번 허탕을 치고 있는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요?   

 

3.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에, 그분이 나에게 주신 소명/사명/목표/목적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지금 소명을 따라 살고 있나요? 

2021. 4. 11. 

 

[본문_요한복음 20:19-31_새번역] 

19 , 주간의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말씀을 하시고 나서,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손을 만져 보고,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설교]
0.
들어가며
이번 달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다뤄보고 싶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몰약을 가져다 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커밍아웃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제자였던  이스카리옷(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공은 제자들에게 넘어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어떻게 소화했을까요? 과연 이들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왔을까요?  

 

1. 도마의 열망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무고한 예수님을 하룻밤 사이에 잡아다가 사형까지 집행한 유대인들의 무도함에 치를 떨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알고 제자들에게 말하자,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무덤을 살피고 사건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자신과 대화를 나눴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숨죽이며 유월절, 무교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두려움 속에는 평안, 평화가 있을 없습니다. 두려움은 극도의 자기 보호를 낳고, 극단적 자기 보호는 타자에 대한 배척과 혐오를 낳습니다. 배척과 혐오는 결국 전쟁의 굴레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두려움의 결과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두려움은 살인을 낳지만, 국가의 두려움은 전쟁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져서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불신(이스카리옷 유다가 배신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으로 가득 제자 공동체에 찾아오십니다. 자신이 살아 났다는 사실을 확증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성령님을 숨으로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22-23) 

 

그러나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돌아오니 다락방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다락방에 오셨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고 기쁨에 얼굴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도마는 처음에는 믿을 없었습니다. 몰래카메라 같기도 했지만, 사실 그런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마의 정서는 어땠을까요? 다른 제자들이 놀리는 같아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 빠진 같아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25절의 도마의 말은 그의 정서를 대변해 줍니다. 

 

25_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도마는 악에 받친 같습니다.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는 믿을 없으니, 직접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봐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도마는 정말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자신에게도 보여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열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10제자만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여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마도 믿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는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직접 보고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직접 만져보라고 말했을 , 도마는 만져보기는 커녕, 자기를 지명하시면서 말을 걸어오신 예수님께 감격하여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2. 꾸짖음 vs. 격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이 장면에서 도마를 꾸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27)라거나,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8) 말씀을 비추어 ,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꾸짖음 보다는 격려의 늬앙스로 읽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전체 제자들 앞에 번째로 오신 상황에서 도마에게 정색을 하며 화난 목소리로 꾸짖었다고 보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했던 베드로에게도니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부드러운 질문으로 다가가셨습니다. 도마는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고 싶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런 도마에게 엄하게 꾸짖었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28절의 말씀은 일종의 축복과 예언의 말씀입니다. 요한은 보지 않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 삶을 살았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30-31절이 이를 대변합니다. 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요한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고, 믿는 사람들에겐 영생이 선물로 주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도마에게 했던 예수님의 말씀은 꾸짖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사역해야 하는 제자들에 대한 격려요, 앞으로 보지 않고 믿게 수많은 제자들을 위한 축복이었던 겁니다.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로 도마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봅시다. 

 

3. 나의 나의 하나님

도마의나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베드로의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과 쌍벽을 이룹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유대적 배경에서 최고의 찬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의그리스도메시야 헬라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신적 동일성을 나타내는 유대식 어법입니다. 그에 반해, ‘나의 나의 하나님 당시 로마/헬라 세계에서 최고의 칭송입니다. “ 오직 로마 황제에게만 있는 표현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다신교 세계에서 유일신과의 개인적 관계를 드러내는 파격적인 어구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죽였던 로마의 권력의 무서움을 뒤로하고 이제 진정한 세상의 주님은 오직 예수님임을 공식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표현은 앞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무수한 이방인들의 신앙고백 최고의 모델이 됩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4. 나가며_나의 고백은?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참조 20:16). 그러나 이제 그들의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세상의 주인이신 오직 밖에 없는 유일한 하나님이 이제나의주님으로나의하나님으로 관계가 형성됩니다. 호칭의 변화는 인생의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누군가를 나의 신랑/신부라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나의 아빠/엄마로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나의 사장/대표로 부르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순간, 우리 인생 최대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진실된 고백이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형식에 치중된 종교 문화 생활에 다름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고백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생일대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단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분을 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축복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제자들의 정서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중에서도 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2. 도마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봅시다. 어떤 어조와 말투로 말씀하시는지 서로 나눠 봅시다.    

 

3.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나요? “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님, 종교 창시자로서의 예수님으로 부르고 있나요? 그분을 진심으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예상됩니까? 

2021. 4. 4. 

 

[본문_요한복음 19:17-24_새번역] 

17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그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18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19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고 썼다. 20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21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 하였으나, 22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썼다” 하고 대답하였다.

23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한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짠 것이므로 24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 하였다. 이는

‘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0. 들어가며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너무 중요하고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부활절이야 말로 모두가 기뻐할 최고의 날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요한은 부활보다 앞서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왕의 대관식이 일어났다는 관점을 알려주고 있죠. 어떻게 이런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 이것이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명패와 왕의 대관식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중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매년 유월절이라는 민족 대명절을 맞아 순례길에 오르는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왔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함께 이 거대한 종교 축제를 경험하러 찾아왔습니다. 변방에 작은 마을이 순식간에 세계인의 melting pot(도가니)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언어가 공존했습니다만 그래도 공용어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공식언어인 라틴어, 지중해 세계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혤라어, 그리고 유대 사람들의 히브리어(또는 아람어)를 공통적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셔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와 기소에 대해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너무 강력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넘깁니다. 하지만 마지막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십자가형에 앞서 죄명을 쓴 죄패 혹은 명패를 붙입니다. 왜 사형시키는지 백성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전세계인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고 썼나요?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습니다. 지도자들은 못마땅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쓰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바꾸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심문한 그는 예수님의 범상치 않은 면모에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민중들이 예수님의 그간의 행적을 잘 알고 그를 메시야 즉 유대이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는 전 세계인 앞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왕의 대관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2. 수치와 영광 

요한은 매우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광이라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과 환호 속에 휘황찬란한 장식과 성대한 예식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전혀 다른 방식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나간 뒤에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그렇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3:31-32)

 

십자가를 두고 예수님은 영광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요한은 십자가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패/명패를 씀으로써 전세계인에게 예수가 ‘유대인의 왕’임을 드러냈다고 해석했고, 그 내용을 자세하게 적고 있는 겁니다.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 가장 영광스런 순간이 되었습니다. 벌거벗겨져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참혹한 순간이 가장 영광스런 왕의 대관식이 된 것입니다. 수치는 여기서 영광이 됩니다. 금관과 곤룡포의 영광이 아닙니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낸 최고의 영광이 된 겁니다. 

 

3. 새로운 관점_수치 속에서 영광을 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사의 어느 순간에나 드러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 우주인급의 실력으로 미친 승리를 이끌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칭찬과 환호를 보낼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움이며 뜻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도 있겠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마 그런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을 겁니다.

 

그러나 승리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패배의 영광도 있습니다. 닉부이치치의 삶이 그랬습니다.  '해표지증'이라는 유전질환으로 짧은 왼쪽 발을 제외하고는 양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없는 그는 친구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실망해 어렸을 때는 자살도 시도했었죠. 그러나 그는 결국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호주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수치스런 순간이 없지 않았습니다. 남과 다른 자기를 보는 것이 부끄러웠겠죠.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치는 이제 영광이 되었습니다. 생명과 평화가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4. 나가며_삶을 재해석하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한 가지 방식/양식으로 제한된다고 생각을 가두지 맙시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다시 해석할 틀이 생겼습니다. 학창 시절 따돌림의 고통은 평생 따라다닙니다. 학폭의 기억은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그 자체의 고통과 아픔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수치스럽고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죠. 그러나 우리는 가장 큰 수치 속에서 가장 큰 영광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슬픈 추억과 기억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빛 속에서 다시 새롭게 조명되길 소망합니다. 나의 고통과 슬픔이 어떻게 사용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아웃의 주인공 라일리가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쁨이’만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슬픔이’가 필요했죠. 영성 작가 헨리 나우웬은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수치의 영광을 받으신 십자가의 예수님, 그 빛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재해석합시다. 부활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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