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25. 김혁수 

 

[본문_디모데후서 4:1-8] 

1나는 하나님 앞과,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2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3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6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Chapter 4

1 I solemnly urge you in the presence of God and Christ Jesus, who will someday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when he comes to set up his Kingdom: 2 Preach the word of God. Be prepared, whether the time is favorable or not. Patiently correct, rebuke, and encourage your people with good teaching. 

3 For a time is coming when people will no longer listen to sound and wholesome teaching. They will follow their own desires and will look for teachers who will tell them whatever their itching ears want to hear. 4 They will reject the truth and chase after myths. 

5 But you should keep a clear mind in every situation. Don’t be afraid of suffering for the Lord. Work at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nd fully carry out the ministry God has given you. 

6 As for me, my life has already been poured out as an offering to God. The time of my death is near. 7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and I have remained faithful. 8 And now the prize awaits me—the crown of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the righteous Judge, will give me on the day of his return. And the prize is not just for me but for all who eagerly look forward to his appearing. 

 

 Tyndale House Publishers, Holy Bible: New Living Translation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2015), 딤후 4.

 

 

[설교]

0. 들어가며 

- 레디 플레이어  

어제 딸과 영화 편을 보았습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어디 나가기도 그렇고, 딸도 심심해하는 같아서 영화를 봤는데요,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영화입니다. 집에 계시다면 검색해보세요. 

 

요사이 유행하고 있는 가상 현실, 소위 메타버스를 다룬 영화입니다. 코로나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요. 마치 코로나를 통해 비약적으로 비대해진 온라인 세상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는 , 가상 현실 아바타의 생활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VR 고글을 쓰고, 프로그램 반응형 수트를 입고 일상의 대부분을 가상 현실 세계인 오아시스에서 보냅니다. 가상 현실은 더이상 가상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현실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가상 현실은 미래의 현실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측면인데요, 성경의 장절이 가상 현실로 들어가는 코드가 되어 언제든지 성경의 세계로 들어갔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누르면 1세기 로마와 로마 감옥 속에 갇힌 바울, 그리고 바울의 편지가 도착한 에베소 교회와 편지를 읽는 디모데의 장면으로 이동하는 것이죠. 성경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측면인데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관을 뚫고 나가기는 점점 어려워지겠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선호하는 세계 속에 매몰되어 나오려고 하지 않을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각자의 세계에 갇혀 전혀 배우려고 하지 않는, 그래서 가르침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할 같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당부 시리즈 마지막 시간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당부를 들으면서 메타버스에 익숙해질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있는지 함께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 

 

1. 엄중함

1) 꼰대 바울 

오늘 말씀을 처음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꼰대 바울이었습니다. 왜냐구요. 1절을 읽어볼까요? 

 

1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구절을 읽을 때는 심각하게 목소리를 굵게 만들어서 말해야 합니다. 바울의 표정과 말투를 상상해봅시다.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꼰대 모습입니다. ‘진리 안에 머물라라고 한다든지, 성경의 중요성을 역설한다든지,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엄숙하게 명령한다든지이런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단어를 쓰면서 무게 잡고 명령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아마 그래서 여러분 중에 일부는 바울을 싫어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꼰대를 정말 상대하기 싫지만, 꼰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꼰대에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들을 들어줄 만큼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없겠지만, 간혹 정말 배울만한 컨텐츠 진정성을 가진 꼰대라면 번쯤 기울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울이 그런 꼰대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배울만한 컨텐츠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삶에 진정성이 묻어 있습니다. 그냥 꼰대가 아닙니다. 

 

2) 누구 앞에 있는가

그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엄중하고 무겁게 명령을 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는 하나님 ,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 그리고 재림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할 가장 엄중하고 무겁고 핵심적인 존재와 사건들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재림, 그리고 심판바울은 지금 앞으로 닥칠 일들을 떠올리고 있는 겁니다. 과거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뤄놓은 인류 구원의 역사도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할 , 무거움과 긴박성과 엄중함을 떠올리며 가장 확신에 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엄중함은 단순히 그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엄중함은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있기 떄문에 나오는 입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존재도 존재지만, 바울은 그분들이 하실 일들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심판자이기도 하십니다. 다시 오셔서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 인류는 앞에서 마지막 정산 혹은 심판을 받게 것입니다. 바울은 미래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의 명령어를 입밖으로 꺼냅니다. 

 

2. 말씀을 선포하라 

1)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그렇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19-20)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나, 바울이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이나 지극히 유사합니다. 

 

2) 케리소 

그런데 약간 다른 점도 포착됩니다. 그것은 바로 케리소라는 단어가 가진 원래 때문에 일어납니다. 바울은 말씀을 선포하라고 , 케리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왕의 전령이 사람들에게 정책이나 입장 등을 선포할 쓰는 단어입니다. 전령은 왕의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습니다. 사람들은 전령을 왕의 대리자라고 생각하고 전령의 말은 왕의 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공표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라 가까이 왔다이런 것이 바로 케리소입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케리소해왔습니다. 이제 누구에게도 명령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디모데에게도 케리소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의 핵심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 끌고 들어왔음을 케리소하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따르면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케리소하라는 겁니다. 

 

선포는 모두가 알아야 공적 사실입니다. 단독 보도, 속보와도 같은 겁니다. 나라가 독립되었다고 공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올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라고 알리는 일본 국왕의 선포와 같습니다. 남북한이 통일한국이 되었다는 소식은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왔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기만하면 나라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언론에 뿌려야 합니다. SNS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케리소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시즌을 타지 않습니다. 계절에 따라 할지 말지를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왕의 전령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3)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그러나 바울은 케리소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성경의 유익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 가지고 있습니다.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선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탁월함 길러줍니다. 이런 성경을 계속 가르치고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살짝 꼰대같은 느낌이 나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같이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가르치고,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라 등의 단어들입니다. 혼날 쓰는 단어들이잖아요.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현저한 차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는 책이 많지도 않았고,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투브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성경이 있었으며, 그마저도 읽을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성경을 해석하고 해설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도 소수였으며,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의 말씀이 가르쳐져야 했습니다. 그러니 소수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요? 지금은 오히려 반대죠. 너무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공중에 다닙니다. 유툽을 열면 수많은 목사님들이, 설교가들이, 성경교사들이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꼰대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죠. 그렇지만, 그렇게 너무 많은 지식들과 해석이 난무하기 때문에, 도리어 건강한 가르침과 건강한 책망과 건강한 경계와 건강한 권면이 더욱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단편적인 정보와 지식 전달을 넘어서서 통합적이고 인격적이고 성육신적인 가르침과 책망과 주의를 주는 것과 권면을 하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기준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기준에 어긋나 있는 성도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어긋나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주의를 니다. 그리고 기준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함께 권면 합니다. 

 

어떻게요? 성육신적이고 인격적이고 통합적으로 말이죠. 전달하는 방식도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용 아니라 내용에 걸맞는 가르침의 방식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걸 성육신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통합적으로 실천하셨습니다. 그것도 함께 가르쳐지는 겁니다. 이게 건강한 가르침입니다. 

 

3.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이다. 

1) 개의 동사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는 것에 진심일까요? 동사를 개나 사용하면서 가르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 책망하라, 경계하라, 권면하라 등의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이렇게 엄중하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3-4절입니다. 

 

3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2) 듣고 싶은 것만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방금 말씀드렸던 건강한 가르침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선생님을 쫓아 다니게 것입니다. 자신들의 귀에 듣기 좋은 가르침만 들으려고 것입니다.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소설같은 꾸며진 이야기만을 좋아하게 것입니다. 벌써 2천년 전에 바울은 이런 현상을 보고 있었고, 심해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던 겁니다. 

 

3) 자동 추천 기능 

정말 어떻게 이렇게 떨어집니까! 현대 사회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세상입니다. 그걸 더욱 가속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자동추천기능입니다. 더욱 정교화된 인공지능 기술이 우리가 선택했던 사항들을 보고 무엇을 좋아할지 통계적으로 판단해서 우리에게 계속 추천해줍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검색하지 않는한 유툽과 각종 SNS들은 내가 좋아할만한 내용들만 계속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점점 한쪽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종합적으로 사고할 없게 되고, 편향적이고 당파적인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이죠. 소위 일베니 메갈이니 하는 그룹들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렇습니다.

 

부담이 되고, 껄끄러운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래 걸리고 장기적으로 연마해야 지식이나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거나 삶의 전반에 영향을 주는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내용만 계속 배우다 보면 그분야에 전문가는 있을지 모르나 통합적 진리에서는 점점 멀어져서 극단적 자기 세계에 갇히기도 하는 겁니다. 

 

4)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이러니 바울의 오늘 엄중한 명령은 우리가 여러 차례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정말로 꾸중도 듣고, 주의도 듣고, 권면도 받고 설득도 당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는가? 단순히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통합적인 진리를 배우고 익히고 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관점을 성경의 관점으로 계속 비춰보고 있는가? 성경의 관점으로 구석구석을 점검하고 있는가? 과연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4. 나가며

- 10분의 1

사랑하는 여러분, 가르침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가르침은 더욱더 힘듭니다. 가장 힘든 것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2 디모데를 계속 배출해야 하는 곳입니다. 여전히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면서 책망과 경계와 권면을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청년들 중에 2 디모데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임사역자, 선교사, 목사가 필요는 없겠지만, 10 , 혹은 20 중에 명은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에서 좋은 직장인이 되는 ,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무 귀하고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다만, 2 디모데도 나와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책망하고 주의를 주고 권면하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운 일이죠. 이해가 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정말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게 족쇄가 되어서 스스로가 위선자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하나님께서 일로 부르시는 사람이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당부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진리 안에 머물러라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쳐라. 죽음을 기다리는 바울이 마지막 호소와 당부가 우리 마음에도 남아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길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

1. 바울의 마지막 당부가 우리 뇌리와 마음에 남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진리에 머물라.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라. 그의 마지막 진심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기도합시다.    

 

2. 성경을 가르치고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는 2 디모데가 나오길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개인의 결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대하고 기도해야 일입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바울이 엄중하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토록 무겁게 말하고 있나요?      

 

2.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2021. 7. 18. 김혁수 

 

[본문_디모데후서 3:10-17] 

10그러나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행동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따르며, 11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내가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박해를 견디어냈고, 주님께서는 모든 박해에서 나를 건져내셨습니다. 12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입니다. 13그런데,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것입니다. 14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15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 있습니다.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17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너의 진리를 존중한다

개취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 취향 존중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나가싫존주의라는 말도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도 존중한다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취향 아니라 개인이 싫어하는 것도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화 현상은 진리에 대해서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너의 진리를 존중한다정도의 뉘앙스가 사회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조금 풀어보면, “너의 진리가 있고, 나의 진리가 있으니 나는 너의 진리를 존중한다. 그러니 너도 나의 진리를 존중하라.”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 보면,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취향에 가까움을 있습니다. 시각, 관점, 오피니언, 생각에 가깝습니다. 더이상 사람들은 진리를 진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우주적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과연 우리는 진리를 계속 이야기할 있을까요? 

 

- 바울의 마지막 옥중 서신 

7 한달 동안 우리는 신약의 저자들의 마지막 당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동안에는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를 다루었습니다. 오늘부터 다음 주에 이어서 바울의 마지막 당부를 공부할까 합니다. 바울은 너무 유명해서 아마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겁니다. 바울의 말년은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바울은 자신이 정말 사랑한 아들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바로 디모데후서인데요. 인생 마지막의 바울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읽어볼까요? 

 

1. 진리의 경험(10-12)

1)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 선교여행 루스드라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바울의 설교와 가르침에 깊이 감명을 받고 회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2 선교 여행 때부터 함께 동역합니다. 시기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언제 강도들을 만날지 모릅니다. 게다가 바울을 지극히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추적하면서 그가 가는 도시마다 살해위협을 가했습니다. 디모데는 모든 광경을 직접 보았습니다. 함께 경험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정말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바울은 이슈가 생기는 교회마다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디모데를 맞이하는 여러 도시의 교회들은 마치 바울을 맞이하듯 그를 대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들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서 6개의 편지의 공동 저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와 후서라는 이름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를만 했습니다. 

 

그들은 동거동락했습니다. 함께 세계를 걸어다니며 여러 도시들을 방문했습니다. 속에서 좋았던 경험도 있었겠지만, 많은 경우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오랫동안 함께 겪었던 고난의 시간들을 다시 회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박해받았던 지역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편지를 받는 디모데에게 기억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2) 박해 속에서의 구원 

기억에는 박해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원도 있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바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순간들이 여럿됩니다. 분명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실 루스드라에서의 사건은 충격적입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무리들을 충동질합니다. 길거리 연설이 이어집니다. 바울을 신성모독죄 같은 것으로 프레임을 씌웁니다. 결국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죽입니다. 그리고 성밖으로 시신을 옮겨 놓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바울이 먼지를 훌훌 털고 일어나는 아닙니까(14:19-20).

 

그런데 유대 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거기로 몰려와서 군중을 설득하고, 바울을 돌로 쳤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제자들이 바울을 둘러 섰을 때에, 그는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틑날 그는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다.”(사도행전 14:19-20)

 

디모데는 이런 상황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숱한 박해 속에서도 바울을 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디모데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3) 진리를 따르는 것의 결과_박해

진리를 따르는 것의 결과는 박해입니다. 바울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2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로마 감옥 안에 갇힌 바울은 지난 선교 사역의 마무리가 감옥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불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정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의 경험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위험이 뒤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말하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위협이 찾아옵니다. 게다가 진리대로 살아가려고 시작하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바울 당시만해도 예수라는 진리를 따르는 무리는 소수였습니다. 소수의 무리가 매주 모여서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 예식 합니다. 그리고 서로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당시 기록에 보면 이런 예식 행위와 서로에 대한 호칭 때문에 식인 풍습과 근친상간 행한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여러분 소수의 무리가 다수가 따르는 로마황제 숭배 다신교의 사회 문화 거부하고, 매주 밤마다 몰래 모여 한다는 것이 식인예식과 근친상간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혐오하게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따르려는 사람들 모두는 박해를 받을 밖에 없었습니다. 

 

2. 진리 안에 머물라(13-14) 

1) 진리에 반대하는 사람들

다른 민족, 로마 사람,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받는 박해는 그나마 그러려니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바울과 디모데를 아프게 사람들 자신들의 뿌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동족,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박해보다 뼈를 때리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디모데 평생을 따라 다니면서 사역을 방해하고 음해하고 모함하고 박해했습니다. 심지어는 1세기 말의 기록인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이들 유대인들을 사단의 무리라고 부르며 주의하라 당부했습니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요한계시록 2:9). 

 

2) 간절한 호소

이렇게 전세계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불신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동족으로부터도 미움과 비방과 모함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왜요? 진리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살아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되신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다시 한번 간절히 호소합니다.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세계를 제패한 대제국 로마의 감옥에서 동족의 비방과 모함과 고소 앞에서 그의 마지막 외침을 들어봅시다. 

진리 안에 머무세요.”

호소가 들리시나요? 간절한 외침이 들리시나요? 바울 인생 전체가 압축된 외침입니다. 진리를 위한 그의 오랜 투쟁의 음성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보다 지금의 우리가 진리를 주장하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당시는 소수에서 다수로 나아가는 성장기의 환경이었습니다. 복음의 확장기였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 때문에 그래도 진리가 진리라는 사실을 믿을 있었고, 박해를 참을 있었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기독교 세계가 다수에서 소수로 전락하는 수축기이기 때문에 사실 진리를 주장하고 살아내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일리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살해의 위협 속에서 살다가 급기야는 동족의 고소로 지금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몇몇 지인들은 바울을 버리고 진리에서 떠났습니다. 

 

그대는 속히 나에게로 오십시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디모데후서 4:9-10)

 

이런 외로운 상황 속에서 진리를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있습니다. 기독교의 확장기라는 사회학적 통계만으로는 바울의 인내를 설명할 없습니다. 개인이 겪는 이런 고난과 심리적 좌절 속에서도 끝까지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끝내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3. 진리의 보고_성경(15-17) 

 

바울은 진리 안에 머무는 가장 좋은 도구, 가장 좋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우리가 익히 듣고 알고 때로는 외우는 구절이 등장합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16). 그런데 구절이 어느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몰랐을 겁니다. 바울의 마지막 권면, 당부의 맥락입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감옥에서 나온 말이라는 겁니다. 요사이 말씀을 가르치는 글들을 보면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바로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말은 책의 맨처음 등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을 마지막에 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목이 신기하면서도 감동을 줍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바울은 성경의 가치를 후대에 알려야 필요를 느꼈습니다. 구약과 복음서 얼마나 소중한 문서인지 후세대에 알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가치가 있나요? 

 

1) 하나님의 영감

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여진 책입니다. 수많은 인간 저자가 있지만, 성경의 제일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적 감동이 없이 성경이 씌여지지도 않았고, 이렇게 편집되지도 않았으며, 이렇게 전달 전수 되지도 않았습니다. 말씀이 글이 되고, 편집이 되어 책이 되고, 책이 후세대에 전달되는 과정 모두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감동받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2) 구원에 이르는 지혜 

둘쨰, 성경은 특히 구약과 함께 당시 거룩한 문서로 통용되던 복음서 일부 바울 서신서의 경우,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있습니다.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구약도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밀스런 지혜를 구약이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누가복음 24:44)

 

이게 복음주의 성경해석학의 근본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말이죠. 성경 66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3) 의의 교과서 

셋째, 성경은 의로운 삶을 위한 교과서입니다. 성경은 거룩한 삶에 대해 말합니다. 의로운 삶이 어떤지에 대해 말합니다. 수많은 이야기와 속의 인물을 통해 배웁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배웁니다. 1600년의 역사를 관통하여 기록된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 담겨 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삶을 있는 역설적 통합적 진리 담겨 있습니다. 극단적, 당파적 주장으로 사람들을 갈라치기 하지 않습니다. 지정의가 통합되어 있습니다. 몸과 영혼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나와 세상, 무리와 우주 통합되어 있습니다. 사실과 윤리가 조화 이룹니다. 성경이 모든 과학과 수학지식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인생을 의롭게 살아가는 데는 가장 탁월한 가르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는 겁니다. 

 

4) 선한 일과 탁월함의 원천

넷째, 성경은 탁월함과 선한 일의 원천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유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성공하는 유능하게 만든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함에 있어 유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입니다. 성경은 돈을 많이 버는 탁월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교보문고에 있는 자기 계발서 코너의 베스트셀러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탁월하고 유능하게 만들어 주는 책입니다. 목표가 다릅니다. 

 

4. 나가며

- 진리를 배우자/ 진리 안에 머물자

진리가 무시되고 배격당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팩트첵크는 중요하지만 진리체크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늘고 있습니다. 진리 체크는 현대사회의 적이며, 관용과 포용의 반대라고 합니다. 

 

점점 진리를 따르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소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구비율로 따지자면 점점 바울의 시대와 비슷해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기에 점점 사회적 압박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고 따르려는 사람들은 고난과 박해를 받는 시대가 왔으며 강도는 점점 세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저는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주를 관통하는,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진리는 다름 아니라, 성경이 오랫동안 가리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 안에 머뭅시다. 진리 안에 거합시다. 진리를 항상 품고 삽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의 전체 흐름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어내는 눈과 해석 전략 배워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파악하는 통독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용과 내용을 이어주는 해석전략입니다. 그래서 66 전체를 통일성 있게 바라보도록 돕는 프레임을 배워야 합니다. 

 

여름에 놀러가는 것도 좋고 쉬는 것도 좋지만, 성경을 배우기 위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어떨까요? 여러분의 여름을 응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진리를 주장하기 점점 어려워집니다. 도리어 조롱당하고 무시당하고 강퇴당할 있는 환경입니다. 그럼에도 진리 되신 예수님을 끝까지 진리로 믿고 따를 있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2. 성경은 우주적 진리를 배우는 최적의 교과서입니다. 여름 성경을 깊이 있게 읽고 배우겠다는 결심의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바울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바울이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라고 말할 , 그의 음성은 어떠했을까요? 상상력을 발휘해서 묘사하거나 연기해볼까요?     

 

2. 여름 성경을 배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 계획인가요? 만약 아직 계획이 없다면 함께 계획을 세워보시면 어떨까요?   

 

 

 

2021. 7. 11. 김혁수 

 

[본문_베드로후서 3:8-18] 

8사랑하는 여러분,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주님께는 하루가 같고, 년이 하루 같습니다. 9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10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것입니다.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11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속에서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13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하늘과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있도록 힘쓰십시오. 15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16바울은 모든 편지에서 이런 것을 두고 말하고 있는데, 가운데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거나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것입니다. 17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사실을 미리 알고, 불의한 자들의 유혹에 휩쓸려서 자기의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18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십시오. 이제도 영원한 날까지도 영광이 주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설교]

0. 들어가며 

- 조롱하는 사람들 vs. 무관심한 사람들

1992 10 28, KBS, MBC, SBS, 외신기자들이 마포구 성산동의 건물에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한국 방송사에 길이 남는 황당한 생방송이 진행되었습니다. 다미선교회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휴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장림 목사는 92 10월에 28 휴거된다고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휴거를 기다렸지만, 12시가 지났는데도 모두가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휴거는 없었고, 속은 사람들의 분노와 허탈함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의 조롱 소리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례에 세기말적 종말론이 몰아쳤지만,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휴거니 재림이니 혹은 하나님의 심판 같은 개념들에 대해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관심을 주지 않게 됩니다. 그전에는 관심이 있으니 조롱도 하고 비웃기도 하고 나아가 비난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종교이야기를 꺼내면 한귀로 흘려보냅니다. 관심을 두지 않기로 결심한 보입니다. 

 

- 베드로의 고뇌

 초대교회에서는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중에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을 보며 놀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어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석될 수도 있는데, 때의 제자들이 박해로 죽고, 나이들어 죽고 있는데, 여전히 오시지 않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은 점점 드세지고 설득력을 얻는 같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 마지막 당부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함께 성경을 읽어 볼까요? 

 

1. 그날이 늦어지는 이유

베드로는 그날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가지 설명을 붙입니다. 

 

1) 하나님의 시간 개념(8) 

첫째,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우리의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겁니다. 시편의 90:4절을 인용하고 있는데요. 시간을 만드신 , 영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의 시간 개념과 다르게 생각하실 있다는 점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상대성이론의 아이디어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중력에 의해 시간이 휘어질 있다는 사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움직이게 되면 시간이 멈춘다는 사실 말이죠.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었던 겁니다. 

 

우리의 인식과 하나님의 인식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의 시간 개념에 꿰어 맞추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땡깡과 비슷합니다. 

 

2) 회개와 구원을 위해(9, 15) 

둘째, 그날이 늦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9절과 1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9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15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멈추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라고 심판을 연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한 말씀을 적이 있었는데요. 로마서 2:4절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롬2:4) 

 

사실 저는 내용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되기도 하고 되기도 합니다.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믿는 사람들도 많아지지만 어쩔 없이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지는데, 그럴바에 빨리 오셔서 심판에 넘겨지는 사람이 줄어들게 하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질문에 갇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마도 날이 늦어지는 이유가 이게 다가 아닐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소원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유만으로 그분의 재림이 혹은 심판의 날이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해보입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우리가 그분의 뇌를 들여다 없다는 사실 말이죠.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때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림의 때를 결정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오실 수도 있겠죠. 

 

베드로는 그런 여러 가지 이유들을 설명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가지에 집중했던 거죠. 하나는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열망이었습니다. 저도 오늘은 가지에 집중해서 말씀드리는 좋겠습니다. 

 

2. 도둑같이 vs. 앞당기자

그런데, 재림의 때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크게 가지 신앙 양상을 띄는 같습니다. 하나는도둑같이 신앙입니다. 다른 하나는앞당기자' 신앙입니다. 

 

1) “도둑같이 신앙

먼저, 도둑같이의 신앙이 있습니다. 

 

10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도둑같이의 신앙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와 하나님의 심판의 때는 인간이 파악할 없다는 겁니다.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날짜와 시간을 알지 못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도둑같이 어느 순간 갑자기 임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손에 달렸다고 인정합니다. 문제는 인정이 도를 지나쳐서 우리의 역할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렸다고 하면서 인간적 노력의 포기를 선언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겁니다. 

 

에이, 어차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잖아요. 우리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죠

이렇게 말하는 신앙이 있을 있습니다. 

 

2) “앞당기자 신앙

도둑같이 신앙과 조금 다른 신앙이 있습니다. 바로앞당기자 신앙입니다. 

 

11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날을 앞당기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소리를 내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재림의 때를, 심판의 때를 앞당길 있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예스, 그럼요. 우리가 앞당길 있습니다. 단순히 기다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때를 앞당길 있습니다이렇게 대답할 확률이 더욱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으면 그날은 오게 겁니다. 그날이 오게 되는 조건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베드로가 제시하는 것은구원받는 사람들의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144,000명의 수와 관련이 있을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 24:14)

 

이렇게 성경은 앞당기자의 신앙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이 생각하신 조건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날과 시를 정하실 때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충족하는지 최종적으로 살피실 겁니다. 조건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겸손하게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최종 결정은 그분이 하시라고 그분의 왕되심을 인정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인간의 조급성과 성경 해석의 편협함이 시한부 종말론을 만들거나 혹은 재림을 위한 선교 목표를 정해서 자신의 부르심 이상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는 거죠. 이게 앞당기자 신앙의 부작용입니다. 

 

도둑같이 신앙이나 앞당기자 신앙이나 부작용이 찾아올 있습니다. 나태하게 기다리기만 한다거나 조급하게 행동주의에 빠진다거나 있는 거죠. 그럼 베드로가 생각하는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은 무엇인가요?  

 

3. 현재를 위한 베드로의 권면

- 관심의 변화_미래에서 현실로

첫째, 우리의 관심을 미래에서 현실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베드로야 말로 누군가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부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를 찾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아침밥을 먹이시고, 산책을 하기 시작하시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번이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죠. , 예수님은 베드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려주십니다. 어떻게 죽게 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가 뒤를 돌아다보면서 요한의 미래와 죽음은 어떻게 되는지 물은 겁니다( 21:21).  베드로는 누군가의 미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질문은 하는 모습이 그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는 미래 자체보다 현실을 중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1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14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날과 시는 우리가 없습니다. 최종결정은 그분이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현실 세계 속에서 거룩한 행실, 경건한 ,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도록 힘써야 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현실에서 힘을 쓰는 겁니다. 미래를 예측하며 그날을 계산하는 힘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죠. 성령님을 의지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겁니다. 실패하더라도 노력하는 겁니다.  

 

- 인내와 열정

둘째, 인내와 열정입니다.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라는 말이죠. 수많은 조롱이 있고, 심지어는 무관심이 팽배해져서 우리의 믿음이 약해질 , 재림의 때를 믿고 인내하라는 겁니다. 동시에 앞당기기 위해 열정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준에서 시기를 앞당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라고 권면하고 있죠. 

 

기디리고 앞당기기, 인내와 열정, 개념이 붙어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인내는 소극적으로 참는 것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부동자세로 오래 버티는 것을 상상하게 합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디는 것을 그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내에 멈추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앞당기기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진취적으로 뭔가를 계획하고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하라는 거죠. 역동성이 넘칩니다. 창의적인 생각들이 마구마구 쏟아집니다. 

 

인내는 열정을 만나고 열정은 인내를 만나야 열매를 맺습니다. 열정없는 소극적 인내는 자칫 나태한 회피 혹은 도피로 있습니다. 인내 없는 극단적 열정은 열광주의, 분파주의, 인간 중심 주의, 세속주의로 있습니다. 둘의 극단을 벗어나야 합니다. 인내와 열정이 만나야만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 생활을 있습니다. 

 

4. 나가며 

- 앞당기기

요사이 청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청년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때와는 달리 혹시 너무 미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실 미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미래,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의 날에 대한 관심이런 미래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너무 줄어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조롱을 우리도 모르게 내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렇게도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청년부는 인내와 열정 중에 어느 것이 부족할까? 아마도 열정이 조금 부족해보였습니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과 역할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사명과 역할을 우리는 쉽게 망각하고, 현실의 문제로 덮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내는 잘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이 약할 있다고 봤어요. 혹여 우리가 열정이 부족한 것이 맞다면, 우리에게 날을 앞당기기 위한 열정을 갖게 달다고 기도해야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가 우리의 뇌리와 마음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지치지 않는 인내와 열정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고 앞당기는 일에 헌신할 있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조롱과 무관심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나요?     

 

2. 우리 공동체가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노력하면 좋을까요? 

 

 

 

2021. 7. 4. 김혁수 

 

[본문_베드로전서 5:1-11] 

1나는 여러분 가운데 장로로 있는 이들에게, 같은 장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 2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떼를 먹이십시오억지로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3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4그러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변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5젊은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복종하십시오.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6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8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9믿음에 굳게 서서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0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11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아멘.

 

[설교]

0. 들어가며 

- 마지막 편지 

언제나 진실한 편지의 마지막은 마음의 울림이 있습니다. 편지는 만날 없음의 메타포입니다. 멀리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거나, 아님 죽음으로 이별했을 ,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편지의 글자 글자에는 마음과 감정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개의 편지를 읽어봤습니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아, 초등학생을 아들 태호님이 이미 떠나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편지를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이렇게 쓰여있더라구요. 

 

“아버지, 어머니 꿈에 얼굴 한 번 보여주세요. 
슬퍼하느라 애썼다 해주시고 이제는 조금 편안해지시라 말씀해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우리 가족이 시간이 흘러 모두 다시 만날 있는 그날까지 저는 저의 해야 일을 하며 언제나 아버지를 기억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들 태호 드림

 

가족의 슬픔이 여전히 묻어 납니다. 여전히 슬퍼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태호님이 그려집니다. 

 

하나의 편지는 유투버 새벽님의 남자친구의 편지였습니다. 최근 67 구독자 유투브 채널을 운영했던 뷰티크리에이터 새벽님이 혈액암으로 투병하다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여자친구를하늘로 보내면서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너를 만나서 많이 달라졌어. 사람은 고쳐쓰는거 아니라는 말, 틀렸다는 걸 내 스스로를 보면서 깨닫게 됐어. 그렇게 만들어 준 너에게 너무나도 감사하고 고마워. 너에게 배운 마음 주변에도 널리 퍼뜨릴게.

사실 아직까지도 너의 빈자리가 믿겨지지가 않아. 지금도 손만 뻗으면 닿을 있고 고개만 돌려도 너가 웃고 있을 것만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더라. 너라는 사람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비대했기에 그걸 비워내는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거 같아.

혹시 내가 그리움에 지쳐 힘들어 하는 밤에는 한번씩 속에 들러서 안부라도 전해줘. 그래야만 내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견뎌낼 있을거 같아.

이렇게 너를 다급하게 데려간걸 보면 하늘나라에서 급하게 천사자리가 하나 필요했나 보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않고 너를 온전히 드러내며 밝게 지냈으면 좋겠다.”

 

이렇게 편지에는 그리움과 애절함이 묻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편지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자주 편지를 주고 받지 못하기에 통의 편지에 마음과 정성을 담아 기록합니다. 방금 소개했던 그런 편지들처럼 돌아가신 분에게 전하는 편지는 아니지만, 초대교회 현실을 놓고 ,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서, 교회의 지도들을 위해서 붓에 힘을 주어 내려갔습니다. 그런 편지들의 마지막 부분들을 우리가 깊이 살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7월에는 마지막 편지라는 시리즈를 준비해봤습니다. 

 

- 초대교회 지도자

5-6월에는 초대교회 지도자 야고보 사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야고보서를 통해 전세계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며 인내하라고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지도자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죠. 오늘은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마지막에 무엇을 강조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떼를 먹이십시오(1-4)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의 번째는 바로 떼를 먹이라는 권면입니다. 일단 베드로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장로들이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떼를 최선을 다해 먹이고 살리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편지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당 지역들은 지금의 터키북부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지역의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졌으며 교회의 장로들은 교회를 운영함과 동시에 성도들을 양육하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떼를 먹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떼를 먹이라는 명령은 누가 누구에게 것이었죠?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이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기 , 부인하고 욕했던 베드로에게 다가가서 번이나 사랑 고백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때마다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죠. 베드로는 명령을 오랫동안 아니 평생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편지의 마지막 권면을 떼를 먹이라라고 했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정말 성공적인 교육을 했습니다. 베드로를 완전히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사람을 돌보는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어부였던 그를 이제는 양을 돌보는 목자의 소명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가지를 추출해 있는데요. 자발성, 사적 이해 불가, 섬김의 리더십, 목자장 임재 의식, 이렇게 가지입니다. 

 

1) 자발성

먼저, 자발성입니다.

2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억지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진해서 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목자의 삶을 사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억지로 하라고 해서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깨닫고 은혜를 알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다가 기쁜 맘으로 목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쁠까요? 복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일어났으며 하나님께서 나라에 같은 죄인을 불러 주신다는 사실이 기쁜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같은 죄인조차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어 교제할 있게 겁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가치를 추구할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교제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분이 나를 목자로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죠. 이런 과정에서 목자에 대한 부르심을 확인하게 되니 억지로 필요가 없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있습니다. 목자는 억지로 필요가 없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합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 

 

우리 청년부를 섬기는 운영위원분들도 모두 자발적으로 동의해서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 공동체의 섬김은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은혜 받은 대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신 일에 감동 받는 대로, 기쁘게 섬기시면 좋겠습니다. 

 

예배를 위해 많은 섬김이 필요합니다. 영감있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기도가 절실합니다. 

 

2) 사적 이해 개입 불가

목자의 태도 번째, 사적 이해 개입 불가입니다.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경우가 있을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와 관련해서 아주 강력한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아시죠? 예루살렘 교회 초창기에 리더십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여러 명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는 재산의 반만 헌금했으면서도 마치 모든 재산을 바친 것인양 거짓말로 자신들의 공적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속이려고 했는데, 이유는 아마도 교회내 영향력을 키워보려는 의도였던 같습니다. 여튼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됩니다. 베드로 앞에서 말이죠. 베드로는 하나님을 경외할 밖에 없었습니다( 5:11). 

 

목자로 섬기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서는 안됩니다. 과정도 깨끗하고 결과도 깨끗해야 합니다. 자신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람을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인적 네트워크는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데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목에서 많은 목자들이 실수하곤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목자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요 죄입니다. 

 

3) 섬김의 리더십

목자의 번째 태도는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다시 반복합니다. 섬김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합니다. 제자들을 위해 발을 씻기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떠오르게 합니다. 양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섬기지 않으면 양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섬기지 않으면 양은 우리를 이탈하게 되어 있습니다. 길을 잃곤 합니다. 격려의 말로, 선물로, 안부 전화로, 식사로 섬겨야 합니다. 

 

4) 목자장 임재 의식

목자의 번째 태도는 목자장 임재 의식입니다. 이게 정말 중요한데요. 인간 목자는 예수님을 목자로 두는 양입니다. 목자장이 누구시라구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본문에서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는 재림의 때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림의 때만을 기다릴 일이 아닙니다. 목자는 매일, 매주 목자장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목양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께 우리의 삶과 마음과 생각과 정서를 나눠야 합니다. 그분께 목양받지 않는 목자는 양을 먹이기 어렵습니다. 

 

=> 공동체의 장로는 누구? 

양을 먹이는 목자의 가지 태도가 무엇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자발성, 사적 이해 개입 불가, 섬김의 리더십, 목자장 임재 의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묻고 싶습니다. 우리 청년 공동체의 장로는 누구입니까? 우리 교회 전체의 장로님은 담임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분의 장로님과 부교역자분들이 계시죠. 교회 전체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송청만으로 놓고 때는 누구일까요? 물론 제가 목자가 겁니다. 그런데 저만 목자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목자로 부르심을 받는 분이 있습니다. 

 

2.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5-7)

이제 베드로의 당부 번째를 보겠습니다. 번째는 공동체의 장로들에게 부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번째는 젊은이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을 위한 내용입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으라입니다. 옷을 입으라 하니까 겉과 속이 달라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지 옷을 계속 입게 되면 점점 내면도 변화됩니다. 군복을 계속 입으면 군인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신부님들이 입는 로만 카라의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그렇게 행동해야 같은 느낌을 받고 실제로도 행동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겸손의 옷을 입으라는 겸손을 위해 매일 매일 노력하라, 겸손의 이미지로 자신을 덮으라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조금씩 변화되는 자신을 있습니다. 

 

- 상호 순종

처음에 젊은이들게 순종하라는 때문에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핵심 요지는 그게 아닙니다. 서로 순종하라가 본질입니다. 어른이라고 해서 함부로 명령하거나 강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목자는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목자의 태도이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장로님께 순종할 있습니다. 섬김의 리더에게 순종하는 것은 행운이요 축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이 젊은이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 상호 겸손

서로 겸손함으로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적 다이나믹을 고려할 , 참으로 어려운 과제입니다. 공동체는 언제나 힘과 정보와 돈을 가진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돈고 없고, 힘과 정보도 부족한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힘있는 사람은 언제나 가르치고 명령하는 입장에 서게 되고, 힘없는 사람은 반대의 입장에 있게 됩니다. 그러니 서로 겸손하게 순종하라는 말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직적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가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상호 겸손, 상호 순종이 작동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이 주는 불안함 

효율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상호 순종은 세계관적 갈등을 유발합니다. 로마 지배 체제 속에서 주인과 노예의 계급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상호 순종을 가르쳤습니다. 당연히 세상의 가치관과 부딪힙니다. 과연 교회가 살아남을 있을까 불안과 걱정이 몰려 옵니다. 로마의 군대 조직 같이 일사분란하게 명령의 체계 속에서 움직여야 교회가 살아남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이런 불안과 염려에 대해 베드로는 어떻게 말합니까? 

 

7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목자장되시는 예수님,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서로 순종하면서 결정해도 됩니다. 조금 늦게 가도 괜찮습니다. 모두가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겁니다. 몇몇 엘리트들에 의해 너무 빨리 달려가면 교회는 기본적 성품을 잃어버립니다. 교회는 모두의 속도를 배려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3. 견고한 성에 거하십시오(8-11) 

이제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의 번째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제목을 달았습니다. 견고한 성에 거하십시오. 사람들은 8-9절에 무게 중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10절에 무게 중심이 있는 같습니다. 그래서 견고한 성에 거하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실까요. 

 

- 사단의 공격

베드로는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공격할 사람들을 찾아 다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악마를 대적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단의 존재를 가장 강력하게 경험했던 사람이 누군줄 아십니까? 맞습니다. 베드로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가야 한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강하게 꾸짖었던 인물이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8:33) 이건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매번 설교 때마다 때의 일을 말하곤 했을 겁니다. 베드로는 사단이 어떻게 자신을 공격했는지 알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어떻게 물고 늘어지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단이 어떻게 도망갔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대적하는 겁니다. 물러가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 고난

고난과 박해가 찾아오면 개개인의 약점이 더욱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약점은 사단이 공격하기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사단은 사람의 약점을 파고 듭니다. 두려움, 분노, 원망, 과도한 자신감, 외로움, 교만, 자신만 특별하다는 의식, 우월감, 열등감, 중독적 증상이런 심리적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고난과 박해는 각자의 약점을 10 100배로 증폭시킵니다. 여기까지가 8-9절의 내용입니다. 

 

8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9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악마와 맞서 싸우라는 것이 가장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매우 독특한 표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다가올 겁니다. 

 

- In Christ 

그런데 이제 10절을 읽어봅시다. 

10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10절은 너무 평범한 내용이라 주목도가 낮습니다. 차라리 악마와 대적해서 싸우는 것이 긴장도를 높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10절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악마와 싸우러 나갈 생각입니까! 매일 매일 악마와 사단이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건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없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악마를 대적하는 영적 전투를 해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전장터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디로 부르셨나요?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부르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통치가 가득한 그분의 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안에서 우리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여러 고난 속에서 온전케 되고 강건해 지고 튼튼해 지는 겁니다. 혼자 악마와 싸울 없습니다. 혼자 악마를 대적할 없습니다. 그건 상당히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십시오. 안에서 더욱 튼튼해 지십시오. 그리고 어느 순간 찾아오는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순서가 올바릅니다. 

 

=> Jesus castle

예수님 성에 거하십시오. 내가 그분 안에 있는지 아님 나홀로 넓은 들판에서 악마를 찾아 헤메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베드로는 혼자 싸워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밤에 자신이 차고 있는 칼을 꺼내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렇게 열성적으로 싸우려고 했던 그는 그날 새벽에 예수님을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그의 외로운 싸움은 성공했나요? 악마를 제대로 대적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가 회복되고 다시 튼튼한 기초를 놓은 곳은 어디였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이 차려 주시는 아침 밥을 먹을 때였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주께서 아십니다.’

그래 그럼 양을 먹이라 

 

그곳이 바로 예수님 성이었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아침을 먹는 곳이 예수님 성안입니다. 베드로는 깊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 튼튼하게 나가는 겁니다. 그래야 때로 악마를 대적할 있습니다. 

 

4. 나가며 

- 의식주 in Christ

어떻게 하다보니, 오늘은 먹고, 입고, 사는 것에 대해 말하게 되었습니다. 떼를 먹이라, 겸손을 입어라, 예수님 성에서 살아라. 이렇게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다보니, 베드로 전서도 리더 교재로서 적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 지도자가 보내는 마지막 권면매우 감동적고 유용합니다. 야고보와 더불어 베드로를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리더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목자의 가지 태도를 듣습니다. 자발성, 사적이해개입불가, 섬김의 리더십, 목자장 임재 의식, 정말 보물같은 요소들입니다. 게다가  겸손과 상호 순종도 교회 안에서 이뤄져야 태도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안에 살면서 더욱 튼튼해지고 강건해져서 악마를 대적할 있게 됩니다. 그렇게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이겨냅니다. 베드로의 인생 전체가 마지막 권면 안에 담겨 있습니다. 갑자기 편지를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은 여러가지 권면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한꺼번에 지킬 수는 없겠죠. 그런데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리더의 부르심을 듣는 겁니다. 목자로의 부르심을 듣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들이 목자로 자라길 원하십니다. 송청 공동체를 위한, 크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목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부르심을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저를 찾아 주세요. 그리고 목자의 훈련을 받으십시오. 야고보를 통해서도 훈련을 받으시고, 베드로를 통해서도 받으시고, 바울을 통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훈련을 받으세요. 그렇게 성장하는 겁니다. 

 

리더로의 부르심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를 키우는 일에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신앙의 여정이 다르고, 출발점도 속도도 여행지도 다릅니다. 천편일률적으로 모든 분들이 한날 한시에 리더가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리더로의 부르심은 언젠가는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세요.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고 리더로의 부르심, 목자로의 부르심을 소중히 받으십시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소원을 말씀해 주세요. 제게 말씀해 주세요. 피트니스 센터에 가면 개인 pt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PT 하면 되죠. 

 

목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우리를 목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반응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각자의 신앙 여정 속에서 언젠가는 목자가 되길 바라십니다. 혹여 지금 그런 부르심을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 말씀드려 봅시다. 저를 사용해 달라고, 좋은 목자가 되게 달라고 말입니다.  

 

2. 이미 목자로 섬기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선생님으로 섬기시는 , 청년부의 소그룹 리더로 섬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오늘 말씀처럼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섬기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베드로는 목자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중에 가장 중요해 보이는 태도는 무엇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2. 목자로의 부르심(리더로의 부르심) 느껴본 적이 있나요? 언제 우리는 리더로의 부르심을 느끼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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