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1월 28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다. 셈은, 홍수가 끝난 지 이 년 뒤, 백 살이 되었을 때에 아르박삿을 낳았다. 11   셈은 아르박삿을 낳은 뒤에, 오백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12   아르박삿은 서른다섯 살에 셀라를 낳았다. 13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은 뒤에, 사백삼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14   셀라는 서른 살에 에벨을 낳았다. 15   셀라는 에벨을 낳은 뒤에, 사백삼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16   에벨은 서른네 살에 벨렉을 낳았다. 17   에벨은 벨렉을 낳은 뒤에, 사백삼십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18   벨렉은 서른 살에 르우를 낳았다. 19   벨렉은 르우를 낳은 뒤에, 이백구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20   르우는 서른두 살에 스룩을 낳았다. 21   르우는 스룩을 낳은 뒤에, 이백칠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22   스룩은 서른 살에 나홀을 낳았다. 23   스룩은 나홀을 낳은 뒤에, 이백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24   나홀은 스물아홉 살에 데라를 낳았다. 25   나홀은 데라를 낳은 뒤에, 백십구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26   데라는 일흔 살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하란은  롯을 낳았다. 28   그러나 하란은 그가 태어난 땅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29   아브람과 나홀이 아내를 맞아들였다.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이고,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이다.  하란은 밀가와 이스가의 아버지이다. 30   사래는 임신을 하지 못하여서, 자식이 없었다.31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32   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

 

 

주석

30절: 후손을 낳지 못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한 가정에 내려진 가장 큰 불행이었다. 그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상속이 이루어지지 못하며 노년에 부부를 돌보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IVP 성경 배경주석).

 

——

1. 수명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도 가능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건강나이는 그렇게 높지는 않다. 

다들 한 두 가지 만성 질환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수명이 200, 300 이상으로 늘어난다면 과연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 

최근에 본 영화, 마블 이터널스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했던 테나는 너무 오랜 삶의 기억으로 광기를 뿜어낸다. 

너무 오랜 살면, 삶의 기억들이 혼란을 일으켜 정말 점점 미쳐가지나 않을까 싶다. 

숱한 고통, 아픔, 슬픔의 트라우마가 맑은 정신을 해치고 인간 본성의 악을 분출하게 되지는 않을까? 

 

셈의 자녀들은 참 오래도 살았다. 

그 오랜 세월들을 살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했을까 싶다. 

본문의 족보에는 들어가지 않은 그 긴 세월의 무게와 반복이 주는 허무감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갑자기 걱정과 의문이 동시에 든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들은 계속해서 아들딸을 낳았다는 점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그들의 삶의 활력이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자녀의 출생은 인간의 삶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다. 

그전에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자신의 몸과 에너지는 자녀들에게로 이양된다. 

그렇게 점점 쇠퇴해가는 몸과 정신력을 보면서 허망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이유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성장하고 성숙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분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녀를 통해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삶의 의미의 중요한 부분을 깨우칠 수 있다는 점이다. 

 

2. 이주 

그 소중한 경험을 아브람은 하지 못하고 있다. 

고대의 가장 융성했던 도시 바벨론 지역은 무수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도시의 광장을 채웠다. 

어린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가득하다. 

아브람은 아이가 없었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귀에 거슬렸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대도시를 떠났던 것은 아니나, 아이들의 웃음 소리에 그렇게 자주 거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비교의식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아이가 없다는 것이 고대 사회에 어떤 의미인지 아브람은 잘 알고 있었다. 

쓸쓸히 노년을 맞이해야 한다. 

 

이주를 선택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출발한 것이다. 

12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놓고 생각할 때, 아마도 하나님은 데라와 아브람에게 동시에 나타나셔서 가나안으로 출발하라고 말씀하셨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이사를 하기 시작한다. 

이웃들이 묻는다. 어디를 가냐고… 

가나안이라고 대답하자 다들 의아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비웃는다. 

그렇게 먼 곳에 가야할 이유가 무엇인지 다들 물었을 것이다. 

설득될만한 정당한 이유가 없다. 

가나안 땅이 더 좋은가? 그럴리가… 

데라의 가족과 그에게 딸려있는 식솔과 가축들이 상당했다. 

캐리어 하나 들고 비행기 티켓 하나면 세계 어디든지 가서 정착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다. 

몇개월간 준비해야 한다. 

대규면 이주다. 

대도시 바벨론과 그 바벨론의 영향하에 있었던 주변 도시들로부터의 탈출이다. 

도시 문화를 거부하고 완전히 유목민의 삶을 살아야 한다. 

결코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몰고 올 일이다. 

 

부르심의 자리를 옮기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하지만 가라시면 가야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영원히 거주할 현세의 땅은 없다. 

부르심에 따라 거주지를 옮긴다. 

이 마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

하나님, 

아브람의 인생을 묵상해봅니다. 

큰 족속을 이루었던 자신의 조상들에 대해 그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몇백년에 걸쳐서 아들 손자 증손 고손 들을 낳으며 별처럼 빛났던 자신의 조상을 기억했을 겁니다. 

아마도 자신도 그런 조상님들의 대를 이어 아이들을 낳고 싶었겠죠. 

그러나 그게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할수록 초라해집니다. 

인생은 초라한 순간으로 종종 채색됩니다. 

남과의 비교가 많아지면 더욱 심해집니다. 

 

하나님, 

비교하지 않고 주님이 저에게 주신 소명의 자리를 잘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부르시는 곳으로 언제든지 이주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항상 마음 준비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2년 01월 27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   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NIV

Then they said, “Come, let us build ourselves a city, with a tower that reaches to the heavens, so that we may make a name for ourselves; otherwise we will be scattered over the face of the whole earth.”(4절)

 

 

주석

9절: 바벨이란 ‘신의 문’이란 뜻이고 바벨론은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신에게 가까운 곳이란 자긍심이 있었다. 그 도시는 스스로 고대 세계의 종교적, 지적, 문화적 중심지요 인간 문명의 걸작품이라고 간주했다. 그런데 9절은 바벨은 결코 ‘신의 문’이 아니라, ‘잡탕’이요, ‘혼잡’ 혹은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바벨론의 무너진 지구라트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있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보여 주고 있다(IVP 성경주석).

 

——

인간의 성취는 언제나 놀라움을 안겨준다. 

핵융합 발전기를 만들거나, 시간 결정이라는 신비로운 현상을 관찰하거나, 양자 역학의 원리를 컴퓨터에 이용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놀랍기만하다. 

스마트폰만으로도 입이 벌어지는데, 우주 여행의 시대가 성큼 다가온 것도 놀라움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마 바벨탑을 처음 만들었을 때의 사람들도 그런 생각과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자신들의 위대함, 자신들의 영광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기술이 고도화되고,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현실이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작은 존재들이며, 하나님을 뛰어 넘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선을 넘었을 때, 인간의 성취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두고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군사를 동원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인류의 성취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도, 

교만하고 악한 사람들이 그걸 사용하는 순간, 

인류는 공멸이다. 

 

더욱 겸손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 안전하게 기술을 다뤄야 하며,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성찰을 끊임없이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남을 죽이는 일이 더욱 광범위하고 불가역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자, 바벨탑을 쌓을 것인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것인가? 

오늘 본문의 도전이다. 

 

——

주님, 

그 어느 때보다 더 고도화된 기술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더욱 겸손해지게 해주세요. 

인간의 나약함과 완악함을 기억하게 해주세요. 

죄악으로 인해 무너지는 인생들을 살펴보게 해주세요. 

그리고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해 주세요. 

저도 모르게 인간의 위대함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박수를 치는 거야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자칫 교만해져서 당신이 없이도 안전하고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오직 예수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삼고, 기술의 발전에 현혹되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2년 01월 26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1   다음은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이다.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다. 홍수가 난 뒤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다.2   야벳의 자손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이다. 3   고멜의 자손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이다. 4   야완의 자손은 엘리사와 스페인과 키프로스와 로도스이다. 5   이들에게서 바닷가 백성들이 지역과 언어와 종족과 부족을 따라서 저마다 갈라져 나갔다.

6   함의 자손은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이다. 7   구스의 자손은 쓰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이다. 라아마의 자손은 스바와 드단이다. 8   구스는 또 니므롯을 낳았다. 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이다. 9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니므롯과 같은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10   그가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 시날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이다. 11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가서,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를 세우고, 12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는  레센을 세웠는데, 그것은 아주 큰 성이다. 13   이집트는 리디아와 아남과  르합과 납두와 14   바드루스와  가슬루와 크레타를 낳았다.  블레셋이 바로 크레타에게서 나왔다.15   가나안은 맏아들 시돈을 낳고, 그 아래로, 헷과 16   여부스와  아모리와 기르가스와 17   히위와 알가와 신과 18   아르왓과 스말과 하맛을 낳았다. 그 뒤에 가나안 족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19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랄을 지나서, 멀리 가사에까지 이르렀고, 거기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서, 라사에까지 이르렀다. 20   이 사람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부족을 따라서 갈라져 나간 함의 자손이다.

21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 22   셈의 자손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다. 23   아람의 자손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이다. 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다. 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해서 벨렉이라고 하였다. 벨렉의 아우 이름은 욕단이다. 26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다. 이 사람들이 모두 욕단의 자손이다. 30   그들이 사는 곳은 메사에서 스발에 이르는 동쪽 산간지방이다. 31   이 사람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부족을 따라서 갈라져 나간 셈의 자손이다.32   이들이 각 종족의 족보를 따라 갈라져 나간 노아의 자손 종족이다. 홍수가 난 뒤에, 이 사람들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와서,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주석

창세기에서 항상 그렇듯이 이 목록은 신학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즉, 셈의 선택된 계보를 선택받지 못한 다른 계보들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선택되지 않은 계보는 항상 선택받은 계보 앞에 놓인다. 즉 셋 앞에 가인(4-5장), 이삭 앞에 이스마엘(25장), 야곱 앞에 에서(36-37장)의 순서다(IVP 성경주석).

 

 

———

잘 모르는 사람들의 족보를 들여다 보는 것 만큼 지루하고 고달픈 것은 없다. 

나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족보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아깝다라는 생각이 찾아온다. 

왜 이런 족보를 읽어야 하는가? 

 

족보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그 족보가 가리키는 방향이 의미가 있다. 

족보는 누구에게로 향한는가? 

 

창세기의 족보는 아브람에게로 향한다. 

수 많은 민족들이 만들어졌지만, 약속을 받아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에게 도달한다. 

그리고 그 아브람의 자손들 중에서도 약속과 믿음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성경은 눈은 향한다. 

 

하나님은 전 세계의 역사에 관심이 있으시다. 

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시다.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시다. 

동로마, 서로마, 그리고 중세의 교회를 통해 통치되던 지중해와 유럽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으시다. 

동시에 스페인, 영국, 포르투칼, 프랑스, 미국 등의 패권 국가들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이 있으시다. 

그러나 그분 관심의 초점은 당신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마카비, 그리고 예수님…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믿음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신다. 

 

그 믿음의 삶을 오늘도 살아가고 싶다. 

전쟁의 소문이 또 들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멀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자칫 러시아와 미국의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군사 대국들의 전쟁은 지구 멸망의 전조다. 

전쟁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다. 

자유와 인권 의식이 그 어느 시기보다 높아진 현대에도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생명과 평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절대 권력의 욕망 앞에 흩어지고 멀어진다. 

 

이런 고통의 순간에도 우리는 약속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살 수 있는가? 

오늘도 질문 속에 묵상을 마친다. 

그리고 간구로 나아간다. 

 

——

하나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기는 하지만, 제 마음 속에 남는 이름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이 제 뇌리에 남습니다. 

전쟁과 싸움이 그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믿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관심을 두십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도 보고 계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욕심과 과욕이 전쟁을 불러 일으킵니다. 

부의 편중이 비교와 과욕을 낳아서 세상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주님, 전쟁을 막아주세요. 

죽음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2년 01월 14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4   그 무렵에,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5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7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NIV

The LORD saw how great the wickedness of the human race had become on the earth, and that every incl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uman heart was only evil all the time. The LORD regretted that he had made human beings on the earth, and his heart was deeply troubled. (5-6절)

 

 

주석

4절: ‘네피림’은 인종적 칭호가 아니라 특정한 유형의 개인에 대한 묘사다. 민수기 13:13에서 그들은 아낙 자손들과 함께 가나안 땅의 일부로 밝혀진다. 아낙 자손은 거인들로 묘사되지만, 네피림은 거인들로 간주할 만한 이유는 전혀 없다. 그 용어는 영웅적 전사들, 아마도 무술 수련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말일 가능성이 더 크다(IVP 성경배경주석).

 

 

——

본문 해석이 어려움이 있다. 

하나님이 아들들은 누구며, 사람의 딸들은 누군가? 

쉽게 답하기, 해석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인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손쉽게 해결하는 길이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자칫 가인의 후손들이 문명/문화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죄인들로 낙인찍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문명 자체를 죄로 여기는 것은 지극히 이원론적 접근이다. 

 

IVP 성경난제주석에서도 다루고 있듯이,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당시 권력을 쥐고 흔들던 고관대작, 사람들의 딸들이란 평범한 여인들일 것이다(월터 카이저). 욕망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이 평범한 여인들을 자신들의 힘과 권세로 마음대로 데리고 가서 아내로 삼았다는 점이 문제다. 그런 사람들이 오래 살게 되면, 그들의 후손은 너무 많아지고, 권력이 더욱 강해진다. 하나님은 그들의 수명을 줄이시는 방법을 쓰신다. 

 

하나님은 후회하시는가? 

이 부분도 어려운 점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후회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신다.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찼다. 

가인의 죄, 즉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라멕의 죄, 즉 자신의 욕망대로 약자를 취하는 폭력적 일상이 가득하다. 

권력자의 아들들이 평범한 사람들을 농락하며, 폭행한다.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인간의 날 수(수명)를 줄여봐도 죄악의 밀도는 점점 커진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인원도 줄었을 뿐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것과 별개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후회하신다. 

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당신에게 반역할 수 있는 인간을, 서로를 죽이는 인간을, 왜 왜 왜 만들었는가? 

 

천만다행으로 노아는 그 죄악에서 벗어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한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은혜를 베푸신다. 

노아를 긍휼히 여기신다. 

 

어찌보면, 후회라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후회에 갇혀사는 것은 인생을 허비하는 일이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삶을 되돌아 보면서 후회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 그 자체가 비인간적이다. 

인간의 선택은 좋은 선택, 나쁜 선택이 혼재한다. 

꼼꼼히 되돌아보면 후회스런 선택이 분명히 있었다. 

억지로 후회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그건 그대로 인정하자. 

다만 후회의 감정이 산을 이루어 쏟아지게 만들지는 말자. 

 

후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다. 

그분은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사랑으로 대하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이런 하나님을 바라본다. 

 

 

——-

은혜의 하나님, 

그 옛날, 노아시대 하나님의 분노, 진로를 바라봅니다.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슬프시고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지… 

인간의 죄악이 선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완전히 망가뜨릴 때.. 

그 때 하나님이 느끼셨던 감정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 

오늘 저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제 주변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아픈 사람이 참 많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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