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5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4 하나님이 발람에게 나타나셨다. 발람이 하나님께 아뢰었다. “일곱 제단을 제가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제단마다 수송아지와 숫양을 한 마리씩 바쳤습니다.”

5 주님께서는 발람의 입에 말씀을 넣어 주시면서,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그대로 말하라고 하셨다.

6 발람이 발락에게로 돌아와서 보니, 발락이 번제물 곁에 그대로 서 있었다. 모압 고관들도 모두 그와 함께 있었다.

7 발람이 예언을 선포하였다. “발락이 나를 시리아에서 데려왔다. 모압의 왕이 나를 동쪽 산골에서 데려왔다. 와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야곱을 저주하라 하고 와서 이스라엘을 규탄하라 하였지만,

8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떻게 저주하며, 주님께서 꾸짖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떻게 꾸짖으랴!

9 바위 산꼭대기에서 나는 그들을 내려다본다. 언덕 위에서 나는 그들을 굽어본다. 홀로 사는 저 백성을 보아라.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을 여느 민족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0 티끌처럼 많은 야곱의 자손을 누가 셀 수 있겠느냐? 먼지처럼 많은 이스라엘의 자손을 누가 셀 수 있겠느냐? 나는 정직한 사람이 죽듯이 죽기를 바란다. 나의 마지막이 정직한 사람의 마지막과 같기를 바란다.”

11 발락이 발람에게 말하였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대적들을 저주해 달라고 당신을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12 발람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나의 입에 넣어 주시는 말씀을 말하지 말란 말입니까?”

 

주석

8-10절. 발람의 첫 번째 예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으실 것임을 강조하며, 그들이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IVP 성경주석, 260쪽).

 

[주님께서 입에 주시는 말씀]

발람에게 나타난 분은 정말 하나님이 맞는가?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입에 자신의 말을 넣어 주시는가? 

지식 체계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적 경험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는가? 

모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나?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느꼈고, 그 말씀이 자신의 입으로 나오는 것을 경험했다. 

그걸 막을 힘도 없고, 의지도 없다. 

하나님은 발람의 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이방신을 섬기던 발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말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고 따라하려고 하셨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방법이었다. 

누구 안에 거한다는 성경 어법의 의미는, 육체적, 정신적 싱크로라기 보다, 상대의 말과 행동을 거의 그대로 따라하는 거라고 보여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하고, 그분의 행동을 따라해야 한다.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따라하고,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해야 한다. 

 

예수님이 축복하는 말을 따라하고, 예수님이 저주하는 말을 따라한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회복을 축복하셨고,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저주하셨다.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고, 세상에서 지켜지도록 기도하셨다. 

그분의 기도는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그분의 비판은 나의 비판이 되어야 한다. 

정직하지 못한 자, 위선으로 자신을 가리우는 자는 비판 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순도 높은 기준을 자주 언급하고,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 참으로 높다는 점이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실하다. 

 

발람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했던 것에 비하면, 발람은 이방인임에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했던 사람이다. 

누가 의인인가? 

 

[기도]

저에게 주님의 말씀을 입에 넣어 주소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더욱 적극적으로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특히 70주년 관련해서 소통해야 할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지혜롭게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 주세요. 

 

전쟁이 속히 그치도록 이끌어 주소서. 

악한 생각과 정서를 거두어가소서. 

악한 영의 속임수에 속지 않도록 우리 모두를 이끌어 주소서. 

 

운동을 하지만, 또 아프기도 합니다. 

허리가 불편합니다. 

잘 낫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6년 10월 12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 지은 시]

1 주님,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2 나를 빗대어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는다” 하고 빈정대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셀라)

3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나를 에워싸주는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이시니,

4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셀라)

5 내가 누워 곤하게 잠 들어도 또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6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7 주님, 일어나십시오. 나의 하나님, 이 몸을 구원해 주십시오. 아, 주님께서 내 모든 원수들의 뺨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를 부러뜨리셨습니다.

8 구원은 주님께만 있습니다. 주님의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셀라)

 

주석

이 시의 배경은 사무엘하 15:13-17:24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하던 때의 사건을 담고 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는 데에는 꼬박 이틀 밤이 걸렸다(IVP성경주석, 662쪽).

 

[최악]

아들이 반역을 일으켰다.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인생이 이렇게 허망하다니… 

최악 중의 최악이다.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곳이 없다. 

아들을 따르는 자들도 다윗을 죽이려든다. 

다윗을 따르던 자들도 다윗은 이제 죽음 목숨이라고 수군거린다. 

이런 상황이면, 자포자기 할 만도 하다.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본다. 

“주님께 소리를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신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자기 자신을 저주하거나 아무말 없이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가장 나은 것처럼 보인다. 

다윗은 달랐다. 

그 와중에도 기도시를 쓰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조용히 앉아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잘 모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대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조급하지 말고, 오늘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가정에 대소사가 너무 많다. 

다 챙기기가 어렵지만, 포기할 수도 없다. 

지혜롭게, 차분하게, 하나님 나라의 대원칙을 따라 살아라. 

 

하나님 나라의 대원칙, 아주 고상하고 순도높은 기준은 마태복음 5-7장 산상수훈에 담겼다. 

다시 읽어보니 도대체 지킬 수 없는 것들이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기준은 마음 자체의 완전한 변화다. 

소금과 빛으로 살아내야 한다. 

마음 속 분노, 음욕, 탐욕을 버려야 한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아주 분명히 밝혀 주셨다. 

그런면에서 마태복음 5:3의 첫 문장은 큰 울림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마음의 문제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기도]

최악의 상황 중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하나됨이 무너진 교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됨이 무너진 공동체가 너무 많습니다. 

주여, 하나됨을 위한 공동체의 구조를 연구하게 하소서. 

인원, 공간, 시간, 예식, 행동방식, 교제, 기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하나됨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까?

시대가 변하고 기준이 변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기도가 힘을 발휘할 수 있나요? 

예수님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는 방법 밖에 없을 겁니다. 

12명 정도를 돌보고 사랑하는 소그룹 리더들이 예수님을 닮아야 할 겁니다. 

인원은 (12+1)*12+1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57명, 최대 160명… 

어느 정도가 하나됨을 유지하는 최적의 인원일까요? 

하나됨의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주님, 저에게 지혜를 주소서.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12+1)*3=39명. 

혹시 이걸까요? 

서로 깊이 사랑하고 격려하는 최소단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게 하시고, 발견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그 일을 이루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6년 10월 07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10 이스라엘 자손은 그 곳을 떠나서는 오봇에 이르러 진을 쳤다.

11 오봇을 떠나서는 이예아바림에 이르러 진을 쳤다. 그 곳은 모압 맞은편, 해 돋는 쪽 광야이다.

12 또 그 곳을 떠나서는 세렛 골짜기에 이르러 진을 쳤다.

13 또 그 곳을 떠나서는 아르논 강에 이르러 북쪽 강변을 따라 진을 쳤다. 그 곳은 아모리 사람의 경계로 이어지는 광야이다. 아르논 강은 모압과 아모리 사이에 있는 모압 경계이다.

14 그래서 ‘주님의 전쟁기’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수바 지역의 와헙 마을과 아르논 골짜기와

15 모든 골짜기의 비탈은 아르 고을로 뻗어 있고 모압의 경계에 닿아 있다.”

16 그들은 그 곳을 떠나서 브엘에 이르렀다. 브엘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을 모아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마” 하고 말씀하신, 바로 그 샘이 있는 곳이다.

17 그 때에 이스라엘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샘물아, 솟아나라. 모두들 샘물을 노래하여라.

18 지도자들이 파고, 백성의 원로들이 왕의 통치 지팡이들로 터뜨린 샘물이다.” 그들은 그 광야를 떠나 맛다나에 이르렀다.

19 맛다나를 떠나서는 나할리엘에 이르고, 나할리엘을 떠나서는 바못에 이르렀다.

20 바못을 떠나서는 비스가 산 꼭대기 부근,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모압 고원지대의 한 골짜기에 이르렀다.

 

주석

14, 17절. 이 여행 기록에는 두 개의 인용문이 등장한다. 하나님 고대 기록인 ‘여호와의 전쟁기’에서,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노래에서 인용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여정을 도우셨음을 기억하며 기쁨으로 노래했다(IVP 성경주석, 259쪽).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시간]

불뱀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아주 특별한 사건이다. 

성경도 어쩔 수 없이 특별한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모든 사건 사고를 다 강조해서 적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책의 한계다. 

발화의 한계다. 

모든 빛은 사건의 기록이다. 

광자는 어떤 순간도 버리지 않는다. 

광자의 집합은 역사의 집대성이다. 

빛을 제외하면 그 어떤 것도 모든 것을 다 담지 못한다. 

선택과 배제가 난무한다. 

특별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문장과 문장 사이, 행과 행 사이에는 숱한 사건과 사람과 시간이 존재한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에 따른 선별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계속 여행한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땅을 향해 수십만명이 움직인다. 

그 여정을 누군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면, 장엄함과 두려움과 감동이 섞일 것이다. 

불평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 속에는 찬양하는 자들도 있었다. 

불평하는 자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주목되었다. 

여기서는 찬양하는 자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17절에서 이스라엘은 노래를 부른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다.

 

삼위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가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2026년 10월 06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 네겝 지방에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은,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서, 이스라엘과 맞서 싸워, 그들 가운데서 얼마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2 그 때에 이스라엘이 주님께 다음과 같은 말로 서약하였다. “주님께서 이 백성을 우리 손에 붙이시면, 우리는 그들의 성읍들을 전멸시키겠습니다.”

3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시니, 이스라엘이 그들과 그들의 성읍들을 전멸시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4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5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8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주석

4절. 에돔이 영토 통과를 거부하자, 이스라엘은 에돔 땅을 우회하는 길을 택해야 했으며, 이는 홍해 쪽으로 멀리 돌아가는 여정을 의미했다(IVP 성경주석, 257쪽).

 

[승리와 불평]

가나안 성읍을 물리쳤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모았다. 

“주님께서 이 백성을 우리 손에 붙이시면, 우리는 그들의 성읍들을 전멸시키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그리고 그들의 간구와 기도가 상달되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광야생활하던 그들에게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지헤를 주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곧 마음에 불평이 올라왔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부족하다. 

만나는 보잘것없는 음식이 되었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이해가 된다. 

40년 가까이 먹어왔다. 

이렇게 저렇게 먹어도 같은 음식이다. 

맛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맛집을 찾아 다니는 한국인들은 저런 상황에서 더 불평했을 것이다. 

지금 같은 현실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식욕은 성욕보다 강하다. 

먹지 못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단순한 식욕이야 건강의 상징이다. 

식탐은 다르다. 

식탐은 우상숭배다. 

욕구를 탐하면 그 욕구로 다른 필요들이 줄을 선다. 

영적인 필요, 관계의 필요가 뒤로 빠지고, 오직 탐욕이 앞장선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점점 뒤로 빠진다. 

그분이 하신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불평과 불만이 쌓인다. 

 

최근에 내가 경험하는 것들이 그렇다. 

갑자기 험한 일들이 쏟아졌다. 

장모님의 응급실, 딸아이의 병원, 아들녀석의 수술, 욕실 누수, 심지어 밭솥 고장… 

할 일이 많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챙겨야하고 신경써야 할 일이 많은데, 과연 감사함으로 감당하고 있지 못하다.

짜증과 불만… 

허리까지 아프니 더욱 힘들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청개구리 볼따귀처럼 불평이 가득하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줄어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갔다.

다시 중심을 잡자. 

주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자. 

예수님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을 기억하자. 

 

뭔가 사회에 선한 영향을 주고 싶었으나, 미미하다. 

미미하다고 내 존재가 작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신 일들을 할 뿐이다. 

그 일들을 좀더 잘 하고 싶을 뿐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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