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19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주석

13-15절. 구원 행위는 “피”라는 용어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되는데, 피는 희생 제사 곧 죄인과 하나님의 화해 수단으로서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로써 믿는 이들을 위해 이방인과 하나님 사이의 장애물이 제거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애물도 무너진다. 이 장애물은 모세의 율법으로, 모세 율법은 그 권위를 받아들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분리했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따돌림 

할례자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를 자신들의 몸에 품고 사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자랑스러움을 너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판단, 정죄, 그리고 따돌렸다. 

판단과 정죄는 개인의 내적 활동이라면, 따돌림은 외적 활동이며, 타인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주는 행위다. 

개인주의 문화가 발달하기 훨씬 이전, 가부장제의 공동체주의 사회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나마 유대인이 인구통계학적으로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에게 따돌림 당하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교회로 들어오면 유대인의 비중도 상당히 늘어났기 때문에, 그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이유로 이방인 출신들을 따돌린다면 이는 상당히 큰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삶의 기준, 윤리/도덕적 기준이 상당히 높고 확고했다. 

그들에게 판단받고 정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버거웠다. 

 

사실 바울조차도 이방인들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정죄적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약속과 무관하게 하나님도 없이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시키는 대로, 욕망에 따라 움직이던 사람들이었다. 

 

2. 자기 몸으로 부숨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부서짐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으셨다. 

유대인은 정죄하고, 이방인들은 죄책감과 함께 저항감으로 반항했을 것이다. 

서로 사이가 좋을 일이 없었다. 

교회가 하나되어야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현실 교회는 이에 턱없이 못미쳤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내에서도 싸웠다. 

바울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징에 대한 강조였다. 

자기 희생으로 갈등의 두 집단을 하나로 묶으셨다. 

자기 몸을 부수고 망가뜨려서 막힌 담을 허무셨다. 

부러진 다리를 이어주셨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던 아담과 하와를 하나로 묶으셨다. 

두 그룹을 하나가 되게 하여 한 몸으로 만들어 주셨다. 

 

서로 갈등하는 두 그룹을 중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신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고, 권한이 많아질수록 꼭 해야 하는 것이 중재다. 

서로 이해 관계가 팽팽할 때, 그 관계를 풀어가는 것이 중재다. 

결국 갈등 중재는 자기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가 없이는 중재가 불가능하다. 

 

그 마음을 다시 배운다. 

자기 몸을 부수어 한 몸을 이루신 그분을 바라본다. 

 

[오늘의 기도]

극단적인 두 그룹을 하나로 묶으시는 주님, 

주님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서로 싸우게 두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서로 싸우다 제 풀에 못 이겨 싸움을 멈추게 되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해와 평화입니다. 

막힌 담들이 풀리게 하소서. 

불신의 담들이 무너지게 하소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이 놀라운 경험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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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7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5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주석

6절. 부활의 결과는 사람들을 하늘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이제 물리적 차원과 영적 차원 둘 다에서 살고 있고, 적대 세력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참여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죽음=사탄의 영을 따라 사는 것

바울은 성도들의 이전 상태는 죽음의 상태였다고 단언한다. 

허물과 죄로 죽음의 상태 있던 사람들의 특징은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에게 영향받음이다.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으로는 살고 있지만, 그 삶의 방향은 사탄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 

허물과 죄를 계속 범한다. 

이 세상의 문화와 풍습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다. 

오랫동안 공중의 권세를 잡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게 만드는 사탄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죽음의 상태에 있다고 바울은 보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들의 욕심, 정욕,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라고 부추긴다. 

그 욕망대로 사는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육신의 욕망은 사탄이 작용하기 쉬운 인간의 본성이다. 

그 욕망 자체는 몸의 생존과 사회적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기능으로 남을 때, 선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폭주하여 과도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사탄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2. 생명=은혜로 구원받아 사는 것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음의 상태에 빠져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어 생명의 상태로 옮기어졌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셨다.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분이 허물과 죄로 반역하던 인간,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사탄의 영향력에 묶여있던 인간을 사랑하셨다. 

이것은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상상하지도 못한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의 상태에 있던 사람들을 생명의 상태로 옮겼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에게 구원이 선물처럼 임했다. 

이제 그 생명의 삶을 살면 된다. 

 

이러니 바울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으로 이끄신 하나님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 자비, 은혜가 얼마나 큰지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한다. 

그분이 하신 일을 높인다. 

 

지금도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들에게 생명을 건네신다. 

사람들이 할 일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들을 부르신다.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생명의 상태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은혜에 감격하고 사랑의 태도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대하는 상태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신다. 

허물과 죄, 사탄의 영향력, 욕망의 노예,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그 사랑에 대한 감사, 사랑하겠다는 결의,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의 상태로 옮기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지금 현존하여 하시는 일이다. 

 

이걸 일상에서 인지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바꾸시는 그분의 음성을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오늘도 그런 삶을 위해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일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성령님으로 오셔서 더욱 적극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현존을 기대합니다. 

 

사람들의 생각, 감정, 마음을 바꾸시어 

생명의 상태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인간의 교만, 나태, 미움, 증오, 생각없음, 배려없음, 사랑없음의 마음을 바꾸시어

겸손, 부지러함, 사랑, 애정, 배려, 격려, 도움의 마음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은 실제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회악을 약화시키고 생명과 평화의 마음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소서. 

저의 마음을 바꾸어 주소서. 

사랑하며 품게 하소서. 

신뢰하며 이해하게 하소서. 

 

사회에 뿌리내린 악한 구조가 드러나게 하시고, 정결하게 하소서. 

가지 같은 작은 사회악도 꺾어야 겠지만, 뿌리 같은 거대한 사회악도 뽑아낼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 일을 하도록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16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5 그러므로 나도, 주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서,

16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내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20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21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2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주석

20-23절.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현재와 상상 가능한 미래에 온 우주에 존재할 능력 있고 권능 있는 그 어떤 존재보다 그리스도를 우월하게 만드신 이 두 행동에서 입증되었다. 무한한 권위가 그리스도에게 주어져서, 우주의 만물이 그분께 복종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그리스도를 우주를 다스리는 “머리”의 자격으로 교회에 주셨다. 이 함의는 교회가 그 머리의 권위에서 유익을 얻고, 그분의 높아지심의 결과에 동참한다는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지혜와 계시의 영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신다. 

이 지혜와 계시의 영 덕분에 성도의 마음의 눈이 열리고 놀라운 비밀들을 알게 된다. 

지혜와 계시의 영은 예수님의 영이며 예수님의 성품과 말씀과 삶을 제일 또렷하게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세상에는 수많은 영이 존재한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영향을 주는 영들이다. 

두려움을 주기도 하고 헛된 야망을 품게 만들기도 하는 영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서 자기가 제시하는 것에 몰두하도록 만드는 영들이다. 

미혹의 영, 거짓의 영, 유혹의 영, 단절의 영이다. 

이런 세상의 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고 참된 영이 있다. 

바로 예수님의 영,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으로 인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따르게 된다. 

예수님께 집중하게 되고 몰두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만 알려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님은 그 고유의 지혜외 계시의 영의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내신다.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셔서 놀라운 하늘의 비밀들을 알게 하신다. 

 

2. 부르심에 속한 소망

성령님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심 이유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부르실 때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계획이 있으시다. 

성도들은 그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영광스런 성취를 고대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온 땅에 가득한 것. 

더는 전쟁과 죽음이 판을 치지 않고, 생명과 평화가 흘러 넘치는 것, 

사자와 어린 양이 서로 어울리는 것, 

서로 긴밀히 소통하고 사랑하여 오해와 불신이 사라지는 것, 

한 마음으로 서로를 향한 기대와 축복이 가득한 것… 

이런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신다. 

 

우리에겐 이런 소망이 있다. 

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함이다.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만들기 위함이다. 

나를 부르신 소망이 여기에 있다. 

 

3. 영광스러운 상속 

소망만 바램이고 큰 그림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은 실체가 없는 소망만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상속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대리통치자로 성도들을 세우시고, 땅과 기업을 주실 것이다. 

그것은 실체다. 

마음의 소망에 머물지 않는다. 

현실 세계로 밀고 들어오는 실체다.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이 현장에 도착해서는 실물로 영접하게 되는데, 이와 같다. 

하나님의 통치의 실제를 경험하는 것, 이것은 영광스러운 상속이며 선물이다.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아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실물을 보기 위해 여행을 감행한다. 

현재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 A380이나 KTX를 타고 실물이 있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 여행지로 떠난다. 

 

지금 내가 있는 이 거제도의 아침처럼 실제 존재하는 것(사물)이며 곳(장소)이다. 

이 영광스러움에 감격한다. 

 

4. 활동하시는 능력 

하나님이 능력이 결국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다. 

우주를 창조하셨던 그분이, 우주를 유지하시는 그분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고, 부활시키셔서 온 우주의 권세를 예수께 넘기셨다. 

누구도 그 왕권을 거부할 수 없게 하셨다. 

왔던 세상, 오는 세상 그 어떤 공간과 시간의 권세자들도 예수님의 왕권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인간이 되셨던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 되셨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진행시키셨다. 

그분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신다. 

 

오늘도 그분의 능력을 기억하고 싶다. 

경험하고 싶다. 

소망으로만 끝나지 않고 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 상속(선물)과 능력의 일부를 맛보고 싶다. 

어떻게 경험하게 될지가 기대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소망과 상속과 능력을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되기를 기도한다. 

4.16의 기억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참된 위로와 격려가 있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소망과 상속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이 아침에 당신이 하신 일을 묵상하는 동안  감격과 감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께서 행하셨던 일과 행하실 일들을 생각할 때, 감사와 기쁨을 느낍니다. 

이 경험이 단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종종 일어나게 하소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경험하고 싶습니다. 

주께서 도우소서. 

 

리트릿에 와 있습니다. 

서로를 깊이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 하소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게 하소서.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시간으로 채우게 하소서. 

 

여전히 사회 곳곳에 재난과 참사의 기억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더욱 넘치게 하소서. 

그들에게 당신의 소망과 상속과 능력을 경험케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15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7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8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9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10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11 내가 말하기를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해도,

12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주석

7-12절. ‘영’(Spirit)은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 그분의 개인적인 임재를 의미한다. ‘어디로... 어디로’는 여호와가 어느 곳이든 임재하시고 어디에서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이러한 사실은 8-12절에서 탐험된다. 즉, 위와 아래라는 영원한 차원(8절, NIV의 난외주, 스올), 공간적 차원(9-10절, 동쪽과 서쪽), 시간적 차원(11-12절, 어둠과 빛)이다. 

 

[오늘의 묵상]

1.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 

교회에 주님이 계신다. 

예배드리는 곳, 기도하는 곳, 찬양하는 곳,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주님이 계신다. 

거기에만 머물지 않으신다. 

식당에서, 거리에서, 자동차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모든 건물에서 주님이 계신다. 

안방, 거실, 주방, 서재… 주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 

주님은 어디든 계실 수 있으며, 언제든지 말씀하실 수 있다. 

바다 속 저 깊은 심해에도, 하늘 끝 우주에도 주님은 계신다. 

만물을 만드시고, 지금도 운영하시는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어디에나 역사하신다. 

 

2. 그러기에 모든 행동을 아신다. 

그러기에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아신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과학과 우주의 신비를 알면 알수록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양자 역학의 세계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양자 얽힘 현상이 일어나면 거리와 상관없이 서로 반응한다. 

관측되지 않으면 통계적으로 존재한다. 

우주의 힘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어떻게 블랙홀은 생성하고 발전하고 유지되는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아신다? 

다 같은 선상에 있다. 

우주가 유지되고 있다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생각과 행동도 아실 수 있다. 

그분은 이 우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3. 시인은 스스로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 

시인은 스올에 내려간 것 같은 경험이 있었다. 

그는 바다 끝 아무도 모르는 곳까지 가본것처럼 삶의 무게를 느껴본 경험이 있다. 

더는 빛에 거하기 싫고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를 바라본 적이 있다. 

우울한 순간, 답답한 순간이 그를 엄습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임재, 어디에나 계시는, 피할 수 없는 그 임재를 경험했다. 

그게 그를 살게 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주께서 지금 내 삶을 어디로 이끄시는지 잘 모르겠다. 

뭔가 답답하고 우려되는 상황이 앞에 놓여 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쉽지 않다. 

무엇보다 처리해야 좋을지 아이디어가 부족하다. 

책임져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지혜가 부족하다. 

 

4. 신뢰할 분은 주님 뿐

어둠과 빛이 주님께는 나뉘지 않는다. 

빛도 파장이며 어둠도 파장이다. 

어둡다고 파장과 에너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가시광선 영역을 벗어나는 주파수의 빛은 볼 수 없으나 존재하며,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생물들은 전혀 다르게 밤을 인식할 것이다. 

야간투시경, 전파망원경, 자외선, 적외선 카메라… 

주님께는 그 모든 것을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뿐이랴! 그분 자체가 빛이시다. 

그분 자체가 그 수많은 주파수를 발산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에게 답이 있다. 

내가 보는 수준에서는 답이 없다. 

하나님이 답을 찾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답을 만드신다. 

그분은 답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께 기댈 수 밖에 없다. 

 

[오늘의 기도]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주님께 제 마음과 생각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우리의 생각과 정서를 아십니다. 

걱정과 염려를 아십니다. 

소원과 열망을 아십니다. 

답답한 상황이 계속됩니다. 

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다시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길을 인도하소서. 

주님의 임재와 인도를 구합니다. 

 

오늘도 멀리 여행을 갑니다. 

오고 가는 모든 길 위에 주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합니다. 

만나는 사람들과 이어지는 모든 대화에서 주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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