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2월 28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부르짖느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라.

16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17 내가 이집트 사람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겠다.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병거와 기병들을 전멸시켜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물리치고서 나의 영광을 드러낼 때에, 이집트 사람은 비로소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9 이스라엘 진 앞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천사가 진 뒤로 옮겨가자, 진 앞에 있던 구름기둥도 진 뒤로 옮겨가서,

20 이집트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 구름이 이집트 사람들이 있는 쪽은 어둡게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쪽은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밤새도록 양 쪽이 서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21 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내밀었다. 주님께서 밤새도록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내시니, 바다가 말라서 바닥이 드러났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22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다.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

23 뒤이어 이집트 사람들이 쫓아왔다. 바로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쫓아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24 새벽녘이 되어,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에서 이집트 진을 내려다 보시고, 이집트 진을 혼란 속에 빠뜨리셨다.

25 주님께서 병거의 바퀴를 벗기셔서 전진하기 어렵게 만드시니,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쫓지 말고 되돌아가자. 그들의 주가 그들 편이 되어 우리 이집트 사람과 싸운다!' 하고 외쳤다.

 

26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라. 그러면 바닷물이 이집트 사람과 그 병거와 기병 쪽으로 다시 흐를 것이다."

27 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내미니, 새벽녘에 바닷물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이집트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물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바다 한가운데 빠뜨리셨다.

28 이렇게 물이 다시 돌아와서 병거와 기병을 뒤덮어 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따라 바다로 들어간 바로의 모든 군대는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29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는데, 바닷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30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널려 있는 이집트 사람들의 주검을 보게 되었다.

31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주님의 종 모세를 믿었다.

 

주님은 모세에게 바다를 갈라지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지나가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15-16절). 구름기둥이 이집트와 이스라엘 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사이, 모세가 팔을 내밀자 바닷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이 드러납니다(19-22절). 이스라엘 자손은 갈라진 바다 물벽 사이로 지나갔지만, 따라 들어온 이집트 군대는 물이 덮여 전멸하였습니다(22-28절). 이스라엘은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였고, 모세를 믿었습니다(31절).

 

‘그 주가 누구인데(5:2)’라는 바로의 모욕적인 질문에,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킴으로써, 계속 말씀하셨던 ‘내가 주님’이라는 답을 완성시키십니다. 바로의 병거를 보고 두려워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홍해를 건넌 뒤에 주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집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모든 이적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이 ‘주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세상의 주님이십니다. 그것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필요하다면 내 앞에 놓인 어떤 ‘홍해’라도 가르실 것입니다. 내 삶과 가정과 공동체에 주되심이 드러나길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 그 빼앗긴 것을 되찾으신다.

이집트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신으로 숭배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우상 숭배가 심해지면 하나님의 영광은 흐려진다. 

온 우주의 창조주가 피조물보다 못한 여김을 받는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열받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 하나님과의 약속을 맺은 사람들이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엄청난 고난을 받는다. 

세상은 하나님이 과연 영광이 있는지 묻는다. 

그 신이 과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묻는다. 

과거에는 이집트와 그 주변국들을 기근에서부터 구출해주셨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한낱 노예들의 신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10가지 재앙으로도 이집트 사람들과 권력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의문이 많았다는 점이다. 

과연 우리가 이 광야에 있는 게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다 죽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홍해 앞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리 상태는 그야말로 패닉이다. 

도대체 그 능력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분노에 찬 이집트 사람들을 괴멸시키기로 결정하셨다. 

그렇게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되찾고, 진정한 우주의 주인이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결정하셨다. 

이집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언약외 백성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언약내 백성까지도 설득하고 확신을 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낮에 이스라엘을 보호하던 구름기둥이 뒤로 간다. 

이집트 군사들은 갑작스런 어둠에 깜짝 놀란다. 

그 구름기둥은 더욱 짙은 층운이 되어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 

기둥의 기세가 너무 세어서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밤이 되었다. 어둠은 더욱 짙어졌는데, 이스라엘 쪽은 밝다. 

불기둥 때문이었다. 불기둥이 밤을 밝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내한다. 

밤새 홍해가 갈라지고, 백성들은 홍해를 건넌다. 

새벽이 되자, 구름기둥이 옅어진다. 

바로의 군대는 홍해로 밀고 들어온다. 

아주 당연히 홍해 바닥은 무거운 병거가 들어오기 어려운 지형이다. 

갯벌 같은 곳에 무거운 병거의 바퀴는 빠지고 움직이기 어렵다. 

이집트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거다. 이스라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싸우신다." 

도망가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새벽녘 이스라엘에 구원이 임했다. 

저 멀리 밝은 태양이 오르고 구름 기둥이 점점 짙어진다. 

태양빛에 이집트 병사들의 시신이 보인다. 

 

31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주님의 종 모세를 믿었다.

 

이스라엘은 이제서야 주님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믿는다. 

사람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로 모아지기가 어렵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 두 마음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다. 

결국 인간은 온전한 신뢰를 보낼 수 없는 존재다. 

생존이 걸렸을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끝까지 그분을 신뢰하는 것,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말은 쉽지만 실제는 어렵다. 

살아있는 생생한 관계를 평소에 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허상을 쫓아 자기 최면, 자기 확신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실제를 몸으로 일상에서 경험하는 자만이 가능하다. 

이런 실제를 경험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고위 공무원 자녀의 학폭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학폭은 사라져야 하며, 그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 그 폭력이 묵과되어서는 안된다. 

피해자는 죽음을 생각하는데, 가해자는 뻔뻔히 승승장구 지내고 있으면 안된다. 

정의로운 법집행이 이뤄져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온 우주의 주님, 

당신의 능력을 봅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한 당신의 최선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높아지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도록 하옵소서. 

우상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돌려드립니다. 

일상에서 오직 주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하소서.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길 원합니다. 

약자들을 사랑하시기에 악행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 가운데서도 나타나게 하소서. 

주님, 울어야 할 때 울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고, 용서해야 할 때 용서하게 하소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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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2월 25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믹돌과 바다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쪽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하여라.

3 그러면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막막한 광야에 갇혀서 아직 이 땅을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4 내가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둘 터이니, 그가 너희를 뒤쫓아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니, 이집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5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쳤다는 소식이 이집트의 왕의 귀에 들어갔다. 그러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 백성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에게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풀어 주어 놓아 보내다니, 어쩌자고 이렇게 하였는가?" 하고 후회하였다.

6 바로는 병거를 갖추고, 그의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7 그는 특수병거 육백 대로 편성된 정예부대와 장교들이 지휘하는 이집트 병거부대를 모두 이끌고 나섰다.

8 주님께서 이집트의 왕 바로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시니, 바로가, 주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나가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뒤쫓았다.

9 마침내 바로의 모든 병거와 기마와 그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여,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비하히롯 근처 바알스본 맞은쪽 바닷가에 이르렀다.

 

10 바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개를 들고 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11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12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13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 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4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

 

주석

이집트의 군대(5-9절) 이 시기 대부분의 병거 부대는 10-15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600대는 대규모의 부대다. 오직 바로의 부대만이 그 정도 규모였다(IVP 배경주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다를 등진 채 진을 치게 하셔서, 바로의 군대를 유인하십니다. 이곳에서 바로의 군대는 무너질 것이며, 이로 인해 이집트 사람이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1-4절). 생각을 바꾼 바로는 특수병거 육백 대와 함께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해 왔습니다(5-9절). 바로의 병거부대를 본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10-12절). 모세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주님이 행하실 일을 지켜보라고 말합니다(13-14절).

 

이집트의 정치, 종교, 경제, 사회 체계를 붕괴시킨 하나님은, 이제 바로의 군사력마저 물리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집트의 주님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이 계획을 믿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병거부대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심지어 다시 이집트의 노예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에 반응하지 말고 잠시 가만히 멈추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싸우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핵미사일이 발사되었다. 

곧장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경보기가 울린다. 

어디 갈 데가 없다.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 

 

홍해 앞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당대 최고의 군사력과 병기를 가지고 이스라엘에게로 다가온다. 

200만에 가까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앞뒤가 꽉 막혔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 

이제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린다. 

그것도 대량 학살이다. 

어디 피할데도 없다. 

이집트 정예군의 칼날에 도륙될 판이다. 

괜한 짓을 했다 생각한다. 

그저 이집트에서 일하다 죽는 게 낫다. 

어린 아이들과 늙으신 부모들과 함께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될 지경이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결국 하나님을 원망한다. 

 

핵미사일이 이제 곧 떨어진다. 

경보기의 싸이렌이 더 격하게 울린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두려워말라고 말한다. 진정하라고 말한다.

우리 민족의 영적 지도자, 모세와 아론! 

과연 그들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도대체 어떤 근거로 두려워말라고 하는가? 

어떤 근거로 진정하라고 하는가? 

물론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메세지를 들었단다. 

하나님이 핵미사일의 공격에서 보호해 주신다고 한다. 

이 공격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도대체 말인가 방군가!! 

이미 발사된 핵미사일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홍해 앞에 진을 쳤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셔서 그에 순종했다. 

그러나 그 순종의 결과가 집단 학살 내지는 집단 수장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백성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은 모세와 아론을 죽이고 다시 이집트 파라오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원망과 반역의 기운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퍼진다. 

 

과연 나는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을까? 

10가지 재앙을 경험했지만, 

불기둥, 구름기둥을 경험했지만, 

미래의 이스라엘의 삶(유월절, 무교절 등)에 대해 하나님께 설명을 들었지만, 

다시 파라오가 이렇게 뒤쫓아 올지는 몰랐다. 

심장이 뛴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온 몸에 긴장의 땀이 흐른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 시대는 위기로 가득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회적, 자연적 위기로 가득합니다. 

위기 앞에서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주님의 인도를 구하게 하소서. 

원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동안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역사와 개입을 마음 속에 각인시켜 위기의 순간에도 강력한 방패가 되게 하소서. 

주님, 끝까지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순종의 삶으로 이끌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2월 24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7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 하나님은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18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대열을 지어 이집트 땅에서 올라왔다.

19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 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20 그들은 숙곳을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장막을 쳤다.

21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 길을 비추어 주셨다.

22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주석

블레셋을 지나는 길(17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시려는 의지를 알리셨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안전을 염려하셨기에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좀 더 멀지만 안전한 길로 안내하셨다(IVP 성경주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름길인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 이유는 전쟁을 할 경우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갈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17-18절). 모세는 요셉의 유언대로 그의 유골을 가지고 나옵니다(19절). 주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들 앞에서 인도하십니다(21-22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17-18절). 잘 보이지 않는 기적이 있다면, 노약자가 포함된 200만 명 이상의 무리가 노숙하며 광야 길로 문제없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낮의 더위는 구름 기둥이, 밤의 추위는 불기둥이 막아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동행하십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묵상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200만명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어떤 모습인가? 

모든 백성을 동시에 보호하는 조치는 과연 가능한가? 

구름기둥은 단순히 기둥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기둥을 중심으로 하늘에 구름이 가득할 것이다. 

그래야 몇 십킬로미터로 줄 서 있는 백성들을 돌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름기둥은 상대적으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불기둥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불기둥은 높이 올라 꼭대기에는 마치 태양 같은 빛과 열을 내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멀리 있는 백성들에게도 빛과 열이 미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일대가 환한 대낮같다. 

야생동물들도 함부로 접근하기 어렵다. 

 

그런데 밤낮 이렇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돕고 계신다면, 

그래서 밤낮 행군하고 있다면, 

그들은 잠은 어떻게 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었을까? 

아이들은 어떻게 행군하고 있었을까? 

가축들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나귀나 낙타같은 동물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낮과 밤이 혼란해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정신건강까지 위태롭다. 

 

물론 가능한 빨리 이집트 땅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언제 이집트의 정예 병사, 정규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속히 이집트 영토를 벗어나 이스라엘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행군 속도는 느릴 수 밖에 없다. 

장정들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약자, 병자, 장애인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한다. 

최대한 그들의 편의를 도모해야 장거리 행군을 마칠 수 있다. 

속도가 필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모두를 위한 속도가 필요하다. 

낮에도 쉬어야 한다. 밤에도 행군해야 한다. 

각자의 체력에 맞춰 쉼과 행군을 반복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가는 방향을 안내한다. 

이 두 기둥은 단순히 햇볕을 막아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역할 이상을 한다. 

먼 곳에 있는 백성들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행군의 목표지점을 알려준다. 

조금 늦게 가도 된다. 

쉬었다 가도 된다. 

안심이 된다. 

항상 언제나 저 멀리에 기둥이 보이고 그 위에는 구름으로, 발광체로 표지판이 있다. 

신기한 경험이다. 

아이들은 이 놀라운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길다란 행군 행렬도 놀라운데, 그 앞에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다. 

지난 10가지 재앙이 사실 초현실적이었다. 

 

보호와 방향. 

옷과 신발 텐트, 그리고  나침반. 

장거리 행군에 꼭 필요한 요소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대신하고 있다. 

보호와 방향을 병행하는 기둥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 사랑, 능력을 경험한다. 

 

성경저자는 하나님의 염려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전쟁으로 인해 중도포기할 것을 염려하셨다. 

목이 곧은 백성 이스라엘. 

언제든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이스라엘.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그들을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더 충분히 신뢰하는 순간까지 염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노심초사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하고 걱정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오래참으시며 많은 은혜를 베푸신다. 

지적인 깨달음을 더하시고, 정서적 안정감을 주신다.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고 간구와 기도에 대해 특별한 응답을 주시기도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면서 천천히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시고, 

그 방향으로 인도하신다. 

 

자유를 말하면서 보호하지 않으면 약자들은 뒤쳐진다. 

자원과 네트워크가 풍부한 사람과 이제 막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자유 경쟁으로 내몰면 당연히 전자가 승리할 것이다. 

성장할 수 있도록 경쟁 생태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인큐베이팅 해야 한다. 

자원과 네트워크가 부족한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게 안되면 출산률은 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배려와 염려를 배워야 할 이유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 청년부 수련회가 있습니다. 

청년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의 배려를 경험하게 하소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청년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소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청년들이 되게 하소서. 

 

고통받는 이 세대 약자들을 돌보소서. 

보호종료 아동, 청소년, 청년들을 보호하소서.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소서. 

외국인 노동자의 삶도 살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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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2월 23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1 "주님께서, 당신들과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당신들을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이르게 하셔서 그 땅을 당신들에게 주시거든,

12 당신들은 태를 처음 열고 나오는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십시오. 그리고 당신들이 기르는 짐승이 처음 낳는 수컷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13 그러나 나귀의 맏배는 어린 양을 대신 바쳐서 대속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대속하지 않으려거든, 그 목을 꺾으십시오. 당신들 자식들 가운데서 맏아들은 모두 대속하여야 합니다.

14 뒷날 당신들 아들딸이 당신들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거든, 당신들은 아들딸에게 이렇게 일러주십시오.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15 그 때에 바로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처음 난 것을, 사람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처음 태를 열고 나온 모든 수컷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서, 아들 가운데에서도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는 것이다.

16 이것을 각자의 손에 감은 표나 이마 위에 붙인 표처럼 여겨라.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다.'"

 

주석

초태생을 제물로 바침(12-16절) 초태생 가축은 야웨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제물로 바쳤으나, 나귀는 제물로 바칠 수 없었다. 아마도 나귀는 짐을 실어 나르는 동물로서 중요하기 때문에 제물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귀는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구제되고 그 대신 다른 제물이 드려졌다(IVP 배경주석). 

 

태를 처음 열고 나오는 모든 것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나귀와 사람의 처음 난 것은 어린양으로 대속, 즉 다른 제물로 바치는 것이 가능합니다(12-13절). 초태생을 봉헌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바로의 고집을 꺾기 위해 이집트 땅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대속으로 초태생 죽음의 재앙을 모면한 이스라엘 백성은, 앞으로도 동물들의 초태생을 바치는 것을 통해 맏아들을 대속해야 합니다(15절).

 

처음 난 것을 죽이는 하나님의 열 번째 재앙은 이집트에게는 죽음과 심판이요, 이스라엘에게는 생명과 구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구원은 ‘어린 양의 피’라는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대속’은 하나님이 대리 지불을 허용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희생을 통해 누군가를 살리는 것입니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며 헌신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기도해 보고 실천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대속하는 이유는 기억에 있다. 

죄에 대한 대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표로서의 대속이다. 

맏아들과 맏나귀가 죄가 있어서 그들을 대신해서 어린 양을 대신 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소유라는 사실을 자신과 가족과 공동체 전체에 공표하는 예식으로서 대속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적 예식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절기를 통해서도 기억과 기념의 활동이 일어난다. 

동시에 각 가족마다 첫째가 때어날 때마다 대속의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때마다 가족 구성원 모두와 마을 공동체 전체가 대속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의 고기를 먹으면서, 기억과 기념의 활동이 일어난다. 

이제 모든 가족의 첫째는 마을 전체가 인정하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 첫째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환영받고 환대받았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진다. 

이런 독특한 역할 규정으로 인해 가족과 공동체를 영적으로 이끄는 리더가 된다. 

모든 자녀들이 마을 공동체로부터 환영받겠지만, 특히 첫째의 존재는 더욱더 부각된다. 

가족과 마을의 영적 리더로서 성장하게 된다. 

기억의 재생, 영적 교육의 중추, 하나님 중심의 삶에 대한 기준 제시 등등

첫째의 역할은 축복이자 부담이 된다. 

공동체로부터 격한 환대와 축복을 받지만, 동시에 가족과 공동체를 영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부담을 느낀다. 

첫째의 첫째도 그렇겠지만, 둘째 셋째 집의 첫째도 마찬가지다. 

 

첫째 아들을 바쳐야 한다는 이 말씀 때문에/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바 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삶에 적용하는 보수적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다. 

첫째 아들을 드려야 한다는 말씀의 적용은 나를 목사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실제로도 천 번의 새벽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를 드리셨다. 

축복과 부담. 이 두 가지를 나는 항상 느꼈다. 

많은 교인들의 축복과 환대를 받았다. 동시에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 

더욱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적 삶의 무게가 오랫동안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가난한 집 맏아들로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종교적, 영적 역할도 감당해야 했다. 

착해야 했고, 순종적이어야 했고, 탁월해야 했다. 

공부도, 교회 생활도, 사회적 관계도… 

어렸을 때부터 어른처럼 살아야 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성인 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사춘기 시절에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모범생, 공부, 운동, 찬양 잘하는 교회오빠 스타일이 되어갔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해결되지 않는 정서적 정신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착한 아이 컴플렉스… 

 

좋은 점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부작용이 있었음도 부인하고 싶지 않다. 

정신적, 정서적 무게가 항상 부담이었다. 

 

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핵심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역을 기억하고, 그분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소유라는 사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는 첫째를 드림으로써 그렇게 했다면,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절기와 제사를 통해 세대간 교육 및 전수가 있었다면, 지금은 매주 예배과 교회 교육을 통해, 매일 이뤄지는 경건의 시간과 소그룹 나눔을 통해 일어난다. 

한 명에게 모든 영적 부담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영적으로 이끄는 목사에게도 모든 부담과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으셨다. 

목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평신도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첫째를 대속하는 마음으로 가정과 공동체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역사를 기념하고, 그분의 소유됨을 기뻐하고, 그분의 뜻을 수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첫째를 대속하는 마음으로… 

그 진지함으로… 

 

[오늘의 기도]

당신의 일을 기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당신이 하신 인류 구원과 구출의 사건을 기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첫째를 드림으로써 과거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매일 첫마음을 드림으로써 지금의 우리가 그렇게 하게 하소서. 

나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에 사용하여 주소서. 

주님의 뜻이 이뤄지는 일에 사용하여 주소서. 

 

게으름을 이기게 하시고, 

더욱 부지런히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기념하고, 사람들을 교육하고, 함께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도우소서. 

 

오늘도 첫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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