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2월 01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사무엘은 늙자, 자기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다.
2 맏아들의 이름은 요엘이요,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비야다.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일하였다.
3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서, 치우치게 재판을 하였다.
4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갔다.
5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6 그러나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 달라는 장로들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주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8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하는 일마다 그렇게 하여,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더니, 너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
9 그러니 너는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 주되, 엄히 경고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 주어라.”
주석
7절. 지도자들은 왕을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하나님은 승리를 가져오시는 일에 별로 성공하지 못했으며 왕이 더 잘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IVP 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돈 벌이
역시 돈이 무섭다.
사무엘의 아들들도 돈 맛을 알아버렸다.
돈이 있어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편하게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는 사무엘이 아니라 그의 아들들이었다.
요엘, 아비야!!
브엘세바에서 중재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력을 가지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소송과 재판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때로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백성들의 갈등 조정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사사는 대체도 재판관들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백성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잘잘못에 대해 판단하는 사람들이었다.
카톨릭 성경에 보면, 사사기를 판관기라고 표현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행정 수반, 군사 통수권자라기보다는 대법관 혹은 헌법재판소의 법관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하는 자가 돈을 좋아한 것이다.
사무엘이 보여주었던 청렴한 태도는 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다.
뇌물을 받고 재판을 왜곡시켰다.
돈을 낸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는 양극화로 치닫게 된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게 된다.
율법의 가치와 원리가 무너진다.
돈이 문제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쌓아 놓는다.
그 돈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인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김건희는 사람들로부터 선물 받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지불해야 할 돈을 보내지 않았다.
권력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선물을 받고 인사 청탁을 수용했다.
그러니 나라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돈이 문제다.
2. 마음 상한 사무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사무엘의 마음이 상했단다.
상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무시하는 백성들 때문에, 아님 자신과 아들들을 무시하는 백성들 때문에?
후자에 더 기운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겼다고 해도, 자신과 아들들을 대하는 백성들 때문에 더욱 마음이 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도 아들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백성에게는 좋은 사사였지만, 아들들에게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백성들을 불러 모아 미스바의 회개를 이끌었지만, 아들들의 회개를 이끌지는 못했다.
아들들에 대한 소문이 왜 없었겠는가!!
요엘과 아비야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이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 아들들에 대해서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요즘도 교회 세습이 여전히 문제를 야기한다.
돈과 권력의 중심이 자녀에게 넘어간다.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큰 교회를 운영하려면 기존의 리더들과 원만하게 지내야 하면 그러려면 아버지의 아들이 교회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세습하는 교회는 점점 가족 기업을 닮는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두의 교회여야 하는데, 한 개인과 가족이 경영하는 회사처럼 바뀐다.
그 권력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반역자, 배신자 취급을 당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한 개인의 교회로 둔갑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돈과 권력에 가려진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돈과 크기에 있지 않다.
그곳은 삼위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이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여 서로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사라지니 교회는 점점 덜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하려고 한다.
그것은 온전함을 버리고 차선으로 최선을 칠하려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다.
우리는 온전한 최선을 끝까지 추구하고 그려내야 한다.
비록 현실은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에도 최선의 이상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에 마음이 상해야 하는가?
내가 한 노력을 공동체가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마음이 상해야 하는가?
아니다.
꿈과 이상, 삼위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이 더 이상 최선의 가치로 남지 않는 것에 마음이 상해야 한다.
육체적 죽음도 경제적 실패도 삼위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의 포기보다 더 상할 일이 아니다.
그 이상과 꿈을 향해 나아가자.
그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말자.
[오늘의 기도]
사랑으로 연합해 계신 삼위 하나님,
당신의 연합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소서.
우리가 당신의 연합 안에 거하게 하소서.
당신의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그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그 사랑이 흐르게 하소서.
연약함에도 그 이상이 숨쉴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소서.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도 공급해 주소서.
죽음 너머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도 공급해 주소서.
우리 모두 삼위하나님의 연합 속에서 하나되어 영원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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