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2월 01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사무엘은 늙자, 자기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다. 

2 맏아들의 이름은 요엘이요,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비야다.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일하였다. 

3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서, 치우치게 재판을 하였다.

4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갔다. 

5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6 그러나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 달라는 장로들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주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8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하는 일마다 그렇게 하여,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더니, 너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 

9 그러니 너는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 주되, 엄히 경고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 주어라.”

 

주석

7절. 지도자들은 왕을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하나님은 승리를 가져오시는 일에 별로 성공하지 못했으며 왕이 더 잘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IVP 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돈 벌이 

역시 돈이 무섭다. 

사무엘의 아들들도 돈 맛을 알아버렸다. 

돈이 있어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편하게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는 사무엘이 아니라 그의 아들들이었다. 

요엘, 아비야!!

브엘세바에서 중재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력을 가지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소송과 재판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때로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백성들의 갈등 조정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사사는 대체도 재판관들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백성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잘잘못에 대해 판단하는 사람들이었다. 

카톨릭 성경에 보면, 사사기를 판관기라고 표현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행정 수반, 군사 통수권자라기보다는 대법관 혹은 헌법재판소의 법관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하는 자가 돈을 좋아한 것이다. 

사무엘이 보여주었던 청렴한 태도는 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다. 

뇌물을 받고 재판을 왜곡시켰다. 

돈을 낸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는 양극화로 치닫게 된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게 된다. 

율법의 가치와 원리가 무너진다. 

 

돈이 문제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쌓아 놓는다. 

그 돈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인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김건희는 사람들로부터 선물 받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지불해야 할 돈을 보내지 않았다. 

권력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선물을 받고 인사 청탁을 수용했다.

그러니 나라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돈이 문제다. 

 

2. 마음 상한 사무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사무엘의 마음이 상했단다. 

상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무시하는 백성들 때문에, 아님 자신과 아들들을 무시하는 백성들 때문에? 

후자에 더 기운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겼다고 해도, 자신과 아들들을 대하는 백성들 때문에 더욱 마음이 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도 아들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백성에게는 좋은 사사였지만, 아들들에게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백성들을 불러 모아 미스바의 회개를 이끌었지만, 아들들의 회개를 이끌지는 못했다. 

아들들에 대한 소문이 왜 없었겠는가!! 

요엘과 아비야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이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 아들들에 대해서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요즘도 교회 세습이 여전히 문제를 야기한다. 

돈과 권력의 중심이 자녀에게 넘어간다.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큰 교회를 운영하려면 기존의 리더들과 원만하게 지내야 하면 그러려면 아버지의 아들이 교회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세습하는 교회는 점점 가족 기업을 닮는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두의 교회여야 하는데, 한 개인과 가족이 경영하는 회사처럼 바뀐다. 

그 권력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반역자, 배신자 취급을 당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한 개인의 교회로 둔갑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돈과 권력에 가려진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돈과 크기에 있지 않다. 

그곳은 삼위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이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여 서로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사라지니 교회는 점점 덜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하려고 한다. 

그것은 온전함을 버리고 차선으로 최선을 칠하려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다. 

우리는 온전한 최선을 끝까지 추구하고 그려내야 한다. 

비록 현실은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에도 최선의 이상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에 마음이 상해야 하는가? 

내가 한 노력을 공동체가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마음이 상해야 하는가? 

아니다. 

꿈과 이상, 삼위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이 더 이상 최선의 가치로 남지 않는 것에 마음이 상해야 한다. 

육체적 죽음도 경제적 실패도 삼위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의 포기보다 더 상할 일이 아니다. 

 

그 이상과 꿈을 향해 나아가자. 

그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말자. 

 

 

[오늘의 기도]

사랑으로 연합해 계신 삼위 하나님, 

당신의 연합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소서. 

우리가 당신의 연합 안에 거하게 하소서. 

당신의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그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그 사랑이 흐르게 하소서. 

연약함에도 그 이상이 숨쉴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소서.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도 공급해 주소서. 

죽음 너머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도 공급해 주소서. 

 

우리 모두 삼위하나님의 연합 속에서 하나되어 영원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1월 30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이 블레셋 사람에게 들어가니, 블레셋 통치자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올라왔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 소식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다. 

8 그들이 사무엘에게 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 주시도록, 쉬지 말고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한 마리 가져다가 주님께 온전한 번제물로 바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고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그 때에 주님께서 큰 천둥소리를 일으켜 블레셋 사람을 당황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였다. 

11 이스라엘 사람이 미스바에서 나와서, 블레셋 사람을 벳갈 아래까지 뒤쫓으면서 무찔렀다.

 

주석

7절. 고대 근동에서는 보통 선제 공격을 하기 전에 의식을 수행했다. 정탐꾼들이나 밀고자들은 사람들이 기존의 절기들과 연관되지 않는 의식들을 수행하는 수상한 모임을 가질 때, 군사 행동이 계획되어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IVP 성경배경주석).

10절. 고대 사람들은 천둥과 번개를 신의 노여움의 표시로 믿었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미스바 대성회

20년간 이스라엘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다. 

상당히 오랜 기간이다. 

언약궤가 기랏여아림으로 돌아오고 엘리아살이 궤를 지켰다. 

과거 사무엘리 하던 일들을 엘리아살이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실로에 있지 않고 기랏여라림으로 옮겨졌고, 

엘리 제사장에서 사무엘로 리더십이 이양되었다.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분쟁과 갈등을 중재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고, 나라는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 

무엇이 먼저일까? 

마음이 하나님께 향한 것이 먼저일까? 

아님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한 리더십이 먼저일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질문처럼 느껴진다. 

상승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 

사무엘은 사람들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금식 대성회 집회를 열었다. 

하나님께 자신들을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언약궤가 돌아왔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다른 신이 아닌 오직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은 우상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엔 너무나 많은 신들이 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너무 많다. 

자기에게 시간과 돈과 마음을 달라고 부르짖는 이들,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야 돈이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야 인기와 명예를 견고히 할 수 있다. 

그러니 너도 나도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 우리 시대 넘쳐난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들. 

하나님보다 그런 것들을 쫓아 다닌다. 

 

미스바 대성회가 필요한 이유다. 

마음을 다시 하나로 집중하여 오직 하나님만 끝까지 섬기겠다고 결심하는 시공간이 필요하다. 

주님의 구원을 바라며 부르짖는 시간이 요청된다. 

혼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주님을 부른다. 

아이돌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우주의 영원한 신을 부르고 찬양하는 것이다. 

 

2. 성회 중 벌어진 사건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주님께 나아와 마음을 쏟아붓고 주님을 찬양하는 그 때, 블레셋은 전쟁을 시작했다. 

블레셋은 정신을 못 차렸다. 

지난 번 언약궤 사건으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새겨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그건 이성적인 합리적인 사람들에나 일어나는 결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어떤 사건의 시말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며, 그 의미도 놓치고 만다. 

그저 하루하루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에 마음을 쏟다보면, 어느새 우상이 자기 옆에 와있고, 마음 속에 들어와 있게 된다. 

우상은 가깝고 매력적이며 신비롭고 유익하다. 

무엇보다 현실적이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도움이 된다. 

에덴의 선악과에 마음을 빼앗겼던 그 방식이 우상에게도 적용된다. 

보암지고, 먹음직도, 슬기롭게 할 만한 그 선악과처럼 우상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우상에 마음을 빼앗긴 블레셋은 과거의 일들을 잊고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큰 곤경에 처했다. 

전투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부르짖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블레셋이 미스바의 비무장 군중들에게 다가와 약탈을 계획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예배하러 모였지만, 두려움이 팽배해졌다. 

마음을 모을 수 없었다. 

 

사무엘이 한 일은 더 기가 막히다. 

전투를 준비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린 양을 바치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여리고 앞에 여호수아 같은 믿음을 발휘하고 있다. 

사무엘의 믿음은 홍해 앞에 모세를 닮았다.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과 유사하다.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붓는 것이다. 

비현실적이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이다. 

 

솔직히 닮기 싫다. 

두 가지를 같이 하는 게 낫지 않나? 

제사는 제사대로 드리고, 전투준비는 그것대로 진행해야 했다. 

모세와 아론이 산에서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글을 읽다보니, 전투 준비를 아예 안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블레셋이 당황하니, 그들을 따라가면서 죽였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투 트랙을 사용한 것이었다. 

사무엘은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렸으며, 다른 한 편으로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많은 설교자들이 사무엘의 행위만을 강조한다. 

믿음의 미스바 성회 말이다. 

그건 그대로 아주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극단주의자는 언제나 설 길이 없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싸움터로 나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며, 일터로 나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성경을 영적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왜곡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시어 그 “일”을 하게 하신다. 

 

오늘도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삶의 현장으로 나아간다. 

두려움을 뚫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이 사무엘의 역할을 대체하셨다. 

내가 굳이 사무엘이 될 필요는 없다. 

도리어 예수님과 성령님을 의지하여 두려움을 이기고 삶터, 일터, 전장터로 나아갈 뿐이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 이게 중요하다. 

그분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 그 중에 신뢰도 중요하지만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한 가지만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호도하는가!! 

 

[오늘의 기도]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길 원하시는 하나님, 

지금 이 땅엔 우상이 판치고 있습니다. 

고대의 우상과 현대의 우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던 무속의 신들과 우상들이 곳곳에 활동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쾌락의 우상도 결코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당신이 오직 온 우주의 유일한 신임을 증명해 주소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소서. 

주께서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고대합니다. 

 

주님, 

미스바의 대성회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주께로 향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1월 28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9 그 때에 벳세메스 사람들이 주님의 궤 속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백성 가운데서 오만 칠십 명이나 쳐서 죽이셨다. 주님께서 그 백성을 그렇게 크게 치셨기 때문에, 그들은 슬피 울었다. 

20 벳세메스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렇게 거룩하신 주 하나님을 누가 감히 모실 수 있겠는가? 이 궤를 어디로 보내어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할까?" 

21 그들은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전령들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이 주님의 궤를 돌려보냈으니, 내려와서 가지고 가라고 하였다. 

7: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주님의 궤를 옮겨,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해 세워서, 주님의 궤를 지키게 하였다.

 

NIV

But God struck down some of the men of Beth Shemesh, putting seventy of them to death because they had looked into the ark of the LORD. The people mourned because of the heavy blow the LORD had dealt them(19절).

 

주석

19절. 벧세메스에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에 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사본에 따라 칠십이나 오만 칠십 명이라고 번역한다. 칠십이라는 숫자도 전통적으로 큰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오만 칠십 명?
처음에는 이 숫자에 깜짝 놀랐다. 

언약궤 안을 보았다고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시다니? 

주석을 보니, 칠십 명일 수도 있다는 설명에 조금은 안심이 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사실이기에 혼란스럽다. 

70명이라고 해도, 그들이 모두 언약궤 안을 쳐다 본 것은 아닐 것이다. 

일부가 쳐다 보았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에 분노하셔서 그 주변의 사람들도 죽이신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시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구약의 난제다. 

 

그럼에도 이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인간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영광과 존귀는 인간의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인간 왕과 하나님은 다르다. 

인간 왕은 자신을 가능한 많이 드러내야 그 영광과 능력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체가 영광과 능력과 존귀로 가득하다. 

오랜 세월 언약궤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이 아니라 사실을 받아들여 살아왔다면 그들은 언약궤를 함부로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대로 절기 마다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와 예식을 온 맘으로 드렸다면 언약궤의 실재성을 제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했다. 

전쟁터에 함부로 가져 간 것도 그렇고, 그 전에 하나님의 전에서 엘리의 두 아들이 보였던 죄악상도 그렇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무시했다. 

경건함을 잃어 버렸다. 

하나님을 업신 여기니 결국 죽음이 임한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루는 사람들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누가 감히 모실 수 있는가?

하나님을 다른 신들처럼 대해서는 그들이 살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모시는 분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그 영광으로 존재하시고, 사람들은 그 앞에 엎드려져야 한다. 

하나님을 모시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분께 온 마음으로 찬양과 경배를 드려라. 

그분의 영광이 어디 사람이 만든 것에 갇히겠는가? 

사람이 만든 건축물과 인공물에 제한되겠는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시공간을 초월하는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양자역학이 하나요, 블랙홀이 또 하나다. 

작은 소립자 세계에서는 양자 얽힘 현상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연동 현상이 발견되었다. 

거대 세계에서는 블랙홀로 인해 시공간이 휘어지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냈다. 

그런 자연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 시공간을 초월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동안 형이상학적 사고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의 초월성이 이제는 과학적 사실로 부각된다. 

감히 그분을 어떻게 한 장소에 모실 수 있단 말인가? 

 

 

[오늘의 기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주님의 영광과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인간의 생각으로 가둘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할 일입니다. 

언약궤 안에 갇혀 게신 분이 아님을 알게 하소서. 

교회 예배당 안에 갇혀 게신 분이 아님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벗어나서 자유로이 활동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당신이 성경 안에서 스스로를 제약하고 계심을 생각할 때,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을 통해 스스로를 제약하고 게심을 생각할 때,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주님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1월 25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0 그래서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새끼에게 젖을 빨리는 암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우리에 가두었다. 

11 수레에는 주님의 궤를 싣고, 금 쥐와 그들의 악성 종양 모양을 본떠서 만든 물건들도 상자에 담아 실었다. 

12 그 암소들은 벳세메스 쪽으로 가는 길로 곧장 걸어갔다. 그 소들은 큰길에서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벗어나지 않고, 울음소리를 내면서 똑바로 길만 따라서 갔고, 그 뒤로 블레셋 통치자들이 벳세메스의 경계까지 따라서 갔다.

13 그 때에 벳세메스 사람들은 들에서 밀을 베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궤를 보고는 기뻐하였다. 

14 수레는 벳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와서 멈추었는데, 그 곳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그들은 나무 수레를 쪼개어 장작으로 삼고, 그 소들을 번제물로 살라서 주님께 바쳤다. 

15 레위 사람들이 수레에서 주님의 궤와 그 곁에 있는, 금으로 만든 물건들이 든 상자를 내려다가, 그 큰 바위 위에 올려 놓았다. 그 날 벳세메스 사람들은 주님께 번제물을 바치고, 다른 제물도 바쳤다. 

16 블레셋의 다섯 통치자들도 이것을 다 보고 나서, 그 날로 에그론으로 돌아갔다.

17 블레셋 사람들이 주님께 속건제물로 바친 악성 종양 모양의 금덩이들은, 아스돗 몫으로 하나, 가사 몫으로 하나, 아스글론 몫으로 하나, 가드 몫으로 하나, 에그론 몫으로 하나였다. 

18 금 쥐도 바쳤는데, 그 수는 요새화된 성읍과 성곽이 없는 마을 곧 다섯 통치자가 다스리던 블레셋의 모든 성읍의 수와 같았다. 사람들이 주님의 궤를 올려 놓았던 그 큰 바위, 곧 벳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있던 그 큰 바위는, 오늘날까지도 거기에 그대로 있다.

 

주석

14절. 언약궤가 놓여 있던 큰 바위는 초기의 제단이나 입석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IVP 성경연구주석 구약).

 

[오늘의 묵상]

1. 두 암소

요사이 사람들이 들으면 끔찍하다고 할 이야기다. 

송아지에게 젖을 물리던 암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끌게 했다. 

암소들은 다시 새끼를 보러 올 수 없게 되었다. 

블레셋 경계를 넘어 이스라엘로 가야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통 제사법에 따라 제물이 될 터였다. 

송아지들은 어미를 잃었다. 

암소는 새끼들을 잃었다. 

암소가 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생살 같은, 분신 같은 새끼를 떨어뜨리고 제물이 되기 위해 언약궤를 메고 국경을 넘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은 자신이 죽을 것은 안다고 한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미소들이 불쌍하다.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사제도가 몹시도 불편하다. 

 

당시의 사람들은 최선의 것으로 신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암소 같은 가축은 그들에게, 한 마을의 귀중한 자산이었다. 

암소 한 마리가 가져다주는 노동력은 성인 남자 몇십 명과 맞먹을 것이다. 

문화인류학자가 정확히 계산해 놓은 것이 있을 것이다. 

가장 귀중한 것으로 신의 노여움을 푸는 행위가 그들의 의도였다. 

지구 상의 거의 모든 민족들이 그런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자연을 다스리는 신들을 달래는 것이 제사장의 몫이었으며, 그들은 언제나 최상의 것으로 신에게 대접하라고 백성들을 가르쳤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런 당시의 문화를 활용하여 당신에게 예배하라고 알렸다. 

모세의 율법을 통해, 대속제물의 필요성을 가르쳤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예배는 제사 예배였다. 

암소는 중요한 제물이었다. 

 

예수님은 송아지를 놔두고 먼 길을 떠나는 암소같이 제자들을 남겨두고 십자가로 걸어가셨다. 

그분은 완벽한 제물이 되셨다. 

그리고 그 완벽한 제물은 제사 예배를 찬양 예배로 예배 문화를 바꾸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칭송하고 찬양하는 예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피와 살 냄새가 진동하는 피의 제사는 더는 필요없다.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그분에 대한 신뢰 및 순종에 대한 결심이 주가 되는 찬양 예배가 중심이 된다. 

그 은혜에 반응하여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른다. 

암소보다 더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린다. 

바로 우리의 존재, 삶 전체다. 

 

2. 블레셋의 속건제 

주의 깊게 볼 것이 있다. 

블레셋은 모세 율법의 규정과는 전혀 다른 속건제를 드렸다. 

악성 종양 모양의 금덩이들과 쥐 모양의 금조각을 속건제물로 드렸다. 

피의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물질로 제사를 드렸다. 

 

또한 언약궤의 운반도 율법 규정에 어긋났다. 

율법에서는 레위 제사장들이 언약궤의 네 귀퉁이를 들고 옮겨야 했다. 

수레에 실어서는 안되었다. 

언약궤는 동물에 의해 운반되어질 물건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특별하게 다뤄져야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블레셋의 속건제를 받으신 것으로 보인다. 

수레로 옮겼다고 진노하시지도 않으셨다. 

후에 웃사 사건과 비교하면 하나님은 상당히 너그럽게 블레셋을 대하신다. 

그들의 금 제물을 받으셔서 블레셋에게 내렸던 심판을 멈추신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궤를 돌려보낸 것 그 사실이다. 

그 본질이 충족되어서 그런걸까?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연하게 대하신다. 

 

어찌보면 하나님은 각 시대의 문화를 존중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싶다. 

그들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 있는가가 핵심이다. 

방식은 어찌보면 부차적이다. 

이스라엘도 제사 제도 자체가 본질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 그분의 비전에 깊이 순응하려는 태도가 핵심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유연함을 의심하지 마라. 

그분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그런면에서 그분은 본질주의자이시다. 

 

[오늘의 기도]

완벽한 제사를 당신 스스로 만드신 하나님, 

당신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하신 일들을 다시 기억합니다. 

온 인류를 다시 당신께로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더 깊이 사랑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개입을 간구드립니다. 

무속 신앙에 빠진 사람들을 구출하여 주소서. 

사탄과 귀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자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교인 중에 점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고쳐주소서. 

 

오직 우리가 찬양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음성은 당신의 음성 뿐입니다. 

제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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