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 20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1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13 나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훌륭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명령합니다.14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15 정한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16 오직 그분만이 죽지 않으시고,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고,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존귀와 영원한 주권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17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18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19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20 디모데여, 그대에게 맡긴 것을 잘 지키십시오. 속된 잡담을 피하고, 거짓 지식의 반대 이론을 물리치십시오.21 이 반대 이론을 내세우다가 믿음을 잃은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NIV 

But you, man of God, flee from all this, and pursue righteousness, godliness, faith, love, endurance and gentleness(11절). 

 

1. 영생을 얻으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 권면을 주고 있다. 

악한 것을 피하라든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든지….

그리고 이런 것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규정하는 듯 싶다. 

악을 피하는 것, 그리고 선을 좇는 것, 이것들은 싸움과도 같이 치열하다. 

악을 피하거나 악과 싸우거나 하면 고통스럽고 피흘리는 아픔을 겪어야 할 수도 있다. 

그속에서 내면의 갈등을 마주하거나 자신의 행동이 진정으로 선인지 혼란스러울 때, 그 싸움을 계속 이어나갈 힘이 부족해진다. 

 

바울은 이런 믿음의 선한 싸움이 영생과 관련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12절) 다음에 곧 이어 “영생을 얻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디모데에게 아주 기초적인 예수님을 통해 얻는 영생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디모데는 오래전에 회심했으며, 바울을 따라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위기와 고비를 같이 겪었다. 

이제 에베소 교회에서 젊은 사역자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디모데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얻는 영생을 다시 얻으라고 권면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생은 무엇인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삶의 열매며,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악을 피하고 선을 좇는 삶, 그 삶 자체가 영생이며, 그 열매가 영생이다. 

이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주신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이 과정이 영생이며 그 결과가 영생이다. 

바울도 그렇고 디모데도 그렇고 그 영생을 매일 얻으며 누린다. 

그런면에서 바울의 영생관은 요한복음의 영생관과 이어진다. 

이신칭의의 영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물에게 주시는 생명(13절), 그 생명으로 풍성함으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그 풍성함이 영생이다. 

그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에서 누리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곳 이 땅에서 누리는 영생이다. 

 

2.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처음에 이 구절을 보았을 때 의아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세상의 부자들을 대상으로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권한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의 지도자이다. 

그가 돌보고 가르쳐야 할 대상은 에베소교회의 교인들이다. 

굳이 이 세상에 부자들에게까지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게 필요할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세상의 부자가 있고, 영적인 부자가 있다. 

물리적인 부자, 현실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고, 반대로 영적인 부자, 영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있다. 

영적인 부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다. 

참된 생명을 얻은 사람이다. 

교회 공동체에 속해서도 영적인 부자가 아니라 세상의 부자로 남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명령하라고 바울이 말한다.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이다. 

 

돈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된 세상, 자본주의 세상에서 소망을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돈이 풍성함을 가져다 준다는 믿는 세상에서 진정한 풍성함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까!! 

그래도 이것이 진리다.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 

 

[오늘의 기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그 생명을 이 세상에서 풍성히 누리길 원하시는 하나님,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돈에 중독된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참 소망을 삼게 하소서. 

뇌에 잠식된 돈의 시냅스를 하나님과 누리를 교제의 시냅스로 바꾸게 하소서. 

하나님을 더 열망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 되길 원합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 세상의 목소리, 사탄의 목소리로부터 보호해주세요. 

낮은 자존감을 불러 일으키고 우울하게 만드는 숱한 목소리로부터 자유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낮잠을 자다가 부지불식 간에 치고들어오는 자괴감과 자기연민으로부터 자유케 하소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으로 붙들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6월 18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종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은 자기 주인을 아주 존경할 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야, 하나님의 이름과 우리의 가르침에 욕이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2 신도인 주인을 섬기는 종들은, 그 주인이 신도라고 해서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주인을 더 잘 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섬김에서 이익을 얻는 이들이 동료 신도요,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권하십시오.

 

3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4 그는 이미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병이 든 사람입니다. 그런 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주석

2절. 그리스도인 종들 가운데 그리스도인 상전을 둔 이들은, 주인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 경우에, 사랑으로 그를 더 잘 섬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컸기 때문입니다(IVP 성경주석, 1787쪽).

 

1. 종과 주인 

바울 당시와 지금은 전혀 다르다. 

제도적 종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제도적 종은 없지만, 경제적, 심리적, 정치적 예속 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런 경우에 성경은 경제적, 심리적, 정치적 자유를 이야기한다. 

모세 시절 히브리 민족의 해방이 대표적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편에 섰다. 

오늘 바울의 권면을 잘못 적용하면 아주 이상한 그림이 된다. 

종은 주인을 존경할 분으로 여겨야 한다는 그의 권면을 예속 관계에 놓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예속 관계에 놓인 경우, 주인을 존경할 분으로 여기는 것은 일종의 가스라이팅의 결과일 수 있다. 

 

오늘 바울의 권면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피고용인은 고용주를 존경할 분으로 여기는 것이 좋다. 

함께 회사, 기업, 조직을 일으키고 성장시키는 것이 서로에게 좋기 때문이다. 

피고용인은 고용주를 존경하라 그리고 고용주도 피고용인을 존경하라. 

서로 존경하라. 

이것이 현대의 윤리가 될 것이다. 

피고용인의 삶, 노동자의 삶도 존경받아 마땅하다. 

고용주가 불법을 저지른 경우, 갑질을 행하는 경우에는 법에 따라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 경우까지 존경할 일은 아니다. 

성경이 불법을 덮어주지 않는다. 

불법과 갑질이 없는 경우, 서로의 약점이 보이겠지만 그래도 서로 존경하는 것이 좋다. 

 

2.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사도 바울의 냉철한 분석이 빛나는 본문이다.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교만이 자리잡는다. 

교만은 마음의 병을 만든다. 

논쟁과 말다툼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잘 모르는 말도 일단 내뱉는다.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결국 공동체가 그로 인해 깨어진다. 

시기, 분쟁, 비방, 의심이 공동체에 파고든다. 

교만한 사람 한 명 때문에 오랜 공든 탑이 무너진다.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리고, 결국 경건을 자기 이득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파당 짓고 정치적 알력 다툼이 생긴다.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에베소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언제든지 일어나는 일이다. 

자기 부인과 자기 성찰이 없는 자기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다. 

가르치는 장로(목사)가 말만 번지르하고 삶이 받쳐주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목사의 기준을 상당히 높여야 한다. 

소명 즉 부르심을 충분히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는 의식으로 충만한 사람이 목사가 되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

오랜 시간 그 가르침을 고수하고 지키는 사람, 

그 가르침으로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를 부인 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목사가 되어야 하며, 교회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능력으로 목사를 뽑아서는 안된다. 

능력이 출중하다고 뽑았다가 공동체가 붕괴된다. 

자기 부인은 사역자의 첫째 덕목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늘의 기도]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길 원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의무와 권리를 우리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큰 권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큰 특혜입니다. 

한 두 사람에게 의존할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연구하고 파악하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각자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이 놀라운 권리를 우리에게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 권리를 잘 사용하게 하소서. 

 

사도 바울의 권면을 지금 이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잘 해석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성령님은 결국 예수님을 닮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닮게 하소서. 

분석에서 끝나지 않고 내면과 삶이 바뀌게 이끄소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6월 17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두 배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더욱 그러하여야 합니다.18 성경에 이르기를, “타작 마당에서 낟알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19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인이 없이는 받아들이지 마십시오.20 죄를 짓는 사람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서, 나머지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십시오.

 

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대는 편견 없이 이것들을 지키고, 어떤 일이든지 공평하게 처리하십시오.22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안수하지 마십시오. 남의 죄에 끼여들지 말고,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십시오.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십시오.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명백해서, 재판을 받기 전에 먼저 드러나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납니다.25 이와 마찬가지로, 착한 행실도 드러나게 마련이고, 드러나지 않은 것도, 언제까지나 감추어져 있지는 못합니다.

 

주석 

19절.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인’은 한 사람이 거짓으로 장로를 모함할 경우에 대비한 보호 장치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유대의 전통적인 관행에 따른 것입니다. 위법한 행위의 분명한 증거가 있다면 반드시 교회 앞에 공식적으로 제시되고 다루어져야만 했습니다(IVP 성경주석, 1786쪽).

 

1. 잘 다스리는 장로 

현대 장로교회의 장로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다스림이다. 

교회 공동체를 운영하고 관리하고 다스리는 역할이다. 

돌봄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공동체의 대소사를 다룬다. 

행정, 재정, 회계, 회의, 기획, 집행, 인사… 

공동체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들여 이슈와 문제를 해결한다. 

 

다른 하나는 가르침이다. 

성경과 하나님 나라의 원리 그리고 그 정신을 가르친다. 

공동체의 역사를 가르친다.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가르친다. 

가르침이 없이는 정신이 전수되지 않는다. 

 

바울은 가르치는 장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그들이 올바르게 서 있어야 한다. 

그들이 무너지면 공동체는 약해진다. 

성경이 있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오래 걸린다. 

경건하며 겸손하고 청렴한 소명의식 충만한 장로들이 필요하다. 

 

이재철 목사님의 강연이 페북 피드에 오래 남아 있다. 

한국교회가 쇠퇴하는 이유 세 가지를 꼽고 있다. 

하나는 목사들의 소명의식 부재다. 

둘은 비성경적 제도의 답습이다. 

셋은 뻔하고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설교다. 

https://www.youtube.com/watch?v=7_k4HBhlNDQ&t=4568s

 

다스리는 장로, 가르치는 장로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한국교회가 쇠퇴한다. 

진정 젊은이들, 다음 세대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교회를 만들 수는 없는가?

 

[오늘의 기도]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시는 주님, 

오랫동안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사람을 돌보고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사소한 일에도 허투로 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허나 한국교회는 목사들에 의해 쇠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소명의식이 결핍된 목사들에 의해, 

고리타분한 올드패션드 구닥다리 관습에 의해,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설교에 의해 

쇠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돈이나 쾌락이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품게 하소서.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힘을 불어 넣어주소서. 

하나님 나라의 그 아름다움으로 둘러쌓여 있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6월 16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6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지으시고, 입김으로 모든 별을 만드셨다.7 주님은 바닷물을 모아 독에 담으셨고 그 깊은 물을 모아 창고 속에 넣어 두셨다.8 온 땅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세상 모든 사람아, 주님을 경외하여라.9 한 마디 주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생기고, 주님의 명령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견고하게 제자리를 잡았다.

10 주님은, 뭇 나라의 도모를 흩으시고, 뭇 민족의 계획을 무효로 돌리신다.11 주님의 모략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며, 마음에 품으신 뜻은 대대로 끊어지지 않는다.12 주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한 나라 곧 주 하나님이 그의 기업으로 선택한 백성은 복이 있다.

 

ESV

He gathers the waters of the sea as a heap; he puts the deeps in storehouses.

Let all the earth fear the Lord; let all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stand in awe of him(7-8절)!

 

주석

6절. ‘입김’은 ‘영’ 또는 ‘성령’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분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단순한 언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효력을 창조 세계에 드러냅니다(IVP 성경주석, 688쪽).

 

1.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순서와 절차로 만들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 

창세기에 보면, 빛이 있으라 하고 명령하시니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 

성경의 저자들은 이 성경의 기록을 믿었다. 

빛이 생기게 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과학혁명 이전의 사람들이 현대 과학의 정보와 분석 방법을 사용했을 리 만무하다. 

그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것은 세상에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영적 존재에 의해 조종되고 영향받는다는 생각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도 그들에게는 신비의 영역이었다. 

당시 그 신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우주의 창조주로 상정하고 믿는 일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신을 상정하고 신에게 창조의 모든 공을 돌리는 것이 비과학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과학의 힘으로도 풀지 못하는 현상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합리적이다. 

현대과학이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과학적 혹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창조주를 상정하는 것은 과학적이며 합리적이다. 

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분의 의도와 목적이 반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과 순서와 타임라인으로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하나님이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이시다. 

 

2. 하나님의 뜻

시인이 보는 세상은 나라와 나라가, 민족이 민족을 대항하여 싸움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 속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그분의 뜻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분의 계획과 뜻이 역사 속에서 작동한다. 

 

알겠다. 

그 고백 자체는 귀하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 후 2천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여전히 전쟁으로 피투성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싸우고, 이스라엘과 이란과 싸운다. 

미사일이 오고 간다. 

평화가 깨지고 죽음이 가득하다.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이 문제인가? 

아님 구약 자체가 문제인가? 

이 세상에 오셔서 평화를 만드신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의 사상만으로 세상 종교가 재구성될 수 있다면 과연 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인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그룹은 전쟁을 불사한다. 

가나안 정복의 서사를 품고 있는 유대인들은 가자 지구에서의 전쟁을 정당화시킨다. 

중동 국가 전체와의 전쟁도 거룩한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 어느 때보다 구약을 잘 읽어야 하는 시기다. 

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읽어내고, 평화와 공존을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의 하나됨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구약 서사에서 그것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오늘의 기도]

창조주 하나님, 

저도 시인을 따라 이 우주의 창조주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계획의 따라 우주 만물을 당신만 아시는 방식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감사의 마음이 끊어지지 않게 하소서. 

내가 이 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주민 덕분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는 의문과 불만이 있습니다. 

세계 평화를 언제 오는 겁니까? 

현대 이스라엘은 왜 저리도 무모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행위 아닙니까? 

 

평화의 주여, 

이 세상에 평화를 주소서.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주소서. 

예수님이 가라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혹 속아내야 하는 경우에라도 기다릴 줄 아는 공존의 기술을 배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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