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4월 17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21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22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23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에 튼튼히 터를 잡아 굳건히 서 있어야 하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었으며,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주석

23절. 이 복음이 모든 피조물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은 과장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신약, 824쪽).

 

[오늘의 묵상]

1. 하나님과 원수 

골로새 교인들은 과거에 하나님과 원수였었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은 간단하다. 

악한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면 된다. 

양심을 져버리면 된다. 

십계명에서 말하는 바, 인간 보편의 윤리를 개똥 취급하면 된다. 

좀 더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사탄을 따르게 된다. 

사탄은 인간 존재 근처에서 끊임없이 속삭인다. 

유혹하는 그를 이겨낼 사람이 거의 없다. 

때로 정신이 돌아와서 양심에 소리에 귀 기울인다 해도, 순간일 뿐이다. 

지속적으로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 그렇게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는 걸까? 

첫째, 인간은 불안에 시달린다. 

주변에 고통당하는 사람 천지다. 

자신도 언제든지 고통의 늪에 빠질 수 있다. 

허우적거리고 발버둥쳐도 빠져나오기는 커녕 더 빨리 빨려들어간다. 

그러니 아무리 현재가 만족스럽더라도 행복하더라도 그 행복이 언제 꺼질지 모른다. 

도로의 싱크홀을 보라. 

갑자기 들이닥치는 불헹을 어떻게 막으랴. 

그러니 불안하다. 

 

둘째, 인간은 두려움에 시달린다.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다. 

어버이가 돌아가신다. 

친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죽는다. 

죽음은 공허를 낳는다. 

그 사람이 빠져나간 공허에는 두려움이 가득 들이찬다. 

고인을 대체할 다른 것이 찾아 들어오기까지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매시간 현실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는 사탄의 전략을 피할 자 누군가!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자들에게 위장 평안를 주려는 사탄의 전략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 

망령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공허한 자들의 영혼과 존재를 앗아간다. 

윤리며 삶이며 배려며 타인이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나르시스트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원수의 탄생이다. 

 

2. 복음의 능력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원수가 그분의 자녀가 되도록 화해시키신 것이 복음이다. 

관계 회복의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 복음이다. 

망가진 영혼과 정신세계를 복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복음이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소망을 품게 된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받았다. 

복음은 전해야 그 효과가 실효된다. 

복음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여야만 복음의 능력이 실효적으로 나타난다. 

실제 이뤄진 일들을 자신이 수용하지 않으면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 있을 뿐이다. 

작은 방, 혹은 약간 큰 집에 갇혀 있는 자에게 복음은 밖으로 나오도록 이끈다. 

넓은 세계가 있고 자유가 있다. 

 

종교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종교성에 기대지 말고, 복음에 몰입하라. 

종교적 행동에 만족하지 말고 복음의 소식에 항상 귀기울이라. 

복음이 일으키는 생명의 회복을 주목하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회복을 관찰하라.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이 기쁜 일들을 이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탄의 유혹과 함정으로부터 구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슬픔이 아니라 저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로 흘러가도록 이끄소서. 

생명, 평화, 사랑, 정의가 흘러가서 사람이 동물이 생물이 살아나게 하소서. 

악한 구조와 조직이 무너지고 와해되게 하소서. 

 

무엇보다 

예수님 빨리 오셔서 

당신의 나라 완성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4월 15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3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14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Message

God rescued us from dead-end alleys and dark dungeons. He’s set us up in the kingdom of the Son he loves so much, the Son who got us out of the pit we were in, got rid of the sins we were doomed to keep repeating(13-14절).

 

주석

13절.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 현재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IVP 성경주석 신약, 586쪽).

 

[오늘의 묵상]

1. 암흑의 권세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기 종족을 배신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들의 삶을 바꾸었다. 

그들이 믿었던 신, 신화, 이야기, 세계관은 사실 암흑과도 같았다. 

자유, 평화, 생명, 번영이 없는 곳, 

독재, 복종, 죽음, 전쟁, 살상이 판 치는 곳, 

사탄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 

암흑에서 살아왔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세상의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사회를 계급으로 나누고 낮은 계급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상위 계급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도록 했다. 

노예의 삶은 처참했고, 평민의 삶도 녹록치 못했다. 

여성 노예들은 주인의 성 노리개였고, 남성 노예들은 상류층의 기쁨을 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암흑의 권세가 세상을 지배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권세를 꺾으시고 사람들을 구출하셨다. 

과거 히브리 노예들은 절대 권력 파라오로부터 구출했듯이, 

이제는 사탄의 졸개들인 제국과 왕국의 권세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하셨다. 

영적인 탈출 뿐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탈출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 둘을 구분하여 영적인 탈출만을 강조하는 것은 영지주의적이다. 

하나님은 영육을 동시에 구출하신다. 

 

2. 현실의 암흑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들의 영육을 구출하신다. 

허망한 죽음으로부터 구출하신다. 

전쟁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하신다. 

악한 정권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하신다. 

 

윤석열 정권은 악한 정권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그룹이다. 

돈이 된다면 국가 기관을 유린하고 사람들을 사지로 내몬다.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자들까지도 배반한다. 

윤석열은 파면당하는 것을 넘어서 그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민주적 정당성을 지닌 법과 제도와 절차를 깡그리 무시했다. 

 

완벽한 정권이 어디에 있겠는가? 

허나 언제나 최선은 있다. 

현실에 기반한 최선의 정권을 창출해야 한다. 

차선도 좋다. 

최악은 면해야 한다. 

최소한 “선”한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한 자리씩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 안된다. 

국민과 공동체를 위한 자기 희생과 헌신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윤석열은 여전히 내란 관련 형사 재판 중에도 1시간 30분 이상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정한단다. 

국민 계몽을 위한 평화적 계엄이란다. 

국회와 선관위에 군대를 보내놓고선 어떻게 평화적 계엄이라고 주장하는가!

거짓말을 밥먹듯 숨쉬듯 한다. 

이런 자가 대통령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참된 자유와 정의 속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 세계로 전하길 바란다. 

참된 자유와 정의는 세상의 방식으로 구현되지 못한다. 

오직 자기의 몸을 희생시킴으로써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신이자 인간이셨던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확산시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유의 정의는 구호로 될 일이 아니다. 

희생당하신 예수님을 삶의 모델과 주인으로 삼을 때 가능하다. 

철학과 수양으로 되지 않는다. 

그분을 참으로 따라야 가능하다. 

 

 

[오늘의 기도]

저와 많은 사람들을 구출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으로 어둠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삶을 다시 묵상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삶을 따랐던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가난하여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인도하소서.

션처럼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김장하 선생님처럼 바라는 것 없이 주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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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1:21-23_복음의 소망  (0) 2025.04.17

 
1. 아름다운 섬마을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아이유와 박보검의 등장부터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사랑의 환타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별로 보고싶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공개될수록 이 이야기는 한 인생 전체가 담겼음이 드러났다. 젊은 청년들의 사랑이 아니라 인생 전체에 걸친 삶과 사랑이었다. 이야기 구성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청하기 시작했다. 
 
2. 1950-60년의 제주가 처음 이야기의 배경이다. 전쟁의 참화와 제주 4.3. 사건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곳, 가족의 죽음으로 생계는 위협받고 가난이 대물림 되던 곳, 제주는 그런 곳이었다. 엄마는 딸 애순을 남기고 재혼을 해야 했고 생계를 위해 잠녀(해녀)의 삶을 살아야 했다. 애순은 엄마를 잊지 못하니 하루가 멀다하고 엄마를 찾아왔다. 작은 아버지에게 맡겨진 애순은 눈치밥을 먹어야 했고, 푸대접을 받아야 했다. 생선가게 아들인 관식은 그런 애순을 아꼈고 보호했다. 억척스러운 엄마로부터 깊은 사랑을 경험한 애순은 힘겨운 삶 속에서도 문학 소녀의 꿈을 꾸며 당차고 야무지게 자라간다. 
 
3. 애순은 엄마의 죽음 이후 어쩔 수 없이 동생들을 키우며 살아야 했다. 애순 곁엔 무쇠처럼 무겁고 든든한 관식이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허나 새아버지가 다시 새엄마를 데리고 오면서 애순은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 없게 되고,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는 고아가 된다. 애순은 관식과 함께 부산으로 야반도주를 감행하지만, 사기를 당한 뒤에 다시 제주로 붙잡혀 온다. 우여곡절 끝에 애순과 관식은 결혼하게 되고, 딸 금명이를 낳는다. 
 
4. 시리즈의 모든 내용을 요약할 작정은 아니다. 초반부의 이야기는 애뜻하고 사랑스럽고 설렌다. 인생의 봄에 해당된다. 유채꽃 밭에서의 꼼냥꼼냥은 아이유와 박보검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장면들이다. 노란 유채꽃 밭에서 풋풋한 사랑이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장 아름다운 자연 속에 가장 아름다운 청춘이 서로를 붙들고 있다. 영화관에서 보면 더욱 아름다웠을 드넓은 유채꽃 밭의 푸른 청춘. 어려웠던 시절이 더 이상 고달프지 않도록 덮어준다. 
 
5. 이야기가 여기서 멈춘다면 이 드라마는 그저 청춘 사랑 이야기에 끝났을 것이다. 이 드라마가 일생에 걸친 삶과 사랑의 대서사시가 되기 위해 이제 여름, 가을, 겨울로 나아가야 한다. 오애순과 양관식의 자녀들, 금명, 은명, 동명이 어떻게 가족이 되어 가난과 상실의 시기를 극복하는지가 남아있다. 1950년대에서 시작해서 2025년까지 애순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한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16부에 담아낸다. 그 점이 감동적이다. 70-80년의 긴 시간이 흐른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회상이 교차한다. 여전히 애순과 관식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자녀들을 위해 더 깊이 헌신하다. 희노애락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내려간다. 좋은 일이 있은 뒤 시련의 시기가 닥쳐온다. 그 모든 시기를 애순과 관식은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이겨나간다. 
 
6.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떠오른다. 가난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상경하여 미싱공장에서 어린 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어머니, 5남1녀의 막내로 태어나 일찍 어머님을 여의고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상황에서 상경하여 미싱 공장의 여공 관리자로 일하셨던 아버지, 그렇게 1970년대 초에 두 분은 섬유 공장에서 만나 결혼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상태로 나를 낳으셨다. 내리 삼형제를 낳았기에 엄마는 아이들을 돌보셔야 했다. 아버지만의 월급으로는 항상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고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 자식들만큼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좋은 교육을 시켜야겠다는 결심만은 무수히 많이 들었다. 
 
7. 금명이가 서울대에 합격하고 부모의 큰 기쁨이 되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과외와 알바를 쉬지 않아야 했고 원하던 유학길이 좌절 되는 상황 속에서 부모에게 서서히 짜증을 부리는 장면은 잊히지가 않는다. 내 모습을 너무나 빼닮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엔 웬만한 시험은 100점을 맞았고, 중고교 시절에도 반에서 1, 2등, 전교에서도 10등 안에 들었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였다. 어머니의 기쁜 표정은 나의 성적표와 상장에 달린 것처럼 보였다. 고려대에 합격하고 과외와 학업과 교회 생활을 병행하면서 점점 지쳐가는 나 자신을 봤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마음 속의 불편함과 짜증은 점점 늘어갔다. 금명이처럼 쏘아부치지는 못했지만, 나의 내면은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결국 군대로 도피했다. 
 
8. “폭삭 속았수다”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께 드리는 헌사다. 
 

너무나 어렸고, 
여전히 여린 그들의 계절에 
미안함과 감사, 깊은 존경을 담아 
 
폭싹 속았수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이 시가 이 드마라의 주제다. 나의 엄마는 나를 22살에 낳으셨다. 둘째를 24, 셋째를 26에 낳으신 셈이다. 아빠는 27에 나를 낳으셨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섬유공장, 중동 건설 노동자, 자동차 카 센터, 농기계 판매, 운전 기사 등등 쉬지 않고 돈을 벌어오셨고, 아이들을 위해 헌신해오셨다. 지금도 나에게 박사학위 따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물어보신다. 자신이 대주고 싶다 하신다. 그분들은 참 어렸고, 지금도 여리시다. 하지만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끝이 없다. 매일 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자녀들, 자손들을 위해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가며 기도를 드리신다. 이러니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울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엄마 아빠의 이야기며, 그렇기에 내 이야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9. 한 인생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그려줘서 너무 고맙다.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신실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 16부작이 길어 보이지 않고 600억의 제작비가 아깝지 않다. 아버지 관식의 사랑은 나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하고, 하늘 아버지를 기억나게 한다. 한결같은 신실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생명과 회복의 이야기다. 현실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생명의 기운으로 씌운 뒤에 다시 마음의 밭에 뿌리니 인간 존재가 봄의 유채꽃처럼 피어난다. ‘미스터션사인’ 이후 최고의 드라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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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0) 2025.04.08

2025년 04월 11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0 다윗이 거기를 떠나, 그 날로 사울에게서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다.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사람은 분명히 저 나라의 왕 다윗입니다. 이 사람을 두고서, 저 나라의 백성이 춤을 추며,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12 다윗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가드 왕 아기스 옆에 있는 것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3 그래서 그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미친 척을 하였다. 그들에게 잡혀 있는 동안 그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여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였다.14 그러자 아기스가 신하들에게 소리쳤다. “아니, 미친 녀석이 아니냐? 왜 저런 자를 나에게 끌어 왔느냐?15 나에게 미치광이가 부족해서 저런 자까지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왕궁에 저런 자까지 들어와 있어야 하느냐?”

 

주석

10절. 다윗은 아마 블레셋 용병으로 일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뛰어난 군인인 자신을 적으로 대하는 대신, 자신들의 편이 되어 싸우는 기회를 줄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구약, 444쪽).

 

[오늘의 묵상]

 

1. 아기스에게 도망가는 다윗 

사울의 위협이 도를 넘어서자 다윗은 안전한 처소를 찾기 시작했다. 

자신의 적이었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쳤다. 

이 부분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다른 왕국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굳이 자신이 오랫동안 전투를 통해 많은 사상자를 낸 블레셋으로 투항한단 말인가? 

골리앗도 블레셋 장수였다. 

다윗이 이스라엘 내에서 명예를 얻게 된 것도 블레셋과의 전투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블레셋으로 망명을 떠났는가? 

사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장소라서? 

원수의 나라에 투항함으로써 확실히 사울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이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블레셋으로 망명을 떠나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주셨을까? 

그것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운신을 결정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움직인다기보다도 일단 자신의 상황에서 스스로 최선을 다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신의 앞날을 결정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어떤 일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가? 

누굴 만나야 하고, 무슨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가? 

안식월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묻어 두었던 질문들을 다시 꺼낸다. 

 

 

2. 미친 척 하는 다윗 

다윗은 생존형 리더다. 

일단 자신이 살아야 했다. 

생존하기 위해서 미친 척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이 미친 척도 대강해서는 누구도 속일 수 없다. 

골리앗을 죽였던 다윗, 

사울의 위협으로 망명을 시도한 다윗, 

조금만 그의 상황을 파악했다면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살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아기스의 신하들의 조언은 참으로 적절하다. 

물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소개한 것은 과장되었다. 

아직 다윗은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망이나 다윗이 그동안 펼친 행적 등을 두루 고려할 때, 신하들이 다윗을 위험 인물로 소개한 것은 적절하다. 

 

다윗은 아기스 왕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쌓여 미친 척을 했다. 

다윗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나님이 이 상황에서 어떤 말씀을 주셨을지도 잘 모르겠다. 

미친 척 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윗은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속을 수 있도록 제대로 미친 연기를 펼쳤다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는 당연해보인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분을 억지로 요청하는 것은 모두에게 독이 된다. 

그분이 정말 계시는지 그래서 이 세상에 개입하시는지 자꾸 확인해야 한다. 

그분이 숨어계시니 어쩔 수가 없다. 

확연히 드러내셔서 당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시지 않으시니 사람으로서는 계속해서 의문이 들고 의심이 든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인간은 생존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당장 살아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 중요하다. 

위협하는 대적들을 무찌르거나 회피해야 한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생존하고 그 생존을 위해 방어막을 펼쳐야 하며 그 방어막을 확대해야 한다. 

방어막 확대는 결국 누군가의 권리와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전쟁이다. 

하나님 없는 삶의 극단은 전쟁이다. 

 

그렇다고 경험되지 않는 하나님을 억지로 믿거나 있는 척 연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 고통스런 인간의 상황이여!! 

 

점점 다윗을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다윗도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존재로 보인다. 

미친 척 할 것이 아니라 모세처럼 광야로 도망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적군에게 가서 목숨을 구걸하다니, 그걸 넘어 미친 척 하다니… 

내 성향에 안 맞는다. 

 

그럼에도 다윗에게 한 가지 부럽고도 본받고 싶은 것이 있다. 

그는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를 쓰고, 기도의 노래를 불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를 붙들었다.

그의 믿음은 참으로 부럽다. 

 

하나님 경험이 끊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분의 살아계심을 더욱 확신할 수 있는 계기가 많아지길 기도한다. 

나의 삶과 생각과 느낌과 죄악과 게으름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로막지 않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결국 하나님 경험이 제게 최선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더욱 깊이 경험하게 하소서. 

이게 무너지면 저는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저의 의문과 의심은 신학 실험실에서 이뤄지게 하소서. 

저의 존재는 당신의 존재에 뿌리를 내리게 하소서. 

더 깊이 뿌리를 내려 당신으로부터 오는 자양분을 빨아드리게 하소서.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저를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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