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13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섰다.

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10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11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ESV

And Jesus said to them, “I ask you, is it lawful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harm, to save life or to destroy it?(9절) 

 

주석

예수를 고발할 구실(7절) 안식일을 벌한 죄에 대한 처벌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누가는 이때부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음을 전하고 있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엿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살피고 엿보고 있다. 

직접 제자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멀리서 관찰하다가 이제는 좀더 가까이 와서 엿보기 시작한다. 

엿보는 것은 인류의 오랜 습관이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엿보고, 정탐하고, 스파이를 보낸다. 

가까이서 봐야 원수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제 예수님을 적대자로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비판을 주의깊게 들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알았다. 

예수님은 자신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은 자신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며 대적해야 할 대상이며 심지어는 사단에 속한 자로 인식했다. 

이제는 배척하고 살해하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엿보기 시작한다. 

과연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예수님은 그들을 멀리하지 않으신다. 

엿보든 말든, 그저 당신의 일을 하신다. 

도리어 당당하게, 대놓고, 고발할테면 고발해봐라 식으로 행동하신다.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치신다. 

사실 손마른 사람은 죽을 병이 아니다. 

다음 날 고쳐도 될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 

안식일 규정에 자유로우시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규정집으로부터 따로 걸어다니신다. 

 

언제나 사건은 안식일에 벌어진다. 

안식일 규정이 가장 눈에 띄는 규정이기 때문이다. 

안식일 규정은 한 번 어기면 쉽게 눈에 띈다. 

사람들이 재빨리 알아차린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을 적극적으로 노린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죽이려는 일을 한다. 

예수님은 비록 죽을 병은 아니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서로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말하는 바,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 

허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새롭게 해석해서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누가 옳은가? 

 

2. 분노

예수님이 촉발한 측면도 있지만, 바리새인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도 그렇지만, 당당히 율법을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예수님이 미치도록 싫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그 사실도 분노의 지점이다. 

왜 예수를 따르는가!! 

대중들은 그렇게 율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가!! 

그동안 율법학자로서 바리새인으로서 성경을 가르쳐 왔던 그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들의 활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유대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페르시아 시대에 예루살렘 성이 회복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이유를 알았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점일획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세 오경(토라)에 등장하는 명령문을 총 613가지로 정리했 놓았다. 

하라 식의 긍정 명령 248개, 하지 말라 식의 부정 명령 365개. 

대단한 노력이다.  

꼭 지켜야 하는 것들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민족을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율법을 어기는 듯한 예수님의 행동과 그분의 해석, 그리고 그런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바리새인들을 격노케했다. 

 

결국 그 분노는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모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분노는 살인을 낳는다. 

분노는 심리적 살인 뿐 아니라 결국에는 물리적 살인을 낳게 된다. 

가인과 아벨을 보라. 

아벨에게 분노하고, 아벨을 받아들여준 하나님께 분노한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분노도 무섭지만, 속으로 삭이는 분노도 못지 않게 무섭다. 

다윗의 충복 요압은 분노가 많았고, 결국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죽였다.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바리새인들처럼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무턱대로 분노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내 기준에 맞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안식일의 주인일 뿐 아니라 모든 날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나의 뜻에 그분을 맞추는 것은 에러다. 

그러나 나에게 맞추지 않는다고 그분께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 

그 분노와 짜증은 하나님에게만 향하지 않고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향한다. 

사랑이 원망과 분노로 바뀌는 현장이 바로 가정이다. 

가족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때로 마음이 닫힐 때가 있다. 

분노가 일 때가 있다. 

조심해야 하는 순간이다. 

나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 기독교가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매우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오늘의 기도]

인간의 높아진 기준을 무너뜨리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대로 성공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성공이 잣대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을 그 기준 안으로 포섭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의 성이 만들어지고, 그는 하나님이 되어 갑니다. 

개인도 조직도 그 길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인간의 기준이 앞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더욱 딱딱한 개인과 조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따뜻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게 도와주소서. 

주님과 더욱 따뜻한 대화를 많이 나누도록 도와주세요. 

저의 기준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기준으로 살아 가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2월 21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니, 주님의 규례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

 

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8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11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12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MESSAGE

“그러나 그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행함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꾸준히 신뢰하십시오. 흔들림 없이 소망하십시오. 아낌없이 사랑하십시오. 이 세 가지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13절)

 

 

바울은 이전 장에서 방언, 예언, 지식,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며,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2:7 참조). 그러나 이 은사들이 가장 좋은 길은 아니며, 더 큰 은사가 있다고도 말했습니다(12:31 참조). 이제 그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은사도, 지식도, 믿음도, 섬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1-3절).

 

현재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일지라도 영원까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영적 어른의 일이며, 온전한 일입니다(11, 12절). 바울이 진술하는 사랑의 본질(4-7절)을 하나씩 묵상하면서 내 안에 사랑이 풍성하길 기도합시다.


고린도전서의 백미다. 

교회 분열의 최고의 해답은 사랑이다. 

다른 은사나 능력으로는 갈등과 분열을 해소할 수 없다. 

오직 사랑의 힘으로 끝까지 인내하고 끝까지 바라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온전해지는 길은 사랑의 길이다. 

능력의 길이 아니다. 

그 사랑의 길을 오늘 다시 걷는다. 

현실은 사랑대신 자기 보호를 선택하라고 한다. 

개인이건 공동체건 사랑대신 자기 보호를 선택할 때, 예수님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 다시 사랑이다. 


주님, 

다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의 길로 인도해주세요. 

많은 말과 사역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겁니다. 

이건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한 자를 위해 공동체가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가 절대 가치를 갖지 않습니다.

공동체도 개인도 하나님 나라의 작은 모자이크일 뿐입니다. 

주닝 저와 공동체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2월 09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니,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입니다.

 

15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행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고 이 말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17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면 삯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못해서 하면, 직무를 따라 한 것입니다.

18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심정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왜 이리 격하게 반응하는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의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상당히 강력한 공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어떤 공격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다만, 바울은 왠지 억울해하는 느낌이다. 

그동안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며 살았는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왜 그런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까?”라는 비아냥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사도들도 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으면서 사역하고 있는데, 당신은 무엇때문에 그런 것을 마다하고 이제와서 순전한 척하면서 자신의 영적 권위만 내세우는 겁니까?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헌신하라고 했나요? 

받을 것은 받고, 쓸 것은 쓰면서 살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자기 기준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건가요? “

등등… 

참 여러 가지 말들이 오고 갔을 성 싶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 입장도 참 비참해보인다. 

주변 사람들이 미리 알아 주면 참 좋은데, 그렇지가 않은가 보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바울의 이중성과 위선을 공격했을 수도 있다. 

왜 여기에서는 이말하고 저기에서는 저말하나요? 

이런 식의 공격 말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맞춰주는 스타일이었다. 

그들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메세지가 조금씩 바뀌었다. 

 

20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목적은 분명하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공감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행동과 메시지가 변했다. 

아마 이것이 공격 포인트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일관성이 없다 등의 공격 말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분명한 자기 기준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 중에 구원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족한 것이었다. 

사회문제, 외교문제에 날까롭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도리어 교회의 하나됨, 특히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의 하나됨에 대해 극렬하게 주장했으나,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의 말은 오롯이 복음이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하게 하는가에 집중되었다. 

 

그러기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 최소한 재정적인 측면에서는 독립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누구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스스로 벌어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절제하면서, 달리기 연습하듯이, 경주하듯이 그렇게 그의 일생을 달려 온 것이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본문이다. 

바울을 무작정 본받기에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그의 태도는 여전히 울림을 준다. 

복음에 대한 열정, 그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태도… 

그런 태도가 여전히 많은 경우 필요하다. 

교회를 교회답게,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하는 것은 상식적 기준을 넘어서는 헌신과 사랑이 기본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절제하고 끝까지 그 일을 하기 위해 연습한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그 목표를 향해 절제한다. 

그리고 그런 바울의 글은 초기 교회에 영감을 주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힘이 된다. 

우리 공동체도 이런 열정의 공간, 헌신의 공간으로 재탄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통스런 순간을 넘어서서, 절제하고 훈련해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주도하는 운동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헌신, 순종, 희생, 용서… 이런 단어들이 힘을 못 쓰는 공동체는 실제로는 오래가지 못한다. 

조직이 되어 현상 유지에 혈안이 된다. 

비전을 만들기가 어렵다. 

비전이 없는 공동체는 기독공동체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과연 어떻게 지금 시대에 헌신, 순종, 희생, 용서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다시 한 번 자문하게 된다. 


주님, 

헌신, 희생, 순종, 용서… 

이런 단어들이 힘을 얻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공정, 형평, 기준, 처벌… 

이런 단어들이 힘을 얻는 공동체는 이미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조직에 다를 바 없습니다.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서 헌신, 희생, 순종, 용서를 실천하게 하시고, 

자연스레 공동체 문화가 되게 하소서. 

물론 그렇다고 공정, 형평, 기준, 처벌이 사라진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권한이 많을수록 헌신과 희생이 우선되게 하소서. 

약자에게는 더욱 공정하고 형평성에 맞는 대우가 일어나되, 사실 그 이상으로 선대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강자와 약자를 구분했지만, 결국 공동체 전체는 헌신, 희생, 순종, 용서의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일에 쓰이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2월 07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니, 주님의 규례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

 

1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4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5 이른바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든 땅에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6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7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그들이 먹는 고기가 우상의 것인 줄로 여기면서 먹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약하므로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8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9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0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11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12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주석

10절: 교육도 더 많이 받고 사회적으로도 뛰어난 집단에 속했던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는 달리 이교도 축제 때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고기를 먹었고, 또 그들을 초대했을 때 고기를 대접할 수 있었던 부유한 친구들이 있었다. 아마 이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을 더 ‘강하다’고 자처했던 자유로운 분파를 대표했을 것이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은 ‘약한’ 자로 분류되었을 것이다(IVP 배경주석).


사랑은 덕을 세운다. 

지식은 자칫 양심이 약한 사람에게 걸림돌이 된다. 

약한 양심의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결심한다.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처음 이 편지를 읽었을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는 결단을 내린단 말인가? 

하지만, 바울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우상에 바쳐진 고기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경험한 사람들은 우상 제사에 쓰여진 고기는 그저 고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상 자체가 힘이 없는 존재이며, 사단과 귀신의 무리들은 그리스도 아래에 있고, 단지 사람들을 속이거나 겁을 주어 자신들에게 종속되게 하려는 존재라는 사실을 지식이 있는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알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지식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태생적으로 양심이 예민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우상 고기가 불쾌했으며,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일상이 무너져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교회에 오는 사람들 중에 그런 예민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상처가 많은 사람, 죄책감이 많은 사람, 완벽주의적 기질을 가진 사람, 두려움이 많은 사람… 사람은 약하고, 교인은 더 약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자유자라 자처하는 사람이 조심해야 한다. 

지식이 많다고 양심이 약한 사람을 쉽게 가르치거나 고치거나 할 수 없다. 

그런게 아니다.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쌓이고 마음의 상처도 회복되고 마음의 힘도 생겨서 양심도 건강하게 작동하는 순간이 되어야 우상 고기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술도 비슷하다. 

맥주나 와인은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며, 특히 서양 사람들은 물처럼 마시는 경우도 흔하다. 

술이 독이 되지 않도록 마신다면 그건 크게 문제될 것이 아니다. 

건강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도 있다. 

과음이 문제다. 

그래서 자유자는 편하게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러나 술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이 많다. 

아버지의 알콜 중독으로 가정이 파탄나기도 한다. 

음주 운전자로 인해 날벼락을 맞는다. 

주취자로 인해 싸움이 일어나고 칼부림이 벌어진다. 

이런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술을 먹는 그리스도인을 상상하기 어렵다. 

술을 드시는 예수님, 술을 먹는 바울, 디모데를 상상하기 힘들다. 

양심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금주를 실천할 수도 있다. 

바울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과 비슷하다. 

형제자매, 성도를 위해, 하나님의 성전인 동료 그리스도인을 위해 절제하는 것이 사랑이다. 

지식만으로는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결국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랑이 사람을 살린다. 

목회는 사랑의 영향력을 키우는 공간이다. 

사랑이 과연 그런 일을 하는지, 자기 가족 뿐 아니라 남이라 여겨지는 성도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는 공간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목회를 하고 있다. 

편지를 통해서 목회를 하는 것이다. 

바울도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단어 몇개의 차이만이 아니다. 

지식, 사랑, 경험, 덕, 개인, 공동체… 수많은 생각들의 집합이다. 

 

오늘도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있다. 

생각해야 할 일이 많지만, 핵심은 사랑이다. 

공동체가 더욱 건강해지려면 사랑이 커져야 한다. 


하나님, 

주님의 사랑이 더욱 커지기를 기도합니다. 

솔직히 지식도 더욱 많아지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품고 싶습니다. 

기억하고 싶습니다.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한 번 들은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지식과 정보가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성공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러나 그런 야망, 욕망을 내려놓고 사랑의 공간을 넓히고 싶습니다. 

덕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고, 그렇게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공간을 확대하고 싶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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