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7 02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법도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의로 내게 힘을 주십시오.

 

1 주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백성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 "너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여라."

2 그래서 왕은 데리고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지시하였다. "어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여서, 백성의 수를 나에게 알려 주시오."

3 그러나 요압이 왕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의 하나님이 백성을, 지금보다 배나 불어나게 하여 주셔서, 높으신 임금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높으신 임금님께서, 어찌하여 감히 이런 일을 하시고자 하십니까?"

4 그러나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이 이상 왕을 설득시킬 없었으므로,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이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려고, 앞에서 떠나갔다.

5 그들은 요단 강을 건너서, 골짜기의 한가운데 있는 성읍인 아로엘 남쪽에서부터 인구를 조사하였다. 다음에는 야스엘 성읍쪽으로 갔고,

6 다음에는 길르앗을 거쳐서, 닷딤홋시 땅에 이르렀고, 다음에 다냐안에 이르렀다가, 거기에서 시돈으로 돌아섰다.

7 그들은 두로 요새에 들렀다가,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을 거쳐서, 유다의 남쪽 브엘세바에까지 이르렀다.

8 그들은 땅을 두루 다니고, 아홉 스무 만에 드디어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9 요압이 왕에게 백성의 수를 보고하였다. 칼을 빼서 다룰 있는 용사가, 이스라엘에는 팔십만이 있고, 유다에는 오십만이 있었다.

10 다윗은 이렇게 인구를 조사하고 다음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래서 다윗이 주님께 자백하였다. "내가 이러한 일을 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종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 참으로 내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을 하였습니다."

11 다윗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 다윗의 선견자로 있는 예언자 갓이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

12 "너는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 주가 말한다. 내가 너에게 가지를 내놓겠으니, 너는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그대로 처리하겠다.'"

13 갓이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말하여 알렸다. "임금님의 나라에 일곱 동안 흉년이 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임금님께서 왕의 목숨을 노리고 쫓아다니는 원수들을 피하여 동안 도망을 다니시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임금님의 나라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퍼지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제 임금님께서는, 저를 임금님께 보내신 분에게 제가 무엇이라고 보고하면 좋을지, 생각하여 보시고, 결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4 그러자 다윗이 갓에게 대답하였다. "괴롭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자비가 많으신 분이니, 차라리 우리가 주님의 손에 벌을 받겠습니다. 사람의 손에 벌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석
1: 다윗의 인구 조사 기사는 왕의 교만이 이스라엘에 어떤 재앙을 초래했는지 보여준다. 사건은 왕권의 파괴적인 잠재력을 보여주는 일종의 비유라고 있다(IVP 성경신학 사전).

 

다윗의 인구 조사는 자신의 세력을 확인하려는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요압이 인구조사를 말렸지만 왕을 설득시킬 수 없었습니다(4절). 다윗은 인구조사 이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지만(10절),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14절).

 

다윗은 이방의 왕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왕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세력을 확인하려 했고, 이는 하나님 앞에서 죄로 여겨집니다. 다윗은 인구조사가 마친 뒤에 즉각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징계를 피할 순 없었지만, 하나님의 징계는 제한적으로 행해집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 자원, 능력들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 기억합시다.

 

——

오늘 본문은 많은 질문을 유발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다윗을 부추기시는 장면이다. 그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전염병을 내리시면 일을 다윗을 부추기셔서 죄를 짓게 뒤에 다윗의 죄의 결과로 이스라엘의 사람들을 죽이시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복잡한 방법을 사용하시는가? 

그전에 이스라엘의 죄가 큰가 아님 다윗의 죄가 큰가? 

이것도 아리송이다. 

 

일단 하나님의 판단이 공정하다는 전제 하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기시에 정말 죄악을 저질렀다. 

하나님이 크게 분노하실 때는, 사사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 결국 다른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를 하는 경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는 경우, 하나님은 이웃 나라의 군사를 활용하여 백성들이 억압받도록 허락하셨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바알, 아세라 등의 이방신을 섬기게 되는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다윗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우상숭배의 풍습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은 아닐까! 

죄에 대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신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는 그럴 있다고 치자, 그런데 다윗을 부추기시는가. 하나님 당신이 사랑하시는 왕을 부추기셔서 그로 하여금 백성을 죽게 만드는 원흉으로 스스로 깊은 죄책감을 느끼게 하실 이유가 무엇인가? 

갑자기 다윗이 너무 불쌍해 보인다. 이것도 다윗의 오래된 죄에 대한 결과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다. 

 

다윗은 결국 흉년 내지는 전염병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14 그러자 다윗이 갓에게 대답하였다. "괴롭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자비가 많으신 분이니, 차라리 우리가 주님의 손에 벌을 받겠습니다. 사람의 손에 벌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손에 벌을 받는 것은 아마도 3개월 동안 반역자들에게 쫓겨다니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이미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닌 적이 있다. 아마 너무 고생스러웠고,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했을 것이다. 

주님의 손에 벌을 받는 것은 중에 하나다. 흉년으로 고생하든가 전염병으로 고생하든가. 

그런데 흉년은 7년이고, 전염병은 3일이니, 아마도 전염병을 선택한 같다. 

 

하나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죄악은 결국 다윗 왕의 통치력 부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있다. 

하나님은 그것이 화가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 다윗을 통한 심판을 내리기로 결정하셨을 것이다. 

다윗은 인구 조사를 통해 하나님의 위치에 도취되고 싶어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추김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지 옵션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의 죄와 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다윗의 , 다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다윗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간의 도망자 신세가 되는 아니었을까? 

하나님은 과거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때에 다윗이 최고의 믿음과 신실함을 보였음을 알고 있었다. 

지난 압살롬의 반역 때도 다윗은 최고의 겸손함을 가지고 자신의 죄에 대해 반성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은 이번 사안에 대해서도 다윗이 다시 광야로 도망다니면서 모든 신뢰를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기를 바라셨을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윗이 정신을 차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도려내기를 바라셨다. 

 

다윗의 병사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인구조사를 했다. 

인구조사의 결과가 나오는 데는 9달하고 20일이나 걸렸다. 거의 10개월이다. 10개월 동안 다윗의 부하들은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현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첩보를 왕에게도 전달했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일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이었다. 사사기 시대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곳곳에 이방 신상들이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왕은 모든 상황을 파악/조치할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음에도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 이번 처벌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만을 향한 처벌이 아니었던 것이다. 관리부재의 책임을 다윗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다윗이 단호하게 우상숭배의 죄를 다루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윗은 다시 광야로 나가야 한다.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단호한 결정이 그에게 필요했다. 아둘람 동굴의 다윗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했다. 의지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윗은 더욱 절실히 깨달아야 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그간의 고통 때문에 트라우마가 있더라도 다윗의 선택은 달간의 광야 생활이어야 했다. 궁궐에서의 평안한 삶이 아니라 광야로 나아가 다시 말년에 마음을 붙잡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는 것이어야 했다. 흉년도 아니고, 전염병도 아니고, 광야가 정답이었다. 

 

그런면에서, 다윗은 다시 실패했다. 단순히 인구조사를 것이 실패가 아니라, 인구조사의 결과 하나님의 시험, 삼지 선다형 시험에서 실패한 것이다. 

하나님은 다시 다윗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원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치러 모리아 산에 올라갔던 아브라함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던 예수님처럼 

다윗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의 삶을 그분께 맡기기 위해 광야에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노욕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정말 많다. 

아무리 젊었을 , 영광스런 일을 많이 했더라도, 늙어서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그분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수도 있다. 

제발 대형교회,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이 끝까지 초심을 잃지 말고, 마지막 순간에 광야에 들어가길 기도한다. 

광야에 들어가 진정 하나님만이 자신의 삶의 최우선이었으며, 그분과의 교제가 최고의 가치였음을 삶으로 증명해주길 바란다. 

그렇게 나도 늙어가길 바란다. 

 

——

일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젊었을 때만의 주님이 아니라 늙어서도 오직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삶의 경험이 쌓이고, 지식이 축적되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져도 오직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이도 이제 50 향해 가고 있습니다. 

초조하게 무엇을 이룰지 고민하기보다 늙어서도 여전히 나의 주인은 주님입니다의 고백이 계속 나오게 해주세요. 

때로 다시 광야로 들어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광야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고통을 회피하지 않게 해주세요.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깊이 만나고, 

당신과의 교제를 더욱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나이듦이 훈장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지게 되는 통로가 되게 해주세요. 

주님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7 01 목요일

 

여는 기도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8 다윗이 거느린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첫째는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인데, 그는 용사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팔백 명과 싸워서, 그들을 한꺼번에 쳐죽인 사람이다.

9 용사 가운데서 둘째는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인 엘르아살이다. 그가 다윗과 함께 블레셋에게 대항해서 전쟁을 때에, 이스라엘 군인이 후퇴한 일이 있었다.

10 때에 엘르아살이 혼자 블레셋 군과 맞붙어서 블레셋 군인을 쳐죽였다. 나중에는 손이 굳어져서, 칼자루를 건성으로 잡고 있을 뿐이었다. 주님께서 엘르아살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으므로, 이스라엘 군인이 다시 돌아와서, 엘르아살의 뒤를 따라가면서 약탈하였다.

11 용사 가운데서 셋째는, 하랄 사람으로서, 아게의 아들인 삼마이다. 블레셋 군대가 레히에 집결하였을 때에, 곳에는 팥을 가득 심은 밭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를 보고서 도망하였지만,

12 삼마는 밭의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밭을 지키면서, 블레셋 군인을 쳐죽였다.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셨다.

13 수확을 시작할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평원에 진을 치니, 삼십인 특별부대 소속인 용사가 아둘람 동굴로 다윗을 찾아갔다.

14 때에 다윗은 산성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진은 베들레헴에 있었다.

15 다윗이 간절하게 소원을 말하였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있도록 해주겠느냐?"

16 그러자 용사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다. 그러나 다윗은 물을 마시지 않고, 길어 물을 주님께 부어 드리고 나서,

17 이렇게 말씀드렸다. "주님,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용사가 바로 이런 일을 하였다.

18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 삼십인 특별부대의 우두머리였다. 바로 그가 창을 휘둘러서, 삼백 명을 쳐죽인 용사이다. 그는 용사와 함께 유명해졌다.

19 그는 삼십인 특별부대 안에서 가장 뛰어난 용사였다. 그는 삼십인 특별부대의 우두머리가 되기는 하였으나, 용사에 견줄 만하지는 못하였다.

20 여호야다의 아들인 브나야는 갑스엘 출신으로, 공적을 많이 세운 용사였다. 바로 그가 사자처럼 기운이 모압의 장수 아리엘의 아들 둘을 쳐죽였고, 눈이 내리는 어느 , 구덩이에 내려가서, 거기에 빠진 사자를 때려 죽였다.

21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를 죽였는데, 이집트 사람은 풍채가 당당하였다. 이집트 사람은 창을 들고 있었으나, 브나야는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 그에게 덤벼들어서, 오히려 이집트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창으로 그를 죽였다.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해서, 용사와 함께 유명해졌다.

23 그는 삼십인 특별부대 안에서 뛰어난 장수로 인정을 받았으나, 용사에 견줄 만하지는 못하였다. 다윗은 그를 자기의 경호대장으로 삼았다.

24 삼십인 특별부대에 들어 있는 다른 용사들로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요압의 아우 아사헬과, 베들레헴 사람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25 하롯 사람 삼마와, 하롯 사람 엘리가와,

26 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27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28 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29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으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30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

31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웻과,

32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들과, 요나단과,

33 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

34 마아가 사람의 손자로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35 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

36 소바 사람으로 나단의 아들 이갈과, 사람 바니와,

37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38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39 사람 우리야까지, 모두 합하여 서른일곱 명이다.

 

다윗과 함께 했던 용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용사들은 3인의 용사와 30인(실제 37인)의 특별부대로 나뉘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3인의 용사들은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에서 물을 길어 오는 것을 통해, 다윗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었습니다(15-17절). 다윗이라는 인물이 있기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 명단의 마지막 이름은 헷 사람 우리야입니다(39절). 그는 충성된 용사였지만 다윗의 범죄로 인해 희생된 인물입니다(삼하 11:17 참조). 이것은 다윗왕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꼭 기억해야 하는 이름입니다. 이는 다윗 왕 조차도 완전한 통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

 

다윗 왕이 외적을 무찌르고, 통일 왕국의 왕이 있었던 여러 요인 하나에는 충성스럽고 용맹한 용사들이 있다. 

다윗 스스로도 블레셋의 거인을 무찌른 용사 중의 용사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그의 충성스런 부하들의 전공도 그에 못지 않다.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 삼총사는 공적은 매우 뛰어났다. 무공도 뛰어났지만, 다윗에 대한 충성심도 탁월했다. 

다윗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모두의 행운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도 이런 제자들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윗의 용맹스런 부하들같은 제자들 말이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그런 제자들이 되기를 바라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의 유명한 용사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다. 

12명의 제자 중에는 예수님을 배신했던 사람도 있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도리어 평범한 사람들을 당신의 최측근으로 삼아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다. 

무력이 아닌 사랑과 섬김으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다윗과 예수님의 차이가 여기서 난다. 

 

현실적으로 다윗의 부하와 같은 사람들이 충성스럽게 섬겨주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세상에 겁날 것이 없겠다싶다. 

삼총사 외에 아비새와 37명의 특별 부대 용사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다윗은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들의 충성심에 항상 놀라고 기쁘고 즐거웠을 것이다. 

블레셋의 거인들을 이기고, 외적의 유명한 장수들을 거꾸러뜨릴 , 다윗의 기분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며,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으리라. 

이런 일들이 현실 속에 벌어진다면, 조직과 회사 혹은 공동체는 막강한 파워와 영향력으로 세상을 압도하게 것이다. 

능력과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실무진이 있다면 못할 일이 없다. 

가끔 그런 꿈을 꾼다. 

잘하는 사람들과 최고의 퍼포먼스를 만들어 세상을 놀라는 하는 . 

그러면서도 팀원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가득한 . 

내가 팀원중 하나여도 좋다. 물론 그런 팀의 리더라면 더욱 좋겠다. 

 

그러나 결국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들을 부하로 두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윤리적 실패와 가족 운영의 실패는 많은 사람들을 어이없는 죽음으로 몰고 감을 있다. 

오늘 본문에도 다윗의 허황된 바램이 삼총사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몰고 했다. 

게다가 특별부대의 마지막에 기록된 우리야의 이름은 뼈아프다. 

다윗의 실수를 더욱 부각시킨다. 이름을 중간에 넣지 않은 것이 역사 편집자의 적극적인 의도처럼 보인다. 

아무리 좋은 팀원이 있어도 결국 리더가 윤리적으로 실패하면 팀은 망가지게 된다. 

전쟁터에서 누렸던 승리의 기쁨은 일상의 윤리적 틈새로 빠져나가고 원망과 증오가 남게 된다. 

리더는 정말 고통스러운 자리다. 

전장터에서 죽는 것이 제일 명예로운 일일 있겠다싶다. 

괜히 일상으로 복귀하지 말고, 숱한 유혹에 시달리다 실수에 빠지지 말고, 가장 치열한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을 있는 바로 그곳에서 장렬히 산화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명예를 생각하면 더욱 그런 생각이든다. 

하지만, 인생이 어찌 전장터에만 있을 있단 말인가. 

결국엔 현실의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지루한 일상의 현장으로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혼자만의 시간으로.

치열함보다는 나름함이 주는 지루함으로.

일상의 현장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요 공간이라는 의식이 주는 긴장을 유지할 있을까!!

 

갈릴리 바닷가의 조용한 아침, 제자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린다. 

예수님은 일상을 풍성함으로 채워가셨다. 

전쟁같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간을 뒤로 , 그분이 하신 일이 아침 준비라는 사실이 오늘 이리 감사할까. 

다윗의 인생 속에서 전쟁터가 아닌 궁궐 옥상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날 있었으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있었을까. 

 

주님과 조용한 아침을 먹고 싶다. 

 

——

주님, 다윗의 인생을 돌아봅니다. 

용맹한 그의 부하들과 전장을 누비며 승리를 기쁨을 누렸던 다윗. 

그러나 일상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했던 다윗. 

주님, 작은 일상 속에서 주님을 더욱 기억하고 싶습니다. 

제가 일을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비록 작은 일상 속에서 주님과 아침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때로 밥상을 차려주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주님, 오늘도 예수님의 은혜로 살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30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이것은 다윗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한다. 높이 일으켜 세움을 받은 용사, 야곱의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 이스라엘에서 아름다운 시를 읊는 사람 말한다.

2 주님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니, 그의 말씀이 나의 혀에 담겼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다스리는 ,

4 구름이 끼지 않은 아침에 떠오르는 맑은 아침 햇살과 같다고 하시고, 비가 뒤에 땅에서 새싹을 돋게 하는 햇빛과도 같다고 하셨다.

5 진실로 나의 왕실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지 아니한가?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만사에 아쉬움 없이 갖추어 주시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어찌 나의 구원을 이루지 않으시며, 어찌 나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랴?

6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아무도 손으로 움켜 없는 가시덤불과 같아서,

7 쇠꼬챙이나 창자루가 없이는 만질 수도 없는 , 불에 살라 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시인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노래합니다(1-2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장차 한 의로운 왕이 나타나 생명력 넘치는 햇살과도 같이 임할 것입니다. 그 햇빛은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낼 것입니다(3-4절). 자신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반면 악한 사람들은 가시덤불 같이 불태워질 것입니다(5-7절).

 

다윗의 마지막 예언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의로 다스리는 왕, 장차 오실 메시아를 떠올립니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을 공의로 다스릴 진정한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이 땅의 모든 고통과 어둠을 물리치고 마침내 다시 오실 온전한 왕을 기다리며 본문을 묵상합시다.

 

——

 

다윗의 자기 정체성 

 

다윗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로 규정한다. 

높이 일으켜 세움을 받은 용사, 

기름 부어 세우신 , 

그리고 아름다운 시를 읊는 사람. 

용사, , 시인 

하나만 해도 인정받는 사람이 것이다. 

용사이기만 해도, 왕이기만 해도, 시인이기만 해도 

그러나 그는 싸움을 잘하는 용사면서 왕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에 못지 않게 시를 지어 노래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었다. 전사, 통치자, 그리고 예술가였던 것이다. 

 

이런 정체성을 형성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은 지대했다. 다윗도 사실을 온전히 인정했다. 

높이 일으켜 세움을 "받은"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것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용사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일으켜 세워주신 것이다. 

기름부어 주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스스로 기름을 부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이 것이 아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알기에 그는 감사의 , 찬양의 , 탄원의 , 도움의 시를 지을 수가 있었다. 

자시 스스로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 위한 시를 것이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시인의 자리에 있게 했다.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 것이다. 

 

공의의 통치차,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 

 

하나님은 공의로 통치하는 왕을 원하셨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왕을 원하셨다. 

자기 맘대로 자기 유익을 위해, 자기 쾌락을 충족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식 속에서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왕을 기대하셨다. 

다윗 왕이 그러하길 바라셨다. 

비록 시에서는 다윗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충족되는 사람인양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윗은 어느 순간부터는 철저히 망가진 군주였다. 

하나님이 마치 안계신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계획적으로 죽일 있단 말인가? 

그러기에 그의 잘못은 역사에 길이 남아 후대에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시점에 잘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자신의 잘못을 전혀 모르지 않고 있는 다윗이 기어코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5 진실로 나의 왕실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지 아니한가?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만사에 아쉬움 없이 잘 갖추어 주시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어찌 나의 구원을 이루지 않으시며, 어찌 나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랴?

 

비록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의 명예는 실추되었고, 사실 자신의 왕실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현재의 모습이라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기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주실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다른 몰라도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신실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들, 유다의 자손들은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영원한 왕을 그들에게 내려보내 주실 것이다. 완전한 , 공의와 사랑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 모든 인간의 딜레마를 해결 있는 . 메시야를 그들은 기다린다. 다윗은 실패했지만, 다윗과의 약속을 통해 진정한 왕이 도래할 것이다. 다윗은 약속을 신실하게 믿었고 신뢰했다. 다윗이 점이 있다면 바로 지점이다. 

 

——

주님,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강한 확신 속에서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의 약속에 깊게 뿌리내리며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립니다. 

저에게 확신과 용기를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25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 주님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셨을때에, 다윗이 노래로 주님께 아뢰었다.

2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

3 나의 하나님은 나의 반석,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 나의 산성,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구해 주십니다.

4 나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셨습니다.

5 죽음의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파멸의 파도가 나를 덮쳤으며,

6 스올의 줄이 나를 동여 묶고, 죽음의 덫이 나를 낚았다.

7 내가 고통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고,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그의 성전에서 나의 간구를 들으셨다. 주님께 부르짖은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의 귀에 다다랐다.

 

8 주님께서 크게 노하시니, 땅이 꿈틀거리고, 흔들리며, 하늘을 받친 산의 뿌리가 떨면서 뒤틀렸다.

9 그의 코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그의 입에서 모든 것을 삼키는 불을 뿜어 내시니, 그에게서 숯덩이들이 불꽃을 튕기면서 달아올랐다.

10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실 때에, 아래에는 짙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

11 주님께서 그룹을 타고 날아오셨다. 바람 날개를 타고 오셨다.

12 어둠으로 주위를 둘러서 장막을 만드시고, 빗방울 머금은 먹구름과 짙은 구름으로 둘러서 장막을 만드셨다.

13 주님 앞에서는 광채가 빛나고, 빛난 광채 속에서 이글거리는 숯덩이들이 쏟아졌다.

14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천둥소리를 내시며, 가장 높으신 분께서 목소리를 높이셨다.

15 주님께서 화살을 쏘아서 원수들을 흩으시고, 번개를 번쩍이셔서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다.

16 주님께서 꾸짖으실 때에, 바다의 밑바닥이 모조리 드러나고,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콧김을 내뿜으실 때에, 땅의 기초도 모두 드러났다.

 

주석
이 노래는 사소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시편 18편으로 구약의 시편에 포함되어 있다. 시편들 사이에서의 그 위치는 그것이 일반적인 감사 찬양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IVP 성경주석).

 

다윗은 대적들의 공격과 박해로부터 구출해주신 하나님을 회상하며 노래합니다. 다양한 시적 은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1-3절), 하나님의 구원은 자신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었음을 고백합니다(4-7절).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돕기 위해 달려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다윗의 부르짖음에 대한 그분의 응답이었습니다(8-16절).

 

다윗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함께 하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그분의 도우심이 어떻게 임했는지 생생하게 고백하며 찬양합니다. 우리의 지난 삶을 돌아봅시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하나님,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시고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올려 드립시다.

 

——

환란에 때에 기도하고, 즐거운 순간에 찬양하라는 야고보의 제안이 떠오른다. 

확실히 다윗은 자신이 어려움을 경험하는 순간에 주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시련의 순간이 지나가자 최고의 표현으로 주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렸다.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었다. 

탁월한 전사였고, 오랜시간 죽이며 자기 세력을 구축한 인내의 전략가인 다윗은 그에 못지 않게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찬양에 대한 열정은 시편에서 종종 느껴진다. 

하나님은 그의 열정에 탄복하셨을 수도 있겠다. 

마음에 합한 다윗, 그러나 이런 칭호는 다윗의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에 국한된다. 

중년의 다윗, 말년의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뤄가시기로 결정하신 같다. 

다른 무엇보다 다윗이 끝까지 품었던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사랑의 표현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비록 그가 잘못했지만, 그래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고난과 고통을 받았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다시 겸손하게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전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사울 왕의 죄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을 가진다. 이렇게 그는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쉬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실수와 죄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복의 길로 돌아서는 다윗의 모습을 수납하신 같다. 

죄에 대해서는 그에 응당한 현실적 처벌이 뒤따른다. 그걸 피하려고 하지 말자.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자꾸 넘어진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 

결심이 흔들린다. 

더욱 정결한 삶을 살고 싶은데, 가족들에게 가장 좋은 모습으로 살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노출된다. 

딸이 실망할까봐 두렵다. 

아들이 나의 때로 보이는 이중적인 정서적 표현에 부정적 타격을 입을까봐 두렵다. 

결국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는데, 종종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실망감을 안겨주곤한다. 

 

여전히 성숙하고 성장해야 요소가 너무 많다. 

온전함에 도달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온전함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는 않겠다.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바꾸실 것이라는 사실. 

이런 사실을 믿고 기대하며 그분을 찬양한다. 

 

더욱 정결한 존재로 빚어가 주시길 다시 부탁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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