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25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4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15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16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18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19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석

15절. 15절은 기본적으로 모든 살아 있는 무리의 창조자시며, 그 각각에게 ‘형태’와 역할을 주권적으로 부여하시는 하나님을 천명하는 말이다. 히브리 전통에서는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이름을 주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이름표를 붙여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말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 속에 거하신다. 

육신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계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예수님의 존재, 성품, 가르침, 비전 등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지속적으로 상기시키신다. 

내가 이해하기로 예수님이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은, 삼위일체 중 한 위격이신 성령님이 영으로 사람의 마음에 거하신다는 의미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요,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 

성령님을 보고 있으면,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성령님의 일하심은 예수님의 현현이요 재현이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자연스레 예수님을 닮게 된다. 

이것이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의 실재다.

 

내 마음 속에 성령님이 계시는가?
그분이 더 활발히 일하시도록 그분께 요청하고 있는가? 

그분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 그리스도의 사랑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경험했던 사람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박해했던 바울을 만나주시고 인생의 새로운 목적과 목표를 제시해 주셨다. 

그 사랑이 그의 마음에 언제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사랑이 더욱 크고 강력하고 엄청나게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령의 법에 대한 강조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 사랑은 온갖 지식을 초월한다. 

그 사랑은 성도들이 구원받게 되는 초석이며, 구원 이후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없고, 대리통치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사탄의 거짓과 술수와 계략과 위협과 유혹을 이길 힘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악행자들의 폭력과 억압과 위협 속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수많은 재난과 고통 속에서도 대리통치자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어찌 어려움이 없겠는가? 

어찌 고통이 없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찌보면 더욱 피곤하고 고통스럽다. 

높은 윤리적 기준도 그렇고, 책임있는 대리통치자의 자리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이 잘 알아 주지 않은 것도 그렇고… 때로 더 외롭고 괴롭다. 

그분의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뚫고 나갈 힘이 없다. 

그분의 사랑 덕분에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개인과 교회와 공동체에 넘치게 흐른다. 

그분의 사랑 덕분에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틀이 놓인다. 

그분의 사랑 덕분에 공동체가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모든 지식과 정보와 이론과 사상보다 뛰어난 그분의 사랑 덕분에 이것이 가능하다. 

사람들 간의 사랑과 신뢰와 희생이 가능한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 덕분이다. 

 

그 사랑을 나와 우리 공동체가 경험하길 소망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알고, 깨닫고, 삶으로 살아내길 소망한다. 

그분의 사랑이 더욱 드러나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고 경험하고 느끼길 원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사랑, 내게 소명을 주시고 이끄시는 사랑, 오늘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 앞으로도 실수와 죄악과 부족함을 용납해주시는 그 사랑… 

그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며, 경험하고 정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 사랑을 흘려 보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 사랑을 후배들에게 청년들에게 학생들에게 흘려 보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를 보호하려기보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24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8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9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10 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11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을 따른 것입니다.

1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13 그러므로 여러분을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난을 보고서, 여러분이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환난은 여러분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주석

10절. 여기서 말하는 정사(통치자, rulers)들은 아마 하늘에 속한 모든 존재일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나 6:12의 악한 세력들뿐만 아니라 둘 다를 가리킬 것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지극히 작은 자 

바울이 자기 자신을 낮출 때마다 위선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후세대와 이방인들에게 전파한 사람이었다. 

기독교의 교리의 기초를 놓았고, 기독교가 그 모양을 갖추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방세계에 예수님과 하나님을 전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모든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고 말하니, 어찌 위선 혹은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바울의 인생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가 주님을 얼마나 박해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를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권세를 가지고 전세계로 파송받았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반역과 악행을 생각할 때, 그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 스스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과거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회상할라치면 부끄러움과 수치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누군가 그의 과거를 말할 때마다 진땀이 흘렀을 것이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는 그의 마음의 표현은 그에게 있어서는 진실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과거의 자신만 부끄러웠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거다. 

현재의 자신도 부끄럽기는 매한가지. 

신앙생활은, 자신에 더욱 알아가는 과정인 신앙생활은,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계속 알아가는 과정이다. 

육체의 법과 성령의 법이 서로 싸우고 있음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다. 

성화의 단계에 올라갈수록 자신의 죄성과 연약함이 더 많이 보이는 법이다. 

거룩한 하나님과 더 친밀해질수록 거룩하지 못한 자신의 몸, 영혼, 정서, 행동이 더 부각된다. 

그래도 괜찮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여전히 부르시기 때문이다.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스런 계획과 일들을 보여주시고 맡기신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도 상당히 부담스런 일이다. 

이 일의 끝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인가? 

이 곳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까? 

주님의 뜻을 구한다. 

점점 나의 연약함을 알아가게 될 이 일의 끝에서 나는 하나님께만 영광돌리 수 있을까? 

 

 

2. 교회를 통하여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밝혀졌다. 

이방인도 구원의 대열에 합류하여 유대인과 한 몸이 되었다. 

교회는 이것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네트워크, 공간이다. 

바울에게 알려주신 그 비밀은 한 개인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가 그 비밀을 온 세상에 드러낸다. 

교회는 하나됨으로 세상을 바꾼다.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세상에 천명한다. 

부족하고 연약해서 때로는 넘어지고 깨지지만,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다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낸다. 

이것은 영원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뜻이었다. 

그 계획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부족한대로, 연약한대로 하나님의 뜻이 실행된다. 

그러기에 교회는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1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한 개인도 부족하지만, 그런 개인들이 모인 교회도 기독공동체도 다 부족하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분 안에서 그 비밀의 확산이 가져올 영광스러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용기있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구할 바를 아뢴다. 

아마도 바울도 이런 마음으로 사역했을 것이다. 

때로 선교팀이 분열되고, 서로 싸우고, 외부의 핍박에 핍절한 상황에 놓여도, 그는 다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라며 기도했을 것이다. 

 

이 꿈과 비전을 놓치고 싶지 않다. 

끝까지 용기 있게 그 길을 걷고 싶다. 

다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분이 주시는 뜻을 받고 따르길 원한다. 

 

[오늘의 기도]

부족한 사람들을 불러서 당신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주님을 바라봅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육체의 정욕, 성공에 대한 욕망, 인정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한 저를 봅니다. 

더욱 정결하고 깨끗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의 부족함에도 여전히 사명을 맡기시고, 그 일을 하라고 부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하소서. 

저 뿐 아니라 교회와 기독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리시길 원하시는 주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일을 이루도록 도우소서.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그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담대함을 얻어 우주의 주인이신 당신께로 나아가겠습니다.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23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 그러므로 이방 사람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나 바울이 말합니다. 

2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도록 나에게 이 직분을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미 들었을 줄 압니다.

3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 비밀을 계시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간략하게 적은 바와 같습니다.

4 여러분이 그것을 읽어보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5 지나간 다른 세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주지 아니하셨는데, 지금은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성령으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6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7 나는 이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이 작용하는 대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따른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1.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다. 

이유는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두 그룹에서의 고소가 계속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이방인들 중에 이방신을 모독하는 것이 경제적 손해가 되기에 고소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장소가 에베소였다. 

아데미 신전이 있었던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자, 폭동을 일으켜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잡아서 즉결심판을 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사도행전 19:21-41). 

이방신을 섬기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위협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 중에 바울의 복음이 자신들의 율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님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특히 바울은 예수님을 복음을 전하면서, 율법의 핵심이라고 여겨졌던 할례나 각종 제사나 절기에 대해 이제는 필요없다는 입장이었다. 

예수님에 의해서 언약이 성취되었고, 더는 율법 조항 중 예식법, 절기법, 제사법 등은 그 의무를 다 했다고 본 것이다. 

바울의 개혁적인 주장에 반기를 든 전통주의자 유대인들이 많았고, 이들은 바울의 선교 여행에 쫓아 다니며, 바울을 박해하고 고소했다. 

 

바울은 이렇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예수님을 전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언약의 성취와 개혁 정신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무엇보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과 동일한 신분이 되었음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감옥에 갇히는 이유가 된다. 

박해받는 이유가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이들의 장난이 아니다.

인생을 건 한결같은 헌신이다. 

위험과 위협이 따르는 험준한 산악 여행과 같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와 샘이 갔던 길과 같다. 

역경과 어려움은 언제나 있어 왔다. 

 

2. 그 비밀  

바울의 부르심에 근저에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비밀이 놓여 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이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6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밀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 선포다. 

복음은 유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복음은 이방 사람들도 언약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거룩한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묵살했었다. 

모든 민족이 복을 누려야 하며, 그 복의 근원이자 유통자로서의 아브라함 자손의 소명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그 소명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음으로 도리어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서 멀어졌다. 

율법에 등장하는 성결법(거룩을 위한 법)은 열심히 지켰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래 주었던 언약의 근간이 복의 전달자, 유통자로서의 역할은 소홀히 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비밀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땅에 감추어진 보물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이 다시 그 보물을 꺼내셨다. 

예수님을 통해 땅을 파시고 그 보물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 시작하셨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성령님을 통해 보여주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보물을 바울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인 그 비밀을 알게 되면 소명이 생긴다. 

하나님의 비전을 알게 되니, 소명이 발생한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하게 알면 알수록 소명이 더욱 확실해진다. 

인생의 목표가 생긴다. 

그저 지나가는 인생은 없다. 

 

 

[오늘의 기도]

당신의 계획과 비전을 알려주신 하나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 인생을 허망함과 허무함에 두지 않으시고, 

목적과 목표를 두셔서 심장을 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심어두신 그 비밀을 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드러난 주님의 계획에 참여토록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그 계획 때문에 흥분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열정적으로 주님의 계획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주님,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4월 19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주석

13-15절. 구원 행위는 “피”라는 용어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되는데, 피는 희생 제사 곧 죄인과 하나님의 화해 수단으로서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로써 믿는 이들을 위해 이방인과 하나님 사이의 장애물이 제거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애물도 무너진다. 이 장애물은 모세의 율법으로, 모세 율법은 그 권위를 받아들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분리했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따돌림 

할례자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를 자신들의 몸에 품고 사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자랑스러움을 너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판단, 정죄, 그리고 따돌렸다. 

판단과 정죄는 개인의 내적 활동이라면, 따돌림은 외적 활동이며, 타인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주는 행위다. 

개인주의 문화가 발달하기 훨씬 이전, 가부장제의 공동체주의 사회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나마 유대인이 인구통계학적으로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에게 따돌림 당하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교회로 들어오면 유대인의 비중도 상당히 늘어났기 때문에, 그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이유로 이방인 출신들을 따돌린다면 이는 상당히 큰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삶의 기준, 윤리/도덕적 기준이 상당히 높고 확고했다. 

그들에게 판단받고 정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버거웠다. 

 

사실 바울조차도 이방인들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정죄적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약속과 무관하게 하나님도 없이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시키는 대로, 욕망에 따라 움직이던 사람들이었다. 

 

2. 자기 몸으로 부숨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부서짐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으셨다. 

유대인은 정죄하고, 이방인들은 죄책감과 함께 저항감으로 반항했을 것이다. 

서로 사이가 좋을 일이 없었다. 

교회가 하나되어야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현실 교회는 이에 턱없이 못미쳤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내에서도 싸웠다. 

바울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징에 대한 강조였다. 

자기 희생으로 갈등의 두 집단을 하나로 묶으셨다. 

자기 몸을 부수고 망가뜨려서 막힌 담을 허무셨다. 

부러진 다리를 이어주셨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던 아담과 하와를 하나로 묶으셨다. 

두 그룹을 하나가 되게 하여 한 몸으로 만들어 주셨다. 

 

서로 갈등하는 두 그룹을 중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신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고, 권한이 많아질수록 꼭 해야 하는 것이 중재다. 

서로 이해 관계가 팽팽할 때, 그 관계를 풀어가는 것이 중재다. 

결국 갈등 중재는 자기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가 없이는 중재가 불가능하다. 

 

그 마음을 다시 배운다. 

자기 몸을 부수어 한 몸을 이루신 그분을 바라본다. 

 

[오늘의 기도]

극단적인 두 그룹을 하나로 묶으시는 주님, 

주님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서로 싸우게 두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서로 싸우다 제 풀에 못 이겨 싸움을 멈추게 되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해와 평화입니다. 

막힌 담들이 풀리게 하소서. 

불신의 담들이 무너지게 하소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이 놀라운 경험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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