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03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22 주님의 이름을 나의 백성에게 전하고, 예배 드리는 회중 한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23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여라. 야곱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려라. 이스라엘 자손아, 그를 경외하여라.24 그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신다.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25 주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회중이 다 모인 자리에서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서원한 희생제물을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치겠습니다.26 가난한 사람들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늘 유쾌하길 빕니다!” 하면서 축배를 들고,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27 땅 끝에 사는 사람들도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28 주권은 주님께 있으며, 주님은 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29 땅 속에서 잠자는 자가 어떻게 주님을 경배하겠는가?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가 어떻게 주님 앞에 무릎 꿇겠는가? 그러나 나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겠다.30 내 자손이 주님을 섬기고 후세의 자손도 주님이 누구신지 들어 알고,31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하고 선포할 것이다.
NIV
All the rich of the earth will feast and worship;
all who go down to the dust will kneel before him—
those who cannot keep themselves alive(29절).
[오늘의 묵상]
시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첫째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분, 둘째 찬양받으실 분, 셋째 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2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고백한다.
24 그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신다.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보고 느끼고 계신다.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에 언제나 응답해 주신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정말 기쁘고 감사할 일이다.
솔직히 난 하나님이 고통스런 사람들을 돌보시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부르짖는 사람에게 언제나 응답해 주신다고는 쉽게 믿기지 않는다.
몇몇 달변가 혹은 궤변론자(?)들이 여기서 말하는 “언제나”에는 Yes, No, Wait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 그대로 긍정적으로 응답하실 수 있고, 아니라고 하실 수도 있고, 좀 더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무응답도 응답이라고 주장하는 영성가도 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언급하면서 아무런 응답이 없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논한다.
그런데 정말 고통에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무응답이 과연 응답이란 말인가?
그냥 뭐라도 편하게 말씀해주실 수 없으신가?
너무 어렵게 하시지 말고, 쉽게 쉽게 응답해주시면 안될까?
고등종교는 참 어렵다.
그분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그분이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시고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난 감사드린다.
그분은 그런 분이시다.
그러나 부르짖는 사람에게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는 시인의 주장은 과장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둘째, 시인에게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다.
가난한 사람들이 축배를 든단다(26절).
세상 모든 민족이 경배를 한단다(27절).
찬양은 인간 내면에 심겨진 종교적 본성이다.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를 찬양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감탄과 탄성의 확장이다.
게다가 그분이 나를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라면 말해 뭐하나!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등장하셔서 사람들을 구출하고 구원하셨다.
예수님이 산 증인이시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자들을 돌보셨다.
삼위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어제 카톨릭 미사를 드렸다.
결혼 미사를 빼고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경건함이 공간을 압도한다.
사제, 부사제, 동사, 사회자, 기도자, 봉독자, 성가대…
공간, 분위기, 음악이 웅장함과 함께 위축감을 선사한다.
혼자 앉아 있으니 어떻게 미사가 진행되는지 관찰하기 바쁘다.
사실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성도들은 많은 것을 암송하고 있었다.
노래면 노래 기도면 기도, 주임 신부의 선창 혹은 성가대의 선창에 이어 성도들의 후창을 들었다.
잘 들리는 듯하면서도 정확히는 들리지 않는 기이한 상황.
가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최신 아이돌 음악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안개를 헤메는 듯한 느낌.
영성체 시간, 미사의 꽃이었다.
사제의 말씀시간보다 길면 길었지 짧지 않았다.
사제의 말과 행동으로 떡과 포도주가 진짜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경건함.
카톨릭 영성의 요체가 바로 그 시간이라는 것이 새삼 강하게 느껴졌다.
매주 이들은 기적을 보고 먹는다.
과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인장모님의 딸인 아내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화체설을 믿는 신자는 많지 않다더라.
그래도 천주교 신자 중 3분의 1일 화체설을 믿는다고 통계가 말해준다.
그렇다면 600만명의 한국 천주교 신자 중 200만명이 화체설을 믿는다는 것인데, 이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매주 신부가 집전하는 신비로운 기적을 보고 믿고 먹고 마신다는 사실에 놀란다.
예수님의 떡과 피가 자기 몸에 들어오니 그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된다.
그럼 그 한 몸된 자신을 성령의 성전으로 알고,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로 경건하게 살아갈 실질적, 심리적 동인을 얻게 된다.
영성의 요체라 불릴만 한다.
1) 예배의 장엄함
2) 영성체(성만찬)의 영성적 효과
그리고 세 번째로 느낀 것은 어쩔 수 없이 미사의 위계와 높은 허들이었다.
사제부터 평신도까지 위계가 분명했다.
성도들의 노래와 각종 기도문의 후창을 외우지 않고서는 미사에 온전히 참여하기 힘들다.
사제가 미사가 마쳤음을 알렸으나 성도들은 남아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는 성가대도 멈추고 오직 성도들만의 노래와 기도로 이어졌다.
이것도 개신교인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제는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으나, 성도는 마리아를 통해서 기도를 올려드린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사실 한 번 미사를 드린 것이니, 피상적인 느낌에 불과하지만, 배울 점과 접근하기 어려운 점 모두 적어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여하튼, 미사 내내 성가대의 운용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찬양은 거의 끊김이 없었고, 그들의 소리는 공간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었다.
아무나 성가대를 할 수 없어 보였다.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가톨릭의 성가대는 이를 현실화시켰다.
셋째, 시인은 하나님을 만국을 통치하시는 분을 보고 있다.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하나님은 만국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분이 아니시다.
가나안 땅의 부족신이 아니다.
그분은 전 세계에 영향을 주신다.
그분은 지금 이 땅과 미국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북한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통치는 인간들의 통치와 정치와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과 같이 섬기는 자들을 통해 나라와 민족과 자연과 만물을 보존하시는 방식으로 통치하신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주님이 섬기고 돌보는 자들을 통해 이 세상을 보존하시고 지탱하시며 움직이신다.
이걸 믿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트럼프, 푸틴, 젤렌스키, 시진핑… 이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져간다.
트럼프과 젤렌스키는 전세계가 보는 앞에서 말싸움을 이어갔다.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고, 경제적 이익도 챙기고 싶으니, 젤렌스키를 압박했다.
미리 사전에 논의하고 결정난 것을 서로 악수하며 싸인하면 되는 일을, 공개적으로 불러서 망신을 줬다.
그렇게해서 젤렌스키를 국제적으로 외교적으로 왕따를 시킬 계획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젤렌스키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다.
전쟁을 일으킨 푸틴이나 막지못한 젤렌스키나 도긴개긴이다.
푸틴의 야욕이 더 큰 문제이긴 하지만 젤렌스키의 무모함과 어리석음도 한 몫했다.
지도자들의 욕망, 교만, 무모함과 어리석음 속에서도 현재 이 세계가 이정도라도 보존되고 운영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돌봄이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꿈꾸며 특히 예수님이 세계 통치의 완전함을 그려본다.
그 나라가 빨리 와서 더 이상의 전쟁과 살상과 슬픔이 사라지길 기도할 뿐이다.
[오늘의 기도]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고통받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소서.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 새로운 나라를 열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지도자들의 교만은 하늘을 찌릅니다.
그들을 겸손하게 하소서.
고통받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소서.
눈물이 마르지 않는 자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허락하소서.
눈물이 마르고, 생의 의지가 드러나고, 웃음이 다시 번지게 하소서.
생명의 기운이 흐르게 하소서.
러우 전쟁이 끝나게 하시고, 더 이상의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을 막아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냇가에 심은 나무 >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24편_주님께서 땅의 기초를 세우셨다 (2) | 2025.03.17 |
---|---|
시 23편_당신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1) | 2025.03.10 |
시 22:12-21_나는 쏟아진 물처럼 (0) | 2025.02.24 |
시 22:1-11_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1) | 2025.02.17 |
시편 21편_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0) | 202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