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9 [예수께서 이레의 첫날 새벽에 살아나신 뒤에,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이다.
10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것과, 마리아가 예수를 목격했다는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내려가는데, 예수께서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되돌아가서 알렸으나,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처음으로 보인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사실 굉장히 충격적인 사실이다.
베드로도 있고, 요한도 있었다.
성경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지는 중요성을 놓고 볼 때, 예수님이 부활 후 처음 만나야 하는 사람은 그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막달라 마리아를 만났다.
친모인 마리아를 만난 것도 아니다.
일곱 귀신을 들렸다가 구출된 여인, 그래서 예수님의 경제적 후원자로 섬겼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
사람들은 그녀를 예수의 여인이나 부인으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으로 결론 내릴 수 없는 상상이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과거의 아픔을 이겼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일곱 귀신에 걸려 삶이 마구 무너졌었다.
예수님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지켰다.
그리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남성중심적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신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성경은 여성을 첫 증인으로 두었다.
이것도 성경이 대단히 도발적인 책임을 보여준다.
시대에 순응하는 책이 아니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책이다.
그러기에 더욱 신빙성이 있다.
누군가에 의해 각색된 책이 아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본 예수님을 증언했다.
남성 제자들은 믿지 못했다.
그가 여성이기에 믿지 못했을까?
그의 말이 너무 허무맹랑해서였을까?
둘 다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슬피 울고 있었다.
지난 삼일 내내 울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곳에는 남성 여성 제자들이 다 있었다.
그들 중에는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기진한 사람도 있었겠다.
예수님이 살아 돌아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는 못했다.
그분의 시체를 봤던 사람들, 그분의 장례를 봤던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마리아의 이야기만 못 믿는 것이 아니다.
엠마오 마을로 돌아갔던 제자가 다시 돌아왔다.
밤늦게 돌아온 그들은 길가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했다.
이상했다.
왜 11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는단 말인가?
그냥 깔끔하게 11명의 제자들(나중에 사도가 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11명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나타난 것을 부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고, 더 빨리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가신 예수님이라면 그분은 예수님이 아닐 것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게 영적 교만이다.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이다.
영적 교만에 빠지면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그랬고, 지금은 제자들이 그렇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각 안에 가두려는 자들은 그분의 자유로움을 부인하고 싶어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틀과 이데올로기에 가두려는 자들은 그분의 섭리를 믿지 못한다.
영적 교만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길은, 적은 무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작은 양떼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누가복음 12:32)
적은 무리, 작은 양떼들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빠르게 다가가신다.
그들을 향한 사랑은 빠르고 거침없다.
크고 자애롭다.
적은 무리의 소리에 언제나 귀를 열어 두어야 한다.
그들이 항상 옳아서가 아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빠르고 크시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우선순위를 떠올려 봅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프로토콜로 움직이시는 당신께 나아갑니다.
자유로우신 분,
인간의 계획과 예상을 뛰어넘으시는 분,
당신을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어떤 길이 있든지 주님을 신뢰하길 소망합니다.
오랫동안 정박했던 배를 띄웁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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