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41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4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주석

42 절. 그 과부가 낸 ‘동전’ 혹은 ‘렙돈’은 당시의 가장 가볍고 가장 값어치가 없는 동전이었다(IVP 성경배경주석)

 

44 절. 요지는 그 가난한 과부는 적은 헌금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적은 금액이 그녀에게는 “생활비 전부”였지만, 큰 금액을 헌금하는 부자는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과부의 적은 헌금은 약자를 너그럽게 대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해 온 성전 기득권자들의 착취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 헌금함 맞은 편  

예수님이 이상한 행동을 하신다. 

율법학자들을 비판한 뒤에 갑자기 헌금함으로 가신다. 

헌금함이 뻔히 보이는 곳, 헌금함에 얼마나 많은 돈을 내는지 훤히 보이는 곳,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으신다. 

이렇게 자리를 잡으시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마가는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적고 있다.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가르치시다가 말고 헌금함에 집중하고 계신다. 

 

지각있는 현대 교회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얼마를 헌금하는지 부러 확인하지 않는다. 

성도들을 돈으로 평가하는 버릇이 생기기 때문이다. 

돈에 예민한 목사로 소문나는 것도 부담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현금 인출기 쯤으로 보지 않기 위함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누가 얼만큼 헌금 하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유심히 관찰하셨다.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은 길게 기도하기 좋아하고 상석에 앉길 좋아하고 길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을 탕진하는 것을 막지 않으며 도리어 빼앗기도 한다. 

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헌금함이 바로 그것이다. 

가난한 여인의 두 렙돈, 가장 보잘 것 없는 동전 두 개를 주목하신다. 

그 여인의 믿음은 훌륭하지만, 그를 돕지 않는 율법학자들과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은 더욱 불거진다. 

 

예수님이 헌금함을 주시하자 제자들은 어리둥절이다. 

가르치다 말고 시선이 헌금함에 꽂히자 제자들도 덩달아 쳐다보게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율법학자 및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정말 때가 왔구나 싶었을 것이다. 

사실 그분은 예루살렘에 오셔서 성전정화 사건을 일으키셨던 분이시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과 논쟁하셨고 결코 물러서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그들을 압도했다. 

그리고는 헌금함을 주시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제자들 중에 눈치 빠른 사람들은 온갖 생각과 상상이 그려 졌을 것이다. 

이제 논쟁이 아니라 돈을 빨리 챙겨서 혁명 자금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누가 헌금을 많이 하는지를 확인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은 아닐까??

다양한 생각이 제자들의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의외다. 

돈 많이 내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돈을 가장 적게 낸 사람에게 주목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대체로 그렇다. 

사람의 생각과는 다른 관점으로 사람과 사물을 보신다.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사람이 누군가? 

세례 요한도 아니고, 제자들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은 자신의 온 재산을 갖다 바쳐서 자신의 믿음을 보인 이 가난한 과부다.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적은 누군가? 

이 가난한 사람이 가진 그 작은 돈도 갖다 바쳐서 종교 시스템을 유지하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은 충격 그자체다. 

그분과 여행할 때는 청심환이라도 챙겨야 한다. 

아님 조금 떨어져 있어야 할 수도 있다. 

가까이 있다가는 충격과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오늘의 기도]

의외의 주님, 

주님의 돌발 행동에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리고 저도 놀랍니다. 

조용히 살고 싶은 저에게 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주여 이끌어 주소서. 

저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소서. 

지평을 열어 주소서. 

 

깨끗한 그릇으로 빚어 주소서. 

깨끗한 나무 그릇으로 조각해 주소서. 

가능하면 더 큰 그릇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물과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면 참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10월 15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38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주석

40 절. 종교 지도자들은 고아와 과부들을 착취하지 말고 도와주어야 했다. 마가복음을 올바르게 읽은 독자들은 과부가 언급되는 것을 보고, 당대의 종교 기득권자들을 향한 예레미야의 비판을 떠올렸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비판 중에는 과부와 고아들이 무시당하고 정의가 무시된다는 내용이 있었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 율법학자들

예수님은 오늘도 가르치신다.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렇지만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가르칠 내용이 방대하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그 원리에 대해 알려주실 것이 너무 많다. 

 

매일 그분에게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어제는 기도 중에 성령의 조명 아래 성경 읽기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령의 조명 아래 성경 읽기”

성령님은 예수님을 떠올리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 최고의 역할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 그리고 가르침을 생각나게 도우신 분이시다. 

그분이 빛을 비추시면 그곳에 예수님의 어슴프레한 모습이 드러난다. 

그 조명 아래서 성경을 읽으면 어떤 성경 본문이건 예수님께로 향하게 된다. 

그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 사건이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반향한다. 

때로는 비슷해서 때로는 너무 달라서 그분이 떠오른다. 

그렇게 성령님은 모든 텍스트에 예수님의 빛을 비추신다. 

그리고 성령님은 삶의 모든 순간에도 예수님의 빛을 비추신다. 

 

하나님 나라는 다수의 힘으로 추진되는 나라가 아니다. 

도리어 소수의 예언자적 목소리로 추진되는 나라다. 

다수가 위력을 사용하려고 하면, 결국 분열, 갈등, 전쟁을 불러 온다. 

민주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정치적인 입김을 발휘하려면 성도들의 자발적 입장표명으로 서서히 제도화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치적 이슈를 가지고 전 교회 차원에서 집회를 열어 힘을 부리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자신들을 돌아보며 회개를 촉구하는 집회는 찬성이다. 

그러나 누구가를 악마화하며 미움과 증오를 극대화하는 대형집회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먹고 거대한 괴물이 되어 누군가를 짓밟는 전쟁초기 단계로 돌입시킨다. 

동성 성교가 죄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러 오셨으며, 죄인들과 어울리셨다.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교의 핵심이다. 

동성 성교를 하는 사람들이 죄인이라면 이성간에 외도와 간음을 하는 것도 죄다. 

간음한 죄인들도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동성 성교를 한 죄인들도 사랑하신다. 

이것을 거부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제한하는 것이며 예수교의 핵심에서 떠나는 것이다. 

이찬수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서 얼굴에 철판을 깔라”고 설교하셨다. 

https://www.youtube.com/shorts/76eHmltP5Rs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반복되는 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동성애 성향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마음의 음심을 품는 것도 죄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27-28_27‘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28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그러니 동성이든 이성이든 음욕을 품고 상상으로 섹스했다면 그것도 죄다. 

마음의 음욕도 죄가 되는데, 하물며 이성간 성교건 동성간 성교건 결혼 밖에서의 성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죄인들을 멀리하셨는가? 

그게 아니다. 

우리 모두는 죄 속에 거하며 죄를 범하며 산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와 식사하시고 교제하신다. 

그리고 더욱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신다. 

동성 성교를 죄라고 설교하면서 바람피는 것을 가만히 둔다면 그것도 언페어하다. 

강조하려면 둘 다 강조해서 죄라고 소리치라. 

그게 아니라면, ‘둘 다 죄이지만 하나님 앞에 철판을 깔라’고 말하라. 

 

만약 죄의 경중을 따지려고 한다면, 성적 지향으로 죽도록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죄를 묻기 전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고 죽이는 정치 지도자들의 죄를 단호하게 정죄하라. 

푸틴, 젤렌스키, 네타냐후, 하마스의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전쟁의 배후에 있는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 

그들이 지금도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전 세계의 독재자들 가운데 사람들을 쉽게 죽이는 사람들이 있다. 

김정은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외교적으로 갈등 구조를 강화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모든 정치 지도자들의 죄악을 폭로하라. 

이것이 예수님을 닮은 교회가 가장 먼저 예언자적으로 선포해야 할 죄에 대한 설교다. 

 

이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누구인가? 

대형교회 목사들 아닌가!! 

예복 입기를 즐기며, 길거리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다. 

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고, 잔치 자리에서 상석에 있고 싶어한다. 

VVIP좌석!! 

그들이 그나마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에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구제헌금을 걷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기 위해 헌금을 내라고 강요하는데, 그 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서 가져온 헌금도 귀한 돈이라고 축복한다 

불법으로 조성된 헌금도 귀한 돈이라고 칭찬한다. 

이게 교회를 타락시킨다. 

과부들의 가산을 탕진시켰던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들의 더 교묘한 버전이다. 

겉으로는 구제하여 교회의 이름을 높이지만, 실제로는 사회를 더욱 악하게 만든다. 

정당하게 벌어야 한다는 설교는 거의 하지 않는다. 

물질의 복을 받으라는 설교는 온 몸에 힘을 주어 선포한다. 

 

나 또한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면에 계속 올라오는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끊임없이 가면을 쓰고 싶은 욕망이 생의 에너지를 갉아 먹는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더욱 정직해야 한다. 

나의 죄에 대해 더 정직하게 주님께 고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예수교의 핵심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한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그분께 나는 오늘도 철면을 깐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철면을 깔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 저의 죄악을 불쌍히 여기소서. 

수많은 욕망들로 부글대는 내면을 주님께 고백합니다. 

음욕은 젊을 때보다 조금 줄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명예욕은 여전합니다. 

인기욕도 여전합니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도 큽니다. 

게다가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점점 커집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 가게 저를 도와주소서. 

하나님보다 높아진 욕망이 있다면 다시 저를 치고 자기를 부인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10월 10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19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만 남겨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형수를 맞아들여서, 그의 형에게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20   형제가 일곱 있었습니다. 그런데, 맏이가 아내를 얻었는데, 죽을 때에 자식을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21   그리하여 둘째가 그 형수를 맞아들였는데, 그도 또한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일곱이 모두 자식을 두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23   [그들이 살아날]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모두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26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떨기나무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시지 않으셨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생각을 크게 잘못 하고 있다.”

 

주석

19 절. 물론 여기에 언급된 사두개인들은 모세법적 관습을 인정했다. 그 관습은 과부의 가족이 땅을 보전토록 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에 대한 생각을 아예 배척했다. 그들에게는 현세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었다(IVP 성경주석). 

 

26 절. 예수님의 대답은 일반적인 바리새인의 반응과 비슷하다. 표준적인 유대의 해석법은 출애굽기 3:6을 현재 시제로 ‘나는 족장들의 하나님이다’라고 해석하여, 그 족장들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암시한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 아브라함의 하나님

구약에서 하나님을 소개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언약을 맺어던 인물들을 떠올리도록 안내하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조들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분은 갑자기 세상에 등장해서 자신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조상들에게 나타나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시고, 약속을 맺으시며, 그 약속에 따라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역사성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 

역사 속에서 일관된 모습을 가진 분이시다.

변화무쌍한 분이 아니시다. 

물론 그분은 자신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나타나실 수 있으시며 사람의 계획을 따르지 않으시고 조각의 형태로 묘사되지 않는 자유로운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비일관성의 대명사는 아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약속을 주시고 언약을 맺으셨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겠다고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신 분이시다. 

그분의 자기 부인은 “언약” 안에 내재되어 있다. 

언약을 하는 순간 그분은 자신의 무한한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여 자기를 부인하신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자신의 영을 육체에 국한시키셨다. 

예수님, 그분이 하나님의 자기 부인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사용할 때는 조금 다른 부분에 강조를 두고 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한다. 

‘사두개'는 다윗 시대에 활약했던 사독이라는 대제사장의 이름에서 기원했다. 

기본적으로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제사장 그룹의 사람들이다. 

로마 치하, 헤롯 대왕의 시대에 제사장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현실주의를 택했다.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보수주의자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오경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토라 전체와 장로들의 구전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부활과 영과 천사를 믿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현실이 중요했다. 

로마가 유대교를 인정해주는 한, 제사장들인 사두개인들은 로마의 질서를 수용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뿐 아니라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까지 싸잡아서 비판하자 사두개인들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논쟁점이 될 만한 이야기를 꺼낸다. 

부활이 있다면 형의 아내를 자기 아래로 받아들어야 하는 동생이 있을 때, 그 아내는 부활시 누구의 아내여야 하는지 묻고 있다. 

시덥잖은 질문이다. 

결혼했던 모든 사람의 아내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할 텐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사두개인들은 부활하면 현 세상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 

현재 질서가 크게 바뀌지 않은 채 모든 사람들이 부활했을 때, 벌어지는 난감한 상황을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부활의 시대가 오면 세상에는 결혼 관계로 사람들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늘의 천사들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관계 맺는 존재가 될 것이다. 

실제 어떤 모습일지는 확정짓기는 어렵다. 

어쨌든 사두개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바로 살아있는 존재들의 하나님임을 밝히기 위해 그분의 이름을 거론하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것은 과거 역사적 인물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영으로 존재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실제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 영으로 존재한다. 

예수님을 그들이 부활을 기다린다고 보신다.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육체가 죽었다고 영이 죽는 것은 아니다. 

영은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 

부활의 때에 모든 살아 있는 영은 육체를 입고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 

지금의 삶이 끝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다른 육체의 부활도 믿게 된다. 

 

사실 고통스런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육체의 부활을 말하고 마지막 심판을 말하는 것이 참 어렵다. 

그걸 믿으라는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기독교 교리를 현대 사회에 계속 반복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전혀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난 여전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 

그래서 육체의 부활도 믿고 그분이 마지막 때에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도 믿는다. 

오랜 믿음이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이상, 그분의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을 불신할 필요가 없다.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가르침이 위로와 힘이 되지 않는다고 확언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큰 도움이 된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고, 그래서 난 미래의 부활을 믿는다. 

그 믿음이 나를 좀더 도덕적인 사람, 좀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한다고 생각하다. 

그 믿음이 공동체를 더 아름답게 만들거라고도 생각한다. 

 

이런 믿음을 기반으로 다음의 사역을 계획한다. 

내가 공부해야 할 내용과 주장해야 할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에 더욱 강조하고 부각시켜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도 정리하고 싶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그 다음을 생각하고 싶다. 

주님께 맡긴다. 

 

[오늘의 기도]

부활의 예수님, 

당신은 모든 육체의 부활을 기대하게 만드신 분이십니다. 

당신은 어느 날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게 하소서. 

 

저의 미래를 주님께 맡깁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님 인도하소서. 

정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평안과 쉼을 얻도록 돕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 길을 보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10월 02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주석

14 절. 예수님은 나무의 진짜 상태에 대한 슬픈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동일할 것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 헝그리

예수님도 배가 고프셨다. 

우주의 주인이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배가 고프셨다. 

베다니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 

당연히 예수님을 모신 집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수님이 일부러 잡수시지 않았을까? 

제자들은 배가 고팠을까?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면 상당히 적극적으로 어필했을 것이다. 

과거에도 배가 고팠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 들어가 밀을 문질러서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예수님은 별로 시장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위의 사건을 고려할 때, 제자들은 별로 배고프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배고프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시기 위해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가신다. 

무화과 철이 아님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가가신다. 

 

예수님도 배가 고프다 하시니 참 인간임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분도 피곤하면 잠을 주무시고,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으시는 인간이다. 

그건 그대로 인정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잘 자란 무화과나무, 곧 있으면 열매를 맺게 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실 일은 아니다. 

단순히 배가 고파서 짜증이 나서 잘못이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일이다. 

분명히 좀더 깊은 의미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에 담겨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교를 통해 선한 열매를 기대해오셨다. 

그런면에서 예수님의 배고픔은 하나님의 배고픔을 닮았다. 

이스라엘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열매, 즉 만백성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삶으로 들어오게 되는 역사를 하나님은 기대하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 실망을 안겼다. 

하나님은 배고프시다. 

하나님 나라와 의가 이 세상에 확산되길 원하셨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곧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유대교는 수많은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었고, 종교 기득권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은 사라지고, 물건을 사고 팔며 이권을 유지하는 자들의 시장이 되었다. 

열매를 그토록 바라시던 하나님의 배고픔은 예수님의 배고픔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 기독교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도 비슷할 것 같다. 

예수님은 배가 고프시다. 

잎만 무성한 한국 기독교에는 열매가 점점 줄어들어 거의 사라질 지경이다. 

온갖 교회 정치꾼들이 진실함을 버리고 자기들 밥줄만 유지하려고 한다. 

현실의 문제에 갇혀 진리되신 예수님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서로 싸울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문란하다. 

신학적, 목회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서로 토론하다가 답답하여 언성이 높아질 수도 있겠다. 

그런 것은 환영이다. 

문제는 돈이나 권력의 문제로 목사와 장로가 싸우고, 교회가 분열된다. 

목사들이 여신도와 성관계를 맺고 무마하려고 한다. 

교회를 사유화하려고 하며 세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그런 교회에 과연 예수님이 있는지 의심한다. 

예수님이 저주할 만하다. 

왜 그런 사람들을 치리하지 않는가!! 

성범죄를 일으켜 교회의 타락을 부추기고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킨 목사들을 왜 치리하지 못하는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를 어떻게 목사로 부를 수 있는가? 

직업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작금의 현상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실 수도 있다. 

그분의 배고픔이 더는 지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 

저도 배고픕니다. 

한국 교회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맞습니까? 

제가 속한 기독 공동체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맞습니까? 

다시 깊이 돌아봅니다. 

열매 없는 저와 공동체 모습에 혹시 실망하실까봐 두렵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고 싶지만, 현실은 초라합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에게 열매를 보여주세요. 

당신에게 드릴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해 주세요.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 지 주님께서 알려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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