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06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2 ‘만군의 주가 말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일 곧 길을 막고 대적한 일 때문에 아말렉을 벌하겠다.3 너는 이제 가서 아말렉을 쳐라. 그들에게 딸린 것은 모두 전멸시켜라. 사정을 보아 주어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등 무엇이든 가릴 것 없이 죽여라.’”

 

4 사울이 백성을 불러모으고 들라임에서 그 수를 헤아려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었다. 유다에서 온 사람도 만 명이나 되었다.5 사울은 아말렉 성읍에 이르러서, 물 마른 개울에 군인들을 매복시켰다.6 사울이 겐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 “당신들은 어서 거기에서 떠나시오. 내가 아말렉 사람들을 칠 때에, 당신들을 함께 치지 않도록, 그들 가운데서 떠나시오. 당신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올라올 때에, 그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이오.” 그러자 겐 사람들이 아말렉 사람들 가운데서 빠져 나갔다.7 그런 다음에 사울은, 하윌라에서부터 이집트의 동쪽에 있는 수르 지역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쳤다.8 아말렉 왕 아각은 사로잡았고, 나머지 백성은 모조리 칼로 쳐서 없애 버렸다.9 그러나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각뿐만 아니라,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들과 가장 기름진 짐승들과 어린 양들과 좋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모두 아깝게 여겨 진멸하지 않고, 다만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하였다.

 

10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11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엘은 괴로운 마음으로 밤새도록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석

2절. ‘아말렉 사람’은 예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위협 거리였다. 그들은 특히 이스라엘 쪽 국경을 공격해 농장을 습격하고 가축을 약탈하는 야만적인 유목민이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단호한 조치가 필요했다(IVP 성경주석, 423쪽).

 

[오늘의 묵상]

* 후회하시는 하나님 

후회하시는 하나님은 충격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후회하시는가? 

아무리 이렇게 물어봐도 소용없다. 

실제로 후회하시기 때문이다.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을 창조한 것을 그들을 보존한 것을 후회하셨다. 

창세기 6:5-6_주님께서는 ,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아담과 하와의 죄악을 보시면서, 노아 시대 인류의 죄악을 보시면서, 홍수 이후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후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은 사울 왕을 세운 것을 후회하시고 계시다. 

항상 선하고 완전하고 변함없으신 그분이 어떻게 후회하시는가? 

그래서 충격이다. 

 

생각해보면,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는 역사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어긋나는 역사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완전하시다는 명제에서 시작하지 말고, 성경 이야기 그 자체에서 뽑아낸 진리는 “하나님은 변한다”이다. 

그분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이 바뀐다.

크게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려 했으나 그들의 불손종으로 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로 보내신다. 

이건 원래 계획에는 없는 부분이었다. 

작게는 요나서에 등장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보시고 그들을 진멸하실 계획을 바꾸신 사건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처럼 사울 왕을 세워두고서는 그의 불순종을 보시고 후회하시는 장면도 있다. 

이렇게 변하시는 하나님을 고정된 큰 기둥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그분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분이시다. 

그분은 바람과 파도를 타고 항해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그분에게 변하지 않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1) 인간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이 증명한다. 

2)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고 돌보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그분의 돌봄이 없다면 이 세계는 유지될 수 없다. 

자연의 불변의 상수는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었다면 이 우주는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중력상수, 원주율, 프랑크 상수, 빛의 속도….. 

물리학자가 아니니 자세한 것은 모르나, 변하지 않는 숫자가 우주와 물리 세계를 떠받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난 신앙인으로서 이런 상수의 존재는 우주를 붙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변하는 하나님, 변하지 않는 하나님. 

이 두 가지를 이해하는 것이 내게 큰 도전이었다. 

마치 구신약 사이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변하시는 것 같다 

구약에서는 대체로 즉각적이시지만, 신약에 와서는 과거보다 더 오래 기다리신다. 

그래서 신약을 은혜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왜냐하면 구약도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내의 정도 차이가 있다 정도로 정리하는 것이 정확하다. 

 

하나님이 내 삶에 대해 실망하시고 후회하신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돋고 매우 슬프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 나에대해 실망하신다면 그 충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의 감정은 그분이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끝까지 나를 대해 주실 것을 믿는 것으로 향한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서 버림 받은 사람이 있지 않았는가? 

바로 가륫 유다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그분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다. 

그렇다고 두려움에 떨면 안되는 이유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이자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오늘의 기도]

전통적인 생각의 흐름 안에 갇히지 않고 싶습니다. 

성경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정보를 잘 모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깊이 알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모든 과정을 잘 거칠 수 있도록 도우소서. 

혼란한 시기, 무조건 닫아 잠근다고 해결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저의 신학의 실험실이 진실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3월 04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36 사울이 말하였다. “우리가 이 밤에 블레셋 군대를 쫓아 내려가서 동이 틀 때까지 그들을 약탈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이도록 합시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임금님이 좋으시다면,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제사장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37 그래서 사울이 하나님께 여쭈었다. “내가 블레셋 사람을 뒤쫓아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날 사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38 그러자 사울이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군지휘관은 모두 앞으로 나오시오. 오늘 이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보겠소.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허물이 나의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감히 그에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40 사울은 온 이스라엘 군인에게 계속해서 말하였다. “귀관들은 모두 이쪽에 서시오. 나와 나의 아들 요나단은 저쪽에 서겠소.” 군인들이 모두 사울에게 “임금님이 좋으시다면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41 사울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었다. “오늘 저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허물이 저에게나 저의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이 나오게 하시고, 그 허물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하십시오.” 그러자 요나단과 사울이 걸리고, 백성들의 혐의는 벗겨졌다.42 사울이 말하였다. “제비를 뽑아서, 나와 나의 아들 요나단 가운데서 누가 죄인인지를 가려 내시오.” 그러자 요나단이 걸렸다.43 사울이 요나단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나에게 말하여라!” 요나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 끝으로 꿀을 찍어서 조금 맛보았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44 사울이 선언하였다. “요나단, 너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너를 처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천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실 것이다.”45 이 때에 온 백성이 사울에게 호소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큰 승리를 안겨 준 요나단을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오늘 하나님과 함께 이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요나단을 살려 내어, 그는 죽지 않았다.46 사울은 블레셋 사람을 더 이상 뒤쫓지 않고 돌아섰고, 블레셋 사람도 자기들의 본 고장으로 돌아갔다.

 

Message

Saul said, “Let’s go after the Philistines tonight! We can spend the night looting and plundering. We won’t leave a single live Philistine!” “Sounds good to us,” said the troops. “Let’s do it!” But the priest slowed them down: “Let’s find out what God thinks about this.”(36절)

 

[오늘의 묵상]

무모하고 무식한 인물 사울이 유독 거슬린다. 

사울은 전투에 나온 군인들에게 맹세를 시켰다. 

적군을 완전히 궤멸시키기 전까지 금식을 하도록 시킨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전투에 나가는 장병들에게 밥을 굶어가며 전쟁에 임하라고 하는 것이 어찌 가당키나 한가? 

 

이제 보면 사울은 종교적 열성으로 상식을 압박하여 신적 권위를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전투를 치르면 되는 것을 종교적으로 바꾸어 버린다. 

전투 전에 자신이 제사를 드린 것도 그렇다(13:9). 

 

13:9사울은 사람들을 시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한 다음에, 자신이 직접 번제를 올렸다.

 

승전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의 맹세로 그 영광을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이끈다(14:24)

 

14:24그 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허기에 지쳐 있었다. 사울이 군인들에게 “내가 오늘 저녁에 적군에게 원수를 갚을 때까지, 아무것이라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고 맹세시켰기 때문에, 군인들이 모두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사울은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려고 했다.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따라 가면 될 일이었다. 

나서서 맹세 같은 거 시키지 않아도 되었다. 

 

요나단은 이 명령을 듣지 못했으며, 그는 꿀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여 전투에 임했다. 

병사들은 너무 굶주린 나머지 양과 소와 송아지를 피째 먹어치웠다. 

이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었다. 

갑자기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사울은 왜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지 궁금했고, 그 원인을 밝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우림과 둠밈을 사용했다. 

결국 원인은 요나단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것이 이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가장 근본적 원인은 사울이다. 

그가 전투병에게 금식을 맹세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둘째는 병영내에 전달된 금식 명령을 요나단이 듣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이상하게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아무리 배고프더라도 율법에서 금지한 피째 동물을 섭식하는 행동을 한 병사들이다. 

실제적인 범죄는 이들이 지은 것이다. 

그러니 우림과 둠밈이 어디 쪽에 나온다 한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보건대, 사울의 어리석음과 무모함과 섣부름이 문제였다. 

사울은 그저 겸손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면 될 일이다. 

스스로 무엇을 보태거나 빼거나 해서 자신이 주목받게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왕이 되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왕!! 

모든 사안에 중심에 서고 싶은 왕!! 

 

피째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어제 영화관에서 본 퇴마록이 떠오른다. 

힘을 추구하는 자 결국 악마에게 자신의 존재를 팔아야 한다. 

해동밀교는 자비를 구현하는 종파였으나, 서교주는 자비가 아니라 힘을 추구했고, 그 힘을 주겠다는 수많은 신들을 모시고자 살인을 밥먹듯 했다. 

결국 자신과 해동밀교 전체를 악마에게 팔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오컬트 소설의 내용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 

현실의 윤석렬도 힘을 추구했다. 

자신이 모든 권력의 정점에서 자기가 원하는 일들을 다 이루려고 했다. 

명태균 게이트가 보여 주듯이, 여론조사를 조작하여 대선후보가 되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12.3 계엄과 노상원의 수첩이 보여 주듯이, 자신의 정적을 싸그리 죽여 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사지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국민을 계몽한다는 말도 안되는 궤변이나 늘어 놓는 윤석렬은 힘의 추구와 거짓이 어떻게 합력하는지 잘 보여준다. 

사울처럼 윤석렬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했던 말이 족쇄가 되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의 가족과 지인과 추종자들 모두 죽음의 골짜기로 끌고 간다. 

몰살은 힘을 추구하는 자가 가는 종착지다. 

 

함부로 맹세하지 마라.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자신의 의지대로 진행하지 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충분히 검토하라. 

섣부른 종교적 열성으로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아는 듯 나서지 마라. 

 

전광훈과 손현보가 들어야 할 메시지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개신교 목사들이 계속해서 들어야 할 메시지다. 

자정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개신교는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교회의 대형화를 제어해야 한다. 

스타 목사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목사되기를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총회와 노회 정치가 더욱 합리적, 민주적이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회는 지금 분수령, 기로에 서있다. 

급진적인 변화가 시급하다. 

이대로 가면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모든 교회는 망하게 된다. 

개교회는 담임목사가 인격적으로 관계 맺고 목양 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인원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300명까지를 최대한으로 두고 그 이상이 되면 분립해야 한다. 

대신 연합 모임을 강화하고 연합된 우주적 교회의 일원임을 지속적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목사에 대한 감사, 치리 등이 더욱 강화되고, 심지어는 가톨릭처럼 임지를 순환시키는 것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새로운 개신교회가 나오지 않고서는 더 이상은 안된다. 

규모로 돈으로 힘을 과시하는 교회는 더는 교회가 아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가르치면서 목사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는 목사들은 피정에 들어가게 하거나 일정 기간 목회 금지 조치(특히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등에)를 취해야 한다. 

목사가 바뀌지 않으면 교회는 바뀔 수가 없다. 

더 이상 욕먹지 않으려면 목사 양성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목사 안수는 가톨릭처럼 더욱 오랜 시간 동안 성품 훈련, 생활 훈련, 상담 훈련 등을 두루 거치도록 해야 한다. 

최소 10년의 교육 후에 목사 안수를 주는 것이 좋겠다. 

신학교 5년, 목회 실습 5년 그 이후 안수를 준다. 

충분히 검증된 사람이 목사가 되는 것이 좋겠다. 

바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삼위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고, 오직 예수님만이 왕이신 그 나라를 꿈꾸자. 

사람이 신노릇 하는 교회를 철거하라. 

진짜 그럴거면 교회 건물을 철거하라. 

순전한 마음으로 초대교회의 가정교회 모습으로 돌아가라. 

 

[오늘의 기도]

너도 나도 사울이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놓은 현실의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이단 교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광훈과 손현보가 그렇습니다. 

혐오로 장사하는 개신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사랑과 평화, 정의와 공평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야 정책적으로 실무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행 헌법을 무시하고 거짓과 폭력을 선동하는 것을 어떻게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과연 그것이 복음입니까? 

 

주님, 당신의 진정한 복음이 선포되게 하소서.

새로운 교회를 보여주소서. 

복음주의가 왜곡되지 않게 하소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모든 것이 되어 복음대로 사는 삶을 무시했던 죄악을 용서하소서. 

함부로 맹세하고, 함부로 규정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사울 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스스로가 신이 되어 영원한 권세를 누리려는 악한 귀신의 장난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3월 03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22 주님의 이름을 나의 백성에게 전하고, 예배 드리는 회중 한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23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여라. 야곱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려라. 이스라엘 자손아, 그를 경외하여라.24 그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신다.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25 주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회중이 다 모인 자리에서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서원한 희생제물을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치겠습니다.26 가난한 사람들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늘 유쾌하길 빕니다!” 하면서 축배를 들고,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27 땅 끝에 사는 사람들도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28 주권은 주님께 있으며, 주님은 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29 땅 속에서 잠자는 자가 어떻게 주님을 경배하겠는가?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가 어떻게 주님 앞에 무릎 꿇겠는가? 그러나 나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겠다.30 내 자손이 주님을 섬기고 후세의 자손도 주님이 누구신지 들어 알고,31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하고 선포할 것이다.
 
NIV
All the rich of the earth will feast and worship;
all who go down to the dust will kneel before him—
those who cannot keep themselves alive(29절).
 
[오늘의 묵상]
시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첫째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분, 둘째 찬양받으실 분, 셋째 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2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고백한다. 

24 그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신다.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보고 느끼고 계신다.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에 언제나 응답해 주신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정말 기쁘고 감사할 일이다. 
솔직히 난 하나님이 고통스런 사람들을 돌보시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부르짖는 사람에게 언제나 응답해 주신다고는 쉽게 믿기지 않는다. 
몇몇 달변가 혹은 궤변론자(?)들이 여기서 말하는 “언제나”에는 Yes, No, Wait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 그대로 긍정적으로 응답하실 수 있고, 아니라고 하실 수도 있고, 좀 더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무응답도 응답이라고 주장하는 영성가도 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언급하면서 아무런 응답이 없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논한다. 
그런데 정말 고통에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무응답이 과연 응답이란 말인가? 
그냥 뭐라도 편하게 말씀해주실 수 없으신가? 
너무 어렵게 하시지 말고, 쉽게 쉽게 응답해주시면 안될까? 
고등종교는 참 어렵다. 
그분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그분이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시고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난 감사드린다. 
그분은 그런 분이시다. 
그러나 부르짖는 사람에게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는 시인의 주장은 과장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둘째, 시인에게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다. 
가난한 사람들이 축배를 든단다(26절). 
세상 모든 민족이 경배를 한단다(27절). 
찬양은 인간 내면에 심겨진 종교적 본성이다.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를 찬양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감탄과 탄성의 확장이다.
게다가 그분이 나를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라면 말해 뭐하나!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등장하셔서 사람들을 구출하고 구원하셨다. 
예수님이 산 증인이시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자들을 돌보셨다. 
삼위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어제 카톨릭 미사를 드렸다. 
결혼 미사를 빼고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경건함이 공간을 압도한다. 
사제, 부사제, 동사, 사회자, 기도자, 봉독자, 성가대…
공간, 분위기, 음악이 웅장함과 함께 위축감을 선사한다. 
혼자 앉아 있으니 어떻게 미사가 진행되는지 관찰하기 바쁘다. 
사실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성도들은 많은 것을 암송하고 있었다.  
노래면 노래 기도면 기도, 주임 신부의 선창 혹은 성가대의 선창에 이어 성도들의 후창을 들었다. 
잘 들리는 듯하면서도 정확히는 들리지 않는 기이한 상황. 
가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최신 아이돌 음악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안개를 헤메는 듯한 느낌. 
영성체 시간, 미사의 꽃이었다. 
사제의 말씀시간보다 길면 길었지 짧지 않았다. 
사제의 말과 행동으로 떡과 포도주가 진짜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경건함. 
카톨릭 영성의 요체가 바로 그 시간이라는 것이 새삼 강하게 느껴졌다. 
매주 이들은 기적을 보고 먹는다. 
과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인장모님의 딸인 아내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화체설을 믿는 신자는 많지 않다더라. 
그래도 천주교 신자 중 3분의 1일 화체설을 믿는다고 통계가 말해준다. 
그렇다면 600만명의 한국 천주교 신자 중 200만명이 화체설을 믿는다는 것인데, 이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매주 신부가 집전하는 신비로운 기적을 보고 믿고 먹고 마신다는 사실에 놀란다.
예수님의 떡과 피가 자기 몸에 들어오니 그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된다. 
그럼 그 한 몸된 자신을 성령의 성전으로 알고,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로 경건하게 살아갈 실질적, 심리적 동인을 얻게 된다. 
영성의 요체라 불릴만 한다.
1) 예배의 장엄함
2) 영성체(성만찬)의 영성적 효과 
그리고 세 번째로 느낀 것은 어쩔 수 없이 미사의 위계와 높은 허들이었다. 
사제부터 평신도까지 위계가 분명했다. 
성도들의 노래와 각종 기도문의 후창을 외우지 않고서는 미사에 온전히 참여하기 힘들다.
사제가 미사가 마쳤음을 알렸으나 성도들은 남아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는 성가대도 멈추고 오직 성도들만의 노래와 기도로 이어졌다. 
이것도 개신교인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제는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으나, 성도는 마리아를 통해서 기도를 올려드린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사실 한 번 미사를 드린 것이니, 피상적인 느낌에 불과하지만, 배울 점과 접근하기 어려운 점 모두 적어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여하튼, 미사 내내 성가대의 운용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찬양은 거의 끊김이 없었고, 그들의 소리는 공간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었다. 
아무나 성가대를 할 수 없어 보였다.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가톨릭의 성가대는 이를 현실화시켰다. 
 
셋째, 시인은 하나님을 만국을 통치하시는 분을 보고 있다.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하나님은 만국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분이 아니시다. 
가나안 땅의 부족신이 아니다. 
그분은 전 세계에 영향을 주신다. 
그분은 지금 이 땅과 미국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북한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통치는 인간들의 통치와 정치와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과 같이 섬기는 자들을 통해 나라와 민족과 자연과 만물을 보존하시는 방식으로 통치하신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주님이 섬기고 돌보는 자들을 통해 이 세상을 보존하시고 지탱하시며 움직이신다. 
이걸 믿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트럼프, 푸틴, 젤렌스키, 시진핑… 이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져간다. 
트럼프과 젤렌스키는 전세계가 보는 앞에서 말싸움을 이어갔다.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고, 경제적 이익도 챙기고 싶으니, 젤렌스키를 압박했다. 
미리 사전에 논의하고 결정난 것을 서로 악수하며 싸인하면 되는 일을, 공개적으로 불러서 망신을 줬다. 
그렇게해서 젤렌스키를 국제적으로 외교적으로 왕따를 시킬 계획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젤렌스키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다. 
전쟁을 일으킨 푸틴이나 막지못한 젤렌스키나 도긴개긴이다.
푸틴의 야욕이 더 큰 문제이긴 하지만 젤렌스키의 무모함과 어리석음도 한 몫했다. 
지도자들의 욕망, 교만, 무모함과 어리석음 속에서도 현재 이 세계가 이정도라도 보존되고 운영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돌봄이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꿈꾸며 특히 예수님이 세계 통치의 완전함을 그려본다. 
그 나라가 빨리 와서 더 이상의 전쟁과 살상과 슬픔이 사라지길 기도할 뿐이다. 
 
 
[오늘의 기도]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고통받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소서.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 새로운 나라를 열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지도자들의 교만은 하늘을 찌릅니다. 
그들을 겸손하게 하소서. 
 
고통받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소서. 
눈물이 마르지 않는 자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허락하소서. 
눈물이 마르고, 생의 의지가 드러나고, 웃음이 다시 번지게 하소서. 
생명의 기운이 흐르게 하소서. 
 
러우 전쟁이 끝나게 하시고, 더 이상의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을 막아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2월 28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6 베냐민 지역의 기브아에서 망을 보는 사울의 파수꾼들이 건너다 보니, 수많은 블레셋 군인들이 아우성을 치며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17 그러자 사울이 자기와 함께 있는 군인들에게 명령하였다. “우리 가운데서 누가 빠져 나갔는지 조사하여 밝혀 내어라!” 사람들이 조사하여 보니,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드는 병사가 없었다. 

18 그러자 사울은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라고 말하였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었다. 

19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 블레셋 진영에서 일어난 아우성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래서 사울은 제사장에게 궤를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였다. 

20 사울과 그를 따르는 온 백성이 함께 함성을 지르며 싸움터로 달려가 보니, 블레셋 군인들이 칼을 뽑아들고 저희끼리 서로 정신없이 쳐죽이고 있었다. 

21 블레셋 사람들 편을 들어 싸움터에까지 나왔던 히브리 사람들도, 이제는 돌이켜서 사울과 요나단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편이 되었다. 

22 또 전에 에브라임 산간지방으로 들어가 숨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블레셋 사람들이 지고 달아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뛰어나와 블레셋 군인들을 뒤쫓으며 싸웠다. 

23 그 날 주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오늘의 묵상]

내 정신은 신학적 여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 묵상을 하기 전 드는 생각이다. 

지난 10여년간 나는 신학적 닻을 내리고 가능하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학생사역을 마무리하고 청장년 사역으로 전환하면서, 교회 사역을 마무리하고 다양한 교회를 방문하면서, 그리고 특히 12.3 계엄을 경험하면서, 신학적 여정을 좀더 적극적으로 떠나기로 했다. 

닻을 올리고 돛을 내리는 신앙의 항해 말이다.

두려운 일이다. 

 

하나님은 사울의 두려움과 오만함을 보시고 그를 버리셨다. 

사무엘상 13:8-9
8사울은 사무엘의 말대로 이레 동안 사무엘을 기다렸으나, 그는 길갈로 오지 않았다. 그러자 백성은 사울에게서 떠나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9사울은 사람들을 시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한 다음에, 자신이 직접 번제를 올렸다. 

 

그리고 오늘 블레셋과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울은 여전히 못미덥다.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제사장 아히야(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손자)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궤를 함부로 움직이면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안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울이다.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 때문에 언약궤를 빼앗겼던 사건을 모르면 안된다. 

사울은 언약궤를 가져오라고 했다가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한다. 

자꾸 바꾼다. 

 

요나단의 용기과 믿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걸로 보인다. 

전쟁은 기울었다. 

블레셋 본진에서는 자기들끼리 죽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대로된 전투도 치르지 못한 채 블레셋은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 저자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칭송한다. 

“23 그 날 주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출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없는 왕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의 어떤 왕도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 

그 유명한 다윗과 솔로몬도 그랬다. 

 

인간에게 완전함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안 계셨다면 인간들은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 조금은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기준이 낮으면 불행의 정도도 낮아지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에 이르면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너무 완벽하신 그분!! 

 

신학적 여정에서의 구출은 무엇일까? 

멋진 항구에 정박하는 것인가? 

드넓은 대양을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것인가? 

물고기를 배에 가득 싣는 것인가? 

밤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 빛 아래에서 팔배개를 베고 코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인가?
나의 신학적 항해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아직은 그 답을 모르겠다. 

그 답을 찾기 전에는 기존에 정리된 것을 기본적인 나의 신념과 토대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항해의 실험실은 통렬하게 가동되어야 한다. 

내게 주신 운명일 수도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있다. 

교만함은 버리자. 

하나님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오늘의 기도]

저의 항해를 응원해 주소서. 

배우고 익히고 살아내게 하소서.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든지 주님을 신뢰하며 떠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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