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7.. 김혁수  

[본문_사도행전 28:17-31_새번역]

17사흘 뒤에 바울은 그 곳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우리 겨레와 조상들이 전하여 준 풍속을 거스르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죄수가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로마 사람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로마 사람은 나를 신문하여 보았으나,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놓아주려고 하였습니다. 19그러나 유대 사람이 반대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내가 황제에게 상소한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이런 까닭으로, 나는 여러분을 뵙고 말씀드리려고, 여러분을 오시라고 청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입니다.” 21그들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아직 유대로부터 당신에 관한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동포들 가운데서 아무도, 여기에 와서 당신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거나 소문을 낸 일이 없습니다. 22우리는 당신에게서 당신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종파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어디서나 이 종파를 반대하는 소리가 높다는 것입니다.”

23그들은 바울과 만날 날짜를 정하였다. 그 날에 더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의 속내를 터놓았다. 24더러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더러는 믿지 않았다. 25그들이 이렇게 견해가 서로 엇갈린 채로 흩어질 때에, 바울은 이런 말을 한 마디 하였다. “성령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여러분의 조상에게 하신 말씀은 적절합니다. 26곧 이런 말씀입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27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28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소식이 이방 사람에게 전파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그것을 듣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29절 없음)

30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 핵심 메시지 

바울은 끝까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예수님의 읊조림을 닮았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수용하지 않아도 바울은 가능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가르치는 데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1. 들어가며  

- 약속의 땅 

드디어 바울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로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습니다. 로마에 입성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약속을 받은 바 있습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들어오는 것은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 배가 광풍에 표류하는 바람에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와주셔서 겨우 살 수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모티브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야곱과 요셉의 자손은 막강한 이집트를 탈출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그 땅을 향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바울도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제 제국의 심장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합니다. 아브라함에겐 제국의 변방으로 가라하셨지만, 예수님과 바울에겐 나라의 중심, 제국의 중심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바울은 로마로 갔습니다. 이스라엘에겐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었지만, 바울에겐 로마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도시 선교는 농촌 선교와 같은 위치에 놓여야 합니다. 우열을 논할 사안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우리 모두에게 다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부를 얻는 곳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번영을 구가하는 것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하는 곳입니다. 가나안이 될 수도 있고 로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읽기]

 

2. 자초지종 

오늘 본문을 읽으면, 로마의 있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어떤 말들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로마에 오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 로마 사법 시스템의 무죄 취지(18절)

첫째,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진행된 로마식 재판에서 바울은 무죄였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법에 걸릴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폭동과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통치자들은 바울이 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2) 유대인들의 반대(19절)

둘째, 바울이 무죄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을 막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어떡해서든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것처럼 바울을 죽일 참이었습니다. 그를 무죄방면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3) 황제에 상소(19절)

셋째, 결국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여 황제에게 상소하게 됩니다. 황제에게 재판을 받아야 하기에 로마로 압송당합니다. 이 상황을 잘 말해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6:30-32 

30왕과 총독과 버니게 및 그들과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 일어났다. 31그들은 물러가서 서로 말하였다. “그 사람은 사형을 당하거나, 갇힐 만한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소.” 32그 때에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함으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고발하거나 고소하기 위해서 상소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더 큰 뜻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그 약속의 땅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통과하면서 수많은 권위자들 앞에서 복음을 증언할 기회를 가졌고, 이제 그 담대함으로 황제와 로마의 통치자들 앞에서도 복음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셔서 당시 온 세상이라고 불릴 만한 로마 제국에 복음을 전하십니다. 

 

3. 바울 메시지의 중심 

그럼 이제 바울이 그의 사역 마지막까지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그의 말로 정리해봅시다. 

 

1) 이스라엘의 소망(20절)
첫째, 그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전했습니다. 20절입니다. 

 

20이런 까닭으로, 나는 여러분을 뵙고 말씀드리려고, 여러분을 오시라고 청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끌려온 이유는 이스라엘의 오랜 소망과 기대 때문입니다. 그것은 메시야 즉 구원자가 이 세상에 올 것이라는 메시야 사상이었습니다. 그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소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소망을 전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소망이 예수님이라고 전했습니다. 

 

2) 하나님 나라(23절) 

둘쨰,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23절입니다. 

 

23그들은 바울과 만날 날짜를 정하였다. 그 날에 더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이 문장이 참 중요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 나라 복음이고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사함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분리를 배격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님이 살아 생전 그토록 외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끌고 들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예수님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은 통치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영적 실패 때문에 그 통치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사탄의 권세로부터 사람들이 해방되고, 죄사함을 얻고, 회복과 샬롬의 세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도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3) 예수에 관하여(23절) 

셋째, 그는 예수님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23절 후반부입니다. 

 

23절후_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의 속내를 터놓았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나사렛 출신의 예수이며, 그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십자가와 부활은 어떤 의미인지 가르쳤습니다. 특히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며, 그 사건들 때문에 죄사함과 사탄의 속박에서의 해방이 일어났음을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있고, 신약의 성령님도 계시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바울은 이 둘을 균형감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4. 우리 메시지의 중심 

저는 우리가 전달하는 메시지도 바울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도리어 좋은 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너무 완벽한 분이잖아요!! 바울은 그래도 우리와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하지만, 가르침에 있어서는 바울을 많이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1) 하나님 나라 

첫째,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되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이미 그리고 아직” “already  but not yet”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지금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적용에 더 많이 신경써야 합니다. 역사 곳곳에서, 현재 곳곳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일어나고 확산되고 있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죄 용서가 일어나고,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수혜자입니다. 혜택을 엄청나게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자유와 평등과 정의로움이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지식의 확장도 그 어느 시대보다 높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나라가 준 선물들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전쟁으로 고통받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통치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생동감있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제 3세계 국가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하나님은 가정교회를 통해 그 냉혹한 핍박가운데도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작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청년부도 작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

둘쨰,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에 관해 더 많이 알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더 깊이 알고 더 폭넓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 성경 읽기와 관상 기도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 신앙의 선배들이 했던 기도 방식이 있습니다. 복음관상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등장하는 복음서의 장면을 머리 속에 그려봅니다. 그리고 여러 등장 인물 중에 한 명이 됩니다. 그렇게 그 상상 속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열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센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입니다. 제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물을 배 밖으로 퍼 버리는 사람, 키를 잡고 배를 안정시키려는 사람, 중요한 물건을 꽉 붙잡고 있는 사람… 그런데 예수님은 배 한 켠에서 주무시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 사건을 잘 알고 계시죠? 그 그림을 상상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 한 제자가 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구경꾼이 되는 거죠. 그 때의 여러분의 감정과 생각을 예수님께 말해보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상상 속에서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는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는 예수님 곁에서 ‘에라 모르겠다 나도 잠이나 자자’ 그랬답니다. 누구는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서 멀찌감치 지켜봤다고 합니다. 상상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 때의 감정과 생각을 정직하게 남겨두는 거죠. 

 

예수님에 관한 에피소드는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스타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그분의 인스타를 보면서 여러분의 상상력을 사용하세요. 

 

- 예수님 팔로워

예수님 인스타에서 하트만 눌러서는 안됩니다. 그분의 팔로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팔로우하는 많은 분들과의 교재가 필요합니다. 다른 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팔로우하는지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신실하고 진실하게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과 교제하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더 깊이 더 폭넓게 알아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가르칩시다. 

 

5. 나가며 

- 약속의 땅으로

이 두 가지, 즉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님을 가르치는 일을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약속의 땅으로 안내했습니다. 로마로 안내했죠. 우리는 어디로 안내하실까요? 우리들 각자의 약속의 땅은 어딜까요? 가장 기본적으로 바로 여러분이 있는 곳이 약속의 땅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현재는 누군가에겐 강렬한 소망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가족이 없는 사람에겐 가족이 있는 삶이 약속의 땅이겠죠.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에겐 서울이 약속의 땅이겠죠. 대학에 못 가본 사람에겐 대학 공부를 하는 것이 약속의 땅이겠죠.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은 누군가에게 약속의 땅이며 소망의 순간입니다. 한류를 좋아하는 베트남의 고등학생에겐 한국에 사는 것만으로 약속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일상을 더욱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을 가르치십시오. 

 

그러나 지금의 일상만 약속의 땅은 아닐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제국의 변방 가나안 땅으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제국의 중심 로마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제 3세계의 가난한 나라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제 1세계의 런던이나 뉴욕으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경상도 상주로, 전라도 함평으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부산, 인천, 서울로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그 새로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 2의 바울의 출현을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이 제 2의 바울이 되면 어떨까요? 

 

[기도회]

1.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님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2.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 어딘지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 약속의 땅으로 안내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시다. 

 

3. 오늘을 기점으로 한국기독교는 회생할 수 없는 타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교회가 보여준 불의함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입증하는 집회가 될 것 같아 두렵습니다. 교회를 회복시키려는 우리의 작은 노력들이 물거품이 될까 걱정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더욱 혐오하게 될까 고통스럽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존재 자체로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동성간 성교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고의 죄라고 주장하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혐오하는 것이 더욱 문제입니다. 존재를 부정하면 살인과 전쟁이 아주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024. 10. 20. 김혁수  

 

[본문_사도행전 26:1-23_새번역]

1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도 된다.” 바울이 손을 뻗치고 변호하기 시작하였다. 2“아그립바 임금님, 오늘 내가 전하 앞에서 유대 사람이 나를 걸어서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변호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3그것은 특히 임금님께서 유대 사람의 풍속과 쟁점들을 모두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내 말을 끝까지 참으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4내가 젊었을 때부터 살아온 삶을 모든 유대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내가 내 동족 가운데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처음부터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5그들은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으므로, 증언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들은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격한 파를 따라 바리새파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6지금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7우리 열두 지파는 밤낮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전하, 나는 바로 이 소망 때문에 유대 사람에게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8여러분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기십니까? 

9사실, 나도 한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데에,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0그래서 나는 그런 일을 예루살렘에서 하였습니다. 나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고,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 그 일에 찬동하였습니다. 11그리고 회당마다 찾아가서, 여러 번 그들을 형벌하면서,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으므로, 심지어 외국의 여러 도시에까지 박해의 손을 뻗쳤습니다.”

12“한번은 내가 이런 일로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과 위임을 받아 가지고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13임금님, 나는 길을 가다가, 한낮에 하늘에서부터 해보다 더 눈부신 빛이 나와 내 일행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14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때에 히브리 말로 나에게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하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15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16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 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17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낸다. 18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그러므로 아그립바 임금님, 나는 하늘로부터 받은 환상을 거역하지 않고, 20먼저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으로 온 유대 지방 사람들에게, 나아가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였습니다. 21이런 일들 때문에,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서 나를 붙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2그러나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낮은 사람에게나 높은 사람에게나 이렇게 서서 증언하고 있는데, 예언자들과 모세가 장차 그렇게 되리라고 한 것밖에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23그것은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것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이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 빛을 선포하시리라는 것입니다.”

 

** 핵심 메시지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삶의 궤적을 설명하고,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나누고 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라는 키워드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정리하고 나누는 삶을 계속 살고 있다. 비록 자신이 구치소에 갇혀 있는 상황임에도 부르심에 대한 확신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신 뒤에 부활하셔서 참 빛을 선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 또한 더욱 또렷해졌다. 이제 그는 어떤 권위자 앞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의 인생 또한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분의 부르심이라는 키워드로 해석/정리/나눔을 통해 누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자. 

 

1. 들어가며  

- 삶의 해석 or 비해석

사람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사람과 해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입니다. 해석하지 않는 사람은 현실에 필요에만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인생을 성찰하면서 자기 인생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어떤 서사에 기여하는지 아는 사람이 해석의 사람입니다. 현실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열망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해석의 사람입니다. 

 

- 전,란

넷플릭스 영화 전,란을 봤습니다. 아내는 잔인하다고 보질 못하더군요. 저는 잔인한 영화도 잘 보는 편입니다. 영화 전체의 줄거리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처음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 정여립이라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조선 중기 선조 시대에 대동사상을 펼친 사상가랍니다. 왕이 통치하는 조선 시대에 나라는 모든 백성의 것이라는 사상을 펼쳤습니다. 왕은 노비, 상인, 무사, 문인 누구나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공화사상을 펼친 사람입니다.  

 

**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 즉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요"라는 뜻이다. 천하공물론은 라틴어에서 '공화국'을 가리키는 용어 "res publica"와 그 의미가 일치한다. 'res publica'는 직역하면 공공의 것, 공중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누구든 임금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다"는 뜻이다. 왕의 혈통이 아니더라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선진적인 사상이었다. 

출처: https://loju.tistory.com/entry/정여립의-대동사상 [LOve & JUstice:티스토리]

 

기록에 따르면, 관군이 쫓아오자 자결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을 상상해봤습니다. 그는 그 사상의 빛 아래서 자신의 인생을 해석해야 의미가 생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저 조선의 사회 시스템에 반기를 든 역모의 반역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대동사상의 빛 아래서 자신의 인생을 해석하면, 그 사상을 이루기 위해 대동계라는 마을을 조성하고 사람들을 계급과 신분의 차이 없이 대했다는 점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사상가며 운동가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인생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빛 아래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는 인생 해석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살펴봅시다. 

 

[성경읽기]

 

2. 반전의 인생 

1) 분노(9-11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바울의 인생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는 술만 먹으면 옛날 이야기 하시던 아버지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회만 되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처음 회심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릴 때부터, 3차에 걸친 세계 선교 여행 도중 내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이야기를 자주 하기를 바랍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내 인생의 방향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점점 또렷하게 알게 됩니다. 저는 그동안 수많은 소그룹 활동을 통해 제 인생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때로는 짧은 시간 안에 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매우 길게 하기도 했습니다. 자주 하세요. 그래야 해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 초기는 탁월한 엘리트의 삶이었습니다. 유대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땅에 바리새인들은 6천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과 장로들의 전통 및 관습을 철저히 지키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매우 스마트했습니다. 지적으로도 탁월했고 실천력도 탁월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존경했습니니다. 사실 사두개인이나 헤롯당, 혹은 젤롯당보다 바리새인들을 더 높이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그룹들은 현실에 타협하거나 회피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그룹입니다. 바울은 그 중에서도 탁월했고 인정받았습니다. 차기 리더십으로 뽑힐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외국에 가서 그리스도인들은 잡아 송환하는 임무를 자청했습니다. 

 

2) 환상(12-18절) 

그러나 그의 인생은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의 인생 일대의 사건입니다. 인생 전반기의 방향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환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죠.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핍박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핍박이라뇨. 그의 세계관 속에서 하늘의 음성으로 자신에게 나타날 분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의아함과 두려움에 휩싸여 되묻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그러자 그 음성이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 말에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바뀝니다. 

 

3) 박해(19-23절)

그날부터 사울은 바울이 되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가는 곳곳마다 하게 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배신자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자기 편인 줄 알았는데, 상대팀이 되어 공격합니다. 어떻게 가만히 둘 수 있습니까? 유대교 신봉자들은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따라와서 그의 사역을 방해하고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실제로 돌을 들어 던졌습니다. 그의 인생 후반부는 박해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바울의 인생을 해석하려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리스도의 사상의 빛으로 바울의 인생을 해석해야 합니다. 

 

지인 중에 전주 기전여고의 국어교사가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소명으로 알고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인생을 새롭게 인도하십니다. 몽골에 가서 선교하기로 최근에 결정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빼고는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인생도 그리스도 없이는 해석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분의 사상으로 여러분의 인생 이야기를 해석하는 시간이 있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인생의 풀스토리를 듣고 싶습니다. 

 

3. 부르심의 이유와 목적 

여러분, 오늘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 아그립바 왕에게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을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은 크게 세 가지 입니다. 

 

1) 증인(16절)

첫째, 예수님은 바울을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16”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 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본 것과 앞으로 보게 될 일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증인은 그저 자기가 본 것을 사실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소설을 쓰거나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요사이 검찰들이 국감장에서 증언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웃깁니다. 도이치모터스 관련해서 대통령 부인 김건희씨를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서 불기소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은 조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증인은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저는 사변적인 사람입니다. 경험보다 종합을 선호합니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질 못하고 이쪽저쪽을 다 고려하려고 합니다. 상상력이 좋다보니 과장을 하거나 과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약점입니다. 그래서 계속 훈련하고 있습니다. 가능한한 내가 경험한 그대로 말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2) 이방인의 구원(18절)

둘째, 예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18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노종문 목사님이 계십니다. 정말 스마트한 분이신데, 그분은 하나님 나라 복음에 성령님의 역할을 강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최근 저서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소개하는 책인데,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본질은 해방이라고 규정합니다. 죄 사함과 사탄을 이김으로 표현합니다. 

 

바울에게 나타난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 죄사함을 받아 거룩한 성도들 가운데로 들어오게 하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특별히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사탄의 세력에 조종당하고 있었습니다. 죄로 얼룩져 하나님께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을 구출, 탈출, 해방 시키는 것이 바울을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23절)

셋째, 예수님은 바울을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전함으로써 온 백성의 빛이 되셨다는 것을 전하도록 부르셨습니다. 23절입니다. 

 

23그것은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것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이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 빛을 선포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것, 이것이 바울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바울에게 사탄에 대한 해방과 죄사함만 선포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 인류의 빛이 되셨음을 선포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현재적 사건으로서 지금 이 순간에 사람들을 해방시킵니다. 살아서의 구원과 죽어서의 구원, 이 두 가지를 분리하려는 움직임에 단호히 거부하십시오. 

 

예수님이 바울을 부르신 목적이 분명해졌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의 목적과 이유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고, 정리했고, 왕 앞에서 말했습니다. 정리와 반복의 힘은 큽니다. 말과 글로 정리하고 계속 반복해서 말하기를 실천합시다.  

 

4. 나의 부르심의 이유와 목적을 찾아서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처럼 우리도 나의 부르심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을 해석할 키워드가 거기에 있습니다. 부르심과 관련해서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 일반적인 부르심 

먼저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부르심입니다. 보편적인 부르심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 관계로의 부르심 

하나는 관계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자신과의 바른 관계로 들어오기를 바라시고 부르십니다. 당신의 백성이 되기를, 더 나아가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부르십니다. 

 

- 초대의 부르심

다른 하나는 우리가 쉽게 놓치는 것인데, 바로 다른 사람들을 그 관계로 초대하라는 부르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관계로 들어오라고 초대하라는 부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일반적인, 보편적인 부르심입니다. 이건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2) 개별적인 부르심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부르심 말고 개별적인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지는 부르심입니다. 이걸 찾을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 하나님 나라의 포괄적 영역에서 나의 위치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포괄적 영역에서 나의 위치를 찾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영역은 우리 일상의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종교적인 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걸 찾아 가는 겁니다. 대학생, 군인, 직장인, 취업 준비 등 모든 일이 하나님 나라와 연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성취 속에서 나의 위치

개별적인 부르심의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성취 속에서 나위 위치를 찾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성취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서사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는 겁니다. 창조, 보존, 화목, 완성시키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이야기 속에 나는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지 찾는 겁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씩 들면 참 좋겠는데, 시간이 없네요. 

 

3) 특정한 부르심

여러분, 개별적인 부르심에도 특정 시점과 상황에 따른 특정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 시기와 상황에 의한 부르심 

예를 들어, 시기와 상황에 의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독립운동의 부르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독립운동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해방이 되면 그 부르심은 끝이 날 겁니다. 

 

- 특별한 필요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부르심

특별한 필요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부르심도 특정한 부르심이 될 겁니다. 특정 시점에 공동체가 원하는 역할이 있을 수 있죠. 공동체를 섬기는 리더나 운영위원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 강렬한 열망 그리고 세상의 비거부가 만나는 지점에서의 부르심

지난 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강렬한 열망을 느끼는 부분, 그리고 특별히 이 세상이 거부하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특정한 부르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열망을 잘 따라가보는 겁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개별적인 부르심 속에서 자신의 열망을 잘 따라가보는 겁니다.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욕구, 나의 개별적인 부르심을 거스리는 욕구는 열망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열망과 욕망을 구별합시다. 

 

일반적인 부르심은 가장 넓은 부르심이며 필수적입니다. 개별적인 부르심은 일반적인 부르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부르심은 개별적인 부르심을 이루는 삶의 단계가 됩니다. 

 

=> 부르심 없이 사는 삶 vs. 부르심을 느끼는 삶 vs. 부르심 속에 사는 삶

사랑하는 여러분, 부르심 없이 사는 삶은 허무합니다. 부르심을 느끼지만 거부하며 사는 삶은 불안합니다. 부르심을 느끼고 그 속에 사는 삶이야말로 인생을 해석하며 사는 삶이고 인생의 목적을 향한 삶입니다. 

 

5. 나가며 

- 부르심의 빛 아래서 삶을 해석하기

부르심의 빛 아래서 여러분의 삶을 해석하기 바랍니다. 그런 해석이 정리되고 반복되어야 우리는 권세자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떨지 않고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그런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부르심의 빛 아래서 해석하고 정리하고 말하고 나누기를 반복하다보니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담대했던 겁니다. 어떤 인터뷰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앞에서도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권력 앞에서도 쫄지 않는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단초를 보았습니다. 부르심의 빛 아래서 자신의 삶을 해석함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심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도 중요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찾자면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빛 아래서 자기 삶을 해석하고 정리하고 나누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런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1시간 짜리 인생 이야기를 서로 나눠봅시다. 부르심의 빛 아래서 자신의 삶을 해석해 봅시다. 서로의 해석을 격려합시다. 그렇게 빚어갑시다. 

 

 

[기도회]

1.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요? 고통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하나요? 회피, 분노, 두려움이라는 키워드도 있을 수 있죠. 친구, 부모님, 선생님이라는 키워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제안합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키워드 혹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키워드로 여러분의 인생을 해석해 보세요. 그리고 이 시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2. 우리 인생을 그리스도와의 만남 혹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해석하고 정리하고 나누기를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용기있게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격려하며, 또한 담대하게 친구와 이웃들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3900443#home

 

‘기적의 사과’ 농법으 로 세계적 스타 농부 된 기무라 | 중앙일보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농약·비료 없이 사과를 재배하고 있는 기무라 아키노리가 자신의 사과밭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논픽션 작가 이시카와 다쿠지의 『

www.joongang.co.kr

 

그 길로 사과재배법을 또 한 번 바꿨다. 과수원의 잡초도 뽑지 않았다. 아예 관리를 하지 않는 원시 그대로 과수원을 팽개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과밭은 ‘방치원’이라 불렸다. 기무라는 “흙이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라고 했다. 그는 “비료나 농약을 수십 년간 뿌려왔던 땅은 딱딱해져 잡초조차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면 흙도 기름져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땅을 바꾸어야 건강한 열매가 맺힌다. 

농약과 비료, 심지어는 천연 비료만으로도 되지 않는다. 

땅 자체가 바뀌고, 그 땅에 적응하는 나무가 그 생명력을 유지할 때, 폭풍에도 끄떡없는 열매가 맺힌다. 

 

오늘 숨:길교회 설립예배에서 배덕만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설교 중 예화다. 

그는 한국교회가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더는 희망을 논하기 어렵다고 했다. 

외부에서는 한국교회가 혐오 집단이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단다. 

그러니 몇가지 조치만으로는 어렵단다. 

땅을 기경하여 새롭게 바꾸는 일에 숨:길교회가 사용되길 축복하는 말씀으로 이어졌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땅에서 떠날 때, 그는 야훼의 음성을 들었다. 

티아맛이나 마르둑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들은 듣보잡 이방신의 음성을 듣고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자는 아브람의 말을 따라 그 긴 거리를 이동했다. 

견디고 인내했다. 

숱한 어려움도 견뎌냈다. 

생명으로의 길을 떠나려는 숨:길교회도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지혜로운 하나님의 인도로 끝까지 그 길을 가길 기도한다. 

 

 

2022. 1. 30. 김혁수

 

[본문_마가복음 2:18-28_새번역]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19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있느냐? 신랑을 자기들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없다. 20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터인데,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2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조각이 낡은 데를 당겨서, 더욱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가죽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도 가죽 부대도 버리게 된다 포도주는 가죽 부대 담아야 한다.”

23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24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되는 일을 합니까?” 25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6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되는 제단 빵을 먹고,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0. 들어가며 

- 말로 싸우는 전쟁 

민족 고유의 명절 설입니다. 새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많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몸과 마음이 더욱 건강해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획을 이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축복하고 덕담을 나눠야 하는 명절에 자칫하면 가족 간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밥상 머리에서 대화하다가 정치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긴장이 고조되면서 결국 말싸움이 되곤하죠. 그래서 밥상머리에서는 취업, 결혼, 그리고 정치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죠. 

 

그러나 TV 틀어 놓으면 어느새 뉴스에서 그리고 하루 종일 종편에서 정치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마치 가족끼리 정치이야기를 하라고 부추기는 같아 보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조심하면서 명절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있는 밥상머리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피하더라도, 차나 간식을 먹으면서는 서로 의견을 묻고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자신의 의견도 담담하게 말할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민주주의는 이런 작은 토론문화가 정착되어야 성숙할 있거든요. 너무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담담하게 솔직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 좋아하는 후보와 공약,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적합한 세력과 후보가 누군지 등에 대해 말하는 거죠. 

 

사실 민주주의는 말로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힘과 무력의 싸움을 말싸움으로 전환시킨 것이 민주주의인 거죠.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말싸움을 고상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힘과 무력이 아니라 말과 희생으로 싸우셨던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면에서 예수님이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은 어떤 말싸움을 하셨는지 본문을 살펴볼까요? 

 

1. 나는 새포도주다(18-22).

1)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

예수님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금식을 정도(월요일, 목요일) 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슬픈 역사를 떠올리며 금식하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바벨론으로부터 파괴되었던 날을 기억하면서 금식을 하곤 했습니다. 여전히 바벨론 포로기에 이어,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시간을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식하는데, 자신만 밥을 먹는 것은 재밌는 경험이 아닙니다. 지금이야 혼밥 혼술이 대중화되어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식하고 있는데, 별로 열지도 않은 식당에 들어가 혼자 먹는다고 생각해보면, 쓸쓸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통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금식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특히 야고보와 요한은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요. 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나서고는 금식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2) 요한의 제자들의 의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자고로 여호와 신앙운동은 경건한 금식기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었죠. 이렇게 모든 , 모든 끼니에 식사를 하는 종교지도자, 신앙운동 공동체는 거의 처음 보는 현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사람들이 물어본 것으로 나와 있는데요, 다른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누군인지 기록해 놓았습니다.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5:14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5:33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군요.”

 

마태가 기록한 내용을 보니, 당시에 예수님께 물어본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질문을 살펴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주 금식을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 모든 끼니를 먹고 있었던 겁니다. 때마다 과거 요한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 스스로도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약간 헷갈렸을 가능성이 있어보입니다.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 예수님은 경건하지 않은 유대인들과 어울리느라 금식하는 날들을 굳이 지키지 않았을 아니라, 예수님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제자들도 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금식이 몸에 베어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따르면서는 굳이 금식하지 않은 것이죠. 

 

3) 새신랑, 새옷, 새포도주

- 혼인 잔치의 새신랑_잔치를 즐겨라

요한의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금식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드디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장 먼저, 지금은 혼인 잔치 기간이라는 겁니다. 이건 유대인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식민지 기간에 있기 때문에 사실은 장례식장 느낌의 살고 있었습니다. BC586년에 바벨론에 멸망당한 뒤로 중간에 잠시 80년간 독립왕조를 이룬 적은 있었지만, BC63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 의해 다시 함락되어 예수님 시대까지 100년을 다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혼인 잔치가 아니라 장례식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은 혼인잔치 기간이며, 특히 혼인잔치의 주인공은 새 신랑이신 예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금식이 아니라 새옷을 입고 새포도주를 마시며 잔치를 벌이라고 하시는 거죠.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채우라고 하십니다. 왜냐구요? 새신랑이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 낡은 옷에 생배 붙이기_새 옷을 입어라

다른 비유도 말씀하셨죠. 낡은 옷을 고치기 위해 생배 조각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겁니다. 오늘날이야 바느질 하는 분들은 전문가시죠. 하지만 과거에는 모든 사람들이 바느질을 알았을 겁니다. 그리고 옷이 헤어지고 뜯어졌을 , 천으로 떼우고 빨면 옷이 오히려 상하게 된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떡하라는 말일까요? 찢어진 옷을 그대로 두라는 이야기일까요? 아님 조각으로 떼우라는 말일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새 천으로 옷을 입으라 말입니다. 이제 옷은 버리고 옷을 지어 입으라는 거죠. 왜요? 새신랑이 오셨고, 잔치가 열렸으니, 잔치에 참여할 새 옷 지어 입으라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새신랑이 왔으니, 썩은 표정을 버리고 기쁨의 시간을 보내라는 겁니다. 많이 웃고, 맛있게 먹고, 멋지게 입고 춤도 추고 즐겁게 지내라는 겁니다. 새신랑과 함께 말이죠. 

 

- 포도주는 부대에_ 부대를 사라

그런데, 그런 잔치에 무엇이 필요하나요? 맞습니다.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잔치를 준비하면서 포도주를 만들텐데, 포도주를 옛날에 만들었던 가죽 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렇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상식 중에 하나가 바로 가죽 부대에 포도주를 넣어서 보관하면 발효되면서 금새 터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도 당시에 상식이었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부대를 만들든지 사야하는 거죠. 잔치에 새포도주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부대 필요한 겁니다. 

 

시대에 대한 관점이 바뀌는 거죠. 이건 우리에게도 요청되는 변화입니다. 예수님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마치 스마트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듯이 말입니다. 옛날로 돌아가자면, 대한민국의 독립 전과 후가 다르듯, 한국전쟁 전과 후가 다르듯이 말입니다. 세상이 바뀐 겁니다. 바뀌었다면 바뀐 흐름에 맞춰 새로운 관점, 새로운 태도,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갖춰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하시고 있는 겁니다. 

 

2.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23-28).

1) 밀밭

오늘의 번째 이야기도 번째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걸어갑니다. 거길 지나가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배가 고팠던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저 제자들이 지나가다가 밀을 잘랐다고 표현했는데요, 마치 밀이 가는 길을 방해해서 밀을 쳐내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조금 다르게 표현했는데요. 

 

누가복음 6: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

 

마태복음 12:1

무렵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서 먹기 시작하였다

 

종합해보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이동중이셨습니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정 거리 이상을 걸을 없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율법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하위 규정을 613가지나 만들어 놓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죠.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일단 안식일에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배가 고프니까 밀밭 사이로 들어가서 밀을 훔쳐 먹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쯤에서 물어볼게요. 제자들은 행동에 대해 예수님께 허락을 구했을까요? 아님 예수님께 묻지도 않고 그냥 몰래 자기들 맘대로 행동한 걸까요? 생각에는 예수님의 허락을 받았을 라고 봅니다. 당시 제자들도 안식일에 해야 일과 하지 말아야 일을 구분하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행동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만약에 예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해도되지 않을까' 생각했겠죠. 그리고 예수님께 물어봤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담담하게 허락을 했을 겁니다. 

 

2) 바리새인들의 문제제기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문제를 제기합니다. 자신들의 기준에서는 있을 없는 일이니까요. 오랫동안 안식일 규정을 연구하고 규정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제자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없었거니와 그런 행동을 허락하고 방치한 스승인 예수님에 대해서도 용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24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님은 생뚝맞은 표정으로그게 어때서라는 식으로 대답하십니다. 읽어 볼까요? 

 

25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6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되는 제단 빵을 먹고,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자신을 다윗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있으십니다. 다윗이 당시에 배가 너무 고파서 제사장들만을 위한 제단 빵을 먹고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에게도 제공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사건인데요.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을 다니다가 배고픔에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죠.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의 상황을 다윗에 빗대고 있습니다. 

 

3)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정의

그러면서 매우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시는데요. 다시 읽어 볼까요? 

 

 27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 사람을 살리는 안식일 

그렇습니다. 안식일의 원래 취지는 사람을 쉬게 하는 겁니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으로부터 쉼과 안식을 통해 새로운 정신적, 육체적 힘을 얻고, 창조적 정신을 유지하라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안식일 규정이 언제 정해졌는지 아시죠? 그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겁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있는 기반 만들어 것이죠. 이집트에서 안식일이 어디있었겠습니까? 그저 죽으라고 일을 해야 했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통해 사람답게 사는 법을 알려주신 겁니다. 그런데 어느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 사람을 살리는 일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안식일을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중요한 지표라고 봤죠. 거룩한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기준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살리는 일도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의 근본 의도와 취지를 말씀하시는 거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겁니다.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는 사용하라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쉬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해야 사람다워집니다. 복잡한 세상사를 내려놓고 편안히 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 , 사람다워집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질을 다시 천명하신 거죠. 

 

- 사람을 살리는 일의 선두주자

그리고 놀라운 주장을 펼치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 당신이라는 주장이죠. 이건 뭡니까?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기가 일입니다. 그전에는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질 않나(마가복음 2:10), 최근에는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질 않나(마가복음 2:17), 이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떠들어대는 겁니다. 예수님은 맥락은 이렇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의 원래 취지인데, 취지를 가장 살리는 존재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분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세상에 오셨죠. 하나님과의 회복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육체적, 정서적, 정신적 회복을 위해 오신 겁니다. 그러니 그분이 안식일의 원래 취지를 가장 살리는 분인거죠. 따라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3. 논쟁의 격화 

1) 논쟁의 이유 

여러분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과 말에 의문을 갖게 되고 논쟁을 하게 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그건 예수님이 보시는 세계와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으로 끌고 들어오신 분이시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겁니다. 

 

최근 개봉한 매트릭스 4, 리저렉션을 봤습니다. 워낙에 매트릭스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스토리가 이어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매트릭스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빨간약을 먹을래, 파란약을 먹을래 하는 장면입니다. 빨간약을 먹으면 컴퓨터 시뮬레이션 세계에서 벗어나 진짜 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파란약을 먹으면 그냥 현재 그대로 남게 됩니다. 시뮬레이션 세계와 진짜 현실 세계가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빨간약과 같은 분이십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고, 세계로 들어가자고 초대하시는 분이시죠. 그런데, 새로운 세계를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논쟁할 밖에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자기 주장

오늘 예수님은 여러 가지 자기 주장을 하셨습니다. 나는 신랑이다. 나는 옷이다. 나는 포도주다.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런 주장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신부가 되길 요청하십니다. 신부답게 옷을 입으라고 요청하십니다. 잔치를 위해 포도주를 부대에 담으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진짜 주인인 예수님을 인정하고 안식일의 삶을 재편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자기 주장은 우리에게 변화를 촉구하십니다. 

 

3) 어리둥절한 사람들 

이러니 사람들은 어리둥절 밖에 없죠. 도대체 이분의 세계관을 쫓아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헷갈렸구요. 바리새인들은 저항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파란약을 먹으면서 평생 지금 세계에 만족하며 살고 싶은데, 급격한 예수님의 주장에 당황하다가 지금은 저항하고 있는 겁니다. 

 

4. 나가며 

- 세계관 확장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나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흔들리는 경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제시하신 하나님 나라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 나라와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교회의 모습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던 신앙 생활과 다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운 겁니다. 너무 좋은데, 그분이 나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사랑하신다니 너무 좋은데, 문제는 그분은 나의 관점을 바꾸길 원하신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고 두렵기도 거죠.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세계관의 변화와 확장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자란 가정이 나의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에는 선생님과 동네 친구가 나의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때에는 학교와 게임과 친구가 나의 세계였죠. 조금씩 우리의 세계는 확장되어왔고, 때마다 조금씩 다른 문법을 배우면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마세요.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는 생각과 다를 뿐이지 더욱 좋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합니다. 변화 자체가 두려운 것이지, 내용은 너무 선하고 아름답고 영원하고 행복한 것들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마시고,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갑시다. 설을 맞아 일가 친척들을 찾아뵙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그리고 정치 이야기도 적절하게 하세요. 그리고 조금 남는 시간에는 예수님과 말싸움을 하시는 어떨까요? 우리의 세계관을 확장하길 원하시는 예수님과 논쟁을 해보는 거죠. 물론 논쟁은 죽어도 거부하겠다는 식의 논쟁이서는 안되겠죠. 정직하게 사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논쟁이면 정말 좋겠습니다. 여러분, 새해 진리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는 누리시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께 정직하게 물어보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질문들을 마음 속에 꽁꽁 숨겨두지 말고, 솔직하게 꺼내서 예수님께 물어보는 사람이 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2. 새해 명절기간 동안 계획해서 너무 삶이 무너지거나 나태해지거나 혹은 너무 달리거나 정치 이야기 등으로 싸우는 없이 기분 좋은 연휴기간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에 대한 질문과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질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2. 만약 예수님과 논쟁한다면 어떤 주제로 하고 싶은가요? 혹은 예수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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