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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 농법으 로 세계적 스타 농부 된 기무라 | 중앙일보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농약·비료 없이 사과를 재배하고 있는 기무라 아키노리가 자신의 사과밭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논픽션 작가 이시카와 다쿠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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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사과재배법을 또 한 번 바꿨다. 과수원의 잡초도 뽑지 않았다. 아예 관리를 하지 않는 원시 그대로 과수원을 팽개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과밭은 ‘방치원’이라 불렸다. 기무라는 “흙이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라고 했다. 그는 “비료나 농약을 수십 년간 뿌려왔던 땅은 딱딱해져 잡초조차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면 흙도 기름져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땅을 바꾸어야 건강한 열매가 맺힌다. 

농약과 비료, 심지어는 천연 비료만으로도 되지 않는다. 

땅 자체가 바뀌고, 그 땅에 적응하는 나무가 그 생명력을 유지할 때, 폭풍에도 끄떡없는 열매가 맺힌다. 

 

오늘 숨:길교회 설립예배에서 배덕만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설교 중 예화다. 

그는 한국교회가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더는 희망을 논하기 어렵다고 했다. 

외부에서는 한국교회가 혐오 집단이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단다. 

그러니 몇가지 조치만으로는 어렵단다. 

땅을 기경하여 새롭게 바꾸는 일에 숨:길교회가 사용되길 축복하는 말씀으로 이어졌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땅에서 떠날 때, 그는 야훼의 음성을 들었다. 

티아맛이나 마르둑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들은 듣보잡 이방신의 음성을 듣고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자는 아브람의 말을 따라 그 긴 거리를 이동했다. 

견디고 인내했다. 

숱한 어려움도 견뎌냈다. 

생명으로의 길을 떠나려는 숨:길교회도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지혜로운 하나님의 인도로 끝까지 그 길을 가길 기도한다. 

 

 

2022. 1. 30. 김혁수

 

[본문_마가복음 2:18-28_새번역]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19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있느냐? 신랑을 자기들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없다. 20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터인데,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2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조각이 낡은 데를 당겨서, 더욱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가죽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도 가죽 부대도 버리게 된다 포도주는 가죽 부대 담아야 한다.”

23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24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되는 일을 합니까?” 25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6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되는 제단 빵을 먹고,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0. 들어가며 

- 말로 싸우는 전쟁 

민족 고유의 명절 설입니다. 새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많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몸과 마음이 더욱 건강해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획을 이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축복하고 덕담을 나눠야 하는 명절에 자칫하면 가족 간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밥상 머리에서 대화하다가 정치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긴장이 고조되면서 결국 말싸움이 되곤하죠. 그래서 밥상머리에서는 취업, 결혼, 그리고 정치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죠. 

 

그러나 TV 틀어 놓으면 어느새 뉴스에서 그리고 하루 종일 종편에서 정치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마치 가족끼리 정치이야기를 하라고 부추기는 같아 보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조심하면서 명절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있는 밥상머리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피하더라도, 차나 간식을 먹으면서는 서로 의견을 묻고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자신의 의견도 담담하게 말할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민주주의는 이런 작은 토론문화가 정착되어야 성숙할 있거든요. 너무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담담하게 솔직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 좋아하는 후보와 공약,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적합한 세력과 후보가 누군지 등에 대해 말하는 거죠. 

 

사실 민주주의는 말로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힘과 무력의 싸움을 말싸움으로 전환시킨 것이 민주주의인 거죠.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말싸움을 고상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힘과 무력이 아니라 말과 희생으로 싸우셨던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면에서 예수님이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은 어떤 말싸움을 하셨는지 본문을 살펴볼까요? 

 

1. 나는 새포도주다(18-22).

1)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

예수님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금식을 정도(월요일, 목요일) 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슬픈 역사를 떠올리며 금식하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바벨론으로부터 파괴되었던 날을 기억하면서 금식을 하곤 했습니다. 여전히 바벨론 포로기에 이어,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시간을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식하는데, 자신만 밥을 먹는 것은 재밌는 경험이 아닙니다. 지금이야 혼밥 혼술이 대중화되어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식하고 있는데, 별로 열지도 않은 식당에 들어가 혼자 먹는다고 생각해보면, 쓸쓸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통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금식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특히 야고보와 요한은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요. 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나서고는 금식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2) 요한의 제자들의 의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자고로 여호와 신앙운동은 경건한 금식기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었죠. 이렇게 모든 , 모든 끼니에 식사를 하는 종교지도자, 신앙운동 공동체는 거의 처음 보는 현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사람들이 물어본 것으로 나와 있는데요, 다른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누군인지 기록해 놓았습니다.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5:14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5:33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군요.”

 

마태가 기록한 내용을 보니, 당시에 예수님께 물어본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질문을 살펴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주 금식을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 모든 끼니를 먹고 있었던 겁니다. 때마다 과거 요한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 스스로도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약간 헷갈렸을 가능성이 있어보입니다.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 예수님은 경건하지 않은 유대인들과 어울리느라 금식하는 날들을 굳이 지키지 않았을 아니라, 예수님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제자들도 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금식이 몸에 베어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따르면서는 굳이 금식하지 않은 것이죠. 

 

3) 새신랑, 새옷, 새포도주

- 혼인 잔치의 새신랑_잔치를 즐겨라

요한의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금식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드디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장 먼저, 지금은 혼인 잔치 기간이라는 겁니다. 이건 유대인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식민지 기간에 있기 때문에 사실은 장례식장 느낌의 살고 있었습니다. BC586년에 바벨론에 멸망당한 뒤로 중간에 잠시 80년간 독립왕조를 이룬 적은 있었지만, BC63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 의해 다시 함락되어 예수님 시대까지 100년을 다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혼인 잔치가 아니라 장례식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은 혼인잔치 기간이며, 특히 혼인잔치의 주인공은 새 신랑이신 예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금식이 아니라 새옷을 입고 새포도주를 마시며 잔치를 벌이라고 하시는 거죠.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채우라고 하십니다. 왜냐구요? 새신랑이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 낡은 옷에 생배 붙이기_새 옷을 입어라

다른 비유도 말씀하셨죠. 낡은 옷을 고치기 위해 생배 조각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겁니다. 오늘날이야 바느질 하는 분들은 전문가시죠. 하지만 과거에는 모든 사람들이 바느질을 알았을 겁니다. 그리고 옷이 헤어지고 뜯어졌을 , 천으로 떼우고 빨면 옷이 오히려 상하게 된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떡하라는 말일까요? 찢어진 옷을 그대로 두라는 이야기일까요? 아님 조각으로 떼우라는 말일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새 천으로 옷을 입으라 말입니다. 이제 옷은 버리고 옷을 지어 입으라는 거죠. 왜요? 새신랑이 오셨고, 잔치가 열렸으니, 잔치에 참여할 새 옷 지어 입으라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새신랑이 왔으니, 썩은 표정을 버리고 기쁨의 시간을 보내라는 겁니다. 많이 웃고, 맛있게 먹고, 멋지게 입고 춤도 추고 즐겁게 지내라는 겁니다. 새신랑과 함께 말이죠. 

 

- 포도주는 부대에_ 부대를 사라

그런데, 그런 잔치에 무엇이 필요하나요? 맞습니다.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잔치를 준비하면서 포도주를 만들텐데, 포도주를 옛날에 만들었던 가죽 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렇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상식 중에 하나가 바로 가죽 부대에 포도주를 넣어서 보관하면 발효되면서 금새 터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도 당시에 상식이었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부대를 만들든지 사야하는 거죠. 잔치에 새포도주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부대 필요한 겁니다. 

 

시대에 대한 관점이 바뀌는 거죠. 이건 우리에게도 요청되는 변화입니다. 예수님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마치 스마트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듯이 말입니다. 옛날로 돌아가자면, 대한민국의 독립 전과 후가 다르듯, 한국전쟁 전과 후가 다르듯이 말입니다. 세상이 바뀐 겁니다. 바뀌었다면 바뀐 흐름에 맞춰 새로운 관점, 새로운 태도,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갖춰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하시고 있는 겁니다. 

 

2.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23-28).

1) 밀밭

오늘의 번째 이야기도 번째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걸어갑니다. 거길 지나가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배가 고팠던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저 제자들이 지나가다가 밀을 잘랐다고 표현했는데요, 마치 밀이 가는 길을 방해해서 밀을 쳐내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조금 다르게 표현했는데요. 

 

누가복음 6: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

 

마태복음 12:1

무렵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서 먹기 시작하였다

 

종합해보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이동중이셨습니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정 거리 이상을 걸을 없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율법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하위 규정을 613가지나 만들어 놓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죠.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일단 안식일에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배가 고프니까 밀밭 사이로 들어가서 밀을 훔쳐 먹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쯤에서 물어볼게요. 제자들은 행동에 대해 예수님께 허락을 구했을까요? 아님 예수님께 묻지도 않고 그냥 몰래 자기들 맘대로 행동한 걸까요? 생각에는 예수님의 허락을 받았을 라고 봅니다. 당시 제자들도 안식일에 해야 일과 하지 말아야 일을 구분하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행동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만약에 예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해도되지 않을까' 생각했겠죠. 그리고 예수님께 물어봤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담담하게 허락을 했을 겁니다. 

 

2) 바리새인들의 문제제기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문제를 제기합니다. 자신들의 기준에서는 있을 없는 일이니까요. 오랫동안 안식일 규정을 연구하고 규정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제자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없었거니와 그런 행동을 허락하고 방치한 스승인 예수님에 대해서도 용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24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님은 생뚝맞은 표정으로그게 어때서라는 식으로 대답하십니다. 읽어 볼까요? 

 

25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6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되는 제단 빵을 먹고,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자신을 다윗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있으십니다. 다윗이 당시에 배가 너무 고파서 제사장들만을 위한 제단 빵을 먹고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에게도 제공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사건인데요.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을 다니다가 배고픔에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죠.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의 상황을 다윗에 빗대고 있습니다. 

 

3)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정의

그러면서 매우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시는데요. 다시 읽어 볼까요? 

 

 27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 사람을 살리는 안식일 

그렇습니다. 안식일의 원래 취지는 사람을 쉬게 하는 겁니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으로부터 쉼과 안식을 통해 새로운 정신적, 육체적 힘을 얻고, 창조적 정신을 유지하라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안식일 규정이 언제 정해졌는지 아시죠? 그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겁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있는 기반 만들어 것이죠. 이집트에서 안식일이 어디있었겠습니까? 그저 죽으라고 일을 해야 했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통해 사람답게 사는 법을 알려주신 겁니다. 그런데 어느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 사람을 살리는 일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안식일을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중요한 지표라고 봤죠. 거룩한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기준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살리는 일도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의 근본 의도와 취지를 말씀하시는 거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겁니다.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는 사용하라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쉬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해야 사람다워집니다. 복잡한 세상사를 내려놓고 편안히 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 , 사람다워집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질을 다시 천명하신 거죠. 

 

- 사람을 살리는 일의 선두주자

그리고 놀라운 주장을 펼치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 당신이라는 주장이죠. 이건 뭡니까?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기가 일입니다. 그전에는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질 않나(마가복음 2:10), 최근에는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질 않나(마가복음 2:17), 이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떠들어대는 겁니다. 예수님은 맥락은 이렇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의 원래 취지인데, 취지를 가장 살리는 존재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분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세상에 오셨죠. 하나님과의 회복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육체적, 정서적, 정신적 회복을 위해 오신 겁니다. 그러니 그분이 안식일의 원래 취지를 가장 살리는 분인거죠. 따라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3. 논쟁의 격화 

1) 논쟁의 이유 

여러분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과 말에 의문을 갖게 되고 논쟁을 하게 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그건 예수님이 보시는 세계와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으로 끌고 들어오신 분이시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겁니다. 

 

최근 개봉한 매트릭스 4, 리저렉션을 봤습니다. 워낙에 매트릭스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스토리가 이어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매트릭스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빨간약을 먹을래, 파란약을 먹을래 하는 장면입니다. 빨간약을 먹으면 컴퓨터 시뮬레이션 세계에서 벗어나 진짜 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파란약을 먹으면 그냥 현재 그대로 남게 됩니다. 시뮬레이션 세계와 진짜 현실 세계가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빨간약과 같은 분이십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고, 세계로 들어가자고 초대하시는 분이시죠. 그런데, 새로운 세계를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논쟁할 밖에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자기 주장

오늘 예수님은 여러 가지 자기 주장을 하셨습니다. 나는 신랑이다. 나는 옷이다. 나는 포도주다.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런 주장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신부가 되길 요청하십니다. 신부답게 옷을 입으라고 요청하십니다. 잔치를 위해 포도주를 부대에 담으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진짜 주인인 예수님을 인정하고 안식일의 삶을 재편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자기 주장은 우리에게 변화를 촉구하십니다. 

 

3) 어리둥절한 사람들 

이러니 사람들은 어리둥절 밖에 없죠. 도대체 이분의 세계관을 쫓아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헷갈렸구요. 바리새인들은 저항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파란약을 먹으면서 평생 지금 세계에 만족하며 살고 싶은데, 급격한 예수님의 주장에 당황하다가 지금은 저항하고 있는 겁니다. 

 

4. 나가며 

- 세계관 확장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나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흔들리는 경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제시하신 하나님 나라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 나라와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교회의 모습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던 신앙 생활과 다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운 겁니다. 너무 좋은데, 그분이 나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사랑하신다니 너무 좋은데, 문제는 그분은 나의 관점을 바꾸길 원하신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고 두렵기도 거죠.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세계관의 변화와 확장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자란 가정이 나의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에는 선생님과 동네 친구가 나의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때에는 학교와 게임과 친구가 나의 세계였죠. 조금씩 우리의 세계는 확장되어왔고, 때마다 조금씩 다른 문법을 배우면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마세요.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는 생각과 다를 뿐이지 더욱 좋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합니다. 변화 자체가 두려운 것이지, 내용은 너무 선하고 아름답고 영원하고 행복한 것들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마시고,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갑시다. 설을 맞아 일가 친척들을 찾아뵙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그리고 정치 이야기도 적절하게 하세요. 그리고 조금 남는 시간에는 예수님과 말싸움을 하시는 어떨까요? 우리의 세계관을 확장하길 원하시는 예수님과 논쟁을 해보는 거죠. 물론 논쟁은 죽어도 거부하겠다는 식의 논쟁이서는 안되겠죠. 정직하게 사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논쟁이면 정말 좋겠습니다. 여러분, 새해 진리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는 누리시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께 정직하게 물어보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질문들을 마음 속에 꽁꽁 숨겨두지 말고, 솔직하게 꺼내서 예수님께 물어보는 사람이 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2. 새해 명절기간 동안 계획해서 너무 삶이 무너지거나 나태해지거나 혹은 너무 달리거나 정치 이야기 등으로 싸우는 없이 기분 좋은 연휴기간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에 대한 질문과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질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2. 만약 예수님과 논쟁한다면 어떤 주제로 하고 싶은가요? 혹은 예수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은가요?       

2022. 1. 23. 김혁수

 

[본문_마가복음 2:13-17_새번역]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다. 무리가 모두 예수께로 나아오니, 그가 그들을 가르치셨다. 14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레위는 일어나서예수를 따라갔다.

15  예수께서 그의 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따라왔던 것이다. 16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17예수께서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0. 들어가며 

- TV 토론

3 9일은 대한민국 20 대통령 선거 투표일입니다. 이제 45일이 남았습니다. 다음 5년을 이끌고 대한민국의 리더를 뽑는 대통령 선거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다들 투표권을 가지고 계시니 관심 갖고 보시게 같습니다. 어느 후보에게 여러분의 소중한 표를 줄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럴 필요한 것이 후보들의 토론일 겁니다. 서로 날카롭게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비슷한 점과 차이점을 보게 되고, 나의 생각과 맞는 후보가 누군지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후보자 토론회가 거의 열리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말과 논리가 부딪히는 토론의 현장에서 생각의 그대로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론만 한다고 훌륭한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서로간의 생각의 차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있다는 측면에서 후보자들의 TV 토론은 여러 차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토론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분이셨습니다. 논쟁의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는데요, 일부러 논쟁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논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주 지혜로운 말씀으로 상대방을 꼼짝못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매서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대응하시는 예수님이 그려집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1. 레위를 부르시는 예수님 

- 바닷가(호숫가) 산책 

오늘도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때로 호수가 너무 커서 바다라고 불리는 그곳을 걷고 계십니다.  바닷가 혹은 호숫가를 걷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시야는 트이고 바람은 이색적이죠. 반복해서 다가오는 물결은 자연 그대로의 ASMR입니다. 저도 일산 호수, 마장 호수, 산정 호수 등의 호수 주변을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최근에도 가족들과 포천의 산정 호수에 다녀왔는데요, 영하 14도까지 떨어지는 강추위 속에서 가족이 비니와 목도리 핫팩을 장착하고 호숫가를 걸어다녔습니다. 꽁꽁 호수 중심에서 오랫만에 얼음 썰매를 탔는데요, 그것도 즐겁더라구요. 

 

예수님께서 걸으신 갈릴리 호수야 얼음을 찾아 없는 곳이겠죠. 호수를 걸어가시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예수님은 이제 연예인에 가깝습니다. 가는 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여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싶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찾아옵니다. 

 

-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태) 

사람들이 가기 꺼리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가버나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가버나움을 지나는 여행객이나 상인들의 세금을 걷는 세관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경계로 서쪽 갈릴리 지역은 셰례 요한을 죽인 헤롯 안디바가 분봉왕으로 다스리고 있었고, 동쪽 지역은 빌립이 분봉왕으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사이에 중요한 교통의 요지가 가버나움이었고, 지역을 통과하던 사람들은 통행세를 내야 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치던 일을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민족의 고혈을 뽑아 로마 제국에게 바치는 세리들을 죄인이라고 무시했습니다. 창녀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라고 것이죠. 예수님이 세관 가까이 가시는 것을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도 세금을 내시려나 싶었을 겁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세관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다가오는 예수님은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꼈을 겁니다. 레위도 비슷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세관에는 돈이 많으며, 유대인들은 세관원의 앞잡이인 레위와 같은 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뒤따르는 무리가 수백명이 넘었습니다. 무서운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폭동이라도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 레위(마태) 회심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서 사무를 보고 있는 레위에게도 다가가십니다. 사무를 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상황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말을 거시는 겁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건 충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미움받던 그래서 언제든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레위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정말 충격인 것은, 마디에 머리 좋은 세리 레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무리들과 어울려서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원래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기로 유명했습니다. 밥도 같이 먹지 않습니다. 아니 몸에 닿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다른 제자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간 겁니다. 

 

누가는 상황을 이렇게 썼습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누가복음 5:28) 

그렇습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세금 장부들도 남겨두었습니다. 장부만큼 중요한 것이 어딨겠습니까? 그의 생명 줄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미래가 장부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깔끔하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세리 일을 그만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더이상 비판과 미움, 질타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무거운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디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을 있었던 겁니다. 

 

2. 바리새인들의 시비

- 레위 마태의 잔치 

따라가는 동시에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마가복음에는 레위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는지, 아님 예수님이 레위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는지가 명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많은 세리와 밖의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서, 그들과 자리에서 앉아서 먹고 있었다”(누가복음 5:29) 

확실히 레위는 세리로서 돈을 많이 벌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잔치를 열었습니다. 자신 같은 세리들을 초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멀리했던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으며, 자기 집과 마당에 자리를 마련해 많은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죠. 당시 잔치에는 포두주와 빵과 고기가 있었을 겁니다. 모두들 즐겁게 웃으면서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 바리새인들의 시비 

예수님을 따라왔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불러 놓고 시비를 겁니다. 

 

16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하시는 거요?”(누가복음 5:30) 

 

누가가 불평이라는 단어를 것이 보이시나요?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자신들이 그렇게 정죄하고 싫어하던 세리들과 여러 죄인들이 함께 모여서 이렇게 웃고 떠들고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 화가 났습니다. 율법을 안다는 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으로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다는 분이, 어찌  죄인들과 어울릴 있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지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집에 어떤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엘리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잔치에는 그들은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초대해도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구요? 레위는 죄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말할 , 소리의 크기는 어땠을까요? “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이렇게 말할 , 모기소리 만큼 작게 말했을까요? 아님 중간 소리 크기로 말했을까요? 아님 그곳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을 있을만큼 소리로 말했을까요? 성경에 답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제법 소리로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잔치 자리는 원래 시끌벅적합니다. 술이 들어가고 맛난 음식이 있으면 당연히 목소리가 커지고 웅성웅성거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레위의 집에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겠죠. 제자들도 예수님 근처에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집안과 마당에 여러 죄인들이 앉아 있었겠죠. 밖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습을 보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하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말했을 겁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겠지만, 제법 소리로 말했을 같습니다. 

 

잔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집니다. 갑뿐싸가 거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와서 일종의 깽판을 놓는 겁니다. 레위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초대한 것이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초대한 것이 아니거든요. 제자들도 순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레위 집에 예수님이 초대받아 가신다고 때부터 뭔가 께림직했거든요. 자신들도 세리들을 싫어했습니다. 제자로 부름받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레위를 제자로 삼으실 흠칫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이 싫어하던 세리를 제자로 삼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죠. 그래도 자신의 스승이 그렇게 하신다니 속으로는 약간 불편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잔치는 솔직히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 모두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세리와 죄인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질문을 하자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분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찍히는 것은 여러 모로 불편한 일입니다. 

 

- 예수님의 답변 

분위기가 싸해지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모두들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았습니다. 먹던 고기와 음식을 꿀꺽 삼켰습니다. 떠들썩하던 집안이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분명하게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나는 의인을 부르러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누가복음 5:32) 

 

여러분, 말씀은 여러 모로 불편한 말씀이라는 것이 보이시나요? 첫째로 바리새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펼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위한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감정이 상했습니다. 지난 번에는 사하는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고 하면서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했는데, 때는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던 정도 였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이 상당히 거슬리는 지경에 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만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잔치에 참여한 세리들을 비롯한 소위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사는 사람들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쨌든 예수님도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먹고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던 그분이 어찌되었든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평안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평소에 가진 생각에 틈을 내고 때로는 깨뜨리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인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 꿈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행동과 말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는 입니다. 돌이켜 회개하는 죄인들이 모여 잔치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할 들어갈 있는 곳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리들도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들어갈 있는 곳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불편합니다. 회개는 언제나 불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바리새인들도 회개해야 했고, 세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소한 세리 레위 마태는 회개했습니다. 회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약 성경의 처음 책인 마태복음을 저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조사관으로 심판관으로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길 없는 사회적 위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우리는 회개해야 죄인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던,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건 간에 우리는 회개해야 하는 죄인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분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 병자들을 초대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자리엔 평범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모두가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레위 마태 있었던 겁니다. 저와 여러분의 자리도 분명히 있습니다. 

 

3. 하나님 나라와 논쟁 

- 논쟁은 필요한가?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부터 바리새인들과 본격적으로 논쟁하기 시작하십니다. 오늘은 죄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 반론을 펴셨습니다. 앞으로 금식 논쟁, 안식일 논쟁을 펴치실 예정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낼 있어야 하는 아닌가요? 기독인은 평화를 지향하면서 논쟁을 피해야 하는 아닌가요?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로마서 12:18)

 

사도 바울의 말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절대로 논쟁을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에 명입니다. 가능하면 말싸움, 논리싸움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제가 철학을 전공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철학은 항상 논리 대결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대결, 논리의 대결에서 지식과 논리가 뚜렷한 사람들이 항상 유리했습니다. 논쟁을 피하려는 성향의 같은 사람들은 아무말도 못하고 듣기만 하다가 시간이 가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해야 말을 분명하게 하시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분명하게 대응하시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허허 웃으면서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잔치의 분위기를 망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 용납과 논쟁 

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처음부터 싸우려고 논쟁한 것은 아니라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내쫓았습니다.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약자와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행동이 있자 그때서야 예수님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은 논쟁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논쟁을 기획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실행하다보니 어쩔 없이 논쟁을 하게 것이라는 말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논쟁에서 시작해서 행동으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시작해서 논쟁으로 겁니다. 행동은 능동적, 건설적, 긍정적 표현입니다. 논쟁은 수동적, 변론적, 부정적 표현입니다. 죄인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식사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니 그제서야 논쟁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원리를 실천하자 그제서야 비난과 비판이 쏟아지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순서였습니다. 용납이 먼저, 논쟁이 나중입니다. 실천이 먼저, 변호가 나중입니다. 선포가 먼저, 대결이 나중입니다. 예수님에게 순서는 분명해보입니다. 

 

4. 나가며 

- 구원과 회복을 위한 논쟁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바리새인, 율법학자들과 대결하시는 장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논쟁이 벌어진 곳은 예수님이 죄인들, 병자들을 용납하시고 그들과 어울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장면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과 싸우시는 겁니다.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병자들을 고치고, 사회적 약자들을 회복시키는 장면에서 그것을 방해하고 비난하는 자들과 싸우시는 겁니다. 저는 예수님의 방식을 옹호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정말 사람들을 사랑하셨던 겁니다. 그들의 구원과 회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과 회복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일을 위해 여전히 헌신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을 방해하는 사단과 하수인들을 대적하시고 그들과 논쟁하시는 것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번 주도 함께 생각하고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삶의 현장에 찾아오십니다. 벗어나고 싶은 일상의 현장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그런 초대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었나요? 그분을 따라 갔나요? 아님 주저하고 있었나요?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논쟁하고 싸우는 것을 회피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위해 싸우시는 그분을 경험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나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여전히 싸우시는 그분을 깊이 알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세리 레위(마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당시 세리로서 느꼈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특별히 예수님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에게 나가올 , 그는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졌을까요?   

 

2. 예수님은 사람들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서는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주제로 논쟁(말싸움) 하게 되나요? 예수님과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2022. 1. 16. 김혁수

 

[본문_마가복음 2:1-12_새번역]

1며칠이 지나서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예수가 계신다는 말이 퍼지니, 2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마침내 앞에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3 때에 중풍병 환자를 사람이 데리고 왔다. 4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없어서예수가 계신 위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5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사람아! 죄가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다. 6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7‘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있는가?’ 하였다. 8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중풍병 환자에게 죄가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일어나서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하고 말하는 가운데서, 어느 쪽이 말하기가 쉬우냐?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11“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12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0. 들어가며 

- 1.5m

저는 강원도 인제, 원통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철책을 지키는 늠늠한 산악 정예병이었습니다. 강원도의 겨울을 유난히 길고 춥습니다. 5 초까지 눈이 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97 1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폭설이 내린다는 기상 예보를 듣고 저를 비롯한 모든 군인들이 잠을 포기하고 작업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눈이 쏟아졌습니다. 눈발이 휘몰아쳐서 그야말로 눈보라가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눈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소대장님이 오셔서 명령을 내립니다. 저를 비롯한 몇명에게 지붕위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네모난 나무 판대기를 붙여 만든 눈삽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서 눈이 쌓이자마자 지붕 아래로 눈을 밀어서 치웁니다. 그런줄 아시나요? 그렇습니다. 눈의 무게를 못이겨 지붕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오는 내내 눈을 지붕 아래로 내립니다. 그렇게 밤새 작업을 하고 아침이 되었는데요. 눈이 일층짜리 건물을 둘러쌓고 말았습니다. 1.5미터 이상 쌓인 겁니다. 군대 막사에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군대 정문에 이르는 1미터 정도의 길만 남았습니다. 세상이 그야말로 눈으로 뒤덮혔습니다. 지붕위에서 광경을 보는 것도 정말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막사의 지붕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누군가는 지붕을 보호하기는 커녕 뜯어냅니다. 도대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걸까요?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1. 뚫린 지붕(1-4)

1) 가버나움, 예수님의

오늘 본문의 배경이 예수님의 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저도 오늘 본문을 보면서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오셨죠. 예수님의 어머님과 그의 동생들이 함께 있었을 겁니다. 갈릴리 호숫가의 여러 회당을 다니면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니 사람들이 예수님의 집으로 몰려 듭니다. 

 

2) 사람들로 가득  

- 예수님의  

예수님의 안에는 이미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했는데요. 읽어봅시다. 

어느  예수께서 가르치시는데갈릴리  유대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교사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므로예수께서는 병을 고치셨다.”(누가복음 5:17)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멀리 예루살렘에도 닿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갈릴리의 예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무슨 가르침을 펼치는지 어떤 기적을 행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예수님의 집에 있었던 겁니다. 일종의 조사관 같은 사람이겠죠. 예루살렘 이단 감시 위원회의 조사관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도 병을 고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칠 때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도대체 어떤 마술을 쓰는지 눈여겨 보고 있었을 겁니다. 정말 병자가 맞는지부터, 병이 진짜 나았는지, 병을 낫게 사용하는 이상한 약품 같은 것은 없는지 눈을 부릅뜨고 관찰하고 있었을 겁니다. 

 

- 예수님의

안에만 사람들이 가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밖에도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병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겠죠. 병자들의 보호자도 같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차례차례 사람들을 안내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혹여라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3) 뚫린 지붕 

- 이상한 소리, 날리는 먼지 

,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천장에서 들리는 소리입니다. 나무가 띁겨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때로는 쿵쿵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병을 고칠 때마다 천장에서 소리가 나니까 모두 무슨 신비로운 힘이 있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먼지가 내려옵니다. 천장에서 후두둑 소리와 함께 오래된 먼지가 뿌옇게 내려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가 놀랍니다. 지진이라도 것은 아닌지 눈을 의심합니다. 

 

- 빛이 들어오다. 

그러더니 천장이 뜯기고 어둑하던 집안에 빛이 쏟아집니다. 예수님의 지붕이 뜯겨나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위를 쳐다봅니다. 중동의 쏟아지는 뒤로 사람들이 보입니다. 

 

- 병상이 내려오다. 

그리고 병상이 내려옵니다. 귀퉁이를 천으로 묶어서 천천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상 위에는 사람이 누워있었습니다. 중풍이 와서 여러곳에 마비가 사람이었습니다. 위에 있던 사람도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내려옵니다. 정말 기가 막히는 장면입니다. 집안에 있던 음식은 못먹게 되었습니다. 다들 놀라서 벽으로 붙었습니다. 거실 가운데 떡하니 병상이 놓여 있습니다.

 

2. 죄가 용서 받았다(5) 

1) 안심

여러분, 자리에 모든 사람들이 얼어 붙었지만, 중풍병자도 복잡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지붕을 망가뜨렸던 겁니다. 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것이지만, 막상 내려와보니 종교지도자들이 둘러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화를 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당신들 뭡니까? 남의 집을 이렇게 망가뜨려도 되는 건가요? 당신들 모두 고소할 거예요.’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보시오,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지붕을 뚫고 들어온 중풍병자와 명의 친구들 앞에서 병자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병자와 친구들은 엄청난 위안을 받았을 겁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진 분이 만약 분노해서 병자를 저주하고 친구를 고소하면 꼼짝없이 죽을 수도 감옥에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습니다. 

 

2) 영적 의미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단순히 지붕을 뚫은 것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는 느낌이 전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잘못에 대한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심오한 차원, 영적 차원이 있음을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병자 존재의 죄에 대한 용서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속에는 온유함과 동시에 엄청난 권위가 묻어 있었습니다. 

 

3. 바리새인의 생각(6-8)

1) 성전 중심 속죄 신학 

이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가장 빨리 파악했던 모양입니다. 그들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끌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제사를 통해 하나님만 하실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오랫동안 무엇이 죄인지 확인해주고,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용서의 제사, 속죄제,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언제든 사함은 성전에서 이뤄졌던 거죠. 제사를 드린 후에 제사장들에 의해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함의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기가 막혔습니다. 지붕이 뚫려서 난장판이 집안도 기가 막혔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기가 막혔습니다. 

 

2) 믿음 중심 속죄 신학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더이상 몇몇 엘리트들에게 독점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함의 방식과 선포에 대해 반대하셨습니다. 이상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되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믿음 중심의 속죄 신학을 예수님이 만드신 것이죠. 

 

이건 당시 문화에서는 충격이었습니다. 마치 안식일의 주인은 나다라고 말하는 것의 충격과 버금가는 충격이었습니다. “ 사함은 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사함의 선포 또한 내가 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버린 겁니다. 

 

4. 용서의 권세(9-12) 

1) 예수님의 권세 

솔직히 병만 낫게 하는 것이 쉽고 안전한 길일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구요. 정말 많은 병자들을 고쳤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 앞에서 사함을 선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왜죠? 

 

그것은 드디어 예수님의 예수님의 자기 폭로를 시작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10절입니다.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단순히 병을 고치고 말씀을 해석하고 귀신을 쫓는데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진정 하나님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죄사함의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줌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가 십자가로 가는 발걸음을 떼었다고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10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오직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라 땅위의 사람인 예수님에게 권세가 있다는 말에 유대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팔다리가 마비가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한마디에 자리에서 일어나 툭툭 털고 걸어 나가는 겁니다. 

 

지점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쫓으실 때는, 사함을 받았다는 선포는 없었는가?” 일단 마가복음의 기록 상에는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없었던 같습니다. 병을 고치는 일과 사함을 동시에 연결하지는 않았던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점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저는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시작점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이제 조금씩 자신의 진짜 정체를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2 후반부에 가면 안식일의 주인이 당신이다라는 말까지 하시거든요. 2 28절입니다. 한꺼번에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랬으면 곧바로 돌을 맞거나 십자가에 끌려갔겠죠. 예수님의 타임라인에 맞춰 조금씩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병을 고치면서 사함을 말하지는 않다가 시점에 말씀하신 거죠. 

 

다른 하나는, 믿음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정말이지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와 그의 명의 친구는 정말 믿음의 행동을 했습니다. 조금 과격하다싶은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치고 싶다 정도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정도의 과격한 행동이 있으려면,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절박함입니다. 다른 하나는 완전한 신뢰입니다. 아마도 중풍병자는 거의 죽음에 가까웠는지 모릅니다. 자신도 친구들도 자신의 상태를 보니 죽겠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줄서서 기다리다가 죽을 있겠다 생각했겠죠. 절박함 위에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약자, 병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분의 지붕을 뚫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보여준 사람들에게 사함의 선포를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던 믿음입니다. 온전한 신뢰. 그것을 다시 복원하시려는 겁니다. 율법 지식과 관습적 행동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셨던 진정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역사가 말해줍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걸 넘어 온전한 신뢰라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에게 예증하시기 시작합니다. 

 

2) 하나님 나라와 용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용서와 은혜는 뒷전에 두는 경우를 봤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긍휼과 은혜와 용서로 시작합니다. 병자들에 대한 긍휼, 약자들에 대한 은혜, 죄인들에 대한 용서로 시작합니다. 그걸 방해하는 권력자들 지식인들 기득권자들에 대한 공의와 정의의 목소리로 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성장의 측면을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용서와 긍휼과 은혜가 없이 공평, 공의, 정의를 말하는 것은 속빈 강정, 직관 없는 개념, 내용 없는 형식에 불과합니다. 용서가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지 않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회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용서와 은혜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 개조 프로그램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 프로그램입니다. 용서가 없는 공의는 폭력과 복수를 낳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피해가 제일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 나가며 

- 죄인은 어디에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매일 매일 그분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매주 매주 그분의 사함의 선포가 필요한 약자요 병자입니다. 때로 우리는 죽을 같은 심리적, 정서적, 육체적 고통 앞에서 예수님 집의 지붕을 뚫어야 합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 그분의 은혜와 용서를 누리기 위해 때로는 처절하게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분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보여야 합니다. 목사님, 에이  그런게 어떻게 은혜입니까? 그저 자연스런 일상 속에서 찾아오는 것이 은혜죠. 이렇게 생각하실 있어요. 그것도 은혜 맞습니다. 내가 특별히 노력하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오는 것도 은혜 맞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의존하지 마세요. 그렇게 한정짓지 마세요. 은혜를 하나의 개념 안에 가두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개념 틀에 매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과감한 신뢰와 믿음의 행동을 칭찬하십니다. 그것이 사함의 선포를 이끌어 냅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분 앞에서 우리의 잘못과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분이 나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 그분과 건강한 관계로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이런 반복을 너무 지겨워하지 마세요. 제가 살아보니, 관계는 그런 것이더라구요. 아내에게 매일 미안하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매일 미안하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실수와 잘못이 두가지가 아닙니다. 실수와 잘못을 계속 반복한다고 해서, 그래서 그것이 지겨워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관계는 멈추게 됩니다. 아니 퇴보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죄와 잘못을 아뢰고 용서를 받는 것을 지겨워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 모든 인간의 일상입니다. 

 

이번 한 주도 주님께 정직하게 고백함으로 그분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지난 주의 우리의 죄를 고백합시다. 하나님을 떠나서 맘대로 살았던 잘못을 고백합시다.  하나님의 뜻과 음성에는 눈과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을 회개합시다.  

 

2. 때로 우리는 과감하게 예수님 집의 지붕을 뚫어야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분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그분과의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때가 있는 겁니다. 혹시 주가 그런 주가 아닐까요? 나에게 그런 주가 수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말씀 읽고, 최선을 다해 신앙 서적을 찾아보고, 최선을 다해 좋은 설교를 찾아 듣고, 최선을 다해 그분의 일하심을 관찰하는 주가 되길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중풍병자의 믿음과 친구들의 믿음 중에 누구의 믿음이 보이나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2. 때로 기독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과감한 결단최선을 다한 노력 필요하다는 말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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