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7.. 김혁수
[본문_사도행전 28:17-31_새번역]
17사흘 뒤에 바울은 그 곳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우리 겨레와 조상들이 전하여 준 풍속을 거스르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죄수가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로마 사람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로마 사람은 나를 신문하여 보았으나,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놓아주려고 하였습니다. 19그러나 유대 사람이 반대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내가 황제에게 상소한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이런 까닭으로, 나는 여러분을 뵙고 말씀드리려고, 여러분을 오시라고 청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입니다.” 21그들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아직 유대로부터 당신에 관한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동포들 가운데서 아무도, 여기에 와서 당신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거나 소문을 낸 일이 없습니다. 22우리는 당신에게서 당신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종파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어디서나 이 종파를 반대하는 소리가 높다는 것입니다.”
23그들은 바울과 만날 날짜를 정하였다. 그 날에 더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의 속내를 터놓았다. 24더러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더러는 믿지 않았다. 25그들이 이렇게 견해가 서로 엇갈린 채로 흩어질 때에, 바울은 이런 말을 한 마디 하였다. “성령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여러분의 조상에게 하신 말씀은 적절합니다. 26곧 이런 말씀입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27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28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소식이 이방 사람에게 전파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그것을 듣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29절 없음)
30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 핵심 메시지
바울은 끝까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예수님의 읊조림을 닮았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수용하지 않아도 바울은 가능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가르치는 데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1. 들어가며
- 약속의 땅
드디어 바울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로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습니다. 로마에 입성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약속을 받은 바 있습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들어오는 것은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 배가 광풍에 표류하는 바람에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와주셔서 겨우 살 수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모티브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야곱과 요셉의 자손은 막강한 이집트를 탈출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그 땅을 향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바울도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제 제국의 심장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합니다. 아브라함에겐 제국의 변방으로 가라하셨지만, 예수님과 바울에겐 나라의 중심, 제국의 중심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바울은 로마로 갔습니다. 이스라엘에겐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었지만, 바울에겐 로마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도시 선교는 농촌 선교와 같은 위치에 놓여야 합니다. 우열을 논할 사안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우리 모두에게 다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부를 얻는 곳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번영을 구가하는 것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하는 곳입니다. 가나안이 될 수도 있고 로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읽기]
2. 자초지종
오늘 본문을 읽으면, 로마의 있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어떤 말들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로마에 오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 로마 사법 시스템의 무죄 취지(18절)
첫째,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진행된 로마식 재판에서 바울은 무죄였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법에 걸릴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폭동과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통치자들은 바울이 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2) 유대인들의 반대(19절)
둘째, 바울이 무죄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을 막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어떡해서든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것처럼 바울을 죽일 참이었습니다. 그를 무죄방면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3) 황제에 상소(19절)
셋째, 결국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여 황제에게 상소하게 됩니다. 황제에게 재판을 받아야 하기에 로마로 압송당합니다. 이 상황을 잘 말해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6:30-32
30왕과 총독과 버니게 및 그들과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 일어났다. 31그들은 물러가서 서로 말하였다. “그 사람은 사형을 당하거나, 갇힐 만한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소.” 32그 때에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함으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고발하거나 고소하기 위해서 상소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더 큰 뜻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그 약속의 땅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통과하면서 수많은 권위자들 앞에서 복음을 증언할 기회를 가졌고, 이제 그 담대함으로 황제와 로마의 통치자들 앞에서도 복음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셔서 당시 온 세상이라고 불릴 만한 로마 제국에 복음을 전하십니다.
3. 바울 메시지의 중심
그럼 이제 바울이 그의 사역 마지막까지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그의 말로 정리해봅시다.
1) 이스라엘의 소망(20절)
첫째, 그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전했습니다. 20절입니다.
20이런 까닭으로, 나는 여러분을 뵙고 말씀드리려고, 여러분을 오시라고 청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끌려온 이유는 이스라엘의 오랜 소망과 기대 때문입니다. 그것은 메시야 즉 구원자가 이 세상에 올 것이라는 메시야 사상이었습니다. 그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소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소망을 전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소망이 예수님이라고 전했습니다.
2) 하나님 나라(23절)
둘쨰,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23절입니다.
23그들은 바울과 만날 날짜를 정하였다. 그 날에 더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이 문장이 참 중요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 나라 복음이고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사함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분리를 배격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님이 살아 생전 그토록 외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끌고 들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예수님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은 통치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영적 실패 때문에 그 통치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사탄의 권세로부터 사람들이 해방되고, 죄사함을 얻고, 회복과 샬롬의 세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도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3) 예수에 관하여(23절)
셋째, 그는 예수님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23절 후반부입니다.
23절후_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의 속내를 터놓았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나사렛 출신의 예수이며, 그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십자가와 부활은 어떤 의미인지 가르쳤습니다. 특히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며, 그 사건들 때문에 죄사함과 사탄의 속박에서의 해방이 일어났음을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있고, 신약의 성령님도 계시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바울은 이 둘을 균형감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4. 우리 메시지의 중심
저는 우리가 전달하는 메시지도 바울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도리어 좋은 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너무 완벽한 분이잖아요!! 바울은 그래도 우리와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하지만, 가르침에 있어서는 바울을 많이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1) 하나님 나라
첫째,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되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이미 그리고 아직” “already but not yet”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지금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적용에 더 많이 신경써야 합니다. 역사 곳곳에서, 현재 곳곳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일어나고 확산되고 있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죄 용서가 일어나고,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수혜자입니다. 혜택을 엄청나게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자유와 평등과 정의로움이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지식의 확장도 그 어느 시대보다 높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나라가 준 선물들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전쟁으로 고통받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통치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생동감있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제 3세계 국가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하나님은 가정교회를 통해 그 냉혹한 핍박가운데도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작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청년부도 작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
둘쨰,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에 관해 더 많이 알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더 깊이 알고 더 폭넓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 성경 읽기와 관상 기도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 신앙의 선배들이 했던 기도 방식이 있습니다. 복음관상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등장하는 복음서의 장면을 머리 속에 그려봅니다. 그리고 여러 등장 인물 중에 한 명이 됩니다. 그렇게 그 상상 속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열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센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입니다. 제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물을 배 밖으로 퍼 버리는 사람, 키를 잡고 배를 안정시키려는 사람, 중요한 물건을 꽉 붙잡고 있는 사람… 그런데 예수님은 배 한 켠에서 주무시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 사건을 잘 알고 계시죠? 그 그림을 상상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 한 제자가 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구경꾼이 되는 거죠. 그 때의 여러분의 감정과 생각을 예수님께 말해보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상상 속에서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는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는 예수님 곁에서 ‘에라 모르겠다 나도 잠이나 자자’ 그랬답니다. 누구는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서 멀찌감치 지켜봤다고 합니다. 상상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 때의 감정과 생각을 정직하게 남겨두는 거죠.
예수님에 관한 에피소드는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스타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그분의 인스타를 보면서 여러분의 상상력을 사용하세요.
- 예수님 팔로워
예수님 인스타에서 하트만 눌러서는 안됩니다. 그분의 팔로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팔로우하는 많은 분들과의 교재가 필요합니다. 다른 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팔로우하는지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신실하고 진실하게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과 교제하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더 깊이 더 폭넓게 알아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가르칩시다.
5. 나가며
- 약속의 땅으로
이 두 가지, 즉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님을 가르치는 일을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약속의 땅으로 안내했습니다. 로마로 안내했죠. 우리는 어디로 안내하실까요? 우리들 각자의 약속의 땅은 어딜까요? 가장 기본적으로 바로 여러분이 있는 곳이 약속의 땅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현재는 누군가에겐 강렬한 소망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가족이 없는 사람에겐 가족이 있는 삶이 약속의 땅이겠죠.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에겐 서울이 약속의 땅이겠죠. 대학에 못 가본 사람에겐 대학 공부를 하는 것이 약속의 땅이겠죠.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은 누군가에게 약속의 땅이며 소망의 순간입니다. 한류를 좋아하는 베트남의 고등학생에겐 한국에 사는 것만으로 약속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일상을 더욱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을 가르치십시오.
그러나 지금의 일상만 약속의 땅은 아닐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제국의 변방 가나안 땅으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제국의 중심 로마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제 3세계의 가난한 나라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제 1세계의 런던이나 뉴욕으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경상도 상주로, 전라도 함평으로 부르십니다. 누군가는 부산, 인천, 서울로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그 새로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 2의 바울의 출현을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이 제 2의 바울이 되면 어떨까요?
[기도회]
1.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님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2.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 어딘지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 약속의 땅으로 안내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시다.
3. 오늘을 기점으로 한국기독교는 회생할 수 없는 타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교회가 보여준 불의함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입증하는 집회가 될 것 같아 두렵습니다. 교회를 회복시키려는 우리의 작은 노력들이 물거품이 될까 걱정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더욱 혐오하게 될까 고통스럽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존재 자체로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동성간 성교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고의 죄라고 주장하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혐오하는 것이 더욱 문제입니다. 존재를 부정하면 살인과 전쟁이 아주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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