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11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32 사무엘이 아말렉의 아각 왕을 끌어내라고 명령하였다. 아각은 행여 죽을 고비를 넘겼나 싶어 좋아하면서 사무엘 앞에 나왔다.33 사무엘이 말하였다. “당신의 칼에 뭇 여인이 자식을 잃었으니 당신의 어머니도 뭇 여인과 같이 자식을 잃을 것이오.” 사무엘은 길갈 성소의 주님 앞에서 아각을 칼로 난도질하여 죽였다.
34 그런 다음에 사무엘은 라마로 돌아갔고, 사울은 사울기브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35 그 다음부터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을 만나지 않았고,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NIV
Until the day Samuel died, he did not go to see Saul again, though Samuel mourned for him. And the Lord regretted that he had made Saul king over Israel(35절).
주석
32-33절. 사울을 왕위에 앉히고 뒤로 물러났던 사무엘은, 다시 사실상 통치자의 자격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아말렉 진멸을 마무리한다(IVP 성경연구주석 구약: 오경·역사서·시가서, 435쪽).
[오늘의 묵상]
1. 아각을 칼로 난도질하다
사무엘은 이 순간 심판자, 도살자의 모습이다.
아각이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아각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 슬픔은 온 땅에 가득하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로 역할한다.
고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하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도 있다.
마치 제사를 드릴 때처럼 칼을 높이 들고 아각의 머리와 사지를 자른다.
생각보다 능수능란하다.
이 장면에 대한 처음 느낌은 ‘잔인하다’이다.
동물을 죽이듯 사람을 죽인다.
사무엘은 유약하고 고상한 제사장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드세고 강하게 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긴 해도 피가 튀는 이 순간을 즐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이유다.
혹시 하나님이 이렇게 무서운 분으로 돌변할까봐 조마조마하다.
물론 그분이 끝까지 나와 주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에는 무섭게 돌변하시는 하나님이 소스라치게 등장한다.
그러니 조마조마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당당함과 조마조마함의 긴장이 나에게 있다.
하나님은 때로 내 심성을 뛰어넘을 것을 요청하신다.
조용하게 평온하게 묵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 심성에 어울린다.
하지만 활동적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삶을 요구하신다.
필요에 따라 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배우고 익히고 경험하고 표현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머물지 말고 타인에게로 나아가 사랑을 실천하길 원하신다.
자기 중심적이고 개인적인 나에게는 항상 어려운 과제며, 에너지가 많이 든다.
목사로 부르실 때는 고상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니리라.
도리어 이 세상을 품고 돌보고 사랑하길 원하셨을 것이다.
그저 바라기는 사람을 난도질하는 수준의 잔인함과 고통스런 일로 부르시지 않기를…
2.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아무리 위대한 사사라도 마음이 상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사람은 마음의 상함과 회복의 연속 속에 살아간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각을 살려둔 것에 크게 실망하고 마음이 상했다.
사울이 위대한 왕이 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왕의 모델이 되어 후대에도 길이길이 칭송받고 본이 되는 왕으로 남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 꿈이 산산조각났다.
자신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었다.
한 시대를 위한 시대정신이 아니라 앞으로 올 모든 세대, 시대를 위한 시대정신으로 남기를 바랬다.
꿈과 비전이 너무 크니 실망도 크다.
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오늘 본문 이후로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지 않는다.
이렇게 관계는 끊어졌다.
한번 이어지기는 어려워도 깨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몇 번의 실망으로 관계는 박살난다.
현대 사회는 이런 박살난 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평생 회복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미움과 쓴마음으로 지내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난 내가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줄 알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더라.
생각보다 자기 중심적이고, 개인적이다.
여전히 혼자 있는 것을 즐긴다.
다른 사람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떠올리다가보면 어느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로 유턴한다.
누군가의 필요나 기도제목에 일정정도 이상 집중하지 못한다.
타인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어떤 모습인지 신경쓴다.
자신에 대해 아예 신경쓰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만, 목회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나 기도제목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부끄럽고 싶지 않아서?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를 나열하는 것조차 내 내면에 대한 성찰의 결과다.
묵상과 침묵이 지향하는 바가 그런 것 같다.
즉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자신의 내면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
그것을 아예 못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어느새 그런 성향이 디폴트 값이 되어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 집중해서 돌보는 것을 잘 못한다.
내면을 돌보는 것과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까?
사무엘이 마음 상한 것이 이런 질문을 낳는다는 것이 비논리적이다.
그런데 어쩌랴, 생각의 흐름이 이렇거늘!!
최근에 마음이 상한 것은 윤석열과 그의 협력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전광훈과 손현보의 막말 때문이다.
윤석열이 구속취소되어 웃는 얼굴로 돌아다니는 것에 욕지기가 터져 나온다.
전광훈과 손현보는 개신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사용하고 있다.
분노가 점점 차오른다.
어찌 이 분노를 다스려야 하는가?!
[오늘의 기도]
악인들이 판을 칩니다. 주님!
죄를 저지르고도 번듯이 돌아다닙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을 죽이고자 계엄을 선포했는데, 법을 교묘히 이용하거나 조작하는 범죄를 통해 버젓이 돌아다닙니다.
심우정은 윤석열 구속 취소를 의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짝짝꿍으로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 나라를 구원해 주소서.
죄인들은 벌을 받도록 이끄소서.
악인들은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도록 인도하소서.
이 세상에 평화와 생명이 가득하도록 이끄소서.
하나님 나라 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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