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7 13 화요일

 

여는 기도

내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1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2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나는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4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5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

6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보내라. '거룩하신 , 참되신 ,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

8 나는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없다. 네가 힘은 적으나, 말을 지키며,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9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10 인내하라는 말을 네가 지켰으니,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 시험은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

11 내가 가겠다.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서, 아무도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12 이기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 그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도시,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사람의 몸에 두겠다.

13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석
사데(1): 사데는 1세기 말경에 번창하던 경제 중심지였고, 영향력 있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편지가 반대자나 사회적 충돌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가 그런 상황에 적응했다고 추론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사데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생각처럼살아 있지않고죽었다 주장한다(IVP 성경비평주석).

빌라델비아(7절): 서머나에서처럼 빌라델비아 도시의 유대인들은 ‘사단의 회’로 불리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오직 유대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자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주재자는 이미 자신을 따르는 이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 놓으셨다(IVP 성경주석).

 

주님은 사데 교회가 사실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씀하십니다(1절). 그런 사데 교회를 향해 ‘깨어나라(2, 3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주님께 받고 들은 가르침을 기억하고, 지키고, 회개하여야 합니다(3절). 주님은 신실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알고 계십니다(4절).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입니다(7절; 사 22:22 참조).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권세가 있는 분입니다(8절). 그 주님께서 친히 거짓된 세력들을 굴복시킴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9절). 그렇기에 우리는 인내하며 주님의 약속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

죽은 , 죽어 가는  

예수님은 사데 교인 중에 벌써 죽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죽어 가는 자가 있다고도 말씀하신다. 

몸은 살아 있고, 모임은 유지되고, 구체적인 실천도 일어나고 있지만,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있다. 

죽어가는 자들이 있다. 

그와 동시에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성도들도 있음을 말씀하신다. 

교회에는 크게 옷이 깨끗한 사람, 죽어가는 사람, 이미 죽은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 

어느 교회나 이런 사람들이 있겠지만, 사데교회는 비율이 죽은 사람들 쪽이 높다. 

예수님은 옷이 깨끗한 사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2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죽어가는 사람들을 깨우라.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시 세우라. 

 

3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다시 살리는 방법은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기고, 굳게 지키고, 회개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처음 받았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복기하는 . 

예수님의 가르침의 순수한 원본을 찾아가는 , 

다시 가름침 위에 서서, 자신의 삶을 회개하는 . 

이것이 다시 사는 길이다. 

 

사람들은 변화 앞에 무기력하게 휩쓸리곤 한다. 

세상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면 도태되고 결국 사회적 부적응자, 실패자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변화를 쫓아간다는 말은 변화를 배운다는 것이다.

배우지 않고서는 따라갈 수가 없다. 새로운 문명, 새로운 과학기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고 익혀서 자기 것으로 삼아야한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한가. 따라가기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모자란다. 

그렇게 열심히 배워도 선도그룹에 올라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뉴스가 나오고, 체계적인 배움의 프로세스가 나왔다면 이미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저 뒤따라가기에도 바쁘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있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세상의 변화에 적절한 연관성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때에도 다시 그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있는가? 

그분의 가르침의 현실 적합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진다면 과연 다시 시간을 들여 그분의 가르침에 몰입할 있을까? 

 

예수님은 이런 상태를 죽어가는 상태라 판단하시는 같다. 

그분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를 못느끼는 사람들. 

현재의 필요에 몰입되어 그것을 따라가기에도 바쁜 사람들. 

교회 모임에는 나오지만, 생각과 마음은 변화되는 세상 앞에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사람들. 

예배는 드리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종교적 관습과 습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 

그렇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가치가 축소되고 점점 멀어진다. 

죽어가는 것이다. 

가르침의 내용이 희미해 지는 ,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점점 죽어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살리는 것이 사역자의 역할이다.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들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리는 , 

가르침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 

그래서 다시 자신의 삶을 가르침에 비추어 되돌리는 .   

이것이 다시 살리는 길이다. 

 

이렇게 살리는 사람들이 흰옷을 입는 사람들이다. 

끝까지 지켜내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다. 

 

 

방해꾼의 존재 

빌라델비아 교회 주변에는 강력한 유대인 그룹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아님 예수님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그룹인 같다.

게다가 유대 민족주의자로서 오직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모양이다.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대인들은 사단의 무리라는 판단을 받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과 행위가 사단에게 속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9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그런데 감동적인 부분이 있다. 

사단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결국 거룩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 앞에 꿇어 엎드려진다. 

그리고 예수님, 하나님이 유대인들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사단의 무리들이 더이상 자기 주장을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하나님의 선호를 드러내신다는 약속이다. 

반론을 제기할 없다. 

명확하다. 

하나님은 유대민족주자들의 편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방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옹호하신다. 

부정할 없는 증거가 차고 넘칠 , 사단의 무리들은 마음의 무릎을 꿇고 수긍할 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방해꾼은 패배한다. 

방해꾼이 없지 않다. 방해꾼은 언제나 생길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교인들에게 마음의 무릎을 꿇게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에 계속 거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예수님, 모든 것을 아시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 등장하신다. 

요한계시록의 예수님은 교회의 상황을 너무나 아시는 분이시다. 

사람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아신다. 

교회에 존재하는 여러 사람들의 상태를 판단하시고 구분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레이다, 그분의 CT, 그분의 MRI 정확하시다. 

그리고 처방도 정확하다. 

그분의 교회의 의사가 되신다. 

그분의 처방전에 따라 교회가 움직이면 교회는 살아난다. 

그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회개하기를 요청하신다. 

요한계시록의 교회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요청하시는 것은 회개다. 

고쳐서 돌이키는 . 

예수님의 원래의 가르침으로 다시 고쳐서 돌이키는 . 

회개는 성도들에게 계속 요청된다. 

처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요청되는 것이 아니다. 

조금 멀리 떨어져 나간 사람들에게, 교회 전체에게 다시 요청된다. 

교회는 언제든지 회개의 자리를 만들 있어야 한다. 

자기 만족에 빠져있으면 안된다. 명확한 예수님의 말씀에 돌아서야 한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예수님의 진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종합검진을 받으러 내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사도 요한처럼 귀를 기울일 있는가? 

때로 슬픈 진단을 받더라도,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죽어가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렇게 해야 한다. 

 

——

의사되신 예수님, 

저와 공동체를 주님의 진찰에 맡깁니다. 

누구보다도 정확히 판단하시는 , 

누구보다도 정확히 진단하시고 처방하시는 , 

우리를 살려주시는 . 

당신께 저와 공동체를 맡깁니다. 

혹여라도 죽어가고 있다면 살려주십시오. 

당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게 주세요. 

수많은 학자들의 이야기에 훼손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원래 우리에게 주셨던 말씀으로 돌아가게 주세요. 

그렇게 다시 살아나게 주세요. 

당신의 영적 권위가 우리 개개인들에게 되살아나 주님께 순복하고픈 마음이 충만하게 주세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게 해주세요. 

 

오늘도 주님 앞에 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7 10 토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종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시오.

 

18 "두아디라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보내라. ' 눈이 불꽃과 같고, 발이 놋쇠와 같으신 ,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나는 행위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을 알고,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

20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 용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종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미혹시켜서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다.

21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자기 음행을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22 보아라, 나는 그를 병상에다 던지겠다.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그와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으면, 환난을 당하게 하겠다.

23 그리고 나는 그의 자녀들을 반드시 죽게 하겠다. 그러면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분임을 알게 것이다. 나는 너희 사람에게 행위대로 갚아 주겠다.

24 그러나 두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사탄의 깊은 흉계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인 너희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25 다만 내가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어라.

26 이기는 사람,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27 그는 쇠지팡이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고, 민족들은 마치 질그릇이 부수어지듯 것이다.

28 이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께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다스리는 것과 같다. 나는 사람에게 샛별을 주겠다.

29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석
두아디라(18절): 두아디라의 경제는 무역과 수공업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역 동업 조합(길드)은 그들의 후원 신에게 바치는 공동 식사(보통 약 한 달에 한 번)를 했다. 두아디라에는 유대 공동체가 있기는 했지만,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동업 조합 사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격리되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이세벨(20-23): 22-23절의 언어는 분명 비유적으로 범죄에 맞는 처벌을 진술하고 있다.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그의 자녀 똑같다. 그녀의 추종자 집단 전체가 종국을 맞게 것이다(IVP 성경주석).

 

두아디라 교회는 그들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 오래 참음으로 칭찬을 받습니다(18절). 또한 그들의 처음보다 나중 행위가 더 훌륭하다고 칭찬받습니다(18절).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도 우상숭배와 음행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칭 예언자 이세벨을 주님은 반드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2-23절).

 

두아디라 교회 사람 중에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에게 주님은 특별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진리를 굳게 잡고 있을 것을 명령하십니다(25절). 그리고 그들에게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26절). 도시의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를 붙잡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님은 아시고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타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주님은 아십니다.

 

——

진보가 있는 교회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에 있어서 점점 진보가 있는 교회였다.

마음도 중요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도 중요하다. 예수님은 일단 두아디라 교회의 행위가 처음보다 낫다고 평가하신다. 

그렇다고 그분이 교인들의 마음을 모르시는 것은 아니다. 

23절에 보니, 예수님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마음을 보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위대로 판단하고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마음과 행위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지를 쉽게 분리하고픈 유혹에 빠진다. 

심리학의 발달은 인간 내면세계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집중한다. 

법과 사회학은 인간의 행동이 실제 미치는 역할에 집중한다. 

사이는 점점 멀어지는 같기도 하고 때로 가까이 붙기도 한다. 

왔다갔다하지만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을 따로보게 되는 경향을 갖는다. 

왜냐면 심리는 개인의 내밀한 것이며 터치할 없는 비밀의 영역이나 행동은 측정과 관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다.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그분은 아신다. 

내가 주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아신다. 

부끄러울 때가 많다. 

 

에베소와의 비교

 

에베소 교회랑 자꾸 비교하게 된다. 

느낌엔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좀더 높은 기대를 가지고 계신 같다. 

에베소 교회가 보여준 행동은 그야말로 진리 수호의 최전선에서 교회와 진리를 지켜내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이라는 모호한 기준, 혹은 상당히 높은 기준의 말로 에베소 교회를 지적하고 계신다. 

그에 비해 두아디라 교회는 진리 수호에 실패하고 있었다. 

이세벨이라는 이단적 교설을 분별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이 여럿 생겼다. 

그녀는 스스로 예언자라고 부르며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간음하게 하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게했다. 

우상의 신전 제의와 유사한 방식을 가르쳤는지 모르겠다. 

이것만 놓고 , 두아디라 교회는 철저히 실패했다. 

복음의 진리가 훼손되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와중에 이세벨의 예언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이들을 축복하기 원했다. 그들이 끝까지 진리에 붙어 있기를 견고하게 있기를 부탁하고 계신다. 

그러니 두아디라 교인들은 기초적인 신앙 지킴만으로도 일단 합격이다. 

에베소 교회는 그것으론 부족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만 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와 기준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마다 성숙의 여정이 다르다. 

복음의 진리가 더욱 분명하게 가르쳐질 필요가 있는 교회가 있다. 

진리 교육보다 실천이 필요한 교회가 있다. 

실천보다 마음과 태도가 훈련되어야 교회가 있다. 

이렇게 교회마다 특징이 있고, 강조점이 변한다. 

 

공동체가 처한 상황이 다르고, 성숙의 지점이 다르다.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교회들의 행위와 그들의 마음을 살피신다. 

그분의 눈에서 벗어날 사람, 교회가 없다. 

 

인내

진리위에 터를 세우고,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넘치는 교회를 주문하고 계신다. 

최소한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바라시는 교회는 진리 수호, 사랑 실천, 그리고 인내다. 

꾸준함, 마음과 실천의 꾸준함 

인내 그리고 인내를 통한 발효 

야고보도 베드로도 인내를 엄청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보니 최근에 읽고 있는 책도 앨러 크라이더의 인내의 발효다. 

인내는 신실함의 다른 이름이다. 

신실함은 오랜 세월 인내의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젊은이들의 피끊은 심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같다. 

변화에 민감한 현대 사회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과연 그런가? 

많은 변화 앞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어찌 보면 인내아닐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코어를 끝까지 지켜낼 있는 인내. 

변화는 외부에서 찾아오건, 스스로 결단하건, 언제나 맞딱뜨리게 된다. 

삶의 여정은 변화의 연속이다. 

아브라함의 여행은 급격한 변화 속으로의 내어던짐이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은 사울이라는 외부의 강력한 공격 때문이었다. 

내부건 외부건 사람은 언제나 급격한 변화 속에 산다. 

그러니 변명할 없다. 

현대 사회가 급격하게 바뀐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의 코어가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없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중심 가치를 지키고 변화 앞에서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발효되어 우리의 독특함이 세상에 향기, 냄새를 뿌릴 때까지 말이다. 

사람들은 발효의 냄새를 싫어하곤 한다. 

그러나 발효된 음식은 몸에 좋다. 오랜간다. 

온갖 미생물들이 적절하게 농익는다. 사람을 살리는 곰팡이요 세균이다. 

 

과연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인내하며 있을까?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

주님, 

인내의 삶을 살게 주세요. 

하나님께서도 오래 참고 있듯이 저도 오래 참고 오래 견디면서 진리를 굳게 붙잡도록 인도 해주세요. 

 

공동체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특징을 잡아내며, 필요하면 적절한 격려와 경고를 통해 건강한 교회, 인내할 있는 교회로 세워가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7 09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법도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의로 내게 힘을 주십시오.

 

8 "서머나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보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11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12 "버가모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보내어라.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13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곳은 사탄의 왕좌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이름을 굳게 붙잡고,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사탄이 살고 있는 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14 그러나 나는 네게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하게 자다.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 따르는 자들이 있다.

16 그러니 회개하여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너에게로 가서,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

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만나를 주겠고, 돌도 주겠다. 돌에는 이름이 적혀 있는데, 돌을 받는 사람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주석
자칭 유대 사람(9절): 해석자들은 대부분 이 절이, 로마 제국에서 유대인의 특권 아래 숨어 황제 제의에 참여할 의무를 회피하려 하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지역 관리에게 고발하던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본다(IVP 성경비평주석).

사탄의 왕좌(13): 주님은 버가모가사단의 위가 있는 임을 인정하신다. 말은 제우스의 제단, 옥좌와 같은 제단을 가리키는 같다. 제단은 버가모를 휩쓸고 있던 우상 숭배의 상징이었다(IVP 성경주석).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고, 비방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9절). 주님은 이들을 향해 박해 가운데서 믿음을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10절).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10절). 또한 모든 인간이 겪는 첫 번째 죽음 이후, 둘째 사망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11절).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황제 숭배와 우상 숭배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우상숭배와 음행을 허용하는 문화를 받아들이라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14, 15절). 하지만 이곳에서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는 믿음을 지켰습니다(13절).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이런 유혹으로부터 돌이켜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16절). 그리고 주님은 감추어 둔 만나를 약속하십니다(17절).

 

——

 

악마와 사탄

 

악마와 사탄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성경 본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신 있다. 

육체의 욕망을 채우라, 세상 권세를 탐하라. 사람들의 인기를 누리라. 

어느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 권력, 명예

이런 것들이 있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도 기세다. 

사단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영혼을 함정에 빠뜨려 자신들에게 귀속시켰다. 함정의 치즈는 , 권력, 명예였다. 

조금이라도 보면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우리의 근본적인 취약점이다. 

본능적 욕망(먹고, 자고, 섹스하고) 위에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혹은 신이 되려는 욕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본능이 해결되고 나면 자연스레 이상의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이겨내셨다. 인간이자 신이신 예수님은 인간에게 가장 약점과 신에게 가장 약점이 지점에서 공격을 받았다. 

사단의 공격이다. 

 

서머나 교인들도 사단의 공격을 받고 있다. 

유대인들이 중심에 있다. 

사단은 하늘 어딘가에 있는 무형의 고스트들이 아니다. 

사단은 인간의 감정과 생각에 깊이 뿌리내려 인간을 통해 조종하고 역사한다. 

서머나 교회를 핍박하는 일부 유대인들은 사단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단의 무리라고 불릴 있었다. 

사실 누군가를 사단의 무리로 지목하는 일은 상당히 조심스럽다. 

때로 서로에게 사단의 무리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 

 

버가모 교인들에게 사단은 일부 유대인들이라기 보다는 황제 숭배 혹은 이방신 숭배의 신전으로 상징된다. 

사단의 왕좌의 영향력은 당시 세속 사회의 주류들에게 엄청났다.

우상 숭배와 음란함은 당시 사단이 사용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사람들의 본능적 욕망을 해소시켜주면서 그들의 영혼을 먹어치우는 사단의 전략이었다. 

니골라당은 여기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버가모 교인들은 에베소 교인들만큼 단단하지는 못했던 같다. 

비진리에 대한 감각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 

 

서머나는 고난에 대한 인내가 필요했다. 

버가모는 사단의 무리와 절연할 있는 분별력이 필요했다. 

둘은 사실 에베소 교회가 왔던 영역이었다. 

서머나와 버가모는 에베소 교회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기독 공동체는 서로 배워야 한다. 

자신들의 약점을 드러내고 약점이 채워지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진리의식이 투철한 공동체가 있고,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공동체가 있으며, 사랑과 배려가 충만한 공동체가 있다. 

솔직히 모든 것은 평균이상으로 감당할 있는 공동체가 있을까? 

 

내부적으로 유대인들처럼 아군이었던 같은데, 치명적인 공격을 펼치는 적군이 있을 있다. 

외부적으로는 이방신들처럼 거대한 세속 사회의 문화적 흐름이 공격하기도 한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예수님을 끝까지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 있다. 

, 우리는 다시 예수님이 어떻게 사탄을 이기셨는지 살펴야 한다. 

말씀으로 사탄의 예봉을 꺾으셨다. 

말씀으로 자신의 욕망을 다스렸다. 

말씀으로 사탄의 공격방식을 폭로했다. 

오늘은 어쩌면 이렇게 싸워야 하는 날일 수도 있겠다. 

 

——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사단을 이기긴 예수님, 

오늘 제가 싸워야 상대가 무엇입니까? 

사단의 어떤 공격에 대비해야 할까요?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본받아 싸움을 싸워가게 하소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7 08 목요일

여는 기도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1 "에베소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2 나는 네가 일과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것도, 알고 있다.

3 너는 참고,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냈으며, 낙심한 적이 없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촛대를 자리에서 옮기겠다.

6 그런데 네게는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

 

 

주석
에베소(1): 에베소는 아시아 최초의 황제 숭배 중심지 곳이었으며, 도미티안은 에베소에 그의 신전의 수호자(Temple Warden)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에베소에는 상당한 수의 유대 인구가 있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원래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실제로 에베소는 시기에 소아시아의 유력한 중심지였다(IVP 성경배경주석).

 

니골라 당(6절): 니골라 당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풀 실마리는 니골라 당을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과 동일시하는 요한계시록 2:14-15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니골라 당’은 그리스식 ‘발람’일 수 있다. 요한은 발람의 교훈을 두 문제로 집약한다. “우상의 제물을 먹음”과 “행음.” 따라서 니골라 당은 그 시대 문화와 타협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킨 무리인 것으로 보인다(IVP 난제주석).

 

교회의 주인이신(1절)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한 일과 그들의 수고와 인내를 알고 계십니다(2-3절). 하지만 이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십니다(4절).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기억하고(remember), 회개하여(repent),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5절). 황제숭배와 경제적 번영의 대명사였던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메시지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1절)에 보내는 메시지이자, 교회들(7절)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혹과 어려움을 이기는 자에게 약속을 주십니다(7절).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우리의 상황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내가 기억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에베소 교회는 유명한 교회였다. 

바울부터 시작해서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고 돌봤던 사역자들의 면면만 봐도 깜짝 놀랄만한 교회다. 

디모데아굴라브리스길라아볼로두기고 등이 사역했으며, 특히 사도 요한의 말년은 이곳에서 보내면서 가르쳤다. 한마디로 역사와 전통이 가득한 당시 최고의 교회였다. 

이들의 자부심을 우리는 충분히 느낄 있다. 

예수님도 그들의 훌륭한 업적을 칭찬하고 있다. 

수고와 인내, 악한 사람들을 치리했던 , 사도라고 사칭하고 다니던 사람들을 분별했던 , 고난을 견디어 냈던 정말 훌륭한 일들을 많이 했다. 

교회가 이정도 했으면 칭찬받고 격려받고 상을 받으면 일이다. 

고난의 시대, 인내의 삶을 살았던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그려진다. 

말씀을 열심히 사모하여 당대 최고의 가르침을 받았던 그들은 진리를 수호하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니골라 당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표명했다. 진리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비판하고 교류하지 않도록 단도리를 했다. 

만약 이런 에베소 교회에 다닌다면, 생각만해도 뿌듯할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들에게 가지를 지적하신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촛대를 자리에서 옮기겠다.

 

칭찬에 비해 나무라는 지점은 추상적으로 보인다. 

처음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 

일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니골라 당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온 것을 보면,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에베소 교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그런데 처음 사랑에 대해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모호한 언급이 불편하다. 

한정없이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언제 무슨 사건 이후로 처음에 가졌던 사랑이 희석되었다고 말씀하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확히 때를 돌아보며 분명한 지점을 이야기할 있었을 것이다. 

처음 사랑 

 

처음 사랑을 버린 일이 회개할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이신 같다. 

사실, 사람이든 공동체든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마음 가짐을 유지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게다가 에베소 교회의 탄생, 바울의 열정적인 가르침과 초대 교회의 기적적인 성립 등을 고려해 , 에베소의 교인들이 가졌을 마음의 흥분과 사랑의 열정을 짐작해 있을 텐데, 열정적 사랑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몇십년에 걸쳐 그렇게 있는가? 갑자기 의문이 든다. 

 

처음 사랑과 처음의 하려던 일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도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처음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었다. 

처음 사랑은 교회의 처음 목표, 목적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무슨 프로젝트를 하려고 했던 같다. 

그게 무엇일까? 

 

처음 사랑이 혹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인가? 아님 성도들에 대한 사랑인가? 

이것도 물어 보게 된다. 

그동안 처음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만 해석해 왔다. 

그런데 처음 사랑이 처음 하려던 일과 관련이 있다면 혹시 성도간의 사랑의 독특한 행동, 다른 교회들에게 보내려는 구체 헌금 등등 뭔가 형제 사랑의 구체적인 부분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이 든다. 

 

예수님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지적하고 계신다. 

일반적으로 처음 사랑이 약해졌다거나 변했다거나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면 이건 왠지 상당히 과장되었거나 일단의 프로젝트를 포기했다는 말로 들린다. 

 

점점 미궁으로 빠져든다.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처음 사랑은 무엇일까? 

그토록 처음 사랑을 강조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실까?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실 정도까지인가?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만은 아닌 것으로 비췬다. 

구체적인 행동의 결여나 포기, 혹은 아예 상반되는 행동이나 정책 등이 포함되는 것은 아닌가? 

그동안 에베소 교회는 너무나 사역을 감당해왔다. 

진리 수호의 최전선에서 모진 고난을 견뎌왔다. 

그렇다면 진리 수호에 앞장서다가 서로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잃어버리는 일부 극단적 보수주의 교회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이단 판별사로 살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나 사랑에 대해서는 점점 강조하지 않는 형국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판단하는 데는 능하나, 형제 자매로 사랑하고 용납하고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일에는 서툴거나 후순위로 밀리거나 아예 신경을 안쓰는 형국 

이런 경우가 발생했을까? 

 

사도 요한은 요한 서신서에서 사랑을 그토록 강조했다. 

에베소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습이 더욱 철저하게 녹아 있어야 했다.

정확히는 없다. 

그러기에 더욱 나와 공동체를 돌아보게 된다. 

구체성이 결여 되었기에 답답하기는 하지만…. 

혹여 오늘 주님께서 나의 답답함을 해소시켜 주시길 기도한다. 

 

——

주님, 처음 사랑을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간직하게 주세요. 

이웃 사랑에 대한 열정도 다시 새롭게 불태워주세요. 

비판과 판단 보다 하나님 사랑의 열정이 더욱 크게 작동하는 공동체가 되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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