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7 21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1 뒤에 나는, 천사 넷이 땅의 모퉁이에 서서 땅의 바람을 붙잡아서, 땅이나 바다나 모든 나무에 바람이 불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2 그리고 나는, 다른 천사 하나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장을 가지고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땅과 바다를 해하는 권세를 받은 천사에게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아라.”

4 내가 들은 바로는 도장이 찍힌 사람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마에 도장을 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5 도장이 찍힌 사람은, 유다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르우벤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6 아셀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납달리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므낫세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7 시므온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레위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잇사갈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8 스불론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요셉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베냐민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었습니다.

 

 

주석

4: 144,000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상징하는 셈이다. 본문도 말하지만, 그들은우리 하나님의 종들이다.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십중팔구 에스겔 9장의 묘사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포함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에는 인류의 모든 지파가 포함될 것이다. 12x12x1000 숫자의 완전성을 강조한다. 인류 전체에서 나온 하나님의 모든 종이 인침을 받는다(IVP 난제주석).

 

6개의 봉인이 떼어지고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땅과 바다를 해하는 권세를 받은 천사(2) 심판을 지연시키고 있습니다(1). 그것은 하나님의 도장을 가진 천사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마에 도장을 찍는 일을 마칠 때까지 지연될 것입니다(3).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도장을 찍는 환상은 유월절 사건( 12) 에스겔의 환상( 9:1-6)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호 받습니다. 비록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고통 받을 있지만(6:9 참조),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모두 아시고 보호하십니다.

 

——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묵상을 하려니 더욱 어렵다. 

 

그래도 확실한 것이 있다. 

5 이하의 이스라엘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씩 도장을 받는다는 말이 단순히 혈통상의 이스라엘 족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요한은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 사람이다. 

에베소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될 것이라고 믿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확실히 본문은 상징적인 본문이다. 

144,000명은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 나라 백성에 들어갈 사람들의 숫자의 상징이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을 것이다. 

 

혹시 말세의 때로 국한시켜서, 마지막 심판이 이르기 전에 현실 지구에 살면서 구원받는 백성의 수라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도 상징적인 숫자다. 모든 지파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어찌 모두 12000명으로 일치할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을 보호하신다. 

그들이 끝까지 그들의 믿음을 지킬 있도록 돌보시다. 

이집트의 압제 속에서도 구출해주셨던 것처럼,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통치로부터도 구원해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사단의 최악의 발악으로부터, 최후심판의 엄중함으로부터 구원해주신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그분이 도장으로 인치신 백성들이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다. 

육체적 피곤함과 곤고함 속에서도 우리의 몸과 영혼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다. 

사실을 기억하고 다시 성령님이 더욱 크게 역사하시도록, 

그분이 정서와 몸과 의지를 주관하시도록 내어 맡기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묵상의 집중력도 흩어진다. 

그럴 때라도 주님께 기도한다. 

피곤함 속에서도 주님의 임재를 기다린다. 

그분 안에서 몸과 마음의 회복을 기다린다. 

나를 보호하시는 그분을 기다린다. 

 

——

심판의 엄중함 속에서도 저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임재를 갈망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하루를 살아갈 몸과 마음의 힘을 공급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은혜를 추구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7 17 토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종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시오.

 

1 나는 어린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물 가운데 하나가 우레 같은 소리로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 그리고 내가 보니, 마리가 있는데, 위에 사람은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그는 이기면서 나아가고, 이기려고 나아갔습니다.

3 어린 둘째 봉인을 때에, 나는 둘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4 때에 불빛과 같은 다른 마리가 뛰어나오는데, 위에 사람은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없애는 권세를 받아서 가졌습니다. 칼을 받아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5 어린 셋째 봉인을 때에, 나는 셋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니, 검은 마리가 있는데, 위에 사람은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6 그리고 생물 가운데서 나오는 듯한 음성이 들려 왔는데 " 되도 하루 품삯이요, 보리 되도 하루 품삯이다.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에는 해를 끼치지 말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7 어린 넷째 봉인을 때에, 나는 넷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8 그리고 내가 보니, 청황색 마리가 있는데, 위에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과 기근과 죽음과 들짐승으로써 사분의 일에 이르는 땅의 주민들을 멸하는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석
마리의 (2-8): 기사(말에 자들) 명백한 유사성에 비추어 , 기사 모두 심판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번째 기사( ) 침략하는 군대를 표상하고 번째 기사(붉은 ) 나라들 사이의 적대와 내전까지도 포함해서 분쟁이라는 일반적인 혼란을 표상하고 있다고 말할 있다. ‘검은 기사는 기근을 가리킨다. 번째 기사(청황색 ) 이름은사망이다. 그러나 특별한 종류의 죽음, 말하자면 역병을 표현한 같다(IVP 성경주석).

 

어린양이 두루마리의 일곱 봉인을 떼기 시작합니다(1절). 그리고 첫 네 봉인을 뗄 때, 네 마리의 말(흰색, 붉은색, 검은색, 청황색)이 등장합니다. 이 네 마리 말의 환상은 스가랴서1:8-11; 6:1-8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에 등장하는 네 마리의 말과 거기에 탄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회복 사역의 시작점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크게 3종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일곱 봉인(6:1-17; 8:1), 일곱 나팔(8:7-9:21; 11:14-19), 일곱 대접(16:1-21)입니다. 우리에게 ‘심판’이라는 단어는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 이전에, 반드시 악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신 주님은, 이 땅 가운데 일어날 심판에 대해 요한에게 보이십니다.

 

——

 

일곱 교회의 인내를 주님께서 아신다. 

숱한 핍박과 박해와 심지어는 살해 앞에서 그들은 신앙을 지켰다. 

매번 고통받을 때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외치며 기도했다.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노력을 기울였다. 

참고 견디며 인내하는 삶을 걸어갔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오랜 시간 사단의 무리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일부 유대인들과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로부터 핍박과 박해를 받았다. 

 

이제 고난받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식이 들린다. 

애굽 땅에 재앙이 내렸듯이 박해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내린다. 

전쟁과 내전, 기근과 전염병의 재앙이 전지구적으로 진행된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멸시하며 성령님을 훼방한 사람들은 재앙에서 벗어날 없다. 

 

어린 양이 역사를 진척시키고 있다. 

어린 양이 재앙을 허락하고 있다. 

죽임 당한신 어린 양이 봉인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나간다. 

가장 약하고 여리고 살해당한 것처럼 비참해 보이는 어린 양이 우주의 역사를 하나하나 앞으로 진척시키고 있다. 

우주의 주인은 바로 어린양이다. 

 

요한계시록 해석은 여전히 어렵다. 

환상과 계시를 억지로 현실 역사에 꿰어맞추려고 하면 오류가 생긴다. 

환상은 상징과 비유 덩어리다. 

그러나 개연성이 없는 상징이 아니다. 

역사적 개연성을 갖고 있는 상징이며 비유다. 

그러기에 숱한 역사 현실 가운데 재현될 수도 있으며, 아님 아직 위의 상징이 예견하는 절체절명의 종말론적 현실이 도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재앙의 때를 역사 속에 특정해서 연표를 만드는 작업은 상당히 비효율적이며 자칫 위험하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역사의 주인되신 예수님은 악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셨으며, 이제 악의 잔당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사랑으로 죽음을 이기셨다. 그리고 악에 대한 미움으로 심판을 단행하신다. 

심판의 때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고통받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확고한 닻이 되어 주신다. 

심판은 있으며, 재앙도 있다. 

악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거짓을 말할 없다. 만천하에 그들의 행실이 드러날 것이다. 

 

재앙은 우주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 과정이다. 

현실 정치의 주도권이 넘어간다. 

오랫동안 악을 교묘하게 자행해오던 기득권들은 전지구적 재앙앞에서 자신들의 주도권을 잃고 새로운 세대의 신흥 권력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때가 것이다. 

바로 어린 양에 의해서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재앙이라고 하면, 지금 코로나만큼 연결짓기 쉬운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기후 위기 등은 진지구적 재앙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위기가 요한계시록의 인의 재앙인지, 나팔의 재앙인지, 대접의 재앙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도리어 하지 말아야 일이다.

 

다만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끝까지 따르겠다. 

그분을 신뢰하겠다. 

죽음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겠다. 

여전히 인내할 일이 많다. 

여전히 참고 견뎌야 일이 많다.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 

 

다시 다짐하는 토요일 아침이다. 

날이 정말 덥다. 

전국의 사역자들이 주님을 더욱 신뢰하기를 위해 기도한다. 

 

——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주님, 

환상과 계시를 통해 당신이 왕이심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는 정치가들이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의 발견이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아닙니다. 

근원적 힘은 역사의 처음으로 끝이 되시는 당신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 

당신의 말씀으로 세상이 존재합니다. 

당신이 우주의 비밀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만이 선악을 분별하고 행위대로 갚아 주실 있으십니다. 

주님, 당신의 존재를 더욱 믿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수록 우주는 미스터리로 가득합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없는 원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당신의 존재를 더욱 믿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신 우리 주님을 더욱 신뢰합니다. 

신비로운 일들이 오늘 저에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더욱 실감나게 일어나도록 도와주세요. 

코로나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기후 위기로 자연 만물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 더욱 적극적으로 세상에 개입해 주십시오. 

우주를 구원해 주세요. 

 

사역자들이 절망에 늪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사역의 열매로 스스로의 부르심을 재단하지 않게 주세요. 

하나님의 사랑의 횃불이 내면에서 활활 타오르는지 점검하게 해주세요. 

횃불이 여전하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주님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7 16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법도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의로 내게 힘을 주십시오.

 

1 나는 ,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고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2 내가 보니, 힘센 천사가 소리로 "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외쳤습니다.

3 그러나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있는 이는, 하늘에도 없고 위에도 없고 아래에도 없었습니다.

4 두루마리를 펴거나 자격이 있는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일곱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6 나는 보좌와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일곱과 일곱이 있었는데, 눈들은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7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8 그가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대접을 가지고 어린 앞에 엎드렸습니다. 향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9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10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다스릴 입니다."

11 나는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은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13 나는 하늘과 위와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14 그러자 생물은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주석
7: 요한계시록은일곱으로 가득하지만, 로마의 유언장이 보통 일곱 개의 봉인으로 쳐졌다는 사실은 중요할 것이다. 법적 서류의 봉인은 어느 누구도 서류를 개봉하거나 함부로 고치지 않았음을 보증했다. 유언장은 작성한 사람의 죽음이 입증될 때까지는 개봉할 없었다. 여기서 유언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을 열기에 합당한 분은 죽임당한 어린양이라는 것이 중요하다(IVP 성경배경주석).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손에 봉인된 두루마리가 있습니다(1절). 하지만 그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3절). 그래서 요한은 큰 소리로 웁니다(4절). 하지만 곧 그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분이 나타납니다. 그분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입니다(6-8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울고 있는 요한의 마음을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그 요한의 눈물을 그치게 하시는 어린 양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께서 자신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들을 위해 값을 치루시고, 그들을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 시키셨습니다(9절). 이 어린 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라가 되고 제사장이 되었습니다(10절). 어린 양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

하늘 노래의 가사는 두고두고 되새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9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10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다스릴 입니다."

 

어린 양이 봉인을 해제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봉인을 해제할 없다. 

우주의 비밀, 역사의 비밀, 미래의 비밀을 해제할 없다. 

오직 어린 , 죽임을 당하신 어린 만이 일을 있다. 

처음 유다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말을 들었을 때는, 엄청난 인물이 나오는 알았다. 

다윗은 당시에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린 영웅이었다. 

이스라엘을 고대 세계에서 구원해 민족의 구원자였다. 

용사요 장수요 왕이었다. 

유다의 사자와 다윗의 뿌리인 영웅이 나와서 영광스런 보좌의 봉인을 해제한다고 한다. 

말만 놓고 보면, 위대한 왕의 대관식 같은 느낌이다. 백성이 모여 있다. 그들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런데 어린 양이 나온다. 

그것도 죽임을 당했던 어린 양이다. 

보잘 없어 보이는 어린 . 죽임을 당해 보이는 듯한 비참한 느낌의 어린 양인데, 게다가 일곱 개의 뿔과 일곱 개의 눈이 있었다. 

뭔가 괴기스럽기도 하고, 맞지 않는 같고, 심히 역설적이다.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일곱 개의 뿔과 눈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다. 

역설적 존재, 예수님은 모두에게 충격이다. 

일단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 충격이다. 

우주의 왕이 죽임을 당했었다. 

자발적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주의 운명과 미래를 이끌고 일곱 개의 뿔과 눈을 가지신 권능의 주인이시다. 

역설적 존재인 예수님을 천하 만물이 지켜 보고 있다. 

역설이 우주를 구원한다. 

왕으로만 계신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만 계신 분이 아니다. 

죽음과 생명이 동시에 존재하며 역설이 그를 통해 통합된다. 

 

그분만이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다. 

그분이 하신 일은 분명하다.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을 사서 하나님께로 드리셨다. 

인류를 구원하셨다. 

원래의 주인에게도 되돌려 놓으셨다. 

사단의 노예로 죽음의 노예로 결국 죽음을 향해 가던 인류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다.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구원한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원리에 순종하는 나라가 되게 하셨다. 전세계와 하나님을 이어주는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땅을 다스리게 하셨다. 

이건 가히 혁명적이다. 

노예로부터 구원해서 자유민이 되게 하는 것을 넘어서는 조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된다. 

평범한 일반 시민으로 살아도 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계획은 조금 다르다. 

노예가 왕이 된다. 

어린 양이 우주의 주인이 된다. 

역설이 곳곳에 일어난다. 

노예였던 존재들이 일어나 전세계를 다스린다. 

하나님의 통치 질서로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 

일곱개의 뿔과 눈이 달린 어린 양을 따라 그들도 세계의 통치자로 등극한다. 

낮아지심의 본을 쫓아, 죽음과 생명의 통합을 따라, 그들을 우주의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생명의 기운으로 심는다. 

섬김의 리더십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그렇게 성도들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12절은 역설적 찬양을 분명히 보여준다. 

 

12 그들은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온갖 수식어의 찬양이 합당하다. 

적군을 죽인 무시무시한 영웅, 사자와도 같은 용맹과 전투력을 가진 장수에게 붙는 찬양이 아니다. 

오히려 적에게 목숨을 내놓았다. 순순히 사형의 틀을 받아들였다. 살해를 당하셨다. 그것도 아주 부끄러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죽음이 오히려 그에게 가장 영광이 되었다. 

요한이 보았던 찬양이 결국 영원한 찬양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는 칭호를 들으셔야 한다. 

왕이신 예수님은 죽임 당한 어린 양으로 영원히 살아가신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고 우주를 원래대로 회복하는 결정적 우주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모든 불확정의 질서가 그분의 죽음으로 새롭게 확정되었다. 

바로 인류와 우주를 구원하기로 하신 것이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주의 빛이 되어, 모든 원소들의 자리를 잡아 주었다. 

 

어린 양으로 불림받으며 영원히 이름으로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과연 어떻게 들릴까 상상해 본다. 

예수님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기뻐하실까? 

나로서는 약간 부끄러울 같다. 

아슬란이라고 불리고 싶을 같다. 

위대한 사자로 불리고 싶을 같다. 

어떤 순간에는 어린 양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영원히 이름으로 불린다면 그건 조금 아니다 싶다. 

 

역설을 때로 하나님이 원하실 때가 있다고 느낀다. 

강함과 약함이 공존하는 인품.

하나님으로 인해 가장 강력한 자아상을 유지함과 동시에 인간의 가장 연약함을 인정하는 태도.. 

대리통치자의 권세와 권능을 유지함과 동시에, 여전히 취약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 

지금 현실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가지를 동시에 원하신다는 생각이다. 

겸손함과 자신감. 

자기 부인과 자기 확신.

돌아봄과 나아감. 

연약함과 강력함. 

가지 모순되고 역설적인 태도를 동시에 갖추길 원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특성을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고 동시에 유지할 있을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우기는 정신승리 아닐까? 

깊은 심리적, 철학적 논의에 빠지고 싶지 않다. 

오늘 본문이 주는 힌트는 이것이다. 

보좌에 계신 어린 양을 영원히 찬양하는 .. 

그분을 칭송하는 . 역설적 상황에 계신 분을 노래하는  

그것이 본문이 주는 해답이다. 

개인으로는 역설과 모순을 통합해 없다. 

그러나 역설의 주님을 계속 높이고 찬양하다보면, 칭송하다보면, 새로운 성품이 장착될 것인데, 바로 역설적 성품이다. 

약함 속에 강함이 드러나고, 자기 부인 속에 자기 긍적과 확신이 표현되고, 겸손함과 온유함 속에 자부심과 자신감이 뿜뿜이다. 자신을 약함을 인정하는 것과 그럼에도 극강의 확신을 표현하는 일이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충돌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의 통치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역설의 주님을 찬양하면서 역설적 통치자가 되어 간다. 

섬김이 가장 권위가 됨을 몸으로 드러내는 통치자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어린 예수님을 찬양한다. 

죽임 당하신 유다의 사자, 어린 예수님을 높인다. 

그분만이 나의 구원자시요. 왕이심을 

영원히 찬양 받으실 분이심을 

 

——

역설과 모순의 주님, 

그래서 주님을 충격을 받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분의 이름이 어린 양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성품을 배우고 싶습니다. 

주님, 약함 속에 강함을, 겸손함 가운데 확신을, 자기 부인 가운데 자기 긍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통합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을 닯기 원합니다. 

찬양 속에서 주님을 더욱 떠올리기 원합니다. 

오늘도 저의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주님으로 인해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고, 마음의 크기가 커지고, 사랑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도록 도와주세요. 

저의 생각에 갇히지 않고 주님의 생각으로 통합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7 14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15 나는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옷을 사서 입고,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20 보아라, 내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22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석
라오디게아(14): 라오디게아는 리쿠스(Lycus)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개의 제국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풍부한 상업 행정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도시에 대해 로마 세계 전역에 알려져 있던 가지 점이 편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우선 도시는 은행업무의 중심지였다. 다음으로 도시는 의복과 양탄자를 생산했다. 그리고 곳은 의학을 공부하는 학교가 있었으며 약품을 생산했다. 특히 지역 돌을 분쇄하여 만든 안약은 유명했다(IVP 성경주석).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한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15-16절). 그들은 풍족한 삶을 누리고 살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17절). 이런 그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부유함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18절).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열정을 내고, 회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19절). 왜냐하면 주님이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20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문을 열 때,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함께 먹으며 진정한 교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 풍성하고 친밀한 교제로 예수님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

 

재정적으로 풍족하다. 

사회기반 시설이 갖추어져있다. 

사고 싶은 것은 맘대로 있다. 

누릴 있는 것들이 즐비하다. 

이마트도 있고, 각종 놀이 공원도 많다. 

주말마다 놀러갈 있는 환경이다. 

선물로 살만한 물건들이 널렸다. 라오디게아 도시에서 생산되는 뿐만 아니라 로마 통치 전역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에 사람들의 눈의 휘둥그레진다. 

교회도 비교적 다른 교회들보다 여유롭다. 

사람들이 돈이 많아서 그런지 관대하다.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는 같다. 

돈이 풍족하니 마음도 여유로운 같다. 

물론 경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상업의 중심지, 교역의 중심지로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정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물건, 좋은 상품을 찾는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인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야 이문이 많이 남는다. 

 

자연스레 물질적 풍요는 영적 정신적 나태함을 낳는다. 

처음 라오디게아 교회가 세워졌을 때에는 예수님 삶의 신비로움과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세상의 좋아보이는 물건과 상품들이 유입된다. 

눈에 보이는 표피적 즐거움에 많이 노출된다. 

상품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기이한 물건과 함께 이야기가 같이 들어온다. 이야기와 함께 문화가 들어온다. 

그렇게 풍족함이 만드는 안이함과 세속적 유혹에 계속 노출되다 보면 자연스레 복음에 대한 열정은 식기 마련이다.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더이상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매주 모일 자랑하는 신기한 물건과 재미진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교회에 안나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즐겁고 흥미롭고 매력적인 것들이 넘쳐난다. 

풍족함이 주는 여유와 즐거움이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의 자리를 차지한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영적 상태 

특별한 고난도 없고, 도전적인 목표도 상실했다. 

점점 교회의 모임은 사교 모임화되고 복음의 열정은 모임이후의 식사 교제로 대체된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현실을 알고 계시다. 

그분은 인류 보편적 정서를 누구보다도 알고 계시는 영원부터 계신 분이시다.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14절)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처음에는 돈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어느 순간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돈이 목적이 되고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순간, 수많은 악이 뻗어 나온다. 

한국의 전임 대통령의 죄악이 거기로부터 비롯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을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풍족하기에 다른 가난한 교회에 헌금도 많이 했을 것이다. 

누가 보면 매우 거룩한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계신다. 

 

그들은 진정한 금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벌거벗고 있다. 

그들의 눈은 심히 어두워져 있거나 만화경 속에 갇혀 있어서 진리를 없게 되었다. 

 

17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영적 비참함을 깨닫는 것은 일상적 예배 행위로는 불가능하다. 

영적 가난함을 깨닫는 것은 강력한 폭로로 가능하다. 사랑의 경고, 사랑의 들춤으로 가능하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예수님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진정한 부를 쌓기 위해서는 불에 정련된 , 불같은 고난을 인내로 통과한 금을 사야한다. 

시중에 돌고 있고, 은행가면 있는 그런 금이 아니다. 

비트코인이나 국가채권, 주식으로 있는 금이 아니다. 

불로 연단된, 다져진, 정련되어 깨끗한, 영적으로 순수한 금을 사야 한다. 

고상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면 고난이 찾아온다. 

하나님 나라의 이상적 목표를 움직이기 시작하면 핍박이 다가온다. 

고난과 핍박을 인내하고 속에 거하다보면 어느새 신앙이 정련된다. 

죽음 앞에서도 끄떡없는 신앙이 된다.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게 된다. 

사울의 무차별적 추적에도 절망하지 않는 다윗의 신뢰를 갖게 된다. 

 

둘째, 쾌락으로 훌러덩 벗겨진 적나라한 자신들의 실체를 거룩한 옷으로 가려야 한다.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수치스런 존재가 되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 우선이겠다.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한다. 

세속적 쾌락에 더이상 기웃거리지 말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으로 생각과 행실을 재조정해야 한다.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옷을 입자.

 

셋째, 예수님의 침으로 만든 거룩한 안약을 눈에 발라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와야 한다. 

영적으로 점점 무지해진다. 

분별이 어렵다. 

무엇이 참된지 거짓인지, 바람직한 것인지 버려야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좋은 상품, 신기한 상품에 눈이 휘둥그레지지만 영적인 실제를 보는 안목은 점점 줄어든다. 

사단의 교묘한 술책과 계략을 눈치채지 못한다. 

즐거움이 눈에 얇은 막을 씌우고 눈은 점점 멀어간다.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의 가르침이 주는 분별력을 얻어야 한다.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바람직하고 실제적인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눈이 더욱 밝아져야 한다.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책망은 싫다. 징계는 더욱 싫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요즘 시대의 정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책망과 징계를 하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위로하고 격려하고 끝까지 참고 수용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 아니냐고 도리어 분노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내내 예수님은 책망하고 있고, 징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계신다. 

그래서 요한게시록을 읽기 싫어진다. 

복음서가 좋다. 

로마서 8장까지가 좋다. 

무조건적인 용납이 좋다. 

책망하시는 예수님, 징계를 언급하시는 예수님은 싫다. 

이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이며 나도 그와 같다. 

 

하지만, 영적 훈계, 책망, 때로는 징계는 현실이며 또한 바람직하다.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된다. 

때로는 엄하게 훈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진전이 없다. 

끝까지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아이들을 무조건 받아 줄수만은 없다. 

밥은 먹어야 하며, 잠을 자야 한다. 

적절하게 유툽을 시청해야 하며, 건널목에서는 뛰면 안된다. 

혜강이의 안전과 성장을 위해 어쩔 없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망과 징계를 한다는 말은 실제이기도 하고 지극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분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징계에 대해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판사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 판사의 훈계와 징계에 무조건적으로 반발하면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물며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판단에 너무 많은 토를 달아서는 결국 나만 손해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 이러쿵 저러쿵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라고 계속 말씀하시는 것이다. 

산상수훈으로 돌아가라. 평지 설교로 돌아가라.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5개의 설교에 집중하라.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야기와 비유에서 교훈을 찾고 예수님의 성품을 그리고, 나아가 그분의 홀로그램을 완성하라. 

그분의 홀로그램 속으로 나와 세상과 공동체를 투영하라. 

그분의 생각으로 필터를 만들어 수많은 메시지를 걸러라.   

구약의 메시지를 걸러라. 영화, 드라마, 노래들의 메시지를 걸러라. 

필터를 항상 띄워두라. 

 

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그동안 문장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촉구할 사용했었다. 

그러나 윗문장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상당히 엄하고 가르침과 권면이 많은 예수님이시다. 

생각없이 문을 열었다가 밑천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분은 사랑하기 때문에 문을 두드린다. 

사랑하기 때문에 들어와서 함께 식사하길 원하신다. 

물론 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뭔가 권면하실 같긴 하지만, 

그렇게 두렵지는 않다. 

하라면 하지 , 히는 생각이 든다. 

그분은 사랑하시는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냥 분명하게 하라고 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이리저리 고려하거나 재지 말고 머리굴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고 싶다. 

그분의 가르침이 분명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면 일이다. 

 

예수님과 밥을 같이 먹고 싶다. 

부활 갈릴리에서 아침을 차려 주신 예수님을 기억한다. 

그분이 차려주신 아침 식사를 신앙의 동료들과 함께 먹고 싶다. 

그렇게 조용한 아침식사를.. 

그렇게 충만함 아침식사를.. 

아침 식사 이후에 베드로에게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듯이. 

그렇게 책망하신다면, 책망받을 용의가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책망을 다시 한번 기대한다. 

 

나이 50 가까워지면서,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삶을 살고 있다. 

나도 벌고 아내도 번다. 

혹여 풍족함이 나의 신앙을 차갑지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로 이끌지는 않는지 돌아본다. 

주님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한다.   

정련된 , , 그리고 안약 

 

——

풍족함 때문에, 수많은 즐거움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소명의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 

저에게 아침밥을 차려 주세요. 

주님과 밥을 먹고 싶습니다. 

밥과 함께 권면과 책망의 말씀을 주신다면 저는 오케이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정련된 금처럼 단련되게 해주세요. 

거룩한 흰옷을 입고, 더욱 맑은 눈으로 살아가게 해주세요. 

 

안에 있는 불만족을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컨트롤 되지 않는 상황과 

부담스런 일들의 연속 앞에서 

주님의 아침밥을 기다립니다. 

주님, 주님으로부터 오는 만족을 누릴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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