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20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24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보고 무서워하며, 모두 그 사람 앞에서 달아났다.25 “저기 올라온 저 자를 좀 보게.” 군인들이 서로 말하였다. “또 올라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어. 임금님은, 누구든지 저 자를 죽이면 많은 상을 내리실 뿐 아니라, 임금님의 사위로 삼으시고, 그의 집안에는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시겠다고 하셨네.”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받는 치욕을 씻어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준다구요?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입니까?”27 군인들은 앞에서 말한 내용과 같이, 저 자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한 상이 내릴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28 다윗이 군인들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맏형 엘리압이 듣고, 다윗에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너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도 안 되는 양은 누구에게 떠맡겨 놓았느냐? 이 건방지고 고집 센 녀석아, 네가 전쟁 구경을 하려고 내려온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29 다윗이 대들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다는 겁니까? 물어 보지도 못합니까?”30 그런 다음에 다윗은, 몸을 돌려 형 옆에서 떠나 다른 사람 앞으로 가서, 똑같은 말로 또 물어 보았다. 거기에서도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하였다.

31 다윗이 한 말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누군가가 그것을 사울에게 알렸다. 그러자 사울이 그를 데려오게 하였다.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저 자 때문에 사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습니다.”33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그만두어라. 네가 어떻게 저 자와 싸운단 말이냐? 저 자는 평생 군대에서 뼈가 굵은 자이지만, 너는 아직 어린 소년이 아니냐?”34 그러나 다윗은 굽히지 않고 사울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의 종인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35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 놈을 쳐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 내곤 하였습니다. 그 짐승이 저에게 덤벼들면, 그 턱수염을 붙잡고 때려 죽였습니다.36 제가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으니, 저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도 그 꼴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자를 어찌 그대로 두겠습니까?”37 다윗은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님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울이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렇다면, 나가도 좋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길 바란다.”

1. 맏형의 꾸짖음

맏형인 엘리압으로서는 막내 동생 다윗의 행동이 맘에 안 들었을 것이다. 
이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인 전쟁터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곳이며, 게다가 지금은 골리앗 때문에 그 죽음이 더욱 가까운 곳이다. 
8명의 아들 중 이곳에 3명이 와 있으니, 그것도 참 난감하다. 
셋 다 목숨을 잃을 경우 이새의 집은 너무도 큰 슬픔에 잠길 수 밖에 없다. 
엘리압은 나머지 동생들이라도 집을 잘 지켜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막내 동생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전장터로 왔다는 사실에는 그나마 마음이 놓였을지는 모르나, 다윗이 그렇게 군인들에게 전황을 묻고 현 전투 상황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마뜩치 않았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다윗은 형들이 보는 앞에서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었다. 
엘리압의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더욱 화가 났다. 
아직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왕의 기름부음을 받고, 전쟁터에 나와서 마치 자신이 영웅인 것처럼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있었던 거다. 

형 엘리압이 이해가 된다. 
형으로서 가족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동생의 무모하고 교만한 행동을 볼 때, 그를 꾸짖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다윗이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리저리 군인들에게 가서 전황을 묻고 자기 나름의 판단으로 비판하는 다윗을 그저 가만히 둘 수만은 없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전장터는 너무 위험한 곳이다. 
만약 지금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나의 가족들을 현존하는 위험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2. 사울의 만류

다윗의 언행이 왕에게까지 미쳤다. 
그리고 사울이 다윗을 불렀다. 
아마 엘리압은 이런 상황이 두려웠을 것이다. 
말이 많으면 결국 그 말에 책임을 지기 마련이다. 
다윗은 사울 왕을 보자마자 대뜸 군의 사기에 대해 말한다. 
골리앗 때문에 군의 사기가 바닥이었다. 
거기까지도 당찬데, 그 이상의 말을 해 버린다. 
자신이 나가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3미터에 가까운 거구의 숙련된 싸움꾼, 골리앗과 한 판 뜨겠다는 것이다. 
다윗이 평균키였다면, 150~180cm 사이지 않았을까! 
3미터에 가까운 골리앗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다윗은 실제 전투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사울은 말렸다. 
그러나 다윗은 그동안 야생 맹수로부터 양을 지켰던 경험을 말하며 자신이 사우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형 엘리압이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했었다. 
“이 건방지고 고집 센 녀석아”(28절)
다윗은 한 고집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모욕당하는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군대가 사기가 꺾여 곧 죽을 것처럼 앉아 있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굳센 믿음이 있었다. 
37 다윗은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님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사울은 극구 말렸으나 다윗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싸우겠다는 걸 끝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골리앗과 대적해야 했다. 
아님 사울 자신이 나가야 할 판이다. 

사울 마음에는 다른 생각들도 있었을 것이다. 
혹시 어린 소년이 출전하여 골리앗에게 끔찍하게 살육을 당하면, 다른 군사들이 크게 분노하게 될 것이며, 그 분노가 도리어 사기를 끌어 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다윗이 워낙에 강한 확신을 가지고 단언하니, 사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를 출전시켰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절대로 출전시키지 말아야했다. 
다윗은 아직 소년이요 전쟁터에 나가본 적이 없었으니, 그의 말을 듣는 것조차 왕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3. 다윗의 믿음

다윗의 행동은 참으로 무모했지만, 그의 고백만큼은 대단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하나님이 자신을 온갖 맹수로부터 지켜주신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종종 구원해주셨다.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구출해주셨다. 
사자의 발톱, 곰의 발톱에서 살려 주셨다. 
다윗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골리앗과의 전투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살려주실 것에 대해 믿었다. 
사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와 미래에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은 100% 진실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변하기 마련이다. 
다윗은 순진한 믿음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무모한 고백과 믿음을 사용하셨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 
사울을 비롯해 그동안 이스라엘 군대에 내로라하는 장수들이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사용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를 왕으로 세우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다. 

믿음이 먼저냐, 선택이 먼저냐? 
다윗의 경우엔 하나님의 선택이 먼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따지고보면, 아브라함, 야곱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선택이 앞선다.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나 선택보다 앞선다. 
하나님이 당신의 의지에 따라 역사를 이끌고 계신다. 
구원의 역사를 그리고 완성의 역사를…

4. 대한민국의 역사

스웨덴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지난 2년간 독재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187360.html
어쩌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퇴보하였는가? 
윤석열 정권의 통치기간 동안 한국은 후퇴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실 계획이신가? 
하나님의 선택과 그분의 의지가 궁금하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도 필요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이끄심과 주도하심이 절실하다. 

다윗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나오길 소망한다.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평화, 생명과 회복, 환대와 돌봄, 공평과 정의가 가득한 세상이 오면 좋겠다. 
폭력, 거짓, 우상 숭배, 탐욕, 물질숭배의 사탄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기를!!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장터로 나아가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오늘의 기도]

당신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어주셔서 이스라엘의 위기 상황을 돌파하도록 이끄신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윤석열과 그의 일단은 온갖 우상을 국가 공적 정책에 적용하고, 북한과의 전쟁을 불사하고, 살해와 폭력을 조장하는 자들이 정권을 잡았었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엄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의 계획과 행적을 파면 팔수록 가관입니다. 
군대는 3천개의 영현백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노상원의 수첩에는 수거해서 처리해야 할 사람들로 빼곡합니다. 
http://newstapa.org/article/jNZ1x
이런 자들은 옹호하는 목사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절대 불변의 절대 가치를 가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절대 가치를 지닙니다. 
교회가 찬양받을 일이 아니고 삼위 하나님이 찬양받으셔야 합니다. 
교회를 참칭하여 폭력을 조장하고 살인자를 옹호하는 자들을 벌하여 주소서. 
이 나라를 회복시켜주시고 주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불완전한 모델로 삼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3월 18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 블레셋 사람들이 또 전쟁을 일으키려고 군인을 모두 모아, 유다의 소고에 집결시키고, 소고와 아세가 사이에 있는 에베스담밈에 진을 쳤다.2 사울도 이스라엘 군인들을 집결시켜 엘라 평지에 진을 친 뒤에, 블레셋 군인들과 맞서서 싸울 전열을 갖추었다.3 그리하여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쪽 저쪽 산 위에서 맞서서 버티고 있었다.

 

4 블레셋 진에서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싸움을 걸려고 나섰다. 그는 키가 여섯 규빗 하고도 한 뼘이나 더 되었다.5 머리에는 놋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는 놋 오천 세겔이나 되었다.6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차고, 어깨에는 놋으로 만든 창을 메고 있었다.7 그의 창자루는 베틀의 용두머리만큼 굵었고, 그 창날의 무게는 쇠 육백 세겔이나 되었다. 그의 앞에서는 방패를 든 사람이 걸어 나왔다.

 

8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전선을 마주 보고 고함을 질렀다. “너희는 어쩌자고 나와서 전열을 갖추었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고, 너희는 사울의 종들이 아니냐? 너희는 내 앞에 나설 만한 사람을 하나 뽑아서 나에게 보내어라.9 그가 나를 쳐죽여 이기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그를 쳐죽여 이기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서 우리를 섬겨야 한다.”10 이 블레셋 사람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내가 오늘 이스라엘 군대를 이처럼 모욕하였으니, 너희는 어서 나에게 한 사람을 내보내어 나하고 맞붙어 싸우게 하여라.”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그 블레셋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몹시 놀라서 떨기만 하였다.

 

주석

4절. 블레셋은 ‘싸움 거는 자’를 앞에 배치하고, 이스라엘의 대표 장수를 앞으로 나오게 하여 단둘이 싸우자고 요구했다. 이런 개인 전투 관습 뒤에는 신(들)이 선택한 사람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는 믿음이 있었다(IVP 성경주석, 425쪽). 

4절. 본문에 기록된 골리앗의 키는 약 3미터다(IVP 성경배경주석, 438쪽).

 

[오늘의 묵상]

* 골리앗의 등장

블레셋 사람들이 또 전쟁을 걸어왔다. 

사울은 이스라엘 군인들을 징집하여 전쟁터로 나갔다. 

이제 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된다. 

이번 전쟁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왜냐하면 3미터에 가까운 거인 장군 골리앗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피지컬의 장군이 딱 버티고 있으니,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보기만 해도 압도당하고 만다. 

그의 외모를 성경 저자는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한다.

투구, 갑옷, 각반, 놋창, 그리고 방패. 

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그를 묘사하면 할수록 겁을 먹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군이었다. 

 

당시의 일대일 싸움은 한 민족의 최고의 실력자가 등장하여 전쟁을 대리한다. 

각 민족의 신마다 그 민족을 위해 최고의 장수를 둘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각 민족의 최고의 싸움꾼끼리 개인 전투를 벌였을 때, 이기는 자의 신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상호간에 인정하게 된다.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깔보며, 이스라엘의 신도 무시하고 있었다. 

과거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자신들의 주요 도시들에 저주를 내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벌써 잊은지 오래다.

삼손이나 기드온 같은 장수가 있었으면 한 번 싸워볼 만 했다. 

사울 왕으로는 이 싸움에 응할 수 없었다. 

사울 자신도 웬만한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가 클 정도로 키가 컸지만, 골리앗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 괴물이 블레셋 군대에 들어갔는지 모두 의아했다. 

결국 블레셋의 신이 블레셋을 돕고 있다는 생각이 그들 머리 속에 가득하게 되었다. 

공포가 밀려온다. 

 

인생은 실전이다. 

우리 삶엔 언제든지 골리앗이 등장할 수 있다. 

경쟁에서 밀리는 상황이 초래된다. 

상대방을 밟아야 내가 승리한다. 

그런데 그 상대방이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골리앗을 준비했을 수 있다. 

두려움에 휩싸인다. 

삶은 지금 마주하는 골리앗 때문에 고달프며, 앞으로 맞이할 수 있는 골리앗 때문에 고뇌한다. 

 

지금 나의 골리앗은 무엇이며, 앞으로 찾아올 골리앗은 무엇일까? 

 

[오늘의 기도]

많은 사람들이 골리앗을 두려워합니다. 

갑자기 등장한 압도적인 경쟁력, 전투력에 넋을 잃고 맙니다. 

그저 자신은 조그만 벌레처럼 느껴집니다. 

숨기 마련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올바른 분별력을 주소서. 

골리앗이 아닌데 골리앗인 것처럼 느끼지 않도록 도우소서. 

진짜 골리앗이라면 내 힘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으로 나아가도록 도우소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힘이 여전히 막강합니다. 

마치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 편이라 믿는 듯이 행동합니다. 

기도 소리도 엄청나고 아멘 소리도 땅을 울립니다. 

그들이 마치 개신교의 대표가 된 것처럼 행동합니다. 

주님,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손을 막아 주소서. 

불법을 조장하는 자들의 입을 막아 주소서. 

 

골리앗을 맞아 싸우는 자들에게 분별력과 힘을 공급해주소서. 

과도한 두려움 혹은 부정확한 오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골리앗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고 그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3월 13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6 그들이 왔을 때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주님 앞에 나와 섰구나’ 하고 생각하였다.7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8 다음으로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들도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9 이번에는 이새가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 아들도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10 이런 식으로 이새가 자기 아들 일곱을 모두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새에게 “주님께서는 이 아들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뽑지 않으셨소” 하고 말하였다.

 

Message

But God told Samuel, “Looks aren’t everything. Don’t be impressed with his looks and stature. I’ve already eliminated him. God judges persons differently than humans do. Men and women look at the face; God looks into the heart.”(7절)

 

[오늘의 묵상]

*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무엘은 새로운 왕을 세워야 했다. 

기존의 왕인 사울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새로운 왕을 뽑기 위해 기름을 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반역이요 역모다. 

사울의 뿌락치가 없을 리 없다. 

곳곳에서 사무엘과 중요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수집 및 사찰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났다고 여겼기에 더욱 세심하게 주변을 살폈을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무엘은 조용히 잠행하여 이새의 집으로 향했고,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으로 사람들을 속였다. 

그리고 이새의 자녀들을 한 명씩 살펴본다. 

하나님이 미리 알려주시지 않았다. 

한 명 한 명 인터뷰 보듯이 보신다. 

사무엘 앞으로 아들들이 한 명씩 지나갈 때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신다. 

이 지점을 어떻게 상상하고 묵상해야 하는지 난관이다. 

본문을 보면 사무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교차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실시간으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무당들의 점사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면, 그들은 거의 실시간으로 신과 접속하는 듯 보인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실까? 

의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직접 들었을까? 

나도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다. 

그러면 이 모든 의문과 질문들이 가라앉고 주님만 의지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 편 두려움도 커진다. 

과연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좋은 것인가? 

자칫하면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 그리고 나의 욕망의 음성이 섞여 분별력을 잃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에게 속아 교회과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 

구마 사제였던 가브리엘 아모르트의 실제 사역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 “엑소시스트: 바티칸”(2022)에 보면, 사탄은 사제에게 빙의하여 교회를 어지럽히고 큰 죄악을 저지르게 만들었었다. 

마녀 사냥이 그 한 예다. 

교회의 죄악은 인간의 악함에게 있지만, 그 악함과 약함을 파고드는 사탄의 교묘한 전략에도 들어난다. 

악마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을 분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별하고 분간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성경을 통해, 그리고 그분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그분의 음성에 예민해져야 한다. 

성경을 문자주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더 큰 범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뜻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담겨 있다.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드러나고 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회복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평화, 정의, 사랑이 흘러가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오만한 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것과 자신이 세운 조직을 유지하는 것에 급급하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다. 

인간이 만든 조직은 영원할 필요가 없다. 

 

* 외형이 아니라 중심이다. 

사무엘은 키가 크고 외모가 괜찮은 첫째 아들을 보며 왕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봤다. 

과거 사울의 예를 봐도 알수 있는데, 외모가 좋다고 왕에 합당한 자질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사울은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로 훤칠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외형만큼 훌륭한 영적 자질을 갖추지는 못했다. 

하나님은 오늘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당신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이 말에 처음 드는 생각은, 그렇다면 사울의 중심을 제대로 보셨나 하는 점이다. 

사울이 잘 못했다는 점을 십분 수긍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삐딱하게 나갈 것을 하나님은 왜 모르셨을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 이렇게 큰 실수를 하신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울을 버리는 이 모든 과정조차도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의 일부라고 말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은 현실 세계에서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이룰 마음이 없으신 건가? 

언제나 모나고 부족한 현실만 남겨두실 생각이신가? 

그럴 수도 있겠다. 

하나님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계획을 추진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만약 이런식이라면 윤석열의 대통령 선출이나 그의 계엄 선포나 구속 취소 결정도 다 그런 식으로 합리화할 수 있게 된다. 

역사의 하나님이 이 모든 과정을 선용하시어 하나님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걸 거부하고 싶다. 

하나님을 내가 옹호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히 옹호하실 수 있는 분이다. 

역사의 끝에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수용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이런 나약한 자기 합리화식의 결정론을 채택하고 싶지 않다. 

윤석열은 무속의 도움을 받았으며 더 나아가 신천지의 도움을 받았다. 

윤석열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계엄을 촘촘히 준비했으며 최선을 다해 실시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의 죄악은 차고 넘친다. 

그런 자를 엄벌하는 것이 정의다. 

역사의 끝에 이 모든 과정이 어떻게 평가되고 이해될지는 중간에 있는 사람은 모른다. 

그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그리고 그분께 기도하면서 내리는 양심의 결정에 따라, 윤석열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나와 우리가 할 일이라고 판단한다. 

 

하나님은 외모나 외형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그 말을 믿고 싶다. 

내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히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고통스런 현실에서 구출해주셨다는 믿음이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빨리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주실 것에 대한 소망이 있다. 

이 중심을 봐 주시길 기도한다. 

이제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길 포기한다. 

그저 마음과 영과 육이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주변의 작은 수의 사람들에게라도 생명의 기운을 전하고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게 내 마음의 중심이다. 

 

[오늘의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혼란스런 시대 속에서 사람들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원합니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한 두 마디로 정리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와 수준과 상황별 적용이 너무나 다양해서 언제나 헷갈립니다. 

성경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이게 시대마다, 공간마다, 상황마다, 사안마다 다 다르잖습니까? 

 

주님!! 

말씀하옵소서. 

사탄의 전략에 속지 않도록 이끄소서. 

오직 순순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3월 11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32 사무엘이 아말렉의 아각 왕을 끌어내라고 명령하였다. 아각은 행여 죽을 고비를 넘겼나 싶어 좋아하면서 사무엘 앞에 나왔다.33 사무엘이 말하였다. “당신의 칼에 뭇 여인이 자식을 잃었으니 당신의 어머니도 뭇 여인과 같이 자식을 잃을 것이오.” 사무엘은 길갈 성소의 주님 앞에서 아각을 칼로 난도질하여 죽였다.

34 그런 다음에 사무엘은 라마로 돌아갔고, 사울은 사울기브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35 그 다음부터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을 만나지 않았고,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NIV

Until the day Samuel died, he did not go to see Saul again, though Samuel mourned for him. And the Lord regretted that he had made Saul king over Israel(35절).

 

주석

32-33절. 사울을 왕위에 앉히고 뒤로 물러났던 사무엘은, 다시 사실상 통치자의 자격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아말렉 진멸을 마무리한다(IVP 성경연구주석 구약: 오경·역사서·시가서, 435쪽).

 

 

[오늘의 묵상]

1. 아각을 칼로 난도질하다

사무엘은 이 순간 심판자, 도살자의 모습이다. 

아각이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아각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 슬픔은 온 땅에 가득하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로 역할한다. 

고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하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도 있다. 

마치 제사를 드릴 때처럼 칼을 높이 들고 아각의 머리와 사지를 자른다. 

생각보다 능수능란하다. 

 

이 장면에 대한 처음 느낌은 ‘잔인하다’이다. 

동물을 죽이듯 사람을 죽인다. 

사무엘은 유약하고 고상한 제사장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드세고 강하게 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긴 해도 피가 튀는 이 순간을 즐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이유다. 

혹시 하나님이 이렇게 무서운 분으로 돌변할까봐 조마조마하다. 

물론 그분이 끝까지 나와 주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에는 무섭게 돌변하시는 하나님이 소스라치게 등장한다. 

그러니 조마조마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당당함과 조마조마함의 긴장이 나에게 있다. 

 

하나님은 때로 내 심성을 뛰어넘을 것을 요청하신다. 

조용하게 평온하게 묵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 심성에 어울린다. 

하지만 활동적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삶을 요구하신다. 

필요에 따라 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배우고 익히고 경험하고 표현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머물지 말고 타인에게로 나아가 사랑을 실천하길 원하신다. 

자기 중심적이고 개인적인 나에게는 항상 어려운 과제며, 에너지가 많이 든다. 

목사로 부르실 때는 고상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니리라. 

도리어 이 세상을 품고 돌보고 사랑하길 원하셨을 것이다. 

그저 바라기는 사람을 난도질하는 수준의 잔인함과 고통스런 일로 부르시지 않기를… 

 

2.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아무리 위대한 사사라도 마음이 상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사람은 마음의 상함과 회복의 연속 속에 살아간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각을 살려둔 것에 크게 실망하고 마음이 상했다. 

사울이 위대한 왕이 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왕의 모델이 되어 후대에도 길이길이 칭송받고 본이 되는 왕으로 남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 꿈이 산산조각났다. 

자신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었다. 

한 시대를 위한 시대정신이 아니라 앞으로 올 모든 세대, 시대를 위한 시대정신으로 남기를 바랬다. 

꿈과 비전이 너무 크니 실망도 크다. 

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오늘 본문 이후로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지 않는다. 

 

이렇게 관계는 끊어졌다. 

한번 이어지기는 어려워도 깨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몇 번의 실망으로 관계는 박살난다. 

현대 사회는 이런 박살난 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평생 회복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미움과 쓴마음으로 지내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난 내가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줄 알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더라. 

생각보다 자기 중심적이고, 개인적이다. 

여전히 혼자 있는 것을 즐긴다. 

다른 사람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떠올리다가보면 어느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로 유턴한다. 

누군가의 필요나 기도제목에 일정정도 이상 집중하지 못한다. 

타인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어떤 모습인지 신경쓴다.

자신에 대해 아예 신경쓰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만, 목회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나 기도제목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부끄럽고 싶지 않아서?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를 나열하는 것조차 내 내면에 대한 성찰의 결과다. 

묵상과 침묵이 지향하는 바가 그런 것 같다. 

즉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자신의 내면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 

그것을 아예 못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어느새 그런 성향이 디폴트 값이 되어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 집중해서 돌보는 것을 잘 못한다. 

 

내면을 돌보는 것과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까? 

사무엘이 마음 상한 것이 이런 질문을 낳는다는 것이 비논리적이다. 

그런데 어쩌랴, 생각의 흐름이 이렇거늘!!

 

최근에 마음이 상한 것은 윤석열과 그의 협력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전광훈과 손현보의 막말 때문이다. 

윤석열이 구속취소되어 웃는 얼굴로 돌아다니는 것에 욕지기가 터져 나온다. 

전광훈과 손현보는 개신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사용하고 있다. 

분노가 점점 차오른다.

어찌 이 분노를 다스려야 하는가?!

 

 

[오늘의 기도]

악인들이 판을 칩니다. 주님! 

죄를 저지르고도 번듯이 돌아다닙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을 죽이고자 계엄을 선포했는데, 법을 교묘히 이용하거나 조작하는 범죄를 통해 버젓이 돌아다닙니다. 

심우정은 윤석열 구속 취소를 의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짝짝꿍으로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 나라를 구원해 주소서. 

 

죄인들은 벌을 받도록 이끄소서. 

악인들은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도록 인도하소서. 

이 세상에 평화와 생명이 가득하도록 이끄소서. 

하나님 나라 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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