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2월 27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8 요나단이 말하였다.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우리를 드러내 보이자.
9 그 때에 그들이 우리에게, 꼼짝 말고 서서 자기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 우리는 올라가지 않고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선다.
10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자기들에게로 올라오라고 하면, 우리는 올라간다. 이것을,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셨다는 징조로 알자.”
11 그 두 사람이 블레셋 사람의 전초부대에게 자기들을 드러내 보이니, 블레셋 군인들이 소리쳤다. “저기 보아라! 히브리 사람들이 그 숨어 있는 굴에서 나온다.”
12 전초부대의 군인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병사에게 소리쳤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병사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너는 나를 따라 올라오너라. 주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셨다.”
13 요나단이 손과 발로 기어올라갔고, 그의 무기를 든 병사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요나단이 블레셋 군인들을 쳐서 쓰러뜨렸고, 그의 무기를 든 병사도 그 뒤를 따라가면서, 닥치는 대로 쳐죽였다.
14 이렇게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병사와 함께, 겨릿소 한 쌍이 반나절에 갈아엎을 만한 들판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사람은 스무 명쯤 되었다.
15 이 때에 블레셋 군인들은, 진 안에 있는 군인들이나 싸움터에 있는 군인들이나 전초부대의 군인들이나 특공대의 군인들이나,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땅마저 흔들렸다. 하나님이 보내신 크나큰 공포가 그들을 휘감았다.
주석
15절. 고대 근동에서 하늘에서 우레가 울리고 땅이 떨리는 것은 보통 신이 전투에 관여함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겨졌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징조
요나단은 하나님의 징조에 따라 블레셋을 공격할지 말지를 결정했다.
자신들이 블레셋 군대에게 보여졌을 때, 그들이 오겠다고 하면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올라오라고 하면 공격을 감행한다.
올라오라는 블레셋 군인들이 말이 바로 하나님의 징조란다.
사실 어처구니 없는 판단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첫째, 징조를 자신들이 결정한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징조의 기준이 아니다.
요나단 스스로 생각해낸 기준에 불과하다.
둘째, 징조의 기준이 너무 위험하다.
공격전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고 행동하는 것이 좋았다.
자신들을 드러낸 뒤에 공격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 없다.
“거기에 가만히 있어라”도 위험하고, “이리로 올라와라”도 위험하다.
적은 인원이 다수를 공격할 때는, 어둠을 이용하여 몰래 잠입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한 명씩 처리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그들은 노출을 감행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징조 파악 행위를 어처구니 없고 심지어는 어리석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징조를 받았던 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한다.
먼저는 노아였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무지개라는 징표로 보이셨다.
둘째는 기드온이다.
전쟁에 나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는 과정이 사사기에 등장한다.
하루는 양털에만 이슬이 맺혀서, 다른 하루는 양털에만 이슬이 맺히지 않아서 그 징조를 보고 확신을 얻는다.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일반적인 방법에는 제사장들의 흉패 안에 있는 우림과 둠밈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징조를 구했다.
이렇듯 일반적인 징조구하기 방법이 있었지만, 요나단은 매우 특별하고 어리석은 방식을 사용했다.
오늘 성경의 저자는 요나단의 돌출 행동을 상당히 용기있고 담대한 방법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의견이다.
요나단은 무모하며, 하나님의 징조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만큼 오만하다.
좀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는 없었을까?
예수님처럼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는 것은 어땠을까?
두 명이서 수많은 적군을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은 과연 하나님이 넣어주신 것일까 아님 호기로운 스스로에 대한 과신인가?
하나님은 마지못해 그들을 돕고 계신 것은 아닌가?(15절)
나의 묵상에는 종종 “떄로” 신학이 등장한다.
‘때로’ 아둔하고 호기로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때로’ 이성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
이것이 “때로” 신학이다.
‘모든 상황에 무조건 적용하는 근본적 원칙이라는 것이 과연 있겠는가’라고 의심하는 관점이다.
모든 순간에 요나단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때로 이런 무모한 행동이 판세를 완전히 뒤바꾸는 경우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자유의 하나님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원리 원칙에 묶어 둘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이거다.
언제 상식에 기반한 일반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그와 동시에 언제 무모하고 호기로운 믿음(?)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그 둘 사이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선인가? 면인가? 아님 점선인가?
그 선은 흐린가? 또렷한가?
일상에서는 지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일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인류의 진보는 일상적/지성적/합리적 노력에 의해 일어나는가?
아님 비합리적/직관적/무도한 도전에 의해 일어나는가?
질문이 많아지는 날이다.
[오늘의 기도]
질문을 물리치지 않으시는 주님,
저의 질문을 받아주소서.
저는 다시 광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인류를 구출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토대를 굳게 붙잡고 저는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끝까지 붙들되, 그 외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고 다시 돌아보고 다시 정리하길 소망합니다.
1. 외계인은 과연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외계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
2. 귀신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수많은 신적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3. 은혜받는 것이란 무엇인가? 감정적 반응과 은혜의 차이는 무엇인가?
4.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등등.
생각하고 정리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저에게 지혜를 주시고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정리하도록 이끄소서.
무엇보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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