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2월 27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8 요나단이 말하였다.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우리를 드러내 보이자. 

9 그 때에 그들이 우리에게, 꼼짝 말고 서서 자기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 우리는 올라가지 않고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선다. 

10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자기들에게로 올라오라고 하면, 우리는 올라간다. 이것을,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셨다는 징조로 알자. 

11 그 두 사람이 블레셋 사람의 전초부대에게 자기들을 드러내 보이니, 블레셋 군인들이 소리쳤다. “저기 보아라! 히브리 사람들이 그 숨어 있는 굴에서 나온다.” 

12 전초부대의 군인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병사에게 소리쳤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병사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너는 나를 따라 올라오너라. 주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셨다.” 

13 요나단이 손과 발로 기어올라갔고, 그의 무기를 든 병사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요나단이 블레셋 군인들을 쳐서 쓰러뜨렸고, 그의 무기를 든 병사도 그 뒤를 따라가면서, 닥치는 대로 쳐죽였다. 

14 이렇게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병사와 함께, 겨릿소 한 쌍이 반나절에 갈아엎을 만한 들판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사람은 스무 명쯤 되었다. 

15 이 때에 블레셋 군인들은, 진 안에 있는 군인들이나 싸움터에 있는 군인들이나 전초부대의 군인들이나 특공대의 군인들이나,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땅마저 흔들렸다. 하나님이 보내신 크나큰 공포가 그들을 휘감았다.

 

주석

15절. 고대 근동에서 하늘에서 우레가 울리고 땅이 떨리는 것은 보통 신이 전투에 관여함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겨졌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징조

요나단은 하나님의 징조에 따라 블레셋을 공격할지 말지를 결정했다. 

자신들이 블레셋 군대에게 보여졌을 때, 그들이 오겠다고 하면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올라오라고 하면 공격을 감행한다. 

올라오라는 블레셋 군인들이 말이 바로 하나님의 징조란다. 

 

사실 어처구니 없는 판단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첫째, 징조를 자신들이 결정한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징조의 기준이 아니다. 

요나단 스스로 생각해낸 기준에 불과하다. 

둘째, 징조의 기준이 너무 위험하다. 

공격전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고 행동하는 것이 좋았다.

자신들을 드러낸 뒤에 공격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 없다. 

“거기에 가만히 있어라”도 위험하고, “이리로 올라와라”도 위험하다. 

적은 인원이 다수를 공격할 때는, 어둠을 이용하여 몰래 잠입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한 명씩 처리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그들은 노출을 감행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징조 파악 행위를 어처구니 없고 심지어는 어리석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징조를 받았던 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한다. 

먼저는 노아였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무지개라는 징표로 보이셨다. 

둘째는 기드온이다. 

전쟁에 나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는 과정이 사사기에 등장한다. 

하루는 양털에만 이슬이 맺혀서, 다른 하루는 양털에만 이슬이 맺히지 않아서 그 징조를 보고 확신을 얻는다.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일반적인 방법에는 제사장들의 흉패 안에 있는 우림과 둠밈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징조를 구했다. 

이렇듯 일반적인 징조구하기 방법이 있었지만, 요나단은 매우 특별하고 어리석은 방식을 사용했다. 

 

오늘 성경의 저자는 요나단의 돌출 행동을 상당히 용기있고 담대한 방법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의견이다. 

요나단은 무모하며, 하나님의 징조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만큼 오만하다. 

좀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는 없었을까? 

예수님처럼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는 것은 어땠을까? 

두 명이서 수많은 적군을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은 과연 하나님이 넣어주신 것일까 아님 호기로운 스스로에 대한 과신인가? 

하나님은 마지못해 그들을 돕고 계신 것은 아닌가?(15절) 

 

나의 묵상에는 종종 “떄로” 신학이 등장한다. 

‘때로’ 아둔하고 호기로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때로’ 이성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 

이것이 “때로” 신학이다. 

‘모든 상황에 무조건 적용하는 근본적 원칙이라는 것이 과연 있겠는가’라고 의심하는 관점이다. 

모든 순간에 요나단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때로 이런 무모한 행동이 판세를 완전히 뒤바꾸는 경우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자유의 하나님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원리 원칙에 묶어 둘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이거다. 

언제 상식에 기반한 일반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그와 동시에 언제 무모하고 호기로운 믿음(?)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그 둘 사이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선인가? 면인가? 아님 점선인가? 

그 선은 흐린가? 또렷한가? 

 

일상에서는 지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일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인류의 진보는 일상적/지성적/합리적 노력에 의해 일어나는가? 

아님 비합리적/직관적/무도한 도전에 의해 일어나는가? 

 

질문이 많아지는 날이다. 

 

[오늘의 기도]

질문을 물리치지 않으시는 주님, 

저의 질문을 받아주소서. 

저는 다시 광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인류를 구출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토대를 굳게 붙잡고 저는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끝까지 붙들되, 그 외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고 다시 돌아보고 다시 정리하길 소망합니다. 

1. 외계인은 과연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외계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
2. 귀신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수많은 신적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3. 은혜받는 것이란 무엇인가? 감정적 반응과 은혜의 차이는 무엇인가? 

4.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등등. 

생각하고 정리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저에게 지혜를 주시고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정리하도록 이끄소서. 

무엇보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2월 26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젊은 병사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저 건너편에 있는 블레셋 군대의 전초부대로 건너가자.” 그러나 요나단은 이 일을 자기의 아버지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2 사울은 그 때에 기브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사울을 따라나선 군인들은 그 수가 약 육백 명쯤 되었다. 

3 (아히야가 에봇을 입고 제사장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가봇의 형제인 아히둡이고, 할아버지는 비느하스이고, 그 윗대는 실로에서 주님을 모시던 제사장 엘리이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요나단이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 

4 요나단이 블레셋 군대의 전초부대로 들어가려면 꼭 지나야 하는 길목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양쪽으로 험한 바위가 있었다. 한쪽 바위의 이름은 보세스이고, 다른 한쪽 바위의 이름은 세네이다. 

5 바위 하나는 북쪽에서 거대한 기둥처럼 치솟아올라 믹마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남쪽에서 치솟아올라 게바를 바라보고 있었다.

6 요나단이 무기를 든 젊은 병사에게 말하였다. “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의 전초부대로 건너가자. 주님께서 도와 주시면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승리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7 그의 무기를 든 병사가 대답하였다. “무엇이든 하시고자 하는 대로 하십시오. 무엇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NIV

Then Jonathan said to the young man who was carrying his armor, “Come and let us cross over to the garrison of these uncircumcised; perhaps the LORD will work for us, for the LORD is not restrained to save by many or by few.”(6절)

 

주석

2-3절. 사울은 요나단의 계획만큼이나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다. 그가 실로에서 온 제사장 아히야를 동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아가는 상황에 어두웠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성경에는 평화의 시기에 대한 내용보다 전쟁과 갈등의 순간에 대한 내용이 훨씬 많다. 

사울이 왕이 되는 과정도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의 표출이다. 

사울이 왕이 되어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는 일도 이스라엘에겐 역경의 역사다. 

사울을 따라나온 군인들의 숫자가 약 육백 명이면 사실 제대로된 전쟁을 치르기엔 역부족이다. 

사울과 그의 군대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떠난 것을 알지 못했다(3절). 

이 또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성경은 전쟁과 갈등의 서사구조로 가득하다. 

평화로운 시대의 기록보다 고통과 전쟁의 기록이 더 많다.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가) 하나는 인류 역사는 고통의 역사이기에 성경 또한 인류 역사를 반영했다. 

나) 다른 하나는 성경 또한 문학이기에 밋밋하고 평범한 이야기보다 자극적이고 흥미를 끄는 기승전결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다. 

 

가)라고 전제하면 성경은 인류의 역사와 관계를 어떤 글보다도 잘 드러내기에 더욱 가치롭다. 

성경을 읽으며 자신의 삶에 등장하는 수많은 긴장, 갈등, 전투를 상기하고 그것들에 적용할 수 있다. 

홉스가 말할 대로, 인생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다.

매순간 전투가 일어난다. 

비평과 비난이 때로는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는 곳이 인간 사회다. 

사랑과 평화는 사상가들의 이상향에 있거나 혹은 평크 밴드의 이름으로 지어진다.  

생존 경쟁은 언제나 치열하고, 내가 아닌 사람들을 ‘모두까기’해야 직성이 풀린다. 

비판하지 않으면 부각되지 않는다. 

비평가와 평론가가 창작자나 정치가보다 생명력이 더 길다. 

셩경을 읽으며 자신이 처한 치열한 전투의 상황에 대입한다. 

성경의 교훈을 전투에서 승리하는 법으로 삼아 매일의 전투력을 충전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요나단의 믿음을 전투력 충전재로 받아들인다. 

 

나)라고 하면, 성경은 편집된 글이고 역사이기에, 편집자의 의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저자와 편집자는 왜 이 이야기를 이 지점에 배치했는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가? 

사울의 어리석음인가? 

아님 요나단의 용기와 지혜인가? 

많은 신앙인들이 요나단의 믿음과 용기에 주목한다. 

그리고 일상의 전투에서 요나단의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적용한다. 

게다가 요나단의 병기 맡은 자의 믿음은 어떠한가? 

요나단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부족하지 않다. 

병기 맡은 자는 죽도록 충성하는 용감한 부하다. 

 

자신의 상황에 따라 요나단의 믿음과 용기, 그 부하의 충성과 용맹함을 배우자고 적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싸움의 정당성을 따지지 않을 때 생긴다.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 잘못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일삼고 여론을 호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입장에서 싸움을 싸워나가겠다고 이 말씀을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긴다. 

믿음과 용기와 충성과 용맹함은 실전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싸움에 나서기 전에 그 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의 잘못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자기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꼭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성경의 저자 혹은 편집자가 기승전결의 문학적 구조를 성경 이야기 구성에 사용했다면, 실제 역사는 이 보다 훨씬 지루하고 밋밋하고 평범하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돋보이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뒤편의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을 상상으로 채워넣어야 한다. 

사울, 요나단, 다윗, 솔로몬… 그 모든 왕들의 이야기 뒷편에 숨겨져있는 몇 년간의 일상을 생각해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 또한 사실 대부분 밋밋하고 평범하고 그저그렇기 때문이다. 

그 일상을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어찌보면 더 중요하다. 

 

성경 구절 행간에 있는 그 숱한 시간들을 들춰내자. 

하나님은 그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는지 상상하자. 

인류 역사를 66권 성경 안에 다 다룰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류 구출과 구원의 역사를 보여줄 뿐이다. 

행간의 그 넓고 깊고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들을 복원하자. 

인류 구원의 역사는 너무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 기록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우리의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주님, 

큰 사건에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주님을 알아가고 느끼는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무수한 시간들을 일상의 작은 일들을 반복적으로 처리해 나갑니다. 

지루하고 밋밋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그 속에서도 주님의 일하심을 구하게 하소서. 

 

윤석열을 파면시켜주소서. 

헌법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벌하소서. 

헌법을 고칠 수도 있고, 헌법기관들을 헌법적 절차에 따라 폐지하거나 새로 수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을 무시하고 폭력으로 무력화시키려는 것은 내란에 다름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보여 주소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당신의 나라를 더욱 공고히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2월 21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마흔두 해였다. 

2 그는 이스라엘에서 삼천 명을 뽑아서, 그 가운데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베델 산지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로 보내고, 나머지 군대는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들었다. 사울이 온 나라에 나팔을 불어서, 히브리 사람 소집령을 내렸다. 

4 온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이 블레셋 수비대를 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길갈로 모여 와서 사울을 따랐다.

5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에다가, 기마가 육천이나 되었고,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서 셀 수가 없었다. 블레셋 군대는 벳아웬의 동쪽 믹마스로 올라와서 진을 쳤다. 

6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위급하게 되었다는 것과 군대가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저마다 굴이나 숲이나 바위틈이나 구덩이나 웅덩이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었다. 

7 히브리 사람들 가운데서 더러는 요단 강을 건너, 갓과 길르앗 지역으로 달아났다. 사울은 그대로 길갈에 남아 있었고, 그를 따르는 군인들은 모두 떨고 있었다. 

 

주석

2절. 사울이 뽑은 3천 명은 전쟁을 위한 지원병 전체라기보다는 가신이나 왕궁의 수비대로 일할 사람일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군대가 있으면, 선공이 최선이라는 말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우려했던 일이다. 

상비군을 두고, 전쟁을 대비하다보면, 때로는 먼저 공격하게 된다. 

침입자에 대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동태를 보고 선제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된다. 

요나단은 그의 군사들을 데리고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했다. 

당연히 블레셋은 전쟁 수행을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도 징집명령을 내려야 했다.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왕이 있으면 생길 일 중에 하나였다. 

왕이 있으면, 왕권 강화를 위해 크게 두 가지를 하게 된다. 

하나는 군비 증강이다. 

다른 하나는 왕궁 및 성전 공사를 통한 중앙 집권화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왕정을 선택하면서 불가피하게 전쟁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 

블레셋의 군사력이 참으로 막강했음에도 함부로 수비대를 건드린 요나단과 사울의 잘못이 크다. 

이스라엘은 왕정을 통해 전쟁을 막으려 했지만, 도리어 전쟁의 참화를 더 많이 맞닥뜨리게 되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왕정은 필수불가결한 결정이었다. 

다른 나라들도 다 왕정을 통해 국가를 운영하고 전쟁을 수행하는데, 이스라엘만 신정 체제로 살아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면 왕정을 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당장 왕정 초기에는 비용도 많이 들고 전쟁에 휩쓸리게 될 가능성도 높아지지만,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나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왕과 군대가 필요했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놓고 보니, 왕정을 선택하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였다. 

나라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레 왕정을 선택하고, 그 왕국이 더 나아가 제국이 되곤 했다. 

그런 역사 발전의 과정에서 이스라엘만 벗어날 수 있었을까? 

끝까지 지파 동맹 체제로 생존할 수 있었겠는가? 

지파 동맹 체제는 최선이고, 왕정은 최악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을 지적하셨지, 왕정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나? 

고민 지점이다. 

 

왜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가? 

이상과 현실의 문제를 자주 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적인 정치 사회 문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 이상과 전혀 다르거나 되레 반대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무턱대고 이상만 옳으니 나머지는 다 잘못됐다거나 악마화시키는 것이 과연 괜찮은지 고민이 생긴다. 

현실은 복잡하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이상적인 모델을 꾸준히 연구하고 그에 맞는 현실적인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 

 

한국 개신교가 더 분열로 치닫고 있다. 

극우 개신교 목사와 지도자들이 헌법을 뛰어넘는 발상과 발언을 일삼고 있다. 

이를 반대하는 그룹의 움직임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미하다. 

하지만 교회 내 성도들 중에 합리적인 분들은 극우 목회자와 리더들을 마음 속에서 결별하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중들이 개신교는 극우 꼴통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복잡하게 엮여 있는 상황에서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조화롭게 만들어가야 할지 의문이다. 

 

현재 내 생각은 분명하다. 

극우 개신교는 더 이상 개신교를 대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현재 개신교를 과잉대표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과 혐오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다. 

예수님의 정신, 즉 사랑과 섬김과 자기 희생과 자기 반성과 수용과 환대로 이뤄지는 나라다. 

배제, 배척, 혐오, 미움, 분리, 공격, 폭력, 무질서로 이뤄진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강자가 희생하고 섬기는 나라다. 

따라서 현재 극우 기독교는 기독교 정신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 

승리주의에 심취하여 돈과 힘으로 밀어 부치려는 태도는 잘못이다. 

 

[오늘의 기도]

현실의 문제에 눈감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시에 그 이상을 현실에 적용하도록 이끄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항상 헷갈립니다. 

현실에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주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겠다고 했는데, 

너무 부족합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부끄러운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약간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2월 20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6 당신들은 그대로 서서, 주님께서 이제 곧 하실 큰 일을 눈으로 직접 보십시오. 

17 지금은 밀을 거두어들이는 때가 아닙니까? 그렇더라도 내가 주님께 아뢰면, 주님께서 천둥을 일으키시고 비를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왕을 요구한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큰 죄악이었는지를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18 사무엘이 주님께 아뢰니, 바로 그 날로 주님께서 천둥을 보내시고, 비를 내리셨다. 온 백성이 주님과 사무엘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19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간청하였다. “종들을 생각하시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셔서, 우리가 죽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습니다.” 

20 사무엘이 백성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이 모든 악행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이제부터는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마음을 다 바쳐 주님을 섬기십시오! 

21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구원하지도 못하는 쓸데없는 우상에게 반하여, 그것을 따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것들은 헛된 것입니다. 

22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기꺼이 자기의 백성으로 삼아 도와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기의 귀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기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23 나는 당신들이 잘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일을 그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들이 가장 선하고 가장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치겠습니다. 

24 당신들은 주님만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다 바쳐서 진실하게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주님께서 당신들을 생각하시고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하셨는가를 기억하십시오. 

25 만일 당신들이 여전히 악한 행동을 한다면, 당신들도 망하고 왕도 망할 것입니다.”

 

주석

17-18절. 팔레스틴에서는 밀 베는 때인 5월과 6월에 비가 오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따라서 그 비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해석되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내가 만약 당시의 백성의 장로 중 한 명이었다면,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의견을 어떻게 판단하고 전달했을까? 

사무엘상 12장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왕을 요구한 이유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도 암몬 왕 나하스가 우리를 치러 오자, 주 하나님이 우리의 왕인데도, 그것을 보았을 때에 당신들은, ‘안 되겠습니다. 우리를 다스릴 왕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사무엘상 12:12)

 

군사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다. 

더는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전에도 여러 사사들을 통해 구원해 주셨지만, 상비군 체계를 갖춘 왕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하며 강력한 왕권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장로들과 함께 사무엘에게 찾아가서 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전쟁이 두렵고, 그 전쟁으로 잃게 되는 나의 친족과 가족을 생각하면 그 두려움은 배가 된다. 

당연히 전쟁을 막을 방법을 다각도로 찾게 될 것이다. 

게다가 사무엘의 아들들이 보여준 불의한 행동들을 알기에 다른 양태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요구를 죄라고 규정하신다.

그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상비군을 두고 왕을 세우면 과연 전쟁이 끝난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군대 때문에 도리어 전쟁이 더 자주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왕이 하나님의 뜻을 어길 때 제어할 제도가 별로 없다. 

왕의 선의에 기댈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이렇게 될 것이라 예상하셨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질 때, 필히 타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숱한 인류 역사를 통해 다 알고 계셨다. 

이스라엘 만큼은 다른 양상의 삶을 살게 하고 싶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망과 두려움이 더 컸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다짐을 받아 둔다. 

이제 그의 시대가 지나간다. 

왕을 뽑고 그에게 나라의 리더십을 맡긴다. 

왕과 백성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당부한다. 

마지막 설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무엘은 이 뒤로도 활동하긴 한다. 

사울을 꾸짖기도 하고 다윗을 세우기도 한다. 

자신이 마지막이라고 말해도 진짜 마지막이 되는 지는 하나님께 달렸다. 

핵심은 이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설교냐 아니냐가 핵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왕이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르겠냐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도리어 더 잘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신다. 

사무엘은 앞으로도 가르침과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울 왕이 사무엘을 더 가까이 하고, 그의 말을 따라 하나님 섬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면 참 좋았겠지만, 사울은 사실 그 일에 실패하고 만다. 

그럼 다윗이나 솔로몬은 어떤까? 

성공한 듯 보이나 그들도 완벽하지 못했다. 

인간 왕, 한 인간에게 국가 권력의 전체가 부여되는 존재, 그 존재는 타락의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다. 

 

민주정은 그 권력의 집중을 제도적으로 막아 두었다. 

함부로 한 개인에게 모든 권력을 주지 않는다. 

국민 다수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국가 권력의 교체할 수 있는 제도가 민주정이다. 

이 민주주의 제도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자기 맘에 안 든다고 군사를 동원해서 헌법 기관인 국회와 선관위를 통제하려고 했던 사건인 바로 12.3 내란이다. 

그 내란 수괴와 주요임무종사자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을 추종하며 내란을 획책하는 자들 또한 수사와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마치 자신이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부 목사들에게는 그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 

비판한다면 자신도 비판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태도다.

하나님이 왕정, 민주정, 독재에 매이는 분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에 반응하는 사회는 민주정에서만 가능하다. 

권력이 누군가에게 혹은 특정 세력에서 독점적으로 주어져버리면, 신앙의 자유는 크게 위축되곤 한다. 

자유롭지 않는 상태에서 주님을 믿는 것은, 즉 강제로 신앙을 갖게 되면 신앙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강제적으로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그 사랑에 자유롭게 반응하는 신앙 양태를 주셨다.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공간과 여백을 준다. 

화내거나 닥달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래서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가끔 화를 내시기고 하시고 벌을 직접 내리시기도 하셨다. 

많이 참으시고 인내 하신 뒤에 행하시는 분노와 처벌이긴 해도 당하는 사람은 두려움과 강제성을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을 온전히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신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자율적으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정말 감사할 일이다.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 감동하여 그분을 섬기게 된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다. 

그 자유로움을 더 깊이 느끼는 것이 좋겠다. 

억지로 믿는 믿음 말고 자원하여 감동하여 믿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이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자.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동하여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섬기는 신앙의 방식, 양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노예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감격이 계속 남아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니 그 경험과 감격은 역사책 속으로 감춰졌습니다. 

사랑의 주님, 어떻게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지금 현실 속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요? 

주님의 돌보심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오늘도 당신의 은혜와 선물과 사랑을 갈구합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주님의 뜻과 섭리를 추구하고 싶습니다. 

주님,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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