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07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2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누군가가, 사울이 갈멜로 가서 승전비를 세우고 나서, 거기에서 떠나 계속 행진하여 길갈로 내려갔다고 전해 주었다.13 사무엘이 사울이 있는 곳에 이르니, 사울이 그를 보고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님의 명령대로 다 하였습니다.”14 그러자 사무엘이 물었다. “나의 귀에 들리는 이 양 떼의 소리와 내가 듣는 소 떼의 소리는 무엇입니까?”15 사울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아말렉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우리 군인들이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가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진멸하였습니다.”

 

16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었다. “그만두십시오! 지난 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내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울이 대답하였다. “말씀하십시오.”17 사무엘이 말하였다. “임금님이 스스로를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던 그 무렵에, 주님께서 임금님께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이 되신 것이 아닙니까?18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전쟁터로 내보내시면서, 저 못된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들을 진멸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고 하셨습니다.19 그런데 어찌하여 주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면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주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시는 대로 전쟁터로 나갔고, 아말렉 왕 아각도 잡아왔고, 아말렉 사람도 진멸하였습니다.21 다만 우리 군인들이 전리품 가운데서 양 떼와 소 떼는 죽이지 않고 길갈로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진멸할 짐승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온 것입니다.”

 

22 사무엘이 나무랐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23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주석

23절. ‘거역하는 것’과 ‘고집을 부리는 것’은 모두 자신의 주장이나 행동을 강요하는 것과 관련된 표현이다. 사무엘은 이것을 우상 숭배와 연결한다. 사울은 우상 숭배자들처럼 예물로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했다(IVP 성경배경주석, 434쪽).

 

[오늘의 묵상]

오늘 본문을 보면서 첫 인상은, ‘하나님의 요구가 과하다’이다.

아말렉 사람들 모두와 그들의 소유 모두를 완전히 다 파괴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과연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적합한가? 

사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의 대부분의 명령을 잘 따랐으며, 다만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서 양 떼와 소 떼를 남겨서 가져 왔을 뿐이다. 

이 정도면 사울의 마음 씀씀이에 대해 하나님이 칭찬해주셔야 되는 것은 아닌가? 

사울이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을 이와 같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화를 내실 일인가? 

이런 질문들이 올라 온다. 

 

매번 이런 질문들을 던질 때마다 나는 하나님 편에서 그분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입장이었다. 

목사니까 설교자니까 당연히 그래왔다. 

혹은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서 속끓이지 않으려면 성경 저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허나 신학의 실험실에서는 조금 더 내 감정과 인상에 솔직해 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그간의 실수를 만회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을 수 있다. 

블레셋과의 전쟁 전에 제사장 사무엘이 늦게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제사를 올린 적이 있었다.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엄청나게 꾸지람을 받는다. 

 

사무엘상 13:13-14_13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주님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14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께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런 꾸지람에 대해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충동이 컸을 것이다.

전쟁의 전리품을 챙기는 것 또한 매우 상식적이며, 당시 병사들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군사들의 사기를 충전하는 것은 왕으로서 매우 합당하고 당연한 행동이었다. 

허나 하나님은 다르게 생각하셨다. 

이 전쟁은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심판이 목적이었다. 

진멸 전쟁, 즉 아말렉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 전쟁의 의도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것으로 하나님은 화를 내셨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질문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과거 사건에 대해 후세대가 벌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벌써 몇 백년 전에 있었던 사건, 즉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 행렬 끝의 사람들을 공격한 치졸한 아말렉 사건을 이제 와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과하지 않나? 

당시에 벌하면 될 일이지, 이제 와서 모든 아말렉 사람들을 죄다 죽이라고 하시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에도 어울리지 않고 사실 정의의 하나님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원래 그런 분이며, 어떤 경우에도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 답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저항하고 싶어진다. 

사무엘 꾸지람의 취지가 그렇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90점짜리 순종은 왜 순종이 아니란 말인가? 

현실적으로 남는 장사를 하겠다는 것은 현명한 것이 아닌가? 

예수님도 그러셨다. 

불의한 제물로 친구를 사귀는 자가 현명하다고 말이다. 

 

누가복음 16:9_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물론 누가복음에서 예수님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이다.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재물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런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음에도 해당 구절은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100점짜리 조언은 아닌 듯 싶다. 

‘정직하게 모은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가 100점이다. 

그러니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꾸지람에 저항감이 생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다. 

특히 신약 성경 속 예수님의 말씀을 비중있게 다루며 순종하고 싶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나에게 참으로 도덕적이며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구약에서 보이는 모순이 비교적 적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자비롭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시키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과연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가? 

당신의 영광이 허물어지는 것에 대한 인내? 

예수님의 자기 희생에 비하면 구약의 하나님의 희생이라는 것은 그분의 명예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신약 속 예수님의 말씀에 더 귀기울리고 싶다. 

구약은 다루기 참 껄끄러운 본문들이 너무 많다. 

 

오해하지는 마시라.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임도 믿는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임도 믿는다. 

그렇게 구약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구약에서 묘사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묵상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다르다는 이단 교설을 따르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선을 다해 구약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마음이다. 

다만, 불편한 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그 불편을 나의 신학 실험실에서 계속 다뤄볼 계획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아 가겠다. 

불편함과 저항감을 안고 살아가겠다. 

그것이 내가 속한 인류와 확연한 차이를 갖고 계신 신에 대한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라고 믿는다. 

불편하기 때문에 버리거나 떠나지 않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구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행동하신 것은 저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불편하고 저항감이 올라옵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안 했을 것 같다는 말씀을 감히 드립니다. 

사울에게 좀더 기회를 주셨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인간 왕에게 좀더 관해하셨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많이 관대하셨잖아요. 

자기의 충직스런 부한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다윗을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사실 죄의 크기로 보자면 이 죄악이 더 큰 것 아닌가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이 저항감에 머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주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도와 주세요. 

주님의 말씀과 행동과 결정에 대해 더 납득하도록 도와 주세요. 

 

이 모든 불편과 저항감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에 대해 큰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저를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더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3월 06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2 ‘만군의 주가 말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일 곧 길을 막고 대적한 일 때문에 아말렉을 벌하겠다.3 너는 이제 가서 아말렉을 쳐라. 그들에게 딸린 것은 모두 전멸시켜라. 사정을 보아 주어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등 무엇이든 가릴 것 없이 죽여라.’”

 

4 사울이 백성을 불러모으고 들라임에서 그 수를 헤아려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었다. 유다에서 온 사람도 만 명이나 되었다.5 사울은 아말렉 성읍에 이르러서, 물 마른 개울에 군인들을 매복시켰다.6 사울이 겐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 “당신들은 어서 거기에서 떠나시오. 내가 아말렉 사람들을 칠 때에, 당신들을 함께 치지 않도록, 그들 가운데서 떠나시오. 당신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올라올 때에, 그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이오.” 그러자 겐 사람들이 아말렉 사람들 가운데서 빠져 나갔다.7 그런 다음에 사울은, 하윌라에서부터 이집트의 동쪽에 있는 수르 지역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쳤다.8 아말렉 왕 아각은 사로잡았고, 나머지 백성은 모조리 칼로 쳐서 없애 버렸다.9 그러나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각뿐만 아니라,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들과 가장 기름진 짐승들과 어린 양들과 좋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모두 아깝게 여겨 진멸하지 않고, 다만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하였다.

 

10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11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엘은 괴로운 마음으로 밤새도록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석

2절. ‘아말렉 사람’은 예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위협 거리였다. 그들은 특히 이스라엘 쪽 국경을 공격해 농장을 습격하고 가축을 약탈하는 야만적인 유목민이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단호한 조치가 필요했다(IVP 성경주석, 423쪽).

 

[오늘의 묵상]

* 후회하시는 하나님 

후회하시는 하나님은 충격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후회하시는가? 

아무리 이렇게 물어봐도 소용없다. 

실제로 후회하시기 때문이다.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을 창조한 것을 그들을 보존한 것을 후회하셨다. 

창세기 6:5-6_주님께서는 ,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아담과 하와의 죄악을 보시면서, 노아 시대 인류의 죄악을 보시면서, 홍수 이후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후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은 사울 왕을 세운 것을 후회하시고 계시다. 

항상 선하고 완전하고 변함없으신 그분이 어떻게 후회하시는가? 

그래서 충격이다. 

 

생각해보면,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는 역사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어긋나는 역사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완전하시다는 명제에서 시작하지 말고, 성경 이야기 그 자체에서 뽑아낸 진리는 “하나님은 변한다”이다. 

그분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이 바뀐다.

크게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려 했으나 그들의 불손종으로 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로 보내신다. 

이건 원래 계획에는 없는 부분이었다. 

작게는 요나서에 등장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보시고 그들을 진멸하실 계획을 바꾸신 사건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처럼 사울 왕을 세워두고서는 그의 불순종을 보시고 후회하시는 장면도 있다. 

이렇게 변하시는 하나님을 고정된 큰 기둥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그분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분이시다. 

그분은 바람과 파도를 타고 항해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그분에게 변하지 않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1) 인간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이 증명한다. 

2)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고 돌보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그분의 돌봄이 없다면 이 세계는 유지될 수 없다. 

자연의 불변의 상수는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었다면 이 우주는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중력상수, 원주율, 프랑크 상수, 빛의 속도….. 

물리학자가 아니니 자세한 것은 모르나, 변하지 않는 숫자가 우주와 물리 세계를 떠받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난 신앙인으로서 이런 상수의 존재는 우주를 붙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변하는 하나님, 변하지 않는 하나님. 

이 두 가지를 이해하는 것이 내게 큰 도전이었다. 

마치 구신약 사이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변하시는 것 같다 

구약에서는 대체로 즉각적이시지만, 신약에 와서는 과거보다 더 오래 기다리신다. 

그래서 신약을 은혜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왜냐하면 구약도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내의 정도 차이가 있다 정도로 정리하는 것이 정확하다. 

 

하나님이 내 삶에 대해 실망하시고 후회하신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돋고 매우 슬프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 나에대해 실망하신다면 그 충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의 감정은 그분이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끝까지 나를 대해 주실 것을 믿는 것으로 향한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서 버림 받은 사람이 있지 않았는가? 

바로 가륫 유다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그분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다. 

그렇다고 두려움에 떨면 안되는 이유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이자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오늘의 기도]

전통적인 생각의 흐름 안에 갇히지 않고 싶습니다. 

성경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정보를 잘 모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깊이 알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모든 과정을 잘 거칠 수 있도록 도우소서. 

혼란한 시기, 무조건 닫아 잠근다고 해결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저의 신학의 실험실이 진실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3월 04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36 사울이 말하였다. “우리가 이 밤에 블레셋 군대를 쫓아 내려가서 동이 틀 때까지 그들을 약탈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이도록 합시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임금님이 좋으시다면,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제사장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37 그래서 사울이 하나님께 여쭈었다. “내가 블레셋 사람을 뒤쫓아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날 사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38 그러자 사울이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군지휘관은 모두 앞으로 나오시오. 오늘 이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보겠소.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허물이 나의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감히 그에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40 사울은 온 이스라엘 군인에게 계속해서 말하였다. “귀관들은 모두 이쪽에 서시오. 나와 나의 아들 요나단은 저쪽에 서겠소.” 군인들이 모두 사울에게 “임금님이 좋으시다면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41 사울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었다. “오늘 저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허물이 저에게나 저의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이 나오게 하시고, 그 허물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하십시오.” 그러자 요나단과 사울이 걸리고, 백성들의 혐의는 벗겨졌다.42 사울이 말하였다. “제비를 뽑아서, 나와 나의 아들 요나단 가운데서 누가 죄인인지를 가려 내시오.” 그러자 요나단이 걸렸다.43 사울이 요나단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나에게 말하여라!” 요나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 끝으로 꿀을 찍어서 조금 맛보았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44 사울이 선언하였다. “요나단, 너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너를 처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천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실 것이다.”45 이 때에 온 백성이 사울에게 호소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큰 승리를 안겨 준 요나단을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오늘 하나님과 함께 이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요나단을 살려 내어, 그는 죽지 않았다.46 사울은 블레셋 사람을 더 이상 뒤쫓지 않고 돌아섰고, 블레셋 사람도 자기들의 본 고장으로 돌아갔다.

 

Message

Saul said, “Let’s go after the Philistines tonight! We can spend the night looting and plundering. We won’t leave a single live Philistine!” “Sounds good to us,” said the troops. “Let’s do it!” But the priest slowed them down: “Let’s find out what God thinks about this.”(36절)

 

[오늘의 묵상]

무모하고 무식한 인물 사울이 유독 거슬린다. 

사울은 전투에 나온 군인들에게 맹세를 시켰다. 

적군을 완전히 궤멸시키기 전까지 금식을 하도록 시킨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전투에 나가는 장병들에게 밥을 굶어가며 전쟁에 임하라고 하는 것이 어찌 가당키나 한가? 

 

이제 보면 사울은 종교적 열성으로 상식을 압박하여 신적 권위를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전투를 치르면 되는 것을 종교적으로 바꾸어 버린다. 

전투 전에 자신이 제사를 드린 것도 그렇다(13:9). 

 

13:9사울은 사람들을 시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한 다음에, 자신이 직접 번제를 올렸다.

 

승전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의 맹세로 그 영광을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이끈다(14:24)

 

14:24그 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허기에 지쳐 있었다. 사울이 군인들에게 “내가 오늘 저녁에 적군에게 원수를 갚을 때까지, 아무것이라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고 맹세시켰기 때문에, 군인들이 모두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사울은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려고 했다.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따라 가면 될 일이었다. 

나서서 맹세 같은 거 시키지 않아도 되었다. 

 

요나단은 이 명령을 듣지 못했으며, 그는 꿀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여 전투에 임했다. 

병사들은 너무 굶주린 나머지 양과 소와 송아지를 피째 먹어치웠다. 

이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었다. 

갑자기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사울은 왜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지 궁금했고, 그 원인을 밝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우림과 둠밈을 사용했다. 

결국 원인은 요나단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것이 이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가장 근본적 원인은 사울이다. 

그가 전투병에게 금식을 맹세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둘째는 병영내에 전달된 금식 명령을 요나단이 듣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이상하게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아무리 배고프더라도 율법에서 금지한 피째 동물을 섭식하는 행동을 한 병사들이다. 

실제적인 범죄는 이들이 지은 것이다. 

그러니 우림과 둠밈이 어디 쪽에 나온다 한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보건대, 사울의 어리석음과 무모함과 섣부름이 문제였다. 

사울은 그저 겸손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면 될 일이다. 

스스로 무엇을 보태거나 빼거나 해서 자신이 주목받게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왕이 되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왕!! 

모든 사안에 중심에 서고 싶은 왕!! 

 

피째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어제 영화관에서 본 퇴마록이 떠오른다. 

힘을 추구하는 자 결국 악마에게 자신의 존재를 팔아야 한다. 

해동밀교는 자비를 구현하는 종파였으나, 서교주는 자비가 아니라 힘을 추구했고, 그 힘을 주겠다는 수많은 신들을 모시고자 살인을 밥먹듯 했다. 

결국 자신과 해동밀교 전체를 악마에게 팔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오컬트 소설의 내용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 

현실의 윤석렬도 힘을 추구했다. 

자신이 모든 권력의 정점에서 자기가 원하는 일들을 다 이루려고 했다. 

명태균 게이트가 보여 주듯이, 여론조사를 조작하여 대선후보가 되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12.3 계엄과 노상원의 수첩이 보여 주듯이, 자신의 정적을 싸그리 죽여 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사지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국민을 계몽한다는 말도 안되는 궤변이나 늘어 놓는 윤석렬은 힘의 추구와 거짓이 어떻게 합력하는지 잘 보여준다. 

사울처럼 윤석렬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했던 말이 족쇄가 되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의 가족과 지인과 추종자들 모두 죽음의 골짜기로 끌고 간다. 

몰살은 힘을 추구하는 자가 가는 종착지다. 

 

함부로 맹세하지 마라.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자신의 의지대로 진행하지 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충분히 검토하라. 

섣부른 종교적 열성으로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아는 듯 나서지 마라. 

 

전광훈과 손현보가 들어야 할 메시지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개신교 목사들이 계속해서 들어야 할 메시지다. 

자정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개신교는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교회의 대형화를 제어해야 한다. 

스타 목사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목사되기를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총회와 노회 정치가 더욱 합리적, 민주적이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회는 지금 분수령, 기로에 서있다. 

급진적인 변화가 시급하다. 

이대로 가면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모든 교회는 망하게 된다. 

개교회는 담임목사가 인격적으로 관계 맺고 목양 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인원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300명까지를 최대한으로 두고 그 이상이 되면 분립해야 한다. 

대신 연합 모임을 강화하고 연합된 우주적 교회의 일원임을 지속적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목사에 대한 감사, 치리 등이 더욱 강화되고, 심지어는 가톨릭처럼 임지를 순환시키는 것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새로운 개신교회가 나오지 않고서는 더 이상은 안된다. 

규모로 돈으로 힘을 과시하는 교회는 더는 교회가 아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가르치면서 목사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는 목사들은 피정에 들어가게 하거나 일정 기간 목회 금지 조치(특히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등에)를 취해야 한다. 

목사가 바뀌지 않으면 교회는 바뀔 수가 없다. 

더 이상 욕먹지 않으려면 목사 양성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목사 안수는 가톨릭처럼 더욱 오랜 시간 동안 성품 훈련, 생활 훈련, 상담 훈련 등을 두루 거치도록 해야 한다. 

최소 10년의 교육 후에 목사 안수를 주는 것이 좋겠다. 

신학교 5년, 목회 실습 5년 그 이후 안수를 준다. 

충분히 검증된 사람이 목사가 되는 것이 좋겠다. 

바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삼위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고, 오직 예수님만이 왕이신 그 나라를 꿈꾸자. 

사람이 신노릇 하는 교회를 철거하라. 

진짜 그럴거면 교회 건물을 철거하라. 

순전한 마음으로 초대교회의 가정교회 모습으로 돌아가라. 

 

[오늘의 기도]

너도 나도 사울이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놓은 현실의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이단 교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광훈과 손현보가 그렇습니다. 

혐오로 장사하는 개신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사랑과 평화, 정의와 공평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야 정책적으로 실무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행 헌법을 무시하고 거짓과 폭력을 선동하는 것을 어떻게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과연 그것이 복음입니까? 

 

주님, 당신의 진정한 복음이 선포되게 하소서.

새로운 교회를 보여주소서. 

복음주의가 왜곡되지 않게 하소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모든 것이 되어 복음대로 사는 삶을 무시했던 죄악을 용서하소서. 

함부로 맹세하고, 함부로 규정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사울 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스스로가 신이 되어 영원한 권세를 누리려는 악한 귀신의 장난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2월 28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6 베냐민 지역의 기브아에서 망을 보는 사울의 파수꾼들이 건너다 보니, 수많은 블레셋 군인들이 아우성을 치며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17 그러자 사울이 자기와 함께 있는 군인들에게 명령하였다. “우리 가운데서 누가 빠져 나갔는지 조사하여 밝혀 내어라!” 사람들이 조사하여 보니,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드는 병사가 없었다. 

18 그러자 사울은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라고 말하였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었다. 

19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 블레셋 진영에서 일어난 아우성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래서 사울은 제사장에게 궤를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였다. 

20 사울과 그를 따르는 온 백성이 함께 함성을 지르며 싸움터로 달려가 보니, 블레셋 군인들이 칼을 뽑아들고 저희끼리 서로 정신없이 쳐죽이고 있었다. 

21 블레셋 사람들 편을 들어 싸움터에까지 나왔던 히브리 사람들도, 이제는 돌이켜서 사울과 요나단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편이 되었다. 

22 또 전에 에브라임 산간지방으로 들어가 숨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블레셋 사람들이 지고 달아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뛰어나와 블레셋 군인들을 뒤쫓으며 싸웠다. 

23 그 날 주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오늘의 묵상]

내 정신은 신학적 여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 묵상을 하기 전 드는 생각이다. 

지난 10여년간 나는 신학적 닻을 내리고 가능하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학생사역을 마무리하고 청장년 사역으로 전환하면서, 교회 사역을 마무리하고 다양한 교회를 방문하면서, 그리고 특히 12.3 계엄을 경험하면서, 신학적 여정을 좀더 적극적으로 떠나기로 했다. 

닻을 올리고 돛을 내리는 신앙의 항해 말이다.

두려운 일이다. 

 

하나님은 사울의 두려움과 오만함을 보시고 그를 버리셨다. 

사무엘상 13:8-9
8사울은 사무엘의 말대로 이레 동안 사무엘을 기다렸으나, 그는 길갈로 오지 않았다. 그러자 백성은 사울에게서 떠나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9사울은 사람들을 시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한 다음에, 자신이 직접 번제를 올렸다. 

 

그리고 오늘 블레셋과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울은 여전히 못미덥다.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제사장 아히야(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손자)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궤를 함부로 움직이면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안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울이다.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 때문에 언약궤를 빼앗겼던 사건을 모르면 안된다. 

사울은 언약궤를 가져오라고 했다가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한다. 

자꾸 바꾼다. 

 

요나단의 용기과 믿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걸로 보인다. 

전쟁은 기울었다. 

블레셋 본진에서는 자기들끼리 죽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대로된 전투도 치르지 못한 채 블레셋은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 저자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칭송한다. 

“23 그 날 주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출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없는 왕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의 어떤 왕도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 

그 유명한 다윗과 솔로몬도 그랬다. 

 

인간에게 완전함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안 계셨다면 인간들은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 조금은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기준이 낮으면 불행의 정도도 낮아지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에 이르면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너무 완벽하신 그분!! 

 

신학적 여정에서의 구출은 무엇일까? 

멋진 항구에 정박하는 것인가? 

드넓은 대양을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것인가? 

물고기를 배에 가득 싣는 것인가? 

밤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 빛 아래에서 팔배개를 베고 코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인가?
나의 신학적 항해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아직은 그 답을 모르겠다. 

그 답을 찾기 전에는 기존에 정리된 것을 기본적인 나의 신념과 토대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항해의 실험실은 통렬하게 가동되어야 한다. 

내게 주신 운명일 수도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있다. 

교만함은 버리자. 

하나님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오늘의 기도]

저의 항해를 응원해 주소서. 

배우고 익히고 살아내게 하소서.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든지 주님을 신뢰하며 떠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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