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2월 26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젊은 병사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저 건너편에 있는 블레셋 군대의 전초부대로 건너가자.” 그러나 요나단은 이 일을 자기의 아버지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2 사울은 그 때에 기브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사울을 따라나선 군인들은 그 수가 약 육백 명쯤 되었다.
3 (아히야가 에봇을 입고 제사장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가봇의 형제인 아히둡이고, 할아버지는 비느하스이고, 그 윗대는 실로에서 주님을 모시던 제사장 엘리이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요나단이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
4 요나단이 블레셋 군대의 전초부대로 들어가려면 꼭 지나야 하는 길목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양쪽으로 험한 바위가 있었다. 한쪽 바위의 이름은 보세스이고, 다른 한쪽 바위의 이름은 세네이다.
5 바위 하나는 북쪽에서 거대한 기둥처럼 치솟아올라 믹마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남쪽에서 치솟아올라 게바를 바라보고 있었다.
6 요나단이 무기를 든 젊은 병사에게 말하였다. “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의 전초부대로 건너가자. 주님께서 도와 주시면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승리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7 그의 무기를 든 병사가 대답하였다. “무엇이든 하시고자 하는 대로 하십시오. 무엇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NIV
Then Jonathan said to the young man who was carrying his armor, “Come and let us cross over to the garrison of these uncircumcised; perhaps the LORD will work for us, for the LORD is not restrained to save by many or by few.”(6절)
주석
2-3절. 사울은 요나단의 계획만큼이나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다. 그가 실로에서 온 제사장 아히야를 동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아가는 상황에 어두웠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성경에는 평화의 시기에 대한 내용보다 전쟁과 갈등의 순간에 대한 내용이 훨씬 많다.
사울이 왕이 되는 과정도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의 표출이다.
사울이 왕이 되어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는 일도 이스라엘에겐 역경의 역사다.
사울을 따라나온 군인들의 숫자가 약 육백 명이면 사실 제대로된 전쟁을 치르기엔 역부족이다.
사울과 그의 군대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떠난 것을 알지 못했다(3절).
이 또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성경은 전쟁과 갈등의 서사구조로 가득하다.
평화로운 시대의 기록보다 고통과 전쟁의 기록이 더 많다.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가) 하나는 인류 역사는 고통의 역사이기에 성경 또한 인류 역사를 반영했다.
나) 다른 하나는 성경 또한 문학이기에 밋밋하고 평범한 이야기보다 자극적이고 흥미를 끄는 기승전결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다.
가)라고 전제하면 성경은 인류의 역사와 관계를 어떤 글보다도 잘 드러내기에 더욱 가치롭다.
성경을 읽으며 자신의 삶에 등장하는 수많은 긴장, 갈등, 전투를 상기하고 그것들에 적용할 수 있다.
홉스가 말할 대로, 인생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다.
매순간 전투가 일어난다.
비평과 비난이 때로는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는 곳이 인간 사회다.
사랑과 평화는 사상가들의 이상향에 있거나 혹은 평크 밴드의 이름으로 지어진다.
생존 경쟁은 언제나 치열하고, 내가 아닌 사람들을 ‘모두까기’해야 직성이 풀린다.
비판하지 않으면 부각되지 않는다.
비평가와 평론가가 창작자나 정치가보다 생명력이 더 길다.
셩경을 읽으며 자신이 처한 치열한 전투의 상황에 대입한다.
성경의 교훈을 전투에서 승리하는 법으로 삼아 매일의 전투력을 충전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요나단의 믿음을 전투력 충전재로 받아들인다.
나)라고 하면, 성경은 편집된 글이고 역사이기에, 편집자의 의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저자와 편집자는 왜 이 이야기를 이 지점에 배치했는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가?
사울의 어리석음인가?
아님 요나단의 용기와 지혜인가?
많은 신앙인들이 요나단의 믿음과 용기에 주목한다.
그리고 일상의 전투에서 요나단의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적용한다.
게다가 요나단의 병기 맡은 자의 믿음은 어떠한가?
요나단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부족하지 않다.
병기 맡은 자는 죽도록 충성하는 용감한 부하다.
자신의 상황에 따라 요나단의 믿음과 용기, 그 부하의 충성과 용맹함을 배우자고 적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싸움의 정당성을 따지지 않을 때 생긴다.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 잘못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일삼고 여론을 호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입장에서 싸움을 싸워나가겠다고 이 말씀을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긴다.
믿음과 용기와 충성과 용맹함은 실전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싸움에 나서기 전에 그 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의 잘못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자기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꼭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성경의 저자 혹은 편집자가 기승전결의 문학적 구조를 성경 이야기 구성에 사용했다면, 실제 역사는 이 보다 훨씬 지루하고 밋밋하고 평범하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돋보이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뒤편의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을 상상으로 채워넣어야 한다.
사울, 요나단, 다윗, 솔로몬… 그 모든 왕들의 이야기 뒷편에 숨겨져있는 몇 년간의 일상을 생각해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 또한 사실 대부분 밋밋하고 평범하고 그저그렇기 때문이다.
그 일상을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어찌보면 더 중요하다.
성경 구절 행간에 있는 그 숱한 시간들을 들춰내자.
하나님은 그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는지 상상하자.
인류 역사를 66권 성경 안에 다 다룰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류 구출과 구원의 역사를 보여줄 뿐이다.
행간의 그 넓고 깊고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들을 복원하자.
인류 구원의 역사는 너무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 기록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우리의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주님,
큰 사건에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주님을 알아가고 느끼는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무수한 시간들을 일상의 작은 일들을 반복적으로 처리해 나갑니다.
지루하고 밋밋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그 속에서도 주님의 일하심을 구하게 하소서.
윤석열을 파면시켜주소서.
헌법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벌하소서.
헌법을 고칠 수도 있고, 헌법기관들을 헌법적 절차에 따라 폐지하거나 새로 수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을 무시하고 폭력으로 무력화시키려는 것은 내란에 다름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보여 주소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당신의 나라를 더욱 공고히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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