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2월 21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마흔두 해였다. 

2 그는 이스라엘에서 삼천 명을 뽑아서, 그 가운데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베델 산지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로 보내고, 나머지 군대는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들었다. 사울이 온 나라에 나팔을 불어서, 히브리 사람 소집령을 내렸다. 

4 온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이 블레셋 수비대를 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길갈로 모여 와서 사울을 따랐다.

5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에다가, 기마가 육천이나 되었고,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서 셀 수가 없었다. 블레셋 군대는 벳아웬의 동쪽 믹마스로 올라와서 진을 쳤다. 

6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위급하게 되었다는 것과 군대가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저마다 굴이나 숲이나 바위틈이나 구덩이나 웅덩이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었다. 

7 히브리 사람들 가운데서 더러는 요단 강을 건너, 갓과 길르앗 지역으로 달아났다. 사울은 그대로 길갈에 남아 있었고, 그를 따르는 군인들은 모두 떨고 있었다. 

 

주석

2절. 사울이 뽑은 3천 명은 전쟁을 위한 지원병 전체라기보다는 가신이나 왕궁의 수비대로 일할 사람일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군대가 있으면, 선공이 최선이라는 말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우려했던 일이다. 

상비군을 두고, 전쟁을 대비하다보면, 때로는 먼저 공격하게 된다. 

침입자에 대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동태를 보고 선제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된다. 

요나단은 그의 군사들을 데리고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했다. 

당연히 블레셋은 전쟁 수행을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도 징집명령을 내려야 했다.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왕이 있으면 생길 일 중에 하나였다. 

왕이 있으면, 왕권 강화를 위해 크게 두 가지를 하게 된다. 

하나는 군비 증강이다. 

다른 하나는 왕궁 및 성전 공사를 통한 중앙 집권화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왕정을 선택하면서 불가피하게 전쟁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 

블레셋의 군사력이 참으로 막강했음에도 함부로 수비대를 건드린 요나단과 사울의 잘못이 크다. 

이스라엘은 왕정을 통해 전쟁을 막으려 했지만, 도리어 전쟁의 참화를 더 많이 맞닥뜨리게 되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왕정은 필수불가결한 결정이었다. 

다른 나라들도 다 왕정을 통해 국가를 운영하고 전쟁을 수행하는데, 이스라엘만 신정 체제로 살아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면 왕정을 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당장 왕정 초기에는 비용도 많이 들고 전쟁에 휩쓸리게 될 가능성도 높아지지만,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나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왕과 군대가 필요했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놓고 보니, 왕정을 선택하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였다. 

나라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레 왕정을 선택하고, 그 왕국이 더 나아가 제국이 되곤 했다. 

그런 역사 발전의 과정에서 이스라엘만 벗어날 수 있었을까? 

끝까지 지파 동맹 체제로 생존할 수 있었겠는가? 

지파 동맹 체제는 최선이고, 왕정은 최악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을 지적하셨지, 왕정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나? 

고민 지점이다. 

 

왜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가? 

이상과 현실의 문제를 자주 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적인 정치 사회 문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 이상과 전혀 다르거나 되레 반대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무턱대고 이상만 옳으니 나머지는 다 잘못됐다거나 악마화시키는 것이 과연 괜찮은지 고민이 생긴다. 

현실은 복잡하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이상적인 모델을 꾸준히 연구하고 그에 맞는 현실적인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 

 

한국 개신교가 더 분열로 치닫고 있다. 

극우 개신교 목사와 지도자들이 헌법을 뛰어넘는 발상과 발언을 일삼고 있다. 

이를 반대하는 그룹의 움직임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미하다. 

하지만 교회 내 성도들 중에 합리적인 분들은 극우 목회자와 리더들을 마음 속에서 결별하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중들이 개신교는 극우 꼴통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복잡하게 엮여 있는 상황에서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조화롭게 만들어가야 할지 의문이다. 

 

현재 내 생각은 분명하다. 

극우 개신교는 더 이상 개신교를 대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현재 개신교를 과잉대표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과 혐오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다. 

예수님의 정신, 즉 사랑과 섬김과 자기 희생과 자기 반성과 수용과 환대로 이뤄지는 나라다. 

배제, 배척, 혐오, 미움, 분리, 공격, 폭력, 무질서로 이뤄진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강자가 희생하고 섬기는 나라다. 

따라서 현재 극우 기독교는 기독교 정신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 

승리주의에 심취하여 돈과 힘으로 밀어 부치려는 태도는 잘못이다. 

 

[오늘의 기도]

현실의 문제에 눈감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시에 그 이상을 현실에 적용하도록 이끄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항상 헷갈립니다. 

현실에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주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겠다고 했는데, 

너무 부족합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부끄러운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약간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