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지역 교회 청소년부 부장집사인 그는 이번 여름 청소년부 수련회에서 저녁 집회 설교를 해달라고 몇 달 전에 부탁을 했었다. 이번 통화는 그 후속 통화였다. 친구는 요즘 그 교회 청소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신앙적 고민을 하고 있는지 꼼꼼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회심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준비해주길 부탁했다. 그는 요사이 보기드문 부장집사님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와의 통화로 인해 수련회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고, 참가할 학생들에게 최선의 것으로 대접하고 싶은 열망이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책을 들었다. 안식월 복귀후 사무실 책상에 놓여 있었던 책은 조장호님의 “오늘을 위한 아우구스티누스 인생 수업”(IVP)이었다. 잠깐만 읽어도 명료하고 유려한 문체에 쉽게 몰입이 되었다. 번역서가 아닌 한국인 저자의 힘이다.
회심이라는 주제가 머리 속에 박혀 있으니, 그의 책을 읽을 때도 그 주제와 관련된 내용들이 쏙쏙 들어왔다.
“회심은 궁극적으로 사랑하고 열망하는 대상이 바뀌는 것이며, 사람의 전 존재를 움직이는 중심은 바로 사랑이다. 이 점에서 선생은, 지식과 앎을 앞세웠던 그리스・로마 철학의 지성주의(intellectualism) 경향과 달리, 의지와 사랑을 통해 인간 존재의 역동을 정확하게 집어낸다.”(p.32)
저자는 신앙의 거대한 봉우리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많은 이야기 속에서 회심이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회심은 사랑과 열망의 대상이 바뀌는 거란다. 그리고 사람의 존재 중심은 다름 아닌 사랑이란다.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관련된 설교도 수십차례 해 왔지만, 오늘따라 다시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남는다.
그렇다. 회심은 일차적으로 인간 존재 중심에 있는 사랑과 열망이 바뀌는 것이다. 거기에 머물지는 않는다. 사랑과 열망이 인간의 왜곡된 의지를 변화시킨다. 아는 것, 지식만으로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사랑의 대상, 열망의 방향이 바뀌어 의지가 발동하여 그 대상과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열의가 느껴진다.
“사랑이 건강한 질서를 되찾아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의지의 변화가 온 것이다.”(p. 101)
사랑의 변화, 의지의 변화만으로도 회심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결국 구제적인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 회심이다. 후회하고도 다르다. 뉘우침, 용서를 빔, 잘못 인정 등과도 다르다. 회심은 사랑과 열망의 방향을 틀어 그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는 일까지 포함한다. 행동의 변화까지 회심이다.
우연히 발견한 책에서 좋은 힌트, 필요한 통찰을 얻는다. 나에겐 이런 것이 은혜다. 생각지 못한 일, 사건, 자료, 만남을 통해 고민의 단초가 연결되고 풀어진다. 오늘도 우연히 발견하고 읽게 된 이 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
“Now behold, as your life was highly valued in my sight this day, so may my life be highly valued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may He deliver me from all distress.” Then Saul said to David, “Blessed are you, my son David; you will both accomplish much and surely prevail.” So David went on his way, and Saul returned to his place(24-25절).
1. 아브넬
나아브넬은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잠이 번쩍 깼다.
다윗의 목소리였다.
그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사울 왕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했으니,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어디 감히…
그런데 정말 왕의 창이 사라졌다.
화들짝 놀라 다윗이 소리치는 방향으로 몸을 틀고 바라봤다.
저 멀리 산 꼭대기에 다윗과 한 사람이 서서는 이쪽을 향해 말하는 것이 보였다.
창과 물병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왕의 물병도 사라졌다.
정말 저들이 우리에게 찾아왔던 것이다.
최소한 저들이 아니라도 첩자를 시켰건, 날렵한 부하를 시켰건, 우리 진영 깊숙이 들어왔다는 건 사실이다.
이건 방어 실패다.
사울 왕이 다윗을 ‘나의 아들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윗을 잡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건 정말 최악이다.
다윗이 복귀하는 것은 큰 위협이다.
게다가 다윗이 하는 말의 핵심은, 사울 왕을 누군가가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 아니라 신하 중에 왕을 속여 다윗을 죽이게 만들었다는 거다.
다윗이 복귀하면 사울의 명령을 따라 다윗을 추격했던 우리 모두 죽게 된다.
그런데 왕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매순간이 위기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위기를 경험케 하시는가?
다윗의 하나님은 아브넬의 하나님은 아니란 말인가?
솔직히 내가 사울 왕을 부추긴 것은 아니다.
왕이 스스로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했던 것이다.
그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사울의 시기를 신하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경계 근무에 실패한 것, 안일하게 대처한 것은 나의 잘못이 맞다.
그러나 왕이 다윗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2. 다윗의 하나님, 모두의 하나님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시기만 한가?
아님 모두의 하나님이신가?
답은 정해져 있다.
그분은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울 혹은 아브넬의 하나님의 아니다.
권력자의 시기를 받아 눈 밖에 나서 몇천명의 군사들로부터 쫓기는 다윗의 하나님이시다.
연약한 자, 고통받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권력의 부당한 압제로부터 죽음의 골짜기를 걷고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못해 과잉충성하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빼앗기고 찢겨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나에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의 욕망을 극대화하길 원하시기보다 당신의 뜻이 분명해지길 바라시는 분.
한 개인인 나의 소망을 무조건 들어주시는 분이시기보다 거대한 이야기의 일원으로 그 뜻에 따라 살기를 원하시는 분.
그렇다고 그분이 나의 소망과 소원에 무관심하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그분에겐 그분의 뜻이 있다.
나의 뜻이 그분의 뜻을 넘어서서 강변되어서는 안된다.
오늘의기도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며 주님이신 여호와 하나님,
한 개인의 기도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시에 한 개인의 기도를 넘어서서 당신의 소망과 뜻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이 참 기쁨입니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인간의 주체성이 강조됩니다.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어떤 우상의 동굴에서도 벗어나서 초인의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1 십 광야의 주민이 기브아로 사울을 찾아와서 밀고하였다. “다윗은 여시몬 맞은쪽 하길라 산 속에 숨어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2 그래서 사울이 일어나, 이스라엘에서 삼천 명을 골라 거느리고, 십 광야에 있는 다윗을 찾으러 직접 십 광야로 내려갔다.3 사울은 여시몬 맞은쪽 하길라 산 속으로 들어가 길 가에 진을 쳤다. 이 때에 다윗은 바로 그 광야에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자기를 잡으려고 그 광야로 쫓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4 다윗은 곧 정찰대원들을 파견하여, 사울이 와 있는 장소가 어디인가를 확인하게 한 다음에,5 사울이 진을 친 곳으로 가 보았다. 다윗이 그 곳에 와 보니, 사울과 넬의 아들 아브넬 군사령관이 자고 있었는데, 사울은 진의 한가운데서 자고, 그의 둘레에는 군인들이 사방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6 그래서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에게, 누가 자기와 함께 사울의 진으로 내려가겠느냐고 물으니, 아비새가 나서서, 자기가 다윗과 함께 내려가겠다고 대답하였다.7 이리하여 다윗이 아비새를 데리고 밤에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 보니, 사울이 진의 한가운데서 누워 자고, 그의 머리맡에는 그의 창이 땅바닥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군인들은 그의 둘레에 사방으로 누워 있었다.8 아비새가 다윗에게 자청하였다. “하나님이 오늘, 이 원수를 장군님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제가 그를 당장 창으로 찔러 땅바닥에 박아 놓겠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이, 한 번이면 됩니다.”9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에게 타일렀다.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누구든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였다가는 벌을 면하지 못한다.”10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말하지만, 주님께서 사울을 치시든지, 죽을 날이 되어서 죽든지, 또는 전쟁에 나갔다가 죽든지 할 것이다.11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이를 내가 쳐서 죽이는 일은, 주님께서 금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12 다윗이 사울의 머리맡에 있던 창과 물병을 들고 아비새와 함께 빠져 나왔으나, 보는 사람도 없고, 눈치채는 사람도 없고, 깨는 사람도 없었다. 주님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셔서, 그들이 모두 곤하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NIV
Abishai said to David, “Today God has delivered your enemy into your hands. Now let me pin him to the ground with one thrust of the spear; I won’t strike him twice(8절).”
주석
11절. 다윗이 밤에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 탈취한 창은, 왕의 직위를 상징하며 왕의 공식 의전에 사용되는 무기였습니다. 어떤 사람의 물과 무기를 빼앗았다는 것은, 그의 생명이 빼앗은 이의 손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IVP 성경배경주석-구약, 450쪽).
[오늘의 묵상]
1. 아비새
다윗은 장차 왕이 될 인물이다.
그가 당하는 고통에 깊이 공감된다.
그는 잘못이 없다.
사울 왕의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
나발이 무시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를 잘 보위하여 추후에 왕으로 옹립하는 것 그게 아비새 내가 할 일이다.
이 날도 사울의 위협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웠다.
수천의 군사들이 코앞에 왔다.
느닷없이 다윗이 아히멜렉과 나 아비새에게 제안을 한다.
사울 왕의 진영으로 들어가자라는 것이다.
왜?
도대체 이 작전의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수천의 군사를 뚫고 사울 왕을 잡자는 것인가?
아님 군사 동향을 파악하자는 것인가?
후자라면 세작을 보내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사울을 죽이자는 이야긴데, 과연 둘이서 가능한 일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다윗이 그동안 보여준 전략과 임기응변을 알기에, 무엇보다 그의 권위가 하나님과 맞닿아 있기에 따르기로 했다.
밤에 내려가니 모두들 아주 편하게 자고 있었다.
경계도 약했다.
싸움을 하러 온 사람들이 맞나 싶었다.
아마도 국가간의 전쟁이 아닌데다 쫓기는 신세인 다윗 일당이 무엇을 할까보냐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울 왕이 잠들어 있는 곳까지 손쉽게 찾아갔다.
진의 중앙에 있을 것이 당연했다.
아무도 불침번을 서지 않고 있었다.
왕과 더불어 모든 참모들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절호의 기회다.
이건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기회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다윗 군대의 장군으로서 내가 적장을 벨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다윗이 시키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도망자의 신세도 끝이다.
“장군님!! 제가 그의 목숨을 끊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울을 맡기셨습니다.”
작은 소리지만 단호했다.
“아니다. 주님께서 기름부어 주신 자를 죽여서는 안된다.”
와… 이런… 숨이 막힌다.
답답하다.
지난 번에도 사울을 살려 준 적이 있었다.
그 때 사울은 다시는 다윗을 뒤쫓지 않겠다 했다.
그런데 상황은 어떤가?
여전히 쫓고 쫓기는 상황 아닌가?
그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답답한 소리를 하다니…
순간 진절머리가 나고, 욱하는 뱃심이 올라왔다.
“창과 물병만 챙기고 가자”
이 아까운 기회를 이렇게 날리다니…
이 절호의 찬스를 이렇게 허비하다니…
2.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비새는 아마도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다윗의 말을 과연 들어야 하는지, 아님 과감하게 이 상황을 종결해야 하는지..
그동안 겪은 역경을 생각하면, 다윗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과감하게 결행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비새는 다윗의 말을 순종했지만, 나라면 좀더 과감했을 수도 있었겠다.
도망자의 신세를 모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너무나 아쉽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욕망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정말 많다.
내가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가 있다.
순간 순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거대 서사가 있다.
또한 미시적인 바램도 있으시다.
그분의 거대 서사 속에 들어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미시적인 뜻도 분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도가 필요한 이유다.
묻고 기다리고 행동하고 다시 묻고 기다리고 행동하고의 반복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를 계속 바라보고 응시한다.
내면의 욕망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들을 것인가?
가끔 내 욕망의 소리가 너무 커질 때가 있다.
그 소리를 잠재워야 거대한 북의 미세한 떨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기에 내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주님의 뜻을 구한다.
[오늘의 기도]
지혜가 많으신 하나님,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 막막함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걷게 하소서.
눈에 보이는 당장의 필요를 쫓기보다 거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속 떠올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