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26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1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2 주님께서 임금님의 권능의 지팡이를 시온에서 하사해 주시니, 임금님께서는 저 원수들을 통치하십시오.

3 임금님께서 거룩한 산에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시는 날에, 임금님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고, 아침 동이 틀 때에 새벽 이슬이 맺히듯이, 젊은이들이 임금님께로 모여들 것입니다.

4 주님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그 뜻을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5 주님께서 임금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그분께서 노하시는 심판의 날에, 그분께서 왕들을 다 쳐서 흩으실 것입니다.

6 그분께서 뭇 나라를 심판하실 때에, 그 통치자들을 치셔서, 그 주검을 이 땅 이곳 저곳에 가득하게 하실 것입니다.

7 임금님께서는 길가에 있는 시냇물을 마시고, 머리를 높이 드실 것입니다.

 

주석

멜기세덱(4절)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시대에 예루살렘의 제사장이자 왕이었다. 고대 세계에서 왕이 최고 서열의 제사장직을 맡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통치자

 

시인은 새로운 왕의 등장을 노래하고 있다. 

오랜 세월 원수들로부터 고통 받은 백성들은 원수들을 물리치는 것을 넘어서 통치하는 위대한 왕을 고대한다. 

다윗을 닮은 왕, 솔로몬을 닮은 왕이 필요하다. 

시인의 노래는 단순한 바램과 소원의 표현이 아니다. 

시인은 노래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 원수들의 압제에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를 사로잡고 있는 큰 원수 사단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 새로운 왕, 위대한 왕의 등장이 필수적이다. 

인간의 왕은 언제나 실패해 왔다. 

다윗이라고 완전한가! 

솔로몬이라고 완전한가! 

소위 위대했던 왕들도 허점이 있고, 약점이 있고, 죄악이 있었다. 

시인은 그런 인간의 왕을 넘어선 새로운 통치자, 원수들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왕의 등장을 예언하고 있다. 

 

그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만이 원수들을 통치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인류를 사단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 

원수들은 무릎 꿇리고 결국 예수님의 발 앞에서 그분께 순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순종하기 싫은 세력은 산산히 흩어지고 더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업게 될 것이다. 

새로운 통치자 예수님의 등장을 고대하라. 

 

2.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종류의 왕이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때부터 유지되었던 왕과 제사장 역할을 분리를 뛰어넘는 왕이 되실 것이다. 

왕이라고 해서 자신이 제사장의 역할을 대신 할 수 없었다. 

사울 왕은 이 원칙을 어겼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혼났다. 

왕이 행정적, 군사적 통치력을 발휘하지만, 함부로 제사를 드려서는 안된다. 

제사장의 고유한 역할을 남겨 두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둘을 통합하신다. 

왕이기도 하시지만, 제사장의 역할을 하신다. 

그것도 멜기세덱과 유사한 제사장이시다. 

아브라함 때에 갑자기 등장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왕이자 제사장이었던 인물이 바로 멜기세덱이다. 

야곱의 12지파 중 레위 지파에게 제사장 역할을 맡기셨던 구약의 역사를 고려할 때, 이 멜기세덱은 정말 신비로운 인물이다. 

그의 선조들을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고고대(아브라함 시절) 예루살렘의 왕과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점이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욥도 그렇고 멜기세덱도 그렇고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왕과 제사장 역할을 통합했던 신비로운 멜기세덱의 모범을 따라 예수님도 영원한 왕이자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하실 것이다. 

 

제사장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 역할이다. 

제사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제사장의 제사와 축복을 통해 백성은 한 해를 보낼 힘을 얻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담대함을 얻었던 것이다. 

이 역할을 이제 예수님이, 새로운 왕이 감당하실 것이다. 

그것도 영원하다. 

일시적이거나 반영구적이거나 하지 않다. 

영원한 역할이며, 예수님은 그 일에 적격이시다. 

구약의 시인은 새로운 왕과 제사장의 통합 리더십의 출현을 고대하며 예언하고 있다. 

 

내가 섬기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구약의 수많은 시인과 예언자들이 고대하던 분이시다.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며, 참 왕이며, 참 제사장이시다. 

그분을 바라보는 일을 오늘도 쉬지 않을 것이다. 

 

올 여름에도 오직 예수님이 영광받으시는 날들을 보고 싶다. 

각종 수련회와 캠프, 그리고 수많은 예배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영광받으시고, 찬양받으시길 소망한다. 

예수님의 자신의 진정한 왕이자 제사장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길 고대한다. 

뜨거운 여름이 되길.

성령님이 더욱 뜨겁게 역사하시는 여름이 되길… 

 

 

[오늘의 기도]

진정한 왕,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 

이 아침에도 주님을 다시 찾습니다. 

주님께 마음의 초점을 맞춥니다. 

왕이신 주님, 저와 제 주변의 모든 상황을 다스려 주옵소서. 

주님께 묻고 주님의 뜻을 따라 결정하고 실행하고 싶습니다. 

제 맘대로 결정하지 않게 하소서. 

제사장이신 예수님, 제가 더욱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도록 도와주소서. 

그 친밀함 속에서 사랑과 평안을 누리게 하시고, 주변의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장마의 시작입니다. 

비로 인해 피해 입는 사람들을 보호하소서. 

외로워하거나 고독한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치료하소서. 

장마가 그치는 날, 이 세상의 전쟁도 그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7 07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9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인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10 주님의 날에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11 음성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12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오는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촛대가 있는데,

13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14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과 같이,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15 발은 풀무불에 달구어 놋쇠와 같고, 음성은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16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17 그를 때에, 내가 그의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것과 지금의 일들과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20 네가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심부름꾼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주석
18절: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권세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지금 닥칠 수 있는 죽음에 용감하게 맞서도록 격려해 줄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요한에게 본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큰 음성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큰 음성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분은 일곱 금 촛대(일곱 교회) 한 가운데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일곱 교회의 심부름꾼)을 쥐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모습은 성경의 여러 부분(겔 1:24, 9:2, 단 10:5-6, 7:9 참조)에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마주한 요한은 큰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이런 요한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7절). 그 분은 처음과 마지막,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고,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17, 18절). 초대교회에 전해진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

예수님과의 만남

 

사도 요한 만큼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지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했었다. 예수님은 삽자가에서 돌아가실 ,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길 정도였다. 서로 깊이 신뢰하는 관계라고 있다. 

예수님의 얼굴을 누구보다도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의 말년, 그는 밧모섬에 갇힌다. 

여러 환난을 겪었으며, 그럼에도 끝까지 인내하고 있는 요한은 밧모섬에서 성령님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음성을 듣게 된다. 

신기한 것은 앞에서 음성이 들리지 않고 뒤에서 그것도 엄청 크게 들렸다는 사실이다.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겼다기보다는 그저 신기할 뿐이다. 일반적이지는 않다. 아마도 깜짝 놀래키려고 그러셨나싶다. 

하나님은 굳이 음성으로 말씀하지 않으셔도 충분히 신적이다. 

작은 음성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도 없는데 소리가 들린다면 깜짝 놀라게 것이다. 

그런데 뒤에게 음성이 들렸다. 엄청 놀랐을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들어 육체의 귀는 쇠하였을지 모르나 요한의 영적인 귀는 엄청난 음성을 아주 정확하게 캐치하였다. 

노인 요한, 그는 이제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다. 

젊었을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자하고 자비로웠던 예수님의 모습보다는 위엄과 능력으로 가득한 모습이었으며, 언뜻 보기에는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모습으로 계신다. 

영광스러운 왕의 모습이었다. 흰머리, 붉은 눈동자, 발이 끌리는 , 가슴엔 금빛 띠를 누르시고, 발에는 장화를 신으셨는데 놋쇠같은 강인한 신이었다. 하나같이 위엄있고 권위있는 모습이었다. 과거에 예수님이 입고 다니시던 일반인의 복장이 아니었다. 

노인 요한은 이제 왕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다시 보게 것이었다. 

어찌보면 모습이 원래의 왕되신 예수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예전에 보았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을 하러 세상에 오신 분의 모습이었지, 우주의 왕의 풍모와 복장을 갖춘 왕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진정한 왕으로 오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왕의 모습으로 오실 있었던 여러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죽음을 맛보았다. 정말 죽었다고 봐야 한다. 그저 죽은 했다가 아니다. 정말 그분은 죽음이 가지고 있는 여러 특성을 몸소 경험하셨다. 숨이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오랜 영적 연합에서 이탈되었다. 어떤 문서에 보면 죽음의 기간에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말도 있다. 그걸 인정하든 하지 않든 그분이 인간이 겪는 죽음의 과정을 온전히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주는 고통과 외로움과 막막함을 그분도 경험하셨다. 그렇게 그분은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는 싶었다. 하지만 죽음도 그분을 계속 가두지 못했다. 사단도, 지옥도, 죽음도, 죄의 구렁텅이도 그분을 가두지 못했다. 그분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영원한 생명의 기운이 다시 작동하였다. 그러니 사망의 세계, 지옥의 세계도 그분께 순종할 밖에 없다. 사망도 지옥도 이제 주인은 엄밀하게 말해 사단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분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사망과 지옥의 불이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그분은 모든 것의 중심이시며 모든 자체이시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역사의 처음과 역사의 마지막은 바로 그분에게 있다. 

빛의 시작과 우주의 시작, 그리고 빛의 만개와 새로운 우주의 시작은 바로 그분에게 달렸다. 

지구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시는 비전. 

예수님은 날을 기다리고 계시다. 

 

왕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인생 최대의 사건이다. 

자기를 왕으로 알고 자라나는 수많은 인생들에게 진정한 왕은 오직 예수님 분이라는 사실은 충격이다. 

여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길 기도한다. 

때로 예배에서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길 기도한다. 

 

——

왕이신 예수님, 

당신의 모습을 실물영접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습니다. 

빨리 오셔서 왕이신 예수님께 저의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싶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여름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수련회와 훈련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주님, 오늘도 왕되신 주님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집중하고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30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이것은 다윗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한다. 높이 일으켜 세움을 받은 용사, 야곱의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 이스라엘에서 아름다운 시를 읊는 사람 말한다.

2 주님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니, 그의 말씀이 나의 혀에 담겼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다스리는 ,

4 구름이 끼지 않은 아침에 떠오르는 맑은 아침 햇살과 같다고 하시고, 비가 뒤에 땅에서 새싹을 돋게 하는 햇빛과도 같다고 하셨다.

5 진실로 나의 왕실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지 아니한가?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만사에 아쉬움 없이 갖추어 주시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어찌 나의 구원을 이루지 않으시며, 어찌 나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랴?

6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아무도 손으로 움켜 없는 가시덤불과 같아서,

7 쇠꼬챙이나 창자루가 없이는 만질 수도 없는 , 불에 살라 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시인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노래합니다(1-2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장차 한 의로운 왕이 나타나 생명력 넘치는 햇살과도 같이 임할 것입니다. 그 햇빛은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낼 것입니다(3-4절). 자신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반면 악한 사람들은 가시덤불 같이 불태워질 것입니다(5-7절).

 

다윗의 마지막 예언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의로 다스리는 왕, 장차 오실 메시아를 떠올립니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을 공의로 다스릴 진정한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이 땅의 모든 고통과 어둠을 물리치고 마침내 다시 오실 온전한 왕을 기다리며 본문을 묵상합시다.

 

——

 

다윗의 자기 정체성 

 

다윗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로 규정한다. 

높이 일으켜 세움을 받은 용사, 

기름 부어 세우신 , 

그리고 아름다운 시를 읊는 사람. 

용사, , 시인 

하나만 해도 인정받는 사람이 것이다. 

용사이기만 해도, 왕이기만 해도, 시인이기만 해도 

그러나 그는 싸움을 잘하는 용사면서 왕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에 못지 않게 시를 지어 노래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었다. 전사, 통치자, 그리고 예술가였던 것이다. 

 

이런 정체성을 형성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은 지대했다. 다윗도 사실을 온전히 인정했다. 

높이 일으켜 세움을 "받은"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것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용사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일으켜 세워주신 것이다. 

기름부어 주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스스로 기름을 부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이 것이 아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알기에 그는 감사의 , 찬양의 , 탄원의 , 도움의 시를 지을 수가 있었다. 

자시 스스로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 위한 시를 것이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시인의 자리에 있게 했다.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 것이다. 

 

공의의 통치차,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 

 

하나님은 공의로 통치하는 왕을 원하셨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왕을 원하셨다. 

자기 맘대로 자기 유익을 위해, 자기 쾌락을 충족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식 속에서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왕을 기대하셨다. 

다윗 왕이 그러하길 바라셨다. 

비록 시에서는 다윗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충족되는 사람인양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윗은 어느 순간부터는 철저히 망가진 군주였다. 

하나님이 마치 안계신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계획적으로 죽일 있단 말인가? 

그러기에 그의 잘못은 역사에 길이 남아 후대에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시점에 잘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자신의 잘못을 전혀 모르지 않고 있는 다윗이 기어코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5 진실로 나의 왕실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지 아니한가?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만사에 아쉬움 없이 잘 갖추어 주시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어찌 나의 구원을 이루지 않으시며, 어찌 나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랴?

 

비록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의 명예는 실추되었고, 사실 자신의 왕실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현재의 모습이라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기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주실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다른 몰라도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신실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들, 유다의 자손들은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영원한 왕을 그들에게 내려보내 주실 것이다. 완전한 , 공의와 사랑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 모든 인간의 딜레마를 해결 있는 . 메시야를 그들은 기다린다. 다윗은 실패했지만, 다윗과의 약속을 통해 진정한 왕이 도래할 것이다. 다윗은 약속을 신실하게 믿었고 신뢰했다. 다윗이 점이 있다면 바로 지점이다. 

 

——

주님,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강한 확신 속에서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의 약속에 깊게 뿌리내리며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립니다. 

저에게 확신과 용기를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28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지휘자를 따라 소산님에 맞추어 부르는 고라 자손의 노래, 마스길, 사랑의 노래]

1 마음이 흥겨워서 읊으니, 노래 가락이라네. 내가 왕께 드리는 노래를 지어 바치려네. 나의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다네.

2 사람이 낳은 아들 가운데서 임금님은 가장 아름다운 , 하나님께서 임금님에게 영원한 복을 주셨으니, 임금님의 입술에서는 은혜가 쏟아집니다.

3 용사이신 임금님, 칼을 허리에 차고, 임금님의 위엄과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4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전차에 오르시고 영광스러운 승리 거두어 주십시오. 임금님의 오른손이 무섭게 위세를 떨칠 것입니다.

5 임금님의 화살이 날카로워서, 원수들의 심장을 꿰뚫으니, 만민이 임금님의 아래에 쓰러집니다.

6 하나님,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무궁토록 견고할 것입니다. 주님의 통치는 정의의 통치입니다.

7 임금님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임금님의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셨습니다. 임금님의 벗들을 제치시고 임금님께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8 임금님이 입은 모든 옷에서는 몰약과 침향과 육계 향기가 풍겨 나고, 상아궁에서 들리는 현악기 소리가 임금님을 흥겹게 합니다.

9 임금님이 존귀히 여기는 여인들 가운데는 여러 왕의 딸들이 있고, 임금님의 오른쪽에 있는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단장하였습니다.

10 왕후님!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왕후님의 겨레와 아버지의 집을 잊으십시오.

11 그리하면 임금님께서 그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임금님이 그대의 주인이시니, 그대는 임금님을 높이십시오.

12 두로의 사신들이 선물을 가져오고, 가장 부유한 백성들이 그대의 총애를 구합니다.

13 왕후님은 금실로 수놓은 옷을 입고, 구중 궁궐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니,

14 오색찬란한 옷을 차려입고 임금님을 뵈러 때에, 뒤엔 들러리로 따르는 처녀들이 줄을 지을 것이다.

15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안내를 받아, 왕궁으로 들어갈 것이다.

16 임금님, 임금님의 아드님들은 조상의 뒤를 이을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그들을 세상의 통치자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17 내가 사람들로 하여금 임금님의 이름을 대대로 기억하게 하겠사오니, 그들이 임금님을 길이길이 찬양할 것입니다.

 

왕과 왕후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소개하며(1절), 신랑이신 왕을 입장시키고 왕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와 그의 영광을 선포합니다(2-8절). 이어서 신부인 왕후를 입장시킵니다. 왕후에 대해 권면하면서 신부의 영광과 그 옷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9-15절). 그리고 왕의 왕조가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며 신랑 신부를 축복합니다(16-17절).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해석하여 왕의 혼인 잔치를 이해했습니다. 우리도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 되는 교회의 연합으로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부인 우리는 신랑이신 주님만을 높이며 그분의 주인 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전에 살던 세상 집을 떠나, 신랑이 다스리는 그의 나라에 대해 듣고 생각해야 합니다.

 

——

 

가지 질문이 생긴다. 

시인은 어떤 임금을 지칭하고 있는가? 

얼필보면 다윗 왕을 지칭하는 같기도 하고, 솔로몬 같기도 하다. 

다른 왕인가? 고라자손'이라고만 하면 시대를 특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내부의 내용만으로 임금이 누구인지 특정하기도 쉽지 않다. 

 

시심의 해설을 참고할 , 왕과 왕후의 결혼식에 부르는 축하 노래라고 한다면, 더욱이 시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위대하지 않더라도 왕과 왕후를 칭송해야 함이 옳겠다. 

그러니 더더욱 왕이 누군지 알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시를 통해 있는 것은 왕의 이상적인 역할과 왕후의 이상적인 태도일 것이다. 

 

4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전차에 오르시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주십시오. 임금님의 오른손이 무섭게 위세를 떨칠 것입니다.

 

시인은 이상적인 왕의 모습으로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전장터에서 전차를 타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왕은 전사여야 하다.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임금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싸우는 왕이어야 한다.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존재여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행위다. 

현실 정권의 통치자는 하나님의 성품인 정의를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시는 악에 대해서는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임금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왕후, 왕비는 어떠해야 하는가? 

왕비는 자신이 알고 있었던 삶의 패턴과 자기 가족의 정신을 버리고 왕가의 삶의 패턴과 정신을 배워야 한다. 

세계관적 변화, 삶의 태도의 변화, 우선순위과 가치관의 변화가 수반된다. 

왕비는 이제 왕이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가족이 함께 일에 매진한다. 

어쩔 없이 왕이 전쟁터에 나갈 때면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의 무사귀환을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왕비의 숙명이다. 기다림, 기도 그리고 왕의 무사귀환에 대한 감사의 찬양

왕비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존재가 되어간다.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존재.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혹은 왕비 같은 존재들이다. 

왕이 예수님이시라면 우리는 왕비라고 있다. 

왕과 결혼하는 왕비. 기존의 삶의 스타일과 태도, 그리고 정신을 벗고, 그분의 새로운 정신을 덧입는다. 

그렇게 왕의 일에 협력한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지금도 싸우시는 예수님을 위해 우리도 함께 싸워간다.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싶다. 

왜냐하면 진리가 무엇인지 계속 의심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들이 과연 진리였는가? 

철학적 회의주의가 문화적 회의주의 혹은 문화 상대주의로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다. 

그에 대한 반작용도 없지는 않다. 

흔들리기 싫다. 자신의 입장이 진리라고 굳게 믿고 싶다. 

내가 속한 , 내가 속한 공동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방식, 일종의 보수, 혹은 수구적 사고가 조금씩 확장되는 같다. 그런데 이런 수구적 사고에서 드러나는 진리는 위험하기 그지 없다. 자국 최우선주의를 펼쳤던 트럼프 계열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고 방식은 갈등을 증폭시키고 전쟁을 유발한다.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 

문제는 문화 상대주의에 의해 역사적으로 억압되었던 계층들이 세력을 얻어가면서 반작용의 힘도 세어진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약자로 지냈던 사람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들의 아픔에 동감하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어야 한다. 그들 입장의 역사가 새롭게 기술되기도 한다. 

반작용을 어떻게 지혜롭게 다루어야 하는가가 앞으로의 과제다. 

 

진리와 정의를 위한 싸움.

진리와 정의를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에 점점 어려워진다. 

피아식별이 분명한 것이 싸울 때는 유리하다. 

누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불분명한 싸움에는 절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 진리와 정의가 무엇인지 더욱 철저하게 물어야 하고 대답을 만들어야 한다. 

 

신앙생활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마음이 갑자기 무거워진다. 

오늘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 주님께 말을 건넨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의 진리, 주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쳐달라면서 

 

 

——

진리와 정의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진리와 정의를 알려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론들이 저마다 자신의 생각과 관점이 진리요 정의라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저는 하나님이 진리요, 정의라고 믿고 있습니다. 

믿음이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고,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 되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 

주님께서 먼저 싸워주시고, 허탄한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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