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04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 뒤에 압살롬은 자기가 수레와 여러 필을 마련하고, 호위병도 이나 거느렸다.

2 그리고 압살롬은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성문으로 들어오는 가에 있곤 하였다. 그러다가, 소송할 일이 있어서, 판결을 받으려고 왕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압살롬은 그를 불러서, 어느 성읍에서 오셨느냐고 묻곤 하였다. 사람이 자기의 소속 지파를 밝히면,

3 압살롬은 그에게 "듣고 보니, 옳고 정당한 말이지만 사정을 대신 말해 사람이 왕에게는 없소" 하고 말하였다. 압살롬은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하였다.

4 더욱이 압살롬은 이런 말도 하였다. "누가 나를 나라의 재판관으로 세워 주기만 하면, 누구든지 소송 문제가 있을 때에 나를 찾아와서 판결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고, 나는 그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려 것이오."

5 누가 가까이 와서 엎드려서 절을 하려고 하면, 그는 손을 내밀어서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곤 하였다.

6 압살롬은, 왕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하였다. 압살롬은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7 이렇게 지났을 때에 압살롬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주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니, 헤브론으로 내려가서 저의 서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8 종이 시리아의 그술에 머물 때에, 주님께서 저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주기만 하시면, 제가 헤브론으로 가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9 왕이 그에게 평안히 다녀오라고 허락하니, 압살롬은 곧바로 헤브론으로 내려갔다.

10 그러나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첩자들을 보내서, 나팔 소리가 나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고 외치라고 하였다.

11 그 때에 이백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손님으로 초청받은 것일 뿐이며, 압살롬의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따라가기만 사람들이다.

12 압살롬은 사람을 보내어서, 다윗의 참모이던 길로 사람 아히도벨 그의 성읍인 길로에서 올라오라고 초청하였다. 아히도벨은 길로에서 정규적인 제사 일을 맡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반란 세력이 점점 커지니,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도 점점 많아졌다.

 

압살롬이 반역을 꾀합니다. 수레와 말을 모으고, 성문 곁에서 왕과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 합니다.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친절한 모습을 보인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1-6절). 그렇게 반란을 준비한 지 사 년이 지나고 압살롬은 다윗이 처음 왕이 되었던 헤브론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서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알리고, 다윗의 뛰어난 부하였던 아히도벨까지 합류하여 세력은 더욱 확장됩니다(7-12절).

 

압살롬이 성문 곁에서 반란을 준비한 4년의 기간 동안 다윗은 무엇을 한 걸까요? 백성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는 것을 다윗은 몰랐을까요? 압살롬의 계략이 성공한 배경에는 백성의 마음을 돌보지 않은 다윗의 무책임함이 큽니다. 내가 보살펴야 할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의 마음이 허탄한 곳에 빠지지 않도록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오늘이 되길 기도합시다.

 

——

정당성이 없는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의 반역 도모는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다윗만해도 블레셋의 거대한 장군 골리앗을 무찌르며,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했다. 그럼에도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어쩔 없이 도망자가 되었으며, 사울 입장에서는 반역자라고 소문을 내었다. 

허나 다윗은 사울을 죽일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라고 대우하며 그를 죽이지 않았다. 

반역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몇번이나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 다윗과 압살롬은 차원이 다른다. 

압살롬은 당시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는 상황이 아니었다.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그의 활동에 제약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다윗이 그가 하는 행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4년이나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다윗은 언젠가는 압살롬을 용서하려고 했을 것이다. 

기다리면서 압살롬의 죄의 값을 치를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다시 그를 복권시켜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자체가 다윗의 이런 장기적 계획에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4 동안 예루살렘 성문에서 백성들을 만나서 하는 말들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일종의 왕자 수업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왕이 되기 위해 백성들의 삶을 듣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참으로 잘하는 행동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다윗 같은 전략에 뛰어난 사람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첩보를 듣지 않았을리 만무하다. 

알면서도 허용한 것이리라. 수업을 수행하는 압살롬을 은근히 대견해 하면서 말이다.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지금은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순간이며 충분히 죄의 값을 치르고 나면 멋진 왕이 자격을 갖추게 것이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간다고 , 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간다고 , 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헤브론은 다윗의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유다의 왕으로 지냈던 곳이다. 

헤브론은 다윗 왕국의 시작점이었다. 

그런 헤브론에 그의 아들 압살롬이 예배를 드리러 간다고 , 어찌보면 긍정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없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다는 아들의 다짐을 엿보았던 아닐까. 

 

다윗은 사울 왕의 직계 자손도 아니었고, 정권의 미움을 받아 도망자의 삶을 살다가 적국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망명도 했었지만, 반역을 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압살롬의 다윗의 친아들이며, 왕의 계승 서열 1위이고, 여전히 예루살렘에 살고 있으며, 점점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과거의 잘못이 더이상 왕위를 계승하는 데에 여러움을 주지 않을 상황이 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반역을 실행한 것이다. 

아들의 반역을 눈치 못한 다윗의 과신도 문제지만, 문제는 아들 압살롬에게 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유지하기 위해 반역을 선택했다. 

욕망 덩어리 인간의 모습을 압살롬이 보여준다.

단순히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으로 보는 것은 나라의 통치자와 권력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관계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다.

욕망이 선을 넘었다. 

압살롬의 간계는 항상 선을 넘는다. 

암논을 살해하던 장면, 아버지를 알현하기 위해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는 장면, 그리고 반역을 위해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하는 장면 모든 장면에서 압살롬은 선을 넘는 욕망을 보여준다. 

생계형 범죄, 우발적 범죄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욕망이 선을 넘자, 그가 가진 모든 자원을 모아 계획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반역을 꾀한다. 

왕의 호의를 자신의 미래권력을 위한 마중물로 쓰고 있다. 

 

기준점

 

원래 사람이란 이런 존재들이다. 

기준점 효과라는 것이 있다. 

백신을 맞으면 현금으로 10만원을 준다는 정책이 시행되면, 그것이 기준이 되고 권리가 되어 백신은 돈받고 맞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리면서 오히려 역효과를 수도 있게 된다. 

시혜가 권리가 된다.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과 사건을 해석하기 마련이다. 

 

나도 그럴 있으며, 주변의 사람들도 그럴 있다. 

나를 항상 돌아봐야 대목이 바로 지점이다. 

리더는 자기 자신이 선을 넘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펴야 한다. 

자기 맘대로 기준점을 옮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기준점은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존재가 세워야 한다. 

바로 하나님이 기준의 기준이다. 그리고 하나님 통치 질서를 대변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기준을 제시하여야 한다. 

개인인 내가 기준점을 제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정관이 있고, 운영 규칙이 있다. 

운영위원회가 있고, 총회가 있다. 

모든 것이 바로 기준을 세우는 공동의 프로세스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를 돌아보고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용할 있는 기준의 세부규칙들이 작성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기준을 져버리고 선을 넘고 만다. 

자신들이 자연만물의 이름을 지을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다고 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기준을 어길 있는 권한까지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이것이 죄의 기원이 된다. 

 

속은 다윗도 문제지만, 속인 압살롬이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압살롬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다. 

압살롬은 자신의 분노를 발전적으로 풀어내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다.  

압살롬은 선을 넘어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기를 바랬다

결과는 보듯 뻔하다. 

 

——

인생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기준이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인생의 기준이 되려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항상 상황을 합리화하며 지내게 것입니다. 

저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게 것입니다. 

 

주님, 다시 말씀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기준, 예수님의 기준 앞에 다시 섭니다. 

더욱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03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21 그러자 왕이 직접 요압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시오, 내가 장군의 뜻대로 하기로 결심하였으니, 가서, 어린 아이 압살롬 데려오시오."

22 요압이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하면서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임금님께 복을 베푸시기를 빕니다. 높으신 임금님이 종의 간청을 이렇게 들어 주시니, 종이 임금님의 총애를 입은 줄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23 그리고는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24 그러나 왕의 지시는 단호하였다. "그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라. 그러나 얼굴은 없다." 그리하여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25 이스라엘에, 압살롬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미남은 없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26 그는 머리 숱이 많아 무거워지면, 해마다 연말에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머리를 깎고 나서 머리카락을 달아 보면, 왕궁 저울로 이백 세겔이나 되었다.

27 압살롬에게는 아들 셋과 하나가 있었다. 딸의 이름은 다말인데, 생김새가 아주 예뻤다.

28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해를 지냈는데도, 왕의 얼굴을 번도 뵙지 못하였다.

29 압살롬이 요압을 왕에게 보내 보려고 요압에게 사람을 보냈으나, 요압은 압살롬을 방문하지 않았다. 번째로 다시 사람을 보냈으나, 그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30 그러자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을 불러다가 지시하였다. " 곁에 요압의 밭이 있다. 그가 거기에 보리 농사를 지어 놓았으니, 너희는 가서, 밭에다가 불을 질러라." 그래서 압살롬의 종들이 밭에 불을 질렀다.

31 그러자 요압이 압살롬의 집으로 찾아가서 따졌다. "어찌하여 종들을 시켜, 나의 밭에다가 불을 질렀습니까?"

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였다. "이것 보시오. 나는 이미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달라고 부탁을 하였소. 장군을 임금님께 보내어서, 나를 그술에서 돌아오게 하였는지, 여쭈어 보고 싶었소. 여기에서 이렇게 바에야, 차라리 곳에 그대로 있는 것이 더욱 좋을 하였소. 이제 나는 임금님의 얼굴을 뵙고 싶소. 나에게 아직도 무슨 죄가 남아 있으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더라고 말씀을 드려 주시오."

33 그래서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서, 일을 상세히 아뢰니, 왕이 압살롬을 불렀다. 압살롬이 왕에게 나아가서, 앞에서 얼굴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자, 왕이 압살롬에게 입을 맞추었다.

 

왕은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지만 얼굴을 마주하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집으로 돌려보내 버립니다(21-24). 해가 지나도록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을 불러온 요압조차 겨우 만난 압살롬은 그간의 마음을 토로합니다. 요압의 중재로 왕은 압살롬을 만나 입을 맞춥니다(28-33). 압살롬은 이스라엘에 칭찬이 자자했습니다(25-27).

 

다시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품어주지 않았습니다. 데려와 놓고서는 외면해 버립니다. 아버지를 향한 압살롬의 거절감은 컸습니다. 만에 겨우 아버지를 만나지만 이마저도 요압을 통해서였습니다. 아버지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었기에 진정성을 느끼기 어려웠고, 때도 너무 늦었습니다. 용서와 화해, 관계 회복의 관점으로 오늘 본문을 묵상해 봅시다.

 

——

예수님이 만약 이런 사건들을 접했다면 어떤 평가와 반응을 보이셨을까?

갑자기 이런 궁금함이 생긴다. 

예수님도 분명 구약의 내용을 익히 듣고 배우셨을 것이다. 

다윗이 가지고 있는 우유부단함, 애매모호함, 어정쩡함, 이도저도 아닌, 마지못해서 진정성 없이 허락했던 일들이 결국 왕국 분열의 씨앗을 남기게 된다. 

차라리 그술 땅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압살롬이 추후에 반역을 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외모와 능력과 출중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이런 사실을 몰랐을 없었던 다윗과 요압은 그를 불러다 놓고 적절한 대우를 하지 않았을까? 

해가 지나도록 다윗은 압살롬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왕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 

그러나 압살롬, 암논 다음의 왕의 계승 서열 1 순위인 그는 왕의 식탁에 초대받지 못하고 있다. 

다윗의 이런 모호한 태도가 다윗과 압살롬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고 있다. 

만약 예수님이 이런 사건의 전말을 듣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지 너무 궁금하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품으라고 말하실지

아님 왕으로서 공명정대하게 값을 물으라고 말하실지 

 

없는 죄인들의 삶에는 무한한 애정과 은혜를 베푸셨지만,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과 같은 권력자들에게는 날까로운 비판도 서슴지 않으셨던 . 

세례요한과 궤를 같이 하셨던 , 

세례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철저하게 드러내고 분노했었다. 

 

이렇게 고민하고 저렇게 고민해 봐도, 예수님은 이번 사건에 대해 분명하게 죄라고 말씀하시고 죄의 값을 치를 것을 요청하셨을 같다. 

다윗도 어마어마한 지도자이며, 압살롬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권력을 가진 자의 죄에 대해서는 엄격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술에 있는 압살롬에게 찾아가 그의 삶을 위로할 수는 있겠다 싶다. 

그러나 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불러 그의 죄가 것이 아닌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 

게다가 애매하게 관심 밖에 두고 저리 대우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다윗이 아쉽다. 

밧세바를 범하는 죄부터 시작해서 아들 문제를 치리하는 과정이 마뜩찮다. 

맏아들 암논도 그렇고, 다음 왕위 계승 서열인 압살롬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분명히 해야 때가 있다. 

애매하게 두면 오히려 공동체가 위험하다. 

 

사랑으로 은혜로 사람을 대해야 함이 옳다. 

그렇다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죄에 대해 너무 관대해서는 안된다. 

분명하게 치리할 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와 개인을 보호할 있다. 

 

리더의 자리는 부담스런 결정을 하는 자리다. 

그걸 회피하면 개인과 공동체 모두 어려움에 처한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

 

죄의 결과를 누구보다도 아시는 주님, 

죄가 인간과 공동체를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기억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수는 없으나, 선을 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없습니다. 

, 제가 지은 죄로 인해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면 주님께서 용서해 주세요.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주님을 더욱 묵상하게 하소서. 

죄의 결과를 겸손히 받아들이되, 

주님의 은혜 또한 겸손히 구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다른 처벌은 받겠으나, 주님과의 관계는 포기할 없습니다. 

저를 구원하시고 아들로 삼으신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02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쏠리는 것을,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알았다.

2 요압이 드고아로 사람을 보내어, 거기에서 슬기로운 여인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부탁하였다. "그대는 초상당한 여인처럼 행동하시오. 몸에는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도 바르지 말고, 이미 오랫동안, 죽은 사람을 애도한 여인처럼 꾸민 다음에,

3 임금님 앞으로 나아가서, 내가 일러주는 대로 호소하시오." 요압은 여인에게, 말을 일러주었다.

4 드고아에서 여인은 왕에게로 나아가서,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절을 뒤에 "임금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5 왕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니, 여인이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저는 남편이 죽어서, 가련한 과부가 되었습니다.

6 여종에게 아들이 있는데, 들에서 서로 싸우다가, 말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아들 하나가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7 그런데 이제는 집안이 들고 일어나서, 종에게, 형제를 때려 죽인 아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죽은 형제의 원수를 갚고, 살인자를 죽여서, 상속자마저 없애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저에게 남아 있는 불씨마저도 버려서, 남편이 땅에 이름도 자손도 남기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8 듣고 왕은 여인에게 말하였다. " 문제를 두고서는, 내가 직접 명령을 내리겠으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9 그러나 드고아 여인은 왕에게 아뢰었다. "우리의 높으신 임금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일에 있어서 허물은 저와 아버지의 집안에 있습니다. 임금님과 왕실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10 왕이 대답하였다. "누구든지 너를 위협하거든, 그를 나에게로 데리고 오너라.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다."

11 여인은 간청하였다. "그러면 임금님, 임금님께서 섬기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셔서, 저의 죽은 아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집안 사람들이 살아 있는 저의 아들까지 죽이는 크나큰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막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12 여인이 간청하였다. " 종이 높으신 임금님께 말씀만 드리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

13 여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처럼 그릇된 일을 하셨습니까?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친아들인 왕자님이 나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처사는 지금까지 종에게 말씀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임금님께서는 그렇게 말씀만 하시고, 왕자님을 부르지 않으셨으니,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4 우리는 죽습니다. 땅에 쏟으면, 다시 담을 없는 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방책을 베푸셔서 비록 내어쫓긴 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15 높으신 임금님, 제가 지금 임금님을 찾아 뵙고서 이런 말씀을 드리게 까닭은, 제가 친척들의 위협을 받으면서, 문제를 임금님께 아뢰면, 임금님께서 제가 간구하는 바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입니다.

16 저의 집안 사람들이 저와 저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끊어 버리려고 하지마는, 임금님께서 저의 사정을 들어서 아시면,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7 종은 , 높으신 임금님께서는 말씀으로 저를 안심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임금님은 바로 하나님의 천사와 같은 분이시니까, 저의 호소를 들으시고 선악을 가려내실 것이라고도 생각하였습니다. 임금님이 섬기시는 하나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18 마침내 왕이 여인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묻는 말을, 앞에서 조금도 숨기지 말고 대답하여라." 여인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19 왕이 물었다. "너에게 모든 일을 시킨 사람은 바로 요압이렷다?" 여인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 임금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높으신 임금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킨 사람은 임금님의 신하 요압입니다. 그가 모든 말을 종의 입에 담아 주었습니다.

20 왕자님의 일을 되게 하여 보려고, 임금님의 신하 요압이 이런 일을 꾸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하나님의 천사처럼 슬기로우시므로, 일어난 모든 일을 아실 압니다."

 

 

압살롬이 떠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압살롬을 향하고 있으나 다시 불러오지 못합니다. 요압은 한 여인을 보내 다윗의 상황과 비슷한 사례를 실제 자신의 이야기처럼 말하도록 지시합니다(1-11절). 자신을 돕겠다는 다윗의 맹세를 들은 여인은 왕의 모순을 지적하며 압살롬을 데려 오라고 권합니다(12-17절). 다윗은 이 모든 말들이 연출에 의한 것임을 직감하고 배후에 요압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18-20절).

 

다윗에게 압살롬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을까요?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있었다면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로 실행에 옮겼어야 했습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자신의 입으로 말해버렸으니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매한 마음은 미지근한 화해로 이어지고 이는 또 다른 갈등을 일으킵니다.

 

——

 

역사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각자의 입장에 서면 판단이 바뀌기 마련이다. 

아버지로서 압살롬과 빨리 화해를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님 왕으로서 죄인에 대해 영구히 처벌하는 것이 옳은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다윗 왕에게는 여전히 많은 아들들이 있다. 

압살롬이 외모나 기개가 남다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삼하 14:25)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교활하고 폭력적이다. 

암논도 그렇고 압살롬도 그렇다. 

그들의 죄악이 가득하다.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왕은 아들에 대한 정당한 벌을 내렸어야 했지만, 다윗 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물쩡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압살롬은 큰형 암논을 죽이고 그술 땅으로 도망했다. 

평생 거기서 사는 것이 압살롬에게나 다윗 왕에게나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에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심각한 딜레마가 여기도 있다. 

좋은 아버지, 좋은 둘의 역할을 함께 있냐는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인간은 왕이 없다. 

왕이 되는 순간, 왕국의 통치를 위해 사적 관계를 공적 원리로 재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이 되는 순간, 가정과 나라를 동시에 관리하고 보살피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차라리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가 도덕적 명분도 분명하고, 사람들도 많이 진심으로 따랐다. 

왕이 되어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했을 , 그것을 해결할 의지와 지혜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왕은 오롯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분만이 진정한 왕이 되실 있다. 

사무엘상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백성이 왕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싶지 않아서다.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 왕은 실존적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도 지혜도 없다. 

그러니 어쩔 없이 분열의 씨앗이 자라게 되고, 전쟁의 빌미가 제공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젊고 능력있는 정치인의 등장은 반갑다. 

청년 세대를 대변하면서 청년의 지지를 받아 정치권에 청년의 문제를 해결해 있는 대표주자가 된다면 그것도 좋을 일이다. 

물론, 개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난관을 계속 만나게 것이기에, 그래서 온갖 딜레마 속에서 고통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인간적으로 불쌍한 마음이 든다. 

 

지도자의 위치에 서는 것은 언제나 고통이다. 

부르심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자리다. 

공동체 지도자의 자리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공동체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리더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싶다. 

그분들이 있어야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많은 공동체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배제할 없기에, 항상 부딪히는 날까로운 이슈들을 다뤄가며 이루는 밤들이 늘어가게 된다.

공동체에는 항상 위기가 찾아오고, 위기 앞에 선봉장으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에, 긴장이 끊이지 않는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직장에서도 책임있는 자리, 관리자의 자리에 승진하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는다한다. 

사토리 세대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의 젊은 청년들에게도 보이는 지점이다. 

책임지는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래서 바울은 권세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P4G 국제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개회식 장면을 보았는데, 사슴이 거닐고 나비가 나부끼는 소나무 숲에서 대통령 연설이 진행되었다. 

증강현실이 보여주는 회복된 자연이 모습이 성경이 꿈꾸는 자연과 닮았다. 

P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Global Goals 2030 줄임말이 P4G이다. 

자연의 회복을 위한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모아지고 있다. 

탄소중립을 위한 노력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도자들이 어디에 힘을 모으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문제는 오랫동안 세계는 세계 평화를 위해 수많은 선언을 했지만, 아직도 요원하다는 사실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자연을 회복시키겠다는 지도자들의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목에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지구의 미래를 위한 희망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영역에서도 분명히 필요하다. 

 

다윗의 딜레마를 이해한다. 

그의 어정쩡한 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태도도 이해한다.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국 분열과 전쟁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 

어찌보면 다윗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찾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기도할 밖에 없는 날이다. 

 

——

인간의 모순을 누구보다도 아시는 하나님, 

사람은 한계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원과 능력은 제한되어 있는데, 수많은 이슈와 문제는 옴짝달싹 없이 만듭니다. 

하나를 결정하면, 결정에 고통받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결정하지 않으면 모두가 고통받습니다. 

고통을 최대한 줄이려고 하지만 고통을 줄이는 결정이 과연 공동체의 미래에 좋은지도 헷갈립니다. 

이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주님, 우리의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구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최종결정해 주시고, 주님께서 책임져 주세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01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23 해가 지난 어느 , 압살롬은 에브라임 근처의 바알하솔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다. 때에 압살롬이 왕자들을 모두 초대하였다.

24 압살롬은 다윗 왕에게도 찾아가서 말하였다. "임금님, 제가 이번에 양털을 깎게 되었으니, 임금님도 신하들을 거느리시고, 아들과 함께 내려가셔서, 잔치에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5 왕이 압살롬에게 말하였다. "아니다, 아들아. 우리가 모두 따라가면, 너에게 짐이 터이니, 우리는 가지 않으마." 압살롬이 계속하여 간청을 하였지만, 왕은 함께 가고 싶지 않아서, 복을 빌어 주기만 하였다.

26 그러자 압살롬이 말하였다. "그러면 맏형 암논이라도 우리와 함께 가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암논이 너와 함께 가야 이유가 무엇이냐?"

27 그래도 압살롬이 계속하여 왕에게 간청하니, 왕은 암논과 다른 왕자들이 모두 그와 함께 가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28 압살롬은 이미 자기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암논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질 때를 지켜 보아라. 그러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쳐죽이라고 하면, 너희는 겁내지 말고 그를 죽여라. 내가 너희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이니, 책임은 내가 진다. 다만, 너희는 용감하게, 주저하지 말고 해치워라!"

29 마침내 압살롬의 부하들은 압살롬의 명령을 따라서, 하라는 그대로 암논에게 하였다. 그러자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자기 노새를 타고 달아났다.

30 그들이 아직도 길에서 달아나는 동안에, 다윗에게는, 압살롬이 왕자들을 모조리 쳐죽여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는 소식이 들어갔다.

31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입고 있는 옷을 찢고 땅바닥에 누워 버렸고, 그를 모시고 있는 신하들도 옷을 찢었다.

32 때에 다윗의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이 나서서 말하였다. "임금님, 젊은 왕자들이 모두 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암논 사람만 죽었습니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보인 날부터, 압살롬은 그런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33 그러니 이제 높으신 임금님께서는, 왕자들이 죽었다고 하는 뜬소문을 듣고 상심하지 마십시오. 암논 사람만 죽었을 따름입니다."

34 사이에 압살롬은 도망쳐 버렸다.

바로 때에 예루살렘의 보초병 하나가, 호로나임 쪽에서 많은 사람이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서, 왕에게 알렸다.

35 그러자 요나답이 왕에게 아뢰었다. "틀림 없습니다. 왕자님들이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종이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36 요나답이 말을 마치는데, 왕자들이 들어와서, 목을 놓아 울기 시작하였다. 왕도 통곡하고, 모든 신하도 통곡하였다.

37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암미훗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죽은 아들 암논 때문에 슬픈 나날을 보냈다.

38 압살롬은 도망한 뒤에 그술로 가서, 곳에 동안 머물러 있었다.

39 그러는 사이에 다윗 왕은 암논을 잃었을 때에 받은 충격도 서서히 가라앉았고, 오히려 압살롬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

 

복수의 날이 왔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질 때까지 두 해를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이 일에도 연루되어, 압살롬의 잔치에 암논과 왕자들의 참여를 허락합니다. 형제간의 살인이 벌어지고(23-29절) 모든 왕자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은 비통해합니다. 다행히 살아 돌아온 왕자들로 인해 안도의 눈물을 흘리지만 다윗은 죽은 암논으로 인해 슬픈 나날을 보냅니다(30-37절).

 

암논이 다말을 범할 때도 다윗이 이용되었는데 이번에도 이용됩니다. 그럼에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저 슬퍼만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삶에서 거듭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나서서 해결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영역은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이런 상황을 회피하며 가만히 있는 것은 굶주린 죄에게 먹잇감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

 

 

2년을 기다렸다. 

다말은 압살롬의 집에 머물고 있다. 

다윗은 암논의 범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다만 분개했을 뿐이다. 

그렇게 2년이 흘러간다. 

압살롬은 매일 다말의 모습을 보면서 안따까움의 한숨을 쉰다. 

결혼도 하지 못하는 다말의 슬픈 모습이 압살롬의 심장을 찌른다. 

지난 2 동안 큰형 암논을 떄마다,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때를 기다렸다. 아무때나 일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적절한 , 모두가 사건을 잊어버릴 , 경계심이 풀리고 각자가 자신의 일에 매진 , 때를 기다려왔다. 

어떻게 암논에게 복수할 지를 계획한다. 더불어 자신의 도망계획도 세운다. 

가능한 철저하게, 절대 실수가 없도록 준비한다. 

지난 2년은 준비의 기간이었다. 

 

낌새

 

압살롬이 다윗 왕에게 양털깍는 잔치에 초대한다. 다른 형제들과 함께 말이다. 

매년 잔치가 있어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매년 모든 형제들을 초대했는지는 미지수다. 

아버지 다윗을 초대하는 것도 매년 했는지, 이번이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뭔가 낌새가 있다. 

다윗 왕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압살롬에게 묻는다. 

 

26 그러자 압살롬이 말하였다. "그러면 맏형 암논이라도 우리와 함께 가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암논이 너와 함께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암논이 굳이 갈야 필요가 있는지 묻고 있다.

암논과 압살롬 사이의 일들을 알고 있었던 다윗이라면 당연히 이쯤에서 제동을 걸어야 했다. 

낌새가 이상하니, 조용히 압살롬에게 어떤 의도와 꿍꿍이가 있는지 물어야 했다. 

그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암논에게 죄를 물어 책임을 지게 하든지, 압살롬과 암논 사이의 중재를 통해 서로 화해하게 하든지 해야 일이었다. 

사실 압살롬의 마음/생각/계획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32 그 때에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이 나서서 말하였다. "임금님, 젊은 왕자들이 모두 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암논 한 사람만 죽었습니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보인 날부터, 압살롬은 그런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사촌이었던 요나답은 어느 정도 압살롬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대충은 알고 있었을 것이고, 아주 구체적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압살롬이 칼을 갈고 있을 거라는 추측은 충분히 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의 범죄

 

그럼에도 다윗은 일련의 사건을 크게 문제시 하지 않았다. 

이게 다윗의 실수 혹은 약점이었다. 

그도 너무 죄악을 저질렀고, 죄를 용서받았다. 

아마도 은혜의 깊이가 너무 컸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관대한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퉁치기엔 결과가 너무 치명적이다. 

관대함이 필요하다. 포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죄에 대해 공정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도 왕의 책무이다. 

자신의 아들의 범죄라고 해서 그냥 모른 지나가서는 안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으로 정당하게 잘잘못을 가리지 않으면 사적 복수가 횡행한다.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정당하게 판결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살해한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만큼 나쁜 죄가 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의 죄에 대해 제대로 치리하지 않은 것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공정하게 치리해야 한다. 원칙대로 치리해야 한다. 죄를 묻고 그에 응당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왕이 해야 일이었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범죄가 되는 것이다. 

 

리더십

 

사적으로 은혜를 베풀 때가 있고, 공적으로 정당한 책임을 물을 때가 있다. 

이것이 리더십의 일이다. 

그래서 리더십은 이중적일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야 무한정 용서하고 싶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는 원칙이 중요하다. 규정과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책임을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모른 넘어가서는 안된다. 

분명히 밝힐 것은 밝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니 리더는 고통을 달고 산다. 

은혜와 공정을 항상 저울질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은혜가 사라진 세상이 어찌 아름답다고 있는가? 

딜레마고통의 연속이다. 

하나님의 딜레마는 모든 리더들의 딜레마다. 

하나님의 자기 부인/ 자기 희생은 그래서 모든 리더들의 자기 부인/ 자기 희생이다. 

 

——

용서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그렇다고 마치 제가 죄가 없었던 사람처럼 살지 않게 해주세요. 

겸손하게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래야 주변의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대할 있을 것입니다. 

죄를 덮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칫 은혜라는 이름으로 죄를 덮지 않게 주세요. 

죄는 빛으로 드러나고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받고, 그리고 다시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야 것입니다. 

그렇게 밝은 빛이 우리 모두에게 비추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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