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5월 12일 수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과 한 골육입니다.

2 전에 사울이 왕이 되어서 우리를 다스릴 때에,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출전하였다가 다시 데리고 돌아오신 분이 바로 임금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네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며, 네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바로 임금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으로 왕을 찾아오니,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언약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4 다윗은 서른 살에 왕이 되어서, 사십 년 동안 다스렸다.

5 그는 헤브론에서 일곱 해 여섯 달 동안 유다를 다스리고,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6 다윗 왕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 사람을 치려고 하니, 그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눈 먼 사람이나 다리 저는 사람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그 곳으로는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7 (그러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하였다.)

8 그 날, 다윗이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려거든,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벽을 타고 올라가서, 저 여부스 사람들 곧 다윗이 몹시 미워하는 저 '다리 저는 자들'과 '눈 먼 자들'을 쳐죽여라!" (그래서 '눈 먼 사람과 다리 저는 사람은 왕궁에 들어갈 수 없다'는 속담이 생겼다.)

9 다윗은 그 산성을 점령하고 나서, 그 산성에 살면서, 그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하였다. 그가 성을 쌓았는데, 밀로에서부터 안쪽으로 성을 쌓았다.

 

10 만군의 주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다윗이 점점 강대해졌다.

11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단과 함께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서, 다윗에게 궁궐을 지어 주게 하였다.

12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굳건히 세워 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번영하게 하시려고 자기의 나라를 높여 주신 것을, 깨달아 알았다

13 다윗은, 헤브론에서 떠나온 뒤에, 예루살렘에 와서 더 많은 후궁과 아내들을 맞아들여서, 또 자녀를 낳았다.

14 그가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이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15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16 엘리사마와 엘리아다와 엘리벨렛이다.

 

주석
9절: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다윗은 즉시 그 성읍을 도성으로 삼았다. 그 성읍은 헤브론보다 훨씬 더 중앙에 있었으며, 베냐민의 영토 안에 있었기 때문에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IVP 성경주석).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고 그를 왕으로 삼습니다(1-5절). 왕으로써 가장 먼저 한 일은 여부스 족속이 거주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는 일이었습니다(6-9절). 두로 왕 히람이 다윗의 궁궐을 지어주고,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강성해진 다윗의 힘을 나타냅니다(10-16절).

 

23년을 기다린 끝에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숱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도 묵묵히 주어진 길을 걸어왔습니다. 큰 영광과 명예가 주어졌지만,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수고의 대가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얻게 된 내 삶의 작은 결과들, 그 가운데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해 봅시다.

 

——

다윗과 참모들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후 23년이 지난 30살에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다윗이 가지고 있는 성품 즉 하나님을 겸손하게 경외하는 태도,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선대하는 태도,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을 끝까지 존경하는 태도 등이 그가 왕이 되도록 도운 것이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도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도우셨다. 사울의 위협 속에서 고국을 떠나 적국으로 망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냈다. 

예루살렘까지 오는 과정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삶의 고비 고비 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고, 이는 그의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다보니 다윗과 함께 했던 참모들을 주목하게 된다. 

다윗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오랜시간 다윗을 따라 수많은 전투에 나갔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의사결정에 있어서 다윗을 신뢰하고 그에게 적절한 조언과 함께 그의 결정을 따랐다. 

참모가 없이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을까? 

헤브론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어떻게 결정했을까? 

헤브론도 충분히 정통성있는 통치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은 사실 매우 높은 산지에 위치해 있었고, 그 성을 점령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굳이 그곳까지 점령하지 않아도 통일 이스라엘을 만드는데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윗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갔다.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에 있는 예루살렘은 그동안 어떤 지파도 통치하지 않았던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이 성을 공격하자는 결정은 다윗 혼자 내릴 수 있는게 아닐 것이다. 

참모진들이 함께 모여 다각도로 논의를 진행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의견도 중요했겠지만, 결국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참모들과의 논의가 결정적이었다. 

 

 

8 그 날, 다윗이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려거든,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벽을 타고 올라가서, 저 여부스 사람들 곧 다윗이 몹시 미워하는 저 '다리 저는 자들'과 '눈 먼 자들'을 쳐죽여라!" (그래서 '눈 먼 사람과 다리 저는 사람은 왕궁에 들어갈 수 없다'는 속담이 생겼다.)

 

이런 명령도 다윗 혼자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벽, 이곳이 예루살렘의 최대 약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가능한 명령이었다. 참모진들의 도움이 그래서 필요했다. 다윗 혼자서는 이 일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좋은 참모, 도움의 손길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일을 하게 하신다. 

혼자서 일하는 경우는 드물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성취하게 된다. 

 

나는 누군가의 참모가 되고, 때로는 결정권자가 된다. 

이 둘을 지혜롭게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의견을 내는 것과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 

이 두 가지 모두 내게 필요하다. 

 

점점 논의가 많아지고 깊어진다. 

변화를 주어야 할 영역이 점점 더 많아진다. 

조직이 어떻게 변해야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질까

시대 변화의 긍정적인 부분은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끝까지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사랑과 정의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일반적인가? 아님 편향적인가? 아님 단편적인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사랑, 용서, 이해, 화합, 평화, 정의, 공평, 공의… 이런 단어들로 둘러 쌓여 있다. 

하나님 나라는 그분이 통치가 본질인데, 그분의 통치는 화해와 용서의 통치다. 

죄 지은 자도 용서받을 수 있는 곳이다. 용서가 없이 평화는 찾아오기 어렵다. 

물론 용서의 시작은 귀책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정의롭고 공평한 판단부터다. 

그리고 용서와 화해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없이 사랑이 작동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갈 수 있을까? 용서가 없는 하나님 나라는 가능한가!!!

하나님 나라 운동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존재적, 근원적, 실제적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 감격과 기쁨이 사라진 채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갈 수 있을까… 

우리의 논의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  

 

——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좋은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해 주세요. 

좋은 의견들이 쌓이고 좋은 피드백들이 쌓여서 좋은 결정들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도 좋은 데이타, 좋은 의견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생산해 내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좋은 참모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 아내에게도, 자녀들에게도, 공동체 지도자들에게도 좋은 참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친 사람들이 평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5 11 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1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도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2 때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는 군지휘관이 사람 있었는데,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었다. 그들은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로서, 베냐민 사람이다. (브에롯 사람도 베냐민 족속으로 여김을 받았는데,

3 일찍이 브에롯 주민이 깃다임으로 도망가서, 오늘날까지 거기에 머물러 살고 있기 때문이다.)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는 다리를 저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이 이스르엘에 전해졌을 때에, 그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유모가 그를 업고 도망할 때에, 서둘러 도망하다가, 그가 떨어져서 발을 절게 되었다. 그의 이름이 므비보셋이다.

 

5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있는 왕궁으로 갔다. 그들은 한창 더운 대낮에 곳에 도착하였는데, 때마침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6 그들은 밀을 가지러 사람처럼 꾸미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찔러서 죽였다. 그런 다음에 레갑과 그의 동생 바아나는 도망하였는데,

7 그들이 대궐로 들어갔을 때에, 왕은 침실에서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잘라 수가 있었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가지고 나와, 밤새도록 아라바 길을 걸어서,

8 헤브론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로 들고 가서 말하였다. "임금님의 생명을 노리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를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 주님께서 높으신 임금님을 도우시려고, 오늘에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벌을 내려서 원수를 갚아 주셨습니다."

 

9 그러나 다윗은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동생 바아나에게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온갖 죽을 고비에서 나의 생명을 건져 주신 확실히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10 전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에게 전하여 주고, 자기는 좋은 소식을 전한 것으로 여긴 자가 있었다. 나는 그를 붙잡아서, 시글락에서 죽였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보상이었다.

11 하물며, 흉악한 자들이, 자기 침상에서 잠자는 어진 사람을 죽였으니, 내가 어찌 너희의 살인죄를 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희를 땅에서 없애 버리겠다."

12 다윗이 젊은이들에게 명령하니, 젊은이들이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손과 발을 모조리 잘라 다음에, 그들의 주검을 헤브론의 연못가에 달아 매었다. 그러나 이스보셋의 머리는 가져다가, 헤브론에 있는 아브넬의 무덤에 묻었다.

 

주석
9-12: '레갑' '바아나' 다윗이 라이벌 왕을 죽인 대해 그들에게 보상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시 , 그가 살해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는 소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다. 그는 살해자들을 처형하고 이스보셋을 좋게 말함으로써 소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IVP 성경주석).

 

의지하고 있던 대상이 사라졌습니다. 이스보셋을 비롯한 백성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1). 바아나와 레갑은 살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살필 여유도 없이, 그들은 단순한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깁니다(2-7). 이스보셋의 머리를 들고 다윗을 찾아갔지만, 결국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8-12).

 

두려움과 불안은 사람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제대로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가만히 있을 없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 찾아오는 두려움과 불안, 취해야 마땅한 태도,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바에 대해 묵상합시다.

 

——

 

자기 꾀에 넘어지다. 

바아나와 레갑은 군대 장군이었다. 아브넬이 총사령관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총사령관이 자기 군대를 배신하고 적군과 내통하다가 살해당했다. 

이제는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라인을 타야 한다. 대세가 어떻게 기울었는지 확인했다. 

방법은 다윗에게 이스보셋을 갖다 바치는 뿐이었다. 

원수의 수장을 갖다 바치면 다윗이 기쁘게 자신들을 맞이하여 벼슬을 알았다. 

사울 때부터 다윗을 쫓아 다녔다. 바아나와 레갑도 비슷한 임무를 여러 수행했을 것이다. 

다윗과 사울의 적대관계를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목을 가지고 가면 다윗이 그들을 용서하고 중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전장터에서 죽는 것보다 이렇게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봤다. 

 

그러나 이는 다윗에 대한 사전조사가 미흡했으며, 다윗을 오해했고, 다윗이 처한 정치적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내린 오판이었다. 

다윗은 사울, 요나단, 아브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조가를 부를 정도로 진심으로 슬퍼했었다. 

비록 정치적 선택이었다하더라도 다윗의 마음에는 진심의 아쉬움이 남아 있었으며 사실은 점점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다윗은 사울 집안을 존중하고 있으며 민족의 화해와 용서 그리고 통일을 바라고 있는 사람임이 널리 널리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아나와 레갑이 과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그들도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해석이 달랐던 것이다. 다윗의 진심에 대해 오해했다. 

다윗의 애가는 오로지 정치적인 제스처이며, 마음으로는 사울 왕가의 모든 자손들이 죽길 원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시던 이스보셋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다. 

다윗은 나중에 므비보셋을 자신의 식탁에 데리고 와서 함께 밥을 먹을 정도로 진심으로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원했다. 하지만 바아나와 레갑은 진심을 믿지 못했다. 

 

결국 자기 꾀에 넘어졌다. 

거사를 치르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다윗에게 가져갔을 때만해도 의기양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알게 되었다. 

다윗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들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들은 다윗의 진짜 의도와 진심을 모르기도 했고, 왜곡했다. 이렇게 사울 왕가는 자중지란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방역수칙을 열심히 지켜온 우리는 수적 감소를 격하게 경험하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생존 있을지도 모를 지경이다. 코로나 전에 비해 절반이 아니라 1/3 수준으로 급감했다. 아니 그보다 심각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C단체는 타격이 없고, 오히려 인원이 늘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마음이 심란하다. 

 

한국교회를 비판해왔다. 정부의 방역 지침에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다.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쳤다. 그런데 언제까지 오프라인 모임을 최소화할 있을까? 선제적으로 수칙을 정하고 국가의 정책을 따라 왔다고 본다. 그러나 신입생을 붙잡지 못하고, 모임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서 결국 내년이나 내후년에 전국 멤버십이 500 이하로 떨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역사적 해석을 내리겠는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어느새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동안의 모든 생각과 선택과 결정이 과연 옳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두려움과 무거운 책임감이 든다고 해서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된다. 더욱 면밀히 살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결정들을 했는지, 그리고 때와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 보자. 이웃을 위해 우리를 희생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도를 벗어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이순간 나의 문제는 생각이 너무 단편적이라는 것이다. 

깊은 생각과 명석한 판단이 들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심과 예수님의 본심을 쉽게 오해할 있는 존재들이다. 

그분의 뜻과 생각을 없다고 믿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그분의 뜻을 깨달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본심을 이해하고 있는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게 달라고 요청드린다. 

 

함부로 결정하고 싶지 않다. 

주님의 인도를 구한다.  

꾀에 내가 넘어가지 말기를 기도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

예수님, 

저는 갑작스럽게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공동체가 결정했던 여러 가지 정책들이 설혹 우리 공동체를 사지로 몰아 넣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노예가 되지 않게 주세요. 

오직 주님의 주시는 평안 속에서 주닝의 인도를 받게 주세요. 

주께서 우리가 희생하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 것입니다. 

어떤 단체, 공동체건 하나님 나라에 잠시나마 기여하면 그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공동체가 되게 해주세요. 

 

저의 두려움을 제하시고, 오직 주님의 밝은 빛을 비춰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5 08 토요일

 

여는 기도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22 때에, 다윗의 부하들이 요압을 따라 습격하러 나갔다가, 많은 노략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아브넬은 때에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않았다. 다윗이 이미 그를 보내어서, 그가 무사하게 곳을 떠나갔기 때문이다.

23 요압이, 함께 데리고 나갔던 군인을 모두 데리고 돌아오자, 누군가가 그에게 알려 주었다. "넬의 아들 아브넬이 임금님을 찾아왔는데, 임금님이 그를 그냥 보내셔서, 그가 무사하게 곳을 떠나갔습니다."

24 말을 듣고, 요압이 곧바로 왕에게로 가서 항의하였다. "임금님이 어찌하여 이렇게 하실 있습니까? 아브넬이 임금님께 왔는데, 임금님은 어찌하여 그를 그냥 보내어서, 가게 하셨습니까?

25 넬의 아들 아브넬은, 임금님께서 아시다시피, 임금님을 속이려고 것이며, 임금님이 드나드는 것을 살피고, 임금님이 하고 계시는 일도 모조리 알려고 것입니다."

26 요압은 다윗에게서 물러나오자마자 사람들을 보내어서 아브넬을 뒤쫓게 하였다. 그들은 시라 우물이 있는 곳에서 그를 붙잡아서,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윗은 일을 전혀 몰랐다.

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니, 요압이 그와 조용히 이야기를 하려는 듯이, 성문 안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요압은 거기에서, 동생 아사헬의 원수를 갚으려고, 아브넬의 배를 찔러서 죽였다.

 

28 다윗이 소식을 듣고서 외쳤다. "넬의 아들 아브넬이 암살당하였으나, 나와 나의 나라는 주님 앞에 아무 죄가 없다.

29 오직 죄는 요압의 머리와 아버지의 집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앞으로 요압의 집안에서는, 고름을 흘리는 병자와, 나병환자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다리 저는 사람과, 칼을 맞아 죽는 자들과, 굶어 죽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아브넬이 그들의 동생 아사헬을 기브온 전투에서 죽였기 때문이다.

31 다윗은 요압을 비롯하여 자기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백성은 옷을 찢고, 허리에 굵은 옷을 두른 뒤에, 아브넬의 상여 앞에서 걸어가면서 애도하여라." 그리고 다윗 왕도 몸소 상여를 뒤따라갔다.

32 백성이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지내니, 다윗 왕이 아브넬의 무덤 앞에서 목을 놓아 울었고, 백성도 울었다.

33 다윗 왕은 아브넬을 두고, 이렇게 조가를 지어 불렀다. "어찌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죽듯이, 그렇게 아브넬이 죽었는가?

34 그의 손이 묶이지도 않았고, 발이 쇠고랑에 채이지도 않았는데, 악한들에게 잡혀 죽듯이, 그렇게 쓰러져서 죽었는가?" 그러자 백성이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시 울었다.

35 날이 아직 저물지 않았을 때에, 백성이 다윗에게 와서 음식을 들도록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였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내가 빵이나 어떤 것을 맛이라도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리셔도 마땅하다."

 

36 백성이 그것을 보고서, 일을 좋게 여겼다. 다윗 왕이 무엇을 하든지, 백성이 마음에 좋게 받아들였다.

37 때에야, 비로소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에게서 비롯된 일이 아님을, 백성과 이스라엘이 깨달아 알았다.

38 그런 다음에 왕은 신복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아는 대로, 오늘 이스라엘에서 훌륭한 장군이 죽었소.

39 스루야의 아들들이 나보다 강하니, 비록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고 하지만, 보다시피 이렇게 약하오. 그러므로 이런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 주님께서 죄악에 따라 갚아 주시기만 바랄 뿐이오."

 

주석
22-39: 아브넬이 살해되어 다윗은 매우 곤경에 처했다. 그를 살해한 자는 다윗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 하나였으며, 따라서 다윗이 아브넬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의심스러운 소문이 멀리 퍼져 나갔을 것이다. 다윗이 있는 유일한 변호는, 자신이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무죄하다는 사실을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이었다(IVP 성경주석).
요압은 동생의 복수를 위해 아브넬을 죽입니다(22-27). 요압의 행동은 다시 이스라엘에 위기를 초래합니다. 다윗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아브넬의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함을 밝히며 요압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백성과 함께 슬피 울며 아브넬을 장사합니다(28-35). 이로써 백성들의 마음은 여전히 다윗을 향하고, 신복들에게도 동정을 얻게 됩니다(36-39).
왕은 아브넬을 평안히 돌려보냈지만 요압은 아브넬을 평안히 돌려보낼 없었습니다. 일차적 동기는 동생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개인적인 감정과 원한이 눈을 가리었고, 그로 인한 행동은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삶을 들여다봅시다. 개인적인 서운함과 원망, 복수심으로 그릇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분별

 

1. 꿈을 꾸다. 

굉장히 오랜만에 꿈을 꾸었는데, 상당히 생생했다. 

아는 목사님이 등장하셨는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가셨다. 

그의 메시지는 개인적 맞춤형 메시지였는데, 나만을 위한 개인 포스터를 만들어서 그분의 메시지를 담아 주셨다. 

영화의 장면들을 활용해서 메시지를 만들었는데, 매우 강렬했다. 

대중문화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워딩이 그대로 생각나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떠오르지 않는다. 

오랜만에 목사님이 꿈에 나타난 것도 신기했지만, 메시지가 나의 영성생활을 때로 가로막는 대중문화에 대한 것이어서 더욱 실감났다. 

꿈에 등장하는 메시지 전달 방식(개인 맞춤형 포스터) 내용(대중문화에 매이지 말라) 하나님에게서 왔을지 아니면 나의 내면의 소리인지는 분별이 필요하다. 

형식과 메시자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도록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있다. 

꿈에서 깨자마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오랜만에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꿈을 통해서 전달하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커졌다. 

그리고 깨자마자 주변의 나를 오랫동안 후원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웃사랑의 방향으로 마음의 흐른 것이다. 

현재로서는 하나님의 음성과 인도로 판단하고자 한다. 

 

어제 마음의 피곤함이 있었다. 

고질적인 성향의 약점이 순간순간 드러난 하루였다. 

남과 비교하기 

동안 비교로부터 조금 멀어졌다고 여겼는데, 어제는 여러 대화와 읽은 속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나를 스스로 초라하게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 

 

요사이 영적으로 예민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느끼는 순간부터 자신에게로 몰입하는 경향이 다시 보인다. 

5월들어 조금 속도가 붙고 있다. 

무조건 좋다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제어할 것도 아니다. 

신앙은 여정이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다. 

5월에 좀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집중하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 

다만, 너무 매몰되어 자신의 강점과 은사를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은혜에 대한 확신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고 싶다. 

억지로 자신에게 가하는 학대가 되지 않도록 도우심을 구한다. 

 

2. 요압의 충성 vs. 사심

본문은 요압의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다윗이 그동안 전체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기반을 뒤흔들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요압은 사심으로 아브넬을 사살, 암살했다고 성경 저자는 기록했다. 

다윗의 전국 통일을 뒤로 후퇴시키는 개인의 앙갚음이었다. 

이런 성경 저자의 의견에 십분 동의한다. 

 

그런데 요압이 내건 정당화 근거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25 넬의 아들 아브넬은, 임금님께서 아시다시피, 임금님을 속이려고 것이며, 임금님이 드나드는 것을 살피고, 임금님이 하고 계시는 일도 모조리 알려고 것입니다.

 

충분히 타당한 근거다. 

아브넬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반란군의 수괴라고 생각했다.

다윗에게 찾아와서 그동안 이스보셋과의 일들을 이야기했겠지만, 그게 사실인지 꾸민이야기인지 방도는 별로 없다. 

사실 다윗 자신도 아기스 왕에게 찾아가 거짓으로 미친 하지 않았는가!

히스기야 시절, 바빌로니아 사절단에게 왕궁의 모든 것을 보여준 그의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은 남유다의 멸망을 확정지으셨다(왕하 20:12-19)

다윗이 적의 장군을 왕의 진지 안으로 들이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요압의 말은 상당히 타당하다고 있다. 

 

공동체에는 저마다의 사정 속에서 각자의 근거가 있다. 

근거는 상당히 일리가 있으며, 듣기에 따라 매우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개인적 욕심과 동기가 원천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분별하는 것이 리더십의 역할이다. 

개인적인 욕심과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전체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무엇인지 필요가 있다. 

 

자신에 대해서도 항상 살펴야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선택에 대해서도 동기를 면밀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온전히 수야 없겠지만, 그동안의 행동의 결과가 그의 동기를 파악하는 도움이 것이다. 

그것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면밀하게 정보를 들어야 한다. 

사람의 역사를 알고 기억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충성인지 사심인지 알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

 

꿈을 통해서도 알려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영적으로 더욱 깨어서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게 주세요.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과민하여 자신을 해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사람이라도 깊이 기도하고 사랑을 표현하게 해주세요.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 거짓된 동기들을 파하시고 오직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거룩한 열망을 품게 해주세요. 

우리 공동체에 속한 모든 지체들이 주님 나라를 위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주께서 역사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5 07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1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 사이에 전쟁이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나 다윗 집안은 점점 강해지고, 사울 집안은 점점 약해졌다.

2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은 다음과 같다. 맏아들은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에게서 태어난 암논이고,

3 둘째 아들은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에게서 태어난 길르압이고, 셋째 아들은 그술 달매의 마아가에게서 태어난 압살롬이고,

4 넷째 아들은 학깃에게서 태어난 아도니야이고, 다섯째 아들은 아비달에게서 태어난 스바댜이고,

5 여섯째 아들은 다윗의 아내 에글라에게서 태어난 이드르암이다. 이들이 다윗이 헤브론에서 때에 낳은 아들이다.

6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사울 집안에서는 아브넬이 점점 세력을 잡았다.

7 사울의 후궁 가운데 리스바라는 여인이 있는데, 아야의 딸이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장군은 어찌하여 나의 아버지의 후궁을 범하였소?" 하고 꾸짖었다.

8 그러자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에 몹시 화를 내면서 대답하였다. "임금께서는 내가, 유다에 빌붙어 살아가는 개로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나는 오늘날까지 임금님의 아버지 사울 집안과 그의 형제들과 친구들에게 충성을 다하였고, 임금님을 다윗의 손에 넘겨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임금님께서 오늘 여자의 그릇된 행실을 두고, 나에게 누명을 씌우시려는 것입니까?

9 주님께서는 이미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다윗 편을 들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을 내리시고 내리셔도 좋습니다.

10 하나님은 나라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서 빼앗아, 다윗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으로 삼으셔서, 북쪽 단에서부터 남쪽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11 말을 듣고,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두려워서, 그에게 다시는 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12 아브넬은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이렇게 전하였다. " 나라가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니 임금님이 저와 언약만 세우시면, 내가 임금님의 편이 되어서, 이스라엘이 임금님에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13 다윗이 대답하였다. "좋소! 내가 장군과 언약을 세우겠소. 그런데 나는 장군에게 가지만 요구하겠소. 그대는 나를 만나러 때에 사울의 미갈을 데리고 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얼굴을 생각을 하지 마시오."

14 그런 다음에 다윗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이렇게 전하였다. "나의 아내 미갈을 돌려 주시오. 미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의 포피 개를 바치고 맞은 아내요."

15 그러자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어서, 미갈을 그의 남편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빼앗아 오도록 하였다.

16 때에 여인의 남편은 계속 울면서 바후림까지 자기 아내를 따라왔는데, 아브넬이 그에게 "당신은 그만 돌아가시오" 하고 말하니, 그가 돌아갔다.

 

17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상의하였다. "여러분은 이미 전부터 다윗을 여러분의 왕으로 모시려고 애를 썼습니다.

18 이제 기회가 왔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다윗을 두고 '내가 나의 다윗을 시켜서,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지배와 모든 원수의 지배에서 구하여 내겠다' 하고 약속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19 아브넬은 베냐민 사람들과도 상의한 뒤에, 이스라엘과 베냐민 사람 전체가 한데 모은 뜻을 다윗에게 전하려고, 헤브론으로 떠났다.

20 아브넬이 부하 스무 명을 거느리고 헤브론에 이르러서, 다윗을 찾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21 잔치가 끝나자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이제 그만 일어나 가서, 이스라엘을 높으신 임금님 앞에 모아 놓고서, 임금님과 언약을 세우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임금님이 원하시는 어느 곳에서나, 원하시는 대로, 왕이 되셔서 다스리실 있습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떠나 보내니, 그가 평안히 떠나갔다.

 

다윗의 아들들의 이름은 점점 강해지는 다윗 가문을 보여주고, 사울의 후궁을 범하고도 이스보셋을 협박하는 아브넬의 모습은 점점 약해지는 사울의 가문을 보여줍니다(1-11). 아브넬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넘기는 거래를 제안하며(12), 종교적 언어들을 통해 장로들을 설득합니다(17-19). 다윗은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울의 사위가 되고자 미갈을 요구합니다(13-14).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자들의 거래로 인해,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내를 빼앗긴 슬픔에 울며 바후림까지 쫓아 오는 발디엘의 장면은 인상적입니다(16). 장면들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

하나님과의 언약의 중요성

 

이야기를 읽다 보면 선과 악을 구분하려는 본능이 발동한다. 

다윗은 선하고 아브넬은 악하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미리 확정하지 않고 행동을 중립적으로 바라보면 조금은 다른 모습들이 보인다. 

아브넬이 정말 사울의 후궁을 범하였는가? 권력의 위기를 느낀 이스보셋의 거짓된 정보에 대한 맹신아닌가? 

다윗이 미갈을 요구한 것은 정당한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딸을 다시 요구하는 것이 옳은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조금은 다르게 본문이 읽힌다. 

 

이제와서 아브넬이 하나님과 다윗의 언약을 중시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그의 인격을 보여준다. 

성경저자는 아브넬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길 원하셨다. 

그걸 아브넬이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스보셋을 따르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처음에 다윗에게 복종했다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는 너무나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다 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들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아브넬은 정치적 입김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어떻게 보면 아브넬은 상당히 지혜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교활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의 울음 소리는 여기까지 들리는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윗의 요구는 불의해 보인다. 

미갈과 헤어진지 오래며, 이미 다른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다윗은 미갈 말고도 아내가 여럿 되었고, 자녀들도 많이 얻었다. 

그런데 굳이 미갈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는 것은 정치적인 행동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지혜롭다 수도 있지만, 무리한 행위이다. 

아브넬과의 언약이면 충분했다. 미갈을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었다. 

결국 미갈은 나중에 다윗을 책망하면서 실질적 부부 관계는 끝이 난다. 

그녀에게도 안따까운 일이다. 

다윗이 미갈을 다시 찾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나 아쉽긴 하다. 

다윗을 무조건 옹호할 생각이 없다.

다윗도 사람이다. 잘못이 있고 부족한 것이 있다. 

그가 그래도 성경에서 예수님의 조상으로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실수를 한다. 때로는 정치적 결정을 한다. 그게 지혜로운 결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공동체의 중요한 결정을 함에 있어서 어쩔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는 결정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에 대해 충분히 묻지 못한다. 

모든 결정에는 장단이 있으며, 완벽하게 이상한 옵션은 논의 테이블에 올라오지도 못한다. 

최대한 좋은 결정을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생긴다. 부족하다.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을 낳는다.

사람, 그리고 사람들의 공동체의 연약함이여….

 

결국 하나님과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밖에 없다. 

앞으로 결정해야 수많은 판단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지만 또한 단호하게 해야 것이다. 

주님을 신뢰하면서 말이다. 

 

 

——

 

은혜의 하나님, 

저의 모든 판단에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 가지 결정을 해야 ,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진행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