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11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부디 내가 이천 명을 뽑아서 출동하여, 오늘 밤으로 당장 다윗을 뒤쫓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2 그가 지쳐서 힘이 없을 때에, 내가 그를 덮쳐서 겁에 질리게 하면,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달아날 것입니다. 때에 내가 왕만을 쳐서 죽이면 됩니다.

3 그렇게만 되면, 내가 백성을 다시 임금님께로 돌아오게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돌아오듯이, 백성이 그렇게 임금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노리시는 목숨도 오직 사람의 목숨입니다. 나머지 백성은 안전할 것입니다."

4 압살롬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도 말을 옳게 여겼다.

5 그러나 압살롬은, 아렉 사람 후새도 불러다가, 그가 하는 말도 들어 보자고 하였다.

6 후새가 압살롬에게 오니, 압살롬은 그에게, 아히도벨이 말을 일러주고서, 말대로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묻고, 다른 의견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7 후새는 압살롬에게 아히도벨이 베푼 모략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8 까닭을 설명하였다. "임금님의 부친과 신하들은, 임금님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용사들인데다가, 지금은 새끼를 빼앗긴 들녘의 곰처럼 무섭게 화가 있습니다. 더구나 임금님의 부친은 노련한 군인이어서, 밤에는 백성들과 함께 잠도 자지 않습니다.

9 틀림없이 그가 지금쯤은 벌써 어떤 속이나 다른 어떤 곳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군인 가운데서 사람이라도, 처음부터 그에게 죽기라도 하면, 압살롬을 따르는 군인들이 지고 말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질 것입니다.

10 그러면 사자처럼 담력이 용사도 당장 낙담할 것입니다. 임금님의 부친도 용사요, 그의 부하들도 용감한 군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므로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임금님에게로 불러모아서,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군인을, 임금님께서 친히 거느리고 싸움터로 나가시는 것입니다.

12 그래서 우리는, 다윗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들이닥쳐서, 마치 땅에 내리는 이슬처럼 그를 덮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물론이려니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13 그가 어떤 성읍으로 물러 나면, 이스라엘이 굵은 밧줄을 가져다가, 성읍을 동여매어, 계곡 아래로 끌어내려서, 성이 있던 언덕에 돌멩이 하나도 찾아볼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14 그러자 압살롬과 이스라엘 사람이,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이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좋다고 찬성하였다. 주님께서 이미 압살롬이 재앙을 당하게 하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좌절시키셨기 때문이다.

 

아히도벨과 후새의 모략 싸움이 전개됩니다. 아히도벨은 기습 작전을 펼쳐 적을 급습하고 다윗 왕만 죽이자고 제안합니다(1-4절). 후새는 아히도벨의 의견에 반대하며 압살롬의 두려운 마음을 자극합니다. 익히 보고 들어 알고 있던 다윗 왕과 그의 장수들의 용맹함, 실패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상기시킵니다(5-10절). 오히려 전면전을 펼치자고 제안합니다. 주님께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좌절시키셨습니다(11-14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지던 아히도벨의 말을 하나님이 좌절시키십니다.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가짜는 진짜에 의해 무력화 되었습니다. 사람의 뜻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의 모략이 다 허물어지고 주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서도록 기도합시다.

 

——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서는 아히도벨과 후새의 전략싸움이 등장한다. 

아히도벨은 속전속결, 기습작전을 통해 다윗만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반해 후새는 군대를 일으켜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아히도벨은 다윗만 죽이면 밑의 군사들이 압살롬을 따를 것으로 봤다. 

하지만 후새는 그렇게 한다고 한들, 물론 다윗 왕만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만, 다윗의 부하들이 압살롬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암암리에 압살롬에게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다윗을 따르는 모든 무리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압살롬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우호적인 사람들 중심으로 정권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다윗의 충복들이 예루살렘성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컸다. 

게다가 후새의 말이 일리가 있었던 것이, 다윗이나 다윗의 부하들은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아왔던 인물들이었다. 전쟁에 능한 베테랑이고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현재 압살롬의 군대는 사실 충성도를 보장하기가 어렵다. 

쿠테타 초기의 어수선함이 여전하다. 자기도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아히도벨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후새의 말이 압살롬의 정서를 건드렸기 때문에 왕의 마음은 후새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11 그러므로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을 임금님에게로 불러모아서,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군인을, 임금님께서 친히 거느리고 싸움터로 나가시는 것입니다.
12 그래서 우리는, 다윗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들이닥쳐서, 마치 온 땅에 내리는 이슬처럼 그를 덮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물론이려니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후새는 게다가 압살롬의 허영심을 부추긴다.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전쟁에 승리하여 영웅이 되어야 한다. 

그런 믿음이 고대에는 팽배했을 것이다. 

다윗을 능가하는 그의 아들 압살롬.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 압살롬은 억억이다를 실현하고 싶은 마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으로서의 정당한 인정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무혈입성만으로는 진정한 쿠테타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다. 

다윗의 실정이 공공연하여 모든 백성들이 다윗 왕의 통치를 받지 않으려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도리어 나름 평안하게 살고 있는데, 왕자의 난이 펼쳐지면서 사회 곳곳은 혼란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니 압살롬 입장에서는 반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기 통치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면전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이를 후새가 정확히 짚었다. 

 

결정의 순간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거친다. 

결정의 순간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특히 인생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된다. 

아히도벨이나 후새 같은 사람들 말이다. 

누구의 말을 듣는지가 인생을 좌우한다. 

 

예수님에게도 참모진이 있었다. 

사실 12제자가 때로는 예수님의 참모들이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겠다는 말을 꺼낼 , 강력하게 붙잡고 그러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예수님은 사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 참모의 말에 크게 의존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참모가 필요하다. 

다양한 의견을 수합하고, 의견 중에 가장 좋은 의견을 채택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개인은 성장하고 사회가 통합되고 공동체는 안정을 찾아 간다. 

 

하나님께 묻는 과정과 함께 신실하고 지혜로운 주변 사람에게 묻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이걸 하면, 의미있고 보람된 인생을 살아갈 있다. 

여기에서 스탭이 꼬이면, 고통이 심해질 있다. 

 

현재 우리 공동체는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변화가 너무 심해서 정신이 없다. 

사회문화가 심대하게 바뀌었다.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다. 

지혜가 필요하다. 

어디서 지혜를 얻을 있을까? 

오늘도 지혜를 갈구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갈망한다. 

 

 

——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 

저에게 신실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많이 붙여 주세요. 

어려운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히도벨도 있고 후새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가장 부합한 방식을 찾아가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10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5 압살롬은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으며,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들어왔다.

16 때에 다윗의 친구인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을 찾아와서, 압살롬을 보고, "임금님 만세!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17 그러자 압살롬이 후새에게 물었다. "이것이 친구를 대하는 그대의 우정이오? 어찌하여 그대의 친구를 따라서 떠나지 않았소?"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주님께서 뽑으시고 백성과 이스라엘 사람이 뽑아 세운 분의 편이 되어서, 그분과 함께 지낼 작정입니다.

19 제가 다른 누구를 섬길 있겠습니까? 당연히 부왕의 아드님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전에 부왕을 섬긴 것과 같이, 이제는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

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물었다. "이제 우리가 무슨 일부터 해야 될지 의견들을 내어 보시오."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왕궁을 지키라고 남겨 후궁들과 동침하십시오. 이렇게 임금님께서 부왕에게 미움받을 일을 하였다는 소문을 이스라엘이 들으면, 임금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더욱 힘을 것입니다."

22 그리하여 사람들이 옥상 위에 압살롬이 들어갈 장막을 차려 주니,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였다.

23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아히도벨도 함께 갔고, 다윗이 보낸 후새도 위장 전향하여 함께 했습니다(15-19절).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말을 따라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이는 다윗을 미워하는 반란 세력이 더욱 결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20-22절). 패륜적인 행위였으나 아히도벨의 말은 압살롬에게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23절).

 

아히도벨은 다윗도 인정한 모략가 입니다. 압살롬에게 그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했습니다. 그 영향력 아래에 익숙해지면 주체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고 그 생각을 의존하게 됩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목소리, 대상, 매체들은 무엇입니까?

 

——

 

이쯤 되면 반역은 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고 있다. 

예루살렘 사랃뜰은 어리둥절 자체이다. 

소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다윗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다윗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들은 믿을 없는 표정이었다. 

어찌 다윗이 모양이 되었는가

민족의 영웅과도 같은 다윗이 어찌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단 말인가

매년 다윗을 따라 전장터를 누볐던 백성들은 세월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흘렀는지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이다. 

세상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적응하기가 너무 어려운 순간이 왔다. 

혁명때로 세상의 변화는 도둑처럼 다가온다. 예측하기 어렵다. 

 

코로나가 그렇다. 

일대 문화대혁명을 가져왔다. 

그동안 생각만했던 것들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낀디. 

정치적 혁명만큼이나 어마무시한 삶의 혁명이 그동안 있어왔다. 

마스크, 거리두기, 온택트 

세상이 갑자기 변하면 어찌해야 바를 모르는 사람들은 현자를 찾는다. 

그래도 지금 시기를 지혜롭게 넘길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찾는다. 

마치 압살롭이 아히도벨을 찾듯이 말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없다. 

책사가 필요하다. 아히도벨이나 후새 같은 모략을 펼칠 있는 참모가 필요하다. 

어찌보면 세상은 2인자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고 권력가들은 권력을 대표하기는 하지만,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고서는 권력을 유지할 없기 때문에 2인자들을 의존할 밖에 없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에게도 많은 조언을 했던 인물이었다. 

혹시 압살롬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다윗에게 조언했었는지도 모른다. 

다윗의 정책에 대해 많은 부분 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23절이 보여주고 있다. 

 

23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아히도벨은 여러모로 지혜와 모략이 넘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실 조금 끔찍한 방식을 압살롬에게 조언하는 모습을 본다. 

다윗 왕의 후궁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 압살롬이 강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압살롬은 넘지 말아야 선을 넘었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에게 확실히 편을 정하라고 압박할 있었다. 

다윗 편인지 압살롬 편인지 결정을 해야 했던 것이다. 

중도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입장을 정하라고 한다. 

괜히 어정쩡하게 있다가는 도리어 공격을 받을 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다윗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벌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는지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압살롬에게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라고 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지혜로운 조언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죄를 부각하고, 그의 실각은 하나님의 심판이며, 그의 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 대리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아히도벨은 그의 손녀 딸의 치욕을 갚을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아무리 어느 순간의 지혜로운 말과 책략이라도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압살롬은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 강을 넘어버렸다. 

이제 압살롬은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정적을 죽일 있을 정도로 뜻이 강고함을 세상에 드러냈다. 아버지의 후궁들을 대낮에 범할 정도로 어찌보면 포악해 보일 정도로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다. 

이제 압살롬을 따를지, 아니면 도망자 다윗을 따라 도망자 신세가 될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것이 예루살렘 백성들이 겪는 딜레마였다. 

 

세상이 바뀌면 딜레마에 빠진다. 

혁명이 일어나면 어느 편에 설지 고민이 깊어진다. 

잘못 결정하면 패가망신이다. 삼족, 칠족이 죽는다. 

정치적 혁명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대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고심이 깊어질 밖에 없다. 

기존 질서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변화하는 흐름에 속할 것인가.

어느 순간에는 결정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어떤 결정을 하는지에 따라 삶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작년과 올해, 

나와 우리 공동체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답을 아는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누구도 답을 없었다. 

다만 각자의 의견이 있었을 뿐이다. 

엄청난 변화 앞에 사역자로서 고심이 깊어진다. 

어떻게 사역을 만들어 있을 것인가.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변화는 불가피하다. 

예루살렘 성의 주인이 바뀌었 , 지금 세상의 중심이 바뀌었다. 

아히도벨이 아니라 예수님께 묻고 싶다. 

후새가 아니라 예수님의 인도를 받고 싶다.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는 없으나, 의견은 의견일 , 그들도 정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아무리 지혜로운 조언 조차도 주님의 앞에 비추어야 것이다. 

 

최근 사역의 가시적 열매를 기대할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1) 하나님 분으로 기쁨을 누릴 있어야 한다. 

2) 이슬람 선교사의 마음과 태도로 사역에 임해야 한다. 

3) 열매보다 가지 표현에 의미를 두고 자기 표현의 아카이빙을 시도하면 좋다. 

4)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자. 

 

이렇게 가지 정도가 머리를 맨돈다. 

하나님 분만으로도 삶의 의미와 기쁨을 유지할 있는가? 

이것은 나에게 계속 던지는 질문이다. 

그분이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할 있는가? 

 

이슬람 선교사분들은 10년을 사역해도 회심자 명을 얻는 일에 실패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분들이 사역에 임하는 자세는 열매에 있지 않다. 

지금 부르심에 자리에 자신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 

캠퍼스 현실이 지금 그렇다. 

회심자를 얻기가 점점 어렵다. 

년을 사역해도 여전히 맨땅일 있다. 

그럼에도 내가 부르심에 자리에 있다는 사실로 만족할 있다면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역자는 어떤 기쁨을 추가적으로 추구할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자기 표현 있겠다 싶다. 

열심히 자기를 드러내라. 글로, 그림으로, 영상으로, 자기의 은사로 드러낼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의 자기 세계를 구축하라. 

누가 관심을 갖든 갖지 않든 자기 만족을 추구하라. 

수년 전에 달인의 리더십에 대해 말하고 다닌 적이 있다. 

그렇다. 미래의 리더십은 달인에게서 나올 있다. 미래의 영향력은 자기를 계속 표현하면서 명확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달인에게서 나온다. 

그러니 지금 당장 영향력을 미친다는 조급증과 결벽증에서 나와 느긋하게 예술가의 삶을 살자. 

 

하지만, 우리는 사역자이니 만큼 있는 전략은 해보는 것이다. 

열매가 있든 없든,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과 에너지와 전략으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과정이 즐거울 있다.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일하라. 

전략을 짜면서 즐거울 있다.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주변 동역자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보는 것이다. 

과정 자체가 열매가 되도록 하라.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해 본다. 

 

——

하나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4 산업혁명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어떤 의견을 채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오늘의 일정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주님의 평안이 흘러가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09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다윗이 산꼭대기에서 떠난 얼마 되어서, 므비보셋의 하인 시바가 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시바는 나귀 마리에 안장을 얹고, 위에다가는 이백 개와 건포도 뭉치 덩이와 여름 과일 개와 포도주 가죽부대를 싣고 왔다.

2 왕이 시바에게 물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왔느냐?" 시바가 대답하였다. " 나귀들은 임금님의 가족들이 타고, 빵과 여름 과일은 신하들이 먹고, 포도주는 누구나 광야에서 기진할 때에 마시고, 이렇게 하시라고 가져 왔습니다."

3 왕이 물었다. "그런데, 네가 섬기는 상전의 손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대답하였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야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 할아버지의 나라를 자기에게 되돌려 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4 왕이 시바에게 말하였다. "므비보셋의 재산을 네가 모두 가져라." 시바가 대답하였다. "임금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임금님의 은총을 입는 몸이 되기를 바랍니다."

5 다윗 왕이 바후림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마을에서 나왔는데, 그는 사울 집안의 친척인 게라의 아들로서, 이름은 시므이였다. 그는 거기에서 나오면서, 줄곧 저주를 퍼부었다.

6 다윗 왕의 모든 부하와 모든 용사가 좌우에 서서 왕을 호위하고 가는데도, 그는 다윗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계속하여 돌을 던졌다.

7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여 말하였다. "영영 가거라!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불한당 같은 자야!

8 네가 사울의 집안사람을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 이제는 주님께서 나라를 너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 주셨다. 이런 형벌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마땅히 받아야 재앙이다."

9 그러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에게 아뢰었다. "죽은 개가 높으신 임금님을 저주하는데, 어찌하여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제가 당장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잘라 버리겠습니다."

10 왕은 대답하였다. "스루야의 아들아, 나의 일에 너희가 나서느냐?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랄 있겠느냐?"

11 그런 다음에 다윗이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에게 말하였다. "생각하여 보시오. 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12 혹시 주님께서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저주 대신에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13 다윗과 부하들은 계속하여 길을 갔다. 그래도 시므이는 여전히 산비탈을 타고 다윗을 따라 오면서 저주하며, 곁에서 돌을 던지고, 흙먼지를 뿌렸다.

14 왕과 그를 따르는 백성이 요단 강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매우 지쳤으므로, 거기에서 쉬면서, 기운을 되찾았다.

 

므비보셋의 하인 시바가 나귀와 많은 음식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왕궁을 빼앗기고 궁지에 몰린 상황이기에 다윗은 시바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이내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므비보셋을 모함하는 시바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재산을 모두 그에게 줍니다(1-4). 후에 시바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이를 바로잡게 됩니다(삼하 19:29 참조).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합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의 민심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있습니다. 다윗은 시므이를 응징할 있었지만 내버려 둡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5-14).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움들을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바라보며 해석할 있도록 지혜를 구합시다.

 

——

급박한 상황, 위기의 상황은 언제나 혼란을 초래한다. 

평소 같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발생한다. 

그러기에 평소처럼 반응할 수는 없다. 

므비보셋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다윗을 따라 나서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그의 하인 시바가 와서 가장 약해있는 다윗 왕과 그의 추종자들을 섬긴다. 

먹을 것의 힘은 대단하다. 음식으로 왕과 백성들을 섬기니 왕은 이내 자신이 있는 최선으로 시바에게 선물을 준다. 

 

예수님이야 이런 경우에 므비모셋과 시바의 마음과 상황을 아시기에 그냥 속지는 않으셨을 것이지만, 다윗은 경황이 없는 중에 명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너무 쉽게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전재산을 하사하게 된다. 

 

급박한 상황에서 마음의 힘이 약해진 다윗은 시므이가 던지는 저주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자신의 아들도 반역을 꾀하여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시점에 전대왕 사울의 베냐민 지파의 시므이가 던지는 저주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 그냥 듣기로 결정한다. 혹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까 하고 일말의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편으로는 자신의 죄의 결과로 이해하거나 다른 편으로는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간구의 시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윗의 멘탈에는 하나님은 가련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생각이 있는 싶다. 

약간 피학적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혹여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십자가로 묵묵히 걸어가시는,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하는 장면이 겹친다. 

그러나 예수님과 다윗은 질적으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다윗은 자신의 죄와 실수가 집적되어 발생한 사건의 결과로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귀한 소명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사람들의 저주의 소리를 듣고 참았던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심리를 이용하기 위해 수모를 참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조롱을 참았던 것이다. 

그러니 다윗과 예수님을 단순비교해서는 안된다. 

 

인생에는 위기 상황이 닥친다.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헷갈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급박한 위기 속에서 올바르게 판단하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두려움, 초조함, 심리적 압박, 정보의 부족, 그간의 스토리들의 재해석,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불신, 정서적 약점의 노출

과연 이런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있단 말인가! 

그래서 현인들은 위기 속에서 인생의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상황 파악이 우선이다. 

팩트 체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서와 감정을 객관화하고, 가급적 극단적인 해석을 배제해야 한다. 

그리해도 우리는 실수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관대해질 필요도 있다. 

하나님도 우리의 상황을 아신다. 

처음 겪는 고통과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얼마나 연약해지는지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공동체에도 위기는 상존한다.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제는 끊이지 않는다. 

사건은 종결되지 않고 계속해서 개인과 공동체는 고통을 겪는다.

우리의 부르심은 목표에 관한 뿐이 아니다. 과정도 중요하다. 

그래서 에너지가 정말 많이 들어간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결정할지 항상 헷갈리기 마련이다. 고민이 깊어진다. 

팩트체크가 안되는 경우도 많다. 

혼자서 결정하려고 하면 그것도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모든 정보를 제공할 수는 없다. 개인이 상하게 된다.

그렇게 딜레마에 빠진다. 

 

인간의 약함을 다시 절감한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

사람의 상황을 아시는 주님, 

매일 겪는 고통과 아픔의 순간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기의 순간에 침착할 있도록 도와주세요. 

수많은 정보들은 겸손하게 수합하게 하시고, 가장 좋은 방법을 찾을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당신의 명예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결정하도록 지혜를 주소서.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극단적으로 선택하지 않게 하시되, 때로는 과감하게 결단하는 용기도 허락해주세요. 

 

오늘 하루를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08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30 다윗은 올리브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는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울고, 머리를 가리고 슬퍼하면서, 맨발로 걸어서 갔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31 때에 누가 다윗에게, 압살롬과 함께 반역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히도벨도 끼여 있다는 말을 전하자, 다윗이 기도하였다. "주님, 부디, 아히도벨의 계획이 어리석은 것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32 다윗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꼭대기에 다다르니, 아렉 사람 후새가 슬픔을 못이겨서 겉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 채로 나아오면서, 다윗을 맞았다.

33 다윗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나와 함께 떠나면, 그대는 나에게 짐만 것이오.

34 그러니 그대는 이제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을 만나거든, 그를 임금님으로 받들고, 이제부터는 임금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시오. 이제까지는 임금의 아버지를 섬기는 종이었으나, 이제부터는 그의 아들, 임금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시오. 그것이 나를 돕는 길이고, 아히도벨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오.

35 곳에 가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그대와 합세할 것이오. 그러므로 그대가 왕궁에서 듣는 말은, 무엇이든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전하시오.

36 그들은 지금 자기들의 아들 둘을 곳에 데리고 있소. 사독에게는 아히마아스가 있고, 아비아달에게는 요나단이 있으니, 그대들이 듣는 말은 무엇이든지, 그들을 시켜서 나에게 전하여 주시오."

37 그리하여 다윗의 친구인 후새는 성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간에 압살롬도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눈물의 피난길 속, 자신의 부하였던 아히도벨의 배반 소식을 들은 다윗은 기도를 드립니다(30-31절). 후새는 친구 다윗의 처지를 슬퍼하며 흙을 뒤집어 쓴 채로 다윗을 맞이합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압살롬 진영에 가담하여 아히도벨의 계략이 실패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후새는 다윗의 제안에 동의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32-37절).

 

아히도벨과 대비되는 후새의 모습입니다. 이미 머리에 흙을 뒤집어써서 다윗과 같은 편임을 드러냈기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다윗을 위한 결정인지 숙고한 후새는 기꺼이 그 위험을 감수합니다. 도움은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한 행동입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봅시다.

 

——

배신의 사회

 

정당성이 부족한 반역에 동참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아히도벨이 그렇다. 

아히도벨이 그렇게 쿠데타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그가 밧세바의 친조부로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고 집안을 이상하게 만든 다윗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개인의 이유가 어떻든 간에 압살롬의 반역에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쉽다. 

개인적으로야 권력자를 싫어할 있다. 

그렇지만, 쿠데타를 일으킬 때에는 그에 걸맞는 정당성이 충분히, 아니 차고 넘치도록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쿠데타는 결국 공동체를 갈라치기 하는 것이며,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다른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웃을 위해 쿠데타는 함부로 일으켜서는 안된다. 

압살롬도 그렇고 아히도벨도 그렇고 하지 말아야 선택을 것이다. 

 

다윗의 죄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으로 수도 있겠다. 

그것은 역사를 전체, 통으로 가능한 해석이다. 

하나님의 처벌이 다른 것으로 대체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굳이 압살롬, 아히도벨이 처벌의 통로가 필요는 없다. 

구약의 나래이션이 항상 하나님의 시각을 반영한다는 확신도 어떤 면에서는 조심스럽다. 

나래이터는 역사와 사건을 보는 하나의 시각이다. 

나래이터에 하나님의 관점이 담겨 있기도 하고,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성령의 영감은 나래이터를 통해서만 성경에 녹아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다양한 저자들이 자신의 입장으로 기록하였다. 

저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임했다는 사실에 깊이 동의한다. 

허나, 같은 사건, 동일한 역사를 보더라도, 저자가 처한 상황과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성령님의 영감은 일단 저자의 시대에 청자들에게 전달할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있다. 

그렇다고 보편적인 적용점이 아예 제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건과 역사, 사건과 역사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공동체, 사이의 관계의 역동에는 어떤 원리가 존재하며, 원리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반영한다. 

보편적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런 구약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그분의 관점으로 구약의 사건들을 보고, 관점으로 지금 현실의 사건을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님의 관점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며, 이는 영원까지 지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구약을 해석하셨던 방식을 철저히 연구하여, 방식의 원리들을 최대한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다. 

 

오늘 본문의 나래이터는 확실히 다윗 편이긴하다. 

다윗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후새, 사독, 아비아달, 아하마아스와 요나단이 다윗의 뒷배가 되어줄 것이다. 

다윗 일생일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복선이 깔렸다. 

갑자기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윗을 구출하는데 공헌한 사람들이다. 

비록 삼하의 나래이터는 다윗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처벌을 받는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가운데도 다윗을 위한 안전장치가 비밀리에 준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본문을 읽으셨다면 어떻게 보셨을까? 

자신의 삶에 본문을 적용하셨을까? 

배신하는 아들, 배반하는 아히도벨 

아마도 예수님은 인생에는 배신과 배반이 언제나 일어날 있음을 본문을 통해 더욱 실감하셨을 같다. 

왜냐하면, 가륫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가륫 유다 아니라 함께 따라 다니던 제자 그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던 사람들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리고 안따까운 마음으로 초심을 잃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배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정당한지 물어 보실 같다. 

 

지금 시대에도 배신이 난무하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된다. 

가장 극적으로 웃음과 함께 보여주는 곳이 런닝맨이다. 

인간사는 배신의 게임과도 같다. 

배신의 연속이며, 나도 그렇고 남도 그렇다. 

속에서 예수님의 태도로 응시할 있을까! 

배신을 어찌보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분노가 아니라 긍휼과 연민과 안따까움으로 바라볼 있을까? 

예수님이 가륫 유다를 보며 했던 말들처럼 말이다. 

 

나는 배신하는 사람들을 참아 있을까

 

——

숱한 사람들의 배신과 배반을 참아내신 하나님,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저에겐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의 욕구와 열망이 방향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생각으로 사로잡히게 도와주세요. 

성령님, 마음에 오셔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하소서. 

배신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보살피게 하소서. 

배신을 배신으로 갚지 않고, 긍휼한 마음으로 있는 초인적인 힘을 공급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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