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5 06 목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2 어느 , 넬의 아들 아브넬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마하나임을 떠나 기브온으로 갔다.

13 스루야의 아들 요압 다윗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서서, 장군이 기브온 연못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맞붙게 되었다. 편은 연못의 이쪽에, 편은 연못의 저쪽에 진을 쳤다.

14 때에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다. "젊은이들을 내세워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합시다." 요압도 그렇게 하자고 찬성하였다.

15 젊은이들이 일어나서, 일정한 수대로 나아갔는데,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쪽에서는 베냐민 사람 열두 명이 나왔고, 다윗의 부하들 가운데서도 열두 명이 나왔다.

16 그들은 서로 상대편 사람의 머리카락을 거머쥐고, 똑같이 상대편 사람의 옆구리를 칼로 찔러서, 모두 함께 쓰러져 죽었다. 그래서 기브온에 있는 곳을 헬갓핫수림, '칼의 벌판'이라고 부른다.

 

17 날에 싸움은 가장 치열하게 번져 나갔고, 결국 아브넬이 거느린 이스라엘 군대가 다윗의 군대에게 졌다.

18 마침 곳에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 있었는데, 아사헬은 들에 사는 노루처럼 달음박질을 하였다.

19 아사헬이 아브넬을 뒤쫓기 시작하여,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빗나가지 아니하고, 아브넬만을 바싹 뒤쫓았다.

20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면서 "아사헬, 바로 너였구나!" 하고 말하니, 아사헬이 "그래, 바로 나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아브넬이 그를 타일렀다. "나를 그만 뒤쫓고, 돌아서서 가거라. 여기 나의 좌우에 있는 젊은이나 사람 붙잡아서, 그의 군복을 벗겨 가지고 가거라." 그러나 아사헬은 그가 뒤쫓던 길에서 물러가려고 하지 않았다.

22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을 타일렀다. "너는 나를 그만 뒤쫓고, 물러가거라. 내가 너를 쳐죽여서, 너를 땅바닥에 쓰러뜨려야 까닭이 없지 않느냐? 내가 너를 죽이고, 어떻게 너의 요압을 보겠느냐?"

23 그런데도 아사헬이 물러가기를 거절하니, 아브넬이 끝으로 아사헬의 배를 찔렀다. 창이 그의 등을 뚫고 나왔으며, 그는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아사헬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가 쓰러진 곳에 이르러서, 모두 멈추어 섰다.

 

24 그러나 나머지 형제 요압과 아비새는 아브넬을 계속 뒤쫓았다. 그들이 기브온 광야로 들어가는 가의 기아 건너쪽에 있는 암마 언덕에 이르렀을 때에, 날이 저물었다.

25 때에 아브넬을 따르는 베냐민 족속의 군인들은, 언덕 위에서 아브넬을 호위하고 버티었다.

26 거기에서 아브넬이 요압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싸워야 하겠소? 이렇게 싸우다가는, 마침내 우리 비참하게 망하고 말지 않겠소? 우리가 얼마나 기다려야, 장군이 장군의 부하들에게 동족을 추격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명령하겠소?"

27 요압이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오. 장군이 이런 제안을 하지 않으셨으면, 군대가 내일 아침까지 추격을 해서, 장군을 잡았을 것이오."

28 요압이 나팔을 부니, 모든 군인이 멈추어 섰다. 그들은 이상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않고, 이상 그들과 싸우지 않았다.

 

29 아브넬과 그의 부하들이 , 밤이 새도록 아라바를 지나갔다. 그들은 요단 강을 건너고, 비드론 땅을 거쳐서 마하나임에 이르렀다.

30 요압도 아브넬을 뒤쫓던 길에서 돌아와서, 군인들을 점호하여 보니, 다윗의 부하 가운데서 열아홉 없고, 아사헬도 없었다.

31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아브넬의 부하 가운데서 베냐민과 아브넬 군인을 삼백육십 이나 쳐죽였다.

32 요압과 부하들은 아사헬의 주검 메어다가, 그의 아버지가 묻혀 있는 베들레헴의 무덤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밤이 새도록 걸어서 헤브론에 이르렀을 때에, 아침 해가 떠올랐다.

 

주석
요압(13) 요압은 다윗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 그의 군대장관이 인물인데,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이 요압의 아우 하나를 살해한 사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설명한다. 요압의 개인적인 감정은 장에 숨겨진 남아 있다. 감정은 결국 3:27에서 드러나게 것이다(IVP 성경주석).

 

동족 간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지휘관은 젊은이들을 내세워 서로를 붙잡고 죽이게 하는 전쟁놀이를 벌입니다. 청년들이 모두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를 군사들은 적의에 차서 싸우기 시작합니다(12-17). 결국에는 다윗의 군대가 승리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브넬에 의해 동생 아사헬을 잃고, 이로 인해 진영 간의 화해의 길은 더욱 멀어집니다(18-23).

 

전쟁에 승자는 없습니다. 지휘권을 가진 사람들이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전쟁에서 많은 젊은 목숨들이 스러졌습니다. 동족이 서로 칼을 겨누었던 , 비극적 역사로 인해 고통 받았던 땅에 화해와 평화가 임하길 기도합시다. 분쟁과 갈등으로 싸우고 있는 모든 곳에 폭력은 그치고 진정한 샬롬이 임하기를 기도합시다.

 

——

피할 없는 전쟁이었다. 

다윗의 군대와 사울의 남은 부하들이 서로 전쟁을 해야 했다. 

다음 정권을 차지하는 사람이 누가 되는지 겨뤄야 했다. 

나라에 기름 부음 받은 왕이 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윗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전쟁의 시작은 아브넬로부터였다. 

군사를 이끌고 기브온으로 갔다.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도 기브온으로 출정했다.

기브온 연못에서 군대가 마주 보고 전쟁을 시작한다. 

 

고대의 전쟁들을 보면, 때로 병사들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양편의 최고의 장수들이 나와 일대일로 겨루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브넬은 자신들의 부하 12명씩을 내세워 전쟁을 하자고 제안한다. 

 

14 때에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다. "젊은이들을 내세워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합시다." 요압도 그렇게 하자고 찬성하였다.

 

결국 양편 12명씩 24명의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이들이 싸우다가 죽는다.  

싸움을 지켜보던 양편의 군사들은 분노하며 치열한 전쟁으로 번진다. 

 

아브넬은 교활한 인물이다. 목숨 걸고 싸우지 않는다. 아사헬이 자신을 쫓을 ,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너를 죽이고, 어떻게 너의 요압을 보겠느냐?”
그는 전쟁의 승패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최소한 자신은 군대장관으로 남아 요압을 계속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로잡히더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결국 아브넬은 휴전을 제의했고, 군대는 전쟁을 멈췄다. 

내전으로 무고한 젊은이들만 죽음으로 내몰렸다. 

 

권력을 차지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젊은이들이 죽어 나간다. 

미얀마의 시민들과 젊은 군인들도 서로를 죽이고 있다. 

싸움은 사람들이 시작했지만, 결국 죽어 나가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불의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시위는 젊은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 때문에 피로 물들었다. 

 

어느 사회건 기득권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젊은이들의 희생을 부추기곤 한다. 

굳이 전쟁에 동원하는 극단적인(하지만 종종 일어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경제적 경쟁 구도 속에 젊은이들이 희생 당하곤 한다. 충분한 보상을 하지 못한다. 미래를 살아갈 충분은 자원을 공급받지 못한다. 가정에 맡긴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돈이 많은 가정의 젊은이들은 상당히 앞선 출발선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불공평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나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과연 역사는 진보하는 것인가라는 케케묵은 오래된 논쟁적 질문이 다시 떠오를 밖에 없다. 

과거에 비하면 인권적인 측면에서 분명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진 같긴 한데, 그럼에도 여전히 인류의 죄는 차고 넘친다. 진보하는 사회 이면엔 죄의 구조가 모양을 조금씩 바꾸면서 더욱 집요하게 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죽인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노동으로 먹고 산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피를 빨고 있다. 

젊은이들이 희망과 소망을 갖고 사회에 나오는 날을 고대해본다. 

자원도 희소하고 그럴듯한 전망좋은 자리도 희소하다. 

젊은이들이 희망을 갖고 살도록 공평하게 지원금이 지급되고, 기회도 정의롭게 배분되어지면 좋겠다. 

보육원을 나온 18살의 젊은이에게 사회에 정착하도록 지원하는 금액이 500-800만원이라고 한다. 

https://www.nocutnews.co.kr/news/5485419

 

달랑 500만원 손에 쥐고 길거리에 내몰린 아이들

[부모도 국가도 외면한 18살 보육원생의 홀로서기②]

www.nocutnews.co.kr

 

과연 돈으로 한국 사회에서 그들이 무엇을 있을까? 

제대로 훈련받지고 교육받지도 지원받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은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18세를 어른으로 보는 분위기가 아니다. 35살까지도 청년으로 본다. 청년은 아직 미생이다. 

18살에 500만원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더욱 넘치길 기도한다. 

 

 

——

희망과 소망의 하나님,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내려주세요. 

얼마 안되는 돈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보육원의 젊은이들을 보호해주세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젊은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이 바뀌게 해주세요. 

많은 젊은이들이 미래를 꿈꾸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보게해주세요.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5 05 수요일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되다 

삼하 2:1-11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1 이런 일이 일어난 뒤에, 다윗이 주님께 "제가 유다에 있는 성읍으로 올라가도 됩니까?" 하고 여쭈었다. 주님께서 그에게 올라가라고 하셨다. 다윗이 다시 여쭈었다. "어느 성읍으로 올라가야 합니까?" 주님께서 헤브론으로 올라가라고 알려 주셨다.

2 그리하여 다윗이 곳으로 올라갔고, 그의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함께 올라갔다.

3 다윗은 자기의 부하들과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함께 올라가서, 헤브론의 여러 성읍에서 살도록 하였다.

4 유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곳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유다 사람의 왕으로 삼았다.

사울을 장사지낸 사람들이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들이라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지니,

 

5 다윗이 길르앗의 야베스 주민에게 사절을 보내어서, 그들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다. "야베스 주민 여러분이 사울 왕의 장례를 치러서, 왕에게 의리를 지켰으니,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6 여러분이 그러한 일을 하였으니, 이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친절과 성실로 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도 여러분을 대접하겠습니다.

7 비록 여러분의 사울 임금님은 세상을 떠나셨으나, 유다 사람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삼았으니, 여러분은 이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기를 바랍니다."

 

8 넬의 아들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 사령관인데, 그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갔다.

9 거기에서 그는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아서,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다.

10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이스라엘의 왕이 때에 마흔 살이었다. 그는 동안 다스렸다.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랐는데,

11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으로 헤브론에서 다스린 기간은 일곱 여섯 달이다.

 

주석
1-7: 성경 저자도 독자도 다윗이 이제 '' 사실을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전히 정치적 관점에서 , '유다 사람들' 결정은 예상할 없었다. 사울의 죽음과 길보아에서의 블레셋의 압도적인 승리로 인해 이스라엘에는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으며, 지파 장로들은 가장 지혜로운 처신에 관하여 처음에 확신하지 못했을 것임이 틀림없다(IVP 성경주석).

길르앗 야베스(4): 사울의 전략적 지지 기반 하나였다. 사울이 이전에 사람들을 암몬 족속으로부터 구해주었다(삼상11, IVP 성경배경주석).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왕을 잃었습니다. 다시 유다로 귀환하려던 다윗은 오랜 기간 블레셋에 망명해 있었던 전적으로 인해 신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왕으로 삼았지만 아직 이스라엘의 왕은 아니었습니다(1-4). 다윗은 사울의 시신을 장사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선대하며 반대 세력을 포용합니다(5-7). 이런 노력에도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웁니다(8-11).

 

다윗은 조심스럽게 유다로 귀환 했어야 했고, 사울 가문과의 대결도 피할 없게 되었습니다. 기름 부음 받고, 십오 만에 왕이 되었지만 자신의 혈족인 유다 지파만의 왕일뿐이었습니다. 일곱 여섯 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난한 과정을 생각해 봅시다. 다윗의 태도와 기다림, 인내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바를 묵상합시다.

 

 

——

결정의 순간

 

1. 유다 지파의 장로 

“유다 사람들이여, 

지금 정국이 심상치 않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우리의 왕인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었습니다. 비통함이 큽니다. 

동시에 우리는 두렴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제 우리를 공격할 지 모릅니다. 

외부의 공격이 지속되는 가운데, 우리 내부적으로도 분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입니다. 

다음 왕위를 누가 가져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역사가 좌지우지 됩니다. 

최근에 다윗이 헤브론에 왔습니다. 그의 식솔들과 부하들도 함께 왔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명장 골리앗을 맨몸으로 물리친 명장입니다. 

최근에 그가 지어 전파한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애가를 비추어 볼 때, 그는 역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블레셋에 망명한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유다로 돌아왔습니다. 

같은 지파 사람으로서, 지금의 외부적 위기 앞에서 그를 우리의 지도자로 세우는 것을 제안합니다. 

여러 장로님들과 가문의 지도자들께서는 심사숙고하여 함께 이 일을 결정지읍시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유다 지파의 A 장로의 제안을 대부분이 동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헤브론의 다윗을 찾아간 것이다. 

군사력을 갖춘 다윗, 헤브론의 여러 성지에 자신의 가족들과 부하들이 흩어져 있다. 

부하들의 다윗에 대한 존경심은 이루 말할 없다. 

그동안 다윗이 보여준 모습에 그들은 감탄했다. 여론이 좋았다. 

유다 지파의 지도자들은 빠르게 정세 판단을 내렸다. 

같은 지파의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기로 말이다. 

하나님께 물으면서 기도하면서 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해주셨다. 정치적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던 것이다. 

 

2. 성경 숨겨진 인물들

어떤 이야기든 주인공이 있다. 

성경의 이야기도 주인공 중심의 이야기 전개다. 

그걸 뭐라할 수도 없다. 지면은 한계가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지면을 할애하기 시작하면 기록할 수도 없거니와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

충분히 이해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이 주인공밖에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순진하다. 

때로 주인공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다.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윗의 이야기에는 수많은 주변인물이 존재한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당시 유다 지파의 최고참 A 장로, 그는 정세 판단이 빨랐다. 그리고 빠른 판단을 통해 유다 지파의 길을 알려주었다. 결국 선택은 옳은 선택이 되었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 다윗의 왕권은 예수님의 왕권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아주 작은 선택을 당시 유다 지파 지도자들은 성경 전체의 중요한 결정 요소로 남는다. 전체로 보면 작은 결정 같지만, 그들에게는 목숨을 모험이었다. 어쨌든 이제까지 사울 집안이 다스려 왔다.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다윗에게 왕위의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반역, 모반이다. 대단히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어려운 것을 유다 지파 지도자들이 해냈다.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나님 나라의 작은 모자이크가 되었다. 작은 벽돌이 것이다. 

 

성경에 숨겨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숨겨진 사람들의 믿음의 행보를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

 

3. 지도자들의 결정 

국가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의 결정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주는 알고 있다. 

그런데, 때로 작은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 혹은 가정을 이끄는 부모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은 결정 하나 하나가 쌓여서 공동체의 역사가 된다. 결정의 벽돌을 오늘도 쌓는다. 부담스럽지만, 그것이 지도자들의 몫이다. 

 

한계를 가진 인간들이 무거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야고보가 그렇게 강조하듯 말이다. 

그분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빠른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것에 꽂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4. 성향 vs 성찰

크게 가지 메시지가 등장한다. 

즐겁게 하세요스스로를 성찰하세요 그것이다. 

즐겁게 하라는 말은 매우 의미가 있다. 자신의 성향대로, 자신의 기호대로 하라는 말이다. 억지로 하지 말라는 말이다. 웃으면서 하라는 말이다. 노력하는 이길 없다. 하지만 즐기는 자가 최후 승자다. 독일인 심리치료사인 롤프 메르클레가 이렇게 말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없다.” 그러나 한편 즐기라라는 말에는 자신의 성향을 그대로 두라 혹은 성향과 기호를 더욱 강화하라는 말로 이어진다. 사람은 관성의 동물이라 제어장치가 없으면 계속 자신의 성향대로 살아간다. 그게 자신의 길을 오래 걸어가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은사대로 사역하라는 말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즐겁게 하라는 원칙만 따를 , 사람은 자신에게 갇힌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에 집중하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 모르는 사람보다야 아는 사람이 낫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따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거대한 성을 쌓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자기 부인의 삶을 선택하지 않을 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자기 부인의 길이다. 은사에 맞는 사역을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부인의 삶을 계속 연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벽돌을 함께 쌓을 없다. 자신의 성은 쌓을 있지만, 모두의 성을 쌓는 일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역은 자신의 성을 쌓는 과정이 아니다. 예수님의 성을 함께 쌓는 과정이다. 

근대적 주체는 자신의 성을 높이 쌓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주체는 예수님의 성을 쌓아간다. 

근대적 주체는 자신의 성을 쌓아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후기 근대적 주체는 자신의 집을 짓고 파티만 연다. 

기독교적 주체는 예수님의 성을 위해 하나의 벽돌이 된다. 

 

사역자들은 자신을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된다. 

자신의 , 자신의 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을 함께 쌓아가야 한다. 

 

——

 

주님, 모두가 다윗 처럼 수는 없습니다. 

많은 경우 자신이 속한 작은 공동체의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살게 것입니다. 

저도 지금 있는 공동체의 리더십으로 있습니다. 

더욱 겸손하게 나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성을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자신을 부인하며 저의 십자가를 지고 길을 걸어가게 주세요. 

제가 좋아하는 것으로 성을 쌓는 일에 몰두하지 않게 주시고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 있는 하나님의 성을 만드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게 주세요. 

기호, 성찰 

가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어린이 날입니다. 

어린이들은 포용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5 04 화요일

다윗의 조가 

삼하 1:17-27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17 다윗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가를 지어서 부르고,

18 그것을 ' 노래' 하여,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였다. '야살의 ' 기록되어 있는 조가는 다음과 같다.

 

19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 언덕에서 쓰러졌다.

20 소식이 가드에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소식이 아스글론의 모든 거리에도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듣고서 기뻐할라.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환호성을 올릴라.

21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곡식도 거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22 원수들을 치고 적들을 무찌를 때에,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일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적이 없다.

23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힘이 세더니!

24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25 ,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위에서 죽어 있는가?

26 나의 요나단,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진한 것이었소.

27 어쩌다가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 없이 되었는가?

 

주석

야살의 (18): 야살의 책에는 영웅들의 행위에 대한 고대의 시적인 기사들이 담겨 있었던 듯하다( 책은 여호수아 10:13 언급된다). 책은 지금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IVP 성경배경주석).

 

다윗은 슬픈 노래를 지어 사울과 요나단을 애도합니다.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토로하고(19-21),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함을 기억하며 칭송합니다(22-24). 특별히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요나단, 그를 떠올리며 애통해합니다(25-27).

 

우리 주변에도 삶을 살아가다 스러져간 사람들, 기억해야 이름들이 있습니다. 누가 떠오르나요? 어두운 시대에 빛을 밝히기 위해 이름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던 가족과 친구들, 그들의 행적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들을 되새기며 애도하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

마음의 근육

 

1. 작사가 다윗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 

슬픔을 몸으로 표현했던 다윗은 이제 노래를 지어 그들을 애도하고 있다. 

노래는 단순한 애도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처음 부분이 의미심장한데, 가드나 아스글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경고하면서 노래가 불려진다.

일단 애도는 하지만 애도가 적군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는 의도도 담겨 있다. 

지극히 전략적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전략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사울 왕과 요나단을 위해 함께 노래를 지어 부른 것은 나름대로 아주 좋은 방식이다. 

 

사울 왕족은 후계를 잃었다. 

다윗은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애도한다. 

비록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지만, 그를 용서했을 아니라 그를 위한 조가를 널리 퍼뜨린다. 

사울과 요나단을 따랐던 사람들도 걱정하지 않고 다윗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민중들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서로 연대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지금은 내정 갈등을 고조시킬 여유가 없다. 외적이 침략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똘똘 뭉쳐서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는데, 과거 민족의 구원자였던 다윗이 정통성을 부인하다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게 것이다. 

 

이런식으로 바라보면, 위의 조가를 민중들이 따라 부르게 만든 것은 탁월할 조치이다. 

 

2. 다윗의 진심

물론 그런 정치적 의도와 목적이 없었겠냐마는, 다윗의 진심이 느껴지는 구절이 눈에 띈다. 

바로 26절이다. 

 

26 나의 요나단,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진한 것이었소.

 

구절은 굳이 넣지 않아도 법한 아주 개인적인 내용의 시이다. 

이걸 민중들이 함께 부르라고 노래에 집어 넣었다면, 그건 단순히 정치적 의도만으로는 설명되기가 어렵다. 

다윗은 요나단을 진심으로 아끼고 깊은 우정을 느끼고 있었다. 

다윗은 모두각 부르는 노래 가사에 자신의 깊은 슬픔을 직접적으로 집어 넣었다. 

요나단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노래에 담았다. 

 

요사이 넓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한계를 느낀다.

나이가 들고, 역할이 많아질수록 품어야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런데 확장하다가 어떤 한계를 만나면 갑자기 수축된다. 

마음의 근육이 부드럽게 이완되어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부드러움이 드러난다. 

하지만, 한계를 경험하고, 나의 약점이 부각되어 자각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의 근육이 위축되고 경직된다. 

그러다보면 자신에게로 숨는다. 

품기 보다 밀쳐낸다. 나만의 동굴로 들어가려고 한다. 

나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5월이 시작되었다. 지난 1-4월을 쉼없이 달려 왔다. 

5월이라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마음의 근육이 위축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다윗이 그동안 적이었던 사울을 위해 애도하며 노래를 지었던 것처럼 넓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품고 싶다. 

마음을 근육이 더욱 이완되기를 기도한다. 

 

——

주님, 

많은 사람들을 픔으셨던 주님, 

저도 주님의 마음을 닮아 끝까지 사람들을 품게 주세요. 

분노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끝까지 경청하며, 마음의 교감이 일어나도록 도와주세요. 

나이가 들수록, 역할이 많아질수록 더욱 마음의 근육이 이완되게 해주셔서 모든 행동과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05월 01일 토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

여는 기도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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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울이 죽은 뒤에, 다윗이 아말렉을 치고, 시글락으로 돌아와서 이틀을 지냈다.
2 사흘째 되던 날, 한 젊은 사람이 사울의 진에서 왔다. 그는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 써서, 애도의 표시를 하고 있었다. 그가 다윗에게 와서,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니,
3 다윗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진에서 가까스로 살아서 빠져 나왔습니다."
4 다윗이 그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서 나에게 알려라." 그가 대답하였다. "우리의 군인들이 싸움터에서 달아나기도 하였고, 또 그 군인들 가운데는 쓰러져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사울 임금님과 요나단 왕자께서도 전사하셨습니다."
5 다윗이 자기에게 소식을 전하는 그 젊은이에게 다그쳐 물었다. "사울 임금님과 요나단 왕자께서 전사한 줄을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6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는 젊은이가 설명하였다. "제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갔다가, 사울 임금님이 창으로 몸을 버티고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적의 병거와 기병대가 그에게 바짝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7 사울 임금님이 뒤로 고개를 돌리시다가, 저를 보시고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었더니,
8 저더러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말렉 사람이라고 말씀드렸더니,
9 사울 임금님이 저더러 '어서 나를 죽여 다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기는 하나,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0 제가 보기에도, 일어나서 사실 것 같지 않아서, 다가가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저는 머리에 쓰고 계신 왕관을 벗기고, 팔에 끼고 계신 팔찌를 빼어서, 이렇게 가져 왔습니다."
11 그러자 다윗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여, 자기의 옷을 잡아 찢었고,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12 그리고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가문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슬퍼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울며 금식하였다.
13 다윗이 자기에게 소식을 전하여 준 젊은이에게 "너는 어디 사람이냐?" 하고 물으니, "저는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입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14 다윗이 그에게 호통을 쳤다. "네가 어떻게 감히 겁도 없이 손을 들어서,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분을 살해하였느냐?"
15 그리고 다윗이 부하 가운데서 한 사람을 불러서 "가까이 가서, 그를 쳐죽여라" 하고 명령하였다. 명령을 받은 그 사람이 그를 칼로 치니, 그가 죽었다.
16 그 때에 다윗이 죽어 가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죽는 것은 너의 탓이다. 네가 너의 입으로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분을 제가 죽였습니다' 하고 너의 죄를 시인하였다."

 

아말렉 사람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울 곁에 있던 사람도 자기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스스로 엎어졌습니다(삼상 31:4-5 참조). 아말렉 사람은 사울의 죽음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다윗에게 말합니다(10절). 그 입의 거짓으로 인해 아말렉 사람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11-16절).

진실보다 나의 유불리를 더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는 진실을 거짓으로 왜곡하는 작업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합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교묘히 남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향해 우직하게 걸어가는 오늘 하루의 삶이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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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시작이다.

시심의 표지가 매력적이다. 꽃들이 반긴다. 

 

다윗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사울의 죽음을 반기지 않는다.

자신을 그토록 죽이려고 했던 사울, 그에게 당한 고난의 시간들이 꽤나 길었다. 

사울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야 했다. 

미친척 해야 했다. 산과 들을 다니며 야영 생활을 해야 했다.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을 대하는 방식이 반역자 다루듯이 했다. 

그런 사울 왕의 죽음을 기뻐하기는 커녕, 큰 슬픔에 빠진다. 

요나단 때문일 수는 있다. 

자신이 사랑했던 절친이 함께 죽었다. 

 

성경의 저자(나래이터)는 이렇게 표현하다. 

 

11 그러자 다윗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여, 자기의 옷을 잡아 찢었고,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12 그리고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가문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슬퍼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울며 금식하였다.

 

다윗은 거짓으로 슬퍼하지 않았다.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그는 최소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진심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왜 그는 사울의 죽음을 그토록 슬퍼했는가? 

그 지점이 오늘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파악하는 핵심 질문이 될 것이다. 

왜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그토록 아파하고 슬퍼했는가?

 

오늘은 질문으로 묵상을 마감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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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모든 슬픔을 이해하시는 하나님, 

다윗의 울음이 가져다 주는 복합적인 감정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정치적인 제스처 같지가 않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서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 우리 인생에는 이해하기 힘든 슬픔이 있습니다.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한 슬픔, 

그 슬픔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앞에서 충분히 울면서, 충분히 드러내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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