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17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 왕이 목놓아 울면서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소문이 요압에게 전해졌다.

2 그래서 모든 군인에게도 날의 승리가 슬픔으로 바뀌었다. 왕이 자기의 아들 때문에 몹시 슬퍼한다는 소문이, 모든 군인에게 퍼졌기 때문이다.

3 그래서 군인들은, 마치 싸움터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 부끄러워서 빠져 나가는 것처럼, 슬며시 안으로 들어왔다.

4 그런데도 왕은 손으로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큰소리로 " 아들 압살롬아, 아들아, 아들 압살롬아!" 하고 울부짖었다.

5 마침내 요압이 집으로 왕을 찾아가서 항의하였다. "임금님, 모든 부하가 오늘 임금님의 목숨을 건지고, 임금님의 아들들과 딸들의 목숨도 건지고, 모든 왕비의 목숨과 후궁들의 목숨까지 건져 드렸습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는 오히려 오늘 부하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6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임금님을 반역한 무리들은 사랑하시고, 임금님께 충성을 바친 부하들은 미워하시는 겁니까? 우리 지휘관들이나 부하들은 임금님께는 있으나마나 사람들입니까? 임금님께서는 오늘 임금님의 본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차라리 오늘,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모두 죽었더라면, 임금님께서는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7 이제라도 일어나 밖으로 나가셔서, 임금님의 부하들을 위로의 말로 격려해 주십시오. 제가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만, 지금 임금님께서 밖으로 나가지 않으시면, 오늘 밤에 사람도 임금님 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님께서 젊은 시절부터 이제까지 당한 모든 환난보다도 무서운 환난을 당하실 것입니다."

8 그러자 왕이 일어나서 성문 문루로 나와 앉았다. "임금님께서 성문 문루에 앉아 계신다!" 하는 소식이 모든 부하에게 전해지니, 모든 부하가 왕의 앞으로 나아왔다. 사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도망하여,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9 이스라엘 백성은 지파마다 서로 의논이 분분하였다. "다윗 왕은 우리를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었다. 블레셋 사람의 손아귀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압살롬을 피해서 나라에서 떠나 있다.

10 우리가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운 압살롬은 싸움터에서 죽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다윗 왕을 다시 왕궁으로 모셔 오는 일을 주저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11 이스라엘이 하는 말이 다윗 왕에게 전달되었다. 다윗 왕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렇게 말하였다. "유다 장로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어찌하여 왕을 다시 왕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려고 하는지,

12 그들은 나의 친족이요 나의 골육지친인데, 어찌하여 왕을 다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려고 하는지,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13 그리고 아마사에게는, 그가 나의 골육지친이면서도,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 사령관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벌을 내리시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고 하더라고 알려 주십시오."

14 이렇게 다윗이 모든 유다 사람의 마음을 하나같이 자기쪽으로 기울게 하니, 그들이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부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어서 빨리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슬픔을 이기지 못합니다. 부하들을 격려하고 왕국을 안정시켜야 상황이었지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요압의 책망과 협박을 들은 다윗은 억지로 왕의 직무를 재개합니다(1-8). 북이스라엘 지파가 왕의 환궁을 주도하려하자 다윗은 자신의 친족 유다 지파가 주도권을 갖도록 부탁합니다. 아마사를 군사령관으로 세워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이들에 의해 왕은 환궁 요청을 받습니다(9-14).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로 왕의 직무에 복귀한 다윗은 제대로 결정을 하지 못합니다. 환궁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유다 지파를 의존함에 따라, 이후 북이스라엘과 유다 지파 간의 갈등을 촉발합니다.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군사령관 교체는 요압의 아마사 살해라는 불상사를 불러옵니다(삼하 20 참조).

 

——

다윗의 이야기는 현실 역사 이야기다. 

단순히 영적으로 해석될 내용이 아니라, 실제 일어나는 일들에 시사점을 많이 던져준다. 

다윗은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용사들을 격려하거나 환대해주지 못했다. 

쿠데타가 일어났으면 어쩔 없이 쪽은 죽음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압살롬이 죽지 않으면 다윗과 그를 따르는 식솔, 부하들이 죽는다. 

대등한 국가간의 전쟁이라면, 휴전이라는 것이 있다. 

전력차가 경우라면, 항복이라는 것이 있다. 

그럴 경우 목숨은 살려 두기도 한다. 최고 지도자는 죽더라도 부하들을 살려 두기도 한다. 

그러나 쿠테타는 패배한 쪽의 세력이 거의 대부분 축출된다. 내전이 무서운 이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압의 말이 옳다. 

다윗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목숨을 다해 싸운 군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것은 알겠지만, 씨앗은 자신에게 있지 않았는가! 

처음부터 시시비비를 다루든지, 아님 압살롬을 완전히 용서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든지 

중에 하나를 결단력있게 감당했어야 했는데, 애매하게 진행했다. 

서로 감정의 골만 깊어지게 만들었다. 지혜롭지 못했고, 어설펐다. 

그가 작성한 수많은 시편은 때로 이런 약점에 대한 자신의 도피처가 아닌가 싶다. 

 

요압이 다윗을 압박한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쿠테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협박 수준의 말이 나왔다. 

싸움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격려하고 축복하지 않고, 오히려 패잔병처럼 대한다는 사실에 요압은 화가 많이 났다. 

 

다윗은 여전히 개인적인 감정, 사적 감정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 

다윗은 공인이다. 왕이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현실판이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왕국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아들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다. 고통은 심하다. 

그럼에도 왕국의 회복을 위해 고통을 감당한다. 

인간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자신의 아들이 귀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도 귀하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해야 했다. 

게다가 압살롬만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다른 왕위 계승자도 있었다. 

 

여러모로 다윗의 인생 후반부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아브라함은 인생 후반부에 자신의 아들을 바치기까지 성장, 성숙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진 것이다. 

다윗은 과연 어땠을까? 

다윗은 인생 후반부로 갈수록 초심을 잃어버렸다. 

왕이라는 직책이 갖는 부담 때문인가? 

 

죽을 때까지 성숙할 있는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닮을 있는가? 

죽을 때까지 믿음의 삶을 진보시킬 있는가? 

 

——

평생에 걸쳐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어떤 순간에 머물거나 퇴보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과의 관계, 믿음, 신실함, 윤리의식, 실천력 

모든 것에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2021 06 16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9 때에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요압에게 말하였다. "제가 임금님에게로 달려가서, 주님께서 임금님을 원수에게서 구원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20 그러나 요압이 말렸다. "오늘은 아무리 좋은 소식이라도, 네가 전하여서는 된다. 너는 다른 좋은 소식을 전하여도 된다. 그러나 오늘은 날이 아니다. 오늘은 임금님의 아들이 죽은 날이다."

21 그리고는, 요압이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명령하였다. "네가 가서, 대로 임금님께 아뢰어라." 그러자 에티오피아 사람이 요압에게 절을 하고 달려갔다.

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또다시 요압에게 말하였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저도 에티오피아 사람과 같이 가서 보고할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요압은 말렸다. "아히마아스야, 네가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보아야, 소식으로는 아무 상도 받지 못한다."

23 아히마아스가 또다시 말하였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저도 가겠습니다." 요압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다." 아히마아스는 요단 계곡을 지나는 길로 달려서, 에티오피아 사람을 앞질렀다.

24 때에, 다윗은 성문 안문과 바깥문 사이에 앉아 있었는데, 파수꾼이 성문의 지붕 위로 올라가서, 성벽 위에서 멀리 바라보고 있다가, 어떤 사람이 혼자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25 파수꾼이 큰소리로 사실을 왕에게 알리니, 왕은 "혼자 오는 사람이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람이 점점 가까이에 이르렀다.

26 파수꾼이 보니,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파수꾼이 큰소리로 문지기에게 " 사람이 달려온다" 하고 외치니, 왕은 "그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다" 하고 말하였다.

27 파수꾼이 알렸다. "제가 보기에, 앞서서 오는 사람은 달리는 것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왕이 대답하였다.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전하러 것이다."

28 아히마아스가 왕에게 가까이 이르러서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며, 얼굴이 땅에 닿도록 왕에게 절을 하며 아뢰었다. "높으신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을 없애 버리시고, 임금님께 승리를 안겨 주신, 임금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9 왕이 " 어린 압살롬도 평안하더냐?" 하고 물으니, 아히마아스는 "임금님의 신하 요압이 종을 보낼 때에, 소동이 있었습니다마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30 왕이 "물러나서 곁에 있어라" 하고 말하니, 그는 곁으로 물러나서 있었다.

31 바로 때에 에티오피아 사람이 들어왔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왕에게 아뢰었다. "높으신 임금님께 기쁜 소식을 가져 왔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을 없애 버리시고, 임금님께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32 왕이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물었다. " 어린 압살롬이 평안하더냐?" 에티오피아 사람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의 원수들을 비롯하여,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이 모조리 젊은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33 왕은 말을 듣고,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울었다. 그는 올라갈 때에 " 아들 압살롬아, 아들아, 아들 압살롬아,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아들아, 아들아!" 하고 울부짖었다.

 

아히마아스는 다윗에게 승리의 소식을 알리려고 합니다. 요압이 만류하고 에티오피아 사람을 보내지만 아히마아스는 끝내 다윗을 향해 출발합니다(19-23절). 다윗은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4-27절). 관심은 압살롬의 생사 여부에 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을 전해들은 다윗은 울부짖습니다(28-33절).

 

아히마아스는 상을 받기 위해 왕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하려 합니다. 압살롬의 죽음이 다윗 왕에게 어떤 의미인지 압살롬에게 듣고도 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생사 여부를 묻자, 그는 모르는 척 답을 피하고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넘겨버립니다. 그는 받을 상에 마음이 급해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

마음의 동기

 

아하스마스는 요압 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전하러 갔을까? 

결국 질문에 답을 내려야 오늘의 중심 메시지가 도출될 것이다. 

아하스마스는 다윗이 심어두었던 첩자였다. 

요나단과 함께 아히도벨의 계책과 후새의 대응, 그리고 압살롬의 움직임에 대해 다윗에게 전달했던 사람이었다. 

아하스마스 덕분에 다윗과 그의 군대는 시간을 있었고, 에브라임 수풀 전투에서 승리할 있었다. 그러니 아하스마스는 승리를 누리고 승리에 대한 응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있다. 물론 순전히 빨리 승전보를 알림으로써 걱정하고 근심하고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왕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일 수도 있겠다. 

 

성경저자는 아하스마스가 상당히 빨리 달려서 에티오피아 사자보다 먼저 도착했음을 적고 있다. 

아하스마스는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에티오피아 전령도 제법 빠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전령은 기동성과 민첩성 생존능력이 탁월한 사람이 뽑힌다. 

그런 에티오피아 사람을 제끼고 앞서서 달려 나가고 있다. 

상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 아님 순전히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서 그랬는지는 쉽게 분간이 안된다. 

 

이상하게 오늘은 그의 순전함에 표를 던지고 싶다. 

성경 인물들의 행동과 선택의 의도를 사건마다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경우는 그냥 추측하거나 그날의 마음 가짐에 따라 선택을 수밖에 없다. 

오늘은 아하스마스가 순전히 빨리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어한다는 선한 동기에 주목하고 싶다. 

자신의 달리기에 자신이 있었던 그는 마치 마라톤 전투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40KM 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 갔던 그리스의 병사처럼 전령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충성스럽게 달려간다. 

지난 자신과 요나단의 첩보를 통해 다윗과 그의 군대가 살았고, 이제는 반란군이 진압되었다. 

다시 다윗 왕국이 새롭게 시작할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자신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도 대견하지만, 안에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간의 노고도 대단했다. 

기쁨의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하스마스는 요압의 예상대로 다윗왕이 승전보에 기쁨을 드러내기 보다 압살롬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던 모양이다. 

당연히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전령의 입장에서 왕의 질문에 거짓을 보태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은 솔직히 아니었다. 

요압이 충분히 당부했었고, 그간의 다윗의 태도를 비추어 ,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예상할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에티오피아 전령보다도 빨리 왔는지도 모르겠다. 

슬퍼할 것은 숨기고 기뻐할 내용만 전달하기 위해서는 에티오피아 전령보다 최소한 10-20 빨리 와야 했다. 

그는 첩자였으며, 주변의 누군가를 계속 속여야하는 사람이었고, 말은 주변 사람들의 심리 파악에 능하고, 모든 상황을 이용할 있으며, 순발력과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는 가능하면 빨리 달려서 슬픈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만 전하려고 했다. 

 

이렇게 보니, 초반에 순전히 기쁜 소식만을 전하려고 했다는 나의 선택은 다소 순진한 느낌이 든다. 

인간에게는 여러 마음이 존재한다. 

아하스마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면서도 왕의 반응에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며, 여러가지로 판단했을 , 에티오피아 전령보다 가능한한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때로 어떤 성경 본문은 당위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자신의 마음과 삶을 반추하도록 돕는 역햘에 국한되기도 한다. 

오늘 본문이 조금 그런 쪽에 속한다. 

아하스마스처럼 되라, 되지 마라가 아니라, 아하스마스와 같은 여러가지 복잡한 마음이 개인에게 있을 있으며, 자신 또한 순전한 마음과 계산적인 생각이 동시에 든다는 것을 부인 없다. 

순전함 그리고 순발력 

순발력은 잔머리와 연결된다. 

가지 아니라 더욱 다양한 마음의 동기가 속에 있다. 

주님 앞에 마음을 드러낸다. 

말씀을 거울 삼아 삶을 비춰본다.

성경 본문은 내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본문으로부터 나를 본다, 

 

 

——

누구보다도 저를 아시는 하나님, 

때로는 저도 저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순전함인지, 자기 잇속 챙기기인지, 아님 습관인지, 어떤 의도가 담긴 건지 

이렇게 복잡한 저의 마음을 오히려 아시는 주님, 

오늘도 저를 기억하시고 저와 대화를 나눠주시고, 주님의 생각과 감정을 나눠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으로 공동체를 섬기기 원합니다. 

다가와 주세요. 

내면의 밝은 빛이 되어 주셔서 마음의 순전함의 정도, 의도의 정도에 대해서도 드러나도록 하시어 더욱 정직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오늘 하루를 주께 맡깁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다시 삶과 사역을 감당할 있는 용기를 갖게 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15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1 다윗은 자기와 함께 있는 백성을 점검하여 보고, 그들 위에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을 세웠다.

2 다윗은 모든 백성을 떼로 나눈 뒤에, 삼분의 일은 요압에게 맡기고,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에게 맡기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에게 맡겼다. 그런 다음에 왕이 백성에게 자기도 그들과 함께 싸움터로 나가겠다고 선언하니,

3 백성이 외쳤다. "임금님께서 나가시면 됩니다. 우리가 도망을 친다 하여도, 그들이 우리에게는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절반이나 죽는다 하여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님은 우리들 명과 다름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임금님은 이제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4 그러자 왕은 그들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성문 곁에 있으니, 백성이 명씩, 명씩, 부대별로 나아갔다.

5 때에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부탁하였다. "나를 생각해서라도,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주시오." 왕이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달라고 모든 지휘관에게 부탁하는 말을, 백성이 들었다.

6 다윗의 군대가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려고 들녘으로 나아가서, 에브라임 속에서 싸움을 하였다.

7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였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크게 패하여서, 이만 명이나 죽었다.

8 싸움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자, 속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이 칼에 찔려서 죽은 군인보다 많았다.

9 압살롬이 어쩌다가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쳤다.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있었는데, 노새가 상수리나무의 울창한 가지 밑으로 달려갈 때에, 그의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휘감기는 바람에, 그는 공중에 매달리고, 그가 타고 가던 노새는 빠져나갔다.

10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서, 요압에게 알려 주었다.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11 요압이 자기에게 소식을 전하여 사람에게 물었다. "네가 그를 보았는데도, 그를 당장에 쳐서 땅에 쓰러뜨리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너에게 개와 하나를 주었을 것이다."

12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였다. "비록 개를 달아서 저의 손에 쥐어 주신다고 하여도, 저는 감히 손을 들어 임금님의 아들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우리 모두가 듣도록, 장군님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누구든지 어린 압살롬을 보호하여 달라고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13 제가 임금님을 속이고, 그의 생명을 해치면, 임금님 앞에서는 아무 일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에, 장군님까지도 저에게서 등을 돌릴 것입니다."

14 그러자 요압은 "너하고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하고 말한 뒤에, 투창 자루를 손에 들고 가서, 아직도 상수리나무의 한가운데 채로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꿰뚫었다.

15 요압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젊은이 명도 모두 둘러싸고서, 압살롬을 쳐서 죽였다.

16 그런 다음에 요압이 나팔을 부니, 백성이 이스라엘 사람을 뒤쫓다가 돌아왔다. 요압이 백성에게 싸움을 그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17 그들은 압살롬을 들어다가 속의 깊은 구덩이에 집어던지고, 위에다가 아주 돌무더기를 쌓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망하여서, 저마다 자기 장막으로 돌아갔다.

18 평소에 압살롬은, 자기의 이름을 후대에 남길 아들이 없다고 생각하여, 살아 있을 때에 이미 자기 비석을 준비하여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 '왕의 골짜기' 있다. 압살롬이 돌기둥을 자기의 이름을 따서 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출전하는 지휘관과 모든 백성에게 압살롬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합니다(1-5절). 다윗의 군대가 승리하고 압살롬은 쫓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나무에 매달립니다. 요압은 감히 왕의 아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잔인하게 압살롬을 죽입니다(6-18절).

 

아버지와 아들의 전쟁,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이 전쟁에 승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패자일 뿐입니다. 원인은 사랑의 실패입니다. 아버지로서 다윗은 아들을 품고 용서해야 했습니다. 진정한 화해를 하며 사랑의 관계를 회복했어야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거절감, 그 깊이 파인 곳에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싹 텄고, 분열과 전쟁, 죽음으로 열매 맺게 되었습니다. 비극적이고 슬픈 이야기 입니다.

 

——

전면전이다.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맞붙었다. 

다윗의 군대가 쫓기는 싶지만, 이들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들의 칼로 죽여봤던 살인 전문가들이다. 

오랜 행군으로 지쳐 있겠지만, 경험많은 장군들이 두루 포진한 다윗의 군대가 유리하다고 있다. 

요압, 아비새, 잇대 이렇게 장군은 매년 전장터를 누비던 사람들이다. 

다윗은 결국 전쟁의 승자는 자신이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전장터로 나가는 장군들에게 자신의 아들은 살려 주라고 말하고 있다. 

말은 전장을 수행해야 하는 장군이나 병사들에게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일 것이다. 

겨우 나라를 통일하고, 국력이 상당히 올라와서 주변국들이 조공을 바치는 주인의 나라가 되었음에도 내부적, 사적 권력관계의 갈등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나라를 일으켰던 일등 공신들은 이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없다. 

그들은 다윗을 따라 나섰지만, 수많은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특히 요압은 잔꾀를 내어 압살롬을 예루살렘을 들인 장본인이다. 

그냥 암논을 죽이고 그술 땅에 망명한 압살롬을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다. 

죄에 대해 엄중히 물어야 했다. 암논의 죄건 압살롬의 죄건 말이다. 

죄를 엄중히 다루지 못하다 보니, 나라 꼴이 엉망이 되었다. 

애꿎은 이스라엘 병사들만 수만명이 죽어나갔다. 국력이 쇠하여 진다. 

다시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는 , 반란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숙청해야 하는 과정 정말 하기 싫은 일들이 남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처형 당할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 전체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다. 

외부의 적을 향해 칼을 드는 것은 정당성을 확보할 있으나, 내전은 언제나 국력의 대부분을 잃게 한다. 

 

625전쟁이 그랬다. 힘을 모아 그동안 한반도를 침략했던 나라들을 몰아내는 최선을 다해야 했건만, 이념으로 나뉘어져 민족이 내전을 겪는다. 3년간 서로를 죽이고 끔찍한 기억이 남아 십년을 내려왔다. 상흔이 너무 깊어 용서가 안된다. 아직도 38선이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은 이유다. 

그러니 내전은 안된다. 미얀마도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하는데, 군부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요압은 땅을 치며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요압이 압살롬을 처단한 것이 이해가 된다. 

비록 왕이 부탁이 있었긴 했지만, 압살롬으로 인해 수만명이 사지로 내몰렸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지 모르는 일이다. 나라에 인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약해진 국력을 틈타 언제 외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다. 나라가 망해버릴 수도 있다. 몇십년을 전장에서 지낸 장군의 눈엔 원망과 원통함이 쌓일만도 하다. 자신들의 부하가 어이없는 전쟁에 의해 죽어나가고 있다. 

 

암논이나 압살롬이나 자신의 죄에 대해 응당한 대가를 미리 치렀어야 했다. 

왕자라도 넘지 말아야 선이 있다. 그들은 선을 넘은 것이다. 

암논도 그렇지만 압살롬은 자신의 형제들이 보는 곳에서 암논을 살해했다. 

그런일이 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기드온의 아들들이 바위에서 죽었던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와 같은 일이 압살롬에 의해 다시 벌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왕은 압살롬을 오히려 왕으로서 버려야 했다. 아버지로서 가끔 찾아가 만날 있었다. 그래도 왕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압살롬은 압살롬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어차피 그는 예루살렘에 왔어도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18 평소에 압살롬은, 자기의 이름을 후대에 남길 아들이 없다고 생각하여, 살아 있을 때에 이미 자기 비석을 준비하여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 '왕의 골짜기'에 있다. 압살롬이 그 돌기둥을 자기의 이름을 따서 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고 한다.

 

그의 자녀가 없지 않았다. 명의 아들(사무엘하 14:27) 있었는데, 아마도 일찍 죽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그는 인생의 낙이 사라졌다. 

아들이 없으니, 자신의 비석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예루살렘에서의 삶도 쓸쓸함 자체였다. 

 

과연 다윗왕은 어떤 결정들을 내렸어야 했나?
예수님은 뭐라고 조언을 하실까? 

왕은 높은 윤리적 기준과 덕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왕은 하나님 통치의 실질적 대리자였다. 

왕은 사적 감정으로 백성들을 죽음에 몰아넣어서는 안된다. 

다윗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신복 우리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아들들의 죄를 엄중히 묻지 못해 이스라엘은 내전으로 들어갔다. 

과연 다윗 왕이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했는가? 

다시 봐도 아니다. 그는 철저히 실패했다. 

그의 실패한 인생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남아 대대손손 흐른다. 

이게 아이러니다. 

신하로서 다윗은 성공했지만, 왕으로서 다윗은 철저히 실패했다. 

전장터에서 다윗은 위대했지만, 왕궁에서의 다윗은 비참했다. 

그가 예배 의식에는 우선 순위가 있었지만, 가정을 돌보는 일은 잼뱅이였다. 

가지를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인간은 실패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모두를 충실히 완벽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없다. 

높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려면 다른 무언가에 누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그렇게 완벽하게 있는 분은 예수님이시데, 문제는 예수님도 육체로 계실 때는 한계 때문에 완벽하게 주변을 챙길 없는 없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문전박대했으며, 결국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어머니에게 너무 상처를 안겼다. 

그러니 예수님도 어쩔 없이 어느 순간엔 가정을 내려 놓을 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의를 위해 사적 관계에 충실할 없었다. 

인간 왕은 그렇게 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해야 한다. 

평소에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부르심의 때가 있고, 사적 관계를 벗어나야 때가 있다. 

때를 분별해야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실패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하다. 

 

리더십은 어쩔 없이 실패한다.

완벽한 성공은 없다. 결점이 가려질 뿐이다. 혹은 용서될 뿐이다.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은 실패하기 일쑤다. 

이게 인간의 한계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외친다 해도, 실제는 실패다. 

인간은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구현할 없다. 

그러니 너무 이상주의에 매몰 필요없다. 

이상주의에 함몰된 사람이 크게 실패하기 마련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상적 비전이야 우리가 소망해야 일이다. 

그러나 현실이 못미친다고 크게 분노할 일이 아니다. 작게 분노할 일이다. 

현실은 언제나 비전을 따라가지 못한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오늘도 가득하길 기도한다. 

 

——

실패한 인생들은 너무도 많이 보아오신 하나님, 

인생도 수많은 결점들이 곳곳에 박혀 있습니다. 

오랫동안 공동체의 리더로 살아왔지만, 부족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 아찔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주님 

예수님처럼 살고 싶지만, 완벽하게 따라하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닮는 노력을 포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주께서 도와 주세요. 

겸손하게 오늘도 주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는 시간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6 12 토요일

여는 기도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15 후새는 사독 제사장과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어떤 모략을 베풀었는지, 그리고 자기가 어떤 모략을 베풀었는지를 알리고서,

16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 빨리 다윗 왕께 사람을 보내서, 오늘 밤을 광야의 나루터에서 묵지 마시고, 빨리 강을 건너가시라고 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임금님만이 아니라, 임금님과 함께 있는 백성까지 모두 전멸을 당할 것입니다."

17 한편,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과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예루살렘 바깥의 로겔 샘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안으로 드나드는 것을 삼갔다. 거기에 있다가, 여종이 그들에게 가서 소식을 전하여 주면, 그들이 소식을 받아서 직접 다윗 왕에게 전하곤 하였다.

18 그런데 그만 젊은이가 그들을 보고서, 압살롬에게 가서 일러 바쳤다. 탄로가 줄을 알고서, 사람은 재빨리 곳을 떠나 바후림 마을로 가서,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그들은 속으로 내려갔다.

19 여인은,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에 놓고, 위에 찧은 보리를 널어놓아서,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였다.

20 압살롬의 종들이 집으로 들어와서 여인에게 물었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에 있느냐?" 여인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은 방금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들이 뒤쫓아 갔으나, 찾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21 그들이 돌아간 뒤에, 사람이 우물 속에서 올라와, 다윗 왕에게 가서, 소식을 전하였다. 그들은 다윗에게, 아히도벨이 다윗 일행을 해치려고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를 알리고, 어서 일어나서 강을 건너가라고 재촉하였다.

22 그러자 다윗이 자기와 함께 있는 백성을 거느리고 거기에서 떠나, 요단 강을 건너갔는데, 날이 때까지 요단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23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 나귀에 안장을 지워서 타고 거기에서 떠나,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집안 일을 정리한 뒤에, 목을 매어서 죽었다. 그는 이렇게 죽어서, 자기 아버지의 무덤에 묻혔다.

24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야, 압살롬이 비로소 이스라엘의 군대를 직접 거느리고 요단 강을 건넜다.

25 압살롬은 요압 대신에 아마사를 군지휘관으로 세웠는데, 아마사는 이드라라는 이스마엘 사람의 아들이다. 이드라는 나하스의 아비갈과 결혼하여 아마사를 낳았는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여동생이다.

26 이렇게 이스라엘과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을 쳤다.

27 다윗이 마하나임에 다다르니, 암몬 족속의 도성 랍바에서 나하스의 아들 소비가 찾아오고, 로데발에서는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 찾아오고, 로글림에서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찾아왔다.

28 그들이 침대와 이부자리와 대야와 질그릇도 가지고 오고,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씨도 가지고 왔다.

29 그들은,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굶주리고 지치고 목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꿀과 버터와 양고기와 치즈도 가져다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후새는 다윗에게 계획을 알립니다(15-17절). 중간에 탄로가 나지만 여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소식은 전해집니다(18-21절). 요단강을 건넌 다윗은 살고, 아히도벨은 스스로 죽습니다(22-23절). 다윗을 쫓아온 압살롬은 요압의 사촌 아마사를 지휘관으로 세워 길르앗에 진을 쳤습니다(24-26절). 소비와 마길, 바르실래가 다윗을 돕기 위해 옵니다(27-29절).

 

여러 돕는 손길들이 등장합니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숨겨준 여인이 있었기에 중요한 첩보가 다윗에게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소비와 마길, 바르실래의 군수품 조달은 다윗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돕는 자들을 붙여주시고,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동역하며 그 뜻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오늘 하루, 나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이 되길 기도합시다.

 

——

우연한 도움의 결과

 

다윗을 돕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하마아스와 요나단이 중요한 첩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로겔 샘터에서 후새가 전달해주는 여러 첩보들을 다윗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결정적으로는 바후림의 이름 모를 여인의 도움이었다. 

아하마아스와 요나단을 압살롬의 군사들로부터 보호해주었다. 

흡사 여리고의 라합 같다. 

이들의 도움으로 다윗은 아주 중요한 군사 기밀을 들을 있었다. 

아히도벨의 계획대로였다면, 다윗의 군대는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압살롬의 최정예 병사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새의 계획이 채택되면서 일단 시간을 벌었다. 

다윗과 그의 백성들은 요단강을 무사히 건넜다. 

그리고 압살롬과의 전면전을 준비할 있었다. 

위기를 넘긴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니, 암몬 족속의 사람들 소비, 마길, 바르실래가 찾아와 다윗의 군대에 음식을 제공한다. 

힘을 북돋아 준다. 

이렇게 다윗을 돕는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다윗은 후일을 도모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그의 일상을 돕던 제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있다. 

특히 여인들의 역할이 컸다. 

남제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도왔다. 

십자가 아래에서 끝까지 남아 예수님을 애도하며 슬퍼했던 사람들도 대부분 여인들이었다. 

부활의 번째 증인 또한 여인들이었다. 

예수님 또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사명을 감당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시작은 불가능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다고 있다. 

 

예수님이 만약에 위의 이야기를 누군가에서 가르친다면, 

어떤 메시지에 중점을 두셨을까?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예수님 스스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직접 가르치신 적이 있다. 

 

누가복음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부활후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는데, 구약의 기록들로부터 자신에 대해 쓰여진 내용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아마도 가능하면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직접적, 간접적으로 예언하고 드러낸 구절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하나님, 그리고 다윗을 위기로부터 구출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의 행적이 예수님에게도 녹아 있다. 

예수님도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을 통해서 말이다. 

아마 예수님은 이야기를 통해, 사실은 자신이 바후림의 이름없는 여인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실 있겠다 싶다. 

위기에 처한 당신의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조용히 섬기는 분으로서의 예수님 

따라서 예상치 못한 도움과 일의 진행으로 결국 위기 상황을 탈출하도록 도우시는 예수님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위의 본문을 사용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예수님은 정말 뜬금없이 사람들을 도우셨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사마리아 마을로 가셔서 여인을 도우셨다. 

거라사 지역의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는 일도 상당히 의도적으로 감당하셨다.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되는 일들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존재셨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얻는다. 

우연성 

 

성령님은 지금도 사람들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돕고 계신다. 

다윗이 수많은 사람들의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했던 것처럼 말이다. 

성령님은 아주 작은 마음의 흐름을 만듦으로써 방향을 꺾으신다.

오늘도 성령님의 일하심을 분별하기 원한다. 

 

——

저도 모르게 저를 도우시는 주님, 

당신의 도움을 오늘도 구합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통해 저와 가정과 공동체를 도와주세요. 

저를 변화시켜 주시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주님의 세밀하고 때론 은밀한 도우심을 감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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