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13. 

 

0. 들어가며_마지막 설교와 기도

1) 가룻유다의 배반 이후 남은 11제자(13장)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날이 이제 바로 내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명절인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월절 식사를 나눕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룻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지만, 가룻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버리고 예수님을 반역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식사 자리를 떠납니다. 이제 11명의 제자들만 남습니다. 

 

2) 마지막 설교(13-16장)

13장에서 16장에 걸쳐 예수님은 마지막 설교를 하십니다. 이 내용들은 정말 중요한데요.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 필적할 만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대해 가르치셨다면, 요한복음의 마지막 설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추동하는 힘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원리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실행방법 혹은 실행할 수 있는 에너지아닙니까? 머리로 아는 원리만으로는 구체적인 실행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그에 도달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실천동력. 내적파워. 추진력이 바로 요한복음의 설교에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꼼꼼히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3) 마지막 기도 

오늘은 마지막 설교 이후에 예수님이 자신의 설교에 도취되셔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기도회를 혹시 인도해보신 적이 있나요? 

대부분의 기도회는 설교의 메시지를 기도제목으로 삼아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기도회를 인도하는 첫번째 본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은 먼저 13-16장에서 좀 길다 싶이 설교를 한 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게 17장의 내용입니다. 

 

저는 17장을 정말 사랑합니다. 오늘 송죽교회 청년들을 생각하면서 어떤 본문으로 말씀을 나눌까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본문으로 설교하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가장 사랑합니다.

 

신약 성경에 예수님의 기도가 여러번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주기도문(마6)을 가르쳐주셨죠. 그런데 이건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문이고요. 직접하신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도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기적을 많이 행하셨는데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을 보면서 화를 내시면서 저주하시다가 드리신 기도입니다. 

게세마네 기도는 유명하죠. ‘이 잔을 옮겨주세요. 하지만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해주세요.’ 

십자가 위에서 드린 기도도 유명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대체로 짧은 기도문들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7장은 그 길이 부터가 남다릅니다. 26절에 걸쳐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기도문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애절한 감정이 철철 흘러 넘칩니다. 

17장을 함께 읽던 한 자매가 그러더군요. 기도가 슬퍼요~~ 맞습니다. 슬픈 감정도 녹아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과 사별 이후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저는 이 기도문을 너무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개가 더 있지만, 그건 나중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한가지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확장성입니다. 기도의 대상이 확장됩니다. 삼위하나님의 하나됨이 확장됩니다. 복음이 확장됩니다. 이 세 가지 확장성에 대해서 오늘 나누고 싶습니다. 

 

1. 기도의 확장성(20절) 

1) 11제자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로(20절)

첫째, 기도의 확장성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2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 제가 상황을 설명해드렸습니다. 11명의 제자들과 식사를 마치시고 3장에 걸쳐 설교를 하신 뒤에 제자들 앞에서 대표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제자들을 어리둥절 했을 겁니다.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주로 11명의 제자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9절을 읽어볼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17절에는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맞습니다. 이 기도는 11명의 제자 공동체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20절에 오면,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히 11명의 제자들에게 제한되지 않습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이 11명의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수많은 2세대 제자, 3세대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사도들 뿐 아니라 사도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도 포함됩니다. 베드로의 설교 이후에 3천명 5천명이 회심하던 예루살렘 교회도 포함됩니다. 1세기 가장 뜨거웠던 선교적 공동체였던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도 포합됩니다.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로마교회.... 그리고 지금 우리까지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신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기도의 스케일입니다. 

 

2) 나에게서 우리로, 우리에서 너희로, 그리고 세상으로

우리의 기도는 주로 나에게 국한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의 평안, 내일 있을 시험, 자격증 시험, 고시, 직장 면접,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 친구랑 잘되게 해주세요. 아이폰 8을 사게 돈 좀 주세요. 등등... 대체로 이런 기도일 겁니다. 이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나를 넘어서야 합니다.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회개하고 용서받고 자유함을 얻는 것도 너무 중요합니다. 기본중의 기본일 겁니다. 

 

그러나 나를 너머 이제 우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11명의 제자만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이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나를 너머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예수를 알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당연한 행동입니다. 

 

우리를 너머 이제는 너희까지 나아갸 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제의 너희였습니다.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겠다는 말은 더이상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우리가 될 수 있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세상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범위가, 기도의 대상이 그렇게 확장됩니다. 세상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소리질러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중보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중보기도가 가장 순수한 기도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기도, 이것이 가장 기도다운 기도인 겁니다. 

 

2. 하나됨의 확장성(21-23절)

둘째, 하나됨의 확장성이 도드라집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17장 전체 기도의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1) 삼위일체의 신비 

21절에 보니 삼위일체의 신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이건 쉽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trinity의 신비는 이렇게 성경에 녹아져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서로 깊이 사랑함으로, 서로에게 온전히 순종함으로, 서로의 말을 동일하게 사용함으로써 서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서로 포함시키기

그런데 이 하나됨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의 사랑의 연합 가운데 있게 헤 달라는 충격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들으면 온갖 형용사, 감탄사를 써 가며 입을 턱하고 벌릴 겁니다. 

헐, 헉, 오마이 갓, 대박, 미쳤어, 깜놀.... 우리 라면 이런 단어를 썼겠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개념은 구약에 흔하게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쉽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건 하나님과 연합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삼위 하나님의 연합 가운데로 들어올 것을 기대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분의 소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가장 진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 소원을 안다면 우리는 이 하나됨을 지켜나가기 위해 놀랍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도대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어떤 상태가 안에 있다는 말인가요?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는 그런 말인가요? 뫼비우스 띠처럼, 내가 너안에 있고 너가 내안에 있고 막 엮여 있다는 말인가요? 서로 안에 있으려면 형식 논리적으로는 동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하나님과 예수님의 육체가 동일하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이건 저와 여러분이 함께 고민해야 할 숙제 입니다. 

 

다음 주까지 고민해서 서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하나됨과 삼위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인지, 어떻게 실현가능하지는 기도하면서 차차 알게 될 일입니다. 지레 겁먹고 회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그분의 소원입니다. 

 

3. 복음의 확장성(21절, 23절)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의 확장성이 분출되어 있습니다. 기도 대상의 확장, 하나됨의 확장은 결국 복음의 확장을 낳습니다. 

 

1) 아버지께서 예수를 세상에 파송하심을 믿도록(21절) 

하나되어 하나님과 연합된 제자 공동체는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이 믿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 놀라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예 맞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파송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들 사이에 사신 겁니다.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신인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신 겁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사단도 깜짝 놀랄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야가 올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이 직접 올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겁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실을 믿는 것은 오직 한가지를 통해 가능합니다. 이 기쁜 소식, 믿기 힘든 복음을 믿게 만드는 것은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입니다. 단순히 서로 하나되는 동호회나 해병전우회 같은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되어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이걸통해 복음이 확장됩니다. 


2) 아버지께서 예수를 사랑하심 같이 세상을 사랑하셨음을 알도록(23절) 

23절에 보면 더욱 놀라운 복음의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하나님이 제자들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의 연합이 확장되어 제자 공동체까지 이어진 이 사실을 결국 세상이 알게 될 겁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거부하거나 아님 그 공동체로 들어오고자 안달이 날 겁니다. 

 

한국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탐욕에 의한 교회 분열입니다. 

캠퍼스에서 18년간 캠퍼스 선교사로 사역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대학 캠퍼스에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과 무관심이 팽배해 있습니다. 기성교회들이 보여온 탐욕과 무절제와 비상식과 분열이 청년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고 전도의 문을 막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여주고 알려줘야 할 교회와 기독공동체들이 오히려 복음의 문을 막고 있는 겁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가 그래서 더욱 슬픕니다. 

그분의 소원이 이 곳 한국 땅에서는 이상하리 만치 잘 이뤄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 고통스럽습니다. 

 

4. 나가며_나를 넘어서자(확장성)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확장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를 넘어서 우리와 너희와 세상으로 이어지는 기도 대상의 확장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이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으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파송하셨으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복음이 온 세상으로 확장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를 드릴 차례입니다. 

나를 넘어 우리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하나되어 하나님께 연합될 때, 세상이 놀라게 될 겁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기도에서 예수님의 기도로 바뀌어야 하니다. 

그분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8. 1. 28. 

 

0. 들어가며 

- 혜율이를 잃어버리다.

집 근처에는 제법 큰 공원이 있습니다. 중산마을에 있다해서 중산공원인데요. 트랙도 있고 인조 잔디 축구장도 있어서 많은 주민들이 이용합니다. 특히 아침저녁으로 무료 에어로빅 강좌가 열리는데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에어로빅 강사를 따라 춤을 춥니다. 

하루는 7살 짜리 큰 딸, 혜율이와 저희 부부가 어둑어둑한 저녁에 산책하러 갔습니다. 한살 짜리 혜강이를 유모차에 태우려고 이것저것 하던 사이에 음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혜율이가 에어로빅 하는데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보이지가 않는 거예요. 몇번 불러봤지만,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그 주변을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있는게 좋은가. 뛰어 다니는 게 좋은가?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정말 1분이 1시간 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0분정도 흘렀을까요? 아내 전화벨이 울립니다. 모르는 전화번호였어요. 한 여성분이 전화를 걸어 울고 있던 혜율이를 바꿔주었습니다. 다행히 혜율이가 엄마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던 겁니다. 십년감수 이럴 때 쓰는 말이죠. 

 

혜율이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서 배워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안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혼을 냅니다. 엄하게 꾸짖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때로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 소방관, 군인_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과 생명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주는 분들에 대한 삶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소방관들의 보호장비를 개인이 사서 착용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건 국가가 나서서 최고의 제품을 공급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생명을 지키고 안전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좀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예수님의 기도_제자들을 지켜주소서. 

요한복음 17장의 전체 내용을 압축하면 하나의 동사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바로 KEEP 입니다. 지켜달라는 그분의 기도가 11절과 15절에 분명히 등장합니다. 혜율이가 없어지고 몇분이 지나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달렸습니다. 주님 혜율이를 지켜주세요.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지켜주세요. 

 

1. Keep 동사의 전제_세상(11절, 15절)

- 지켜달다는 말이 전제로 놓고 있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입니다. 

11절에 보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켜달라’, ‘보호해달라’라는 기도가 작동하게 된 근원적인 상황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 남겨져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 부활하셔서 승천하게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상에 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고 세상에 남아서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속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 데려감을 당하는자 vs 남겨둠을 당하는 자_참고도서

마태복음 24:40-41, 이 본문은 마지막 날 있을 일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온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두 사람이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누가 구원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일반적으로는 데려가는 것이 구원받는 사람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 노아의 홍수와 유사성을 밝히면서 이 구절을 설명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은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다. 

나) 버려둔다의 단어는 단순히 남는다의 leave 동사로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서 아피에미(φίημι)는 ‘떠난다. 용서한다. 풀어준다. 허용한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부정적 의미보다 긍정적 의미로 볼 여지가 크다. 

다) 데려간다의 의미는 “재판에 회부된다”라는 뜻, 성경배경주석에 잘 설명되어 있다.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라) 병행구절 눅17:37, “주검이 있는 곳에는 또한 독수리들이 모여들 것이다”라고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심. 이는 독수리들이 모이는 곳에 죽어버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 즉 데려감을 당하는 자들의 장소는 독수리를 관찰하면 된다는 뜻.

 

여러가지로 볼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종말에 구원받는 사람은 세상에 남는자입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저주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 해석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건전한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 새롭게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미래 버전이 탄생할 겁니다. 

 

-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개념_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 

여러분!! 이 세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새로워질 뿐입니다. 사라지는 게 아니고 변형되는 겁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영혼들이 떠다니며 노래하는 세상이 아니라, 육체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일도 하며 춤도 추는 세상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주기도문에 잘 드러납니다. 그 나라는 이 땅에 임합니다. 

 

일상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우주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세워질 겁니다. 지구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수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일상과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게 중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에 대한 태도인 겁니다. 

 

- 중간기의 세상은 위험하다. 

그런데 이 남은 자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뤄지기 전까지의 남은 자들에게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중간기의 세상은 위험합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왕의 대관식이 성대하게 전세계적으로 전우주적으로 일어나기 전까지의 세상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사우론과 사루만, 우르크하이와 오크들이 반지원정대를 공격하고 세상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2. 무엇으로부터 지키는가?_악한 자에게서(15절) 

예수님은 악한 자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럼 악한자는 누구를 의미하는 걸까요? 

1) 사단 

첫번째는 사단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예민하게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 하신 이후에 예수님을 시험한 사단은 아주 달콤한 존재였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제안들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했죠.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해봐라. 무릎을 꿇고 절을 해봐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봐라. 돈, 권력, 명예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죠.지금은 고인이 되신 헨리 나우웬은 영성에 대한 책을 많이 내셨는데요. 그중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예수님이 이겨내신 사단의 시험을 상황부합의 시험, 권력확보의 시험, 이목집중의 시험이라고 정의내렸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적합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 힘을 키워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욕망,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이런 욕망은 세상의 길이라고, 무한히 상향성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귀신들이 종종 나타나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사단의 전략에 맞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영광받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숨기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종종 등장합니다. 

 

사단은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시험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들이 가진 내밀한 욕구들을 끄집어 내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유혹합니다. 제자들의 능력을 드러내어 자신들의 목표에 빨리 도달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자극할 겁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빨리 상황을 호전시키는 데만 혈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단은 교묘하게 우리의 은밀한 욕망을 자극합니다.

 

이 사단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주기도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악에서 구원하소서~~ 

 

2) 대제사장을 비롯한 성전 중심 유대교인들

둘째는 성전 중심의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사단이 조정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사단의 졸개들이라고도 하죠. 대표적인 것이 성전중심으로 사리사욕을 취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2번이나 성전을 뒤엎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역 1년차일때 뒤엎은 사건이 나오고요(요2:13-22). 나머지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는 사역 3년차때 뒤엎은 사건이 나옵니다. 전세계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옵니다. 일생에 한번 와서 제사드리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습니다. 참된 용서는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로만 이뤄진다고 믿었죠. 그러니 성전은 최고의 종교, 관광 상품이었습니다. 기득권이 어마어마했죠. 자릿세도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모든 돈이 성전의 최고 권력자들에게 들어갔죠. 성전 제사장들과 사두개인이 그들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서 멸망한 AD 70년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최고의 종교적 상징이자, 최고의 돈벌이 수단이었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지속적으로 예수믿는 사람들을 압박한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여전히 종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교회세습의 본질은 돈과 권력의 종교적 카르텔의 보호입니다. 유력한 목사 중심으로 돈과 권력이 집중됩니다. 단지 그 목사 한 개인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장로 권사 집사들이 일종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 됩니다. 그러니 가장 안전한 사람을 후임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세습을 버젓이 하는 것은 자신들이 종교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3) 바리새인을 비롯한 회당 중심 유대교인들 

그런데 성전 수호자들만 악한 게 아니었습니다. 세번째가 있는데요.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히며 신학논쟁을 펼쳤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존경받는 유대 지도자들입니다. 율법 준수에 탁월했습니다. 유대교 경전인 토라, 즉 모세 오경을 다 외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을 쫓아다니며 바울의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세계 곳곳에 회당이 있었는데, 곳곳마다 가서 그리스도인들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대교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도 악한 자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를 하라 하지 말라의 종교로 격하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 교육을 받아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도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켜서 종교적 행위에 가둬두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은 의무라기 보다는 즐거움이요 특혜죠. 주일예배도 특권입니다. 기도도 특권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모든 종교적 행위를 의무로 느끼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의미가 빠진 형식은 의무감만 남깁니다. 특권이 특권되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을 강요하기 이전에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대화하는 시간, 충분히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형식파괴자는 아닙니다. 다만 형식을 강요하기 전에 그 의미에 대해 오랜 시간 배우고 깨닫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4) 로마 

마지막으로 누가 악한 자입니까? 당시 절대권력 절대반지를 가지고 있었던 절대 제국 로마가 악한 자입니다. 황제숭배를 강요합니다. 여러 신들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만, 황제숭배는 필수였습니다. 네로 황제부터 시작한 로마의 박해는 도미티안 황제 시대가 되면 극에 달합니다. 요한복음이 AD80년대 중후반에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33년에서 85년까지 약 50년간 요한은 로마의 다양한 박해를 경험했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고,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끓는 기름에 튀겨졌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싫어하는 권력과 국가가 있습니다. 지금도 순교의 현장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합니다.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과격한 행동이 그리스도인들을 타겟으로 이뤄집니다. 교회가 불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탄압과 박해는 대체로 종교 그 자체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이유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극단성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건 기독교 극단주의자들도 유사하게 행동합니다. 정상적이고 온건한 종교인들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현대의 로마는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누구는 공산주의라고 부릅니다. 누구는 이슬람국가라고 합니다. 누구는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누구는 국가제도 그 자체라고 합니다. 

저는 자신의 신념을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것을 로마라고 부르겠습니다. 

극단주의자들, 그것이 종교든, 물질이든, 사상이든, 국가든 극단주의자들 그들이 로마요, 악한 자들입니다. 

그런자들이 폭력을 부르고 살인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런 악한 자들로부터 육체와 정신과 정서와 마음을 지켜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3. 나가며

- 세상에 남겨두신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살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기도는 악한 자에게서 제자들을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단의 유혹, 돈, 권력, 명예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종교 기득권자의 기독교 장악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종교적 행위에 가둬두려는 신학적 이단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로마로 상징되는 극단주의자의 박해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교회 즉 성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2018년 1월 21일 일요일 

 

0. 들어가며

- 김희중 집사의 고백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안따깝기고 하고, 분노하게 되기도 한 사건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전전직 대통령의 최최최측근 집사인 김희중씨가 자신이 모셨던 MB의 국정원 특별활동비 상납 의혹과 관련한 사실들에 대해 검찰에 자세히 이야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검찰 조사의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더 이상 그 집사는 그 대통령안에 있지 않은 것 처럼 보입니다. 정치 논평할 생각은 없구요. 다만, “~안에 있다”라는 의미를 생각하며 살다보니까, ‘김희중 집사는 더이상 MB 안에 있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말입니다. 

 

- “~안에 있다” 

고통스런 한 주를 보냈습니다. “~안에 있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요한복음 전체에서 힌트가 될 만한 구절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핵심중에 하나인, 삼위 하나님의 확장에 대해 말씀을 나눠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이 확장되고,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이 확장되어, 결국 복음이 확장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나눴습니다. 그리고 제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도대체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자고 숙제를 내드렸습니다. 서로 짝을 지어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

 

묵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다시 연구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나눠볼까 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봤습니다. 

 

1. 말씀의 공명 

제일 먼저, ‘~안에 있다’라는 말은 말씀이 공명한다라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위에 존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의도, 뜻이 예수님 존재의 본질로 요한은 본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번 생각해봐도, 요한의 첫 서술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고 예수님에 대한 책을 낸다고 했을 때, 어떤 문장을 제일 먼저 쓸까요? 

 

‘85년전 12월 예수님이 태어났다.’

‘수십년 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살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처음이야기를 기록에 남기고 싶다.’ 등등 

 

마치 역사를 쓰듯, 혹은 교과서의 첫문장을 쓰듯 시작했을 겁니다. 

그러나 요한은 전혀 다른 서술방식을 가져다가 씁니다. 지극히 철학적이요, 창세기적이요, 시적인 방식으로 첫문장을 터뜨립니다. 

예수님의 본질을 폭로해버립니다. 첫문단에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기승전결 뭐 이런 거가 없습니다. 처음 시작하자마자 하이라이트, 고음을 찍는 겁니다. 핵심을 질러버립니다. 뭐라고요? 

“예수는 하나님 곧 말씀이다” 

 

2) 따라장이 예수님 

요한복음 전체에서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말)을 그대로 따라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주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요. 대표적인 구절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3:34_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7:16-18_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8:26_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대로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8:28_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2:49-50_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 

14:10_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14:26_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16:13_그러나 그 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속된말로 하나님 따라장이였던 겁니다. 

그분의 말씀, 가르침, 교훈, 설교 이 모든 것은 자기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그에게 넣어주신 말과 뜻과 의도와 목적이었습니다. 

 

3) 말씀의 공명으로서의 ‘안에 있음’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첫번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존재에 뿌려지고 공명하고 새겨지고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이 우리의 뇌에 자각됩니다. 단순히 뇌의 문장으로만 남지 않고 분석되고 해석되어 그 의미가 이해됩니다. 이해된 말씀이 묵상과 상상을 통해 온 몸과 맘으로 공명합니다. 그렇게 우리 존재에 새겨집니다. 그러면 그 말씀에 자연스럽게 머물러 있게 됩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어서, 현재 우리의 삶이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하나님 나라 역사에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되고, 그 기독교 세계관적 노랫소리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뇌와 마음에 울려퍼진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말이 바뀝니다. 말의 내용이 바뀝니다. 말투가 바뀌는 게 아니다. 어휘와 내용이 변화됩니다. 새로운 구조와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그분의 말이 들어와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창조, 언약, 통치, 성육신, 십자가, 부활, 내주, 중보, 은사.... 등의 단어와 그 의미가 존재에서 공명합니다. 이 말들과 그 의미가 지속해서 우리 존재로부터 노래되어 나옵니다. 

이것이 첫번째 입니다. 

 

2. 행동의 공명 

그런데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1) 행동의 공명 

’~안에 있다’의 두번째 의미는 바로 행동의 공명입니다. 

이것도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5:17_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5:19_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5:30_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한다

6:38_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8:29_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8:55_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10:38_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14:11_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그분이 시키시는 일,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이 공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극단적으로 보면, 너무나 의존적인 자녀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독립적으로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0살이 넘어 본격적인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한 뒤에도 오직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말만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도 따라하고 계십니다. 

 

말과 행동이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의 이분법은 하나님에게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이 그분의 의지이며 그분의 행동입니다. 그분의 말은 창조의 힘을 지닌 말입니다.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요새처럼 말과 행동이 분리된 때도 드물겁니다. 수많은 말들이 SNS상에 발표되고 떠돌아다니고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번복되고, 했던 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포장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과 행동이 공명되고 있었던 예수님은 그분의 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거짓이 아닌 참으로 드러나도록 그대로 행동하고 계시는 장면을 성경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특히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애쓰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계명 지키기(14:20-21) 

행동의 공명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0-21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요 14:20-21). 

 

예수님은 ‘~안에 있음’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계명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계명을 받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고, 예수님의 사랑도 받습니다. 계명을 받아 지키는 것, 즉 예수님과의 행동의 공명이  예수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의미는 단순히 그분의 말만 반복한다고 되는 것이 압니다. 예수님의 단어와 문장과 논리만 사용하여 말로 가르치는 것을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말합니다. ‘계명을 지켜라.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거다. 내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들과 계명들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너희도 내가 준 계명을 받아서 그대로 지켜라.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3) 사랑의 공명(13:34-35)

그럼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요?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요 13:34-35). 

 

지난 주에 말씀드렸죠? 예수님이 자신의 설교에 도취되어 기도하신 것 같아고 말입니다. 

13장-16장까지 마지막 다락방 설교에서 그분은 엄청난 일을 하신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들으면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바로 새계명을 주겠다는 그분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계명 외에 다른 새계명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새계명을 주시더니만, 나와 아버지가 서로 안에 있다고 하시더니, 제자들에게도 그 연합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장에서 그런 기도를 드리신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 같이,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입니다. 즉 정리하면, 행동의 공명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도 그걸 하신 것이고요. 제자들도 그걸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예 맞습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이건 감정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라라는 행동을 공명하도록 요청하는 겁니다. 

이끌림, 매혹, 애착, 애정 등의 개념만으로도 포착되지 않습니다. 매우 구체적인 행동으로 요청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해야 할 말이 많은데 그건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책 한권을 추천드립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사랑과 정의” 라는 책입니다.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를 이분이 정리하고 계시더라구요. 혹시 저랑 같이 읽고 책 나눔 하고 싶으시면 말씀해주세요. 

 

3. 상징의 공명_성만찬(6:55-57)

‘안에 있다’의 마지막 의미는 상징의 공명입니다. 

6:55-57_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 말도 정말 충격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특히 ‘~안에 있다’라는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 읽다가 이 구절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매번 형식적으로 하던 그 성만찬에 이런 의미가 있는 줄 새삼 깨닫게 된 겁니다. 

왜 예수님이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계속 지키도록 하셨는지, 왜 초대교회가 성만찬 예식을 매번 모일 때마다 진행했었는지, 왜 이제까지의 교회 역사 속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그토록 많은 시간 토론하고 논쟁하고 대화를 나눴는지 이해가 가더라구요. 

 

그렇습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상징적 예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공명하는 사람, 그분의 행동에 공명하는 사람은 바로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식이 필요없지 않습니다. 상징의 공명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몸과 피를 먹는 상징의 공명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상징, 이미지, 로고는 인간의 존재와 기억과 사고 활동에 필수적입니다. 

모든 언어는 상징으로 구성됩니다. 

수많은 상징들이 쌓여 우리 인간의 의식을 구성합니다. 

상징으로 단순화, 이미지화, 추상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사물과 우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상징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즉 그분의 살과 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장로교는 성만찬을 특별한 절기에 주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일년에 3-4번에 걸쳐 성만찬예식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미국의 한 교회는 매주 성만찬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카톨릭 교회들도 매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주 그분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자주 먹는 게 좋습니다. 문제는 그 예식 자체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죠. 

말씀과 행동이 공명되지 않은 상징은 그 자체가 형식이요 우상이 됩니다. 

그렇다고 성만찬을 등한히하거나 무시하거나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됩니다. 

상징도 계속 우리 속에서 공명해야 합니다. 

 

4. 나가며

오늘은 여러 말씀들을 찾아봤습니다. 아마 너무 복잡하다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사용한 그 단어의 의미를 요한복음을 통해 찾으려고 했던 시도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안에 있다’는 말씀의 공명, 행동의 공명, 그리고 상징의 공명입니다. 

그분의 언어와 문장과 뜻과 의도가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계명의 실천이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상징적 행위가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서로 하나되어 연합되신 그 하나됨에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안에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말씀과 행동과 상징이 공명을 이룰 겁니다. 

2021. 3. 28. 

 

[본문_로마서 12:1-3] 

새번역_1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2여러분은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3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라이트 번역_1그러므로 사랑하는 가족이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런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됩니다. 2더욱이 여러분은 시대가 강요하는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마십시오. 도리어 여러분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선하고 합당하며 온전한지 분별할 있도록 하십시오. 3내게 주신 은혜를 통하여 여러분 각자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자신에 대해 마땅히 생각해야 이상으로 높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정해 주신 참된 기준인 믿음에 따라 냉철히 생각하십시오. 

 

[참고본문_요한복음 17:15-19]

새번역_15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16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17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19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3
월에는 신앙의 딜레마라는 주제로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이 되겠습니다. 다루어야 주제는 많지만, 3월에 숙고한 주제들을 돌아보니, 마음과 육신, 성령의 법과 죄의 , 예수님의 육신 속에 정죄하심 , 결국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끝에는 /죄책감의 해결과 은혜에 대한 책임이 놓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지난 말씀의 결론 부분이었는데요. /죄책으로부터는 자유하지만, 은혜로부터는 부자유하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은혜로부터 부자유하다는 말이 생각보다 딜레마적인 어구더라구요. 그래서 딜레마도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말씀을 통해 은혜로부터 부자유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나아가 은혜에 대한 책임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로마서의 전환, “그러므로

로마서는 크게 부분으로 나눌 있습니다. 1-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다룹니다. 그리고 1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죄의 문제가 해결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로마서를 이렇게 구분해 봤습니다. 12 1절의그러므로 8 1절의그러므로 견줄 있는 위대한그러므로입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인류에게 8 1절의그러므로 반전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12 1절의그러므로 우주적 사건으로서의 죄의 해방에서 일상의 삶으로의 전환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로마서의 그러므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하심을 힘입어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이 성도들에게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입은 성도들은 이제 자신을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제물로 드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삶의 예배인데요. 세상의 주류 사상과 틀에 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냉철하게 세상의 프레임을 분별하고 과감히 절연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런데 말을 전하는 바울도 자신이 은혜를 입은 자이며, 은혜를 힘입어, 은혜를 통해 권한다고 반복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추론할 있는데, 은혜를 입은 성도들도 은혜를 힘입어 은혜를 통해 거룩한 제물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임을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책임(은책감)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계기입니다. 

 

2. 은혜에 대한 반응, 은혜를 갚다, 은혜에 대한 책임. 

여러분, 많은 설교자들이 값싼 은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 왔습니다. ‘천국 티켓을 사기 위한 죄의 고백 문제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죄를 용서받고서는 실제로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불완전한 회심이라고 저격했죠. 맞습니다. 은혜에는 그에 합당한 반응이 요구됩니다. 오늘 저는 가지 개념을 들고 왔습니다. 하나는 은혜에 대한 반응, 둘은 은혜를 갚다, 셋은 은혜에 대한 책임입니다. 비슷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릅니다. 은혜에 대한 반응이 가장 포괄적인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은혜에 대한 반응하면, “감사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머무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럼 은혜를 갚다는 어떨까요? 은혜를 갚는 것의 이미지는 받은 은혜에 동일한 수준 혹은 이상으로 되돌려 주는 장면입니다. 100만원의 은혜를 100만원 혹은 이상으로 갚는 것이죠. 이것은 갚을 능력이 있는 경우에 있는 말이겠습니다. 저는 개념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말을 만들었습니다. 은책(은혜에 대한 책임) 단순히 감사하는 느낌과 말전달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은책은 은혜를 갚는 식의 동일 행동 이상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책은 은혜 받은 사람이 모종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책임의 범위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무거운 것이며 죽음으로 갚는 것보다는 가벼운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표현에 의하면, 시대가 강요하는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는 , 도리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선하고 합당하며 온전한지 분별하는 ”(2)입니다. 

 

3. 당위의 메커니즘 

그런데 은책이 바울만 사용한 개념이 아님을 우연히 큐티를 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목소리를 통해서죠. 오늘 참고 본문 요한복음 17:15-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힘을 다해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세상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겨주시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세상 속에 있기를 그러하기에 악한 자들에게서 보호받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기도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진리로 거룩하게 달라고 간청입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바울의 말과 통합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은책입니다. 

 

죄책도 당위(해야함) 만들어 냅니다. 죄책을 느끼는 사람들은 죄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회규범 이상의 과도한 기준을 설정하고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채찍질 합니다. 그렇게 해야할 일이 늘어납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무거운 마음이 두려움으로 발전하고 두려움은 온갖 부정적 행동의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은책은 이와 다릅니다. 은책도 당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가 원인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는 사랑으로 이어지며, 사랑은 과도한 책임감에서 벗어나 사랑의 대상이 가장 원하는 소원에 집중합니다. 당위의 메커니즘이 상반됩니다. 은책감은 당위를 애호로 바꿉니다. 따라서 은책감은 부담감이 아니라 즐기기로 점차 변모합니다. 은혜가 우리의 사고 구조와 행동 방식을 바꾸는 것이죠. 

 

4. 나가며_죄책감에서 벗어나 은책감으로 살아가기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당위를 요구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사회적 규범 아니라 가정에서의 규칙들, 나아가 부모 선생님의 개인적 기호나 성격에서 비롯된 숱한하지말라와 해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규범, 규칙, 해라/하지마라는 자연스럽게 죄책감의 사고구조와 행동방식을 낳았습니다. 거기다가 종교적 도덕률이 추가되어 많은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죄의 본질보다 죄의 곁가지에 얽매여 스스로 가중처벌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죄책감에서 벗어납시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경험하고 새로운 사고 구조와 생활방식을 장착합시다. 이것이 마음이 새롭게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기쁨, 감사 속에서 새로운가벼운 부담감’, 은책감으로 살아갑시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거룩함을 추구하되, 억지로 함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자연스러운/우연한/특별한 도움으로 거룩함까지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은책감으로 주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은책/은책감은 무엇일까요? 과연은혜에 대한 책임이라는 개념이 온당한가요?   

 

2. 값싼 은혜, 피해자에 대한 합당한 보상과 가해에 대한 적절한 처벌이 없이, 죄의 고백만으로 용서받는다는 개념은 무엇이 문제인가요? 은책은 값싼 은혜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요?  

 

3. 은책/은책감으로 살아갈 , 여러분에게 가장 걸리는 부분/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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