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1일 일요일 

 

0. 들어가며

- 김희중 집사의 고백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안따깝기고 하고, 분노하게 되기도 한 사건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전전직 대통령의 최최최측근 집사인 김희중씨가 자신이 모셨던 MB의 국정원 특별활동비 상납 의혹과 관련한 사실들에 대해 검찰에 자세히 이야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검찰 조사의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더 이상 그 집사는 그 대통령안에 있지 않은 것 처럼 보입니다. 정치 논평할 생각은 없구요. 다만, “~안에 있다”라는 의미를 생각하며 살다보니까, ‘김희중 집사는 더이상 MB 안에 있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말입니다. 

 

- “~안에 있다” 

고통스런 한 주를 보냈습니다. “~안에 있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요한복음 전체에서 힌트가 될 만한 구절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핵심중에 하나인, 삼위 하나님의 확장에 대해 말씀을 나눠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이 확장되고,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이 확장되어, 결국 복음이 확장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나눴습니다. 그리고 제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도대체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자고 숙제를 내드렸습니다. 서로 짝을 지어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

 

묵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다시 연구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나눠볼까 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봤습니다. 

 

1. 말씀의 공명 

제일 먼저, ‘~안에 있다’라는 말은 말씀이 공명한다라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위에 존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의도, 뜻이 예수님 존재의 본질로 요한은 본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번 생각해봐도, 요한의 첫 서술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고 예수님에 대한 책을 낸다고 했을 때, 어떤 문장을 제일 먼저 쓸까요? 

 

‘85년전 12월 예수님이 태어났다.’

‘수십년 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살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처음이야기를 기록에 남기고 싶다.’ 등등 

 

마치 역사를 쓰듯, 혹은 교과서의 첫문장을 쓰듯 시작했을 겁니다. 

그러나 요한은 전혀 다른 서술방식을 가져다가 씁니다. 지극히 철학적이요, 창세기적이요, 시적인 방식으로 첫문장을 터뜨립니다. 

예수님의 본질을 폭로해버립니다. 첫문단에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기승전결 뭐 이런 거가 없습니다. 처음 시작하자마자 하이라이트, 고음을 찍는 겁니다. 핵심을 질러버립니다. 뭐라고요? 

“예수는 하나님 곧 말씀이다” 

 

2) 따라장이 예수님 

요한복음 전체에서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말)을 그대로 따라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주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요. 대표적인 구절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3:34_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7:16-18_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8:26_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대로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8:28_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2:49-50_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 

14:10_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14:26_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16:13_그러나 그 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속된말로 하나님 따라장이였던 겁니다. 

그분의 말씀, 가르침, 교훈, 설교 이 모든 것은 자기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그에게 넣어주신 말과 뜻과 의도와 목적이었습니다. 

 

3) 말씀의 공명으로서의 ‘안에 있음’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첫번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존재에 뿌려지고 공명하고 새겨지고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이 우리의 뇌에 자각됩니다. 단순히 뇌의 문장으로만 남지 않고 분석되고 해석되어 그 의미가 이해됩니다. 이해된 말씀이 묵상과 상상을 통해 온 몸과 맘으로 공명합니다. 그렇게 우리 존재에 새겨집니다. 그러면 그 말씀에 자연스럽게 머물러 있게 됩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어서, 현재 우리의 삶이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하나님 나라 역사에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되고, 그 기독교 세계관적 노랫소리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뇌와 마음에 울려퍼진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말이 바뀝니다. 말의 내용이 바뀝니다. 말투가 바뀌는 게 아니다. 어휘와 내용이 변화됩니다. 새로운 구조와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그분의 말이 들어와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창조, 언약, 통치, 성육신, 십자가, 부활, 내주, 중보, 은사.... 등의 단어와 그 의미가 존재에서 공명합니다. 이 말들과 그 의미가 지속해서 우리 존재로부터 노래되어 나옵니다. 

이것이 첫번째 입니다. 

 

2. 행동의 공명 

그런데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1) 행동의 공명 

’~안에 있다’의 두번째 의미는 바로 행동의 공명입니다. 

이것도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5:17_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5:19_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5:30_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한다

6:38_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8:29_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8:55_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10:38_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14:11_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그분이 시키시는 일,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이 공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극단적으로 보면, 너무나 의존적인 자녀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독립적으로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0살이 넘어 본격적인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한 뒤에도 오직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말만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도 따라하고 계십니다. 

 

말과 행동이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의 이분법은 하나님에게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이 그분의 의지이며 그분의 행동입니다. 그분의 말은 창조의 힘을 지닌 말입니다.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요새처럼 말과 행동이 분리된 때도 드물겁니다. 수많은 말들이 SNS상에 발표되고 떠돌아다니고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번복되고, 했던 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포장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과 행동이 공명되고 있었던 예수님은 그분의 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거짓이 아닌 참으로 드러나도록 그대로 행동하고 계시는 장면을 성경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특히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애쓰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계명 지키기(14:20-21) 

행동의 공명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0-21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요 14:20-21). 

 

예수님은 ‘~안에 있음’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계명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계명을 받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고, 예수님의 사랑도 받습니다. 계명을 받아 지키는 것, 즉 예수님과의 행동의 공명이  예수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의미는 단순히 그분의 말만 반복한다고 되는 것이 압니다. 예수님의 단어와 문장과 논리만 사용하여 말로 가르치는 것을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말합니다. ‘계명을 지켜라.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거다. 내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들과 계명들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너희도 내가 준 계명을 받아서 그대로 지켜라.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3) 사랑의 공명(13:34-35)

그럼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요?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요 13:34-35). 

 

지난 주에 말씀드렸죠? 예수님이 자신의 설교에 도취되어 기도하신 것 같아고 말입니다. 

13장-16장까지 마지막 다락방 설교에서 그분은 엄청난 일을 하신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들으면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바로 새계명을 주겠다는 그분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계명 외에 다른 새계명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새계명을 주시더니만, 나와 아버지가 서로 안에 있다고 하시더니, 제자들에게도 그 연합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장에서 그런 기도를 드리신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 같이,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입니다. 즉 정리하면, 행동의 공명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도 그걸 하신 것이고요. 제자들도 그걸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예 맞습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이건 감정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라라는 행동을 공명하도록 요청하는 겁니다. 

이끌림, 매혹, 애착, 애정 등의 개념만으로도 포착되지 않습니다. 매우 구체적인 행동으로 요청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해야 할 말이 많은데 그건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책 한권을 추천드립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사랑과 정의” 라는 책입니다.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를 이분이 정리하고 계시더라구요. 혹시 저랑 같이 읽고 책 나눔 하고 싶으시면 말씀해주세요. 

 

3. 상징의 공명_성만찬(6:55-57)

‘안에 있다’의 마지막 의미는 상징의 공명입니다. 

6:55-57_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 말도 정말 충격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특히 ‘~안에 있다’라는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 읽다가 이 구절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매번 형식적으로 하던 그 성만찬에 이런 의미가 있는 줄 새삼 깨닫게 된 겁니다. 

왜 예수님이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계속 지키도록 하셨는지, 왜 초대교회가 성만찬 예식을 매번 모일 때마다 진행했었는지, 왜 이제까지의 교회 역사 속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그토록 많은 시간 토론하고 논쟁하고 대화를 나눴는지 이해가 가더라구요. 

 

그렇습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상징적 예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공명하는 사람, 그분의 행동에 공명하는 사람은 바로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식이 필요없지 않습니다. 상징의 공명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몸과 피를 먹는 상징의 공명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상징, 이미지, 로고는 인간의 존재와 기억과 사고 활동에 필수적입니다. 

모든 언어는 상징으로 구성됩니다. 

수많은 상징들이 쌓여 우리 인간의 의식을 구성합니다. 

상징으로 단순화, 이미지화, 추상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사물과 우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상징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즉 그분의 살과 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장로교는 성만찬을 특별한 절기에 주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일년에 3-4번에 걸쳐 성만찬예식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미국의 한 교회는 매주 성만찬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카톨릭 교회들도 매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주 그분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자주 먹는 게 좋습니다. 문제는 그 예식 자체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죠. 

말씀과 행동이 공명되지 않은 상징은 그 자체가 형식이요 우상이 됩니다. 

그렇다고 성만찬을 등한히하거나 무시하거나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됩니다. 

상징도 계속 우리 속에서 공명해야 합니다. 

 

4. 나가며

오늘은 여러 말씀들을 찾아봤습니다. 아마 너무 복잡하다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사용한 그 단어의 의미를 요한복음을 통해 찾으려고 했던 시도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안에 있다’는 말씀의 공명, 행동의 공명, 그리고 상징의 공명입니다. 

그분의 언어와 문장과 뜻과 의도가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계명의 실천이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상징적 행위가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서로 하나되어 연합되신 그 하나됨에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안에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말씀과 행동과 상징이 공명을 이룰 겁니다. 

2021. 3. 28. 

 

[본문_로마서 12:1-3] 

새번역_1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2여러분은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3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라이트 번역_1그러므로 사랑하는 가족이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런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됩니다. 2더욱이 여러분은 시대가 강요하는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마십시오. 도리어 여러분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선하고 합당하며 온전한지 분별할 있도록 하십시오. 3내게 주신 은혜를 통하여 여러분 각자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자신에 대해 마땅히 생각해야 이상으로 높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정해 주신 참된 기준인 믿음에 따라 냉철히 생각하십시오. 

 

[참고본문_요한복음 17:15-19]

새번역_15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16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17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19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3
월에는 신앙의 딜레마라는 주제로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이 되겠습니다. 다루어야 주제는 많지만, 3월에 숙고한 주제들을 돌아보니, 마음과 육신, 성령의 법과 죄의 , 예수님의 육신 속에 정죄하심 , 결국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끝에는 /죄책감의 해결과 은혜에 대한 책임이 놓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지난 말씀의 결론 부분이었는데요. /죄책으로부터는 자유하지만, 은혜로부터는 부자유하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은혜로부터 부자유하다는 말이 생각보다 딜레마적인 어구더라구요. 그래서 딜레마도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말씀을 통해 은혜로부터 부자유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나아가 은혜에 대한 책임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로마서의 전환, “그러므로

로마서는 크게 부분으로 나눌 있습니다. 1-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다룹니다. 그리고 1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죄의 문제가 해결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로마서를 이렇게 구분해 봤습니다. 12 1절의그러므로 8 1절의그러므로 견줄 있는 위대한그러므로입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인류에게 8 1절의그러므로 반전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12 1절의그러므로 우주적 사건으로서의 죄의 해방에서 일상의 삶으로의 전환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로마서의 그러므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하심을 힘입어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이 성도들에게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입은 성도들은 이제 자신을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제물로 드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삶의 예배인데요. 세상의 주류 사상과 틀에 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냉철하게 세상의 프레임을 분별하고 과감히 절연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런데 말을 전하는 바울도 자신이 은혜를 입은 자이며, 은혜를 힘입어, 은혜를 통해 권한다고 반복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추론할 있는데, 은혜를 입은 성도들도 은혜를 힘입어 은혜를 통해 거룩한 제물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임을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책임(은책감)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계기입니다. 

 

2. 은혜에 대한 반응, 은혜를 갚다, 은혜에 대한 책임. 

여러분, 많은 설교자들이 값싼 은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 왔습니다. ‘천국 티켓을 사기 위한 죄의 고백 문제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죄를 용서받고서는 실제로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불완전한 회심이라고 저격했죠. 맞습니다. 은혜에는 그에 합당한 반응이 요구됩니다. 오늘 저는 가지 개념을 들고 왔습니다. 하나는 은혜에 대한 반응, 둘은 은혜를 갚다, 셋은 은혜에 대한 책임입니다. 비슷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릅니다. 은혜에 대한 반응이 가장 포괄적인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은혜에 대한 반응하면, “감사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머무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럼 은혜를 갚다는 어떨까요? 은혜를 갚는 것의 이미지는 받은 은혜에 동일한 수준 혹은 이상으로 되돌려 주는 장면입니다. 100만원의 은혜를 100만원 혹은 이상으로 갚는 것이죠. 이것은 갚을 능력이 있는 경우에 있는 말이겠습니다. 저는 개념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말을 만들었습니다. 은책(은혜에 대한 책임) 단순히 감사하는 느낌과 말전달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은책은 은혜를 갚는 식의 동일 행동 이상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책은 은혜 받은 사람이 모종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책임의 범위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무거운 것이며 죽음으로 갚는 것보다는 가벼운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표현에 의하면, 시대가 강요하는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는 , 도리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선하고 합당하며 온전한지 분별하는 ”(2)입니다. 

 

3. 당위의 메커니즘 

그런데 은책이 바울만 사용한 개념이 아님을 우연히 큐티를 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목소리를 통해서죠. 오늘 참고 본문 요한복음 17:15-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힘을 다해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세상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겨주시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세상 속에 있기를 그러하기에 악한 자들에게서 보호받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기도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진리로 거룩하게 달라고 간청입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바울의 말과 통합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은책입니다. 

 

죄책도 당위(해야함) 만들어 냅니다. 죄책을 느끼는 사람들은 죄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회규범 이상의 과도한 기준을 설정하고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채찍질 합니다. 그렇게 해야할 일이 늘어납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무거운 마음이 두려움으로 발전하고 두려움은 온갖 부정적 행동의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은책은 이와 다릅니다. 은책도 당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가 원인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는 사랑으로 이어지며, 사랑은 과도한 책임감에서 벗어나 사랑의 대상이 가장 원하는 소원에 집중합니다. 당위의 메커니즘이 상반됩니다. 은책감은 당위를 애호로 바꿉니다. 따라서 은책감은 부담감이 아니라 즐기기로 점차 변모합니다. 은혜가 우리의 사고 구조와 행동 방식을 바꾸는 것이죠. 

 

4. 나가며_죄책감에서 벗어나 은책감으로 살아가기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당위를 요구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사회적 규범 아니라 가정에서의 규칙들, 나아가 부모 선생님의 개인적 기호나 성격에서 비롯된 숱한하지말라와 해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규범, 규칙, 해라/하지마라는 자연스럽게 죄책감의 사고구조와 행동방식을 낳았습니다. 거기다가 종교적 도덕률이 추가되어 많은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죄의 본질보다 죄의 곁가지에 얽매여 스스로 가중처벌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죄책감에서 벗어납시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경험하고 새로운 사고 구조와 생활방식을 장착합시다. 이것이 마음이 새롭게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기쁨, 감사 속에서 새로운가벼운 부담감’, 은책감으로 살아갑시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거룩함을 추구하되, 억지로 함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자연스러운/우연한/특별한 도움으로 거룩함까지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은책감으로 주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은책/은책감은 무엇일까요? 과연은혜에 대한 책임이라는 개념이 온당한가요?   

 

2. 값싼 은혜, 피해자에 대한 합당한 보상과 가해에 대한 적절한 처벌이 없이, 죄의 고백만으로 용서받는다는 개념은 무엇이 문제인가요? 은책은 값싼 은혜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요?  

 

3. 은책/은책감으로 살아갈 , 여러분에게 가장 걸리는 부분/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 2:1-7

요한계시록 바로 읽기#3_ 사랑의 회복

2019. 10. 20. 김혁수 

 

0. 들어가며 

- 김현태의 첫사랑 

눈을 감고도 있느냐고

비탈길이 물었다.

나는 답했다.

발이 없이도, 아니 길이 없어도

그대에게 있다고.

 

짧은 시구 속에서 현대인의 사랑과 이별의 그리움을 노래한 김현태 시인은 사랑이라는 아주 짧은 속에서 사랑의 대상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다가가고 싶었는데, 사랑의 마음이 있었는데, 놓친 사람이 있나요? 

 

- 일곱 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편지 

교회 

관련

 본문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

칭찬

책망

해결책

불순종의 

결과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 

에베소

2:1-7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교리적 경계심과 인내

처음 사랑의 상실

기억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라

촛대를 옮김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서머나

2:8-11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영적으로 부요함, 박해를 견뎌

-

죽도록 충성하라

-

생명의 관을 받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

버가모

2:12-17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부인하지 않음

거짓 가르침

회개하라

그리스도의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움

감추었던 만나와 위에 이름이 기록된 돌을

두아디라

2:18-29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섬김의 행위에서 드러난 점점 커지는 사랑

분별력 부족, 이단을 용납함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끝까지 굳게 잡고 지키라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새벽 별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사데

3:1-6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순결하고 충성 몇이 남아 있음

죽은 행위

말씀을 지켜 회개하라

그리스도가 도둑처럼 오심

옷을 입고 이름이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으며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됨

빌라델비아

3:7-13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인내심 있게 견디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름을 부인하지 않음

-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고 하나님과 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의 이름이 위에 기록됨

라오디게아

3:14-22

아멘, 충성되고 참된 증인,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되신

-

영적으로 눈이 멀고 파산했으며 벌거벗고 미지근함

그리스도에게서 , , 안약을 사고,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그리스도의 입에서 토하여 버림을 당함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는 것을 허락받음

ESV 스터디 바이블 p. 2540. 

 

오늘 우리가 같이 묵상하고 나눌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물론 요한을 통해 전달된 편지죠. 2장부터 3장까지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것만을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당시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주의와 권면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교회들을 위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대한 책입니다. 교회가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입니다. 표를 잠시 보시면 일곱교회에 대해 예수님깨서 어떻게 보시는지가 드러납니다. 잘하고 있는 점과 와중에 고쳐야 점을 제시하십니다. 장단을 말씀하시고서 해결책과 보상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이게 일곱 반복되고 있습니다. 

 

회사에 입사할 , 자기 소개서를 쓰게 된다면 지원하는 회사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충분히 알아야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장단을 자기가 알고 장점을 부각하고 단점은 고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은 전세계 교회를 대표하는 일곱교회를 평가하십니다. 그리고 적절한 조언과 함께 보상에 대해서도 말씀하심으로써 교회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게 보낸 편지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정의 & 사랑

편지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전체 중에서 해석하기가 가장 쉬운 부분이 2-3장일 겁니다. 현실 교회의 아픔과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직접 사역했던 곳입니다. 3년이나 사역하면서 두란노 학당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가 당시 소아시아의 로마의 수도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4 도시에 속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에베소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중에서 가장 사건은 아르테미스 신전사건일 겁니다. 그리스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는데요, 세공장이 데메드리오가 바울이 전하는 소식 때문에 자신들의 생계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에베소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서 에베소 극장으로 데려가서 2시간 동안 이렇게 외칩니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한다. 

 

여러분 시간이나 이런 식으로 격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공개처형 하자고 달려들어도 이상할 없는 상황입니다. 다행히 바울은 자리에는 없었지만,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일단 3년의 사역을 정리하고 다른 지방으로 떠나게 됩니다. 

 

이후에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정말 사랑하는 제자, 아들같이 여기는 디모데가 사역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도 요한이 교회에 부임하여 사역을 하게 됩니다. 정말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교회 하나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중요합니다.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도 상당히 중요한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 예수님은 진리 수호에 앞장서는 것에 대해 칭찬하시지만, 동시에 진리 수호가 그들의 정의가 , 사랑이 식어지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좀더 살펴볼까요? 

 

1) 정의(Justice)_진리수호

- 악한 , 자칭 사도, 거짓말쟁이(2)

에베소 교회의 정의는 진리 수호였습니다. 세계 7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독교에 위협이었습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도망자들의 도피처였습니다. 각종 마법사와 불법자들, 범죄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사기꾼도 많았을 겁니다. 기독교의 사도를 사칭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자신들이 사도이며 자신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면서 여러가지 마술과 마법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끝까지 그들을 참으면서 또한 그들의 거짓을 입증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영적 분별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영적인 인내와 사람에 대한 사랑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누군가의 거짓을 밝혀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지금이야 통화기록도 남고 카톡 기록도 남고 CCTV 녹화도 되기 때문에 알리바이를 속이는 것이 점점 힘들어 지고 있습니다. 지워도 포렌식 작업을 통해 다시 복원하기도 합니다. 핸드폰 위치 추적이 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결국 누군가가 사람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사람의 거짓을 밝혀내기 힘듭니다. 대단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에서 함부로 다른 사람을 쉽게 낙인찍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인내해야 합니다.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교회는 위협을 받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사기꾼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 니골라 (6)

6절에 보니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칭찬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니골라 당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 성경 내외적 자료가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발람의 행위와 유사한 행위를 니골라 당이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4-15절입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그러나 나는 네게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재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자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_요한계시록 2:14-15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 발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멸망하게 만드는 비법을 모압 사람들과 미디안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비법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이방여인들과 성관계를 맺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신들에게 절하도록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니골라 당이 하는 일도 이와 같았습니다. 성도들을 유혹하고 설득하여 이방신을 섬기는 여인들과 섹스하게 하고 이방신을 섬기도록 합니다. 이방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먹게 합니다. 그렇게 성도들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일을 밝혀내고 일을 미워했습니다. 정말 일입니다. 

 

교회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왜곡된 진리와 거짓 사상과 싸워야 합니다. 인내를 갖고 거짓을 밝혀내야 합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정통교회들을 공격합니다. 이만희 같은 사람이 나타나 자기가 예수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말을 믿고 성경을 풀어내는 많은 신천지 신학자들이 존재합니다. 속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는 기존 정통교회에 들어가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이간질 하여 교회가 통째로 신천지 교회로 바뀌도록 술수를 씁니다. 1세기 에베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21세기 한국에도 여전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고 성경을 깊이 공부해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 동시에 사람에 대한 관심을 깊이 가져야 합니다. 분별력은 주의 깊은 관찰에서 나옵니다. 관찰은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서 미세한 이단의 속임수가 교회 공동체에 뿌리 내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사랑(4-5)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단의 교설과 속임수,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태도는 참으로 옳고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문제는 진리 수호가 그들의 정의가 , 어느덧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랑이 식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사랑은 가지 방향의 사랑을 포함합니다. 

 

- to God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크고 훌륭했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상징후가 발견된 같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보낸 편지인 에베소서 3장을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_에베소서 3:17-19

 

그렇습니다. 편지를 일반적으로 축복과 기도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펴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깊이 사랑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 to Neighbors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웃 사랑으로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다음을 읽어볼까요? 

 

이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_에베소서 1: 15

 

그러므로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_에베소서 4:1-4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부분에서 바울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로를 향한 사랑이 지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장에 보면, 뭔가 이상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가득합니다. 특히 서로 하나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씀도 가득합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처음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이상 징후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사랑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바울도 그것을 눈치 채고 에베소 교회가 더욱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것을 요청하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도 그걸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고 진리를 수호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시들해졌습니다. 사랑이 식었습니다. 

 

2. 사랑의 회복을 위해

1) 변곡점 찾기

- Reflection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언제 첫음 사랑이 식었는지를 기억해내라고 하십니다. 이건 공동체적인 리플렉션 작업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그간의 역사를 아는 분들이 함께 모여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과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함께 금식하면서 자신들의 수치를 감추지 않으려는 용기를 발휘합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갔는지, 언제부터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어갔는지를 솔직하게 나누는 겁니다. 

 

이런 작업의 고통은 서로를 비난하는데서 옵니다. 서로 과거를 회상하고 리플렉션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남탓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은 숨기고 남의 잘못은 부각시킵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금식과 기도로 자신을 부인하는 연습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두어야 합니다. 

 

손을 잡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기로 하고 함께 삼위하나님의 연합 가운데 들어가서 안에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는 겁니다. 

 

2) 회개_돌이켜서 따라가기

- 말과 눈물 그리고 행동 

그리고 해야 것은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사랑이 식은 시점으로 돌아가서 함께 회개하는 겁니다. 회개는 돌이켜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함께 리플렉션하면서 공통적으로 잘못했다고 느꼈던 사건과 행동에 대해 심지어 마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겁니다. 그리고 상당히 오랫동안 잘못에 대해 묵상하는 겁니다. 오랫동안 해야 합니까? 그것은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회개를 헤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했을 , “미안하고 지나가면 상대방이 제대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미안하다는 진정성있는 사과와 잘못의 인정은 상당한 시간 동안 자신의 잘못을 계속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말과 눈물이 그리고 회개의 행동이 함께 수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회개를 잃어버렸습니다. 간단히 잘못했습니다 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저도 그런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이런 지적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철저히 회개해야 필요가 있습니다. 

 

- 회개를 위한 조치들_금식

그런 회개를 위해 때로는 함께 금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행동을 위해 우리는 때로 일상과 떨어져서 하나님께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에 대해 깊이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지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3) 사랑의 처음 행동

그리고 나서 마자믹으로 처음 사랑의 행동들을 기억해 내는 겁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의 행동을 기억해내는 겁니다. 도대체 성숙한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에 경험했던 흥분을 가라 앉히고 지성을 사용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수많은 이슈들을 공부하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 표현을 자제하고 성경 구석 구석의 내용을 익히고 신학자들의 주장들을 나열하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까? 무엇이 신앙의 성숙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감정과 지성과 의지가 계속 순환하면서 마음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진전되어 나가는 것이 성숙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처음 단계에서 경험하는 사랑의 감격은 많은 지식과 실천으로 보강되어 순도 높은 사랑의 감격과 감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첫음 사랑의 회복입니다. 

 

3. 나가며 

- 처음 사랑을 찾아서

여러분, 우리는 언제부터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나요? 우리는 언제부터 딱딱한 마음으로 지식적 신앙을 추구하고 있나요?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에 대한 비난과 비판에 집중했나요? 당시로 돌아가서 회개의 기도를 드립시다. 금식의 기도를 드립시다. 사랑을 회복시켜 달라고 애원합시다. 감정과 감격을 다시 알게 달라고 다시 경험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것이 신앙의 후퇴가 아닙니다. 퇴보가 아닙니다. 깊은 성숙입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찾기를 소망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처음 사랑에 대한 책입니다. 마지막 때에 처음 사랑을 소유한 사람들을 찾고 있는 책입니다. 

 

** 기도회 

1. 개인은 하나님과의 사랑을 언제부터 잃어버렸나요? 언제부터 사랑의 기억이 흐릿해졌나요? 하나님께 사랑의 기억을 되살려 달라고 기도합시다. 

 

2. 회개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사건 이후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까? 나는 사건이후에 어떻게 하기로 마음 먹었나요? 결심이 혹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것은 아니었나요? 결심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하면 좋겠습니다. 

 

3. 때로 하나님 앞에 나의 죄와 잘못에 대해 깊이 반성하며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겠다고 결심하는 고백을 기도로 올려드립시다. 

요한계시록 1:9-20

요한계시록 바로 읽기#2_역사의

2019. 10. 13. 김혁수 

 

0. 들어가며 

- 광화문과 서초동의 상상

최근에 대한민국은 광화문에서 수십만명이, 서초동에서 수십만명이 모여서 집회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어제도 서초역 사거리에서 수십만에서 수백만명이 모여 검찰개혁을 외쳤다고 합니다. 광화문에서도 조국 사퇴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개천절과 한글날에 있었습니다. 저는 집회에 오는 사람들이 어떤 상상을 하며 집회에 참석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가진 그림이 있습니다. 상상이 있습니다. 상상이 선명할수록 집회에 적극적입니다. 자신들이 꿈꾸는 나라에 대한 상상과 그림이 선명할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구호를 외치고 행진을 시도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봐요.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생생하고 선명한 하나님 나라의 상상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꿈꾸는 세상을 상상하며 그렇게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이고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그들만큼 선명하고 확신있는 상상과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 하기비스 

하기비스는 순간풍속 초속 60m 초강력 바람을 몰고, 시속 35km 속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시속 216킬로 속도의 바람입니다. 일본은 1000만명에게 대피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아직 피해 통계가 완전히 나오지 않았지만 벌써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실제 발생할 때도 공포스럽겠지만, 정부가 나서서 대피 명령을 내린다면 때부터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하기비스가 몰고오는 상상이 너무나 공포스럽기 때문입니다. 부디 최소한의 인명피해가 나길 바랍니다.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태풍에 대한 예상과 상상이 얼마나 공포스러운가입니다. 현실이 있는 상상과 환상은 우리의 삶을 뒤바꿔 놓습니다. 상상이 삶과 존재를 바꿔 놓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상상해야 것이 무엇인지 같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1. 환상 

1) 밧모 섬의 요한(9) 

마이클 고먼이라는 학자는 요한이 살고 있었던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기본 신앙고백인예수는 ”( 10:9) 그들처럼 고백하지 않는 가족들, 친구들, 일터 동료들 그리고 관원들과 더불어 살았다. 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어려운 물음에 부닥쳤으며 물음에 대해 뭔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방 종교적인(유대교도 아니요, 기독교도 아닌) 성격을 가진 사회 행위에 계속 참여해야 하는가? 행위에는 운동 경기와 수사 경연을 관람하거나 거기에 참여하는 , 이교 신전 경내에서 고기를 사고 먹는 , 상거래 길드, 클럽, 개인 집안 행사에 드나드는 , 이교도들의 만남과 술자리와 연회에 드나드는 거의 모든 일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의문도 가졌을 것이다. ‘우리가 이교 신전에 가서 은행 일을 보거나 고기를 사야 하는가 그리 해도 되는가? 황제는 자기 신전 경내에서 공공 행사를 때나 그를 드높이는 많은 행사에서 자기를 주권자로 인정하라고 요구하는데, 요구를 따라 황제를 주권자로 인정해야 하는가?’”

마이클 고먼,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 박규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4, p. 86.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다가 결국 이런 황제숭배 사상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예수는 주님이라는 신앙 고백을 유지하려다가 밧모 섬에 유배를 가게 됩니다. 9절에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였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이런 상황에 몰린 것입니다. 

 

2) 환청과 환상(10-11) 

밧모 섬에 갇혀서 주로 무엇을 했을까요?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활동을 했을 겁니다.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안을 정리했을 겁니다.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고 해서 아예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인 일상 생활을 함과 동시에 그는 말씀을 읽고, 기도 생활에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그가 알고 있었던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겁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들과 사도들의 편지의 사본들을 소중히 다루었을 겁니다. 그렇게 그는 아주 집중된 공간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도의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 요한의 뒤에서 엄청나게 소리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나팔 소리처럼 크게 울리는 소리였습니다. 갑작스레 나팔 소리가 들리면 아마도 심장이 쪼그라들겁니다. 깜짝 놀라서 몸이 굳을 수도 있습니다. 조용한 마을에 자동차 경적 소리가 크게 들리면 얼마나 놀랄까요. 소리 음성은 이렇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예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11) 

 

조용히 속삭이는 음성이 아닙니다. 평소에 대화 나눌 때의 소리도 아닙니다. 지극히 울림의 소리가 뒤에서 울립니다. 나팔 소리가 크게 나면 귀청이 아픕니다. 울림이라면 몸이 떨립니다. 페스티발 스피커 앞에 있으면 베이스의 선율 따라 몸이 들썩이는 것을 느낄 있습니다. 

 

요한은 너무나 갑작스럽운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섬기던 에베소부터 시작해서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도시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전하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 나의 환상은?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떤 환상을 갖고 살고 있나요? 평소에 멍하게 있을 , 우리는 어떤 상상들을 하면서 지내고 있나요? 여러분의 환상이 궁금합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는 상상을 하십니까? 그건 아닌 같습니다. 

멋진 여행지에 가서 맛있는 음식과 멋진 카페를 상상하나요? 기가막히는 자연 경관을 것에 대한 꿈을 꿉니까? 

아님 멋진 여자친구, 남자친구를 사귀는 상상, 데이트 하는 상상을 하시나요? 대체로 그럴 같긴 합니다. 

혹은 오버워치 게임을 주로 상상하나요? 

제가 아는 목사님은 예전에 당구를 배울 , 당구대와 당구공이 눈에 항상 있었다고 합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을 , 천장에 있는 조명들이 당구 공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고 경험했던 장면들이 상상의 재료들이 됩니다. . 

상상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우리의 꿈을 자극합니다. 

여러분은 주로 어떤 환상과 상상 속에 살아갑니까?

 

사실 솔직한 우리의 상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는 수많은 끔찍하고, 더럽고, 께름칙하고, 부끄러운 장면들이 참으로 많이 스쳐 지나갑니다. 만약 우리의 상상이 거룩하게 된다면 그건 거의 예수님에 가까운 존재일 겁니다. 

 

거룩한 상상으로 도전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의도입니다. 하늘과 땅의 환상을 통해 우리의 상상을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그야말로 무모한 도전, 불가능한 도전으로 비춰집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요한을 통해 거룩한 상상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2. 정체 

거룩한 상상의 첫번째는 뭐니뭐니 해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요한이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1) 인자(13)

요한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돌립니다. 우리 함께 몸을 돌려볼까요. 평소에 보지 못하던 곳입니다. 별로 집중하게 되지 않는 공간입니다. 주의 ,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신 바로 , 그날은 대개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향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을 겁니다. 혼자서 드렸겠죠. 그런데 뒤쪽에서 음성이 들려서 뒤로 방향을 틀고 앉은 겁니다. 시점과 관점이 바뀌니 곳에는 일곱 촛대가 놓여져 있습니다. 일곱 촛대는 소사이사의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 일곱 촛대 사이 중간에인자와 같은 있습니다. 인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인자라는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하십니다. 

 

13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앞에 섰다. 14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_다니엘 7:13-14

 

다니엘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어떤 환상을 보았나요? 우주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인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분은 옛적부터 계신 분입니다. 백성이 그에게 경배합니다. 분은 하나님과 같은 권한과 권세를 갖게 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었던 다니엘에게 이런 환상이 내려온 겁니다. 환상이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회자되어 내려오다가 예수님 스스로 인자라는 표현을 쓰신 겁니다. 그리고 이제 요한도 인자와 같은 분을 다시 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성경은 통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느 하나 떼어 놓고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면 오류에 빠집니다. 성경은 내적 연결 고리들이 무수히 많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직접 인용하기도 하고, 은근히 드러내고 반영하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의 내적 통일성과 원리를 무시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는 엉뚱한 결과를 낳습니다. 

 

 

2) 묘사(13-16)

그분의 모습을 확인해 볼까요. 요한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 옷과 금띠 

그렇습니다. 먼저 인자와 같은 , 예수님의 옷을 보고 있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옷입니다. 물론 고대 세계에서 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입었던 옷도 발에 끌리는 옷이기도 합니다. 둘다를 의미할 겁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래서 만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겁니다. 동시에 그분은 최고의 왕이십니다.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슴에 금띠가 그것을 더욱 강조합니다. 대제사장의 원래 옷에는 12개의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는데요. 예수님의 가슴에는 금띠가 둘러 있습니다. 인간인 대제사장과는 차원이 다른 고품격의 유일무이한 대제사장임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 머리, , , 음성, 그리고 얼굴

이제 그분의 머리를 볼까요. 어떤 모습입니까? 같이 흽니다. 처럼 하얗습니다. 그분의 머리는 하얗습니다. 다니엘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분과 동일합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9내가 바라보니, 옥좌들이 놓이고, 옥좌에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옷은 눈과 같이 희고, 머리카락은

털과 같이 깨끗하였다.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고, 옥좌의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10불길이 강물처럼  그에게서 흘러 나왔다. 수종 드는 사람이 수천이요, 모시고 있는 사람이 수만이었다. 심판이 시작되는데, 책들이 펴져 있었다_다니엘 7:9-10

 

눈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부리부리 불꽃이 오르고 있습니다. 발은 어떻습니까? 풀무불에 달구어 놋쇠처럼 빨갛게 달아 있습니다. 범접할 없는 위엄이 느껴집니다. 근처에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습니다. 음성은 많은 물소리,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같습니다. 모든 소리를 집어 삼키는 엄청난 목소리입니다.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있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자들입니다.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의 칼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의 말씀입니다. 창조의 말을 여기서 심판의 말로 바뀝니다. 얼굴은 마치 해와 같습니다. 강력한 빛이 주변을 비춥니다. 

 

여러분, 이분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릴 있겠습니까? 사실 쉽지 않습니다. 어떡해서든 그림을 그릴 있을지 모르지만, 정확히 그리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초상화가 아니라 추상화가 나올 뿐입니다. 

 

그럼 요한은 이런 환상을 보았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존재의 본질에 대해 옷과 금띠가 손과 발의 모양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겁니다. 단순히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상징과 추상화로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역할에 대해 말하기 원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왕이요 제사장입니다. 그분은 우주의 왕이십니다. 

 

3) 소개(17-20)

모습을 요한은 이사야나 에스겔,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두려워서 죽은 사람 같이 됩니다. 그분의 영광 앞에 꼬꾸라져 버립니다. 그러자 그분이 다가와서 일곱별을 들고 있는 오른손으로 요한의 몸에 손을 댑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그렇습니다. 그분은 영광의 광채가 빛나는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 서면 놀라서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손을 대시면서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 처음이요 마지막

이제 그분은 자신의 소개를 하십니다. 처음이요 마지막, 시종이라고 소개합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이분에게서부터입니다. 마지막도 예수님을 통해 일어납니다. 

 

- 부활하신  

18절에 보니 그분 스스로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난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 부활의 주인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 영원한 권세자

마지막으로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며, 동시에 죽음과 사망을 컨트롤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쇠는 그분에게 있습니다. 그분을 통해 역사가 진행될 것입니다. 최종 심판도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주의 왕이십니다. 

 

=> 교회와 만물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 

우리가 친구라고 부르고, 형이라고 부르고, 가족이라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와 만물과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사이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균형감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친밀한 맞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세계를 주관하시는 왕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무한한 권한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맞먹을 있는 분이 아닙니다. 무례하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에 대한 신적 경외감과 친밀감을 동시에 느끼는 그것이 그분 안에 있는 제자들의 인식입니다. 

 

3. 나에게 예수님이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세종대왕_역사적 인물 

2) 소크라테스_철학자, 사상가

3) 석가모니_성인 

4) 체게베라_혁명가

5) 아이언맨_구원자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생각할 있습니다. 곰곰이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그리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역사적 인물, 철학자, 사상가, 성인, 혁명가, 구원자 좋습니다.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런 요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 만물과 역사의 주인 예수님 

그러나 그분이 우주 만물과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결코 놓쳐서는 안됩니다. 누군가의 평가는 사람과의 만남, 대면 접촉과 더불어 함께 시간을 보내고 겪어 보면서 내리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부분의 생각은 대부분 우리가 그런식으로만 경험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분이 만물과 역사의 주인이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세계인들이 모여서 주님을 경배하고 그분 앞에 무릎꿇는 경험을 하기 바랍니다. 때로 집회가 갖는 가장 장점은 바로 경험을 있도록 도와주는 있습니다. 

 

4. 나가며 

- 상상의 성화 

오늘 말씀의 주제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건 바로 상상의 성화입니다. 우리의 상상이 점점 거룩해지는 겁니다. 역사상 어떤 세대보다 우리는 환상적인 영상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머릿속에 있던 수많은 그림과 영상이 이제는 눈으로 직접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5G 혹은 4차산업혁명 시대가 무르익게 되면 현실 같은 상상이 더욱 차고 넘칠 겁니다.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지키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신실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상이 더욱 거룩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적계시가 상상의 세계에 뿌리내립니다. 예수님을 상상하고 그분의 나라를 상상하고 다시 오실 그분을 상상하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상상합니다. 그것만 상상하며 수는 없겠죠. 그러나 때때로 종종 홀로 기도할 마다 상상이 더욱 선명해진다면 그래서 상상의 세계 속에서 머물 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의 상상이 성화되는 순간을 경험하길 소망합니다. 

 

 

** 기도회 

1. 예수님에 대한 나의 상상은 어떠합니까? 그동안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상상하고 있었나요? 과연 그분의 만물과 역사의 주인이요 왕이라는 생각을 얼마나 했나요? 혹은 반대로 그분이 나의 친구, 나의 형제, 나의 연인이라는 상상은 얼마나 했나요? 우리 그분을 떠올리는 기도를 드립시다. 

 

2. 그분을 상상하는 시간과 깊이가 늘어나고 깊어지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의 상상이 바뀌면 우리의 존재가 바뀝니다. 그분에 대한 상상이 많아지고 깊어질수록 우리의 존재는 더욱 성숙하게 겁니다. 이를 위해 기도합시다. 

 

3. 터키가 쿠르드족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쿠르드 족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IS와의 전쟁을 벌여 왔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시리아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터키가 쿠르드를 공격하는 것을 막아주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부디 더이상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달라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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