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1. 

 

[본문_요한복음 20:19-31_새번역] 

19 , 주간의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말씀을 하시고 나서,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손을 만져 보고,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설교]
0.
들어가며
이번 달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다뤄보고 싶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몰약을 가져다 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커밍아웃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제자였던  이스카리옷(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공은 제자들에게 넘어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어떻게 소화했을까요? 과연 이들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왔을까요?  

 

1. 도마의 열망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무고한 예수님을 하룻밤 사이에 잡아다가 사형까지 집행한 유대인들의 무도함에 치를 떨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알고 제자들에게 말하자,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무덤을 살피고 사건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자신과 대화를 나눴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숨죽이며 유월절, 무교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두려움 속에는 평안, 평화가 있을 없습니다. 두려움은 극도의 자기 보호를 낳고, 극단적 자기 보호는 타자에 대한 배척과 혐오를 낳습니다. 배척과 혐오는 결국 전쟁의 굴레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두려움의 결과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두려움은 살인을 낳지만, 국가의 두려움은 전쟁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져서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불신(이스카리옷 유다가 배신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으로 가득 제자 공동체에 찾아오십니다. 자신이 살아 났다는 사실을 확증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성령님을 숨으로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22-23) 

 

그러나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돌아오니 다락방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다락방에 오셨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고 기쁨에 얼굴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도마는 처음에는 믿을 없었습니다. 몰래카메라 같기도 했지만, 사실 그런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마의 정서는 어땠을까요? 다른 제자들이 놀리는 같아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 빠진 같아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25절의 도마의 말은 그의 정서를 대변해 줍니다. 

 

25_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도마는 악에 받친 같습니다.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는 믿을 없으니, 직접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봐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도마는 정말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자신에게도 보여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열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10제자만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여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마도 믿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는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직접 보고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직접 만져보라고 말했을 , 도마는 만져보기는 커녕, 자기를 지명하시면서 말을 걸어오신 예수님께 감격하여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2. 꾸짖음 vs. 격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이 장면에서 도마를 꾸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27)라거나,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8) 말씀을 비추어 ,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꾸짖음 보다는 격려의 늬앙스로 읽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전체 제자들 앞에 번째로 오신 상황에서 도마에게 정색을 하며 화난 목소리로 꾸짖었다고 보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했던 베드로에게도니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부드러운 질문으로 다가가셨습니다. 도마는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고 싶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런 도마에게 엄하게 꾸짖었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28절의 말씀은 일종의 축복과 예언의 말씀입니다. 요한은 보지 않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 삶을 살았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30-31절이 이를 대변합니다. 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요한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고, 믿는 사람들에겐 영생이 선물로 주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도마에게 했던 예수님의 말씀은 꾸짖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사역해야 하는 제자들에 대한 격려요, 앞으로 보지 않고 믿게 수많은 제자들을 위한 축복이었던 겁니다.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로 도마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봅시다. 

 

3. 나의 나의 하나님

도마의나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베드로의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과 쌍벽을 이룹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유대적 배경에서 최고의 찬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의그리스도메시야 헬라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신적 동일성을 나타내는 유대식 어법입니다. 그에 반해, ‘나의 나의 하나님 당시 로마/헬라 세계에서 최고의 칭송입니다. “ 오직 로마 황제에게만 있는 표현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다신교 세계에서 유일신과의 개인적 관계를 드러내는 파격적인 어구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죽였던 로마의 권력의 무서움을 뒤로하고 이제 진정한 세상의 주님은 오직 예수님임을 공식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표현은 앞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무수한 이방인들의 신앙고백 최고의 모델이 됩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4. 나가며_나의 고백은?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참조 20:16). 그러나 이제 그들의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세상의 주인이신 오직 밖에 없는 유일한 하나님이 이제나의주님으로나의하나님으로 관계가 형성됩니다. 호칭의 변화는 인생의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누군가를 나의 신랑/신부라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나의 아빠/엄마로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나의 사장/대표로 부르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순간, 우리 인생 최대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진실된 고백이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형식에 치중된 종교 문화 생활에 다름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고백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생일대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단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분을 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축복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제자들의 정서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중에서도 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2. 도마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봅시다. 어떤 어조와 말투로 말씀하시는지 서로 나눠 봅시다.    

 

3.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나요? “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님, 종교 창시자로서의 예수님으로 부르고 있나요? 그분을 진심으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예상됩니까? 

2018. 02. 18. 

 

0. 들어가며 

앞으로 4주간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순절도 시작되었는데요. 2월 14일에 교회력에서는 재의 수요일이라 해서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미사와 예배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동안 요한복음 14-16장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에 대해 다루려고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무작정 참회하고 무작정 슬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현재적인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사순절에 더 어울리는 설교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리즈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혹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가 함께 회개하면서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원리

- 사랑의 원리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을 것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포하시고 그 나라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시고 가르치시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습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며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통치의 기본 원리를 명령이라는 형태로 제시하셨는데요. 요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13:34-35) 

맞습니다. 마치 헌법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주 중요한 원리인 나라입니다. 

 

2) 명령 vs 방법

그런데 이런 명령만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명령만 있으면 가정이 운영이 되겠습니까? 평창 올림픽은 평화 올림픽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원리만 있으면 실제로 그것이 이뤄지겠습니까? 원리를 천명하고 당위를 제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입니다. 원리, 당위, 명령 등은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을 그려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신과 목적과 의미를 표현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평창 올림픽이 평화 올림픽이 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협력해야 합니다. 미국과 일본도 협조해야 합니다. 중국과 러시아도 동조해야 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서로 적대행위를 잠시 멈추고 대화 모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 올림릭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방법이 중요합니다.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사항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방식,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구현되는지를 알려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나 누가복음의 평지설교나 마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등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을 드러내 줍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그 명령과 원리를 실천해낼 수 있을까요? 저는 요한복음 14-16장이 그 방법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그래서 몇번에 걸쳐 이 본문을 묵상해 보시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어떤 방법들을 제시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 네가지 방법

14-16장까지 여러번 묵상하고 생각해보면, 크게 4가지 방법론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성령님의 도우심. 이 네가지를 앞으로 4주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바른 신학입니다. 

 

함께 본문을 읽어볼까요? 

잘 읽으셨습니다. 

바른 신학을 이루는 핵심 구절은 14장 6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그냥 앞뒤 문맥을 빼고 읽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구절이건 전후 문맥을 떼어 내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로 허공을 떠돌게 됩니다. 철저히 문맥 속에서 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1. 근심에 쌓인 이유

1절에 보니 예수님이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근심을 파악하고 계십니다. 왜 제자들은 근심하고 있을까요? 

 

1) 이 안에 배반자가 있다(13:21) 

첫째로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배반자가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음이 괴로우셔서, 환히 드러내어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요 13:21)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는 순간에 12명의 제자들을 보고 하신 말씀 치고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13:28)고 요한은 적고 있습니다. 

 

2) 나는 너희를 떠날 것이다(13:33) 

둘째로 더욱 더 큰 충격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날 것이라는 선언에 있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요13:33)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3년가까이 동행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 지도자들을 굴복시킨 뒤에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로마를 점령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할 일은 다윗처럼 이스라엘를 통일하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독립시켜서 전 세계에 가장 위대한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 믿었고 따라서 예수님이 곧 그와 같은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에 차있었습니다. 그런데 떠난다니요!! 제자들은 수군거렸을 겁니다. 

 

3) 수제자 베드로도 나를 부인할 것이다(13:38)

근심하게 된 세번째 이유는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할 거라는 예수님의 예언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13:38)

제자들 중에 가장 인정받고 있었던 수제자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란 말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라면 근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 근심에 둘러쌓일 만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걱정스럽게 근심되게 만드는 말들을 원투 어퍼컷을 날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 상황에서 새계명이라고 제시하시는 것 자체가 매우 모순적입니다. 가장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새 계명을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창 올림픽 개막식이나 폐회식에서 그런 선포를 하시면 분위기가 맞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새계명을 선언하십니다. 정말 예수님은 엉뚱한 구석이 많습니다. 제가 제자라고 해도 마음에 근심이 쌓일 만합니다. 

 

=>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 

좋습니다. 근심있는 마음을 아시고 자신을 믿으라고 하시니 일단 믿어봅시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전혀 사람 속을 모른채 자기 멋대로 말하는 분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심을 시켜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분을 신뢰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2. 아파트 vs. τοπον(place, position)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뭔가 이상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이게 무슨 소리죠? 저 같으면 그들의 정서를 공감하면서 신뢰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그래 너희들 마음속에 근심이 많은 것을 내가 잘 안다. 아까전에 내가 했던 말들 때문에 더욱 그럴거야.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이미 모든 상황을 내가 잘 정리해 두었단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만 믿어’ 

이 정도가 상식적인 답변 아닐까요? 느닷없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라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의 심사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1) 아버지 집에는 방이 많다(2절) _성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 집(2:16)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 바로 성전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2:16) 라고 말씀하실 때의 아버지 집은 성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럼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톰라이트라는 유명한 신약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성전의 핵심 의미는 그곳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풀면,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성전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제자들이 있을 곳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 토폰을 마련하러 간다(2절) 

바로 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거할 곳,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거든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면서 통치히시는 하나님 나라에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다고 대답하고 있는 겁니다. 

 

- 정적인 개념 vs. 동적인 개념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있을 곳, 헬라어로 하면 토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요. 이 토폰이 단순히 장소적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할과 포지션이라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있을 곳은 제자들이 가만히 앉아있거나 서 있는 곳이 아니라 제자들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곳을 함께 의미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거주하는 집, 아파트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는 역할과 포지션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토폰은 정적인 개념만이 나이라 동적인 개념도 함께 전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존재하다 그리고 활동하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존재를 통해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새로운 역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함께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이 드러날 때, 새로운 도성, 새 예루살렘이 이 땅 가운데 펼쳐질 때, 제자들은 각각의 역할과 위치를 부여받을 겁니다. 

 

3)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3절) 

-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기

새로운 하나님 나라는 그냥 앉아서 놀고 먹고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게 될 겁니다. 온 우주를 그분과 함께 정의로운 사랑으로 통치할 겁니다. 이게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첫번째 명령의 회복이 일어나는 그림입니다. 

 

=> 미래로의 초대 

근심에 쌓여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큰 그림을 그려주십니다. 단순히 그들의 정서를 위로해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는 말은 그들을 토닥이는 심리 삼담사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는 말은 세상의 끝을 위해, 새하늘과 새땅을 위해,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예수인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믿고 신뢰하라는 겁니다. 그분은 세상의 끝을 보고 있습니다. 그 미래로 제자들을 초대하는 겁니다. 

 

이 미래를 믿으십니까? 정말 믿습니까? 

 

3. 도마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_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현실주의자, 실증주의자, 경험주의자 도마로서는 이해가 안 될 겁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아주 정직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는 그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제시하신 미래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갇혀 삽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건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마 처럼 물어야 합니다. 주님! 정말 주님이 그리시는 그림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럼 그분은 이렇게 답하실 겁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이게 바른 신학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1) 길_방법 

그분이 방법이 되십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그분의 인격과 성품과 삶과 가르침,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겁니다. 

 

2) 진리_정체성 

그분은 방법 뿐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 하나님 나라 그 자체, 진리 그 자체가 됩니다. 세상의 처음과 끝이 되십니다. 창조주가 되신 그분이 모든 진실을 알고 계십니다.

 

3) 생명_목적

더불어 그분이 바로 우리 모든 숨쉬는 것들의 목적이 되십니다. 그분이 바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없이는 우리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참 생명이 되십니다. 

 

길, 진리, 생명 이 셋중에 오늘 본문이 집중하는 건 바로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도록 만드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이게 바른 신학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능케 하는 건 그 명제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우리는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만물을 회복시키겠다는 녹색당의 정강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겠다는 어떤 노력이나 정치이데올로기도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냅니다. 

 

4.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_예수 중심의 신학

결국 바른 신학이란, 예수 중심의 신학을 의미합니다. 구약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추출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빠진 하나님 나라 설명은 껍데기입니다. 

 

1) 신학, 교제, 기도, 성령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네가지가 있다고 초두에 말씀드렸습니다.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그중에 오늘 바른 신학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2) 신학이 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 

예수 중심의 신학이 바른 신학입니다. 이게 무너지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몇가지 원리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정의, 사랑, 공평, 자비, 희년, 자연보호, 인권, 약자보호, 내부고발 등등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떠 올릴 때 가져다 쓸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개념 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낼 수 없습니다. 

 

- 예수 중심의 신학을 위한 노력

이번 한주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한 노력을 조금만 더 기울여 봅시다. 구체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분에 대한 책을 읽는 것도 좋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라는 책을 한번 살펴보세요. 아니면 성경을 깊이 연구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큐티 정도가 아니라 연구를 해 보는 겁니다. 

 

이번 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2021. 4. 4. 

 

[본문_요한복음 19:17-24_새번역] 

17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그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18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19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고 썼다. 20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21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 하였으나, 22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썼다” 하고 대답하였다.

23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한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짠 것이므로 24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 하였다. 이는

‘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0. 들어가며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너무 중요하고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부활절이야 말로 모두가 기뻐할 최고의 날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요한은 부활보다 앞서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왕의 대관식이 일어났다는 관점을 알려주고 있죠. 어떻게 이런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 이것이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명패와 왕의 대관식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중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매년 유월절이라는 민족 대명절을 맞아 순례길에 오르는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왔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함께 이 거대한 종교 축제를 경험하러 찾아왔습니다. 변방에 작은 마을이 순식간에 세계인의 melting pot(도가니)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언어가 공존했습니다만 그래도 공용어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공식언어인 라틴어, 지중해 세계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혤라어, 그리고 유대 사람들의 히브리어(또는 아람어)를 공통적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셔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와 기소에 대해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너무 강력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넘깁니다. 하지만 마지막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십자가형에 앞서 죄명을 쓴 죄패 혹은 명패를 붙입니다. 왜 사형시키는지 백성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전세계인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고 썼나요?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습니다. 지도자들은 못마땅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쓰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바꾸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심문한 그는 예수님의 범상치 않은 면모에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민중들이 예수님의 그간의 행적을 잘 알고 그를 메시야 즉 유대이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는 전 세계인 앞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왕의 대관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2. 수치와 영광 

요한은 매우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광이라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과 환호 속에 휘황찬란한 장식과 성대한 예식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전혀 다른 방식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나간 뒤에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그렇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3:31-32)

 

십자가를 두고 예수님은 영광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요한은 십자가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패/명패를 씀으로써 전세계인에게 예수가 ‘유대인의 왕’임을 드러냈다고 해석했고, 그 내용을 자세하게 적고 있는 겁니다.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 가장 영광스런 순간이 되었습니다. 벌거벗겨져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참혹한 순간이 가장 영광스런 왕의 대관식이 된 것입니다. 수치는 여기서 영광이 됩니다. 금관과 곤룡포의 영광이 아닙니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낸 최고의 영광이 된 겁니다. 

 

3. 새로운 관점_수치 속에서 영광을 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사의 어느 순간에나 드러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 우주인급의 실력으로 미친 승리를 이끌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칭찬과 환호를 보낼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움이며 뜻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도 있겠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마 그런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을 겁니다.

 

그러나 승리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패배의 영광도 있습니다. 닉부이치치의 삶이 그랬습니다.  '해표지증'이라는 유전질환으로 짧은 왼쪽 발을 제외하고는 양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없는 그는 친구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실망해 어렸을 때는 자살도 시도했었죠. 그러나 그는 결국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호주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수치스런 순간이 없지 않았습니다. 남과 다른 자기를 보는 것이 부끄러웠겠죠.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치는 이제 영광이 되었습니다. 생명과 평화가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4. 나가며_삶을 재해석하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한 가지 방식/양식으로 제한된다고 생각을 가두지 맙시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다시 해석할 틀이 생겼습니다. 학창 시절 따돌림의 고통은 평생 따라다닙니다. 학폭의 기억은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그 자체의 고통과 아픔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수치스럽고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죠. 그러나 우리는 가장 큰 수치 속에서 가장 큰 영광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슬픈 추억과 기억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빛 속에서 다시 새롭게 조명되길 소망합니다. 나의 고통과 슬픔이 어떻게 사용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아웃의 주인공 라일리가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쁨이’만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슬픔이’가 필요했죠. 영성 작가 헨리 나우웬은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수치의 영광을 받으신 십자가의 예수님, 그 빛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재해석합시다. 부활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2018. 2. 11. 

 

0. 들어가며 

-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감동적이었던 장면 두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성화 점화를 위해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선수 두명(박종아, 정수현)이 성화를 함께 들고 경사도 가파른 120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남북의 평화로운 통일의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저렇게 함께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제 아내와 나누었습니다. 

 

두번째는 2018개의 드론이 만들어낸 오륜기였습니다. 처음엔 제 눈을 의심했지만, 금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드론이다. 확신에 찬 감탄사로 “드론이다. 드론”하고 아내에게 외쳤습니다. 정말 Fantastic한 장면이었습니다. 어느 블로그를 봤는데, ‘2018명의 어떻게 일사 분란하게 드론을 운전할 수 있는가?’라며 놀라움을 표했더라구요. 저는 알았죠. 그건 2018명의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1명이 컴퓨터로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평화를 통한 하나됨

올림픽의 정신은 ‘평화 친선 도약’입니다. 그중에서도 평화가 으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도시 국가간에 전쟁 중이더라도 올림픽 기간 중에는 휴전을 했다고 합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포츠로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남과 북에 평화가 정착되고 더 나아가 통일이 되는 그 날을 위해 평창 올림픽이 그 출발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남과 북이 평화롭게 하나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소원이라면, 예수님의 소원은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통해 예수님의 기도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 

2주전에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악한 세력은 사단, 예루살렘 성전종교 지도자들, 회당 중심 바리새인들, 그리고 거대제국 로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세력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해주시길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지키다도 중요하지만, 왜 지키는가?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Keep from 도 중요하지만 Keep for도 중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영어공부 한번 하면 좋겠는데요. 목적을 나타내는 so that may  구문을 찾아봅시다. 

 

1. 하나됨 (11절)

이건 우리가 지난 2주간 계속 다루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로 연합해 계시듯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한자들, 즉 사단을 비롯한 그의 하위 권세자들은 위협과 유혹으로 제자들의 하나됨을 훼손할 겁니다. 제자들의 내면의 욕망을 극대화하여 하나됨을 훼손할 겁니다. 

 

- 철저히 유린된 교회의 하나됨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자들의 유혹에 철저히 유린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분열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조적 분열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네트웍크를 유지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박해와 이단의 발흥으로 분열합니다. 로마교회는 교리 문제와 교황권 싸움으로 동로마교회와 서로마교회로 분열됩니다. 유럽대륙의 카톨릭교회는 구교와 개신교로 나뉩니다. 

 

- 예수님의 기도는 능력이 없다? 

교인들은 하나됨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예수님의 기도의 한계와 허약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기도하신 걸까요? 그의 기도는 능력이 있는 기도일까요? 이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그분이 기도하셨다는 것은, 그리고 그 기도가 AD80년 중후반 요한의 글에서, 요한의 공동체에서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함께 드려졌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됨은 현실에서 완전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는 하나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적으로 기도하신 겁니다. 그분의 기도는 지금도 하늘과 땅에서 울려퍼집니다. 하나됨을 해치려는 수많은 세력들과 욕망들 앞에서 온몸으로 막고 계십니다. 우주적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내기 위한 그분의 기도와 수고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 진실한 공동체 

저는 진실한 공동체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됨의 가장 큰 적은 가식, 부정직, 외식, 겉과 속이 다름입니다. 마피아게임은 공동체를 하나되게 만들지 못합니다. 서로간의 불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재미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하게 하다보면 인격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낳습니다. 건전한 게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중에 하나가 딕싯입니다. 서로의 생각과 관점과 느낌을 알도록 기획된 보드게임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게임에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나눔과 정직한 반응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수적입니다. 세상은 속이고 반전으로 놀래키고 배반으로 돈을 벌지만, 즉 일종의 투자와 사기사이의 애매한 길을 가지만,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는 진실함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 하나됨을 위해_삼위일체 신학, 용서, 그리고 경청과 공감

이렇게 진실되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됨을 위한 신학 내지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요, 그게 바로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서로 안에 있음을 이해한 삼위일체 신학과 묵상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많은 부분이 이런 기도로 채워져야 합니다. 묵상의 많은 부분이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 원리가 기독인의 영성의 근본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응시가 매일 있으면 있을 수록 우리는 하나됨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무엇을 감행해야 하는지 결단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우리는 가장 큰 장애물을 건너야 하는데, 그게 바로 용서입니다.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구함이 옳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용서를 실행할 용기를 내면 참 좋습니다. 과거 학생 수련회 때마다 용서의 밤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용서에 대한 설교를 듣고 지난 학기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먼저 다가가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약간 인위적이긴 했지만, 그 나름 대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실제로 용서를 구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용서를 서로 구하고 서로 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경청과 공감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드는 일입니다. 게다가 공감하며 경청하기는 꾸준한 노력과 훈련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기 PR의 사회입니다. 경청과 공감은 콘서트에서나 있는 아주 희귀한 일이 되었습니다. 김제동의 톡투유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경청과 공감듣기가 작동합니다. 기독 공동체에서 일어나야 할일이 교회 밖에서 기획되어 대중화됩니다. 

 

=> 도전! 진실한 하나된 공동체

평생에 걸쳐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일이 있다면,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 진실하며 하나된 교회 공동체를 한번 만들어보는 겁니다. 규모에 상관없습니다. 크고 작든 그런 공동체의 이상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 보는 게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우리 크리스찬들의 자세일 겁니다. 

 

2. 기쁨(13절)

무엇을 위해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는가? 두번째는 기쁨입니다. 13절에도 so that may 구문이 등장하죠? 그런데 사실 저는 이 구절이 왜 여기에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후 문맥을 아무리 살펴도 이 문장은 매우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세상에 머물게 될 제자들을 지켜보호해 달라는 내용의 기도를 드립니다. 14절부터 19절까지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 공동체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13절이 정말 뜬금 없습니다. 갑자기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한번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답을 드리려는 게 아니라 고민을 나누는 겁니다. 

 

-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기도의 목적은 제자들의 기쁨(13절)

13장에서 17장까지가 고별설교및 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가르치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 바로 제자들의 기쁨입니다. 세상에 남게 되는 제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수많은 유혹과 핍박이 찾아옵니다. 이 유혹과 핍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내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홀로 단절되었을 때 커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천국을 보화와 같이 간직하며 동시에 이 세상에 누룩을 가져오는 신앙,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 우리를 대적하는 자보다 더 크다고 확신하는 신앙, 우리를 세상 한복판에서도 악으로부터 구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신앙이 더 큰 신앙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교회의 분열에 맞서: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 대하여]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하시는 두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는 설교입니다. 다른 하나는 중보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제자들의 마음 속 기쁨입니다. 단순히 억지로 웃는 웃음이 아닙니다. 가식적인 스마일이 아닙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입니다. 

 

- 제자들의 정서적 만족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은 쥐어짜내어 헌신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의지의 남은 하나까지 쥐어짜내어 인상을 찌푸리며 종교행위에 몰두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최근에 너무 추워서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 배수관이 얼어서 세탁기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손 빨래를 했는데, 청바지를 빨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손빨래를 했는데요. 있는 힘을 다해 청바지를 비틀었습니다. 청바지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안쓰던 근육도 울부짖었습니다. 

 

이렇게 쥐어짜내는 것은 올림픽 경기장에 나온 분들로 족합니다. 모든 근육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건 그들이 할 일입니다. 

 

기독교는 희락의 종교입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기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추억할 때, 우리는 내면의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근심이 가득해도, 핍박이 있어도, 박해가 있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기쁨이 있습니다. 

 

- 기쁨의 근원

이 기쁨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 사랑의 연합이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 연합안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이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위의 말씀에서도 기쁨이라는 단어가 독보적으로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성한 기쁨 안에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십니다. 부담이 아니라 억지가 아니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요 자발적이요 자원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되자 

유명한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한분 계십니다.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그분을 만족해할 때, 그분이 우리를 통해 영광으신다고 역설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문장에 적극 동의합니다. 그분의 존재가 기쁘십니까? 그분의 존재로 만족합니까? 그분이 하신 일로 기쁨이 있습니까? 그분이 하신 일에 만족하십니까? 감정고양으로 흥분되는 상태말고요. 주변 교인들의 칭찬으로 으쓱해지는 거 말고요. 교회 봉사나 구제로 인해 스스로 흡족해 하는 거 말고요. 정말 삼위 하나님이 기쁘십니까? 삼위 하나님이 만족스러우신가요? 

 

우리가 스스로에게 계속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행을 떠난 나그네입니다. 신앙의 여행은 수많은 질문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이 여행의 특징입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의 욕망이 세상의 욕망이 우리의 눈을 가리우고 흐릿하게 합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분이 기쁩니까? 그분으로 만족합니까? 

 

3. 진리로 거룩(17-19절)  

이제 마지막입니다. 무엇을 위해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십니까? 하나됨과 기쁨을 위해서도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거룩입니다. 사단을 필두로 하는 세상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거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상태가 어쩌면 거룩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존재의 규정만으로 거룩을 다 담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거룩의 실제가 무엇이며, 그 실제로 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 거룩의 실재_보냄받는 일상(18절)

거룩의 실제는 분명합니다. 거룩은 세상과 분리되어 고상한 삶의 방식을 누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산과 시내를 벗삼아 조용히 기도의 집중하는 삶이 거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거룩의 실제 모습은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아이를 돌보는 아빠와 엄마, 설겆이를 하는 순간, 화장실 청소 하는 순간, 밀린 빨래를 하는 순간, 출근해서 그날 해야 할 업무 리스트를 점검하는 순간, 회사 직원 회식을 위해 식당을 예약하는 순간,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기획회의를 하는 순간, 올림픽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기사를 읽고 댓글을 다는 순간.... 모든 일상의 순간이 거룩의 실제를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모든 일상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 속에 있듯이 지내면 그것이 거룩입니다. 모든 일상이 타성에 젖은 습관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경험하는 의미의 공간이 될 때, 그것이 거룩의 실재입니다. 

 

- 진리로 거룩하게(17절)

그럼 어떻게 일상에서 거룩하게 됩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진리로 거룩해지는 겁니다. 위엄있는 척 하는 모습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해 보이는 옷과 신발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식사 기도를 오랫동안 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낮추고 성경의 용어를 사용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해지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바로 진리입니다. 

 

-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다(17절)  

예수님이 설명하십니다. 진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먼저는 구약 성경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시고 외우시고 연구하신 성경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한 구약 성경 전체일 겁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가르치신 말씀들입니다.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허락없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진리다

이 사실을 한번 더 확장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진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스러워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시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

 

맞습니다.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격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가르침에 잠잠히 거하는 것, 순전히 따르는 것. 이것이 거룩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은 진리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겁니다. 30살 때까지 목수의 아들로 잔뼈와 잔근육이 발달했던 그분을 따라 사는 겁니다. 종교권력과 맞서 예루살렘 이방인의 뜰에 펼쳐져 있던 장사 테이블을 뒤엎었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환대하시고 힘있고 신학적으로 갑질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욕설을 베푸셨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던 것처럼 사회적 계급을 무시하고 의전을 무시하고 약자를 섬기는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이게 거룩입니다. 손을 올려 주님을 외치면서 집회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거룩의 기역자도 쓸 수 없습니다. 

 

- 말씀이 읽혀지고, 선포되고, 이해되고, 나눠질 때, 거룩함에 이른다. 

 

“너희가 성경은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요 5:39절) 

 

그러니, 우리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Transformed by the Holy Scripture. 이게 되어야 합니다. 과연 말씀으로 변화되고 말씀때문에 내 삶에 새로운 질문들이 던져지고 있습니까? 신앙의 여정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나요? 말씀 때문에 던져진 인생의 질문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울리고 있나요? 어떤 질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 말씀은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선포되고, 이해되고, 해석되고, 나눠져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말씀이신 예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진리로 거룩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겁니다. 

 

4. 나가며 

몇 주간의 걸친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묵상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과 연합 안에 있다는 개념에 집중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 기도 시리즈 설교의 마지막으로 그분이 무엇을 목적으로 기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 하나됨(one), 기쁨(joy), 거룩(holy)

맞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을 그토록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 중의 핵심일 겁니다. 하나됨을 위해 우리는 삼위일체 신학과 영성에 깊이 천착해야합니다. 서로 용서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경청과 공감이 일어나야 합니다. 두번째 목적은 제자들 속에 기쁨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제자가 되기를 그토록 바라셨습니다. 세번째는 그들의 일상속 세상속에서 진리로 거룩해지길 목적으로 삼습니다.  

 

-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그분의 기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드려진 기도였습니다. AD30년에 드려졌던 그 기도는 초대 교회에 면면이 흘러 지속적으로 드려지다가 AD85년 어간 요한의 공동체가 함께 드리고 있는 기도였습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도 좋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것도 좋습니다. 옆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기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따라 적용하여 기도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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