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25. 김혁수 

 

[본문_요한복음 21:15-25] 

15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어린 떼를 먹여라.” 16예수께서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쳐라.” 17예수께서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먹여라. 18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것이다.” 19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나서베드로에게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0 베드로가 돌아다보니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베드로가 제자를 보고서예수께 물었다. “주님,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2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23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24 모든 일을 증언하고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 하신 일은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기록한 책들을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0. 들어가며
4
월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당시의 가장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감정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은 마지막 이야기를 베드로에게 할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등장시킵니다. 이제 제자들의 활약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마음의 죄책감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베드로의 죄책감을 다뤄주십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1. 호숫가 산책

지난 주에 우리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생선을 구워주시고 빵을 주시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 아침 식사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아침은 그야말로 감동이었습니다. 찢어질 잡힌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서 퍼득대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심장도 물고기들처럼 퍼득댑니다. 새로운 소망으로 차오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분이 이렇게 버젓이 살아서 제자들을 음식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분이 이제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섬겨주십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다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그런데 쪽에 베드로가 앉아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100여미터 되는 호수를 헤엄쳐 왔습니다(21:7). 하지만 음식이 주어지는 내내 베드로는 불편했습니다. 자기가 섬겨야 하는데, 제자가 스승을 모시는 것이 당연한데, 그는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예전 같았다면, “예수님, 음식 제가 만들겠습니다. 서빙도 제가 하겠습니다. 모진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던 몸을 이끌고 직접 일하시다뇨? 제가 하겠습니다. 앉아 계십시오!” 이렇게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쪽에 가만히 앉아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기만 했습니다. 더이상 선생님으로 주님으로 부를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말로 배신하고 저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었으며, 심지어는 욕을 했었습니다.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제 다시 수제자 노릇을 하기에는 염치가 없습니다. 

 

아침을 먹은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산책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의 손을 잡고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서 걷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니가 나를 여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보다 사랑하느냐?” 비록 조용히 묻긴 했지만, 베드로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 들을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베드로는 살짝 고민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했던 자신이 과연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그의 성격상 고민을 이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요 주님,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시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떼를 먹여라. 방금 내가 먹였던 떼를 이제는 니가 먹이면 좋겠구나 

 

2. 기억의 치유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후계자로 베드로를 다시 지목하십니다. 그에게 떼를 맡기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자격지심도 있습니다. 말만 많고 실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욕하고 저주했던 자신이 과연 예수님의 후계자가 있을까요? 번도 아니라 번이나 부인했던 자신의 과오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 예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니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질문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질문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대답하고 나니까 현타가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질문을 받자 마음이 너무 복잡합니다. 자신이 울기 전에 부인할 것이라 예언하셨던 예수님 아닙니까. 자신의 행동과 말을 아는 주님이 다시 이렇게 물으니, 갑자기 바를 모릅니다. ‘예수님이 물어 보실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등등. 고민 끝에 답을 합니다. “주님께서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다.” 

 

점점 과거의 기억이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올라옵니다. 2 , 새벽 동터오는 시간에 어쩔 없이 예수님을 부인했던 참혹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질문에 답하면 답할수록 답답합니다. 그런데 번째 질문이 던져집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번의 질문을 던지는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안들려서 크게 듣고 싶어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의 대답에 신중에 신중을 더합니다. 정말 사랑하는지, 모든 과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스스로 답을 찾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가 모든 일과 모든 말을 알고 계십니다. 숨길 없습니다. 비록 실수가 있었지만, 저는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것까지도 알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진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랑만큼은 알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부끄러웠던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에게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번이나 말이죠. 대화는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는 듣고 있었습니다. 

 

3. 나를 따라라 

예수님이 베드로의 감정과 마음만 치유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입니다. 살펴보세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번이나 그의 떼를 먹이고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무너진 마음의 회복은 기억의 망각이나 무시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한 고백에서 일어납니다. 비록 실수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의 회복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시 수제자로서, 후계자로서의 사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베드로에게 용서는그래 괜찮아. 이해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용서는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였습니다. 이게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그동안도 계속 따랐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예수님이 사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4. 나가며_따르고 있는가?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나요? 정말 그런가요? 교회에 나온다고, 일주일에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과연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있을까요? 다르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인가요? 아님 교회의 교인인가요? 예수님을 따라 여행을 다니며, 예수님을 따라 고난도 당하는 그리스도의 제자 맞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맞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비록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회복의 기회를 주시고, 원래의 소명을 부여하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따라 오라고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충분히 그러실 분이십니다. 허기진 우리의 몸과 영혼에 음식을 주실 분이십니다. 제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의 죄책감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죄책감 때문에 그분에 대한 사랑고백을 못하시는 분이 있나요?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음식을 주시며 호숫가에 산책을 청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패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자신의 임무를 부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그분을 따를 있는 겁니다. 

 

과연 내가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다시 돌아봅시다. 그리고 혹시 실패했다면 다시 그분께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을 따라 나섭시다.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번이나 물어보십니다. 번째 물어보실 베드로의 생각과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2. 여러분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과거 실패에 대한 자책감, 미래 소명에 대한 두려움 등등 여러분의 마음 정서를 나눠주세요. 

 

3. 예수님은 우리에게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번 그분을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요? 

2018. 3. 4. 

 

0. 들어가며 

- 최근 나의 절실한 기도제목은? 

- 예수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성령의 도우심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세번째로 오늘은 뜻에 맞는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1. 예수님의 꼼수? 

-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4절) 

14장 14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기도하면서 이 구절을 외우고 또 외우고 읊조리고 또 읊조립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순간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하잖아~~’ 그렇게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급속도로 팽창했던 60-70년대의 신앙은 오중복음 삼중축복으로 대표되기도 하는데요. 물질과 건강의 축복이 간절했던 그 당시 서민들의 정서를 정확히 찔렀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구절도 큰 유행이었죠.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니 정말 신나는 일 아닙니까!!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보다 더 쉬운 일이죠.

 

- 정직한 사람은 안다.  

그런데 조금만 정직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 뒤에 갖다 붙인다고 해서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도 중환자실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매일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혹시 예수님의 꼼수?

그럼 오늘 성경 말씀은 포교활동, 전도활동에 유용하게 사용하라고 전해주신 예수님의 마켓팅 전략인가요? 예수님의 꼼수인가요? 그럴듯하게 말해놓고 실제는 그렇지 않는 다단계 같은 영업 전략인가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이건 구라구만. 에이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네. 초대교회에는 가능했겠지...’ 등등 여러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2. 빌립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문맥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이해는 마음에 와닿는 한구절 한구절 외우는 걸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런 성경 암송은 외우지 않는만 못합니다. 성경의 바른 이해를 방해합니다. 전후문맥을 꼼꼼히 따져야 합니다. 

 

14장을 쭉 훑어보면 일단 경험주의자 제자 도마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 물었고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죠. 목적이자 방법이 예수님이라고 그게 바른신학이라고 말씀을 나눴었죠. 이번엔 빌립입니다. 

 

1) 아버지를 보여주소서(8절)  

예수님이 ‘너희는 아버지를 이미 보았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성적이었던 빌립은 어안이 벙벙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사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한다는 예수님의 예언에 멘붕상태입니다. 베드로가 한쪽 구석에 앉아 멍때리고 있을 때, 다른 제자들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8절) 원래 요한의 제자였던 빌립은 영적인 갈망이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2) 내가 곧 아버지다(9-11절) 

그때, 약간 책망하듯이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랫동안 함께 있었는데 내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있다. 정 못 믿겠으면 내가 하는 일을 보면 알지 않겠니?’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제자들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인격이 수천년동안 이스라엘이 섬겨왔던 만군의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갑자기 여러분에게 다가가서 재림예수다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은 쉬운 결단은 아닙니다. 증인도 있고 증거도 있긴 하지만 증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 우리에게 말씀을 거십니다. ‘2000년전 역사속에 존재했던 한 인물인 예수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 믿음이 가장 먼저 필요합니다.  

 

3. “내 이름으로”(13절) 

여러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주겠다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내 이름으로’ 입니다. 이건 주술이 아닙니다. ‘아브라카다브라’ ‘수리수리마수리’ 같은 주술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문맥에서 ‘이름’은 곧 그의 영광을 구하고 정확하게 그를 위해 말하는 사람들, 정말로 그의 인증을 받은 대리인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교 마술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영적 세력을 조작하려고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성경배경주석, p. 346) 

 

1) 바른 믿음(10-11절) 

첫째, in the name of Jesus는 바른 믿음을 의미합니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른 믿음입니다. 12절 시작부분에 이렇게 이야기하시죠. ‘나를 믿는 사람은....’ 맞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속에 실존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말이 아닌 거 아시겠죠. 그정도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 역사적 실존 인물이 유대교 경전인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른 믿음이죠. 이 믿음에 도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분을 좋은 윤리적 가르침을 전하는 인류의 대스승이나 성인급으로 받아들이는 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유일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in the name of Jesus는 이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2) 예수님의 대사(12절) 

둘째, 12절을 잘 읽어볼까요. 예수님보다 더 큰 일들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병고침과 귀신이 쫓기는 현상이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일어납니다. 전 세계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됩니다. 이 제자들은 단순히 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사들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한 특사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세계 곳곳으로 증폭시키는 일을 하는 대사들입니다. 이 정체성이 in the name of Jesus에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의미가 바로 대사, 특사라는 말입니다. 고대 근동의 용법이 그렇습니다. 

 

3) 아버지께 영광(13절) 

셋째, In the name of Jesus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13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더욱 높아집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바른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의 대사들의 간구를 들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지는 겁니다. 그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목적과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그 어구를 기도끝에 주문처럼 달아서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바른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기도는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내 욕망이나 내 가족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가 아닙니다. 

 

4. 기도 구절에 관한 고찰(14-16장_고별 설교내에서)

여기서 고별 설교 내에 있는 기도에 관한 내용들을 한번 쭉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고별 설교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드렸고, 그중에 세 번째가 ‘뜻에 맞는 기도’인데 14장 13-14절 두 절에서만 나오면 너무 적은 분량이잖아요. 사실은 16장까지 계속 곳곳에서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17장은 아예 대놓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이기도 하구요. 

 

1)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5:7)

잘 살펴보면 여기도 전제 조건이 있음이 보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을 뒤에 붙이는 기도가 아닙니다. 참포도나무되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즉 말씀과 행동이 공명되고 그분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이 우리 안에 계속 공명하고 있으면, 무엇을 구하든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가 전제 조건입니다. 

 

2) 열매 맺는 대사(ambassador)_제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15:16)

여기서도 단순히 모든 개인적인 욕망을 다 채워주신다는 뜻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열매맺는 대사, 특사로 택하셨습니다. 열매 맺는 대사로 택하신 건, 이를 통해 기도의 응답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문장 구조를 잘 보셔야 합니다. 열매맺는 대사로 택한 것이 먼저 입니다. 그럴때 비로소 무엇이든 받는 기도가 가능해집니다. 

 

3) 고난 속 기쁨을 위해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16:23-24)

16장은 마지막 때에 관한 장입니다. 그 날은 고난이 최고조로 달할 때입니다. 핍박과 박해가 극에 달할 겁니다. 먼저는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걸로 박해가 시작됩니다. 그 뒤에는 로마 황제들이 박해가 주기적으로 지속됩니다. 그때를 위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주실 텐데,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맥락은 기쁨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게 없이는 고난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고통 속에 기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사실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4)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16:26) 

마지막으로 16장 26절에는 예수님만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아버지께 직접 간구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회복됩니다. 제사장과 제사를 통해서만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유대인에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여기면서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별 설교에서도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통속적 해석이 튼튼히 서있기는 어렵습니다. 조건이 있고, 목적이 있고, 강조점이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자판기처럼 대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동전을 넣고 기도제목을 누르면 응답의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식 기도는 위험합니다. 이교적입니다. 

 

5. 뜻에 맞는 기도란?_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은 바로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1) 바른 믿음과 바른 관계안에서 드리는 기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바른 믿음과 그분과의 바른 관계안에서 드리는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2) 그리스도의 대사의 신분으로 드리는 기도 

또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 그리스도 예수의 특사의 정체성과 자격으로 드리는 기도가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 이런 조건 하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이런 조건 하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예수님께서 응답하시기 위해 일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함께 응답의 선물을 주실 겁니다. 

 

6. 나가며_맹신을 벗고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오해를 벗어버리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말씀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가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가 정답입니다. 그분이 다 듣고 있다는 정답입니다. 그러나 우리 뜻대로 다 이뤄진다는 오답입니다. 그분의 뜻에 맞을 때 이뤄집니다. 이 분문 때문에 생긴 오해를 벗고 참으로 인격적이신 그분과의 관계로 나아갑시다. 조건에 다 맞지 않다하더라도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건 그분과의 교제에 있어 가장 기본입니다. 두려움없이 그분과의 기도로 나아갑시다. 다만 내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신다는 맹신만 없으면 됩니다. 오해를 벗어 버리고 기도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회 

1.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뤄주신다는 말씀을 오해했다면 오해했다는 고백을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혹여라도 이 말씀을 무시하거나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거나 거짓말로 치부하거나 했다면 회개하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말씀의 본뜻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도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  

 

2.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시다. 그분이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바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 예수 그리스도의 특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 참고 도서

김영봉, 사귐의 기도, IVP

김영봉, 사귐의 기도, IVP 

2021. 4. 18.

 

[본문_요한복음 21:1-14] 

1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2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사람이 자리에 있었다. 3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하니, 그들이우리도 함께 가겠소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밤에는 고기를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4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 잡았습니다.” 6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7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저분은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였다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8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작은 배를 채로, 고기가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 90미터)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9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11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3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 14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이번이 번째였다.

 

[설교]
0.
들어가며
4
월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당시의 가장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해왔던 그들의 깊은 기대와 믿음은 송두리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3년간의 기대가 바뀔 , 누군가는 크게 저항하고 싶었을 겁니다. 완전히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그들을 새로운 출발선으로 데려왔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새로운 출발선에 봅시다. 

 

1. 디베랴/갈릴리 호수로 돌아온 제자들

마가의 다락방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돌아옵니다.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의 서쪽 연안에 자리잡은 매우 도시였습니다. 지난 달은 제자들에게 충격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만 해도 백성들의 환호와 기대에 눈빛을 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맥없이 잡히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절망과 고통 속에 있을 ,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끝나고 이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일이 없었다는 , 평온한 갈릴리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말에 원래 어부였던 제자들이 하나 베드로를 따라 나섭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고기를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과는 별개로 제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헤야 할지 막막하고 열매가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보는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 왔는가? 원래는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서 성령이 내려오실 때까지 기도에 전념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입니다. 성경 마태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제자들 보고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기를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것이라고 하여라”( 28:7) 
 때에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가서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그러면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28:10)

 

그러니 단순히 제자들이 낙담하여 자신들의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왔다고 해석하면 그건 반쪽짜리 해석일 겁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했을까요? 어차피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2. 기억의 소환

제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어부였습니다.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90미터 떨어진 뭍에서 사람이 소리칩니다. “여러분, 무얼 잡았나요?” 새벽녘 갈릴리 호수의 고요함을 깨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에 다들 흠칫 놀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별거 없습니다.” 그러자그럼,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져 보세요. 그럼 잡힐 겁니다.” 배의 오른편이나 왼편이나 얼마나 차이가 나겠습니까? 밤새 어부들이 오른편 왼편 던져보지 않았을까요? 말을 들은 제자들은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왠일입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생선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장면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4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5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6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누가복음 5:4-6)

 

뿐만이 아닙니다. 물고기를 잡아 오자 벌써 예수님은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생선을 굽고 계셨고, 빵도 이미 가져다 놓으셨습니다. 밤새 고기잡느라 허기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시면서 먹을 것을 건네 주십니다. 여러분, 장면은 무엇과 유사한가요? 맞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오는데, 장소가 디베랴 호수 근처였음을 우리는 있습니다. 모세 시대 만나의 기적을 재현하여 진정한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 사건이었습니다. 때는 제자들이 돌아다니면서 빵과 생선을 나누어 주었죠.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3 전의 사건들이 제자들에게 떠오릅니다.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과의 처음 만난 장면과 백성들의 흥분에 기대의 소리를 다시 기억해냅니다. 아마 예수님은 이런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다시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같습니다.

 

3. 새로운 출발선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제자들, 그들에게는 다시 출발선에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다시 주어져야 했습니다. 지난 3년이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에서 따라다녔던 기간이라면, 이제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들로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새로운 출발선에 섭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갈릴리로 부르셨습니다. 유사한 장면을 연출하심으로써 제자들을 다시 처음의 마음가짐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4. 나가며_나의 사명은?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분명있습니다. 때로는 사명을 새롭게 하고 다시 출발선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실패하기도 하고, 잘못된 기대와 기준으로 다루다 보니 어긋난 결과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시 부르심의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목표, 새로운 목적, 새로운 사명이 생겼던 때가 있었나요? 무엇이었나요? 누군가는 가족을 섬겨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겠다. 교회를 살리겠다. 청소년들을 섬기겠다. 주변에 가난한 이웃을 섬기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만물의 보호를 위해 애쓰겠다. 이런 결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꿈과 비전을 주십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기억들이 있을 압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의 결심은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세상의 관점과 생각에 의해 왜곡되거나 오염되기도 합니다. 나의 동기가 예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 우리가 해야 일이 있습니다.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다시 처음 부르셨던 예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 추억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대체로 예수님과의 깊이 있는 만남의 시간은 수련회와 같은 집중된 말씀 공부와 공동체적 활동을 통해 경험됩니다. 그런데 지금 코로나 때문에 그것이 막혀 있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이미 경험했던 분들이 그때를 회상하면서 하루 이상의 시간을 떼어놓고 충분히 기도와 묵상으로 들어가면 좋겠다고 추천드립니다. 성경과 기도책 그리고 노트를 들고 하루 피정을 떠나는 겁니다. 곳에서 오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거죠. 나의 갈릴리는 어디인가? 내가 처음 만난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등의 질문을 던집니다. 이렇게 다시 출발선에 서는 겁니다. 부디 예수님이 차려주시는 아침식사를 맛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갈릴리에 돌아온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을까요?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매번 허탕을 치고 있는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요?   

 

3.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에, 그분이 나에게 주신 소명/사명/목표/목적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지금 소명을 따라 살고 있나요? 

2018. 02. 25. 

 

0. 들어가며 

1) 가장 친한 친구? 

-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절친의 이름을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그 친구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생각해봅시다. 

 

마지막 고별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별설교에서는 예수 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 이렇게 4가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오늘은 두번째인데요. 함께 머무는 교제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말씀을 읽어봅시다. 

 

1. 비유로 말씀하시다

1) 참포도나무(1절), 포도나무(5절), 가지(2절), 열매(2절)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비유합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동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이사야5:7). 출애굽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사사시대에도 실패했습니다. 왕정국가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라는 강력한 제국에게 망했구요. 남유다는 그보다 더 강력한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지금 로마에 속국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참포도나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십니다. 그분이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과거 전통에 묶여 있는 성전중심의 유대교, 회당중심의 유대교, 율법주의 유대교를 따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진정한 성전이요. 안식일의 주인되신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입니다.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게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가지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2) 비유의 기능_유진 피터슨의 비유로 말하라

- 비유의 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있으라. 거하라. 라고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는 확장성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는 사물과 개념을 이어줍니다. 비유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힘이 있습니다. 비유는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유는 보통 새로운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년 동안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우리가 간과한 것을 알아채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혹은 우리가 그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잊어버렸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유진피터슨, 비유로 말하라, IVP, p. 38). 

 

- 고정관념을 깨는 비유 

이렇듯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의 딱딱히 굳은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개념과 생각들을 마음속에 심어두십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포도나무로 여겼던 유대 사람들은 참 포도나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국가를 대체하는 한 인물의 등장에 놀랍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정도 수준의 사람이 되어야 가능한 발언입니다. 

 

- 비유의 현대화 

이 비유의 이미지가 우리 내면에 남아야 제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최상의 효과를 냈을 겁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현대 사회에 오셔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신다면 어떤 비유를 사용하실까요? 

나는 와이파이요 너희는 핸드폰이니 너희가 내게 연결되어 있으면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단다. 

나는 스킵이요 너희는 스윕퍼니 내 말에 머물러라 그러면 하우스안에 들어올 것이니... 

나는 버스 운전자요 너희는 승객이니 내 안에 머물러라 도착지점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니...

다양한 비유가 가능하겠지요. 여러분이 만들어보세요. 

 

2. 함께 머무는 교제 

1) 붙어 있으라(4절), 내 안에 머물러라(4-5절),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10절) 

결국 예수님의 비유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크게 보면 하나지만, 자세히 띁어보면 세 가지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붙어 있으라’입니다. 이 표현은 비유 때문에 나온 표현입니다. 나무와 가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드러나는 표현이죠. 두번째는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거니와 결국 버림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내 안에 머무는 것의 좀더 구체적 표현은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무엇이 흘러갑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물과 양분이 가지를 타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제자에게 전달되는 물과 양분은 바로 사랑이었던 겁니다. 

 

2) 계명을 지키는 삶(10절) 

여기서 요한은 한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게 10절입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바로 머무는 것은 사랑하는 거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면서 상상으로만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내가 가지니까 그래 꼭 붙어 있어야지’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1차원적입니다. 

그분을 구원자로 주님으로 만나는 것, 즉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주님 안에 머물게 되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나무에 가지가 붙는 과정이죠. 그 다음에 그분의 사랑안에 머무는 것이 두번째 단계이며 그 농도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안에 머물게 되는 두번째 단계의 핵심 동력은 형제자매 사랑입니다. 형제자매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면 주님의 사랑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상상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홀로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자매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분께 계속 붙어 있는 겁니다. 이쯤되면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열매가 어떤 건지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맞습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흘러 가지 끝에 열매로 맺힙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3. 교제의 시작_인격적 만남 

저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의 첫번째 단계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대학생 사역을 하다보면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경우도 많고, 인격적인 만남이 뭔지도 모릅니다.

 

1) 비인격적 만남

우선 인격적인 만남의 반대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예 맞습니다. 비인격적인 만남이겠죠. 

- 기계적 만남_알고리즘적 만남

기계적 만남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비인격적일 겁니다. 정해지는 대로, 프로그래밍 대로 반응하는 '쉬리'하고의 만남이 기계적 만남이겠죠. 정해진 알고리즘에 의해 바둑을 두는 그래서 결국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와의 만남이 기계적 만남일 겁니다. 인공지능과의 만남, 기대되는 만남이지만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건 프로그래밍된 결과물과의 만남이니까요. 이 만남에서는 우연을 오류라고 부릅니다. 이 만남에서의 반응은 수많은 데이타와 알고리즘의 산출물일 뿐입니다. 기계적 만남의 대표격이 바로 무속신앙, 기복신앙입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공을 들인만큼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 동물적 만남_본능에 충실한 만남

동물은 매우 본능적입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교미하고 싶을 때 교미합니다. 본능에 충실합니다. 본능과 본능이 만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충돌을 피하려고 평행선을 달립니다. 나는 나의 과업이 있고 상대는 상대의 과업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꿈과 열정이 있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비전과 열정이 있습니다. 굳이 조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긴 만났지만, 나에게 개입하는 걸 거부하는 만남을 동물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분을 내 욕구를 채우는 데 이용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계획으로 나를 조정할 의사는 없습니다. 내 본능, 내 욕구가 더 중요하니까요. 현대의 극단적 개인주의 신앙이 바로 동물적 만남입니다. 

 

- 위계적 만남_권위주의적 환경에서의 만남 

권위에 눌린 만남입니다. 북한 김정은을 만나는 느낌이랄까요. 고대 왕정시대의 왕과의 만남입니다. 질문도 못합니다. 불평도 못합니다. 거절도 못합니다. 앞의 상대는 무서운 분입니다. 이분에게 찍히면 내 앞날이 깜깜합니다. 각 분야의 대부격인 사람들입니다. 연극계는 이윤택이라는 분이 오랫동안 성추행을 해 왔는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도 너무 위대하시고 초월적인 분이라서 그분의 말씀에 토를 달지 못합니다.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대면해서 거부의사를 밝히지도 않습니다. 슬금슬금 피할 뿐입니다. 소위 말하는 오순절계통의 영적 카리스마 운동을 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느끼는 만남입니다. 아니면 극단적 보수적인 교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느끼는 만남입니다.  

 

2) 인격적 만남

- 지적, 감정적, 의지적 교류 

인격은 서로를 알아가고 정보를 나눕니다. 그 뿐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교류합니다. 교감이라고 하죠. 예수님은 자신을 알리시고 제자들을 알아가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자들과 감정을 교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을 알리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을 느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감정도 우리가 느끼길 원하십니다. 더불어 그분은 어떤 뜻과 계획과 의지가 있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뜻과 계획과 의지에 대해서도 존중하십니다. 이것이 서로 교류가 될때, 우리는 인격적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질문, 불평, 거부할 수 있는 권리 

인격적 만남에는 세 가지 권리가 함께 따라갑니다.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을 막고 질문을 못하는 만남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궁금하면 물어볼 수 있는 관계가 인격적 관계입니다. 비권위주의적 관계입니다. 좀더 세게 나가면 불평할 수 있는 권리도 인격적 관계에서는 가능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삶에 닥친 수많은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좀더 세게 나가볼까요. 때로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격적인 예수님은 거부 자체를 못하게 막는 분이 아닙니다. 정 하기 싫으면 안하겠다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강제하거나 억지로 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잘 짜여진 기계에 불과합니다.

 

 

4. 나가며

1)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라. 

핵심은 이겁니다.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십시오. 참포도나무에 제대로 붙으십시오. 그동안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었다면 이제 인격적인 만남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인격적 만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성경을 다독했다고 인격적 만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제 3월이 시작됩니다. 청소년기를 마치고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는 여러분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건 한 번 설교를 듣는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참포도나무되신 그분께 붙어봅시다. 그래서 그분안에 머물러 있어봅시다. 인격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종교행위가 아닌 살아있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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