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8.

 

[본문_요한복음 21:1-14] 

1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2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사람이 자리에 있었다. 3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하니, 그들이우리도 함께 가겠소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밤에는 고기를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4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 잡았습니다.” 6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7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저분은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였다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8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작은 배를 채로, 고기가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 90미터)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9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11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3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 14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이번이 번째였다.

 

[설교]
0.
들어가며
4
월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당시의 가장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해왔던 그들의 깊은 기대와 믿음은 송두리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3년간의 기대가 바뀔 , 누군가는 크게 저항하고 싶었을 겁니다. 완전히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그들을 새로운 출발선으로 데려왔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새로운 출발선에 봅시다. 

 

1. 디베랴/갈릴리 호수로 돌아온 제자들

마가의 다락방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돌아옵니다.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의 서쪽 연안에 자리잡은 매우 도시였습니다. 지난 달은 제자들에게 충격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만 해도 백성들의 환호와 기대에 눈빛을 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맥없이 잡히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절망과 고통 속에 있을 ,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끝나고 이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일이 없었다는 , 평온한 갈릴리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말에 원래 어부였던 제자들이 하나 베드로를 따라 나섭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고기를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과는 별개로 제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헤야 할지 막막하고 열매가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보는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 왔는가? 원래는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서 성령이 내려오실 때까지 기도에 전념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입니다. 성경 마태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제자들 보고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기를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것이라고 하여라”( 28:7) 
 때에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가서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그러면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28:10)

 

그러니 단순히 제자들이 낙담하여 자신들의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왔다고 해석하면 그건 반쪽짜리 해석일 겁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했을까요? 어차피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2. 기억의 소환

제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어부였습니다.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90미터 떨어진 뭍에서 사람이 소리칩니다. “여러분, 무얼 잡았나요?” 새벽녘 갈릴리 호수의 고요함을 깨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에 다들 흠칫 놀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별거 없습니다.” 그러자그럼,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져 보세요. 그럼 잡힐 겁니다.” 배의 오른편이나 왼편이나 얼마나 차이가 나겠습니까? 밤새 어부들이 오른편 왼편 던져보지 않았을까요? 말을 들은 제자들은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왠일입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생선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장면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4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5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6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누가복음 5:4-6)

 

뿐만이 아닙니다. 물고기를 잡아 오자 벌써 예수님은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생선을 굽고 계셨고, 빵도 이미 가져다 놓으셨습니다. 밤새 고기잡느라 허기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시면서 먹을 것을 건네 주십니다. 여러분, 장면은 무엇과 유사한가요? 맞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오는데, 장소가 디베랴 호수 근처였음을 우리는 있습니다. 모세 시대 만나의 기적을 재현하여 진정한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 사건이었습니다. 때는 제자들이 돌아다니면서 빵과 생선을 나누어 주었죠.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3 전의 사건들이 제자들에게 떠오릅니다.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과의 처음 만난 장면과 백성들의 흥분에 기대의 소리를 다시 기억해냅니다. 아마 예수님은 이런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다시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같습니다.

 

3. 새로운 출발선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제자들, 그들에게는 다시 출발선에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다시 주어져야 했습니다. 지난 3년이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에서 따라다녔던 기간이라면, 이제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들로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새로운 출발선에 섭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갈릴리로 부르셨습니다. 유사한 장면을 연출하심으로써 제자들을 다시 처음의 마음가짐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4. 나가며_나의 사명은?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분명있습니다. 때로는 사명을 새롭게 하고 다시 출발선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실패하기도 하고, 잘못된 기대와 기준으로 다루다 보니 어긋난 결과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시 부르심의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목표, 새로운 목적, 새로운 사명이 생겼던 때가 있었나요? 무엇이었나요? 누군가는 가족을 섬겨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겠다. 교회를 살리겠다. 청소년들을 섬기겠다. 주변에 가난한 이웃을 섬기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만물의 보호를 위해 애쓰겠다. 이런 결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꿈과 비전을 주십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기억들이 있을 압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의 결심은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세상의 관점과 생각에 의해 왜곡되거나 오염되기도 합니다. 나의 동기가 예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 우리가 해야 일이 있습니다.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다시 처음 부르셨던 예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 추억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대체로 예수님과의 깊이 있는 만남의 시간은 수련회와 같은 집중된 말씀 공부와 공동체적 활동을 통해 경험됩니다. 그런데 지금 코로나 때문에 그것이 막혀 있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이미 경험했던 분들이 그때를 회상하면서 하루 이상의 시간을 떼어놓고 충분히 기도와 묵상으로 들어가면 좋겠다고 추천드립니다. 성경과 기도책 그리고 노트를 들고 하루 피정을 떠나는 겁니다. 곳에서 오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거죠. 나의 갈릴리는 어디인가? 내가 처음 만난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등의 질문을 던집니다. 이렇게 다시 출발선에 서는 겁니다. 부디 예수님이 차려주시는 아침식사를 맛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갈릴리에 돌아온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을까요?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매번 허탕을 치고 있는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요?   

 

3.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에, 그분이 나에게 주신 소명/사명/목표/목적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지금 소명을 따라 살고 있나요? 

2018. 02. 25. 

 

0. 들어가며 

1) 가장 친한 친구? 

-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절친의 이름을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그 친구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생각해봅시다. 

 

마지막 고별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별설교에서는 예수 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 이렇게 4가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오늘은 두번째인데요. 함께 머무는 교제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말씀을 읽어봅시다. 

 

1. 비유로 말씀하시다

1) 참포도나무(1절), 포도나무(5절), 가지(2절), 열매(2절)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비유합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동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이사야5:7). 출애굽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사사시대에도 실패했습니다. 왕정국가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라는 강력한 제국에게 망했구요. 남유다는 그보다 더 강력한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지금 로마에 속국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참포도나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십니다. 그분이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과거 전통에 묶여 있는 성전중심의 유대교, 회당중심의 유대교, 율법주의 유대교를 따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진정한 성전이요. 안식일의 주인되신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입니다.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게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가지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2) 비유의 기능_유진 피터슨의 비유로 말하라

- 비유의 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있으라. 거하라. 라고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는 확장성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는 사물과 개념을 이어줍니다. 비유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힘이 있습니다. 비유는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유는 보통 새로운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년 동안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우리가 간과한 것을 알아채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혹은 우리가 그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잊어버렸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유진피터슨, 비유로 말하라, IVP, p. 38). 

 

- 고정관념을 깨는 비유 

이렇듯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의 딱딱히 굳은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개념과 생각들을 마음속에 심어두십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포도나무로 여겼던 유대 사람들은 참 포도나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국가를 대체하는 한 인물의 등장에 놀랍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정도 수준의 사람이 되어야 가능한 발언입니다. 

 

- 비유의 현대화 

이 비유의 이미지가 우리 내면에 남아야 제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최상의 효과를 냈을 겁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현대 사회에 오셔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신다면 어떤 비유를 사용하실까요? 

나는 와이파이요 너희는 핸드폰이니 너희가 내게 연결되어 있으면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단다. 

나는 스킵이요 너희는 스윕퍼니 내 말에 머물러라 그러면 하우스안에 들어올 것이니... 

나는 버스 운전자요 너희는 승객이니 내 안에 머물러라 도착지점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니...

다양한 비유가 가능하겠지요. 여러분이 만들어보세요. 

 

2. 함께 머무는 교제 

1) 붙어 있으라(4절), 내 안에 머물러라(4-5절),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10절) 

결국 예수님의 비유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크게 보면 하나지만, 자세히 띁어보면 세 가지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붙어 있으라’입니다. 이 표현은 비유 때문에 나온 표현입니다. 나무와 가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드러나는 표현이죠. 두번째는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거니와 결국 버림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내 안에 머무는 것의 좀더 구체적 표현은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무엇이 흘러갑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물과 양분이 가지를 타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제자에게 전달되는 물과 양분은 바로 사랑이었던 겁니다. 

 

2) 계명을 지키는 삶(10절) 

여기서 요한은 한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게 10절입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바로 머무는 것은 사랑하는 거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면서 상상으로만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내가 가지니까 그래 꼭 붙어 있어야지’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1차원적입니다. 

그분을 구원자로 주님으로 만나는 것, 즉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주님 안에 머물게 되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나무에 가지가 붙는 과정이죠. 그 다음에 그분의 사랑안에 머무는 것이 두번째 단계이며 그 농도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안에 머물게 되는 두번째 단계의 핵심 동력은 형제자매 사랑입니다. 형제자매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면 주님의 사랑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상상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홀로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자매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분께 계속 붙어 있는 겁니다. 이쯤되면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열매가 어떤 건지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맞습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흘러 가지 끝에 열매로 맺힙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3. 교제의 시작_인격적 만남 

저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의 첫번째 단계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대학생 사역을 하다보면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경우도 많고, 인격적인 만남이 뭔지도 모릅니다.

 

1) 비인격적 만남

우선 인격적인 만남의 반대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예 맞습니다. 비인격적인 만남이겠죠. 

- 기계적 만남_알고리즘적 만남

기계적 만남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비인격적일 겁니다. 정해지는 대로, 프로그래밍 대로 반응하는 '쉬리'하고의 만남이 기계적 만남이겠죠. 정해진 알고리즘에 의해 바둑을 두는 그래서 결국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와의 만남이 기계적 만남일 겁니다. 인공지능과의 만남, 기대되는 만남이지만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건 프로그래밍된 결과물과의 만남이니까요. 이 만남에서는 우연을 오류라고 부릅니다. 이 만남에서의 반응은 수많은 데이타와 알고리즘의 산출물일 뿐입니다. 기계적 만남의 대표격이 바로 무속신앙, 기복신앙입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공을 들인만큼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 동물적 만남_본능에 충실한 만남

동물은 매우 본능적입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교미하고 싶을 때 교미합니다. 본능에 충실합니다. 본능과 본능이 만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충돌을 피하려고 평행선을 달립니다. 나는 나의 과업이 있고 상대는 상대의 과업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꿈과 열정이 있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비전과 열정이 있습니다. 굳이 조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긴 만났지만, 나에게 개입하는 걸 거부하는 만남을 동물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분을 내 욕구를 채우는 데 이용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계획으로 나를 조정할 의사는 없습니다. 내 본능, 내 욕구가 더 중요하니까요. 현대의 극단적 개인주의 신앙이 바로 동물적 만남입니다. 

 

- 위계적 만남_권위주의적 환경에서의 만남 

권위에 눌린 만남입니다. 북한 김정은을 만나는 느낌이랄까요. 고대 왕정시대의 왕과의 만남입니다. 질문도 못합니다. 불평도 못합니다. 거절도 못합니다. 앞의 상대는 무서운 분입니다. 이분에게 찍히면 내 앞날이 깜깜합니다. 각 분야의 대부격인 사람들입니다. 연극계는 이윤택이라는 분이 오랫동안 성추행을 해 왔는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도 너무 위대하시고 초월적인 분이라서 그분의 말씀에 토를 달지 못합니다.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대면해서 거부의사를 밝히지도 않습니다. 슬금슬금 피할 뿐입니다. 소위 말하는 오순절계통의 영적 카리스마 운동을 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느끼는 만남입니다. 아니면 극단적 보수적인 교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느끼는 만남입니다.  

 

2) 인격적 만남

- 지적, 감정적, 의지적 교류 

인격은 서로를 알아가고 정보를 나눕니다. 그 뿐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교류합니다. 교감이라고 하죠. 예수님은 자신을 알리시고 제자들을 알아가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자들과 감정을 교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을 알리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을 느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감정도 우리가 느끼길 원하십니다. 더불어 그분은 어떤 뜻과 계획과 의지가 있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뜻과 계획과 의지에 대해서도 존중하십니다. 이것이 서로 교류가 될때, 우리는 인격적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질문, 불평, 거부할 수 있는 권리 

인격적 만남에는 세 가지 권리가 함께 따라갑니다.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을 막고 질문을 못하는 만남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궁금하면 물어볼 수 있는 관계가 인격적 관계입니다. 비권위주의적 관계입니다. 좀더 세게 나가면 불평할 수 있는 권리도 인격적 관계에서는 가능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삶에 닥친 수많은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좀더 세게 나가볼까요. 때로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격적인 예수님은 거부 자체를 못하게 막는 분이 아닙니다. 정 하기 싫으면 안하겠다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강제하거나 억지로 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잘 짜여진 기계에 불과합니다.

 

 

4. 나가며

1)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라. 

핵심은 이겁니다.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십시오. 참포도나무에 제대로 붙으십시오. 그동안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었다면 이제 인격적인 만남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인격적 만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성경을 다독했다고 인격적 만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제 3월이 시작됩니다. 청소년기를 마치고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는 여러분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건 한 번 설교를 듣는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참포도나무되신 그분께 붙어봅시다. 그래서 그분안에 머물러 있어봅시다. 인격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종교행위가 아닌 살아있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1. 4. 11. 

 

[본문_요한복음 20:19-31_새번역] 

19 , 주간의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말씀을 하시고 나서,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손을 만져 보고,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설교]
0.
들어가며
이번 달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다뤄보고 싶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몰약을 가져다 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커밍아웃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제자였던  이스카리옷(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공은 제자들에게 넘어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어떻게 소화했을까요? 과연 이들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왔을까요?  

 

1. 도마의 열망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무고한 예수님을 하룻밤 사이에 잡아다가 사형까지 집행한 유대인들의 무도함에 치를 떨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알고 제자들에게 말하자,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무덤을 살피고 사건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자신과 대화를 나눴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숨죽이며 유월절, 무교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두려움 속에는 평안, 평화가 있을 없습니다. 두려움은 극도의 자기 보호를 낳고, 극단적 자기 보호는 타자에 대한 배척과 혐오를 낳습니다. 배척과 혐오는 결국 전쟁의 굴레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두려움의 결과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두려움은 살인을 낳지만, 국가의 두려움은 전쟁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져서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불신(이스카리옷 유다가 배신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으로 가득 제자 공동체에 찾아오십니다. 자신이 살아 났다는 사실을 확증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성령님을 숨으로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22-23) 

 

그러나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돌아오니 다락방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다락방에 오셨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고 기쁨에 얼굴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도마는 처음에는 믿을 없었습니다. 몰래카메라 같기도 했지만, 사실 그런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마의 정서는 어땠을까요? 다른 제자들이 놀리는 같아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 빠진 같아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25절의 도마의 말은 그의 정서를 대변해 줍니다. 

 

25_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도마는 악에 받친 같습니다.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는 믿을 없으니, 직접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봐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도마는 정말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자신에게도 보여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열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10제자만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여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마도 믿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는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직접 보고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직접 만져보라고 말했을 , 도마는 만져보기는 커녕, 자기를 지명하시면서 말을 걸어오신 예수님께 감격하여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2. 꾸짖음 vs. 격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이 장면에서 도마를 꾸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27)라거나,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8) 말씀을 비추어 ,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꾸짖음 보다는 격려의 늬앙스로 읽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전체 제자들 앞에 번째로 오신 상황에서 도마에게 정색을 하며 화난 목소리로 꾸짖었다고 보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했던 베드로에게도니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부드러운 질문으로 다가가셨습니다. 도마는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고 싶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런 도마에게 엄하게 꾸짖었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28절의 말씀은 일종의 축복과 예언의 말씀입니다. 요한은 보지 않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 삶을 살았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30-31절이 이를 대변합니다. 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요한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고, 믿는 사람들에겐 영생이 선물로 주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도마에게 했던 예수님의 말씀은 꾸짖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사역해야 하는 제자들에 대한 격려요, 앞으로 보지 않고 믿게 수많은 제자들을 위한 축복이었던 겁니다.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로 도마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봅시다. 

 

3. 나의 나의 하나님

도마의나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베드로의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과 쌍벽을 이룹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유대적 배경에서 최고의 찬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의그리스도메시야 헬라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신적 동일성을 나타내는 유대식 어법입니다. 그에 반해, ‘나의 나의 하나님 당시 로마/헬라 세계에서 최고의 칭송입니다. “ 오직 로마 황제에게만 있는 표현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다신교 세계에서 유일신과의 개인적 관계를 드러내는 파격적인 어구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죽였던 로마의 권력의 무서움을 뒤로하고 이제 진정한 세상의 주님은 오직 예수님임을 공식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표현은 앞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무수한 이방인들의 신앙고백 최고의 모델이 됩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4. 나가며_나의 고백은?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참조 20:16). 그러나 이제 그들의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세상의 주인이신 오직 밖에 없는 유일한 하나님이 이제나의주님으로나의하나님으로 관계가 형성됩니다. 호칭의 변화는 인생의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누군가를 나의 신랑/신부라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나의 아빠/엄마로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나의 사장/대표로 부르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순간, 우리 인생 최대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진실된 고백이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형식에 치중된 종교 문화 생활에 다름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고백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생일대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단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분을 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축복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제자들의 정서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중에서도 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2. 도마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봅시다. 어떤 어조와 말투로 말씀하시는지 서로 나눠 봅시다.    

 

3.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나요? “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님, 종교 창시자로서의 예수님으로 부르고 있나요? 그분을 진심으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예상됩니까? 

2018. 02. 18. 

 

0. 들어가며 

앞으로 4주간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순절도 시작되었는데요. 2월 14일에 교회력에서는 재의 수요일이라 해서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미사와 예배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동안 요한복음 14-16장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에 대해 다루려고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무작정 참회하고 무작정 슬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현재적인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사순절에 더 어울리는 설교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리즈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혹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가 함께 회개하면서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원리

- 사랑의 원리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을 것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포하시고 그 나라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시고 가르치시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습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며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통치의 기본 원리를 명령이라는 형태로 제시하셨는데요. 요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13:34-35) 

맞습니다. 마치 헌법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주 중요한 원리인 나라입니다. 

 

2) 명령 vs 방법

그런데 이런 명령만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명령만 있으면 가정이 운영이 되겠습니까? 평창 올림픽은 평화 올림픽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원리만 있으면 실제로 그것이 이뤄지겠습니까? 원리를 천명하고 당위를 제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입니다. 원리, 당위, 명령 등은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을 그려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신과 목적과 의미를 표현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평창 올림픽이 평화 올림픽이 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협력해야 합니다. 미국과 일본도 협조해야 합니다. 중국과 러시아도 동조해야 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서로 적대행위를 잠시 멈추고 대화 모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 올림릭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방법이 중요합니다.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사항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방식,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구현되는지를 알려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나 누가복음의 평지설교나 마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등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을 드러내 줍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그 명령과 원리를 실천해낼 수 있을까요? 저는 요한복음 14-16장이 그 방법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그래서 몇번에 걸쳐 이 본문을 묵상해 보시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어떤 방법들을 제시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 네가지 방법

14-16장까지 여러번 묵상하고 생각해보면, 크게 4가지 방법론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성령님의 도우심. 이 네가지를 앞으로 4주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바른 신학입니다. 

 

함께 본문을 읽어볼까요? 

잘 읽으셨습니다. 

바른 신학을 이루는 핵심 구절은 14장 6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그냥 앞뒤 문맥을 빼고 읽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구절이건 전후 문맥을 떼어 내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로 허공을 떠돌게 됩니다. 철저히 문맥 속에서 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1. 근심에 쌓인 이유

1절에 보니 예수님이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근심을 파악하고 계십니다. 왜 제자들은 근심하고 있을까요? 

 

1) 이 안에 배반자가 있다(13:21) 

첫째로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배반자가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음이 괴로우셔서, 환히 드러내어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요 13:21)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는 순간에 12명의 제자들을 보고 하신 말씀 치고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13:28)고 요한은 적고 있습니다. 

 

2) 나는 너희를 떠날 것이다(13:33) 

둘째로 더욱 더 큰 충격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날 것이라는 선언에 있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요13:33)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3년가까이 동행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 지도자들을 굴복시킨 뒤에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로마를 점령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할 일은 다윗처럼 이스라엘를 통일하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독립시켜서 전 세계에 가장 위대한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 믿었고 따라서 예수님이 곧 그와 같은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에 차있었습니다. 그런데 떠난다니요!! 제자들은 수군거렸을 겁니다. 

 

3) 수제자 베드로도 나를 부인할 것이다(13:38)

근심하게 된 세번째 이유는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할 거라는 예수님의 예언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13:38)

제자들 중에 가장 인정받고 있었던 수제자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란 말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라면 근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 근심에 둘러쌓일 만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걱정스럽게 근심되게 만드는 말들을 원투 어퍼컷을 날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 상황에서 새계명이라고 제시하시는 것 자체가 매우 모순적입니다. 가장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새 계명을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창 올림픽 개막식이나 폐회식에서 그런 선포를 하시면 분위기가 맞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새계명을 선언하십니다. 정말 예수님은 엉뚱한 구석이 많습니다. 제가 제자라고 해도 마음에 근심이 쌓일 만합니다. 

 

=>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 

좋습니다. 근심있는 마음을 아시고 자신을 믿으라고 하시니 일단 믿어봅시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전혀 사람 속을 모른채 자기 멋대로 말하는 분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심을 시켜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분을 신뢰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2. 아파트 vs. τοπον(place, position)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뭔가 이상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이게 무슨 소리죠? 저 같으면 그들의 정서를 공감하면서 신뢰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그래 너희들 마음속에 근심이 많은 것을 내가 잘 안다. 아까전에 내가 했던 말들 때문에 더욱 그럴거야.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이미 모든 상황을 내가 잘 정리해 두었단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만 믿어’ 

이 정도가 상식적인 답변 아닐까요? 느닷없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라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의 심사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1) 아버지 집에는 방이 많다(2절) _성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 집(2:16)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 바로 성전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2:16) 라고 말씀하실 때의 아버지 집은 성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럼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톰라이트라는 유명한 신약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성전의 핵심 의미는 그곳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풀면,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성전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제자들이 있을 곳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 토폰을 마련하러 간다(2절) 

바로 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거할 곳,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거든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면서 통치히시는 하나님 나라에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다고 대답하고 있는 겁니다. 

 

- 정적인 개념 vs. 동적인 개념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있을 곳, 헬라어로 하면 토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요. 이 토폰이 단순히 장소적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할과 포지션이라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있을 곳은 제자들이 가만히 앉아있거나 서 있는 곳이 아니라 제자들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곳을 함께 의미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거주하는 집, 아파트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는 역할과 포지션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토폰은 정적인 개념만이 나이라 동적인 개념도 함께 전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존재하다 그리고 활동하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존재를 통해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새로운 역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함께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이 드러날 때, 새로운 도성, 새 예루살렘이 이 땅 가운데 펼쳐질 때, 제자들은 각각의 역할과 위치를 부여받을 겁니다. 

 

3)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3절) 

-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기

새로운 하나님 나라는 그냥 앉아서 놀고 먹고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게 될 겁니다. 온 우주를 그분과 함께 정의로운 사랑으로 통치할 겁니다. 이게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첫번째 명령의 회복이 일어나는 그림입니다. 

 

=> 미래로의 초대 

근심에 쌓여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큰 그림을 그려주십니다. 단순히 그들의 정서를 위로해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는 말은 그들을 토닥이는 심리 삼담사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는 말은 세상의 끝을 위해, 새하늘과 새땅을 위해,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예수인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믿고 신뢰하라는 겁니다. 그분은 세상의 끝을 보고 있습니다. 그 미래로 제자들을 초대하는 겁니다. 

 

이 미래를 믿으십니까? 정말 믿습니까? 

 

3. 도마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_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현실주의자, 실증주의자, 경험주의자 도마로서는 이해가 안 될 겁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아주 정직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는 그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제시하신 미래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갇혀 삽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건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마 처럼 물어야 합니다. 주님! 정말 주님이 그리시는 그림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럼 그분은 이렇게 답하실 겁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이게 바른 신학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1) 길_방법 

그분이 방법이 되십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그분의 인격과 성품과 삶과 가르침,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겁니다. 

 

2) 진리_정체성 

그분은 방법 뿐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 하나님 나라 그 자체, 진리 그 자체가 됩니다. 세상의 처음과 끝이 되십니다. 창조주가 되신 그분이 모든 진실을 알고 계십니다.

 

3) 생명_목적

더불어 그분이 바로 우리 모든 숨쉬는 것들의 목적이 되십니다. 그분이 바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없이는 우리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참 생명이 되십니다. 

 

길, 진리, 생명 이 셋중에 오늘 본문이 집중하는 건 바로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도록 만드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이게 바른 신학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능케 하는 건 그 명제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우리는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만물을 회복시키겠다는 녹색당의 정강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겠다는 어떤 노력이나 정치이데올로기도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냅니다. 

 

4.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_예수 중심의 신학

결국 바른 신학이란, 예수 중심의 신학을 의미합니다. 구약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추출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빠진 하나님 나라 설명은 껍데기입니다. 

 

1) 신학, 교제, 기도, 성령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네가지가 있다고 초두에 말씀드렸습니다.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그중에 오늘 바른 신학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2) 신학이 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 

예수 중심의 신학이 바른 신학입니다. 이게 무너지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몇가지 원리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정의, 사랑, 공평, 자비, 희년, 자연보호, 인권, 약자보호, 내부고발 등등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떠 올릴 때 가져다 쓸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개념 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낼 수 없습니다. 

 

- 예수 중심의 신학을 위한 노력

이번 한주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한 노력을 조금만 더 기울여 봅시다. 구체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분에 대한 책을 읽는 것도 좋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라는 책을 한번 살펴보세요. 아니면 성경을 깊이 연구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큐티 정도가 아니라 연구를 해 보는 겁니다. 

 

이번 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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