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1일 일요일 

 

0. 들어가며

- 김희중 집사의 고백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안따깝기고 하고, 분노하게 되기도 한 사건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전전직 대통령의 최최최측근 집사인 김희중씨가 자신이 모셨던 MB의 국정원 특별활동비 상납 의혹과 관련한 사실들에 대해 검찰에 자세히 이야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검찰 조사의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더 이상 그 집사는 그 대통령안에 있지 않은 것 처럼 보입니다. 정치 논평할 생각은 없구요. 다만, “~안에 있다”라는 의미를 생각하며 살다보니까, ‘김희중 집사는 더이상 MB 안에 있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말입니다. 

 

- “~안에 있다” 

고통스런 한 주를 보냈습니다. “~안에 있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요한복음 전체에서 힌트가 될 만한 구절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핵심중에 하나인, 삼위 하나님의 확장에 대해 말씀을 나눠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이 확장되고,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이 확장되어, 결국 복음이 확장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나눴습니다. 그리고 제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도대체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자고 숙제를 내드렸습니다. 서로 짝을 지어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

 

묵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다시 연구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나눠볼까 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봤습니다. 

 

1. 말씀의 공명 

제일 먼저, ‘~안에 있다’라는 말은 말씀이 공명한다라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위에 존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의도, 뜻이 예수님 존재의 본질로 요한은 본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번 생각해봐도, 요한의 첫 서술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고 예수님에 대한 책을 낸다고 했을 때, 어떤 문장을 제일 먼저 쓸까요? 

 

‘85년전 12월 예수님이 태어났다.’

‘수십년 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살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처음이야기를 기록에 남기고 싶다.’ 등등 

 

마치 역사를 쓰듯, 혹은 교과서의 첫문장을 쓰듯 시작했을 겁니다. 

그러나 요한은 전혀 다른 서술방식을 가져다가 씁니다. 지극히 철학적이요, 창세기적이요, 시적인 방식으로 첫문장을 터뜨립니다. 

예수님의 본질을 폭로해버립니다. 첫문단에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기승전결 뭐 이런 거가 없습니다. 처음 시작하자마자 하이라이트, 고음을 찍는 겁니다. 핵심을 질러버립니다. 뭐라고요? 

“예수는 하나님 곧 말씀이다” 

 

2) 따라장이 예수님 

요한복음 전체에서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말)을 그대로 따라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주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요. 대표적인 구절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3:34_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7:16-18_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8:26_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대로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8:28_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2:49-50_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 

14:10_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14:26_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16:13_그러나 그 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속된말로 하나님 따라장이였던 겁니다. 

그분의 말씀, 가르침, 교훈, 설교 이 모든 것은 자기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그에게 넣어주신 말과 뜻과 의도와 목적이었습니다. 

 

3) 말씀의 공명으로서의 ‘안에 있음’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첫번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존재에 뿌려지고 공명하고 새겨지고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이 우리의 뇌에 자각됩니다. 단순히 뇌의 문장으로만 남지 않고 분석되고 해석되어 그 의미가 이해됩니다. 이해된 말씀이 묵상과 상상을 통해 온 몸과 맘으로 공명합니다. 그렇게 우리 존재에 새겨집니다. 그러면 그 말씀에 자연스럽게 머물러 있게 됩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어서, 현재 우리의 삶이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하나님 나라 역사에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되고, 그 기독교 세계관적 노랫소리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뇌와 마음에 울려퍼진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말이 바뀝니다. 말의 내용이 바뀝니다. 말투가 바뀌는 게 아니다. 어휘와 내용이 변화됩니다. 새로운 구조와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그분의 말이 들어와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창조, 언약, 통치, 성육신, 십자가, 부활, 내주, 중보, 은사.... 등의 단어와 그 의미가 존재에서 공명합니다. 이 말들과 그 의미가 지속해서 우리 존재로부터 노래되어 나옵니다. 

이것이 첫번째 입니다. 

 

2. 행동의 공명 

그런데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1) 행동의 공명 

’~안에 있다’의 두번째 의미는 바로 행동의 공명입니다. 

이것도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5:17_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5:19_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5:30_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한다

6:38_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8:29_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8:55_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10:38_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14:11_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그분이 시키시는 일,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이 공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극단적으로 보면, 너무나 의존적인 자녀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독립적으로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0살이 넘어 본격적인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한 뒤에도 오직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말만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도 따라하고 계십니다. 

 

말과 행동이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의 이분법은 하나님에게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이 그분의 의지이며 그분의 행동입니다. 그분의 말은 창조의 힘을 지닌 말입니다.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요새처럼 말과 행동이 분리된 때도 드물겁니다. 수많은 말들이 SNS상에 발표되고 떠돌아다니고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번복되고, 했던 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포장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과 행동이 공명되고 있었던 예수님은 그분의 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거짓이 아닌 참으로 드러나도록 그대로 행동하고 계시는 장면을 성경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특히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애쓰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계명 지키기(14:20-21) 

행동의 공명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0-21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요 14:20-21). 

 

예수님은 ‘~안에 있음’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계명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계명을 받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고, 예수님의 사랑도 받습니다. 계명을 받아 지키는 것, 즉 예수님과의 행동의 공명이  예수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의미는 단순히 그분의 말만 반복한다고 되는 것이 압니다. 예수님의 단어와 문장과 논리만 사용하여 말로 가르치는 것을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말합니다. ‘계명을 지켜라.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거다. 내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들과 계명들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너희도 내가 준 계명을 받아서 그대로 지켜라.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3) 사랑의 공명(13:34-35)

그럼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요?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요 13:34-35). 

 

지난 주에 말씀드렸죠? 예수님이 자신의 설교에 도취되어 기도하신 것 같아고 말입니다. 

13장-16장까지 마지막 다락방 설교에서 그분은 엄청난 일을 하신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들으면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바로 새계명을 주겠다는 그분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계명 외에 다른 새계명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새계명을 주시더니만, 나와 아버지가 서로 안에 있다고 하시더니, 제자들에게도 그 연합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장에서 그런 기도를 드리신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 같이,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입니다. 즉 정리하면, 행동의 공명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도 그걸 하신 것이고요. 제자들도 그걸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예 맞습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이건 감정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라라는 행동을 공명하도록 요청하는 겁니다. 

이끌림, 매혹, 애착, 애정 등의 개념만으로도 포착되지 않습니다. 매우 구체적인 행동으로 요청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해야 할 말이 많은데 그건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책 한권을 추천드립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사랑과 정의” 라는 책입니다.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를 이분이 정리하고 계시더라구요. 혹시 저랑 같이 읽고 책 나눔 하고 싶으시면 말씀해주세요. 

 

3. 상징의 공명_성만찬(6:55-57)

‘안에 있다’의 마지막 의미는 상징의 공명입니다. 

6:55-57_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 말도 정말 충격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특히 ‘~안에 있다’라는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 읽다가 이 구절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매번 형식적으로 하던 그 성만찬에 이런 의미가 있는 줄 새삼 깨닫게 된 겁니다. 

왜 예수님이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계속 지키도록 하셨는지, 왜 초대교회가 성만찬 예식을 매번 모일 때마다 진행했었는지, 왜 이제까지의 교회 역사 속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그토록 많은 시간 토론하고 논쟁하고 대화를 나눴는지 이해가 가더라구요. 

 

그렇습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상징적 예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공명하는 사람, 그분의 행동에 공명하는 사람은 바로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식이 필요없지 않습니다. 상징의 공명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몸과 피를 먹는 상징의 공명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상징, 이미지, 로고는 인간의 존재와 기억과 사고 활동에 필수적입니다. 

모든 언어는 상징으로 구성됩니다. 

수많은 상징들이 쌓여 우리 인간의 의식을 구성합니다. 

상징으로 단순화, 이미지화, 추상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사물과 우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상징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즉 그분의 살과 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장로교는 성만찬을 특별한 절기에 주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일년에 3-4번에 걸쳐 성만찬예식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미국의 한 교회는 매주 성만찬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카톨릭 교회들도 매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주 그분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자주 먹는 게 좋습니다. 문제는 그 예식 자체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죠. 

말씀과 행동이 공명되지 않은 상징은 그 자체가 형식이요 우상이 됩니다. 

그렇다고 성만찬을 등한히하거나 무시하거나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됩니다. 

상징도 계속 우리 속에서 공명해야 합니다. 

 

4. 나가며

오늘은 여러 말씀들을 찾아봤습니다. 아마 너무 복잡하다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사용한 그 단어의 의미를 요한복음을 통해 찾으려고 했던 시도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안에 있다’는 말씀의 공명, 행동의 공명, 그리고 상징의 공명입니다. 

그분의 언어와 문장과 뜻과 의도가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계명의 실천이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상징적 행위가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서로 하나되어 연합되신 그 하나됨에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안에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말씀과 행동과 상징이 공명을 이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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