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1:1-18] 

1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야고보가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3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5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6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그런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8그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9비천한 신도는 자기가 높아지게 것을 자랑하십시오.  10부자는 자기가 낮아지게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해가 떠서 뜨거운 열을 뿜으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져서,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 골몰하는 동안에 시들어 버립니다.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13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17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설교]
0.
들어가며
5
월이 찾아왔습니다. 1 이상 지속되는 코로나 상황 때문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5월이 주는 푸르름의 기운이 하나님의 은혜를 연상시킵니다.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 날과 부모님 날이 있는 달입니다. 감사의 달이기도 하죠. 스승의 날도 있어서 감사한 분들을 찾게 되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한국의 5월은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고 초록의 물결이 산하를 덮습니다. 사실 코로나만 아니면 더없이 밝고 행복한 달이 될텐데 말입니다. 

 

안따깝게도 인도에서는 코로나 일일 확진자가 40만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세계 최대의 백신 생산 시설을 가지고 있지만, 백신 접종도 느리고 의료시설도 부족합니다. 의료 대란이 일어나서 병상 확보가 안되고 산소 마스크가 없어서 제대로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음의 문을 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적 지원이 필요하고, 부족한 백신도 빨리 공급되어야 것입니다. 

 

이런 비현실적 상황 앞에서 세계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묵상한 야고보서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야고보서는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공동체적, 실천적 메세지가 가득한 편지입니다. 5 , 야고보서를 통해 우리 개인과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1. 세계 기독 공동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면서 중요한 회의의 의장 역할을 감당했었죠.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에도 관여했습니다.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리더십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세계 기독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1세기 편지

그럼 편지를 쓰게 되었을까요? 질문이 핵심 질문입니다. 도대체 야고보는 세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편지를 썼을까요? 야고보서 전체를 살펴보면서 답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오늘 본문에 국한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시험 당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장 먼저,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시험 혹은 시련을 받고 있습니다. 지중해를 비롯하여 로마의 통치권 아래 있는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시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부류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편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통 신앙을 버리고 예수를 메시야로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생각했으며 신성 모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편은 다신론과 황제 숭배 사상에 젖어 있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일신론을 설파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상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존재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핍박을 받을 밖에 없었습니다. 유명한 네로 황제의 박해를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억압을 경험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런 결과인데, 빈곤이 찾아옵니다. 사회적 유대관계가 넉넉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경쟁에서 도태됩니다. 처음에는 부자였어도 점점 가난이 찾아옵니다. 사회적으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있던 재산도 점점 줄어듭니다. 

핍박과 빈곤, 가지가 초대교회의 구체적인 시험거리였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의 상황

3. 인내하라  

이런 핍박과 빈곤의 시험과 시련 앞에선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야고보의 번째 당부는 바로, “인내하라였습니다. 

 

 4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조금 상투적입니다. 뻔합니다. 시험이 있으니 인내하고 견디라니요. 왠지 권면을 따르고 싶지 않아집니다. 이게 우리의 자연스런 반응일 있겠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시련의 시기에 가장 적합한 메시지가 인내라는 사실을 뒤집기란 쉽지 않습니다. 빨리 포기하라, 과도하게 리액션하라, 모른 회피하라…. 아마도 요즘 나오는 제목으로 수는 있겠지만, 진실에 가깝지는 않습니다. 빨리 포기하면, 신앙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과도하게 리액션하게 되면, 싸움이 커집니다. 모른척 회피하면 피해가 더욱 커집니다. 박해 앞에서, 빈곤이라는 시험 앞에서 그들은 너무 쉽게 포기해서도, 과도하게 대적해서도, 모른 뒤로 숨기도 부적절합니다. 일단은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고통스런 상황을 인정하고 견뎌내야 합니다. 야고보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 아프지만 참고 인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https://blog.daum.net/lifeword01/1314

4. 지혜를 구하라  

번째 당부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입니다. 5-7절을 읽어봅시다.

 

5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6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그런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8그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시험, 시련, 고난의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분은 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의 잠언은 지혜의 보물 창고 같은 글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전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지혜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말고도, 구약의 모세 오경을 비롯한 성경의 이야기들이 인생의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도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지혜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지혜의 근본되신 그분 자신이 스스로 내려오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진정한 지혜이십니다. 세상을 살아갈 지혜 자체요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혜의 원천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지혜를 주십니다. 

 

고난의 , 시련의 , 시험을 때를 만났을 ,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의 원천되신 예수님을 분명하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5. 나가며_시험 속에서 

지금 기독 청년들은 다양한 압박 속에서 살아갑니다. 코로나 때문에 신앙 공동체의 와해를 경험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에 청년들도 도매금으로 넘어가 덤태기를 쓰고 있습니다. 교회는 코로나 방역에 협조하지 않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이웃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있다는 이미지가 쌓이고 말았습니다. 지난 달에 장신대에서 실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비개신교인들이 바라보는 교회의 이미지는이기적이다입니다. 비개신교인 응답자의 76% 이렇게 생각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주간 리포트  제 92호 (2021.4.23. 자), 7페이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정립하기에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다원주의, 상대주의가 디폴트가 되었습니다. 과학와 신앙이 헷갈립니다. , , 동성애, 인권, 페미니즘, , 외교, 정치 등등 이루 말할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슈들이 있는데, 신앙인으로서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어떤 것이 성경적인가에 대해 수많은 답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유명 유투버들의 생각이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것이 바른 길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이 시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식과 비트코인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성경적 대응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청년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비단 청년들만의 문제는 아니겠으나, N 세대라며 스스로 많은 것을 포기해 왔던 청년세대들이 코로나 때문에 더욱 빈곤의 삶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기독 청년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재정적 압박은 청년들은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시간이 없는데, 교회 생활, 신앙 생활에 돈과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야고보서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고 견디고 인내하라, 그리고 지혜를 아낌없이 주시는 나에게 지혜를 구하라. 

존버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까지 버틴다는 말이죠.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는 존버해야 합니다. 끝까지 버텨내야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가능할 것입니다. 그분의 지혜를 구하며, 기도하면서 존버하는 겁니다. 지혜롭게 존버하는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지혜를 구하는 겁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수련회를 있는 것도 아니고, 전체가 만나서 집회를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이 주신 지혜로 그동안 우리 청년 공동체는 여러 위기들을 그럭저럭 넘어 왔습니다. 줌에서 수련회도 했고, 온라인 도서관도 했고, 책나눔, 성경 개론도 진행했고, 매주 예배도 드려왔습니다. 돌아보면 변화하는 시기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인내해왔습니다.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며 버텨왔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앞으로도 위기의 시기를 여러분과 함께 지혜를 구하며 끝까지 인내하고 싶습니다. 함께 버티자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하길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현재 내가 겪는 시험은 무엇인가요? 어떤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나요?    

 

2. 한국교회가 혹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시험과 시련은 무엇인가요?  

 

3. 야고보는 인내하며 지혜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나요?  

2018. 3. 11. 

 

요한복음 16:5-15(새번역)

5. “그러나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서 아무도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고,

6.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8.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9.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10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11.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0. 들어가며 

- 성령하면 떠오르는 색깔은? 그 이유는?

 

4주동안 예수님의 고별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시리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인데요. 예수 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오늘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려면 이 네가지의 방법을 장착해야 하는데요, 마지막인 성령의 도우심은 이 모든걸 가능케하는 힘이 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the Helper, the Advocate)

예수님께서 가시면 보혜사께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옆에 계시면서 변호하시고 대변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동시에 모든 공간에 임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육체를 지니신 예수님은 육체의 한계를 지니고 계십니다. 3차원에 갇혀 계실 수 밖에 없죠. 그러나 성령님은 3차원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 헬라어 단어는 요한1서 2장 1절에서 예수님께 사용한 단어입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한1서 2:1). 

 

여기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과 예수님은 같은 본성을 가지고 계신거죠. 14장 16절에 보니까 ‘다른 보혜사’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1 παράκλητος는 예수님이시고요. 또 다른 παράκλητος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럼 이 παράκλητος 돕는 분, 변호사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1.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보혜사(8-11절)

먼저 그분은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이십니다. 8절입니다. 변호사 성령님은 세상이 무엇이 잘 못 되어 있는지 정확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세상을 대변하여 제자들을 고소하는 사단이라는 검사는 세상이 옳고 제자들은 그릇되었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변호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옆에서 변호하십니다. 어떻게 변호하실까요? 

사실 8-11절은 한번 읽어가지고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도 다각도로 연구하고 선배님들의 글을 읽고 학자들의 연구서를 읽으니까 그때서야 이해가 가기 시작하더라구요. 시작해봅시다. 

 

1) 죄에 대해(9절)

첫째는 죄에 대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세상이 말하는 죄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불트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이 이해하는 죄는 세상적인 표준과 이상, 즉 세상에 안전을 제공하는 것들에 반역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적인 안전망 전체를 의문시하고 또 다른 안전 장치를 열어 주는 계시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것, 그것이 진정 죄다”(Bultman). 

 

세상에서 말하는 죄는 불법적 죄와 윤리도덕적 죄로 구분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법률에 의거한 규정을 어길 때, 처벌을 받는 죄가 있겠죠. 그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지탄받게 되는 윤리도덕적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드러내는 죄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일종의 영적인 죄인데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 새로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는 겁니다. 불신, 교만, 자기중심성이 죄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신뢰와 겸손, 예수중심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세상은 불신과 교만과 자기중심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성령님은 이 죄를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이건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런 큰 윤리적 획을 그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를 이분법으로 구분해서 세상은 교회 밖이고, 그 교회 밖 세상의 죄에 대해 성령님께서 정죄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은 아주 잘 못된 생각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구역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으로 구분됩니다. 교회 밖이건 교회 안이건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세상입니다. 불신, 교만,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살아가고 있으면 그 사람이 교회안에 있건 밖에 있건 그는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결국 성령님은 그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실 겁니다. 

 

2) 의에 대해(10절)

둘째, 변호사 성령님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의에 대한 잘못을 깨우치실 겁니다. 그런데 논거가 좀 이상하지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라니요? 이게 무슨 논리입니까? 저도 이 구절에서 한참 헤맸습니다. 이 구절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로마에 팔았습니다. 결국 유대 지역를 통치하던 5대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못박았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못 박은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십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바로 부활과 승천이지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겁니다. 세상에 있으면 세상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이라고 말하고 다닐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 우편에 계십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이 증명하신 겁니다. 아버지께로 간 자가 의로운 겁니다. 모세가 의로운 거죠. 엘리야가 의로운 거죠. 그렇게 예수님이 의로운 겁니다. 

 

세상은 세상의 규정과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이죠.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를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사람들 상호간의 생명과 복지를 향상 시키는 방향으로 의로움을 정의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의롭다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온전한 인정을 받은 분이기때문이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의입니다. 

 

3) 심판에 대해(11절)

셋째로 심판에 대해서도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겁니다. 세상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예수님을 심판했습니다. 유죄 선고를 내린 거죠. 그러나 성령님은 확실히 알게 하실 겁니다.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 세상이요, 그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이라는 사실입니다. 

 

=> 프레임짜기 

이렇게 변호사 성령님은 통념과 편견을 깨부수고 완전히 새로운 재판을 만드십니다. 기존의 법정에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논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승리합니다. 세상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립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판을 다시 짭니다. 프레임을 재구축하는 거죠. 

 

평화 올림픽 vs 평양 올림픽

이런 것이 프레임입니다. 평창 올림픽 때, 남북 선수단의 공동입장을 두고 누구는 평화 올림픽이라고 했고, 누구는 평양 올림픽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을 너무 많이 배려한다고 그건 평화가 아니고 평양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체제 선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프레임 싸움입니다. 

 

사진 프레임

셀카 찍을 때, 어떤 각도로 찍어야 얼짱이 나옵니까? 

세상의 윤리적 사법적 프레임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면 세상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으로 사태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2.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보혜사(13-15절)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기도 하시지만, 더 나아가 진리로 이끄시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1) 진리 되신 예수님께로(13절)

13절을 볼까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분도 예수님처럼 앵무새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자신 맘대로 말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듣는 말씀만 하십니다. 

 

요한은 지속적으로 진리에 대해 말합니다. 그건 철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인격이신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ex) 신입생 홍보와 전도를 위해 캠퍼스에 달았던 현수막_”진리는 인격이다.”  

 

2) 예수님을 영광되게(14-15절)

결국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실 겁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죠. 성령님은 예수님의 것을 받아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14-15절이 말하는 바입니다. 

 

성령님의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개인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잘못된 영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조직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거짓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불의의 영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높아져야 합니다. 

 

베뢰아 김기동이 주장했던 성령은 거짓의 영입니다. 음란의 영입니다. 

홍대새교회를 지어 다윗도 범죄했지만 회개하니 하나님이 용서하셨더라라고 말하면서 뻔뻔히 목회를 하고 있는 전OO목사의 성령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은 성령님의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길 원하십니다. 

그외는 그냥 그리스도의 제자일 뿐입니다. 예수의 증인일 뿐입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종 어느어느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이런 종류의 설명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예수님 중심으로 그분을 신뢰하면서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3. 보혜사 성령님의 핵심 역할(요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14:26) 

 

1)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심 

보혜사 성령님의 핵심 역할은 분명합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함께 지낼때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제대로 알게 됩니다. 육성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3년 동안 아무리 말로 가르쳐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임을 바꾸고 패러다임을 쉬프팅하고 관점을 바꾸려고 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2) 신약 성경의 핵심 저자_성령님 

그런면에서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 성경의 주저자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게 하신 겁니다. 새로운 패러다임과 프레임을 장착시켜주셨습니다. 그렇게 성경이 기록된 겁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작품인 겁니다. 

 

우리가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3) 성령 충만이란? 

그럼 여러분 성령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논리에 따르면, 성령충만은 예수님의 삶과 말씀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분을 영광되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공명하고 행동이 공명하고 그분의 삶의 이미지가 공명하는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분이 영화롭게 된다면 자기 자신은 철저히 낮아져도 된다는 겸손한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4. 나가며 

- 자기중심성, 교만, 불신의 죄의 결과

자기 중심적으로 살며, 교만하게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서, 자신의 능력과 돈과 권력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뉴스를 우리는 거의 매일 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약자인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우리는 미투 운동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국가를 사유화하고 부정부패와 뇌물수수를 일삼는 권력자들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작년 3월 10일 헌법재판관들은 당시 최고 권력인 대통력 박근혜를 파면했습니다. 지금 들리는 뉴스에 따르면, 만약 헌법재판소의 결과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기각으로 나오면, 촛불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의혹이긴 하지만,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 없이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위수령을 발동해서 시민들을 진압하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겁니다. 만약 그 의혹이 사실이었다면 제2의 518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위기였습니다. 

이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성, 교만, 불신이 가져다 주는 악의 구조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의 구조를 떠받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교회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예수님은 이걸 깨고 성령 충만한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자기 중심성을 깨고, 교만을 깨고, 불신을 깨고, 예수 중심, 겸손, 신뢰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깨우치시고, 예수님께만 영광돌리기 원하시는 성령, 그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성경연구 방법이나 성경개론 같은 것을 함께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회] 

1. 성령님에 대해 혹시 편향된 생각이나 이미지로 그분을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과 성령님께 고백합시다. 성령님이 어떤 분인지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2. 그분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이해를 깨우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함으로써 예수님만을 영광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할 문제]

1. 평소에 생각하던 성령님의 이미지와 오늘 설교에서 나눠진 성령님의 이미지와 어떤 부분이 비슷하고 어떤 부분이 다른가요? 

 

2. 대한민국 법률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3. 보혜사 성령님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무엇인가요? 기존에 알고 있던 성령 하나님의 핵심 역활과 같은가요? 다른가요? 다르다면 어떤 부분이 다른지 함께 나눠봅시다. 

 

4. 성령 충만한 삶은 어떤 삶인가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영역이 무엇입니까? 

 

5.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한 결단을 기도로 표현해봅시다. 

 

*** 참고 도서

존 스토트, 성령 세례와 충만, IVP

존스토트, 성령세례와 충만, IVP

 

 

2021. 4. 25. 김혁수 

 

[본문_요한복음 21:15-25] 

15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어린 떼를 먹여라.” 16예수께서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쳐라.” 17예수께서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먹여라. 18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것이다.” 19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나서베드로에게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0 베드로가 돌아다보니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베드로가 제자를 보고서예수께 물었다. “주님,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2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23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24 모든 일을 증언하고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 하신 일은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기록한 책들을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0. 들어가며
4
월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당시의 가장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감정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은 마지막 이야기를 베드로에게 할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등장시킵니다. 이제 제자들의 활약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마음의 죄책감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베드로의 죄책감을 다뤄주십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1. 호숫가 산책

지난 주에 우리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생선을 구워주시고 빵을 주시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 아침 식사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아침은 그야말로 감동이었습니다. 찢어질 잡힌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서 퍼득대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심장도 물고기들처럼 퍼득댑니다. 새로운 소망으로 차오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분이 이렇게 버젓이 살아서 제자들을 음식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분이 이제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섬겨주십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다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그런데 쪽에 베드로가 앉아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100여미터 되는 호수를 헤엄쳐 왔습니다(21:7). 하지만 음식이 주어지는 내내 베드로는 불편했습니다. 자기가 섬겨야 하는데, 제자가 스승을 모시는 것이 당연한데, 그는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예전 같았다면, “예수님, 음식 제가 만들겠습니다. 서빙도 제가 하겠습니다. 모진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던 몸을 이끌고 직접 일하시다뇨? 제가 하겠습니다. 앉아 계십시오!” 이렇게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쪽에 가만히 앉아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기만 했습니다. 더이상 선생님으로 주님으로 부를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말로 배신하고 저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었으며, 심지어는 욕을 했었습니다.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제 다시 수제자 노릇을 하기에는 염치가 없습니다. 

 

아침을 먹은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산책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의 손을 잡고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서 걷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니가 나를 여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보다 사랑하느냐?” 비록 조용히 묻긴 했지만, 베드로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 들을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베드로는 살짝 고민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했던 자신이 과연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그의 성격상 고민을 이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요 주님,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시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떼를 먹여라. 방금 내가 먹였던 떼를 이제는 니가 먹이면 좋겠구나 

 

2. 기억의 치유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후계자로 베드로를 다시 지목하십니다. 그에게 떼를 맡기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자격지심도 있습니다. 말만 많고 실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욕하고 저주했던 자신이 과연 예수님의 후계자가 있을까요? 번도 아니라 번이나 부인했던 자신의 과오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 예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니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질문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질문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대답하고 나니까 현타가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질문을 받자 마음이 너무 복잡합니다. 자신이 울기 전에 부인할 것이라 예언하셨던 예수님 아닙니까. 자신의 행동과 말을 아는 주님이 다시 이렇게 물으니, 갑자기 바를 모릅니다. ‘예수님이 물어 보실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등등. 고민 끝에 답을 합니다. “주님께서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다.” 

 

점점 과거의 기억이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올라옵니다. 2 , 새벽 동터오는 시간에 어쩔 없이 예수님을 부인했던 참혹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질문에 답하면 답할수록 답답합니다. 그런데 번째 질문이 던져집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번의 질문을 던지는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안들려서 크게 듣고 싶어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의 대답에 신중에 신중을 더합니다. 정말 사랑하는지, 모든 과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스스로 답을 찾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가 모든 일과 모든 말을 알고 계십니다. 숨길 없습니다. 비록 실수가 있었지만, 저는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것까지도 알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진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랑만큼은 알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부끄러웠던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에게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번이나 말이죠. 대화는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는 듣고 있었습니다. 

 

3. 나를 따라라 

예수님이 베드로의 감정과 마음만 치유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입니다. 살펴보세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번이나 그의 떼를 먹이고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무너진 마음의 회복은 기억의 망각이나 무시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한 고백에서 일어납니다. 비록 실수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의 회복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시 수제자로서, 후계자로서의 사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베드로에게 용서는그래 괜찮아. 이해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용서는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였습니다. 이게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그동안도 계속 따랐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예수님이 사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4. 나가며_따르고 있는가?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나요? 정말 그런가요? 교회에 나온다고, 일주일에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과연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있을까요? 다르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인가요? 아님 교회의 교인인가요? 예수님을 따라 여행을 다니며, 예수님을 따라 고난도 당하는 그리스도의 제자 맞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맞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비록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회복의 기회를 주시고, 원래의 소명을 부여하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따라 오라고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충분히 그러실 분이십니다. 허기진 우리의 몸과 영혼에 음식을 주실 분이십니다. 제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의 죄책감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죄책감 때문에 그분에 대한 사랑고백을 못하시는 분이 있나요?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음식을 주시며 호숫가에 산책을 청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패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자신의 임무를 부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그분을 따를 있는 겁니다. 

 

과연 내가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다시 돌아봅시다. 그리고 혹시 실패했다면 다시 그분께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을 따라 나섭시다.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번이나 물어보십니다. 번째 물어보실 베드로의 생각과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2. 여러분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과거 실패에 대한 자책감, 미래 소명에 대한 두려움 등등 여러분의 마음 정서를 나눠주세요. 

 

3. 예수님은 우리에게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번 그분을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요? 

2018. 3. 4. 

 

0. 들어가며 

- 최근 나의 절실한 기도제목은? 

- 예수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성령의 도우심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세번째로 오늘은 뜻에 맞는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1. 예수님의 꼼수? 

-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4절) 

14장 14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기도하면서 이 구절을 외우고 또 외우고 읊조리고 또 읊조립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순간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하잖아~~’ 그렇게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급속도로 팽창했던 60-70년대의 신앙은 오중복음 삼중축복으로 대표되기도 하는데요. 물질과 건강의 축복이 간절했던 그 당시 서민들의 정서를 정확히 찔렀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구절도 큰 유행이었죠.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니 정말 신나는 일 아닙니까!!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보다 더 쉬운 일이죠.

 

- 정직한 사람은 안다.  

그런데 조금만 정직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 뒤에 갖다 붙인다고 해서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도 중환자실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매일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혹시 예수님의 꼼수?

그럼 오늘 성경 말씀은 포교활동, 전도활동에 유용하게 사용하라고 전해주신 예수님의 마켓팅 전략인가요? 예수님의 꼼수인가요? 그럴듯하게 말해놓고 실제는 그렇지 않는 다단계 같은 영업 전략인가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이건 구라구만. 에이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네. 초대교회에는 가능했겠지...’ 등등 여러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2. 빌립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문맥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이해는 마음에 와닿는 한구절 한구절 외우는 걸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런 성경 암송은 외우지 않는만 못합니다. 성경의 바른 이해를 방해합니다. 전후문맥을 꼼꼼히 따져야 합니다. 

 

14장을 쭉 훑어보면 일단 경험주의자 제자 도마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 물었고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죠. 목적이자 방법이 예수님이라고 그게 바른신학이라고 말씀을 나눴었죠. 이번엔 빌립입니다. 

 

1) 아버지를 보여주소서(8절)  

예수님이 ‘너희는 아버지를 이미 보았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성적이었던 빌립은 어안이 벙벙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사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한다는 예수님의 예언에 멘붕상태입니다. 베드로가 한쪽 구석에 앉아 멍때리고 있을 때, 다른 제자들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8절) 원래 요한의 제자였던 빌립은 영적인 갈망이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2) 내가 곧 아버지다(9-11절) 

그때, 약간 책망하듯이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랫동안 함께 있었는데 내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있다. 정 못 믿겠으면 내가 하는 일을 보면 알지 않겠니?’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제자들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인격이 수천년동안 이스라엘이 섬겨왔던 만군의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갑자기 여러분에게 다가가서 재림예수다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은 쉬운 결단은 아닙니다. 증인도 있고 증거도 있긴 하지만 증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 우리에게 말씀을 거십니다. ‘2000년전 역사속에 존재했던 한 인물인 예수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 믿음이 가장 먼저 필요합니다.  

 

3. “내 이름으로”(13절) 

여러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주겠다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내 이름으로’ 입니다. 이건 주술이 아닙니다. ‘아브라카다브라’ ‘수리수리마수리’ 같은 주술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문맥에서 ‘이름’은 곧 그의 영광을 구하고 정확하게 그를 위해 말하는 사람들, 정말로 그의 인증을 받은 대리인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교 마술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영적 세력을 조작하려고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성경배경주석, p. 346) 

 

1) 바른 믿음(10-11절) 

첫째, in the name of Jesus는 바른 믿음을 의미합니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른 믿음입니다. 12절 시작부분에 이렇게 이야기하시죠. ‘나를 믿는 사람은....’ 맞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속에 실존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말이 아닌 거 아시겠죠. 그정도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 역사적 실존 인물이 유대교 경전인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른 믿음이죠. 이 믿음에 도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분을 좋은 윤리적 가르침을 전하는 인류의 대스승이나 성인급으로 받아들이는 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유일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in the name of Jesus는 이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2) 예수님의 대사(12절) 

둘째, 12절을 잘 읽어볼까요. 예수님보다 더 큰 일들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병고침과 귀신이 쫓기는 현상이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일어납니다. 전 세계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됩니다. 이 제자들은 단순히 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사들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한 특사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세계 곳곳으로 증폭시키는 일을 하는 대사들입니다. 이 정체성이 in the name of Jesus에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의미가 바로 대사, 특사라는 말입니다. 고대 근동의 용법이 그렇습니다. 

 

3) 아버지께 영광(13절) 

셋째, In the name of Jesus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13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더욱 높아집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바른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의 대사들의 간구를 들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지는 겁니다. 그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목적과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그 어구를 기도끝에 주문처럼 달아서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바른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기도는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내 욕망이나 내 가족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가 아닙니다. 

 

4. 기도 구절에 관한 고찰(14-16장_고별 설교내에서)

여기서 고별 설교 내에 있는 기도에 관한 내용들을 한번 쭉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고별 설교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드렸고, 그중에 세 번째가 ‘뜻에 맞는 기도’인데 14장 13-14절 두 절에서만 나오면 너무 적은 분량이잖아요. 사실은 16장까지 계속 곳곳에서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17장은 아예 대놓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이기도 하구요. 

 

1)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5:7)

잘 살펴보면 여기도 전제 조건이 있음이 보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을 뒤에 붙이는 기도가 아닙니다. 참포도나무되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즉 말씀과 행동이 공명되고 그분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이 우리 안에 계속 공명하고 있으면, 무엇을 구하든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가 전제 조건입니다. 

 

2) 열매 맺는 대사(ambassador)_제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15:16)

여기서도 단순히 모든 개인적인 욕망을 다 채워주신다는 뜻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열매맺는 대사, 특사로 택하셨습니다. 열매 맺는 대사로 택하신 건, 이를 통해 기도의 응답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문장 구조를 잘 보셔야 합니다. 열매맺는 대사로 택한 것이 먼저 입니다. 그럴때 비로소 무엇이든 받는 기도가 가능해집니다. 

 

3) 고난 속 기쁨을 위해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16:23-24)

16장은 마지막 때에 관한 장입니다. 그 날은 고난이 최고조로 달할 때입니다. 핍박과 박해가 극에 달할 겁니다. 먼저는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걸로 박해가 시작됩니다. 그 뒤에는 로마 황제들이 박해가 주기적으로 지속됩니다. 그때를 위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주실 텐데,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맥락은 기쁨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게 없이는 고난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고통 속에 기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사실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4)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16:26) 

마지막으로 16장 26절에는 예수님만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아버지께 직접 간구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회복됩니다. 제사장과 제사를 통해서만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유대인에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여기면서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별 설교에서도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통속적 해석이 튼튼히 서있기는 어렵습니다. 조건이 있고, 목적이 있고, 강조점이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자판기처럼 대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동전을 넣고 기도제목을 누르면 응답의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식 기도는 위험합니다. 이교적입니다. 

 

5. 뜻에 맞는 기도란?_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은 바로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1) 바른 믿음과 바른 관계안에서 드리는 기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바른 믿음과 그분과의 바른 관계안에서 드리는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2) 그리스도의 대사의 신분으로 드리는 기도 

또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 그리스도 예수의 특사의 정체성과 자격으로 드리는 기도가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 이런 조건 하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이런 조건 하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예수님께서 응답하시기 위해 일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함께 응답의 선물을 주실 겁니다. 

 

6. 나가며_맹신을 벗고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오해를 벗어버리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말씀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가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가 정답입니다. 그분이 다 듣고 있다는 정답입니다. 그러나 우리 뜻대로 다 이뤄진다는 오답입니다. 그분의 뜻에 맞을 때 이뤄집니다. 이 분문 때문에 생긴 오해를 벗고 참으로 인격적이신 그분과의 관계로 나아갑시다. 조건에 다 맞지 않다하더라도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건 그분과의 교제에 있어 가장 기본입니다. 두려움없이 그분과의 기도로 나아갑시다. 다만 내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신다는 맹신만 없으면 됩니다. 오해를 벗어 버리고 기도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회 

1.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뤄주신다는 말씀을 오해했다면 오해했다는 고백을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혹여라도 이 말씀을 무시하거나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거나 거짓말로 치부하거나 했다면 회개하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말씀의 본뜻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도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  

 

2.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시다. 그분이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바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 예수 그리스도의 특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 참고 도서

김영봉, 사귐의 기도, IVP

김영봉, 사귐의 기도,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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