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6.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1:19-27] 

19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말하기는 더디 하고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20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25그러나 완전한 율법  자유를 주는 율법을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26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5
주부터 우리는 야고보의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참고 인내하라는 야고보의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적실한 메시지였음을 확인했습니다. 기독교 문화, 내부의 부패와 리더십의 부재, 코로나로 인한 공동체의 약화 등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그리스도인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시련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일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존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어진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분노를 더디하라

첫째, 분노에 조심하세요. 

어려움이 닥치고 시련이 몰려오면 분노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세계 그리스도인들도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공동체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힘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니까 분노를 하다보면 누군가의 말을 듣기 보다 자기 말을 빨리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분노하면 심장이 나대기 시작합니다.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 톤도 올라갑니다. 생각해서 말하지 않고 말을 하면서 논리가 만들어집니다. 때로는 공격적이고 감정이 섞인 논리적 비약이 있는 말도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감당이 안됩니다. 외부의 시련과 박해도 견디기 어려운데, 공동체 형제 자매의 분노의 폭언을 듣는 것은 더욱 상황을 힘들게 만듭니다. 

 

서점가에 보면, 분노하라는 메시지의 책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장하성 교수님은 그의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노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작가며 인권운동가인 스테판 에셀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제목이분노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의 불의한 문제앞에 분노해야 때가 있겠죠. 구약의 예언자도 분노했습니다. 예수님도 분노했죠. 그러나 그런 분노와 오늘 본문의 분노는 다릅니다. 뭐가 다르죠? 남의 말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가 다릅니다. 예언자의 분노나 예수님의 분노나 혹은 시대 인권 운동가의 분노는 남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생기는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분노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욕심에 이끌려 자기 열망의 좌절 때문에 생기는 화와 짜증을 곳곳에 다니면서 터뜨리는 사람들의 분노입니다. 

 

19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야고보는 듣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 발하는 분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 경청하는 사람들은 공감의 분노를 느끼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분노의 감정도 함께 느끼게 되죠. 때로 같이 화도내고, 전화도 하고, 문제제기도 합니다. 그런 분노는 그래도 정당화될 있는 공분이 있죠. 그러나 자신의 꿈과 목표, 욕구가 좌절되어서 불만이 쌓이고 쌓인 불만이 외부를 향한 분노로 폭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연발 속사포같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붓습니다. 때부터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는 자신이 우주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런 것이 공동체를 깨뜨립니다. 이런 분노는 연쇄적인 분노를 낳습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분노에 조심하라가 오늘 분문의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럼 번째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2. 말씀을 듣고 행하라

둘째, 말씀을 듣고 행하십시오. 

 

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시련과 고난 속에서 분노할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행하는 힘을 쏟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얼핏보면 분노에 대응하는 단어가 온유한 마음으로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맞죠. 그러나 메시지의 무게로 보면 분노에 대응하는 단어는 말씀을 듣고 행하라입니다. 분노하지 말고 구약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구약과 예수님의 말씀을 해설하는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라는 말입니다. 듣지만 말고 행동으로 옮기라고 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일종의 폭력적 행동입니다. 이걸 치유하고 대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라는 겁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고, 얼굴에 밥풀이 묻었다는 것을 거울을 통해 봤으면서도 금방 잊어버려서 밥풀을 떼지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22-24).

 

23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듣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운동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정기적으로 보겠다는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결심은 변화를 낳는데, 변화라는 것이 나의 습관과 관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새로운 습관과 관성이 생길 때까지는 본성적 저항과 거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렵죠. 그럼에도 우리는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지난 재정 강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걸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것입니다. 

 

분노하지 말라가 번째,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럼 번째는 무엇일까요? 

 

3. 경건

셋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십시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보았습니다. 바로 당시의 고아와 과부였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전쟁은 수시로 일어나고 밝혀지지 않은 범죄가 빈번했습니다. 남편,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과 과부들은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지금과 비교할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는 같습니다. 자기를 위해 분노하지 말고,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 죽음으로 몰리는 사람들을 위해 분노의 감정을 승화시켜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분출하십시오. 이것이 경건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좋은 경건입니다이렇게 말입니다. 경건은 말씀을 듣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데, 실천의 방향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어제 송청 운영위원회에서는 지난 겨울 수련회에서 전재윤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 그리고 지난 설성호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재정적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도울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펀드 혹은 기금을 조성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작은 실천이지만, 조금씩 시도해보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함께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4. 나가며 

야고보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전체가 통으로 엮여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뚝뚝 끊어져서 무슨 잠언집 같고 명언집 같은 인상을 주는데요, 야고보 시대의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야고보의 위치를 고려하면서 읽으면 점점 통합된 의미들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곱씹는 맛이 있는 편지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분노하지 마라, 말씀을 듣고 행하라, 그리고 참된 경건으로 나아가라. 이렇게 가지 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로 다가가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제대로 듣지도 않고 분노하고 짜증내는 우리의 성향과 죄성을 주님께 아뢰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우리 주변에 고난 받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도울 있는 우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요사이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요?     

 

2. 참된 경건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와 우리 공동체에게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가요?   

누가복음 19장 1-10절 

삭개오의 회심

2018. 2. 4. 김혁수 

 

0. 들어가며 

- 안OO 검사

지난 한주 저는 슬프고 부끄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월요일 JTBC 뉴스룸에서 서OO 현직 검사와의 인터뷰 장면이 방송을 탔는데요.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8년전에 성추행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추행한 사람이 바로 유력한 선배 검사였다는 인터뷰였습니다. 

어떻게 기소권과 수사권을 동시에 가진 검사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말인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더욱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던 것은, 성추행으로 지목당한 안OO 전 검찰국장이 한 대형교회에서 세례 간증을 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힘들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했는데, 그 간증을 듣고 사건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서OO 검사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회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회개, 회심, 용서받기 등등의 기독교적 용어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원래 설교해야할 본문을 내려놓고, 한주동안 이 주제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과 묵상을 했습니다. 

오늘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의 회심이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말씀을 읽어볼까요.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삭개오 이야기의 상황 

1) 삭개오는 누구인가? 

- 여리고의 세관장(1-2절) 

여리고는 국경도시였습니다. 구약에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에 처음 들어가는데, 그 첫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신약에도 베레아 지역과 유대 지역의 중간 도시였습니다. 국경을 넘어설 때 받는 관세나 판매세 등을 걷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여리고는 지금으로 말하면, 인천공항 세관 같은 곳이겠죠.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지역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헤롯대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죠.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따뜻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연평균 온도가 18도인 반면에 여리고는 연평균 온도가 25도입니다. 요사이 처럼 추운 날에는 제주도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 따뜻한 남쪽 나라... 헤롯에게 여리고가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역량도 많고 따라서 세금도 많이 걷히고 있었겠죠. 당시 로마는 세관장에게 입찰을 주었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세금을 걷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세금 공무원의 자격을 준 겁니다. 월급은 따로 없었습니다. 세금을 걷어서 자기 월급을 만들면 되는 구조였습니다.

 

이쯤되면 왜 사람들이 세리들을 성매매여인들과 함께 죄인이라고 말하는 줄 알겠죠? 세리들은 동족의 피 같은 돈을 긁어모아 그들을 강제로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추가로 걷은 세금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자들이 바로 세리들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세관을 맡은 세리장, 혹은 세관장이었습니다. 특별히 험한 꼴을 직접 보지 않고도 그는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민족을 배반하였지만, 그 댓가로 큰 부를 누렸습니다.

 

- 부자(2절) 

그래서 2절에서 그를 부자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뽕나무의 진실

그동안 우리는 이 뽕나무에 대해 잘 못 알고 있었는데요. 이 뽕나무는 우리가 흔히 보는 키가 작은 오디 열매가 맺히는 2미터 남짓한 뽕나무가 아닙니다. 이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돌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이며 키가 15-16미터까지 자랍니다. 뿌리부터 나무줄기가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올라가기도 쉬웠습니다. 원래 적군을 보는 망대 역할을 하는 나무로 심겨졌습니다. 

 

150센티미터 정도로 예상되는 작은 키를 가진 삭개오 여리고 지방국세청장님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오래부터 우리는 삭개오님의 적극적인 열성에 대해 칭찬하는 설교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마음에 집중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그것도 좋은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포인트를 짚어볼 생각입니다.

 

3) 공개적 죄인 

일단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른 유대인들이 삭개오 세리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7절입니다. 사람들은 세리장인 삭개오를 다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되았는지, 세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어떻게 자신들의 혈세가 고스란히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민족을 배신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죄인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은 로마 군인들을 대상으로 성을 팔았습니다.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동족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두 그룹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가장 큰 죄인들 중의 죄인이었던 것이죠. 

 

4)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했을까요? 왜 그에게 다가갔을까요? 뽕나무에 올라간 사람은 삭개오 뿐일까요? 올라가기 쉽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널려있는 돌무화과나무위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삭개오 뿐이었을까요? 왜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거신 걸까요? 이 질문을 해결해 보려면 전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30절에 보면, 돈많은 관리가 나타나 무엇을 해야 영생,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을 잘 지켰는지 물어보십니다. 그건 아주 잘 지켜왔다고 합니다. 그 부자 관리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제안하십니다. 

 

- 돈 많은 관리의 근심

그러나 이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 부자 관리는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어렵다, 과장법을 사용해서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씀합니다. 

 

-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깜짝 놀라죠. 계명을 잘 지키며 부자로서 사회적으로 덕망있는 관리자, 지도자인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니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_부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18장에 이어서 19장에 삭개오를 주목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부자를 구원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를 구원하십니다. 

삭개오와 부자관원과의 핵심적인 차이는 진정한 회심의 차이입니다. 부자관원은 자신의 돈이 아까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버렸습니다. 이게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자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삭개오의 회심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2. 삭개오의 회심 

1)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모심(6절)

삭개오의 회심의 첫번째 요소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매우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얼른 내려왔습니다. 어린이가 아닙니다. 청년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장년이겠죠. 그러니까 세리장을 하고 있겠죠. 다 큰 어른이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나무에서 거의 뛰어내리듯이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흥분과 기쁨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맞이하죠. 

“So he hurried and came down and received him joyfully”(ESV)
“in great excitement and joy”(NLT)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인격적 반응이 회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나의 죄인됨을 알고 오직 그분만이 나를 구원할 분임을 믿고 그분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회심에 있어 첫 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나의 죄만을 들쑤시는 죄의 고백은 바른 회심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이상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회심은 바른 회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회심의 첫번째는 그분에 대한 기쁨입니다. 

 

2)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는 것(8절)

삭개오의 회심의 두번째 요소는 바로 자신의 소유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돈이 너무 많다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그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강제적으로 뺏앗은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 그 어머어마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혹이나 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과 대중앞에 공표를 해 버린 겁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분의 가르침에도 호의적이고 적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삭개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신을 처분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3. 회심의 다양한 측면 

1) 회심이란? 

여러분 회심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제가 몇가지 선택지를 드려볼게요. 

- 죄를 인식하는 것 

- 죄를 뉘우치는 것 

-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

-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 

- 죄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는 것 

- 더이상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 선을 행하기 위한 노력하는 것 

 

=> 인식, 감정의 반응을 넘어선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회심이다. 

회심이란 터닝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과 애통만으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 (shub)는 “돌아서다. 되돌아오다. 도로 찾다. 회복하다”의 뜻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 (metanoein) 는 “방향전환”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회심은 죄의 습성과 죄된 방향으로의 진행을 멈추고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 및 진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터닝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죄를 인식하거나 뉘우치는 것을 넘어섭니다. 짐 윌리스, <회심> 에 나오는 정의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회심이 무엇인지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건 바로 돌이킴입니다. “뒤로 돌아 가”입니다. 돈과 안정을 위해 달려가던 삶을 멈추고 뒤돌아서 완전히 다른 방향,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2) 회심의 신비

회심에는 신비로운 요소가 분명있습니다. 회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사회문화적 존재인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마치 속옷처럼 입고 다니던 그 사회적 관습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중생, 곧 회심이 일어나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회심에서 인간의 결단과 결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회심은 돌이켜서 걸어가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로봇이 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방향을 틀고 새로운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입니다. 

 

3) 회심했는가? 

여러분 회심했나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 들이셨나요? 정말 그분이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는 분 맞습니까? 동시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가치에 따라 구체적인 결단이 있었습니까? 예를 들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까?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잘못된 관행과 불의에 대해 먼저 나서서 피해자에게 용서와 보상을 결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회심의 진정성은? 

- 앞으로의 말과 행동에 달렸다. 

저는 안OO 성도의 회심을 믿고 싶습니다. 그가 경험한 예수님에 대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분도 개인적으로야 꽤나 힘든 시기를 보냈겠죠.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겠죠. 그분이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제가 판단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회심이 진심이라면, 그가 진정성있게 회심을 했다면,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그의 말과 행동이 그의 회심의 진정성을 보여주게 될 겁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우리 국가 공동체가 정해놓은 법의 형벌을 담담하게 받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 문화적 교인들의 한계 

이건 안OO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터닝이 없는, ‘돌아서서 감’이 없는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죄의 회개를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에서 해결하면 된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눈물이 나오면 모든 죄가 사라졌다는 생각은 너무 주일학교적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에서 대형캠프에서 다루는 너무나 대중적인 관점입니다. 

죄는 지극히 사회적이며 관계적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는 경우도 태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렇다면 이제 그 받은 은혜를 힘입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게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무릎을 꿇어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쇼가 아니라 진심이 담겨야 합니다. 이렇게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힘도 내가 용서 받았기 때문이며, 용서를 비는 힘도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욱 이상적인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5:23-24_“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심지어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나올 때, 형제 자매 중에 원한과 원망이 있다고 생각이 들때는 예배드리는 도중에라도 그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한 뒤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회심은 하나님과만의 관계 회복에 제한 혹은 국한 되지 않습니다. 회심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5. 나가며

저는 큰 원리를 알려드린 겁니다. 케바케가 정말 많을 겁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벌써 돌아가셨거나, 연락이 두절인 경우도 있겠죠. 가해와 피해가 교묘하게 섞여 있어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용서구함이나 용서함이 성립되기가 어려운 경우도 다반사겠죠. 그건 함께 고민해봅시다. 무엇이 성경적으로 회심한다는 말인지 그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봅시다. 

 

하지만, 큰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회심은 그분을 기쁘게 맞이하는 겁니다. 회심은 자신의 소유를 베푸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회심ㄴ은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보상배상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인식과 감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회심은 “돌아서 감”입니다. 

 

 

*** 참고 도서

짐 윌리스, [회심] 

김영봉 목사, [숨어있는 하나님]

2021. 5. 2.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1:1-18] 

1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야고보가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3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5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6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그런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8그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9비천한 신도는 자기가 높아지게 것을 자랑하십시오.  10부자는 자기가 낮아지게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해가 떠서 뜨거운 열을 뿜으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져서,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 골몰하는 동안에 시들어 버립니다.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13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17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설교]
0.
들어가며
5
월이 찾아왔습니다. 1 이상 지속되는 코로나 상황 때문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5월이 주는 푸르름의 기운이 하나님의 은혜를 연상시킵니다.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 날과 부모님 날이 있는 달입니다. 감사의 달이기도 하죠. 스승의 날도 있어서 감사한 분들을 찾게 되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한국의 5월은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고 초록의 물결이 산하를 덮습니다. 사실 코로나만 아니면 더없이 밝고 행복한 달이 될텐데 말입니다. 

 

안따깝게도 인도에서는 코로나 일일 확진자가 40만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세계 최대의 백신 생산 시설을 가지고 있지만, 백신 접종도 느리고 의료시설도 부족합니다. 의료 대란이 일어나서 병상 확보가 안되고 산소 마스크가 없어서 제대로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음의 문을 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적 지원이 필요하고, 부족한 백신도 빨리 공급되어야 것입니다. 

 

이런 비현실적 상황 앞에서 세계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묵상한 야고보서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야고보서는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공동체적, 실천적 메세지가 가득한 편지입니다. 5 , 야고보서를 통해 우리 개인과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1. 세계 기독 공동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면서 중요한 회의의 의장 역할을 감당했었죠.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에도 관여했습니다.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리더십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세계 기독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1세기 편지

그럼 편지를 쓰게 되었을까요? 질문이 핵심 질문입니다. 도대체 야고보는 세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편지를 썼을까요? 야고보서 전체를 살펴보면서 답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오늘 본문에 국한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시험 당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장 먼저,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시험 혹은 시련을 받고 있습니다. 지중해를 비롯하여 로마의 통치권 아래 있는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시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부류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편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통 신앙을 버리고 예수를 메시야로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생각했으며 신성 모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편은 다신론과 황제 숭배 사상에 젖어 있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일신론을 설파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상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존재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핍박을 받을 밖에 없었습니다. 유명한 네로 황제의 박해를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억압을 경험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런 결과인데, 빈곤이 찾아옵니다. 사회적 유대관계가 넉넉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경쟁에서 도태됩니다. 처음에는 부자였어도 점점 가난이 찾아옵니다. 사회적으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있던 재산도 점점 줄어듭니다. 

핍박과 빈곤, 가지가 초대교회의 구체적인 시험거리였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의 상황

3. 인내하라  

이런 핍박과 빈곤의 시험과 시련 앞에선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야고보의 번째 당부는 바로, “인내하라였습니다. 

 

 4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조금 상투적입니다. 뻔합니다. 시험이 있으니 인내하고 견디라니요. 왠지 권면을 따르고 싶지 않아집니다. 이게 우리의 자연스런 반응일 있겠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시련의 시기에 가장 적합한 메시지가 인내라는 사실을 뒤집기란 쉽지 않습니다. 빨리 포기하라, 과도하게 리액션하라, 모른 회피하라…. 아마도 요즘 나오는 제목으로 수는 있겠지만, 진실에 가깝지는 않습니다. 빨리 포기하면, 신앙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과도하게 리액션하게 되면, 싸움이 커집니다. 모른척 회피하면 피해가 더욱 커집니다. 박해 앞에서, 빈곤이라는 시험 앞에서 그들은 너무 쉽게 포기해서도, 과도하게 대적해서도, 모른 뒤로 숨기도 부적절합니다. 일단은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고통스런 상황을 인정하고 견뎌내야 합니다. 야고보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 아프지만 참고 인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https://blog.daum.net/lifeword01/1314

4. 지혜를 구하라  

번째 당부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입니다. 5-7절을 읽어봅시다.

 

5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6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그런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8그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시험, 시련, 고난의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분은 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의 잠언은 지혜의 보물 창고 같은 글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전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지혜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말고도, 구약의 모세 오경을 비롯한 성경의 이야기들이 인생의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도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지혜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지혜의 근본되신 그분 자신이 스스로 내려오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진정한 지혜이십니다. 세상을 살아갈 지혜 자체요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혜의 원천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지혜를 주십니다. 

 

고난의 , 시련의 , 시험을 때를 만났을 ,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의 원천되신 예수님을 분명하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5. 나가며_시험 속에서 

지금 기독 청년들은 다양한 압박 속에서 살아갑니다. 코로나 때문에 신앙 공동체의 와해를 경험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에 청년들도 도매금으로 넘어가 덤태기를 쓰고 있습니다. 교회는 코로나 방역에 협조하지 않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이웃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있다는 이미지가 쌓이고 말았습니다. 지난 달에 장신대에서 실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비개신교인들이 바라보는 교회의 이미지는이기적이다입니다. 비개신교인 응답자의 76% 이렇게 생각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주간 리포트  제 92호 (2021.4.23. 자), 7페이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정립하기에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다원주의, 상대주의가 디폴트가 되었습니다. 과학와 신앙이 헷갈립니다. , , 동성애, 인권, 페미니즘, , 외교, 정치 등등 이루 말할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슈들이 있는데, 신앙인으로서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어떤 것이 성경적인가에 대해 수많은 답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유명 유투버들의 생각이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것이 바른 길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이 시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식과 비트코인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성경적 대응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청년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비단 청년들만의 문제는 아니겠으나, N 세대라며 스스로 많은 것을 포기해 왔던 청년세대들이 코로나 때문에 더욱 빈곤의 삶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기독 청년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재정적 압박은 청년들은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시간이 없는데, 교회 생활, 신앙 생활에 돈과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야고보서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고 견디고 인내하라, 그리고 지혜를 아낌없이 주시는 나에게 지혜를 구하라. 

존버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까지 버틴다는 말이죠.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는 존버해야 합니다. 끝까지 버텨내야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가능할 것입니다. 그분의 지혜를 구하며, 기도하면서 존버하는 겁니다. 지혜롭게 존버하는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지혜를 구하는 겁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수련회를 있는 것도 아니고, 전체가 만나서 집회를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이 주신 지혜로 그동안 우리 청년 공동체는 여러 위기들을 그럭저럭 넘어 왔습니다. 줌에서 수련회도 했고, 온라인 도서관도 했고, 책나눔, 성경 개론도 진행했고, 매주 예배도 드려왔습니다. 돌아보면 변화하는 시기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인내해왔습니다.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며 버텨왔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앞으로도 위기의 시기를 여러분과 함께 지혜를 구하며 끝까지 인내하고 싶습니다. 함께 버티자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하길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현재 내가 겪는 시험은 무엇인가요? 어떤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나요?    

 

2. 한국교회가 혹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시험과 시련은 무엇인가요?  

 

3. 야고보는 인내하며 지혜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나요?  

2018. 3. 11. 

 

요한복음 16:5-15(새번역)

5. “그러나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서 아무도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고,

6.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8.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9.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10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11.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0. 들어가며 

- 성령하면 떠오르는 색깔은? 그 이유는?

 

4주동안 예수님의 고별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시리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인데요. 예수 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오늘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려면 이 네가지의 방법을 장착해야 하는데요, 마지막인 성령의 도우심은 이 모든걸 가능케하는 힘이 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the Helper, the Advocate)

예수님께서 가시면 보혜사께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옆에 계시면서 변호하시고 대변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동시에 모든 공간에 임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육체를 지니신 예수님은 육체의 한계를 지니고 계십니다. 3차원에 갇혀 계실 수 밖에 없죠. 그러나 성령님은 3차원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 헬라어 단어는 요한1서 2장 1절에서 예수님께 사용한 단어입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한1서 2:1). 

 

여기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과 예수님은 같은 본성을 가지고 계신거죠. 14장 16절에 보니까 ‘다른 보혜사’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1 παράκλητος는 예수님이시고요. 또 다른 παράκλητος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럼 이 παράκλητος 돕는 분, 변호사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1.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보혜사(8-11절)

먼저 그분은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이십니다. 8절입니다. 변호사 성령님은 세상이 무엇이 잘 못 되어 있는지 정확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세상을 대변하여 제자들을 고소하는 사단이라는 검사는 세상이 옳고 제자들은 그릇되었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변호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옆에서 변호하십니다. 어떻게 변호하실까요? 

사실 8-11절은 한번 읽어가지고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도 다각도로 연구하고 선배님들의 글을 읽고 학자들의 연구서를 읽으니까 그때서야 이해가 가기 시작하더라구요. 시작해봅시다. 

 

1) 죄에 대해(9절)

첫째는 죄에 대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세상이 말하는 죄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불트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이 이해하는 죄는 세상적인 표준과 이상, 즉 세상에 안전을 제공하는 것들에 반역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적인 안전망 전체를 의문시하고 또 다른 안전 장치를 열어 주는 계시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것, 그것이 진정 죄다”(Bultman). 

 

세상에서 말하는 죄는 불법적 죄와 윤리도덕적 죄로 구분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법률에 의거한 규정을 어길 때, 처벌을 받는 죄가 있겠죠. 그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지탄받게 되는 윤리도덕적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드러내는 죄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일종의 영적인 죄인데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 새로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는 겁니다. 불신, 교만, 자기중심성이 죄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신뢰와 겸손, 예수중심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세상은 불신과 교만과 자기중심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성령님은 이 죄를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이건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런 큰 윤리적 획을 그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를 이분법으로 구분해서 세상은 교회 밖이고, 그 교회 밖 세상의 죄에 대해 성령님께서 정죄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은 아주 잘 못된 생각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구역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으로 구분됩니다. 교회 밖이건 교회 안이건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세상입니다. 불신, 교만,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살아가고 있으면 그 사람이 교회안에 있건 밖에 있건 그는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결국 성령님은 그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실 겁니다. 

 

2) 의에 대해(10절)

둘째, 변호사 성령님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의에 대한 잘못을 깨우치실 겁니다. 그런데 논거가 좀 이상하지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라니요? 이게 무슨 논리입니까? 저도 이 구절에서 한참 헤맸습니다. 이 구절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로마에 팔았습니다. 결국 유대 지역를 통치하던 5대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못박았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못 박은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십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바로 부활과 승천이지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겁니다. 세상에 있으면 세상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이라고 말하고 다닐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 우편에 계십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이 증명하신 겁니다. 아버지께로 간 자가 의로운 겁니다. 모세가 의로운 거죠. 엘리야가 의로운 거죠. 그렇게 예수님이 의로운 겁니다. 

 

세상은 세상의 규정과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이죠.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를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사람들 상호간의 생명과 복지를 향상 시키는 방향으로 의로움을 정의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의롭다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온전한 인정을 받은 분이기때문이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의입니다. 

 

3) 심판에 대해(11절)

셋째로 심판에 대해서도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겁니다. 세상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예수님을 심판했습니다. 유죄 선고를 내린 거죠. 그러나 성령님은 확실히 알게 하실 겁니다.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 세상이요, 그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이라는 사실입니다. 

 

=> 프레임짜기 

이렇게 변호사 성령님은 통념과 편견을 깨부수고 완전히 새로운 재판을 만드십니다. 기존의 법정에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논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승리합니다. 세상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립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판을 다시 짭니다. 프레임을 재구축하는 거죠. 

 

평화 올림픽 vs 평양 올림픽

이런 것이 프레임입니다. 평창 올림픽 때, 남북 선수단의 공동입장을 두고 누구는 평화 올림픽이라고 했고, 누구는 평양 올림픽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을 너무 많이 배려한다고 그건 평화가 아니고 평양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체제 선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프레임 싸움입니다. 

 

사진 프레임

셀카 찍을 때, 어떤 각도로 찍어야 얼짱이 나옵니까? 

세상의 윤리적 사법적 프레임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면 세상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으로 사태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2.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보혜사(13-15절)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기도 하시지만, 더 나아가 진리로 이끄시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1) 진리 되신 예수님께로(13절)

13절을 볼까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분도 예수님처럼 앵무새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자신 맘대로 말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듣는 말씀만 하십니다. 

 

요한은 지속적으로 진리에 대해 말합니다. 그건 철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인격이신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ex) 신입생 홍보와 전도를 위해 캠퍼스에 달았던 현수막_”진리는 인격이다.”  

 

2) 예수님을 영광되게(14-15절)

결국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실 겁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죠. 성령님은 예수님의 것을 받아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14-15절이 말하는 바입니다. 

 

성령님의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개인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잘못된 영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조직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거짓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불의의 영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높아져야 합니다. 

 

베뢰아 김기동이 주장했던 성령은 거짓의 영입니다. 음란의 영입니다. 

홍대새교회를 지어 다윗도 범죄했지만 회개하니 하나님이 용서하셨더라라고 말하면서 뻔뻔히 목회를 하고 있는 전OO목사의 성령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은 성령님의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길 원하십니다. 

그외는 그냥 그리스도의 제자일 뿐입니다. 예수의 증인일 뿐입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종 어느어느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이런 종류의 설명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예수님 중심으로 그분을 신뢰하면서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3. 보혜사 성령님의 핵심 역할(요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14:26) 

 

1)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심 

보혜사 성령님의 핵심 역할은 분명합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함께 지낼때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제대로 알게 됩니다. 육성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3년 동안 아무리 말로 가르쳐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임을 바꾸고 패러다임을 쉬프팅하고 관점을 바꾸려고 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2) 신약 성경의 핵심 저자_성령님 

그런면에서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 성경의 주저자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게 하신 겁니다. 새로운 패러다임과 프레임을 장착시켜주셨습니다. 그렇게 성경이 기록된 겁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작품인 겁니다. 

 

우리가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3) 성령 충만이란? 

그럼 여러분 성령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논리에 따르면, 성령충만은 예수님의 삶과 말씀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분을 영광되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공명하고 행동이 공명하고 그분의 삶의 이미지가 공명하는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분이 영화롭게 된다면 자기 자신은 철저히 낮아져도 된다는 겸손한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4. 나가며 

- 자기중심성, 교만, 불신의 죄의 결과

자기 중심적으로 살며, 교만하게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서, 자신의 능력과 돈과 권력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뉴스를 우리는 거의 매일 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약자인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우리는 미투 운동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국가를 사유화하고 부정부패와 뇌물수수를 일삼는 권력자들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작년 3월 10일 헌법재판관들은 당시 최고 권력인 대통력 박근혜를 파면했습니다. 지금 들리는 뉴스에 따르면, 만약 헌법재판소의 결과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기각으로 나오면, 촛불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의혹이긴 하지만,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 없이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위수령을 발동해서 시민들을 진압하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겁니다. 만약 그 의혹이 사실이었다면 제2의 518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위기였습니다. 

이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성, 교만, 불신이 가져다 주는 악의 구조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의 구조를 떠받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교회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예수님은 이걸 깨고 성령 충만한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자기 중심성을 깨고, 교만을 깨고, 불신을 깨고, 예수 중심, 겸손, 신뢰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깨우치시고, 예수님께만 영광돌리기 원하시는 성령, 그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성경연구 방법이나 성경개론 같은 것을 함께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회] 

1. 성령님에 대해 혹시 편향된 생각이나 이미지로 그분을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과 성령님께 고백합시다. 성령님이 어떤 분인지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2. 그분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이해를 깨우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함으로써 예수님만을 영광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할 문제]

1. 평소에 생각하던 성령님의 이미지와 오늘 설교에서 나눠진 성령님의 이미지와 어떤 부분이 비슷하고 어떤 부분이 다른가요? 

 

2. 대한민국 법률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3. 보혜사 성령님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무엇인가요? 기존에 알고 있던 성령 하나님의 핵심 역활과 같은가요? 다른가요? 다르다면 어떤 부분이 다른지 함께 나눠봅시다. 

 

4. 성령 충만한 삶은 어떤 삶인가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영역이 무엇입니까? 

 

5.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한 결단을 기도로 표현해봅시다. 

 

*** 참고 도서

존 스토트, 성령 세례와 충만, IVP

존스토트, 성령세례와 충만,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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