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12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30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주석

32 절.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주와 가치관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예수님조차 실패한 일이 있다. 

하나는 가륫 유다의 배신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여론 형성이다. 

가륫 유다의 배신이야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건이다. 

12명의 제자를 뽑았는데, 그 중 한 명은 예수님의 배신자였다.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은 예수님도 어려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뭔가를 알기를 원치 않으셨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입소문은 발 없는 말이었다. 

순식간에 천리를 간다. 

입단속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좋아하고, 한 번 입 밖에 나온 이야기는 주어 담기 불가능하다. 

말이 하늘을 맴돈다. 

사람은 말하는 존재다. 

자기 표현, 자기 생각을 외부를 발화하는 것을 막으면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예수님의 바램도 바램으로 그치게 된다. 

 

공동체를 돌보고 운영하다보면, 수 많은 말들이 떠돌아 다니는 것을 본다. 

그걸 억지로 막는다고 해도 막아지지 않는다. 

기독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그러하기에 용서와 용납이 필수다. 

말을 막을 수 없으니, 그 말의 진의가 밝혀지기까지 인내할 필요가 있다. 

 

말이 많은 사람을 신뢰하기가 어렵다. 

선천적으로 여과 없이 혹은 순진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순수함을 높게 사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기에 마냥 긍정할 수만은 없다. 

말이 영향력을 생각할 때, 조심스럽게 말을 전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시는 분이셨다. 

자기 부인에 대한 말씀은 결국 자기를 십자가의 길로 안내했다. 

자기 부인에 대한 설교와 세족식은 연결된다.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말과 행동이 다르다. 

남을 향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지도자가 드물다. 

설교를 너무 많이 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특히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설교는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다. 

남을 비판하는 설교의 내용으로 자신도 비판할 줄 아는 설교자가 성숙한 설교자다. 

자신이 말한대로 살아가는 설교자가 참 설교자다. 

예수님을 닮기에는 아직도 너무 멀었다. 

진리는 알지만, 내가 실천할 수 없기에, 강력하게 주장하질 못한다. 

가련한 인생…. 

신앙의 선배들은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 

너무 부유해지면 타락하게 되거나, 혹 타락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유함을 유지하기 위해 소중한 것에 소홀해진다. 

사람의 에너지는 유한하며, 따라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 쓰인 에너지 만큼 다른 것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줄이는 수 밖에. 

그렇게 심플 라이프를 설교하던 분들은 그렇게 살아내는 분들이었다. 

그래서 그분들을 존경했다. 

문제는 그분들이 나이가 들면서 그들이 말한 그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경우는 더러 있더라는 것이다. 

노욕이 문제다. 

 

과연 나는 자유로운가? 

설교한 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 

나의 욕망을 줄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는가? 

나이 들어 분별력이 조금은 흩어지는 순간에도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나를 계속 돌아봐야 할 일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사람이 말로 흥하고 말로 망합니다. 

설교가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소리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의지로 끝까지 살아가게 하소서. 

노욕을 부리지 말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다 죽게 하소서.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쉽지 않기에 더욱 기도합니다.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 끝까지 성찰하도록 이끄소서. 

그 중에 주께서 주시는 선물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9월 11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28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주석

29 절. 귀신 쫓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권능, 혹은 다른 권세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에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신 기도를 강조하신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모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물을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적대자가 있는 곳에선 아군의 취약점을 드러내면 안된다. 

율법학자들과 논쟁하고, 군중들의 의심을 받고, 예수님의 꾸지람 비슷한 것을 들을 상황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그럼에도 진짜 알고 싶은 것이 있다. 

그동안은 잘 되던 것이 왜 갑자기 안 되는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면 되던 일이 왜 갑자기 먹통이 되는가? 

잘 되던 핸드폰이 갑자기 먹통이 될 때 느끼는 의문과도 같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받아 각 마을로 돌아다니며 귀신을 내어쫓고 병자를 고쳤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경험했다. 

그렇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을 가졌던 제자들이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정서적인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전에는 두 명씩 흩어져서도 귀신을 내쫓았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 명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데도 그 귀신을 내어쫓지 못했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예수님께 묻는다. 

염치없지만 그래도 너무 중요하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 왜 우리는 이미 하던 일들을 갑자기 못하게 된 겁니까? 

예수님이 없이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이었는데, 왜 오늘은 안 된 겁니까? 

우리의 능력이 부족한 겁니까? 

귀신의 능력이 탁월한 겁니까? 

예수님이 혹시 권능을 다시 가져가신 겁니까? 

아님 예수님이 일시적으로 우리의 능력을 제한하신 겁니까? 

귀신을 내쫓는 다른 메커니즘이 있습니까? 

하늘의 군대나 천사들의 도움이 없었습니까? 

우리가 사용했던 축귀의 말에 문제가 있었나요?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했나요? 

도대체 왜 오늘 갑자기 그 능력이 발휘되지 않았나요? 

 

많은 질문들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그동안 썼던 축귀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예상컨대 예수님의 권능을 힘입어 내뱉는 명령의 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귀신에게 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면 그 권위에 의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 

아마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명령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기도의 방법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다. 

명령은 자신에게 있는 대리적 권위를 이용하여 직접적으로 상대의 행동 변화를 요구하는 행위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고 역사하시도록 부탁하고 의탁하는 행위다. 

귀신 중에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대리적 권위로는 움직이지 않는 부류가 있는 모양이다. 

귀신들의 부류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오늘 말씀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이는, 즉 인간의 대리적 권위만으로는 해결이 안되는 영적 존재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도우셔야 하며, 하나님께서 직접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아무리 그가 예수님의 제자, 사도라 하더라도, 그래서 능력이 출중하다하더라도 그 자신이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은사가 있어도 그 은사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기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행위다. 

자기가 가진 영적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영적 권위가 직접 드러나야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진다. 

대리통치자는 원본통치자가 아니다. 

대신 권한을 행사한다고 해서 진짜 왕이 된 것은 아니다. 

진짜 왕이 계시다. 

그분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대리통치자가 해야 할 일이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남기 위함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를 위협하는 수많은 영적 존재들이 있습니다. 

유혹하며 거짓으로 우리의 자아를 망가뜨리려는 영적 존재들이 있습니다. 

주께서 제게 주신 권한과 은사로 그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주님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영광받으시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걸 위해 겸손히 섬기길 원합니다. 

주님, 도우소서. 

주님께 기도합니다. 

제 마음의 여러 복잡한 목소리로부터 저를 구출하소서. 

때로는 세상의 음성이, 제 자신의 욕망의 음성이, 혹은 사탄과 귀신의 음성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9월 05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1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주석

34 절. 십자가는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처형 도구였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보통 조롱하는 무리 사이를 지나서 처형 장소까지 십자가의 가로대를 지고 가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수사학적으로 강한 용어를 사용하셔서 참된 제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각오해야만 하는 것을 묘사하신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잠을 설치면 너무 피곤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곤욕이다. 

오늘이 그랬다. 

괜히 아들 녀석과 같이 잔다고 했다가,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들은 사랑하지만, 아들과 한 매트리스에서 자는 것은 사양이다. 

그렇다고 하루의 시작을 찌뿌둥하게 만들어서는 안되는 법. 

다시 마음을 붙잡고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을 함께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듯이, 십자가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것에 대해 제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죽을 것이라고 예고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란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오란다. 

십자가가 얼마나 무겁고 부끄럽고 고통스러운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는 단어였다. 

십자가 진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그렇다면, 그게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할 게다. 

그런데 정말 싫을 때가 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싫고, 십자가를 지는 것도 싫을 때가 있다. 

그만 하고 싶은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그동안의 십자가도 버거웠는데, 다시 또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계속 살라 하신다. 

욱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온 세상을 얻기 위함도 아니다. 

내 목숨을 구함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큰 미션을 마쳤으니, 조금은 쉬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이뤄지지 않을 때 생기는 짜증이다. 

주님의 나라와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 달려 왔으면, 잠깐 동안만이라고 안정된 상황 속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부끄럽게 생각한 적 없다. 

그분은 언제나 나에게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사랑스러운 분이시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영광스럽고 가치있다. 

그걸 의심한 적이 없다. 

다만 현실은 냉혹하고 경쟁은 끝이 없고 재정에 대한 압박은 계속되고 주변 사람들의 요구는 변함이 없다. 

현실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것이 쉽지만은 않기 떄문에, 나에겐 쉼이 필요하다. 

 

주님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분의 음성이 들리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 

저에게 주신 십자가가 무엇인가요? 

항상 부담되는 일을 맡기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적절한 힘을 공급해주세요. 

아니면 잘 쉴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마음과 몸의 근육이 더욱 강화되게 하소서.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인내력을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9월 04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주석

33 절. 예수님은 아마도 자신의 말씀의 요지를 분명하게 전달하시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 같다. 곧 베드로는 신적인 것보다 세상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는 면에서 사탄과 똑같다는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휘몰아치는 일정을 보냈다. 

수련회며 이사회며 쉴새 없이 매일 매일이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과거처럼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었다.

그러나 삶의 리듬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다시 묵상과 기도로 나아간다. 

내 삶의 배가 정박해야 할 항구는 언제나 말씀 묵상과 기도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구약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어야 했다. 

메시야적 성취는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 계시하셨다. 

유대인들은 그 내용을 알지 못했다. 

애써 부인했다. 

이사야 53장 같은 말씀은 해석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본문을 스킵하곤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드러내 놓고 전달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고 한쪽으로 끌고가 항의했다. 

대단한 인물이다. 

좀 전만 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안드니 하나님의 아들에게도 항의한다. 

배워야 할지, 욕해야 할지 헷갈리는 인물이다. 

그의 정직함과 순박함을 배워야할 것 같다.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무모함은 비판이 필요하다. 

베드로의 열정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열정은 과하고 무모하기 때문이다. 

열정은 높은 산보다 넓은 산맥이어야 그 가치가 산다. 

순간적으로 따오르는 불꽃보다 오래 지속하는 숯불이어야 한다.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기보다 한 방향으로 오랜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감정적인 반응을 뛰어넘어 결단과 의지와 전략이 같이 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의 열정은 크게 닮고 싶지 않았다. 

나만의 열정이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과하시다.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이라 지칭하시는 것은 과한 언사다. 

예수님이 과했다고 결론 내릴 수도 있고, 그만큼 이 사건의 의미가 크게 깊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과했다고 치더라도, 베드로의 항의 사건이 갖는 의미를 깊이 들여다 봐야 한다. 

과연 베드로의 행위는 사탄의 행위와 유사한가? 

 

먼저,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위대한 계획에 반대를 표했다. 

한 개인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계획의 수준이 아니다. 

온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오랜 계획이며 섭리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이 없이는 그간의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어그러뜨리려는 사탄의 모습을 닮았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끌고나와 꾸짖었다. 

나는 끌고나왔다는 점, 즉 당겨서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예수님을 끌고왔다는 점을 주목한다. 

예수님을 사막에서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며 유혹했던 사탄의 모습이 중첩된다. 

 

셋째, 베드로는 사람의 일에 집중했다. 

하나님의 계획보다는 사람들이 꿈꾸는 일에 집중했다. 

사람들은 민족의 독립과 위대한 다윗 왕국의 재건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힘썼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계획을 세우셨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영광을 추구했다. 

사람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추구하는 것이 사탄이 꾸민 장난이다. 

 

이런 이유들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과한 말씀을 퍼부으셨다. 

만약 나였다면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구석에 있었을 것이다. 

혹은 제자그룹에서 이탈했을 수도…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크게 상처를 받았을 거다. 

그점에서 베드로를 높게 평가한다.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음에도 끝까지 예수님 곁에 있었다. 

멘탈 갑 베드로. 

이 부분은 배워야 할 지점이다. 

 

앞으로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될까? 

여전히 주어지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주님의 제자 그룹에 남겠다. 

 

 

[오늘의 기도]

주님, 

주님의 비난을 들을 용기가 저에겐 없습니다. 

주님의 꾸지람을 이길 힘이 저에겐 없습니다. 

그럼에도 가끔 주님께서 지적하신다면 달갑게 들을 수 있는 담대함을 주소서.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의 꾸지람을 듣겠습니다. 

 

주님, 도우소서. 

매번 책임지는 위치, 감당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누구의 말에도 쉽게 상처받지 않는 정신력을 갖추게 하소서. 

그 모든 말들이 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정직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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