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13일 금요일

 

여는 기도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NRSV
“Whoever welcomes one such child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welcomes not me but the one who sent me.”(37절)

주석

36 절. 지금까지 마가의 내러티브에서 가장 힘 있는 인물인 예수님은 팔로 어린아이를 안으심으로써, 힘 있는 사람이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함을 실제로 보여주신다(IVP 성경비평주석).

37 절. 유대 관습에 따르면, 오늘날의 사업 대리인과 비슷하게, 어떤 사람의 대행자가 그를 보낸 사람을 대리하여 행동할 수 있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예수님은 평소에 어린이를 안아주신 적이 있는가? 

어린이를 껴안은 행위는 쇼잉인가 진심인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인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인가? 

본문만 놓고보면 확실하지가 않다. 

솔직히 본문에서 안겨진 아이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보인다. 

예수님이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평소에 아이들을 껴안고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표현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분에 대한 기록이 제한적이어서 그럴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보여주려고 연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미지 관리 시대다. 

대통령 부인이 캄보디아의 어린이를 안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언론에 뿌리기 위해 연출한 흔적이 곳곳에 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진심으로 사고 현장에 찾아가기보다 어쩔 수 없이 이미지를 위해 찾곤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대 사회의 일상이 되고 있다. 

SNS를 보라. 

얼마나 멋진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는가? 

이제는 AI기술로 실제 그 현장에 가지 않아도 거기 있는 것처럼 합성할 수가 있다. 

세상이 이렇다보니, 예수님의 행위도 일종의 보여주기 이벤트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더욱더 생각이 빠르게 그쪽으로 흐른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사랑하셨다. 

마가복음 10:13-16
13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4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5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6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아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제자들에게 아이들은 귀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을 축복해주셨다. 

그분은 진심이셨다. 

쇼잉이나 이미지 관리가 아니셨다. 

하나님 나라는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시고 선포하신 예수님은 그 구성원의 첫 번째 부류가 바로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이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왔다. 

예수님의 축복기도를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자세다. 

예수님께 머리를 내어 맡기고 그분의 축복을 받고자 원하는 마음 말이다. 

이런 자세가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 

주님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지식과 논리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을 이리저리 분석하고 분해하여 자신의 논리 그물에 걸리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려버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 체계나 사상 체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신앙은 예수님을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과연 주님의 쓰다듬어 주시는 것을 열망하는가?

그분이 안아주시고 축복해주시는 것을 바라는가? 

 

그분의 품 안에서 모든 경쟁의식을 버리고 그분의 축복을 받고 싶다. 

그분의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나이가 들어도 끝까지 겸손하며 끝까지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를 어린아이 같은 존재를 받아주세요. 

주님과 더욱 깊은 교제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주님을 더욱 신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떤 길로 인도하시더라도 끝까지 당신을 신뢰하여 그 길을 걷게 하소서. 

어떤 명예가 남는지 염려하지 않게 하소서. 

어떤 노후가 기다리고 있는지 걱정하지 않게 하소서. 

혹 제가 기대하던 노후가 아니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게 하소서. 

죽는 날까지 주님을 사랑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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