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01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7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10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주석

9-10 절. 그들이 입을 맞추어 외친 구호는 시편에서 따 왔으며, 이스라엘 왕국에 옛 영화를 되찾아 줄 다윗 가문 출신의 오실 왕을 환영하는 소리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그들은 정치적인 리더, 민족을 선도할 지도자, 거친 사회 개혁자를 기대했을 것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 나귀 새끼

전쟁에 승리한 장군은 전리품을 이끌고 가장 화려한 말을 타고 개선문으로 들어온다. 

온 백성이 그야말로 환호성을 지른다. 

전쟁의 실패는 왕국의 멸망을 부른다. 

저 개선문으로 다른 나라 왕이나 장군이 들어온다면 그들은 죽은 목숨이다. 

승리자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이게 역사적 진리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신다. 

과거 예언이 어떠하든지 간에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은 전쟁에 승리한 왕이나 장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키와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동안 행했던 기적을 알기에, 그분의 업적을 알기에 그분을 찬양하고 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이 그 환호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상상해 본다. 

주위를 둘러보며 손을 들어 합당한 찬양에 대한 긍정의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을까?

무표정한 얼굴로 예루살렘 성전을 응시하며 무뚝뚝하게 지나가고 있었을까?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듯 손을 마주치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길을 주며 가셨을까? 

사람들의 환호 앞에 예수님의 얼굴 표정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나귀 새끼를 탔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겠다는 의미를 준다. 

세상의 왕과 황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그분의 얼굴은 인자하지만 단호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도 계속 말씀했지만, 예수님은 죽으러 가시는 길이다. 

예루살렘은 그분의 처형 장소요, 장지다. 

사람들의 환호에 그저 웃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신다. 

하나님이 얼마나 오랜 시간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려고 하셨는가!
그럼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장군에게 함락될 것이었다. 

과연 예수님이 웃을 수 있었을까! 

과연 예수님이 연예인처럼 사람들의 환호에 일일이 반겨하며 박수치고 싸인하고 사진찍고 허그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분의 눈은 예루살렘 성전을 응시하고, 그의 입술은 살짝 닫혔으며, 사람들의 함성에 입술이 좌우로 조금 늘어났을 뿐이다. 

 

아마 사람들도 조금은 의아했을 것이다. 

나귀 새끼라니… 

정말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맞을까하고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의문은 그 날이 다 가기 전에 현실이 되고 있었다. 

 

* 이미 날이 저물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면, 혁명의 깃발이 성벽에 걸릴 줄 알았다. 

예수님의 숨겨둔 부대가 일격에 로마 군대를 궤멸시키고, 세상을 뒤집을 거라 믿었다. 

예루살렘 성은 온통 예수님 이야기 뿐이었다. 

그분이 하실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가 최고조가 되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든, 장대한 백마를 타고 오시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 혁명을 일으킬 계획이 있느냐다. 

함께 혁명을 이끌고 나갈 군대가 있느냐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어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흡족케 할 만한 대안을 가지고 왔느냐다. 

그런데, 이미 날이 저물었다. 

이미 혁명의 날도 한물가버렸다.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징후가 없다. 

새 세상은 없다. 

그저 태양은 지고 날은 저물었다. 

야간에 뭔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조용하다. 

예루살렘 근처에도 혁명군이 있다는 소문도 없다. 

이미 날이 저물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영광의 날은 실망의 날로 바뀐다. 

군중의 칭송은 원망으로 바뀐다. 

열정적인 찬양은 열정적인 비판으로 바뀐다. 

순식간이다. 

기대가 높을수록 실망이 큰 법이다. 

 

나귀 새끼부터 알아봐야 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의 표정은 알 듯 모를 듯 하다. 

알 수 없는 표정에서도 알아봐야 했다. 

세상은 여전하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산책하러 왔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다. 

오랜 기대와 세계관에 매이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분의 길이 있고 계획이 있다. 

사람들은 그 계획을 다 알 수도 없고 따라가기도 어렵다. 

그저 자신들의 감정과 생각에 의해 반응할 수 밖에… 

 

나도 내 감정과 생각에 갇혀 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실지는 나의 과거를 통해서만 추측할 뿐이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나귀새끼를 타라고 하면 탈 의향이 있는가? 

그저 예루살렘 성에 산책하듯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라고 하면 그럴 의향이 있는가? 

내 계획을 포기할 마음이 있는가? 

 

[오늘의 기도]

저의 기대를 벗어나 움직이시는 예수님, 

당신의 움직임을 저의 계획에 맞추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소서. 

주님의 움직임에 저의 계획을 맞추는 지혜를 주소서. 

주님의 의도를 예단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계획을 신뢰하게 하소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저의 인생을 주님께 맡깁니다. 

겸손하게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게 하소서. 

 

복음주의 학생 운동에 복을 내리소서. 

젊은이들이 복음 운동에 헌신하도록 이끄소서. 

주님을 따르는 젊은이들이 더욱 많아지도록 인도하소서. 

 

로잔이 기관이 아니라 운동이 되게 하소서. 

돈이 아니라 로잔의 정신이 흐르게 하소서. 

가난하지만, 끝까지 나귀 새끼를 타게 하소서. 

어떤 운동도 주님의 계획보다 앞설 수 없으며, 주님의 계획보다 장수할 수 없습니다. 

로잔의 시작과 끝도 주님께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주님의 신실하신 역사를 신뢰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9월 26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41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주석

43 절. 세상의 통치자들은 권력을 쫓고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화 낼 만한 일들이 있다. 

공의롭지 못한 일을 봤을 때, 손해가 되는 일이 생겼을 때는 물론이다. 

네비게이션 안내를 두 번이나 놓쳐서 약속 시간에 40분이 늦게 생겼을 때도 화가 난다. 

어제 일이었다. 

그런데 진짜 화 낼 만한 일이 있다. 

친구의 배신이다.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행위다. 

신뢰를 깔아 뭉개는 말과 행동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애정을 받았던 제자였다. 

친척지간이기도 했지만,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인물들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던 세 명 중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이렇게 대놓고 인사 청탁을 할 줄이야. 

공동체의 신뢰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제자들 사이에 다툼과 분쟁의 여지가 생긴다. 

안그래도 최근에 길거리에서 누가 큰 사람인지에 대해 논쟁하지 않았던가! 

그 사이에 자기들의 어머니를 대동하여 예수님이 만드실 새로운 나라에 주요 보직을 달라고 요청하는 행태는 분노를 일으킨다. 

가장 크게 분노한 사람은 아마도 베드로가 아닐까? 

예수님의 오르편에 앉을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그 자리를 꿰차려고 한다. 

제자 공동체가 무너지면 예수님의 사역도 상당히 큰 타격을 입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할 사람들이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이 그동안 말씀하셨던 내용을 기억하여 후대에 전달하게 될 사람들이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더욱이 겸손하게 공동체를 위해 자신들의 욕망을 절제하고 예수님의 선택을 신뢰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마음이 급했던지, 야고보와 요한과 그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아래 무릎을 꿇는다. 

 

돌아보면, 공동체를 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기만 하면 될 일이 아니다. 

전도에 집중해서 교인 수만 늘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교회의 참 모습이 끝까지 유지되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다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곳이다. 

그것은 목사라고, 장로라고, 권사라고 예외가 아니다. 

모두가 마찬가지다. 

 

함께 기도하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해 조금 느리고 더디더라도 그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공동체는 누구 한 사람의 기관이 아니다. 

모두의 기관이다.  

권한이 집중되면 그 순간 교회는 조직이나 회사로 전락한다. 

권한이 분산되어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때에 따라 분산과 집중의 정도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교회는 공동의 참여와 합의로 인도함 받는다. 

카리스마틱한 한 개인의 의해 운영되는 것은 결국 그 개인의 죄성으로 인해 고통받게 되고 상처받게 된다. 

 

다양한 공동체의 흥망성쇠를 연구하면 아마도 더 복잡하게 되겠지만, 

일단 그렇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다.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드리러 오셨다. 

공동체의 설립자이신 예수님이 이런 정신으로 오셨다면, 그의 제자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제자들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 아니라 더 섬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궁구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 

너무나 겸손하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자리에 연연하는 저를 돌아봅니다. 

섬기는 것이 저의 역할일텐데, 언제부터인지 자리에 연연합니다. 

저의 본성을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자리가 돈이 되고 명예가 되는 곳이 인간 사회입니다. 

그러니 더욱 자리에 연연하게 됩니다.

 

주님, 제 마음을 잘 지키게 해주세요. 

어떤 자리에 있든지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잘 섬기는 자리가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세요. 

혼자 결정하지 않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9월 20일 금요일

 

여는 기도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주석

23-24 절.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부요’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아니라 그 부요를 의지하려는 유혹을 받는다(IVP 성경주석). 

 

27 절. 부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재산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재산을 가진 사람, 그것도 부유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은 주변을 둘러보셨다.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약간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또는 전문맥에 등장했던 부자 청년 같은 사람들이 모두 있었을 것이다. 

전체 인구 구성으로 봤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겠지만, 그 중에는 꽤나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속마음을 아셨다. 

부자 청년 같은 사람, 즉 스스로 율법을 잘 지켰고 구원에 대한 갈망도 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르지 않는 사람의 속마음도 아셨다.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무작정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속마음도 아셨다. 

혹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기 위해 감시하러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속마음도 아셨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가진 것을 내다 던지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의 속마음도 아셨다. 

그렇다. 자신이 뭔가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걷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각자를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한다. 

각자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물질적이건 정서적이건 혹은 영적이건 그 소중한 것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방해가 될 때가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어려움을 준다. 

부요함이 문제를 심화시킨다. 

결정을 어렵게 만든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셨다. 

그들의 욕망을 알고 계셨다. 

부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욕망, 현재 자리를 지키려는 욕망… 

그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힘만으로 하기 어렵다. 

하나님이 도우셔야 한다. 

사람의 욕망을 다스리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만 봐도 그렇다. 

부모가 통제하지 않으면, 그것도 사랑으로 오랫동안 가르치고 권면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가르치고 안내하고 인도해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고 은혜다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부모, 혹은 어른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글과도 다름없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여 타인을 도구화한다. 

어릴 때부터 그런 죄악의 태도가 버젓이 활개친다. 

그것을 제어하고 통제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과정에는 부모와 어른들의 통제가 가르침이 필수적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자신의 욕망과 부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안내해주시고 인도해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라는 선물이 사람들의 마음에 부어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제자들 중에는 이미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세리 마태도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 제자들도 어엿한 자기 배를 가지고 중산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와 소유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 다니고 있다.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욕망 대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반응하도록 이끄신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비전을 심어주시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가능케하신다. 

수많은 부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내가 가진 것들을 주님께서 원하시면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게 다시 던져지는 질문이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 

저를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돈도 중요하고, 미래도 중요하고, 아이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당신의 의입니다. 

당신의 나라와 의를 구합니다. 

별로 가진 것이 없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기쁘게 드리게 하소서. 

제 시간, 열정, 비전, 미래… 

주의 나라를 위해 바칠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소서.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9월 13일 금요일

 

여는 기도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NRSV
“Whoever welcomes one such child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welcomes not me but the one who sent me.”(37절)

주석

36 절. 지금까지 마가의 내러티브에서 가장 힘 있는 인물인 예수님은 팔로 어린아이를 안으심으로써, 힘 있는 사람이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함을 실제로 보여주신다(IVP 성경비평주석).

37 절. 유대 관습에 따르면, 오늘날의 사업 대리인과 비슷하게, 어떤 사람의 대행자가 그를 보낸 사람을 대리하여 행동할 수 있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예수님은 평소에 어린이를 안아주신 적이 있는가? 

어린이를 껴안은 행위는 쇼잉인가 진심인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인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인가? 

본문만 놓고보면 확실하지가 않다. 

솔직히 본문에서 안겨진 아이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보인다. 

예수님이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평소에 아이들을 껴안고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표현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분에 대한 기록이 제한적이어서 그럴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보여주려고 연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미지 관리 시대다. 

대통령 부인이 캄보디아의 어린이를 안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언론에 뿌리기 위해 연출한 흔적이 곳곳에 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진심으로 사고 현장에 찾아가기보다 어쩔 수 없이 이미지를 위해 찾곤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대 사회의 일상이 되고 있다. 

SNS를 보라. 

얼마나 멋진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는가? 

이제는 AI기술로 실제 그 현장에 가지 않아도 거기 있는 것처럼 합성할 수가 있다. 

세상이 이렇다보니, 예수님의 행위도 일종의 보여주기 이벤트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더욱더 생각이 빠르게 그쪽으로 흐른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사랑하셨다. 

마가복음 10:13-16
13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4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5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6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아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제자들에게 아이들은 귀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을 축복해주셨다. 

그분은 진심이셨다. 

쇼잉이나 이미지 관리가 아니셨다. 

하나님 나라는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시고 선포하신 예수님은 그 구성원의 첫 번째 부류가 바로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이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왔다. 

예수님의 축복기도를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자세다. 

예수님께 머리를 내어 맡기고 그분의 축복을 받고자 원하는 마음 말이다. 

이런 자세가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 

주님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지식과 논리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을 이리저리 분석하고 분해하여 자신의 논리 그물에 걸리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려버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 체계나 사상 체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신앙은 예수님을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과연 주님의 쓰다듬어 주시는 것을 열망하는가?

그분이 안아주시고 축복해주시는 것을 바라는가? 

 

그분의 품 안에서 모든 경쟁의식을 버리고 그분의 축복을 받고 싶다. 

그분의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나이가 들어도 끝까지 겸손하며 끝까지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를 어린아이 같은 존재를 받아주세요. 

주님과 더욱 깊은 교제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주님을 더욱 신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떤 길로 인도하시더라도 끝까지 당신을 신뢰하여 그 길을 걷게 하소서. 

어떤 명예가 남는지 염려하지 않게 하소서. 

어떤 노후가 기다리고 있는지 걱정하지 않게 하소서. 

혹 제가 기대하던 노후가 아니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게 하소서. 

죽는 날까지 주님을 사랑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