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8월 24일 토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종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시오.

 

24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주석

24-30절. 돼지나 개와 같은 ‘부정한’ 음식이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면(7:16-19), 이방인 역시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종교 당국과의 논쟁에서 모두 이기셨지만, 한 이방 여인의 필사적인 반론에 설득당하신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을 읽는 이방인 독자들에게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IVP 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 숨어 계실 수 없다.

예수님도 숨고 싶었다. 

매일 매일 사람들과의 만남의 연속이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삶, 그것은 그래도 나았다. 

대적자들과의 변론과 싸움도 이어가야 했다. 

환호를 듣는 사역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적자들의 비판과 비난도 들어야 했다.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러 왔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이 문제였다. 

모세도 그랬다. 

히브리 노예인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로 향했지만 백성들이 반기지 않았다. 

파라오는 그를 죽이려고 했다. 

상황이 이러니 예수님도 숨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소문은 금방 마을에 퍼졌고,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상황을 모른 척 할 수 없으셨다. 

사람들을 따라 바리새인들이 찾아왔고, 율법의 규례를 잘 지키는지 항상 감시했다. 

급기야는 예수님이 두로 지역까지 가셨다. 

숨고 싶은 마음에 거기까지 가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갈릴리에는 더는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두로에 소문이 안 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사람이어도 절실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오늘 본문의 한 여인이 그랬다. 

 

#상처주는 말 

그 여인에 대한 처음 말씀은 그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었다. 

갑자기 그 여인을 개에 비유한 것이다. 

주인이 자기 아들에게 줄 음식을 개에게 주지 않는다는 말을 내뺕으셨다. 

바리새인들에게 비판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가련한 한 여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부드럽게 거절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너무 바쁘다든가, 아님 아이를 직접 데리고 오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해도 된다. 

아님, 지금 나는 유대인들에게 집중하고 있으니, 그점 양해 바라오 정도의 말을 해도 된다. 

예수님이 한 여인에게 상처주는 말을 했다니…

예수님도 인종주의자이신가? 

유대인 중심주의를 가지고 계신가? 

온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보편적 섬김은 어디에 있는가? 

 

#두로에 오신 이유

처음에 예수님이 왜 두로에 오셨을까 생각해 봤다. 

단순히 숨기 위해서? 

이방인의 땅에 가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름 휴가차 가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방인의 땅에 들어가시면서, 이방인을 개에 비유한 것은 역설이다. 

둘 중에 하나는 본심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도 고치고 싶으셨다. 

어떤 사람이라도 주님을 찾아와 믿음과 신뢰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 

백부장의 종도 고쳐주셨다. 

그를 이스라엘에서 보기 드문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해주셨다. 

그러니 이방인이라고해서 거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루살렘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면서 성전 정화 사건을 일으키신 분이시다. 

그러니 그리스 사람이라고 해서 거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이 두로에 오신 이유는 숨기위해서가 아니라, 두로의 시민들 중에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하길 원하셨다. 

그분이 사울을 불러 이방인의 선교사로 삼은 이유가 있다. 

전 세계를 향한 그분의 구원 열정은 처음부터 있었다. 

그분의 말이 상처가 되기에 그분에게 죄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상처 주기 싫어서 관계를 맺지 않거나 확인해야 할 것을 확인하지 않거나 가르쳐야 할 것을 피하는 것은 상처에 대한 과도한 예민함에서 나온다. 

심리학, 상담학이 보편화되면서 나오는 부작용 중에 하나다. 

오냐오냐 키우는 것이 아이를 위해 최선이 아닌 것과 같다. 

상처회피주의? 

그걸로는 사람을 온전히 성장하도록 돕지 못한다. 

아무때나 상처를 주라는 말이 아니다. 

때로는 상처가 되더라도 해야 하는 말이 있다. 

 

[오늘의 기도]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 

가난한 사람, 가련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주님, 

당신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때로 주님의 말씀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을 겁니다. 

주님이 제게 원하시는 것을 행할 때는 쉽지 않은 순간이 많을 겁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주님의 요구가 제게 무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체력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닥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때에도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저를 회복시키시고 더 성장시키시려는 당신의 뜻과 계획과 섭리를 끝까지 믿게 하소서. 

 

여전히 덥지만 가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꿈과 비전으로 제 자신을 채우고 싶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길로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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