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1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17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가셨다. 

18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19   그들은 근심에 싸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예수께 말하기 시작하였다.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다. 

21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주석

20 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고’ 그 사람을 배반한다는 것을 들은 고대의 독자들은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손님 접대 및 식탁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을 친밀한 유대의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왜 배신자를 특정하는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다. 

당신을 배신할 제자가 누구신지 아셨다. 

예수님이 마음만 먹었으면, 그 제자를 붙잡아 포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을 통해 그 한 명의 배신자를 처단할 수도 있었다. 

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사람을 특정해 주신다. 

이 정도 말씀하셨으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가룟 유다를 붙잡아 추궁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도 가룟 유다를 막지 않는다. 

분명히 예수님이 특정했음에도 다른 제자들은 그저 자신이 배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해 하는 듯 보인다. 

아님 예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고 있는 건가? 

예수님을 넘겨줄 사람을 빨리 색출하는 것이 다른 제자들의 의무 아닌가? 

이게 참 의아하다. 

예수님도 배신자가 있고 그가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혈기왕성하던 제자들도 가룟 유다를 그저 방치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점점 미궁에 빠진다. 

가룟 유다가 공동체의 회계로서 돈 관리를 하는 사람이기에 그가 배신자일 리 없다고 다들 믿고 있었던 걸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회개를 기회를 주신 것일까? 

예수님은 왜 이런 이상한 말씀만 하시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으시는지 알 길이 없다. 

 

21절이 힌트가 될 수 있을까?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그 예언은 성취될 것이다. 

예수님은 무고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 피를 흘리실 것이다. 

가룟 유다는 그 예언의 성취를 촉발시킨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막을 생각이 없으시다. 

이미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을 거라고 믿고 계셨고, 예고도 하신 바 있다. 

예언대로 가고 있음을 모든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셨을까?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신가? 

 

의문이 남는 말씀이다.

 

2. 근심에 쌓인 제자들

자신들 중에 한 명이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한단다. 

순간 제자들 사이에 적막이 흐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자신은 아니라고 장담한다. 

그렇지만 내 옆의 동료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근심과 걱정이 온통 가득하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가끔 제자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과연 예수님은 평안을 주시는 분이신가? 

아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은 불편하다. 

그분은 뭔가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요청한다. 

자신은 곧 죽겠다고 하시질 않나, 예루살렘 성전 마당의 기물을 파손하질 않나, 제자들 그것도 12명 중에 배신자가 있다고 하질 않나…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은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본다. 

갑자기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그것도 불편하기 매 한가지. 

예수님이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세상이 줄 수 없는 불편함고 주신다. 

그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영성 훈련의 과정이라 믿고 있다. 

마냥 편한 것이 과연 성령님의 역사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을 떠올리고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면, 불편하다. 

평안과 불편이 교차한다. 

성령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여러모로 벅차고 힘들고 지친다. 

그분과 동행하면 여행을 다니는 것도 에너지 빨리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 관련된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버겁다. 쉽지 않다. 

끝까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공동체를 지켜내는 것도, 완벽주의적 이상향을 그리는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피곤하다. 

그 속에서 성령님도 나를 더욱 몰아세우기도 하신다. 

그것은 다 나를 위함이다. 

나의 성숙과 성장을 위한 성령님의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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