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22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3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이 겹쳐서, 우리는 더욱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분 모두로부터 환대를 받고, 마음에 안정을 얻었던 것입니다.

14 내가 여러분을 두고 디도에게 자랑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분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여러분을 두고 디도에게 말한 자랑도 진실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15 디도는, 여러분 모두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영접하고 순종한 것을 회상하면서, 사랑하는 정을 더욱더 여러분에게 기울이고 있습니다.

16 나는 여러분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말미암아 큰 위로를 받습니다. 여기에 디도의 기쁨까지 겹쳐서 더욱 기뻐합니다. 디도 역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큰 환대를 받고, 마음에 안정을 얻습니다(13절). 바울의 근심이 무색할 만큼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를 극진히 영접한 것입니다(14-15절). 바울은 무엇보다 고린도 교인들과의 신뢰가 회복된 것으로 인해 기뻐합니다(16절).

 

실의에 빠졌던 바울은 디도가 가지고 온 소식으로 인해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일하셔서 바울과 디도를 위로하십니다. 이제 바울과 디도는 고린도 교회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풀기 어려운 갈등과 긴장이 있다면, 더 깊이 사랑하고 신뢰할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 바울의 정서 상태는 매우 좋음이다. 

바울과 디도는 위로를 받았고 기쁨을 누리고 있다. 

디도는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디도는 더욱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교인들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기쁨이 되고 있다. 

관계가 회복되었다.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있었지만,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고, 그래서 회복되었다. 

위로, 환대, 기쁨, 신뢰… 

이런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참 감사하다. 

바울의 오랜 노력과 분투 위에 하나님이 주신 멋진 선물이다. 

 

교회에서 웰컴팀을 시작했다. 

예배 전에 커피와 과자를 먹으면서 예배에 오시는 분들을 환영한다. 

그것만으로도 예배에 오는 분들의 마음이 조금은 열린다. 

다들 조금 일찍 교회에 오게 되었다. 

예배 시작 시간에 조금 더 많은 청년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이건 꽤나 멋진 변화다. 

환대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위로와 기쁨과 신뢰를 만들어 가는 과정 중에 환대가 있다. 

환대의 의미의 그 풍성함을 더 많이 발견하면 좋겠다. 

 

성도간의 서로 위로가 있고, 환대가 있으면, 당연히 그 안에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이 점점 커지고 확대되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영역 안으로 들어온다. 

그들도 위로를 받는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다. 

세상에서 받지 못했던 위로다. 

 

오늘 말씀 중에 가장 와닿는 것은,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을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솔직히 바울의 마음 속에는 고린도 교인들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웠다. 

분열이 있었고, 죄가 있었고, 바울의 대적자가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인들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이 당연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관계가 회복되었고, 신뢰가 회복되었다. 

신뢰는 한쪽만의 변화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울이 신뢰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교인들도 바울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말과 상통한다. 

이런 상호 신뢰가 마련된 교회, 공동체를 참 갈망하게 된다. 

 

한국의 교회, 공동체는 얼마나 많이 깨어져 있는가? 

너무 많은 갈등과 긴장이 존재한다. 

사랑보다는 미움과 원망이 가득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상처를 받는다. 

목사와 성도 사이에, 장로와 장로 사이에, 성도 간에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법정에 가기도 한다. 

갈등이 없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신뢰가 깨어진 공동체는 위로와 기쁨을 주기 어렵다. 

서로의 진정성을 믿고, 환대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게 잘 안되니까 사이비가 득세한다. 

사이비는 뇌 한쪽의 정상적 기능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교주의 말에 절대 복종하게 되고, 성도간의 갈등은 최소화된다. 

그러니 얼핏보면 사랑과 환대가 넘쳐난다고 보여진다. 

자아가 망가진, 정상적인 이성 활동이 정지된 사람들은 기계처럼 웃고 살갑게 대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곳에 뭔가가 있다고 느낀다. 

세상에서, 전통 교회에서 경험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미끼가 되어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이끈다. 

교회는 말씀과 신뢰가 회복되어야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사이비를 능가할 수 있다. 

 

기독 공동체들의 시작은 대체로 원대하다. 

좋은 꿈과 이상을 갖고 시작한다. 

하지만 대체로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상적 그림만으로 공동체가 유지되기가 어렵다. 

작은 상처를 다뤄야 하며, 상호 신뢰를 줘야 한다. 

위로와 환대와 기쁨이 공동체에 흘러야 한다. 

이것은 비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성 있는 사랑, 헌신, 인내 등의 성령의 열매가 필요하다. 

성숙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불가피하게 어려움이 찾아온다. 

너무 이상적이지도 말고, 너무 자조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은혜요,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 달인의 경지다. 

 

디도가 찾아오길 바라게 된다.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는 디도가 왔으면 좋겠다. 

위로와 신뢰가 더욱 커지는 하루 하루가 되길. 

마음 속에 있는 상처와 아픔이 치유받길… 

 

[오늘의 기도]

위로를 주시는 주님, 

공동체에 위로가 흘러가게 하소서.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의 관심으로 위로가 흘러가게 하소서. 

 

기쁨을 주시는 주님, 

주님의 기쁨을 맛보게 하소서. 

공동체의 관계가 회복되기에 갖게 되는 기쁨을 주소서. 

서로 환대하기에 서로의 존재가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렇게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더욱 늘어가길 원합니다. 

서로 신뢰하기에 가족 같은 관계가 되길 기도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위해 기도해 주는 관계가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21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2 여러분은 마음을 넓혀서,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 우리는 아무에게도 부당한 일을 한 적이 없고, 아무도 망친 적이 없고, 아무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없습니다.

3 여러분을 책망하려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도 말하였거니와, 여러분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입니다.

4 나는 여러분에게 큰 신뢰를 두고 있으며, 여러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온갖 환난 가운데서도, 나에게는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5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의 육체는 조금도 쉬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환난을 겪었습니다. 밖으로는 싸움이 있었고,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6 그러나, 실의에 빠진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디도를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7 그가 돌아온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리워하고, 내게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또 나를 열렬히 변호한다는 소식을 그가 전해 줄 때에, 나는 더욱더 기뻐하였습니다.

8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9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11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2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편지한 것은, 남에게 불의를 행한 사람이나, 불의를 당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여러분의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환히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NIV

Make room for us in your hearts. We have wronged no one, we have corrupted no one, we have exploited no one(2절).

 

주석

2-4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 자신과 화해하자고 호소한다. 자신의 행동에 화해를 가로막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충분히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 화해를 고린도 교인들과 자신의 관계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실함을 호소합니다(2-4절). 그는 디도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로 인해 걱정했지만,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과 화해하기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합니다(5-10절).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하게 마주한 이들에게 회개와 화해의 기쁨이 넘칩니다(11-12절).

 

온갖 환난과 싸움과 두려움에도 포기하지 않은 바울의 마음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원했던 고린도 교인들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픔과 후회가 있었지만, 그 결과로 얻은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회개와 화해의 과정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아픔이라면 결코 손해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변호하는 사람도,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린도 전서에서만 봐도, 여러 파가 존재했다. 

바울파, 아볼로파, 바나바파, 예수파…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중심으로 묶여야 하지만, 원래 인간들이 자신들의 당파를 만들어 특별한 소속감을 느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조직을 만들곤 한다. 

그 사조직이 분열을 이끈다. 

분열로 인해 고린도교회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교인간의 분열은 자칫 교리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 

자신의 성향 문제를 교리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개인적 성향에 의해 교리를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충분한 공부와 학습과 이해가 결여되면, 결국 자신의 성향대로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도 놔버리는 우를 범하곤 한다. 

바울은 이런 분열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교리적 타락, 우상숭배의로의 타락, 성적 타락, 은사받은 자들의 교만을 지적하면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애쎴다. 

직접 방문할 생각도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편지를 쓴 것이다. 

비판적인 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죄에 대해 적나라하게 적었던 것 같다. 

고린도전서도 그런 비판의 내용이 나오지만, 두 번째 보낸 편지는 좀더 심했던 걸로 보인다. 

바울도 여러 번 반복적으로 그 편지가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적고 있다. 

성도들의 죄를 조목조목 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죄를 지적함과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아프게 하는지, 

그리스도를 욕보이게 하는지 적었던 것 같다. 

편지를 읽는 내내 성도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솔직히 어떤 사람들은 그 편지로 인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바울의 진심어린 진솔한 비판을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그들은 바울의 편지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9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바울 마음 속에는 기쁨이 점점 찾아오고 있다.

성도들이 바울의 진심을 알아주고 있다. 

성도들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고 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 아픔이 도리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으로 이끌고 있다. 

하나님도 때로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바울은 적고 있다. 

구약의 역사에서도 엇나가는 백성들을 호되게 꾸짖으시거나, 그게 작동하지 않으면 물리적인 충격을 주시곤 했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좋은 촉매제가 된다. 

 

물론, 이런 마음의 작동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 회개하게 만드는 일은, 어찌보면 무당들이 제일 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죄를 들춰내고 두려움을 심어준다. 그래서 사단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종교적 노예가 되게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이다. 

강력한 질책, 죄책감과 두려움, 복종과 노예화… 

기독교도 이런 심리적 메카니즘을 통해 사이비를 출생한다. 

이걸 기술로 삼아 교회를 운영해서는 안된다. 

복음은 죄책감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유를 선포한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가져다 주는 참 자유를 선포한다. 

문제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스르는 행위를 무분별하게 할 때다. 

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온당하며, 그래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을 갖게 된다. 

어쨌든,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종교적 기술로 사람들을 옭아매는 것은 잘못이다. 

 

핵심은 이걸 기술로 쓸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도들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섬기려고 하면서 그리고 본을 보이면서, 성도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랑이 아니라 기술로 다가가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가 되어 버린다.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 전제한 뒤에 죄에 대한 지적과 훈계가 이어져야 한다. 

지적과 훈계가 습관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그래서 문제가 된다. 

습관 혹은 강박은 진실된 사랑과 거리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비판, 지적, 훈계를 강박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 참지 못해 습관적으로 강박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사랑으로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비판과 지적으로 자기 사람을 만들어온 사람들은 계속 그 방법을 사용한다. 

 

목회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죄책감을 통한 자기 사람 만들기다. 

죄책감을 계속 조장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면 신랄하게 비판한다. 

성도들은 참 힘들지만, 그 심리적 메커니즘에 중독되어 있다. 

자신을 혼내주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아니 혼나기를 욕구하기도 한다. 

일종의 메조키스트적 욕망이다. 

이걸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진심을 담아 사랑하는 사람이 비판할 자격을 얻는다. 

그러니 목회는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다. 

사랑해야 그 설교에 진정성이 남는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으십니다. 

죽음으로 당신의 진정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떻게 저의 진심을 담아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외칠 수 있을까요?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육체의 욕망이 아니라 진정성있는 태도로 끝까지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세요. 

사랑을 담아, 진심을 담아,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게 하소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 회개를 요청하게 하소서. 

사랑과 비판. 이 둘을 조화롭게 감당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20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14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화합하며,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더불어 함께 차지할 몫이 무엇이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일치하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너라. 그들과 떨어져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나 주가 말한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18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나 전능한 주가 말한다.”

 

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주석

14절 이 구절들 자체는 세상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나 교리적인 차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물러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상 숭배적인 식사나 예배에 참여하지 말라는 특정한 권고와 관련되어 있다. 분명 일부 고린도인들은 계속해서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BST 고린도후서). 

 

벨리알(15절) ‘벨리알’은 사단을 가리키는 또 다른 유대식 명칭이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정의와 불의, 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14절).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악과 함께 할 수 없으십니다(15절).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함께 있습니다(16-18절).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온전한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1절).

 

고린도 교회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첫 번째 편지(고린도전서)에서도 우상숭배에 대해 훈계했습니다. 이 일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거룩해지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희미해질 것입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1.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바울은 그간 고린도후서라는 편지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은유를 사용했다. 

그리스도의 향기, 편지, 대사 등의 개념을 가져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고귀하며 소중한 존재인지를 설파했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다시 한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특권, 책임, 축복을 말했다. 

오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의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은유다. 

유대교에서 성전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며, 그곳에서 드려지는 제사제도는 이스라엘 국가의 근간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성전의 기능이 유지될 때만 가능했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물리적 성전이 이제는 성도들의 모임, 바로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고린도교회라는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우리” 즉 고린도 교회의 성도와 바울 선교단이 성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한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주장이다. 

 

바울은 구약의 언약 공식을 사용한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사실 첫 번째 언약 공식은 상당히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두 번째는 몇 가지 구약 구절을 결합해야 만들어진다. 

바울은 구약의 언약 공식을 사용해 현재 교회의 위치와 신분을 확정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구약의 예언의 성취다. 

두 번째 언약 공식까지 도출한 것은 바울 신학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 일 것이다. 

이방인 지역에 있는 이방인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게다가 고린도 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 문제가 많았던 교회였다. 

분열이 있었고, 싸움이 있었고, 우상 숭배의 문제가 있었던 교회. 

그 교회를 보고 어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바울의 대담함이 여기서 보인다. 

아니 성령님의 담대함이 여기서 드러난다. 

 

작금의 교회도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백성, 자녀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데 중요하다. 

우리의 신분과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 거룩을 향한 걸음을 추진할 수 있다. 

 

2.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더러움은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육은 더럽고 영은 깨끗한 것이 아니다. 

육과 영은 더러울 수도 깨끗할 수도 있다. 

영/육 이분법으로는 바울의 논리를 설명할 수 없다. 

육과 영은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하느냐에 따라 깨끗할 수도 더러울 수도 있다. 

바울은 벨리알과 같은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멀어지라고 충고하고 있다. 

14절의 “믿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비그스도인 전체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비그리스도인 중 진리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상을 따르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과 짝하며, 사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확인해 보면 안다. 

그들은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해서, 심리적으로 조종해서, 육체와 영을 망가뜨린다. 

정신을 뺴앗고, 몸을 망가뜨리고, 범죄에 이용한다. 

<나는 신이다>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함부로 자신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사귀어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으며, 오히려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범죄 조직을 한 개인이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들과는 사귈 것이 아니라 싸워야 한다. 

인생을 걸어 싸우지 않는 한 승산이 없다. 

심리적으로 조종당하는 사이비, 우상 숭배자가 사회 곳곳에서 암약 중이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깨끗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곳,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곳으로 유지해야 한다. 

우상 숭배자가 성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움직이는 주님의 교회다. 

우리는 움직이는 주님의 성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요, 대사다. 

우리는 보물을 담은 질그릇이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며, 자녀다. 

이것들이 바울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과 공동체의 신분이며, 정체성이다.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하고 되새기고 각인시켜야 한다. 

바울의 그림 언어를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한다.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벨리알의 역사를 막고, 사이비 범죄 집단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 

특히 순진한 종교적인 사람들을 사이비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위대한 신분 상승이 주는 부담도 있지만, 역시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주된 감정이다. 

오늘도 그 감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 주의 시작을 감사로 시작하게 하셔서 고맙습니다. 

 

주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더욱 정결하고 거룩해지게 하옵소서. 

육과 영이 더욱 깨끗해져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더욱 향기롭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당신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게 하소서. 

하나님의 대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만방에 공표하게 하소서. 

더욱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도록 도와주세요. 

 

진정한 진리 되신 예수님, 

당신의 이름을 참칭하는 이단, 사이비 교주들을 벌하소서. 

돈과 성의 유혹에 넘어가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억압하는 자들을 심판하소서. 

돈과 범죄 네트워크로 사이비 종교들이 비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역사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17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6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주석

17절 당분간 여전히 옛 것이 지속되고 새 것이 아직 완전히 오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명의 새로움이다(IVP 성경주석).

 

18-20절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은 ‘화해하게 하는 말씀’을 바울에게 맡겨주셨다. 그래서 그분의 사절인 바울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분과 화해하게 되기를 권하신다(IVP 성경주석).

 

전에는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16절).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됐습니다(17절).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바울과 화해하시고, 바울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18절).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할 것을 권고합니다(20절).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2절).

 

화해는 그리스도에게 가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따지지 않는 대신,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에게 죄를 씌우셨습니다(19, 21절). 이는 육신의 잣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리스도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롭게 된 우리를 통해 화해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실 것입니다. 회심한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화해했습니다. 화해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묵상]

육신의 잣대로는 바울은 미쳤다는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육신의 잣대로는 바울과 그의 선교단이 극단적이고 이상적이고 비현실이라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육신의 잣대로는 스스로를 포장하지 않고 정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바울의 태도가 어리석다고 판단할지 모른다. 

육신의 잣대는 세상의 잣대다. 

세상이 판단하는 대로 그대로 가치 판단을 한다. 

그러면 바울의 삶은 더욱 초라해지며, 어찌보면 미친 짓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생명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다. 

그리고 오늘 분문에서 등장하듯이 그리스도의 대사다. 

화해의 직분, 화해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어디서나 화해를 촉진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을 허물어 주신 것처럼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도모한다. 

 

바울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분열을 치료하고 화해를 일으키고 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화해하도록 돕고 있다. 

평생의 업으로 알고 이리저리 분주하다. 

그 스스로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세상의 기준과 육신의 잣대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잣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이는 바울 혼자에게만 주신 역할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다. 

그러기에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대사다. 

그리스도의 사절이다. 

어디든 그리스도의 뜻을 알리고 그분을 대변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같은 성품과 능력으로 점점 자라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깊은 소통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원칙을 드러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대사, 사절은 비록 지내는 곳은 타국이지만, 본국과의 긴밀한 협의, 협조 속에서 본국의 뜻을 대변한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곳은 이 세상, 이 지구다. 

이곳을 벗어나지 말고, 본국의 뜻을 대변하는 일을 해야 한다. 

학교, 직장, 마을 어디서나 화해의 사절단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바울이 크게 외치듯이,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5장 20절이다. 하나님과 화해하라.

그것이 가장 우선이다. 

하나님과 불화하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대변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과 화해하기에 오늘날 만큼 좋은 날이 없다. 

예수님이 그 길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분이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그분이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수많은 매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고 있으며, 예수님이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화해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 은혜의 때라고 하는 것이다.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일단 화해의 시작이 일어난다. 

그 후로도 적극적으로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그래서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자신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면서 그분과의 화해를 시도한다. 

동시에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더 앞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은 이 때에도 은혜를 베푸신다. 

부족하다고 버리지 않으신다. 

화해를 위해 분투하는 삶을 칭찬하신다.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죄인들에게 의의 신분을 주셨다. 

대신 값을 치르셨다. 

사단의 올무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법적으로나 관계적으로 새로운 신분을 주신 것이다. 

의인이라는 신분이다. 

새로운 피조물은 의인이라는 신분에서 나온다. 

 

이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바울의 목표요, 나의 목표다. 

전국의 대학생들에게, 교회의 청년들에게, 행복기숙사의 대학생들에게, 전국의 청소년들에게… 

하나님과 화해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주님, 

죄책감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 말고,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가 너무 좋고 필요하기에 당신을 찾는 사람 되고 싶습니다.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 정서적 안정감을 찾는 얄팍한 신앙에서 벗어나 

화해의 사도, 화해의 사절단의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죄에 대해 무감각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더욱 예민해져야 그리스도의 대사 역할을 잘 감당하지 않겠습니까! 

매일 매일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하시되, 

또한 매일 매일 주님과 더욱 멀어지게 하소서. 

가까워서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알게 되고, 

멀어져서 죄인들의 세상에서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그 멀어짐이 화해를 위한 발단이 되길 원합니다. 

변화산에만 있을 수 없사오니, 산에서 내려가자는 주님 말씀을 따릅니다. 

 

오늘도 부담스런 시간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 시간들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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