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16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1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에도 우리가 환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12 그렇다고 해서 또 다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여러분에게 치켜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NASB

For the love of Christ controls us, having concluded this, that one died for all, therfore all died;(14절)

 

주석

두려움(11절), 사랑(14절) 성경에서 ‘두려움’은 잔뜩 움츠린 공포가 아니라 거룩한 경외이며,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희생적인 보살핌이다. 이 두 단어는 양립할 수 있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BST 고린도후서).

 

바울은 책임을 깨닫고 있고 그래서 바른 두려움이 있다. 또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알고 있고 그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해왔습니다(11절).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12절). 만약 그가 미쳤다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고, 온전했다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13절).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휘어잡혔습니다(14절).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었습니다(15절).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삶은 미친 것,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중심은 나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우리를 휘어잡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양합시다. 내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를 힘씁시다.

 

[오늘의 묵상]

말에는 힘이 있다. 

스스로 규정하기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말을 통해 사람들은 상상을 이어가고 감정을 나누고 행동을 촉진한다. 

 

설득하는 말, 자랑하는 말, 오늘 본문에는 이 두 가지 말이 나온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성도들의 마음을 바꾸어야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확립되고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다. 

바울파, 아볼로파, 바나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 대해 험담하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정당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부당한 험담은 조심해야 한다. 

죄와 싸워야 하건만 죄의 유혹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어조로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바울은 그 일을 해 온 것이다. 

 

자랑하는 말도 바울이 안 한 것은 아니다. 

그 자랑은 실체에 대한 자랑이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었다. 

그러한 고백이 아니고서야 자랑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고백의 중심에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자랑이다.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인 자신은 실제로는 보잘 것 없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였다. 

자신을 자랑하는 듯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고백으로 자랑한다. 

 

허나, 어떤 사람들은 삶의 고백이 아닌 허풍으로 자랑하기도 한다. 

속과 겉이 다르다. 

포장이다. 

속은 비어 있거나 썩어 있는데, 겉만 번지르하게 포장한다. 

그리고 마치 고귀한 것이 있는 둥, 자랑을 한다. 

이단이나 사이비가 하는 일이 그렇다. 

죄악에 둘러 쌓여 그 속은 곪아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도리어 생명을 위협하는데, 겉만 치장하여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문제는 그게 먹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속아 넘어간다. 

사이비의 달콤한 위장 전술에 속아서 정신세계를 갖다 바친다. 

허풍과 거짓의 사람들에게 당한다. 

 

바울은 이런 거짓의 사람들, 위선적인 사람들에게 진정한 소망, 진정한 자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말하라고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랑이다. 

자랑의 근거가 있으며, 그 근거는 삶으로 경험한 것들이다. 

성령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바꾸셨으며, 지금도 바꾸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삶의 변화가 없이 성령님의 역사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님은 마음에 영향을 주고 설득을 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여주고 살도록 추동하신다. 

그렇게 열매로 안다. 

성령님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는 삶의 변화, 삶의 열매로 안다. 

종교적 열정만으로는 진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 

감정적 고백만으로는 참된 자랑을 할 수 없다. 

삶의 실제적 변화가 따라와야 한다. 

 

애즈베리 대학교의 24시간 기도와 예배의 열정은 참으로 귀하다. 

그러나 참된 부흥은 24시간 예배당에 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죄의 고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회심은 회개로 이어진다. 

마음의 변화는 삶의 궤도 수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자신과 주변을 바꾸는 힘으로 작동된다. 

이것이 참된 부흥이며, 이것이 속이는 자들에게 보여줄 자랑의 근거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 변화된다. 

 

이런 것이 급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울을 미쳤다고 하기도 했다. 

바울의 대답은 수사적이다. 

미쳤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미친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온전한 정신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에 미쳐있다.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배와 어망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모양 그는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걸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삶 그 자체가 미친 것으로 비췰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미쳤는가? 

이유는 단호하다.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생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널리널리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즉 바울의 미침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바울을 미치게 했다. 

정신이 혼미하거나 정신 질환을 앓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추동시킨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미쳐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 때의 사랑은 집착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귀한 사랑에 의해, 희생적 사랑에 의해 삶의 변화를 겪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에 미친 것이다. 

고귀한 사랑을 받으니 사람이 미친다. 

그 사랑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호를 만들어야 했다.

미술 시간에 지우개 도장 파기가 있었는데, 두 글자로 내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주광” 주님께 미치다. 

그렇게 지었다. 

정말 예수님께 미쳐 있었다. 

그분이 나의 점심시간을 빼아갔으며, 하교길 친구들과의 노는 시간도 빼앗아 갔다. 

그 시간에 나는 종종 기도회에 참석했고, 

그 시간에 나는 종종 길거리 전도에 나갔다. 

어린 마음에 여물지 않는 신앙의 집착과도 같은 행동들이었다. 

부족했지만 부끄럽지 않고, 여물지 않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주광, 주님께 미친 자, 여전히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예수님을 온전히 미치고 싶다. 

온전한 정신으로 그분께 미친 자가 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주님,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게 하소서. 

열정만으로 이뤄진 부흥이 아니라 삶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부흥을 경험하게 하소서. 

회심 뿐 아니라 회개가 일어나게 하소서. 

24시간 기도하며 예배하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동시에 습관이 바뀌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해서 점점 예수님처럼 되어 가는 것, 이것이 베스트입니다. 

주님, 한국에 진정한 부흥을 주소서. 

주님을 향한 열망이 터져나오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흘러 나오게 하소서. 

제가 섬기는 공동체가 부흥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기에 변화되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15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2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이 장막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3 우리가 이 장막을 벗을지라도, 벗은 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4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5 이런 일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몸을 입고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압니다.

7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8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

9 그러므로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서 있든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0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

 

NIV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9절).

 

주석

9절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미래 상태에 관한 사색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게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결심이다(IVP 성경주석).

 

땅의 장막집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은 우리를 짓누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영원한 집이 있으니 괜찮다고 말합니다(1-4절).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집이 땅의 장막집 위에 덧입혀질 것입니다(2절). 짓눌린 탄식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것입니다(4절). 결국 우리는 어디서든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6-9절).

 

‘땅과 하늘, 무너질 집과 영원한 집, 벗는 것과 입는 것, 죽음과 생명, 떠나는 것과 함께 사는 것, 보는 것과 믿는 것’처럼, 첨예한 갈등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각 사람은 선택에 따른 마땅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10절). 우리는 하나님이 덧입히실 것을 갈망하면서도 견고하게 실재하는 현실을 탄식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말씀에는 헷갈리게 하는 구절이 있다. 

6절이다. “우리가 육체의 몸을 입고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압니다”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동안 바울은 우리가 주 안에 있음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 안에서 살아간다. 

육체의 몸을 입고 산다는 것이 주님과 떠나 산다는 의미와 동격은 아닐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7절에 힌트가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주님에게서 떠나 산다는 말을 다시 풀어 보면, 주님을 직접 보면서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분을 우리가 직접 보면서 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육체적으로는 혹은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지내는 것이 맞다. 

그래서 우리에겐 믿음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그분의 임재를 믿음으로써 살아간다. 

바울은 이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 겪는 수많은 고난과 고충, 이것들은 육체로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어려움이다. 

그래서 바울이 갈망하는 것은 차라리 육체를 떠나 예수님을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육체로 살든지, 육을 떠나 예수님께 가든지, 그의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더불어서 일을 하게 되면, 언제나 어려움이 찾아온다. 

서로의 욕구와 욕망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우선순위가 다 다르다. 

그러니 아무리 기독공동체라도 서로 협력해야 하는 순간에 갈등과 긴장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걸 해결해야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다. 

육체는 욕망에 의해 작동된다. 

먹는 것, 자는 것, 섹스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충동적으로 올라온다. 

돈, 명예, 섹스는 육체가 언제나 지향하는 것들이다. 

이런 충동 자체가 어찌 나쁜 일이겠는가? 

이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고 폭주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죄악이다. 

이런 육체에 매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감당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며 위험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역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진정 하나님의 역사요, 성령님의 도우심이다. 

각자의 욕구와 욕망을 줄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춘다. 

돈도, 명예도, 자존심도, 성욕도, 인적욕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님의 열매 중 하나가 절제라는 것은 다시 생각해도 귀하다. 

2023년 03월 14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8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2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13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5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17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주석

질그릇(7절) 복음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값싸고 쉽게 깨지는 ‘질그릇’으로 비유되었다. 이는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IVP 성경주석).

 

10절 ‘예수의 죽임 당하심’이라는 표현에 사용한 용어는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자에게서 나는 악취와 썩는 과정을 함축한다. ‘짊어짐’은 관을 메는 자를 가리킬 때 쓰던 전형적인 용어였다. 이것은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매일 겪는 핍박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음을 생생하게 묘사한다(IVP 성경배경주석).

 

우리는 복음의 영광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7절). 바울의 삶은 항상 죽음의 위협과 고난으로 위태로웠지만(10-12절), 복음의 영광은 그를 날로 새롭게 만들었습니다(14-16절). 그렇기에 바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예수의 생명을 바라봅니다(18절).

 

보물과 질그릇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질그릇은 부서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가 겪는 고난을 통해서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십니다. 어느 것도 복음의 영광을 가리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존재의 연약함과 고난으로 낙심하지 맙시다. 나를 날로 새롭게 하실 예수의 생명을 바라봅시다.

 

[오늘의 묵상]

몇 해 전 청소년 집회에 간 적이 있다. 

질그룻 속의 보물이라는 주제를 그토록 강렬하게 전달하는 설교자를 본 적이 없었다. 

모든 힘을 쏟아 내어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우리가 담고 있는 것은 보물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말씀을 전했다. 

그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 말씀을 그동안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이 비유를 자주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과 그에 상반되는 복음과 예수님의 위대함을 이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바울과 그의 선교팀은 수 많은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방에서 그를 공격한다. 

외부적으로는 이방인들과 로마 당국자들이 노려본다. 

준외부적으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성도들 중에 일부가 바울을 비판하고 깍아내리려고 하고 있다. 

조용히 살면 굳이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안디옥교회에 있으면서 성도들을 돕고 말씀을 잘 가르치면 굳이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되어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전세계를 다니면서 새로운 복음 운동, 예수 운동을 일으키니 적이 많아진다. 

이방 세계의 심장을 찾아다니면서 진정한,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을 전하니 반대가 심하다. 

지중해 세계를 다니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우니 유대인들의 화살이 계속 날아온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죽음과 가까이 살아간다. 

그래서 죽음이 자신과 선교팀에 작용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단의 거짓과 위협이 바울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죽음과 사망의 위협을 뚫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통해 사람들이 살아난다. 

새로운 영적 생명이 탄생한다. 

사람들이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살아난다. 

하나님은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고, 성령님이 운행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뜻이 실현된다. 

생명이 작용하는 것이다. 

생명나무의 실과가 드디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사건 이후에 멀어졌던 생명나무의 영향이 이제 다시 출현한다. 

사람들은 다시 살아난다. 

 

이러니 자신들이 비록 고난 속에서 죽을 것 같지만, 계속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나눠주기 위해 노력한다. 

복음이 작동하고 작용하도록 그 길을 계속 걷는다.

그러다보니 몸은 조금씩 망가지고 통증도 쉬이 사라지지 않지만, 마음 속 만은 기쁨으로 감사로 가득하다.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 

새로운 생명을 품으니 속사람은 새로워진다. 

 

코로나를 겪으며, 기독 공동체가 점점 약해진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단순히 인원이 줄어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작용한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아서 힘들었던 것 같다. 

사람들 마음 속에 생명의 기운이 넘쳐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늘지 않아서 낙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겉으로 당하는 힘듦과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복음의 능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느낀다면 그것을 견디는 것이 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성령님은 일하시고, 조금씩 사람과 공동체를 회복시켜 나가신다. 

그 회복의 시기를 보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회복의 기운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나는 질그릇 같이 부족하고 연약하다. 

쉽게 상처 받고, 고난 받고, 흠집이 난다. 

때로는 깨지기도 한다. 

그러나 깨지면 그 보석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난다. 

나는 깨지지만 보석이 더 잘 드러난다면 한편 감사한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깨지는 사람들이다. 

그 깨짐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 깨짐과 회복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욱 빛나게 밝혀진다. 

 

내 영혼에게 말한다. 

깨짐을 혐오하거나 공포로 여기지 말라. 

그 깨짐 이후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라. 

 

 

[오늘의 기도]

주님, 

저는 연약합니다. 

저는 질그릇 같이 쉽게 상처 받고 쉽게 깨집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영광받으시고,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다면, 그 깨어짐을 기쁘게 받으들이겠습니다. 

깨어짐이 두려워 주님께서 주신 소명의 삶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대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생명이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캠퍼스 곳곳에서 열심히 전도하고 관계맺고 말씀을 가르치는 간사님들을 도와주세요. 

모임 할 때마다 학생들이 주님을 더 알게 하시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사이비 교주들과 그 조직들을 벌하소서. 

자신이 신이 되어 사람들을 옭아매는 거짓의 사람들을 벌하소서. 

 

오늘도 보물되신 예수님이 더 많이 등장하길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13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2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3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4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6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NIV

For God, who said, "Let light shine out of darkness," made his light shine in our hearts to give us the light of the knowledge of God's glory displayed in the face of Christ(6절).

 

주석

5절 바울과 같은 도덕 교사들은, 자신을 전파한다고 비난받는 것에 대비해서 언제나 자신을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비난을 물리친다(IVP 성경배경주석).

 

바울은 부끄러운 일들을 배격했고, 간교와 왜곡 없이 진리를 환히 드러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떳떳합니다(2절). 반면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은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합니다(3-4절).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두워진 마음속을 비추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5-6절). 

 

바울은 많은 이에게 복음이 가려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3-4절). 진리가 왜곡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신’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둠으로 진리를 가립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묵상]

바울은 부끄러운 일들을 배격했다. 

간교하게 행하지 않는다. 즉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교묘하게 조종하지 않는다. 

가스라이팅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 같지 않다. 

말씀에 권위가 있으니, 그 말씀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득을 확장시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돈과 명예다. 

돈과 명예가 사람들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 

양심을 판다. 

속으로는 아닌 것을 알지만, 한번 속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의 교묘한 거짓말에 속아 자신도 남도 거짓에 사람들이 되게 한다. 

그러기에 항상 빛으로 드러내야 한다.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을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속이지 않는 방법이다. 

빛으로 다니는 것, 빛으로 비추는 것,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 세상의 신은 사람들이 스스로 속고 속이도록 만들어 결국 양심을 가린다. 

양심 곧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말을 걸어오기도 하시고, 성경 말씀을 떠오르게도 하시고, 중요한 이미지를 보여주시기도 하신다. 

그런데 그 양심이 거짓으로 더럽혀지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진다. 

그분의 이미지가 흐려진다.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양심을 완전히 세상에 신에 잠식당하기 전에라도 양심은 그 기능의 많은 부분이 훼손된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곳,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 그곳은 양심 곧 마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들의 소통 공간인 마음이 어두워지거나 더럽혀지면 그만큼 하나님의 존재가 희미해진다.  

세상의 신들은 그것을 유도한다. 

 

세상의 신들의 속임수에 갇히면, 예수님이 아닌 어떤 한 인간을 신격화하기도 한다. 

사이비 교주의 시작이다. 

한국에는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100명이란다. 

메시아들을 다 한 자리에 모으면 서로 뭐라고 말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주장 외에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 

복음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 

무식한 자기 확신의 대담하고 쌍스러운 발언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양심을 옭아매는 거짓말에 속지 않기 위해 우리는 빛으로 나아와야 한다. 

예수님만이 참 빛이시다. 

그 빛을 참칭하는 자,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구원이요, 참 빛이시다. 

이 사실을 우뚝 앞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그분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요, 종이요, 섬김이다. 

 

마음 속에 빛을 비추어 자신만 알고 있던 모든 비밀을 드러낸다. 

죄와 거짓과 욕망을 드러낸다. 

부끄럽지만, 그 수치와 부끄럼도 드러낸다. 

거짓없이 속임수 없이 다시 시작한다. 

100% 완전한 솔직함이라는 것이 어디있겠냐마는, 최선을 다해 정직을 연습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솔직하다. 

빛이 비추었기 때문이다. 

그 빛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기능이 마음 속에서 성장한다. 


<더 글로리>와 <나는 신이다>가 사람들 사이에 화제다. 

가상의 학교 폭력과 실제의 종교 폭력이 드라마와 다큐로 제작되었다. 

드라마라고 해서 현실보다 더 끔찍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한국 사회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교 폭력에 연루되어 있다. 

자신들의 과거가 자신들을 옭아맨다. 

참 자유를 위해 정직한 자기 고백과 회심이 필요하다. 

 

나는 빛으로 걷고 있는가? 

속고 있지는 않는지, 속이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한다. 

정직한 말로 나아가자. 

모든 것을 아시는 친절한 그분께 솔직하게 나아가자.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솔직히 말하는 연습을 더 하자. 

오늘의 결심이다. 

 

[오늘의 기도]

빛이 되신 예수님, 

제 마음에 정직한 영, 정직한 마음을 허락하소서. 

스스로 속고 속이는 바보같은 사람 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열망을 인식하고, 그 열망을 정직하게 풀어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억지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느라 양심과 마음을 흐리고하고, 블러처리하지 않게 하소서. 

타인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제 마음의 소리를 왜곡시키지 않도록, 

오랜된 습관이라고, 성격의 일부라고 변명하지 않도록 

주님, 제게 용기와 힘을 공급하소서. 

 

이번 한 주도 주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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