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31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2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되려고 하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척도로 하여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13 우리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른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한계를 벗어나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15 우리는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활동 범위가 여러분 가운데서 더 넓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16 우리는 여러분의 지역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요,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17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18 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

 

NIV

Neither do we go beyond our limits by boasting of work done by others. Our hope is that, as your faith continues to grow, our sphere of activity among you will greatly expand(15절),

 

자기를 척도로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자기를 견주어 보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12절). 하나님이 기준이 된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 안에서 자랑하고 행동합니다(13-14절). 바울은 주제넘게 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15-16절).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주님이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17-18절).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또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 행동하기도 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하느냐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랑하고, 주님의 인정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한계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묵상]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순간, 사람은 신이 되려는 유혹에 빠진다. 

아담과 하와가 빠진 유혹이 바로 그것이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신이 되라고 유혹한다. 

자기 스스로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라고 한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신이 되려고 했다. 

신바벨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나 벨사살 왕도 그런 유혹에 빠졌었다. 

로마의 황제들도 마찬가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철처한 나르시스트가 되어 신처럼 행동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정해주신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 

사실 그 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오직 하나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자기의 욕망이, 자기의 생각이 최종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 그것이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정말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하나님께 물어야 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했으니, 일단 먹지 말아야 했고, 정말 먹고 싶었으면 다시 물어볼 일이다.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니까. 

그런데 그 한계를 자기 척도로 넘어 버린 것이다. 

 

바울은 자기 척도와 스스로와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아마도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자신의 기준을 강제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성경 교사가 건강하게 뿌려놓은 씨앗을 짓밟고 밭을 헤집고 다니는 교사들이 있었던 것 같다. 

신천지의 행태와 비슷하다. 

정직하게 서로 토론하면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판단하도록 돕는 일이 우선이다.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15절)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내에 파당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난다.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자랑”(16절)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경쟁 구도가 생기고 서로 갈등이 일어난다. 

이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정직하게 복음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한 일을 말하면 된다. 

과도하게 포장하지도 축소하지 않아도 된다. 

정직하게 내가 한 일과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면 된다. 

 

사람들 앞에 인정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에 너무 신경쓸 필요는 없다. 

결국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주님께서 세워주시는 사람이다. 

주님이 세워주실 때, 그 사람의 권위와 인기가 올라간다. 

단순히 올라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권위와 인기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인정과 인기가 중요하다. 

그게 곧 돈이 되고, 삶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진다. 

심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실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따라서 인정과 인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한계를 넘어선 인정과 인기의 추구가 결국 독이 된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는데, 스스로 세우려고 하면 결국 분열과 싸움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세우실 때를 기달릴 수 있어야 하며, 그 때까지는 겸손하게 그저 자기의 일을 할 뿐이다. 

인정과 인기는 권력을 얻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권력이 커진다는 말은 독점적 지위를 갖는다는 말과 같다. 

인정과 인기가 몰리면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되고, 권력이 몰린다. 

그러니 시기하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이 생기고, 공동체나 교회는 분열의 길로 가게 된다. 

바울은 이런 메카니즘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졌던 파당 논란을 다뤘던 당사자로서, 한계를 벗어난 자랑과 인위적인 인정 추구가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 그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했을 것. 

 

다만, 바울이 이렇게 비판하면, 상대측에서도 비판할 것이 눈에 뻔히 보인다. 

말과 말의 싸움은 끝이 없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교통정리를 해 주셔야 하는데, 그걸 분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서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하니… 

그야말로 바울파도 베드로파도 아볼로파 아닌 그리스도파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 스승이시요, 구주이시다.’

이런 고백만으로 그리스도파로 남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말싸움이 아니라 화해와 하나됨으로 결론 날 수 있을까? 

 

오늘의 물음이다. 

 

[오늘의 기도]

한계를 지어주시는 주님, 

저는 그 한계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깁니다. 

그 한계는 자유를 제한하는 선이 아닙니다. 

그 한계는 오히려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선입니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계를 지켜야 합니다. 

내가 기준이 되고 척도가 되는 순간, 아담의 죄를 저지르게 되고, 죄악의 폭주기관차가 됩니다. 

주님, 자유가 최고 가치가 아니라 사랑이 최고 가치가 되게 하소서. 

나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 이웃 사랑이 더욱 높은 가치가 되게 하소서. 

그 사랑을 알고 실천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길 원합니다. 

 

주님, 

저에게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독 공동체가 말싸움이 아니라 서로 하나되고 사랑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겉으로는 그리스도파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서로 자기 라인을 그리고 있다면 과연 말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도우심으로 깨닫기 원합니다. 

파당이 아니라, 하나됨으로 마무리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30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7 여러분은 겉모양만 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면,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인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스스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8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내가 좀 지나치게 자랑했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넘어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주신 것이므로,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9 나는 편지로 여러분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10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로 쓰는 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석

겉모양(7절) 고린도인이 겉모습을 지나치게 중요시한 것은 궤변론자들이 적당하고 설득력 있는 말에만 신경을 썼던 것과 비슷하다. 더 부유한 고린도인은 바울이 자신들의 문화적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고 공격했다(IVP 성경배경주석).

 

겉모양만 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합니다(7절). 바울의 권위는 겉모양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이 권위는 사람을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8절).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고린도 교회를 대했습니다(9-11절). 

 

사람이 보기에 바울의 겉모습은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 또한 당시 헬라의 웅변가들과 비교했을 때 변변치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관용과 사랑과 헌신을 권위로 인정하지 않고, 멸시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담대하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세우기 위한 권위였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힘과 권위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묵상]

여전히 사람들은 말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단순히 웅변가, 달변가가 아니라, 재밌으면서도 의미있는 메시지를 잘 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대중 강연자로 나서는 사람들은 대체로 재밌고 메시지가 뚜렷하다. 

세바시, 테드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 계의 전문가 이기도 하지만 전달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다. 

김미경, 김창옥, 설민석 등의 유명 강사들의 강의를 이제 유투브를 통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듣는다. 

 

바울 시대에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나보다. 

사람들은 희랍의 여러 철학자들, 웅변가들, 소피스트 들의 말을 더 재밌고, 권위있게 느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비슷한 관점으로 바울을 평가한다. 

달변이 아닌 것을 넘어 도리어 말 주변이 없다고 평가한다. 

한 두 사람의 평가를 이렇게 편지에 담지는 않았을 터. 

게다사 한 두 사람의 평가가 이렇게까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 

고린도교회 지도급의 사람들 사이에서 바울에 대한 비슷한 평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내용이 바울에게까지 들렸고, 바울은 아쉽고 슬프고 약간 뽐새가 빠지는 말이지만, 자기 스스로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다.

자기 스스로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 바울에게는 무척 아쉽고 안따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건강한 권위가 필요했다. 

복음을 왜곡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집중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바꾸어야 했다. 

누군가는 크게 혼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교회를 떠나기도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위해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일에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단, 사이비를 분별하고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그 때 사용되는 권위가 건강한 권위이다. 

교회를 세우는 권위다. 

성도들을 보호하는 권위다. 

권위자의 안위가 아니라 성도의 안위를 위해 사용되는 권위이다. 

 

바울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평가가 있었다. 

글은 힘이 있어 보이지만, 실상 만나면 말주변이 없다는 식의 평가다. 

바울이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언급한다. 

편지에서의 말과 실제 행함에서의 일이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비판자들은 글과 말이 다르다고 비평하지만, 바울은 말과 일의 일치를 언급한다. 

이 지점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말이나 글이나 지적 작용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내면적인 작업이다. 

하지만 행함은 나를 넘어서는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일어난다. 

말과 글은 진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 

행함이 진정성을 드러낸다. 

말과 행함이 일치한다면, 그것은 성인에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글과 말은 사람마다 개인적 특징이 있고 능력에 차이가 난다. 

핵심은 말글이 자신의 행동과 일치하느냐이다. 

로고스만 아니라 에토스가 따라와야 한다. 

말이 실천적 윤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과연 그의 진정성을 어떻게 확보하겠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말하고 써야 한다. 

사실의 적시야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위적 언명은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해야 한다” “하라” 등의 문장과 말을 했을 때는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게 설교자의 고문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말과 글로 고문을 당한다. 

그 높은 기준을 스스로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르치면서도 고통스럽다. 

그 고통을 피하지 않으면서, “해야 한다”로 강조하는 사람들이 설교자다. 

 

바울은 자신이 말한 것을 어느 정도는 잘 지켜내고 있었던 것 같다. 

복음에 대해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서도,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진정성은 주변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였다. 

그렇다고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족한 것이 있었기에,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는 표현도 쓰고, 곤고한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다고 모든 편지에 절절히 썼다. 

자비량 선교사로서 사람들의 헌금에 의존하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그거보다 더 대단한 것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거룩으로 나아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고백한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이다. 

 

자신이 말한 대로, 글 쓴대로 사는 사람들이 존경받아야 하고, 대우 받아야 한다. 

그 권위를 세워줘야 한다. 

말글과 행함이 일치하는 사람.

그 일치를 위해 매일 매일 노력하는 사람. 

나의 원너비다. 

쉽지 않으니 고문과도 같지만 말이다. 

기쁘게 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저의 말과 글이 저의 행동과 일치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게 해 주세요. 

그것 또한 제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매주 하는 설교, 매일 쓰는 묵상글… 

모든 것이 기록에 남습니다. 

부끄럽고 또한 두렵습니다. 

제가 한 말과 글로 저를 평가한다면, 생각조차 두렵습니다. 

최선을 다해 매일 노력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억지로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인도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오늘 저녁에 예배가 있습니다. 

Youth-worship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29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관대하심을 힘입어서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

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강경하다고들 합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청하는 것은, 내가 가서 여러분을 대할 때에 강경하게 대해야 할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정을 따라서 처신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대하려고 생각합니다.

3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4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궤변을 무찌르고,

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6 그리고 여러분이 온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모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NIV

For though we live in the world, we do not wage war as the world does(3절).

 

주석

온유하심과 관대하심(1절) 그리스도의 ‘유순함(온유)’과 ‘관대함’은 마태복음 11:29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헬라 문화는 온유함을 덕목으로 여기지 않았다(IVP 성경배경주석).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유순함과 관대함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입니다(1절). 바울은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좋은 무기의 조건은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고 교만한 생각을 쳐부숴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권위가 없고, 사도로서 비범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강조했습니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우월해 보이는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육정을 따라 싸우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육체의 무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갑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 편지에서 주제가 갑자기 바뀐다. 

이제까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에 대해 열심을 내어줄 것을 부탁했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기근으로 인해 고통받는 성도들을 돕자고 요청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뭔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누군가가 바울을 평가하고 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할 때는 온유하고 부드러운데, 편지로 이야기 할 때는 날카롭고 강경하니, 도대체 바울의 진짜 성격은 무엇인가 등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바울이 기본적으로 강경한 사람에 속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스데반이 죽을 때에도 바울은 강경했다. 

자신의 신념에 있어서 흐뜨러짐이 별로 없다. 

그 신념이 행동으로 이어진다. 

바나바와 싸울 때도 그렇다. 

마가가 1차 선교 여행 때, 중도 포기 한 것에 대해 크게 실망한 바울은 다음 선교 여행 때는 마가를 배제했다. 

바나바는 마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고 했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바울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철두철미하고, 완벽주의에 가깝고, 신념이 투철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베드로와도 싸웠다.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베드로를 강하게 비판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신앙의 기초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러니 편지가 강경하다는 인상이 남을 만 하다. 

내 생각엔, 편지만 강경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의 성격은 올곧고 분명하고 신념에 투철해서, 만나서 대화를 해도 그의 단호한 모습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언제부턴지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함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마음 속이야 강경하고 담대하고 두려움이 별로 없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율법을 연구하면서 학자로서의 강경한 양심의 소유자였을 것이지만,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조금씩 조금씩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무엇인지, 성도들을 돌보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이다.

자신의 성격의 모난 부분을 다뤄가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경험했다. 

그러니 이제는 사람들을 만날 때, 무조건 강경하게, 단호하게, 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대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마가를 용서하고 그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르는 모습에서도 보면, 바울은 점점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고 본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그와 같은 표현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얼마나 많은 묵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 깊이를 오랫동안 묵상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사람이 바뀐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온유함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 일부는 그 온유함을 비판하고 있다. 

카리스마 있는 다른 교사들과 비교하면서 바울을 비난하고 있다. 

사람들과 있을 때는 제대로 말도 못하면서, 편지에는 강경하게 쓴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바램은 성도들이 그들의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쌓아가는 것이다. 

자신들의 지식의 교만함을 버리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우상들이 만들어 내는 지식이 있다. 

우상숭배자들이 만들어 내는 정보와 생각의 틀이 있다. 

JMS, 아가동산, 만민성결교회와 이단, 사이비를 보라. 

자신이 신이 되어 사람들을 현혹한다. 

선악의 판단을 자기 스스로 내린다. 

교주를 세우고, 그 위계를 만들어, 자신들의 왕국을 만든다. 

교주도 악하지만, 그 바로 밑에서 이용하는 제 2-3위의 권력자들도 악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지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체계, 시스템을 강화시킨다.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그 교만함을 버리지를 못한다. 

자신이 최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듯이 생각한다. 

모든 생각과 그 생각의 틀 모두가 그리스도께 반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언젠가는 칼을 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온유함으로 권유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글은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때문에, 또한 지면의 한계 때문에 딱딱하고 정리되어 제시된다. 

그러기에 강경해보이고 단호해 보인다. 

말과 대화는 사랑하는 상대가 있고, 상황이 각자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그 뉘앙스와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비판한다면, 그것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만약 그 비판이 선을 넘고 도에 지나쳐,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그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따라서 언젠가는 아주 단호하고 담대하게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가짐이다.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이 신이 되어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을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다 알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거나 교회를 이용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한다. 

담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훼손되고, 왜곡되고, 성도들이 피해를 입는다. 

물질적 피해만이 아니라 영적 피해다.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정신적 세뇌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이런 싸움을 싸워야 할 때도, 세상의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을 최우선적으로 의지한다. 

육체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무기를 사용한다.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힘이다. 

바울은 숱하게 경험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는 알고 있다. 

육체의 무기는 분노와 복수를 낳지만, 성령님의 무기는 양심을 건드리고, 회개에 이르게 하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한다. 

 

온유함, 단호함, 성령님께 대한 의존… 

바울의 삶과 사역의 태도에서 이런 요소들이 춤을 춘다. 

예술적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예술적 조합이 이뤄져, 예수님의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바울은 예수님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태도가 점점 드러난다. 

그렇게 한 개인이, 한 인간이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온유함, 단호함, 성령님께 대한 의존… 

 

오늘 내가 배워야 할 점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아침부터 몸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납니다. 

짜증과 무기력으로부터 저를 건져주소서.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참고 인내하고 온유함으로 대하려는 바울을 봅니다. 

그럼에도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불타는 열정으로 분명하게 기준을 제시하는 바울을 봅니다. 

주님, 저런 사람으로 자라가고 싶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온유함과 담대함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성령님께 의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28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6 요점은 이러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7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갖 은혜가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하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에 언제나,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9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한 것과 같습니다.

10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씨를 마련하여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여러분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11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12 여러분이 수행하는 이 봉사의 일은 성도들의 궁핍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넘치게 드리게 할 것입니다.

13 여러분의 이 봉사의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또 그들과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도움을 보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14 그들은 또한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때문에 여러분을 그리워하면서, 여러분을 두고 기도할 것입니다.

15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NIV

Thanks be to God for his indescribable gift!(15절)

 

주석

12절 예루살렘 성도들 중 가난한 사람들은 주후 46년경에 시작된 팔레스타인 기근의 여파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여파가 얼마나 멀리 미쳤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헌금을 모으는 일은 매우 궁핍하던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BST 고린도후서).

 

바울은 요점을 한 번 더 강조하며 정리합니다.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7절). 이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 온갖 넘치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을 통해 구제받는 이들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8-15절).

 

하나님은 가장 선한 방식으로 가난한 자를 도우시며, 이로 말미암아 넘치는 은혜를 모두 함께 누리게 하십니다. 구제의 대상은 극심한 기근을 겪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봉사는 이방인에게도 화해의 직분과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 됐습니다. 우리 주변에 가난하고 메마른 곳은 어디인가요? 그곳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화해와 생명을 증언합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이 요점을 명확히 밝혀 주니 참 고맙다. 

바울의 요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구제 헌금을 많이 하라.

다른 하나는 각자 정한대로 기쁜 마음으로 하라.

기근 속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위해 돈을 모금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부유한 사람들이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부유한 사람들의 부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이 부를 한 곳으로 모은다. 

사람들의 기호가 부의 이동을 부른다. 

사람들의 기호는 사회적 현상이며, 때로는 조작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인정과 기호를 통해 상품이 판매되고 돈이 움직인다. 

연예인이든, 대기업이든 자신들의 부는 어찌보면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에서 나온다. 

그러니 사회적 인정과 사랑이 그들의 부가 되는 것이다. 

출발점도 다 다르다. 

금수저가 있고, 흙수저가 있다. 

물론 환경이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다. 

어쨌든 부는 사회적 산물이다. 

부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이 유지, 관리, 혁신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부를 나누는 행위는 사회 시스템의 유지, 관리, 혁신에 도움이 된다. 

가난한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 시스템으로는 현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사람들은 매정하고 냉혹한 사회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물며 일반 사회도 이렇게 복지를 위해 애를 쓰는데, 하나님 나라는 더욱 그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더욱 힘을 다해 나눔을 권면하고 있다. 

많이 내는 사람들을 통해, 그 헌금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누린다. 

사회적 부가 공유된다.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재정적 서포트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억지로 무리해서 내서는 안된다. 

기쁘게 낼 수 있을 정도로 내는 것이 합당하다. 

억지로 기쁨을 조작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구제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이 봉사의 일은 사람들의 궁핍함과 핍절함을 돕는데 크게 사용된다. 

동시에 이 봉사가 하나님께 감사가 되게 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교회가 최선을 다할 때, 사람들은 교인들에게 감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일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 조성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신다. 

 

억압받아 고통 속에 있으면 자연스레 가난해 진다. 

재물을 축적하기가 어려워진다. 

정부의 압박은 시장에서 퇴출될 정도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억압받는 사람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그래서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친일파들이 축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일본제국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민족적 자존심보다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에 끌렸던 사람들이다. 

일본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에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권력가의 편을 드니 재물이 모인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재산을 잃는다. 

 

하나님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출하기를 원하신다. 

억울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풀기를 원하신다. 

갇힌 사람들이 다시 풀려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자유로이 사람 살 만한 공간을 창출하기 원하신다. 

이 일을 위해 돈을 쓰고, 에너지를 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시선이 머문다. 

좀 과장하면,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억울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가장 오래 가장 밀도있게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냥 들어갈 수 없으니, 자신이 가진 돈을 가지고 들어가면 된다.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만나는 최상의 방법이다. 

성경공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성경공부는 자연스레 삶으로 이어져야 하며, 성경공부가 지향하는 삶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과의 공동식사다.  

 

** 목회데이터연구소, Numbers 183. 

 

 

보호종료아동이라는 단어가 자립준비청년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보육원을 졸업하고 자립준비하는 청년들 중에 50%가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얼까 다시 고민해 본다. 

우리 교회 바로 옆이 “송죽원”인데,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의 기도]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 되어 주시는 주님, 

억압받는 백성들 곁에 계셔 주시는 주님, 

주님을 더 깊이 느끼고 경험하길 원합니다. 

내면 속에서, 기도 속에서 만나는 주님도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상한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만난다면 더욱 기쁘고 감사할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상처입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깊이 파였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믿기지 않습니다. 

주님, 고통받는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셔서 위로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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