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10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7 돌판에다 문자로 새긴 율법을 선포할 때에도, 광채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그 광채 때문에, 비록 곧 사라질 것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에도 이러한 영광이 따랐는데,

8 하물며 영의 직분에는 더욱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9 유죄를 선고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으면, 의를 베푸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10 참으로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이제 훨씬 더 빛나는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 빛을 잃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11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도 생길 때에 영광을 입었으니, 길이 남을 것은 더욱 영광 속에 있을 것입니다.

 

주석

7-8절 바울은 옛 언약에 영광이 동반된 것을 인정하지만 새 언약에는 더욱 큰 영광이 동반된다고 주장한다(IVP 성경주석).

 

돌판에 새긴 옛 언약은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새 언약은 사람을 살립니다(6-8절). 옛 언약은 유죄를 선고하지만, 새 언약은 의를 베풉니다(9절). 새 언약의 영광이 훨씬 더 빛나기 때문에, 옛 언약은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10절). 옛 언약은 사라질 것이지만, 새 언약은 빛나는 영광 속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11절).

 

옛 언약을 강조한 사람들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정죄했습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은 의를 베풀며 성령을 약속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과 만나지 못하게 만드는 옛 언약은 무엇인가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다가 갑자기 신학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추천장 사건이 신학적 사고로 이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문서로 작성된 추천장이 아니라, 바울이 전도하고 가르친 사람들 마음 속에 새겨진 새로운 언약이 바울의 추천장이었다. 

그러기에 그 추천장에 대한 설명을 더욱 신학적으로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영이 대조를 이룬다. 

돌판에 새긴 율법의 역할은 대체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록해 두었고, 그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어겼을 때 어떤 처벌을 받는지가 주를 이룬다. 

물론 제사 제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언약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율법의 메인은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고, 십계명에서 파생된 여러 규정들이며, 이는 해야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집중한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처벌하고 구제한다. 

율법에 은혜가 없는가? 

아니다. 율법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담겨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기보다 법률로 해석하고 처벌의 기준으로 삼으며, 때로는 이 법률로 사람을 처형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길거리 집단 사형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 성령의 법은 다르다. 

사람을 죽이는대신 살리는 일에 집중한다. 

회복시키고, 원형을 보존하고, 다시 시작할 힘과 용기를 공급하신다. 

죄인의 죄인됨을 율법의 규정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 양심의 법으로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돕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도록 돕는다. 

따라서 영은 생명이며, 그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의 직분을 갖고 사는 것이다. 

율법도 영광 속에서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더욱 큰 영광으로부터 왔으며, 더욱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전 우주적 영광을 통해 성령님이 폭발적으로 운행하시게 되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영광을 사람들 마음 속에 그야말로 각인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차리고 감지하고 반응할 수 있는 마음 상태가 되게 하신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직접 성령님을 통해 일하신다.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이제는 영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오셨다. 

영원한 진리이며, 이로써 모든 영광보다 뛰어난 영광이 되셨다. 

 

사람들은 이제 성령님을 통해 새 언약으로 들어간다. 

새 언약은 마음 속에 새겨지고, 언제든지 확인이 가능하다. 

성령님의 마음 속 역사를 감지하게 된다. 

사람들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그 사람들을 통해 세상의 역사를 이끄신다. 

따라서 세상에 개입하시는 성령님을 감지하는 능력도 조금씩 길러진다. 

악한 영의 개입도 많기 때문에 분별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씩 알아간다. 

하나님 나라를 추동하시는 성령님의 개입을 알아차린다. 

새 언약 백성들은 그렇게 성령님의 일하심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거짓을 폭로하시는 성령님을 본다. 

JMS를 비롯해서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거짓을 세상에 알린다. 

이만희, 정명석같은 자들의 거짓을 폭로하신다. 

병을 고친다고 하고 미래를 알아 맞춘다고 해서 모두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무당이 하는 일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그 열매로 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여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섬기셨다.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으셨다. 

신도를 강간하고 가스라이팅하고 죽인다고 협박하는 교주가 어떻게 예수님이요 메시아라고 할 수 있는가? 

왜 성경을 비유로 풀려고 하는가?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서사가 있으니, 모든 것을 비유로 풀려는 시도는 사이비의 전유물이다. 

 

성령님은 거짓을 폭로하고 진리를 보존하신다. 

역사를 왜곡하려는 자들은 성령님과 거리가 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함부로 왜곡한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정치적 유불리를 따진다. 

진실을 기반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중심으로 결정한다. 

거짓 속에 탐욕이 있고, 그 탐욕을 이용해 사단이 활동한다. 

성령님은 진실을 좋아하시고,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신다. 

감추지 않으시고 빛으로 드러내셔서 만천하가 알게 하신다. 

사람의 약함도 진실이고 사람들의 악함도 진실이다. 

약함과 악함을 드러내고 인간이 그 자체로 신이 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신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함을 다시 알려주신다.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을 맡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영광이 더욱 영화롭게 드러나길 고대한다. 

사이비, 조폭, 권력에 의한 폭력, 학폭 등등 

숨겨지고 조작되고 그래서 피해자는 더욱 고통스럽고, 가해자는 도리어 땅땅거리며 살아가는 거짓의 세상에 영화로운 성령님의 빛이 임하길 기도하고 고대한다. 

거짓은 물러가고 모든 것은 밝은 빛 앞에 드러나라. 

 

 

[오늘의 기도]

영광의 하나님, 

새로운 언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생명의 법이 작동하도록 도와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성령님이 역사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령님을 더 빠르고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더 분명히 드러나길 기도합니다. 

 

사이비 교주의 거짓말에 속아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세요. 

전쟁도 극악하지만, 사이비들의 거짓과 가스라이팅도 그에 못지 않게 극악하고 더럽습니다.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젊은이들을 보호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9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치켜올리는 말을 늘어 놓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보일 추천장이나 여러분이 주는 추천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

2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하여 주는 추천장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적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읽습니다.

3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4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합니다.

5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은 사람을 살립니다.

 

주석

추천장(1절) 추천장은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보다 더 많은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IVP 성경배경주석).

 

2절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 추천장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비난에 대해 대답하고 있다. 그 비난은 아마도 거짓 사도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며 바울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IVP 성경주석).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으로 쓰신 편지입니다(3절). 이 편지는 바울을 천거하는 추천장이며(2절), 사람을 살리는 새 언약이기도 합니다(6절).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자격으로 이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했습니다(3-6절).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고린도 교인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3절).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당시 거짓 사도들은 돌판에 새겨진 옛 언약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옛 언약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성령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우십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도 새 언약이 적혀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아침부터 마음이 참 분주하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말씀을 다시 바라본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의 마음이 이런 걸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일부는 바울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혹은 다른 권위자로부터 추천장을 받아서 방문하기를 바랬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다른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의 권위를 쉽게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마 형식적으로는 그게 좋았을 수도 있다. 

 

바울의 항변은 다음과 같다. 

추천장도 좋지만, 사실은 고린도교회 설립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 바울의 선교였다. 

바울의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 덕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의 처음을 아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다. 

그들이 바울의 추천장이다. 

바울의 일거수일투족을 봐왔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기억 속에, 마음 속에 바울의 행동과 설교와 가르침이 남아 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구약의 메시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여러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바로 그들이 바울의 추천장이다. 

 

이런 사람들의 변화는 모세의 율법으로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돌판에 씌여진 것은 모세의 율법이요, 오랫동안 유대인들의 삶의 기준,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알고 삶과 정치에 적용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는 새로운 한 길이 놓여졌는데, 그것은 성령님께서 마음 속에서 하시는 역사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판에 새겨진 것으로서,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다. 

돌판보다 더 생생해서 한 사람의 인생에 강력하게 역사한다. 

외부에 있는 돌판의 자구가 아니라, 한 개인의 마음과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 언제라도 밝게 빛나는 등불이 된다. 

마음 속 등불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매일 매일 생명의 삶을 살아간다. 

바울은 이 차이를 알았다. 

구약에 정통한 바울, 모세 율법에 정통한 바울은 이 차이를 깊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언약의 백성이 탄생한다. 

혈통으로 묶인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성령님의 각인으로 서로 묶인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 

이제 새로운 언약의 백성은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바울의 추천장이다. 

행정 서식과 절차에 의해 추천되는 강사가 아니라 삶의 실제적인 모델이 있는 추천장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용기를 내어 다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 

이 아름다운 비유의 당사자가 바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고 이 비유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된다. 적용되어야 한다. 

요사이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난한다. 

교회를 비판하다.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비판한다. 

그 비판이 일리가 있다. 

그리스도의 향기여야 하고 편지여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오히려 악취가 나고 저주문이 읊어진다. 

사랑으로 약자를 품지 못하고, 자신들의 옳음을 주장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사람을 살리는 영, 성령님의 역사를 교회 이기주의로 가둬둔다. 

사랑의 실천이 점점 약해진다. 

아쉬움이 크다. 

나부터도 그렇다. 

사랑의 넓이가 커지지 않는다.

안따깝고 부끄럽다. 

 

다시 한번 그분의 은혜를 구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인 저와 우리 기독인들이 주님을 부끄럽게 만들지는 않는지 돌아봅니다. 

좋은 향기, 좋은 편지가 되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더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만들고 싶은데, 

자꾸 비판과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을 하는 기독인들을 보게 됩니다. 

 

성령님, 

마음 속에 강력하게 임하셔서 주님의 말씀을 새겨주세요. 

잊지 않게 하시고, 때로 떠오르게 하시고, 무엇보다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더욱 사랑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오늘 하루 주님의 편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주님의 도움 없이는 참 삶이 뻑뻑합니다. 

마음과 몸에 힘을 공급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8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드로아에 갔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거기에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

셨습니다.

13 그러나 나는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

14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5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16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17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NASB

For we are a fragrance of Christ to God among those who are being saved and among those who are perishing: to the one an aroma from death to death, to the other an aroma from life to life. And who is adequate for these things?(15-16절) 

 

주석

14절 로마의 승리 행진에 비유한 표현. 구약에서나 고대 세계에서는 승리 행진에서 향을 피웠다(IVP 성경배경주석).

 

바울은 또 다른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14-15절). 바울의 고난이 누군가에겐 죽음의 냄새였고, 누군가에겐 구원을 얻는 생명의 향기였습니다(16절). 바울은 하나님이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했습니다(17절).

 

썩은 냄새에 뒷걸음치게 되고 감미로운 향기에 뒤돌아보게 되듯, 향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가집니다. 그리스도는 죽음과 고난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죽음과 고난에서 구원받는 이들에게도 드러납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납니다. 말씀에 비추어 나를 돌아봅시다.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시다.

 

[오늘의 묵상]

1.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14절)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고, 그 결과와 영향은 어떠한지를 잘 아는 지식, 그 지식이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구약에 통달한 바울은 구약의 메시아 사상과 나사렛 예수를 연결시켜 그리스도가 정말 누구신지를 밝혔다. 

지중해 세계를 다닐 때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은 끊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가르친다.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말한다.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궁금해한다면 몇날 며칠이고 강론할 수 있다.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바울과 그의 선교단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라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의 향기라는 시적 표현을 썼다는 것이 다시 한번 바울의 면모를 느끼게 한다. 

딱딱한 신학자일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의외로 정서와 감정이 풍부한 시인이다. 

구약의 시편을 외우고 공부했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시인의 감성을 갖게 될 것이다. 

바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그는 탁월한 구약 지식과 시편적 감성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전하는 신학적 시인이었다. 

은유적 표현을 사용할 줄 알아야 각 지역에 맞는 설명 방식, 전도 방식을 개발할 수 있다. 

핵심 내용을 유지하면서 내용의 겉모습을 바꾸기 위해서는 시가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라는 어구를 다시 쳐다본다. 

처음엔 책을 많이 읽는 대학 교수님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자꾸 쳐다보니, 지식으로만 무장하여 설득과 변증에 능통한 교수님만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지식의 향기는 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외모부터 행동, 풍기는 첫인상, 말하는 방식, 관계맺는 방법 등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초대하는 것이 그 향기다. 

 

2. 그리스도의 향기(15절)

그러니 바울은 자신과 선교단과 고린도교회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15절에서의 그리스도의 향기는 단순히 지식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는 지식을 넘어 존재의 변화에서 오는 향기다. 

정말 예수님을 닮은 사람만이 풍기는 향이다.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 향이 풍긴다.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그 향이 풍긴다. 

지식이 아니라 삶과 존재가 그리스도를 닮았다. 

하나님은 그 향을 기뻐하신다. 

어디에 있건 하나님은 작은 예수님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성도는 사이에서도, 비신자들 사이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 향을 숨길 수가 없다. 

자연스레 풍기는 향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사람들은 그 향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그 향의 출처를 묻는다. 

그렇게 존재로부터 그리스도의 향을 풍기는 사람들을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다. 

 

3. 생명의 향기(16절)

하나님께만 기쁨이 되는 향이 아니다. 

결국 그 향은 구원얻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생명의 향기다. 

삶의 지향점이 되는 향이다. 

삶과 존재의 모델로 삼을 만한 향이다. 

그 향을 따라 살면 어느덧 나도 그 향이 난다. 

향이 몸에 벤다. 

자신은 그 향을 못 느끼는 순간이 오지만, 다른 사람들은 느낀다. 

그 향이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다. 

한번 회심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 그 향이 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생명의 향 근처에 자주 머물러야 한다. 

그렇게 자신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 생명의 향기가 되어간다. 

 

이런 삶을 추구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사람. 

완벽하지 않지만, 같이 있으면 좋은 향을 내고, 그 향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사람. 

그런 사역자, 목사, 간사가 되고 싶었다. 

 

바울은 이런 향기의 삶을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장사꾼이 아니라 진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17절)

그렇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가르치는 장사꾼이 아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진심을 다해 일한다. 

돈이 안되더라도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진심을 다한다. 

때로는 피곤하고, 생계의 위협을 느끼고, 특별한 이익이 없다고 해도, 진심을 다한다. 

진정성으로 승부를 건다. 

그런데 그 진정성을 믿어주지 않으니 바울이 그렇게 슬펐던 것이다. 

자신의 진정성을 믿어주길 바라면서 바울은 텐트메이킹을 했다. 

말씀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했던 것. 

아마 바울은 텐트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장사꾼의 습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재료를 아끼면서 최대한의 돈을 벌 수 있는지, 그 효율성과 거짓말의 경계선을 알았을 것이다.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은 장사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효율성을 이유로 적은 재료에 많은 이익을 남긴다면 그는 장사꾼이라 부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이익을 위해 진심을 버린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런 사람이 되지 않고자 결심했고, 최선을 다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했다. 

아직도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랬듯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사람들을 섬기려고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믿고 있다. 

예수님이 끝까지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바울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끝까지 사랑하려고 한다. 

 

이런 진정성은 말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삶이 받춰져야 한다. 

돈과 시간을 쓰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누구를 얼마나 만나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오늘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되고 싶다. 

진심을 다한 사역이 되고 싶다.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오늘의 기도]

당신의 죽음으로 당신의 진심을 드러내신 예수님, 

당신의 진정성 확인 방식은 너무 극단적이십니다. 

저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제 마음을 잘 아신다고 믿습니다. 

제 마음의 동기와 열망을 잘 아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더욱 확장되기를,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기를, 

특히 대학 신입생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더욱 알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진심을 잃지 않게 도와주세요. 

장사꾼이 되지 않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7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5 누가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면, 실은 나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이 아니라, 과장하지 않고 말해서, 어느 정도는 여러분 모두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6 여러분 대다수는 그러한 사람에게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7 그러니 여러분은 도리어 그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8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기를 권합니다.

9 내가 그 편지를 쓴 것은, 여러분이 모든 일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여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여러분이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해 주면, 나도 용서해 줍니다. 내가 용서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용서한 것입니다.

11 그렇게 하여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넘어가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속셈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NASB

Therefore I urge you to reaffirm your love for him(8절).

 

주석

5-7절 학자들은 이 사람이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에 대해 논쟁한다.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다시 한 통의 서신을 써서 그 사람을 징계하라고 명했다(IVP 성경배경주석).

 

그 사람은 바울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전체를 아프게 했습니다(5절). 바울은 징계를 받았던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지 않도록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7절).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기 때문입니다(6절). 용서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그리스도인의 방식입니다(8, 10절).

 

악은 용서와 사랑이 없는 틈을 타서 분열을 일으킵니다. 악이 속삭이는 곳에는 지나친 분노와 짓눌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화해를 가져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으로 분열을 잠재우고 악을 몰아냅니다. 한 사람을 돌이키기 위한 징계도 필요하지만, 목표는 화해입니다. 악이 나와 공동체에 틈타지 못하도록 용서와 화해의 삶을 실천합시다.

 

[오늘의 묵상]

세계를 다니며 숱한 어려움을 극복했던 대사도 바울,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신구약을 넘나들며,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동시에 고려하며,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신학자 바울, 

왠지 그는 마음이 아프다, 슬프다 등의 정서적 반응을 보일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바울은 마음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다룰 뿐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마음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교회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바울 한 사람의 마음만 힘들고 어렵게 한 게 아니다. 

모두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다. 

공동체는 마음으로 이어져있다. 

공동체 구성원의 아픔은 모두의 아픔이다. 

공동체 구성원의 죄는 모두를 고통스럽게 한다. 

바울은 이런 마음의 연결됨을 인지하고 있다. 

 

용서는 이 시대의 단어가 아니다. 

현대 사회는 용서보다 정의가 앞선다. 

일면 온당한 측면이 있다. 

바른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서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잘못이 무엇인지 바르게 규정되고, 잘못한 사람이 분명하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할 때, 우리는 용서할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용서의 단어의 풍부한 의미와 용서 주변의 다양한 과정과 절차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용서라는 말을 부정적인 뉘앙스로 바라보는 경우도 많다. 

용서하면 지는 것이고, 용서하면 도리어 약해 보이고, 용서하면 경쟁에서 밀리고, 용서하면 결국 패자로 남게 된다는 인식이 점점 늘고 있다. 

용서보다는 비판이 매력적이다. 

날까로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칭찬받는다. 

용서하겠다는 사람은 대치 국면에서 뒤로 빠진다. 전투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한다. 

용서하겠다는 사람까지도 비판받는다. 

용서하는 사람도 고통과 아픔을 갖고 있는 피해자인데, 그 사람이 어느새 준가해자가 된다. 

함부로 용서하지 말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용서가 이 시대의 단어가 되기 힘든 이유다. 

 

점점 용서 주위에 창의적인 생각이 모여들지 않는다. 

비판 주위에는 온갖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들이 모여든다. 

비판의 정도가 점점 다양해 진다. 

비판하는 방식도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그러나 용서 주위에는 온화한 기운, 종교적 기운 외에는 남지 않는다. 

치열한 생각과 열정적 아이디어가 비판과 정죄 주변에 가득하다. 

비판과 정죄의 색깔은 샛빨강이지만, 용서와 화해는 옅은 푸른색이다. 

뉴스와 댓글은 비판적인 단어와 생각으로 가득하다. 

용서는 과연 어디서 일어나는지 찾아보기 어렵다. 

법정으로 사건이 가는 한 진정한 용서가 일어나기 불가능해 보인다. 

법원 판결에 기꺼운 마음으로 승복하는 경우도 별로 없거니와, 

가해자와 피해자가 끝까지 서로를 비난하고 비판하기 마련이다. 

점점 용서가 설 자리가 줄어든다. 

 

교회와 가정은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끝까지 남아야 한다. 

용서의 색깔을 더욱 진하게 칠할 수 있는 공간, 

용서 주변의 다양한 생각과 아이디어가 모일 수 있는 공간, 

용서의 진정성을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으로 남아야 한다.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죽을만큼 힘들지만, 용서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용서의 전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데 있다. 

부흥은 죄의 고백이 빠지지 않는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공동체 구성원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진심을 사람들에게 표현한다. 

그럴 때 형제 자매의 용서가 일어난다. 

죄의 고백은 죄 값을 치르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진정한 죄의 고백은 그 죄값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한다. 

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하는지를 진정한 회개자는 깨닫는다. 

성령님의 역사다. 

그 깨달음은 죄 값을 계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미안함과 송구함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참회하고 보상하고 죄값을 치르려고 한다. 

그러니 사실 진정한 용서는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죄인의 죄를 드러내고, 진정한 참회로 이끌어야, 피해자들이 용서할 수 있는 전제가 완성된다. 

그래야 성령님이 마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이런 자연스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령님은 자연스런 과정을 뛰어넘어 역사할 수도 있다. 

순서의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피해자의 용서가 가해자의 참회로 이끈다. 

이런 순서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부자연스런 과정을 인간이 억지로 만들려고 하면 안된다. 

사람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추구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성령님은 때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 

그것을 막을 법은 없다. 

성령님만이 용서의 색깔을 더욱 밝고 굵고 화려하고 다양하게 채색하신다. 

인간은 지극히 제한된 색맹 수준일 뿐이다. 

 

사탄은 비판의 날을 더욱 날카롭게만 하라고 요구한다. 

그게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심지어는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용서의 풍부한 의미와 방법들을 놓지 않는다. 

성령님은 가정과 교회에서 용서를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다. 

사단에게 속지않고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비판과 함께 용서를 배워야 한다. 

 

이 어려운 길을 끝까지 가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아무말 없이 그 수치의 끝에 올라가셨다. 

그러니 이 길을 포기할 수 없다. 

 

아… 예수님, 

거기계시는군요. 

 

[오늘의 기도]

용서는 어렵습니다. 

분노는 자연스럽습니다.

용서는 본성을 거스릅니다. 

분노는 속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용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조금씩 생겨납니다. 

성령님, 저에게 분별의 능력을 더하소서. 

사탄의 전략에 휘말리지 않게 하소서. 

가정과 교회에서는 용서의 색깔이 더욱 풍부하고 더욱 진해지게 하소서.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생겨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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