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06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23 내 목숨을 걸고서, 나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렵니다. 내가 아직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24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습니다.

 

1 여러분에게 또 다시 아픔을 주지 않아야 하겠기에, 나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2 내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더라도,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은, 내가 마음 아프게 하는 그 사람 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3 내가 이런 편지를 쓴 것은, 내가 거기에 갔을 때에, 나를 기쁘게 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내가 마음 아픈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의 기쁨임을, 여러분 모두를 두고 나는 확신하였습니다.

4 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NASB

For if I cause you sorrow, who then will be the one making me glad but the one who is made sorrowful by me?(2절)

 

주석

1절 약속했던 두 번째 방문 대신, 편지를 쓴 것은 마음 아픈 일을 당할까 했기 때문이다. 그 편지는 바울이 몹시 괴로워하며 썼으며,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편지를 썼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고린도에 가지 않기로 결심합니다(1절). 교인들을 아끼기에(23절), 또다시 아픔을 주지 않으려고 내린 어려운 결정입니다(1절).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2-3절). 바울은 교인들의 믿음을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기쁨을 누리도록 돕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24절).

 

바울의 결심으로 인해 생기게 될 오해와 갈등은 자명했습니다. 자기변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진실한 고백입니다. 바울은 적당히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서로의 마음이 아프더라도 진실한 마음을 전합니다(4절). 나는 갈등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나요? 갈등을 회피하지 말고, 아프더라도 진실하게 마주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의 표현이 절절하다. 

심지어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해 보이기까지 하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속마음,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해받으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슬프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방문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단순변심, 갈등회피, 더 나은 전략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성도들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증인이 되신다. 

바울의 진심과 동기는 하나님이 아신다.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잃어버린 두 번째 서신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총 3번의 편지를 썼는데, 그 중에 두 번째를 잃어버렸고, 그 두 번째 편지는 매우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편지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회개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바울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바울은 그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었다. 

마음을 열고 바울의 진심을 받아들이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첫 번째, 두 번째 편지도 눈물로 기도하면서 편지를 썼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걱정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문제는 이것이다. 

아무리 진심을 표현한다고 해도, 한 번 마음이 틀어진 사람들은 그 진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보다야 글이 조금 더 신뢰감이 가는 표현방식이긴 하지만, 한 번 글로 표현되면 여러 사람들이 읽으면서 비판의 강도가 더 강해질 가능성도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판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 매일 매일 보고 있다. 

어떤 글이든, 어떤 말이든,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표현은 없다. 

누군가는 그 글과 말로 마음 아파하고 비난한다. 

 

과연 바울의 이 편지는 그 목적하는 바를 성취했을까? 

자신의 뜻을 밝히고 자신의 진정성을 호소하지만, 실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바울의 개인적 감정의 호소는 뒤로 감춰지고, 이 편지에 등장하는 몇몇 교리적, 신학적 단편들만 후대에까지 회자된다. 

편지로 교류하던 옛날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만, 바울의 표현을 그대로 받자면, 바울은 정말 오랜시간 이 편지를 쓰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하고 에너지를 들이고 감정을 쏟아냈던 것으로 보인다.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단 한 문단이 곤욕이다. 

어떤 내용을 넣을지 말지를 계속 고민했을 것이다. 

마음 속에서 수정, 삭제, 보완이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실제 글을 쓰는 순간에도 여러번 고쳤을 가능성이 있다. 

글쓰는 사람들은 그 고통이 어떤지 안다. 

특히 감정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에는 더욱 조심스럽다. 

불신이 있는 사람들에게 쓰는 글은 지레 겁먹기 십상이다. 

 

바울은 원래부터도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로 나뉘었던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 그 어떤 파도 없고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어야 함을 강변한 적이 있다. 

바울이라고 해서 무조건 편을 들어서는 안된다. 

바울이라고 해서 무조건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아니다. 

그도 인간이고 약점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집중되는 것이었다. 

파벌로 인해 교회가 나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울은 원했다.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나의 지금 마음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스스로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아무때나 양심에 손을 얹고 발언해서는 안된다. 

정말 진심인지 깊이 고민하고 몇번이고 돌아보고 고백해야 한다. 

스스로 속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많은 가면을 쓰고 사는 다중인격같은 사람들도 있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심이 아닌데, 진심인 척 할 수 있다. 

거짓이 반복되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게 정말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이 무언지 헷갈리게 된다. 

진심을 숨기는 게 익숙해진 사람들은 꽁꽁 숨겨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뒤늦게 자심의 속마음을 공개하여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정치인들은 여러 가면 쓰기에 달인들이다. 

협상과 타협을 위해 그들은 스스로를 속인다. 

아… 진심을 표현하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지 누군가 진심을 다해 표현하는 것을 쉽게 믿지 못한다. 

악어의 눈물이라 비난하게 된다.

 

그저 하나님을 바라본다. 

나의 진심을 알고 계신 분은 오직 그분 뿐이다.  

 

바울이 느꼈을 절망감이 다가온다. 

세계 선교를 위한 그의 원대한 계획과 실천은 종종 진심을 표현해도 먹히지 않는 상황 때문에 더욱 힘들고 고되다. 

그게 사역자의 길인가? 

 

 

[오늘의 기도]

진심을 아시는 하나님,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헌신했던 지난 시간을 아시는 하나님, 

거짓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몸부림 쳤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당신이 증인이십니다. 

진심을 다해 기도했고, 최선을 다해 만났습니다. 

나의 이익과 유익과 미래를 위해 전략적으로 만나기보다

한 사람의 유익을 위해,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만났습니다. 

그렇게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든 순간 다 그랬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심의 순간도 많았음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 시간에 대해서는 그 노력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인정해주시고, 칭찬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럼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4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15 이러한 확신이 있으므로, 먼저 나는 여러분에게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두 번 다시 은혜를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6 나는 여러분에게 들러서, 마케도니아로 갔다가, 마케도니아에서 다시 여러분에게로 와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서 유대로 갈 작정이었습니다.

17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변덕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또는, 내가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기를, '아니오, 아니오' 하려는 속셈이면서도, '예, 예' 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겠습니까?

 

18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 하는 것은 아닙니다.

19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셨다가 동시에 '아니오'도 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을 뿐입니다.

20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21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2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NIV

Now it is God who makes both us and you stand firm in Christ. He anointed us,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21-22절).

 

주석

17절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하는 것은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쉽게 약속을 어기고 거리낌 없이 ‘예’를 ‘아니’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정된 계획을 변경합니다. 하지만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변경하는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15-17절). 바울은 신실하신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21절). 하나님이 약속에 신실하시듯, 바울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실했습니다.

 

바울이 신뢰하던 이들의 비난에도 단단히 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자신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십니다(22절). 이는 변치 않는 신실한 약속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고 있나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 앞에 진실한 태도로 굳게 서길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은 자신의 선택의 진정성을 보여주고자 애를 쓰고 있다. 

어찌보면 고린도후서는 교리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자신의 순박함과 진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고린도 성도 중 일부가 비판을 하기 때문이다. 

약속이 변경되었다. 

방문 계획이 있었지만, 여러 상황상 그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방식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고린도에 갈 계획이었지만, 그래서 그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바뀌어 어쩔 수 없이 변경한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바울의 속뜻을 의심했다. 

처음부터 갈 마음이 없었는데, 말로만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변명으로 일관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속과 겉이 다른 것… 위선… 그건 예수님이 아주 강력하게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비판했던 지점이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에게 위선자라는 공격은 심각한 내적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자신이 버리려고 했던 위선적 바리새인의 모습을 누군가 지적한 것이다. 

바울이라고 마음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과 계획이 왜 없었겠는가!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특히 바울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원래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사실 방문하는 것이 달갑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감정이 들 수 있었던 것. 

그렇다고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재방문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서상,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에 가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엄격하게 돌아보았다. 

정말 내 마음 속에 “아니오”라는 마음이 있었는가? 

그 마음은 진실한 것이었나? 

말로만 “예”하고 속으로는 “아니오” 하지는 않았는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것이다. 

답은 아니오였다. 

비록 마음 속에 거리끼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마음은 고린도 교회에 가겠다는 마음, 가고 싶다는 마음, 가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속과 겉을 일치시키기 위한 오랜 노력의 결과다. 

예수님의 경고와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바울이 이런 진실성을 연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바리새인의 삶을 청산하고 진심을 담아, 진실하고 신실하게 살아가겠다고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 

그 노력이 눈에 그려진다. 

매번 자신을 돌아보며,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양심에 비추어 예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단호하게 확신있게 예라고 말해야 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연습. 

애매모호하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말하지 않는 훈련. 

 

바울은 결국 이 모든 결정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계획이 변경되었다. 

단순 변심이 아니다. 마음의 오락가락이 아니다.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으며, 그 계획에 따른 사명이 각자에게 주어지고, 바울은 그 사명에 따라 계획을 수정했던 것이다. 

자신의 육신의 상황, 환경의 변화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생각하며 계획을 바꾸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가지 않을 생각인데, 말만 그렇게 했다는 비난은 과도하다. 

 

이렇게 한 번 관계가 꼬이면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과거에도 그랬겠지만, 현대 사회는 더욱 그렇다. 

정보의 공유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한번 깨어진 신뢰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과 말이 고깝게 들리고, 비판의 소스가 된다. 

복잡한 인간 심리를 생각할 때, 과연 진정성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기가 두렵다. 

아무리 나의 진정성을 믿어달라고 항변해도, 한번 틀어지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느새 거짓말쟁이가 된다. 위선자가 되고, 이기주의자가 된다. 

진정성은 말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과 결과로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동안은 비난, 비판, 오해, 불명예를 참고 견뎌야 한다. 

정말 진정성과 진실성을 확보하려면 인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성과 신실성은 십자가라는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권력가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때, 그는 죽음을 기다렸다. 

아무 말 없이 행동으로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그렇지 않고는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는다. 

많은 경우 속고 속이는 세속 사회의 본질에 혹사당했기 때문일거다. 

 

어제 말씀이 떠오른다. 

주님이 주시는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교인들을 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겠구나 싶다. 

과연 나는 겉과 속이 같은 진정성있는 사람인가? 

그간 나의 노력은 과연 결실을 맺고 있는가?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인가? 

INFJ의 복잡함을 단순명료하게 줄여가고 있는가?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나를 분노케 한다. 

순곡선열의 정신을 이토록 왜곡시키다니, 그는 자꾸 선을 넘는다. 

편향된 외교로 적을 만들고, 단선적 동맹주의로 역사를 왜곡한다.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과연 그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는가? 

한국인가 일본인가!! 

 

 

[오늘의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인류 구원에 진심이신 하나님, 

당신의 진심은 당신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 진심을 저는 믿습니다. 

 

저도 당신을 닮아 더욱 신실하고 진실하게 하소서. 

복잡한 내면의 생각 때문에 제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정직하게 돌아보고, 솔직하게 말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소서. 

많은 사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저의 주관과 생각을 몰래 감추는 위선적인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이 모순 덩어리 인간을 도와주세요. 

정직한 사람이 되게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3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2 우리의 자랑거리는 우리의 양심이 또한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세상에서 처신할 때에, 특히 여러분을 상대로 처신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행하고, 세상의 지혜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13 우리는 지금 여러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써서 보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14 여러분이 우리를 이미 부분적으로는 이해했습니다마는,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여러분이 우리의 자랑거리이듯이, 우리가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것을 자랑합니다(12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 증언을 완전히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13절). 그만큼 스스로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예수의 날에 고린도 교인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14절).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바울의 양심은 깊은 인상을 줍니다.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특히 서로를 향해 처신할 때 자신의 동기를 돌아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내 양심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습니다. 곧 바울의 양심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나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내 양심은 무엇을 증언하나요?

 

[오늘의 묵상]

바울과 그의 선교단은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자긍심이 높다. 

그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 특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할 때, 순박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대하고 있다. 

사실 순박함과 진실함은 현대 사회에서 잘 알아주는 덕목이 아니다. 

순박함은 순진함으로 들리고, 진실함은 센스없음으로 들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덕목들이다. 

요사이는 센스있게 세련되게 약삭빠르게 살아야 잘 산다는 소리를 듣는다. 

순박하게 진실하게 살아서는 도리어 사기나 당하고 어리석다는 평을 듣기 마련이다. 

바울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결정을 해야 하는 선교팀 회의에서 순박함과 진실함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적이어야 하고, 전략적이어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터. 

하지만, 그들은 순박하고 진실함을 선택했다. 

 

물론 그들이 세상에 대해서 무조건 순진하게 대했다는 기록은 없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때로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문화와 상황을 고려한 복음 전도 내용을 사용했다.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방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대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최선을 다해 순박하게 진실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의 어려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했던 첫번째 편지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순전함으로 진실함으로 그들에게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혹여 그들이 바울의 진실함을 역이용해서 바울을 공격할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들의 순박함과 진실함이 원래부터 자신들에게 있었던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들에게 순박함으로 진실함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은 부끄럽고 때로는 약점으로 잡히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가면을 쓰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공격적으로 방어적으로, 때로는 회피하고 때로는 우회적으로 살아간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삶의 방식이다. 

이걸 역류해서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남을 대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주님께서 주신 용기요, 결단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그 공을 돌린다. 

 

이것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이리저리 재고 계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가가는 것… 

이것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다. 

그렇게 계산적으로 대우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대해도, 사람들이 그 속에서 서로의 진심을 알고,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면, 이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다. 

그 은혜를 바울은 느끼고 있었다. 

첫 번째 편지, 그리고 이어진 중간 편지, 그리고 오늘 세 번째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바울의 진심이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 과정을 통해 성도들의 삶이 더욱 하나님께 가까워졌다. 

교회 안에 있었던 갈등과 분열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각종 파벌로 나뉘었던 교인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을 경험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첫 번째 편지에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 오래참는 사랑의 과정을 서로에게 보여주고 있다. 

감사가 절로 나온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 선교단과 고린도교회 성도간에 넘친다.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에게 자랑이 되어가는 관계가 되었다. 

주님의 날에는 그 관계가 확정될 것이다. 

서로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기독공동체는 법과 규정, 경쟁과 논쟁이 아니라,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를 품고 사랑하고 자랑스러워야 한다. 

법과 규정으로 서로를 묶어놓는 공동체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끼어들 자리가 점점 사라진다. 

규정이 생기는 이유는 대체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인데, 그 문제로 공동체가 아팠기 때문이고, 앞으로 있을 비슷한 문제로 공동체가 아파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순간 순박함과 진실함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규정으로 서로를 판단하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규정이 아니라 권면이 작동하는 공간은 이제 우리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서로에게 순박하고 진실하게 다가가는 관계의 태도는 점점 찾아보기 어렵다. 

그 순수함을 유지하려면 소수의 공동체만이 가능해 보인다. 

인원이 많아지고, 돈의 흐름이 많아지면 순박함과 진실함만으로 공동체를 구성하기 어렵다. 

현실적인 이유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도 서로의 관계에서 순박함과 진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는 것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기독공동체는 사회운동 단체가 아니다. 

기독공동체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을 추구하는 단체다. 

기독공동체는 법과 규정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애정과 연민, 그리고 서로에 대한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다가가는 모임이다. 

이 이상을 포기하지는 말자. 

현실에 어느 정도 타협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그 이상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이상적 현실주의자 혹은 현실적 이상주의자여야 한다. 

모순과 딜레마는 그리스도인의 숙명이다. 

높은 양심과 하나님 사랑은 모든 문제에 대해 모순과 딜레마를 느끼게 하기 마련이다.

 

임은정 검사를 응원한다. 

사회의 모순을 계속 드러내고 그 딜레마 속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있다. 

고통이 가중되더라도 정직함으로,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진실을 숨기는 자가 범인이다. 

부장검사 적격심사를 통과했으니, 앞으로 7년 모순 투성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함으로 살아내시길 기원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이상을 향해 그 모순 속에 들어가는 것. 

오늘 나에게 던져진 삶의 과제다. 

 

[오늘의 기도]

모순 덩어리 하나님,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모순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고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정의롭다고 하면서 용서를 베푸십니다. 

개인을 존중하시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이루십니다. 

모든 것을 품고 계시기에 모순적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저는 순박하게 따르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 

현실적 이상주의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세요.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되, 현실에 발을 딛는 자 되게 해 주세요. 

주님이 주신 은혜로 이상을 향해 오늘도 걸어가는 하루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2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8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9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0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앞으로도 건져 주시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11 여러분도 기도로 우리에게 협력하여 주십시오. 많은 사람의 기도로 우리가 받게 된 은총을 두고, 많은 사람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NIV

Indeed, we felt we had received the sentence of death. But this happened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9절).

 

주석

8-9절 바울은 철저히 무력해지는 경험을 통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바울이 의지한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 지금도 계속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BST 고린도후서).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은 바울을 무겁게 짓누르고, 살 희망마저 잃게 만들었습니다(8절). 바울은 죽음의 경험 속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9절). 하나님은 죽은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지시며, 앞으로도 건져 주실 분입니다(10절).

 

고통은 우리를 짓누르고 살아갈 희망마저 빼앗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능력으로 죽을 고비에 놓인 우리를 날마다 건지실 것입니다(10절).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공동체와 함께 협력하여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바울의 말을 이해할 것이다. 

수많은 환란과 고통이 몰려오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적 고립, 재정 상태의 악화, 질병, 따돌림, 범죄에 노출… 

다양한 이유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울도 이제 곧 죽을 것이다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닌 것 같다. 

아시아에서 그는 돌에 맞기도 해서 실제로 숨을 쉬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그를 버린 적도 있다. 

돌에 맞으면, 몸 곳곳이 성한 곳이 얼마나 있겠는가! 

온 몸이 피투성이요, 멍이 뼈까지 들었을 것. 

돌 맞아 죽음을 맞이한 스데반 집사를 그는 떠올렸을 것이다.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했던 스데반 집사, 바울은 회심 전에 그의 사형집행을 도왔던 사람이었다. 

돌에 맞아 죽는 것, 십자가에 죽는 것, 법 집행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

많은 죽음을 그는 경험했다. 

그리고 바울은 아시아에서 그런 죽음을 경험했다. 

감옥에서, 광장에서, 길거리에서… 언제나 죽음의 위험이 그를 기다렸다. 

때론 그 죽음이 바로 앞에 있다고 느꼈다. 

바울은 죽음과 함께 살았다. 

그 두려움이 왜 없었겠는가! 

죽음의 위협은 그와 그의 동료들을 주눅들게 하고, 걱정하게 하고, 기도하게 했다. 

자신만 죽을 것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함께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선교팀의 동역자들도 함께 죽을 것 같았다. 

그만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죽음의 문턱을 왔다갔다했다.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도 위협을 당했으며, 이방인들에게도 당했다. 

로마의 권력자들에게도, 이방의 우상숭배자들에게도 살해 위협을 당했다. 

두려움은 지근거리에 항상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다.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이 도우셨다. 

때로는 바울 자신의 신분을 활용함으로써, 때로는 친구들을 통해서, 급기야는 천사가 직접 도와주기도 했다.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이 법정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당시 법이 그랬다. 

그를 돕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감옥 생활을 도왔다. 

급기야는 감옥 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천사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툭툭 털고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바울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그럼 왜 스데반은 죽었는가! 

하나님은 왜 바울은 살리고 스데반의 죽음은 허용하셨는가? 

이런 질문이 들 수 있다. 

각자의 소명이라고 말할 수 밖에.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에 의해 누군가는 여러 번의 죽음을 넘기고, 누군가는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3년만에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신 분이 있는가 하면, 

인도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다 죽는 분도 있다. 

어찌 알겠는가!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수 밖에. 

각자에게 주신 소명에 맡기는 수 밖에. 

 

어찌되었건,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누리고 있었다. 

최소한 이 편지를 쓰기 전까지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선교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건지셨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건지셨던 그 하나님은 바울을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건지고 계속 그의 선교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다. 

바울에게도 광야 생활이 있었고, 그에게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었다. 

하늘의 만나도 경험했고, 공중의 메추라기도 경험했다. 

홍해 앞에 이스라엘처럼 죽음의 위협도 경험했다. 동시에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의 인생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반복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이스라엘 역사의 반복이며, 바울의 삶의 반복이다. 

죽음같은 순간을 버티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몸소 경험한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영혼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는 것도 너무 중요한 경험이다. 

하지만, 인생의 여러 문제들 속에서 죽을 것같은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분의 구출, 구원, 돌봄, 은총…. 영적, 정서적, 물리적… 

이 모든 것을 경험하면서 점점 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임계점이 넘으면, 죽음 조차도 하나님 신뢰를 막을 수 없다. 

신뢰는 더욱 강해지고, 공고해진다. 

영원을 책임지시는 그분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 

 

그런 신뢰의 삶으로 나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길 바란다. 

아마 3.1 운동을 일으켰던 일제시절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죽음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 

우리 민족의 독립을 하나님의 뜻을 믿었던 사람들. 

그분들의 의지와 소망을 후대 사람들이 부끄럽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주님의 백성들을 돌봐주세요. 

세계 곳곳에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주님의 백성들을 지켜주세요. 

전쟁으로 지진으로 삶 자체를 위협받는 사람들을 보호해주세요. 

 

3월의 시작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새로운 시작을 여는 하루입니다. 

새로운 만남이 그들을 기다립니다. 

좋은 만남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생명이 살아나는 만남이 많아지게 하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부끄러워지지 않도록 

주님, 대한민국의 역사를 흔드는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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